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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0회] 논평 / 주재용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8 17:54
조회
1212

[제10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논평 일시 : 2006년 6월 15일(목) 오후 5-7시

“만우ㆍ장공 신학의 유형적 특징비교와 신학교육에서 그 통전의 과제”에 관한 논평

주재용 박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경건과 신학연구소 소장)

[1]

오늘의 한신대학교(조선신학교)의 초석을 놓은 세 기둥이 있다면, 1939년 당시 미화 25만불에 해당되는 설립기금을 내 놓은 김대현 장로, 학교설립과 교육, 그리고 행정을 통해 신학교육의 정신적 초석을 놓은 송창근 목사, 김재준 목사 이 세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신학교육기관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 재정적 후원을 했던 초대 이사장 진정률 장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그가 기증한 토지 50만평이 지금도 있음). 이들은 "한국교회의 재력으로 세우고 운영하려는 자립정신"에서 이 학교를 시작했으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학교육"을 그 교육이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수 십년간 한신대와 기장은 장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교 66주년을 맞이하면서 '진보 한신'을 특집으로 한 최근의『한신 소식』(2006, 봄호, vol.48)에서도 장공 김재준, 늦봄 문익환, 그리고 장준하 선생들만이 부각되고 있다. 한신대의 거의 모든 홍보물에서도 이 세 사람이 한신대를 대표하여 등장한다. 이들이 훌륭하고 존경받을 선배들이고 스승들인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의가 없지만 한신대의 신학교육 및 오늘의 대학교육의 정신적 기초와 그 발전에는 이 분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만우와 장공, 이 두 스승을 놓고 봐도 만우는 한신대와 기장에서 잊혀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단지 김경재 교수도 지적했듯이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사업회'와 '경건과 신학연국소'에서 그를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는 기장 교회 전체적인 차원의 후원을 받고 있고, 한신대에서도 후원을 받고 있지만, 만우를 기념하는 사업회나 연구소는 한신대에서 조차 후원을 받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학교에서도 장공 기념물은 계속되고 있지만 만우의 기념에는 생각이 없다.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 사업회'에서는 마지막으로 송우혜 작가에 의뢰하여 만우의 전기(傳記)를 금년 가을에 출판할 예정으로 있다.

만우에 대한 소홀함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 교수도 지적했듯이 첫째는 교수와 학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감화를 끼친 기간이 장공이 거의 50여 년인데 반하여 만우는 해방 후 약 5년간에 불과하였다. 지금의 한신대 신학과 교수들만이 아니라 지금 기장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목사들도 만우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논평자도 고등학교 시절 동자동 교정에 있던 성 바울전도교회(오늘의 서울성남교회)의 수요예배에서 한 번 뵈었을 뿐이고, 그의 애제자중 한 사람인 만수 김정준 박사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에 관한 책(지금 전집으로 출판되었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둘째는 만우가 한신대와 관계를 맺은 기간도 짧았지만, 그는 저술을 남길 시간적ㆍ정신적 여유가 장공보다 없었기 때문에 그가 남긴 저술은 장공에 비할 수 없이 적다. 총회에서 출판한 장공의 전집은 18권인데 비하여 만우의 전집은 2권에 불과하다. 그것도 둘째 권은 그에 관한 글들이다. 사실 만우는 미국에서 신학사, 석사, 그리고 1931년에 "유대사상에 근거해서 본 바울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그가 귀국한 후 한국교회는 그를 학문에 전념하도록 놔두지를 않았다.

오늘 한신대의 교육철학, 교수들의 교육에 대한 헌신적인(devotional) 컴미트먼트에 위기의식이 팽팽한 시점에(최근의 신학과 교수들의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만우․장공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색이는 '강좌'를 본 사업회가 마련한 것은 시기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평자가 소장으로 있는 '경건과 신학연구소'에서도 만우와 기장, 신학교육의 문제를 다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울성남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강연 중에 "신학교육자로서 만우"를 언급한 바가 있었다.

