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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6회]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론 / 이상철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04 10:56
조회
2812

[제36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5년 4월 23일(목) 오후 5~7시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론

이상철 박사
(한신대 외래교수 / 기독교윤리)

한신대 신학과, 대학원 신학과(Th.M)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전공.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학원에서 석사(MATS),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의 윤리’를 주제로 박사학위. 저서로 『탈경계의 신학』, 『성서와 윤리』, 『헤아려본 세월』, 『남겨진 자들의 신학』(공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신학적 성찰』등.

< 목 차 >
[I] 프롤로그: 텍스트와 해석, 그 분열의 변증법에 관하여

[II]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III] 장공의 텍스트론

[1] 장공과 성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1)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2) ‘성서 속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3)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2] 장공의 성서관: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의 해석학

1) 양 극단을 넘어서 2) 성서,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3) 성서, 사건을 유발하는 텍스트

[IV] 데리다의 텍스트론

[1] 데리다의 삶과 사상적 전이

[2] 데리다의 ‘차연’

1) 차연의 해석학 2) 차연의 정치학

[3] 텍스트의 해체

1) 해체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해체론적 성서읽기 “예”

(1) 칼의 왕, 솔로몬 (2) 그 재판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3) 해체론적 성서해석이 노리는 것

[V] 종합: 장공과 데리다의 동행, 그리고 작별

[1] 장공과 데리다의 동행

1) 낡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텍스트 2) 새로운 사건과 전망을 향한 요청으로서의 텍스트

[2] 장공과 데리다, 작별하다

[VI] 에필로그: 다시, 솟아나는 텍스트와 해석을 둘러싼 물음들

Diego Vel zquez, <Las Meninas(The Maids of Honour)>, 1656,
318cm X 276cm,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I] 프롤로그: 텍스트와 해석, 그 분열의 변증법에 관하여

위의 그림은 고전주의 시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생각들이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묻겠다. 그림에 나와 있는 인물들 중에서 누구에게 가장 먼저 시선이 꽂히는가?

우선, 그림 중앙에 화려하게 치장한 어린소녀는 마가레테 공주다. 이 아이는 필립4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주 양쪽에 2명의 시녀가 서 있다. 왼쪽 시녀는 공주를 바라보고 있고, 오른편 시녀는 화면 이쪽을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시녀 앞쪽에 얼굴과 체격이 지나치게 비대칭적인 난쟁이가 서있는데 어린 공주의 바비인형 같은 황금비율 몸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 뒤로 어둠 속에 서 있는 두 인물은 궁궐관리가 아닐까 싶다. 시녀들의 훈육과 관리, 그리고 궁궐의 온갖 궂은일을 담당하는 그런 인물일 것이다.

시녀 왼편에는 화가가 서 있다. 가만히 보면 그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벨라스케스 자신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면 왼쪽 약간 위로 거울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희미하게 비친 두 사람은 어린 공주의 부모인 필립 4세와 안나다. 왕과 왕비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따지고 보면 지금 이 그림을 바라보며 서 있는 우리들의 자리 어디쯤일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는 지금 그림 밖에, 캔버스 밖에서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셈이다.

어린 공주의 시선, 공주 오른 편 시녀와 그 옆 그로테스크한 난쟁이와 뒤에 서 있는 남자 관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최종 종착점도 왕과 왕비이고, 화가의 시선도 국왕부부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 맨 뒤에 통로에 선 집사도 역시 중앙에 있는 국왕 부부를 응시하고 있다. 그림에 나와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의 시선과 행위는 왕과 왕비를 전제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인 국왕부처는 이 그림에 자리하지 않는다. 단지,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비칠 뿐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부재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미셀 푸코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 ‘라스 메니나스’에 대한 논평을 감행하며 본인의 텍스트론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1) 여기서 푸코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재현의 한계이다. 서구 담론사에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구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이데아를 모방하고, 구현하고, 표현하고, 구술하면서 재현의 형이상학을 발전시켜 왔다. 회화는 대상에 대한 재현에 있어 가장 손쉽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재현 개념은 서구의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미학까지를 하나로 묶는 내적 기재이자 동력으로 작용한다.

1) 미셀 푸코,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민음사,2012) 中 1장 ‘시녀들’(25-44)과 9장‘인간과 인간의 분신들’中 2절 ‘왕의 자리’(423-428)를 참조하라.

그런데, 푸코가 ‘라스 메니나스’를 비평하면서 이런 서구의 재현 시스템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재현의 한계에 대한 부분이 그것인데, 재현의 한계란 우리는 ‘대상의 모든 것을 그릴 수 없음’, 혹은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설사 뭔가를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라스 메니나스’ 경우에서 보듯이, 그것은 말할 수 없음, 말해지지 않음을 동반한다.2)

2)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는 아마도 고전주의적 재현의 재현 같은 것, 그리고 고전주의적 재현에 의해 열리는 공간의 정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재현은 여기에서 자체의 모든 요소, 자체의 이미지들, 가령 재현이 제공되는 시선들, 재현에 의해 가시적이게 되는 얼굴들, 재현을 탄생시키는 몸짓들로 스스로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재현이 모으고 동시에 펼쳐 놓는 이 분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공백이 뚜렷이 드러난다. 즉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재현과 닮은 사람, 그리고 재현이 닮음으로만 비치는 사람이 사방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주체 자체, 즉 동일 존재는 사라졌다. 그리고 재현은 얽매어 있던 이 이해 방식으로부터 마침내 풀려나 순수 재현으로 주어질 수 있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43.

이 그림에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국왕부처는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거울을 통한 간접적 등장이다. 완벽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고전 시대 인식의 패러다임이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한다면, 푸코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라스 메니나스’를 통해 반동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재현의 신화는 ‘라스 메니나스’의 경우처럼 희미하게 떠다니는 신기루일 수도 있고, 캔버스에 부재하는 국왕처럼 현실에서는 감지 안 되는 실재의 판타지일 수 있다.

결국, 푸코가 ‘라스 메니나스’ 해석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텍스트 안에는 재현의 가능성만큼이나 재현의 불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푸코는 재현의 가능성을 믿고 따라왔던 정신의 흐름들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 역사의 타자들에 주목하였다. 그는 타자들에 대한 배제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역으로 재현 시스템, 상징 시스템, 그리고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 배어 있는 서구사상의 뿌리 깊은 허위와 기만에 대한 고발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II]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라스 메니나스’를 텍스트로 가정하고 그에 대한 접근과 분석을 통해 미셀 푸코가 지닌 전시대와는 다른 해석의 경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을 성서해석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성서’와 ‘라스 메니나스’는 텍스트이고, 국왕 부처와 신은 텍스트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재현 시스템에 의하면 텍스트 안에는 재현의 대상이 명확히 각인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텍스트의 가치이고, 그런 텍스트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해석의 임무다.

그런데, 푸코는 ‘라스 메니나스’ 분석을 통해 텍스트 안에 대상이 부재할 수 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기표인 대상이 텍스트 전반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라스 메니나스’에 대한 푸코의 비평은 텍스트를 둘러싼 장공과 데리다의 견해로 진입하기에 앞서 우리들에게 과연 텍스트는 무엇인지,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성찰을 던지고 있다.

우선,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를 둘러싼 논의로 들어가기에 앞서 텍스트의 범위를 성서로 한정시키겠다. 서구에서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성서해석학이었다. 물론, 지금은 해석학의 범위가 성서로만 국한되지 않고 각 분야에 존재하는 다양한 텍스트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었지만, 근대 이전까지 텍스트는 성서였고, 해석이란 성서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였다.

본 논문에서 언급하는 텍스트는 당연히 성서다. 왜냐하면 장공사상의 시작은 성서에 대한 기존 해석과의 과감한 결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데리다의 경우는 그가 비록 성서를 콕 집어서 말하지 않고 텍스트 일반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켰다고는 하나, 서구 역사에서 텍스트 일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대명사는 성서이고, 데리다 후반의 사상은 다분히 종교적사유로 치우치기에 그렇다.

이런 취지와 이유를 갖고 나는 이제부터 장공과 현대철학의 상징인 데리다의 텍스트론을 따라가면서 양자에게 있어 ‘텍스트가 지니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텍스트론에 반기를 들고 나왔던 두 사람의 실험이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또한 밝힐 것이다. 이는 장공이 지니는 텍스트론의 특이점과 가치를 부각시키는 작업임과 동시에, 장공과 현대철학이 만남을 통해 장공사상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이다.

[III] 장공의 텍스트론

[1] 장공과 성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성서가 처음 책으로 묶여지던 단계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는 양승애는 근대 이후 현재까지 성서를 읽는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성서해석학의 큰 흐름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 세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성서 속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3)

3) 양승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총론”, 김창락, 정양모, 김재성 외,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생활성서,2001), 9-26.

III장의 제목은 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장공과 성서를 읽는 세 가지 방법’이라 명명하였다. 제목 그대로 여기서는 성서를 바라다보는 세 가지 인식의 창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작업은 장의 후반부에 가서 이루어지는 장공의 성서해석학을 위한 전이해적 성격을 지니고, 장공 성서해석학의 특이점을 파악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사전 지식의 역할을 할 것이다.

1)‘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처음 등장하는 것이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이다.4) 18세기 이전 사람들은 성서를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읽었다. 근본주의자들의 성서를 보는 관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성서의 내용을 쓰여진 글자 그대로 사실(fact)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서 안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역사들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정확한 사실이고, 성서 안에 예언된 미래의 사건들 역시 반드시 그대로 우리들에게 벌어질 사건들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고, 이것대로 사는 자가 바로 신앙인이다.

4) “이 방법론은 크게 원전 비평, 역사 비평, 사회학적 비평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중 역사 비평 방법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 비평 방법론은 출전 비평, 양식 비평, 전승 비평, 편집 비평의 네 형태가 주축을 이룬다.”-Ibid., 13.

하지만, 성서에는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여러 장면들이 있다. 그것은 성서의 제일 처음인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서 66권의 시작인 창세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였는지에 대한 기사로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성서는 그 처음부터 많은 의문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창세기 ‘1장~2장 4절 a’와‘2장 4절 b~25절’의 내용이 다르다. 전자의 창조기사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Omnipotential God)’이다.

반면, 후자의 창조기사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할 때 직접 진흙을 주무르고 만지고 거기다가 호흡까지 불어넣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후에 하와를 창조하는 경우도 그렇다. 아담의 갈비뼈를 빼다가 하와를 만드는데 그 과정이 매우 디테일하고 세심하다.

동식물을 창조하는 경우도 양자의 서술은 다르다. ‘1장~2장 4절 a’에서는 온갖 식물들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에 동물, 맨 나중에 남자와 여자와 한꺼번에 창조된 반면, ‘2장 4절 b~25절’에서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남자를 제일 먼저 흙으로 창조한 후에, 그 다음에 식물을 자라게 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한 다음, 마지막에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안 되어 보여 하와를 창조하셨다. 이렇듯 성서에는 창세기 뿐 아니라, 같은 대상과 사건에 대해서 다르게 묘사되는 경우가 숱하다.5)

5) 장공은 근본주의적인 당시의 성서해석과는 다르게 구약성서 5경의 구성요소인 J,E,D,P 문서들의 존재를 밝히고 동시에 Q자료를 포함한 신약성서의 자료설에 대한 해외의 연구동향을 여과없이 소개하고 있다, - 김재준, “성서의 유래와 정전화 과정”, 한국신학대학출판부 편,『장공 김재준의 저작 전집 3』,(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 15-17.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러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 불경하게 생각하였다. 일찍이 장공은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성서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평을 남겼다:

성서절대무오설, 즉 성서의 축자적 무오설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이 요청되며, 따라서 축자영감설이 득세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비위에 맞는 어떤 학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그 학설에 맞추어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은 불경건한 태도임과 동시에 비진실을 초래할 것이다.6)

6)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십자군>(1950년 3월);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 (한신대학교출판부,2014), 207.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어 성경을 읽는 방법은 성서는 본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성서는 역사 전개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함은 성서는 역사 전개의 기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성찰과 탐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진리를 복원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배경들, 예를 들면, 성서의 저자, 저자와 독자들이 속했던 공동체, 당대의 역사적 사건과 상황들을 알아야 한다. 이것들에 대한 정당한 복원과 학습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서의 진리 앞으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전 시대 성서 무오설에 대한 근대인들의 도전이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한껏 고양된 인간의 이성은 축자영감설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을 알아가면서 사람들은 더 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진 성서가 만만치 않은 역사적 과정과 역경, 수고와 기도, 피와 땀으로 점철된 아주 오래 되고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쳐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복잡다단한 역사의 삶의 자리를 드러내는 것이 ‘역사 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은 이 방법론의 특징을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읽어버리거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과 사실을 차근차근 따져가며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결론을 얻으려는 태도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로운 연구다. 전통적인 결론을 덮어놓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사실이 명령한다면 전통적인 것에서 떠나는 것도 사양치 않는 태도다. 또한 이것은 경건한 연구다. 계시와 구원의 사실이 담겨 있는 거룩한 책에 대한 연구인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의 사실에 대한 연구요, 어떤 교리나 신조를 전제로 한 연구가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실상 그대로 파악하려는 것이요, 어떤 기성 교리 변증을 위한 사실의 도구화를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7)

7) 김재준, “성서 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 <십자군>(1950년 5월);『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 (한신대학교출판부,2014),221-222.

2) ‘성서 속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 저자와 저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는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방법은 근대이후 20세기 초, 중반까지 성서학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를 차지하면서 축자영감설이나 알레고리컬한 성서해석에 익숙했던 신앙인들이나 독자들에게 성서를 보는 합리적 관점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는 바른 신학과 건전한 신앙형성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겼다.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삶의 자리가 어쨌든지 간에, 성서를 썼던 원저자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 완성되어 우리 손에 넘어온 성서는 원래의 삶의 자리와 저자의 의도와는 독립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이 그것이다.8)

8) 양승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총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19.

특별히 텍스트는 언어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해석한다’ 함은 텍스트의 내적 언어구조를 따라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텍스트가 쓰여지던 당시의 상황을 복원하고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발견한다고 해도,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여타의 배경과 조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반론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성서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비평을 성서해석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구조주의 비평(Structual Criticism), 수사학적 비평(Rhetorical Criticism), 서술 비평(Narrative Criticism)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9)

9) 구조주의 비평은 겉으로 드러난 본문의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본문의 구성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내적 구조(무의식적, 신화적, 문화적, 언어적 등)에 주목한다. 이것은 본문의 자리, 저자의 의도보다는 본문을 구성하는 내적구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 수사학적 비평은 기본적으로 글의 문체나 형식이 글의 메시지나 내용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어떤 한 주제나 내용을 증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배치된 수사학적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서술비평은 역사상의 실제 저자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독자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화자에 관심을 둔다. 그 화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이야기의 구성(plot)을 꾸며나가는지를 밝힘으로써,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내용(what)보다는 이야기 전개 방식(how)에 주목한다. 각각의 방법론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양승애의 위의 글“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총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20-23 참조하라.

정확한 성서해석을 위해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삶의 자리를 복원하는 것,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근본주의 성서해석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겠으나, 그 노력의 이면에는 텍스트로서의 성서가 하나의 완벽한 체제임을 전제로 한다.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분명 오리지널한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학문적인 열정은 물론 축자영감설 같은 근본주의적 발상과는 다른 훌륭한 생각이지만, 그것 역시 ‘성서란 그 자체로 이미 닫혀진 세계이고 그 자체로 작동한다’라는 확신과 믿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주의적인 파토스와 그 방향만 다를 뿐이지 그 양태는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서 뒤의 세계’와 ‘성서 속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간략하게 양자를 요약하자면, 전자는 텍스트를 이해할 때 저자와 저자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저자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텍스트 밖에 없으므로 텍스트가 지시하는 상징(기표)과 그 상징이 지시하는 의미(기의)간의 관계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이 두 가지 방법론으로만을 놓고 봤을 때 장공의 성서해석학은 전자, 즉 ‘성서 뒤의 세계’에 관심하는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와 신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등 근본주의적인 성서방법론과 맞서 그것들의 모순과 폐악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역사비평적이고 과학적인 성서방법론이 요청되었는데, 장공은 용기를 내어 그런 방법론을 수용하면서 성서의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공의 성서관을 역사비평적이었다고 단정해버린다면 그것은 장공이 지닌 소중한 성서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장공의 성서관은 다음에 전개되는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3)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

20세기 현대사에서 1960년대는 가히 ‘혁명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월남전에 대한 반전운동, 히피운동, 여성운동, 흑인운동,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던 제3세계국가들이 강대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비동맹운동, 유럽의 68혁명 등 연속적인 변혁의 움직임들이 끊이지 않고 196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신학적으로도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려 카톨릭계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1968년 흑인운동의 기수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피살된 것을 분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흑인신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WCC 제4차 총회는 WCC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주제인 인간화(Humanization)라는 모토를 내걸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이데올로기의 횡포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인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역시 1968년, 콜롬비아 멘델린에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가 열렸는데 그 회의에서 ‘해방신학’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960년대에 세계사적으로 전개되었던 다양한 변혁적 움직임들은 신학적으로 정치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그리고 알타이저로 상징되는 ‘신 죽음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은 당연히 성서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위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이 그것이다. 성서를 지배하는 어떤 권위적인 목소리, 절대적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가 형성된 배경과 역사도 아니고, 성서 본문 자체인 성서 속 세계도 아니다. 지금 성서를 앞에 놓고 읽고 있는 우리가 처한 상황, 즉 ‘성서 앞의 세계’이다. 저자와 텍스트를 떠나 그것들 앞에 놓여 있는 독자인 우리가 텍스트 해석의 관건이 된 것이다.10)

10) 양승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총론”,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23-24.

이는 각자의 역사와 경험, 각각의 공동체가 경험한 역사적 사건과 고백을 통해 성서를 바라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서구에 사는 백인 중산층 남성이 주도하였던 성서해석의 범위는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제3세계 국민들, 남성이 아닌 여성, 부르주아가 아닌 민중들,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이 바라보는 성서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성서해석의 풍요로움을 더 하였다. 오히려 이들이 읽어내는 성서해석의 파괴력이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장공은 20세기 전체를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였고, 무엇이 성서를 읽는 방법인지를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축자영감설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독단과 역사비평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권위와 나르시스에 빠지지 않으면서 온전히 성경을 읽어내는 방법에 몰두하였는데 그런 고민들은 그의 저작 곳곳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11) 그 중에서도 나는 다음 구절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우주에는 말씀이 차 있다. 우주 만상 자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에게 거주하며 우리와 생활을 같이 하기 전에는 참 구원은 오지 않는다.”12)

11) “소위‘신신학’이란 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불신앙을 돌이키고자 힘쓴다. ‘정통신학’은 이보다도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가 아닐까?”-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교리와 신앙:정통의 도취”,『김재준 전집 1』(이하 전집), 275; “여기서 진리는 그에게 어떤 객관적인 진리, 보편체계로서의 진리가 아닌 personal한 생명적인 진실로 성숙합니다. 인간화한 주체적인 진리가 됩니다. 진리인간이 된단 말입니다.”- 김재준,“진리, 길, 생명”,『전집 4』, 51; “하나님 말씀이 다만 구약성서에 써진 문서로서의 말씀이 아니고, 또 그 말씀이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로고스’로서의 말씀도 아니고, 성자 예수 라는 인간을 이루어 인간화한 말씀이어야 생명적이라는 말입니다.”-김재준,“산 말씀”,『전집 1』, 233. 12) 김재준,“생활의 복음”,『전집 1』, 184.

이 글이 발표된 것이 1946년이라고 하는데, 장공은 서구 신학계에서 20년 후에나 전개될 “말씀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성서해석학의 맹아를 이 글에서 미리 앞당겨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공의 이러한 성서관은 그의 신학사상 전반을 지배한다. 신학이란 시대를 전제하고,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처하고 응전하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다짐 말이다. 신학이란 성서 뒤의 세계에 빠져 과거에 대한 훈고학적 고찰과 성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신학이란 텍스트 자체가 자아내는 읽는 즐거움과 감동에만 안주해서도 안 된다. 장공에게 있어 신학이란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들을 정면으로 그 응시하는 힘이다. 성서는 이런 현실의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성찰과 각성과 기도와 결단을 하게 하는 도구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 앞을 비추는 등불이다. 이런 성서해석의 원리를 ‘성서 앞에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이라고 후대 사람들은 명명했는데, 장공은 이런 용어들이 나오기 벌써 훨씬 이전에 벌써 그 강을 건너 더 넓고 높은 세계로 비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장공의 성서관: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의 해석학

지금까지 나는 ‘성서 뒤의 세계’, ‘성서 속의 세계’, 그리고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각각이 지닌 특징과 그와 결부된 장공의 성서방법론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3장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사항을 종합하면서 장공의 성서관에 대한 전체적 지도를 작성해 보기로 하겠다.

1) 양극단을 넘어서

장공 김재준(1901-1987)은 3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8년 9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프린스턴과 웨스턴 신학교에서 구약을 전공한 후에 1932년에 귀국하였다.13) 그의 신학사 졸업 논문은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이었고, 석사학위 논문은 “오경 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었다. 장공은 유학기간 중에 당시 구미를 휩쓸고 있었던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소개받았고,14) 이를 통해 성서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과 안목을 습득하였다.

13) “김재준은 웨스턴 신학교의 학부과정부터 다시 시작했다. 전공은 구약학을 선택하였다. 그는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구약개론, 구약원전 강독 등 구약학 과목은 모두 들었다....학업성적은 우수하여 한 과목만 B+ 학점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A학점을 받았다. 그리하여 1932년 졸업식때에 김재준은 신학사(S.T.B)와 신학석사(S.T.M) 학위를 겸해서 받았다. 히브리어를 잘 한 덕분에 ‘히브리어 특별상’도 받았다.”- 천사무엘,“근본주의와 독대네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한신대학교출판부,2006),36. 14) Ibid., 39-40.

미국 유학기간 동안 장공의 이력 중에서 특이한 사실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당대 근본주의 신학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그레샴 메첸 교수의 수업을 듣고 그의 서적을 탐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메첸으로 상징되는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다: “많은 배움이 있었으나 그곳을 떠날 때 나는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발악하는 고민상을 여실히 보았습니다”15)

15) 김재준,“대전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전집 1』, 375.

이렇듯 장공은 미국 유학을 하면서 양극단을 모두 경험한 셈이다.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메첸 밑에서 수업을 들었고, 역사비평적인 방법을 소개받아 구약 논문을 작성한 것이 그것이다. 양자를 다 경험한 장공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성서해석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우리는 정통주의자의 성경에 대한 축자적인 광신을 피함과 동시에 자유주의자의 희박하고 방자한 막연성을 막아야 한다”16)

16) 김재준,“한국교회의 신학운동”,『전집 5』,9.

이 발언은 장공의 성서관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장공이 역사비평에만 몰두했던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비판을 이곳저곳에서 듣는다. 근본주의와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역사비평적으로 성서를 가르치고 해석하는 것이 빌미가 되어 장로교 총회에서 파면당한 장공의 알리바이는 장공과 그의 후학들을 곡해하고 매도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재로 지금까지 작동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다. 장공은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신봉자가 아니다. 물론 장공은 역사비평을 성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을 현실화시키는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17) 그렇다면 양극단을 넘어서는 제3의 길로서의 성서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장공은 이 질문을 갖고 성서와 씨름하였고, 나는 그것을 장공 특유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건의 해석학”이라 부르고 싶다.

17) 김재준,“생활의 복음”,『전집 1』, 184.

2) 성서,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성서를 읽는 커다란 세 가지 카테고리 중에서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은 장공의 성서해석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공이 그것에 함몰되지는 않았음이 밝혀졌다. 세 가지 방법론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성서 안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에 대해 장공이 본격적으로 다룬 흔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방법론은 문학 분야에서 부터 시작된 비평론을 성서해석의 방법론으로 차용한 경우인데, 다분히 이론취향적인 면이 강하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감싸 안아야했던 장공에게 있어 단순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텍스트로서의 성서를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장공에게는 없었다. 텍스트 자체의 쾌락에 몰두할 수 있는 호사는 분명 그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나는 세 가지 방법론 중에 장공의 성서해석학에 가장 근접한 것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을 택할 것이다.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이 무엇이었나? 우리가 처해있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나의 언어와 경험과 사건과 역사와 더불어 성서를 해석하는 것 아닌가!

이영미는 “장공은 그의 해석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장공이 지녔던 방법론을 “해석적, 주관적, 고백적”이라고 주장하였다.18) 장공에 대한 이영미의 평은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장공이 지녔던 성서해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생각한다.

18) 이영미,“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과 해석공동체”, 제22회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 13쪽

그리고 자칫하면 분산될 우려가 있는 주관적 고백과 해석을 하나로 묶는 원리가 장공에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다. 장공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 더군다나 어떤 성경관이 그리스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과 그의 심정으로 성경을 재평가하며 해석한다.”19) 이영미는 장공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을 다음과 같이 각색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함은 장공이 구약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향한 예언으로, 신약은 이의 성취로 보는 구속사적 시각을 늘 견지하는 것이다.”20)

19) 김재준,“한국교회의 신학운동”,『전집 5』,9. 20) 이영미,“장공의 비평적 성서해석과 해석공동체”, 13쪽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공의 성서해석이 구속사적인 지평으로 확대되는 것을 느낀다. 이는 장공이 이론신학과 성서신학을 넘나들며 양자를 서로 연결시키고자 했던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21)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성서관의 강조는 자칫 장공사상을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신학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반대의 경우다. 장공도 이런 우려를 의식했는지, 그리스도 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다: “교리체계보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두고 그의 생명에 향응하여 세대를 창조하는 진실로 ‘산 종교’, ‘사는 종교’를 체득해야 하는 것(!)”22), 이것이 장공이 강조하는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속에 담겨있는 함의다.

21) 장공은 도미전에 일본에서 3년간 신학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졸업논문 제목은 『칼바르트의 초월론』이었다. 미국 유학기간에도 전공은 구약학이었으나 부전공으로 ‘조직신학’을 이수하였다. - 김희헌, “신학훈련과 한국교회의 현실”,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라_ 장공 김재준 목사 어록집』,(너의 오월, 2013), 14-16. 22) 김재준,“정통과 이단”,『전집 5』,390.

나는 여기서 장공이 언급하는 ‘산 종교’, ‘사는 종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것은 장공의 말대로라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받아들어야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제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상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고, 교회가 아니라 인간”23)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고, 당신도 변화되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없다. 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은 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신다움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양자 간의 극복 될 수 없었던 타자성은 긍정될 수 있었다.24)

23) 김재준,“성육신”,『전집 4』,154. 24)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성격을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표현하였다.-디트리히 본회퍼, 손규태.정지련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 8: 저항과 복종-옥중서간-』,(대한기독교서회, 2010), 711.

장공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은 그의 교회론으로까지 번져나간다:

우리는 현존교회의 고정사상을 탈피하고 부단히 개혁하면서 종말의 완성까지 전진할 것입니다. 교회는 변천하는 역사의 속에, 곁에, 위에 그리고 역사의 화살촉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섬기고, 역사의 미래를 창조하는 그리스도의 기수가 되는 것입니다.25)

25) 김재준,“전진하는 교회”,『전집 9』,263.

지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병고에 시달리는 자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율법을 어긴 범죄자들, 윤락한 여성들, 어부와 농부 등등을 찾아 그들의 친구가 된 나사렛 예수의 근본 모습을 똑바로 다시 봐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우리 교회가 관심의 방향을 이러한 오늘의 시점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심판 앞에서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26)

26) 김재준,“말씀을 새긴다 (2)”,『전집 9』,43.

위의 두 가지 인용문 안에서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장공의 교회론이 깃들어 있다.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진 고통의 짐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대리한다. ‘대리’의 결과 그리스도가 세상을 대신하여 죽었고, 대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었듯이,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서를 바로 읽은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고통의 한 가운데, 장공의 표현대로, ‘역사의 화살촉’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섬기는”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이다.27)

27) 본회퍼는 노골적으로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손규태, 정지련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 8: 저항과 복종-옥중서간-』,(대한기독교서회, 2010), 713; 장공과 본회퍼의 삶과 사상은 여러 면에서 상동성이 있다. 그리스도론, 교회론, 윤리학 등 이론적인 지형뿐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걸어갔던 궤적까지 둘은 닮았다. 본회퍼와 장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다음 작업을 위한 예비적 질문으로 남겨둔다.

3) 성서, 사건을 유발하는 텍스트

지금까지 나는 장공의 성서관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건의 해석학”이라 정의를 내리면서 그리스도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장공의 교회론까지 연결되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묻는다. 장공에게 있어 성서는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있어 성서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사건을 일으키는 텍스트이다. 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장공은 성서비평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그런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했던 것이고, 결론적으로 장공에게 있어 성서란 사건을 유발하는 텍스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글은 장공의 이러한 취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믿음은 세속사회에서 사건으로 나타난다. 믿음의 세계는 격세간적인 영원한 정적이 아니다. 명경지수의 맑고 고요한 ‘포오즈’도 아니라. 그런 것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믿음의 생태인 것은 아니다. 믿음은 생동한다. 생동하는 것은 사건을 일으킨다.28)

28) 김재준,“말씀을 새긴다 (10)”,『전집 10』,35.

위의 글은 장공이 믿음론이지만, 나는 이것을 장공이 성서를 바라다보는 입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서의 메시지는 자본의 질서가 유일한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은 이 흉측한 사회 속에서 사건으로 나타날 것이다. 성서의 세계는 침묵의 공간이 아니다. 성서의 세계는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물속에 수장시키고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기는 뻔뻔하고 조용한 세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성서는 사건을 일으키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아니, 성서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텍스트이다. 장공을 그것을 보고, 믿고, 따랐다. 그 결실이 바로 한신대학이었고, 그 성과가 바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인 것이다.

[IV] 데리다의 텍스트론

IV장의 목적은 데리다의 대표적인 개념어라 할 수 있는 ‘차연’에 대해 살펴보고, 데리다의 해체론적 성서읽기가 지닌 특이성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앞서 살펴보았던 장공의 성서관과 데리다의 그것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간략하게 데리다의 생애와 이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데리다의 삶과 사상적 전이

데리다는 193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제리에서 광폭하게 시행된 프랑스의 반셈주의와 페탕정책(학교에서 유대인 학생의 비율을 7% 제한하는 유대인 차별정책)의 피해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데리다가 그의 글이나 발언에서 강조하는 차이와 다름, 그리고 타자에 대한 환대 개념은 유소년 시절 식민지 국가 알제리에서 유대인으로 살았던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어 귀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9) 알제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리다는 프랑스로 건너와 몇 차례의 낙방 끝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1952) 수학하였다. 27살(1957년)의 나이에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데리다는 1964년부터 1984년까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29) 제이슨 포웰, 박현정 옮김, “1장, 알제리”,『데리다 평전』,(인간사랑, 2010), 37-53.

흔히 우리가 한 인물의 사상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전기사상과 후기사상으로 나누어 평가할 때가 있다. 니체 같은 경우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전과 이후 작품의 성격이 다르다. 전기 작품인 『비극의 탄생』,『The Gay Science』에서는 근대성 일반에 대한 비판이 있고,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 등장하는 『도덕의 계보학』, 『선과 악을 넘어서』, 『The Anti-Christ』,『Ecce Homo』를 통해 니체는 점점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 해간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도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를 기준으로 전기 사상은 ‘의식-무의식’의 지형도를 그렸다면, 그 이후는 ‘Id-Ego-Superego’간의 무의식의 역동, dynamic으로 옮겨가는 사상적인 전이를 보인다.

데리다도 마찬가지다. 데리다 연구자들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패망한 이후의 데리다와 그 이전 데리다를 구분한다. 데리다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 절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1992년에 후쿠야마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승리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고, 그로부터 1년 후에 데리다의 가장 문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유령들』30)이 출판된다.

30)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

이 책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 데리다와 후기 데리다를 나눈다. 전기 데리다는 주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에 주력하면서 그에 대한 전략으로 언어, 기호, 텍스트에 대한 천착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31) 후기 데리다는 정치, 윤리, 법, 신학, 정의론 등 정치철학과 신학적인 부분으로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여 해체론을 적용하기에 이른다.32)

31) 데리다는 1967년에 세 개의 주요 저서, 『목소리와 현상 Speech and Phenomena』(김상록 역, 인간사랑, 2006),『그라마톨로지Of grammatology』(김성도 역, 민음사, 2010 개정판),『글쓰기와 차이 Writing and Difference』(남수인 역,동문선, 2001)를 발표하면서 일약 스타철학자로 급부상하였고, 1972년에 두 번째 세 개의 주요저서인 『산종 Dissemination 』,『철학의 가장자리 Margins of Philosophy 철학의 가장자리』,『입장들 Positions』,(솔출판사, 1992)을 발표하면서 그의 전기 사상을 완성지었다. 32) 『법의 힘 Force of Law』(진태원 역, 문학과 지성사, 2004),『환대에 관하여 Of Hospitality』,(남수인 역,동문선, 2004),『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Rogues』,(이경신 역,휴머니스트, 2003),『우정의 정치학 Politics of Friendship』(1994)등이 있다. 특별히 『The Gift of Death』(1986)과『Religion』(1998)은 해체론과 신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데리다가 활동할 무렵 프랑스에는 가히 천재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샤르트르, 폴 리꾀르, 미셸 푸코, 들뢰즈, 알튀세, 바디우, 자끄 라깡,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야콥슨, 레비나스 등 서로 다른 무늬와 색깔을 지닌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그야 말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데리다는 당대 현대철학의 상징으로 우뚝 자리한다. 이런 데리다의 사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해체와 차연에 대해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데리다의 차연

이 장의 목적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대명사격인 데리다의 삶과 그가 만든 대표적인 개념어인 ‘차연’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다루어질 데리다의 텍스트론을 이해하는 필수요소임과 동시에 데리다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기조로 데리다에게 다가가려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적 성격을 지닌다.

1) 차연의 해석학

데리다가 사용하는 différance는 우리나라에서 ‘차연’으로 번역되었다. 어원적으로는 Differ(다르다) 와 defer(연기하다), 이 둘이 합쳐진 조합어가 ‘차연’인 셈이다.33) 영어로 번역된 데리다의 저작을 보면 불어인 différance를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영어로 différance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Differ와 defer의 의미 다 들어간 단어를 만들어 내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에 굳이 그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불어인 différance를 그대로 쓰는 것일 게다.34)

33) 자크 데리다, “차연”,『해체』,(김보현 편역, 문예출판사, 1996).118-128. 34) 미국 Northwestern Univ 철학과에서 현상학을 가르치면서 데리다 해석의 권위자로 각광받는 페넬로페 도이쳐(Penelope Deutscher)교수는 데리다의 차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차연은 (‘다르다 to differ’와 ‘연기하다 to defer’를 뜻하는 동사 differer에서 유래하는)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그것은 미분화(differentiation)된 상황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거리두기(간격두기)를 말하는 것이고, 어떤 기호도 자기폐쇄적인 동일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Penelope Deutscher, How to Read Derrida (New York: WW Norton & Company, 2005),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차연’을 표현하면 어떤 말이 적합할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영어 단어 중에 낱말의 뒤에 붙어 명사화 시키는 접미어 중 나중에 보면 동사의 느낌이 나는 접미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단어 뒤에 -(a)tion을 붙이는 케이스이다. 예를 들어 像을 뜻하는 image에 –ation을 붙여 ‘이미지화하기’(imagination)라는 단어가 파생되고, ‘개념’을 뜻하는 concept에 –tion을 붙이면 ‘개념화하기’(conception)라는 뜻이 생긴다. 둘 다 형태는 명사형이나 동사 feel이 나는 단어들이다. 그럼 ‘차이화하기’라는 말도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은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설명하는 중요한 물음이다.

영어로 차이를 뜻하는 difference에 –ation를 부치면 differentiation이라는 말이 파생되는데, 이 단어는 수학용어로는 미분을 뜻하는 말이다. 미분이 무엇인가? 계속 잘게 쪼개는 것이다. 이렇듯 Differntiation은 사전적으로는 ‘미분화하기’ 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차이화하기’로 치환된다.35) 미분했다는 말은 쪼개어져서 이 전 형태와 다른 차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 ‘차이화하기’라는 말은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차이’와‘연기’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말이고,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해석에 대한 독점 없이 해석의 준거점들이 계속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5) “차연은 현존(present)도 부재(absent)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부재이다. 그것은 동일성(identity)도 아니고 차이(difference)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일종의 미분화(differentiaition)이다. 그것은 그러한 동일성들 사이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효과를 산출한다.”-Ibid., 29.

위에서 나는 차연은 틈과 여백을 창출하는 것이라 말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틈과 여백이란 의미가 재현할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카프카의 소설 <굴>이다.36) 소설은 굴을 파는 짐승의 시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굴을 파는 짐승이 있다. 어느 정도 안락한 거처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짐승은 그 소리가 분명 바깥에서 들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은 그 소리의 출처를 찾아 끊임없이 탐색한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다.

36)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굴”,『변신.시골의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민음사, 1998)

하지만, 카프카의 <굴>을 읽다보면 그 소리가 바깥이 아니라 이 짐승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짐승은 그 소리가 밖에서 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 확신이 바로 자기동일성이고, 환상이고, 판타지다. 어쩌면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자기동일성’이란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그래서 그 틈을 메워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히스테리였고, 변증법이란 그 틈과 여백을 메우기 위해 고완된 정신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헤겔은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데리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은 서구인들의 허풍이고 위선이다.

현대철학은 헤겔 류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반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자기동일성을 ‘Totality’(전체성)이라 비난한 후‘전쟁의 존재론’37)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푸코는 서구의 근대가 그려나갔던 자기동일성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38)였다고 회고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 역시 이러한 서구가 지녔던 자기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7)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22. 38)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

2) 차연의 정치학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의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 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차이’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명사화된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이가 계속 발생하는 상황과 차이가 발생하면서 일으키는 사건과 사태에 관심한다.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간과가 데리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셈이다.

내게 있어 데리다의 ‘차연’은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면서 도래하는 사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데리다의 차연을 현실에 논리에 적용한다면 이런 것이다.‘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 속에서 차이가 계속 발생한다’ 함은,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속에 담겨있는 정치적 함의다.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뭔가 불순한 세력과 음모가 이 사회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 속에 깃들어있는 정치적 음모이고 윤리적 강령이라 한다면?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차연은 그의 ‘텍스트론’과 어떤 상관이 있고, 장공의 텍스트론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것이 이 글에게 남겨진 마지막 과제다.

[3] 텍스트의 해체

1) 해체에 대한 오해와 진실

통상 해체주의는 파괴, 전복, 폭력 등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느낌을 던져준다. 이런 까닭으로 데리다를 변호하는 학자들마다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은 해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작업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해체란 기존 텍스트 안에 묻혀있었던, 저자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 혹은 절차 일반을 의미한다.

이것은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냈다.39) 데리다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Timaeus』를 읽으며 플라톤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라(Khora)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40)

39) “내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해하고자 했던 방식은 이러한 유산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반복하고 보존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그들의 사유가 작동하고 있는지 또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남긴 언어 자료 안의 긴장, 모순, 이질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런 하나의 분석이다”- Jacques Derrida,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Ed. John D. Caput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9. 40) “나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매 순간마다 그의 작품 안에 있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코라가 어떻게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양립할 수 없는지 찾으려고 한다. 나는 플라톤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플라톤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공히 분석한다.”- Ibid.

‘코라’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 할 때 물질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은 이데아의 모방(imitation)이고, 세상 속에서 이데아가 구현되는 터, 질료, 대지가 바로 “코라”다. 이데아가 질서(Order)라면 코라는 혼돈(Chaos)을 상징한다. 흔히 서양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 주관과 객관의 조화란 범박하게 말하면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의 혼동을 극복하고 현실가운데 안정과 질서, 그리고 통일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스스로도 의도하지 못했던 코라의 의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 ‘코라 없이는 이데아도 없다’는 것이다. 코라는 지금까지 논외의 영역이었고, 단지 이데아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으로 치부되었었는데, 데리다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에 의해 코라는 이데아 못지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코라에 이데아가 심겨져야 비로소 그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듯 그동안 묻혀있었던 텍스트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혹은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다.

나는 데리다의 ‘해체’를 접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하나는‘해체’라는 한국어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어 ‘해체’의 뉘앙스는‘deconstruction’의 느낌을 정확히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흉칙하고 두렵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번역이다. 이보다는 더 부드럽고 본래 의미를 잘 살릴 용어의 발굴이 시급하다.41) 두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데리다의 해체론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겠다’ 라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실제로 데리다의 해체론에 입각한 성서읽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것이 종전의 해석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나 역시 궁금하고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41) 철학자 진태원은 ‘해체’보다는 ‘탈구축’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해체가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서울: 동녘, 2013) 중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p.309-339)를 참조하라.

2) 해체론적 성서읽기

데리다의 해체론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 숨겨져 있었던 의미를 발견해내고 이를 통해 종전의 해석을 전복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의 창을 내게 한다. 이번 장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솔로몬 재판’(왕상 3:16-28)에 대한 해체론적 독법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전의 해석과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새로운 점인지 음미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1) 칼의 왕, 솔로몬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놓고 저마다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우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점점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고 급기야는 솔로몬에게까지 이르게 되는데…. 자칫 미궁으로 빠질 뻔한 이 사건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지혜를 이용하여 생모를 구별해냈다는 이 이야기는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등극시킨 결정적인 본문이다.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학원 이름 혹은 학습지 제목을 훑어보면 아마도 하버드 만큼이나 솔로몬이란 이름도 많을 것이다. 이 모두가 ‘솔로몬 = 지혜’라는 잘못된 신화에 기인한 웃지못할 진풍경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서에 나와 있는 솔로몬에 대한 재판을 해석하기에 앞서 피로 점철되었던 솔로몬 가계의 역사와 솔로몬의 권력투쟁에 대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스라엘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았다. 성경에 나오는 굵직한 다윗의 자손은 암논, 압살롬, 다말, 아도니야, 그리고 솔로몬이다. 이중 솔로몬만 예루살렘 세대라 할 수 있고, 나머지 자식들은 헤브론 출신이다. 전체 족보상으로 다윗의 장남은 암논이다. 그런데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말의 친오빠였던 압살롬은 이에 분노하여 암논을 살해하였고, 아버지 다윗에게까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령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한다. 솔로몬은 성장하면서 이러한 피로 점철되었던 자기 가문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권력의 생리를, 칼의 논리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자라났다.

솔로몬 권력투쟁의 절정은 다윗의 노쇠로 인한 레임덕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다윗 구파라고 할 수 있는 요압 장군, 아비아달 제사장의 비호를 받는 아도니야와 예언자 나단과 밧세바가 지원하는 솔로몬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솔로몬은 최후의 승자가 된다. 족보상으로는 솔로몬보다 형인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야 맞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야망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그런 족보 같은 것이 뭐 큰 대수이고, 삶의 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솔로몬은 권력에 오르자마자 자기 형인 아도니야와 자기 아버지의 평생 측근 요압장군을 처형하였고, 제사장 아비아달은 멀리 추방시켰다.

이러한 역사를 종합해보면, 솔로몬은 참 불행한 사람이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오라비가 여동생을 강간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모습을 다 지켜봤던 사람이 솔로몬이었고, 급기야는 자기 역시 (그 동안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자기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 인물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의 히브리어 뜻이 ‘평화롭다’라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그렇다면, 평생 평화롭지 못했던 솔로몬에게 있어 지혜란 무엇이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솔로몬의 재판’을 이야기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2) 그 재판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바락바락 우겨대는 사건이 솔로몬 눈앞에서 발생한다. 더군다나 두 여인은 천한 창녀였다. 각각의 변론을 들어보니 죽은 아기는 상대방의 아이이고, 살아있는 아기가 자기 아이란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했었지?’ 살아오면서 대화와 타협, 화해와 용서의 경험이 없었던 솔로몬이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음모와 배신이, 화해와 용서보다는 처벌과 죽임이 솔로몬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었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변론을 듣고 나서 본능적으로 칼을 갖고 오라고 명한다. 이 대목에서 주석가들은 솔로몬이 지혜를 발휘하여 두 여인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이처럼 말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인생이 솔로몬에게 준 교훈이 무엇이었나?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을 때,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솔로몬이 그 위기를 벗어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칼이었다. 솔로몬에게 있어 지혜란 언제 누구에게 어느 시점에서 칼을 정확하게 쓸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것이 솔로몬의 지금을 있게 했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칼의 논리에 아주 충실했던 사람이었고, 그것에 입각해 칼을 갖고 와서 아이를 잘라 반반씩 나누라고 한 것이라면 너무 불손한 해석인가?

극의 반전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왕상 3:26). 성경은 그 아이 어미의 마음이 “아들을 위하여 불붙는 것 같았다”(개역)고 적고 있고,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랐다”(표준새번역)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는 진짜 어미가 “살아있는 아기를 저 여인에게 주어 죽이지 말아달라”고 솔로몬에게 애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게 왠 황당한 시츄에이션? 솔로몬은 놀랐을 것이다. 다른 여인은 상식적으로 칼로 아이를 잘라 반씩 나누자고 말하는데, 그것이 내가 아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이고 바른 판단인데, 저 여인의 행동과 말과 표정과 눈물은 무엇이지? 왜 오버하는 거야? 생전 처음 벌어진 칼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해법을 접하고 솔로몬은 당황해 한다. 세상에 뭐 이런 게 있어? 내가 그동안 뭔가를 놓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 다음 구절에서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왕상 3:27).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그때에 드디어 왕에게 지혜가 임했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생의 최초로 칼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판정을 내린다: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칼과 죽임의 논리에 빠져 있던 솔로몬에게 살림과 생명의 논리가 최초로 선포되는 장면이다.

(3) 해체론적 성서해석이 노리는 것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빛난다’고 칸트는 말했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망론하고 지혜는 천상의 영역이었고 선택된 자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함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지혜와 진리는 정치학의 기초로 가장 선한 자, 즉 가장 우수한 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했다. 중국에서도 국가 경영의 모델은 언제나 요순시대나 삼황오제 같은 성군들의 차지였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에 있는 지혜와 도덕, 그리고 명석한 판단은 높이 있는 별을 따듯이 높은 양반들만이 그곳으로 올라가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솔로몬을 이러한 원칙에 부합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해체론적인 읽기를 따라 다시 꼼꼼히 본문을 읽어보니 수상한 점이 보인다. 지혜의 출처가 솔로몬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란 생명의 논리이고 사랑의 언어이다. 그런데 그것이 솔로몬이 아니라 한 아이의 어미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여인으로부터, 마치 이데아가 코라에 기대어 자기를 실현했던 것처럼, 지혜가 흘러나온다. 솔로몬은 그저 흘러나오는 지혜를 만졌을 뿐이다. 이처럼 해체론적인 읽기는 동일성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그 원칙을 성립시키기 위한 내부적 필수요건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 결과 지혜는 솔로몬으로 상징되는 상층부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민초들의 영역으로까지 직영을 넓히며 그 외연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해체는 파괴와 전복의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해체론은 우리 생각에 새로운 창을 내어, 인식의 지평을 넓혀 텍스트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해체론으로 바라본 성서읽기는 의미의 폐쇄와 성서읽기의 독점적 권력을 갖는 억압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그 독점적 권력이란 민족(혹은 국가)일 수도 있고, 체제일 수도 있고, 이념일 수도 있고, 계급일 수도 있고, 그리고 당연히 종교도 성서도 그 예외는 아니다.

[V] 종합: 장공과 데리다의 동행, 그리고 작별

지금까지 나는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론이 지니는 특색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사상적 토대와 배경이 다르다. 지역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이고, 종교적으로도 유대교적 정서와 기독교적 정서로 나뉜다. 데리다는 맑스의 세례를 받은 전력이 있고,42) 장공은 맑시즘에 대한 견해를 소상히 밝히지는 않았다. 이렇듯, 여러모로 두 사람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교집합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을 나는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텍스트를 매개로 함께 동행하는 듯 했던 장공과 데리다는 어느 시점에서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42) 제이슨 포웰, 박현정 옮김, “19장. 데리다의 세계: 마르크스 직면하기”,『데리다 평전』,(인간사랑, 2010), 391-404 참조.

[1] 장공과 데리다의 동행

1) 낡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텍스트

장공과 데리다는 공히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장공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1940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교회를 출범시켰다. 그 과정에서 장공이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축자영감설로 상징되는 성서의 권위문제였다. 그는 1950년 3월에 발간된 <십자군>에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축자영감설의 문제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43)

43) 장공은 축자영감설을 반반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거들을 내세웠다: (1)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2)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기존의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그것을 기록하였다. (3) 하나님께 말씀을 주실 때 무슨 기성품처럼 주신 것이 아니다. (4) 성경은 역사나 과학의 연대표가 아니다.-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십자군>(1950년 3월);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 (한신대학교출판부,2014),207-209

장공은 축자영감설에 대한 반발 못지않게 성서에 대한 교리적 해석에도 민감하였다: “그것은 자기네가 만든 교리 신조 신학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 또는 그 이상에 놓고 각 개인의 양심을 억압 지배하려는 태도인 것이다.”44) 교리적 해석의 등장은 중세 가톨릭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로마교황청은 성서해석의 독점권을 기반으로 성서를 교리 혹은 교황의 시녀로 삼았다. 이에 대항하면서 마틴 루터는 “오직 성서!”를 제창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었다.

44) 김재준,“양심의 성서적 위치”,『전집 2』,112.

장공은 한국 교회가 중세교회처럼 성서해석을 교리 밑에 두려는 작태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러한 행위는 우상숭배라고까지 하면서 맹렬히 비난하였다.45)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 말씀이 구약성서에 써진 문서로서의 말씀이 아니고, 또 그 말씀이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로고스’로서의 말씀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축자영감과 교리적 해석에 대한 단죄를 선언하였다.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축자영감설과 교리적 해석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45) “정통신학이니 정통교리니 하여 그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최고표준을 삼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인격적인 데서 관념적인 데로, 영적인 데서 율법적인 데로, 자유하는 데서 종 되는 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어서 하나의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김재준,“기독교의 기본문제”,『전집 4』,3-4.

장공의 지적은 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46)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기존 재현의 형이상학은 텍스트 밖에 로고스로 상징되는 빛이 있어 텍스트 안으로 그 빛을 비추어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천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시스템이었다. 마치 자궁에 있는 태아가 탯줄에 의지해 산모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천상의 진리인 이데아는 이성의 원리인 로고스에 의해 인도되어 텍스트로 들어와 박힌다.

46) “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text”-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Corrected edition. Trans. Gayatri Chakravorty Spivak(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Press, 1997), 158.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을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이라 부르는데, 데리다에게 있어 로고스 중심주의는 플라톤 이래로 서구철학을 근거 짓는 지침이었다. 로고스중심주의 하에서는 ‘말하는 것’(시니피앙)과 ‘말하려는 의미’(시니피에)가 일치한다. 이것이 대상과 인식의 일치,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매개하여 진리에 대한 확증을 보증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을 지탱하는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데리다는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가 이룩한 연쇄고리를 서구 정신사가 성취한 허상이라 지목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였던 것이다.47)

4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84.

장공이 축자영감설과 교리적 성서해석이라는, 즉 텍스트 밖에 존재하면서 텍스트를 강제하는 원칙에 반대했던 것처럼, 데리다 역시 텍스트 밖에서 텍스트를 짓누르는 로고스 중심주의에 저항하면서 텍스트를 구해 내고자 했다. 이렇듯 양자는 낡은 관습과 전통으로부터 텍스트를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2) 새로운 사건과 전망을 향한 요청으로서의 텍스트

장공과 데리다의 텍스트론은 독자들로 하여금 텍스트를 바라보는 지평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데리다의 차연과 해체를 텍스트에 적용했을 때는 단순히 말과 의미의 간극을 설명하는 이론이겠지만, 그것을 신학 텍스트에 적용하면 신은 기존의 신학적 담론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존재다. 이러한 데리다의 종교관을 요약하는 문장이 바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48)이다.

48)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Routledge, 2002), 56.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론을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 우선,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시간관부터가 다르다. 데리다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면서, 메시아적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질서와 ‘시간이 탈구될 것(time is out of the joint)’이라고 예언하였다.49) 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50) 변증법적 시간과도 다르고 메시아적인 시간관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49)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7. 50) 『마르크스의 유령들』출판은 현실 사회주의 패망 이후 움츠려들었던 좌파논객들을 하나로 모아 다시 한번 좌파의 미래와 대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논의들을 편집해 출판된 책이 Ghostly Demarcation: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Versro, 1999)이다. 이 책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The Specter’s Smile, 프레드릭 제임슨의 Marx’s Purloined Letter, 데리 이글튼의 Marxism without Marxism, 아이자드 아마드의 Reconciling Derrida: ‘Specters of Marx’ and Deconstructive Politics 등 내로라하는 논객들의 문제적 데리다 읽기 아홉 편이 실려있다. 이에 질세라 데리다도 꼼꼼히 그들의 지적과 비판에 맞서 대응을 하는데, 데리다의 반박은 Marx & Sons 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 후반부에 실렸다. 한국에서는 2009년 도서출판 길에서 Ghostly Demarcation에 실려있는 3편의 논문과 데리다의 Marx & Sons를 묶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불가능한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예: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예: 새하늘 새땅)를 향해 중단 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다. 메시아적인 시간관은 이런 변증법적 시간관의 역순이라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런데 데리다가 “시간은 탈구될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메시아적인 것’을 겨냥한다. 그것은 신학적 도그마와 교리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황홀경도 아니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고,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이고,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교리와 도그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기표로 남겨두었다. 메시아주의(messianism)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인데, 덕택에 데리다에게 있어‘메시아적인 것’은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이 된 셈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보다 더 정치적 속셈이 있다. 텅 빈 기표로서 ‘메시아적인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스템 속에서 틈과 균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고, 그 틈과 균열을 통해 도래하는 사건과 희망을 예감하고 전망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나는 데리다의 텅 빈 기표를 장공이 말하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51)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싶다. 장공은 다양한 맥락에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는데, 요약하면 우리가 회복해야할 신앙의 원형, 교회의 지향해야 할 목표, 영원한 생명의 길 등을 지시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범우주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권위나 체제, 전통 혹은 관습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전적인 개방성의 의미와 무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51) ‘범우적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장공의 발언은 꾸준히 이어졌다: 김재준,“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전집 16』,352-353;“존재현상의 저편”,『전집 3』,329; “교회의 뿌리”,『전집 18』,16; “문명인과 문화인”,『전집 3』,253-254; “최대의 계명”『전집 4』,288-289;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전집 18』,101.

이는 데리다의 ‘차연’을 연상시킨다. 우주만큼 극단의 차이가 무한하게 연기되면서 발생되는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범우주적’이라는 표현은 데리다의 차연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말로 그것이 완성되었을 경우에는 느낌이 달라진다. 데리다에게서 나타났던 계속 연기되는 차이들과 텅 비어 있는 기표가 ‘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안에서 하나로 모아질 것 같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52) 이 지점에서 장공과 데리다의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52) 장공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고 신앙인의 생활원칙이라 생각하고 있다: “범우적 사랑의 공동체가 땅 위에 건립되고 운영되고 성장돼야 한다고 비전을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비전은 낡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신 하느님의 설계도 안에 그려진 완성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골인할 때까지.”- 김재준,“새 하늘 새 땅”,『전집 9』,351.

[2] 장공과 데리다, 작별하다

장공과 데리다가 지녔던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낡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측면에서는 둘은 철저하게 서로를 향해 공명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과 전망을 향한 요청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지점에 이르러서 양자 사이에는 온도차가 드러난다.

둘은 공히 사회적 변혁을 원하고 기대하나, 데리다 같은 경우(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는 그것을 언표화하거나 규정하는 것에는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를 텅 빈 기표로 남겨둔 채 도래하는 사건을 주시하는데 반해, 장공의 경우(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그것을 데리다보다는 좀 더 분명히 명시화하고자 한다.

장공과 데리다 사이에서 발생한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해석학과 해체론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에게 있어 진리는 결코 텍스트 속에서 단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벨라 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서 국왕부처가 캔버스 상에서는 부재하지만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장공과 데리다 사이에 묘한 긴장이 발생한다. 장공은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데리다와 다르게 상대적인 것들을 통합할 방식이라든지, 각양의 해석들을 적절하게 가를 기준을 설정하고자 한다. ‘성서 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다양한 방법론을 추구하면서 축자영감의 전체성을 탈피하고자 했던 장공은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론에 입각해 나름대로 본인의 해석학적 준거점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공이 이러한 행보에 대해 데리다는 반대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장공처럼 근원적 진리로의 회귀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텍스트가 선사하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텍스트와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창들을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텍스트의 힘이고 해석의 작용이다. 결국, 데리다에게 있어 텍스트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에 대한 저항이고 해석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VI] 에필로그: 다시, 솟아나는 텍스트와 해석을 둘러싼 물음들

본 논문을 시작할 때 나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감상하면서 독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그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글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묻겠다. 두 번째로 바라보는 <라스 메니나스>에서는 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가?

이 질문은 텍스트와 관련한 질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텍스트는 다시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대들은 텍스트 뒤에 있는가? 속에 있는가? 아니면, 앞에 있는가?” “장공이 바라다보는 텍스트는 무엇이었고, 데리다는 왜 그렇게 텍스트로부터 도망치려 했을까?”

이런 질문들을 다시 던져 보지만, 나의 답변은 다시 미궁으로 빠진다. 이런 낭패감에 시달리고 있던 찰나에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그것이 텍스트 아닌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텍스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 상황과 조건과 문제들, 그러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해석의 갈등을 부추기고 정신적으로 가위눌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텍스트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텍스트론이란 우리에게 세계가 겪고 있는 변화와 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걸맞는 적극적 해명, 그리고 해방을 위핸 새로운 전략한 리듬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경계와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환대의 방식을 숙고케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라고 가르친다. 장공과 데리다는 텍스트가 지니는 이런 미덕을 알았던 사람들이고, 그 질문에 맞서 나름의 해법을 찾으려고 몸부림 쳤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 자신이 텍스트가 되었다.<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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