[2]

김 교수의 발제내용에 대해서 몇 가지 논평을 하려고 한다.

1) 김 교수는 우선 만우와 장공의 관계를『논어』의 말을 빌어 "군자는 화하나 동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p.1). 이 두 사람의 관계를 "형과 아우",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등 여러가지로 표현하지만(p.2), "군자화이부동"이란 표현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싸움은 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다름'과 '틀림'을 혼돈하지 않았다. 만우와 장공도 조신신학교에 관계할 때 의견 차이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뿐, '틀림'으로 보지 않았다.

전 대광고등학교 교목은 한국교회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고 배타적이고 사회갈등을 조장한다고 비판하면서 목사직을 반납하였다. 이 현상은 한신대, 기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 십년간 만우와 장공의 후세대들의 역사를 보면, "군자화이부동"의 관계 속에서 오늘의 한신대와 기장을 이룩한 두 스승의 정신을 그 후세대들은 거의 한번도 교육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소인동이불화'의 인간관계 속에서 패거리 싸움을 해 왔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우리의 스승들은 싸움을 하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교육에 헌신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소인동이불화'의 현실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안 만우는 거의 잊은 채, 장공만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장공만이 아니라 만우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2) 김 교수가 만우의 '복음주의적 경건신앙'에는 피어선성경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 있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한 점을 일깨워줬다고 생각한다(pp.5-8). 그러나 만우의 '복음주의'는 17-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운동, 영국의 웨슬리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나타난 복음주의이지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보수정통주의적 복음주의는 아니었다.

만우의 신학과 목회, 그리고 그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 프랜시스의 '성빈'(聖貧) 사상, '무소유의 기쁨', '자기 비움의 충만함'이 있었다. 이 사상의 실천에 그의 '외향형'과 '영웅주의'적 성격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장공이 '정중동'(靜中動)의 사람이라면 '동중정'(動中靜)의 사람이었다.

물론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장공에게도 성령에 의한 회심의 경험, 성빈의 흠모, 하천풍언의 사랑의 실천(p.8) 등이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모두 뜨거운 영성신학이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충실한 기독교 신학적 영성이 있었다. 김 교수도 영혼 내면의 중생체험이 두 사람에게 모두 있었다고 하였다(p.8).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3) 김 교수는 만우와 장공의 신학을 조심스럽게 분별하면서, 만우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신앙(전형적인 복음주의 경건신학)이 그 중심에 있는 반면에, 장공에게는 요한 신학적인 화육의 신학이 그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p.8).

만우와 장공이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격하고 회심의 경험과 생활신앙을 강조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특정 신학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신학체계로부터도 자유하는 신학교육을 강조한 사람들이지만(pp.8-10), 김 교수가 위에서 분별한 만우와 장공의 차이는 만우와 장공의 신학적 차이만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신학교육과 목회에서의 차이의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이 내용이 김 교수의 발제 (5)에서 구체적으로 논급되고 있다. 사실 만우는 1920년대에 예수를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만치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1930년대와 해방정국에서는(1948년) 교회의 중심을 하나님 말씀과 순순한 복음에 두게 된다(pp.14-15). 이것은 장공의 기독교 건교이념과 분명하게 다른 입장이다. 만우의 입장의 변화는 교회와 성직자들이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 보다 사회와 정치계의 권력지향적인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 차이에 대해서 김 교수는 매우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만우와 장공의 '차이'를 은폐하려 한다든가, 부정하려 하거나, 양자택일 할 것이 아니라 귀중한 (유산으로 생각하고)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만우와 장공의 입장을 일차적 자신의 견해로 받아드리되, 다른 견해도 잊지 말아야 두 사람이 추구했던 '복음주의적 경건신앙'이나 '개혁주의적 역사참여신앙'의 전통을 건전하게 계승할 수 있다고 하였다.

5) 김 교수는 이 결론을 만우와 장공의 유형적 특징을 신학교육에서 통전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김 교수는 (1)전문신학지식인 훈련교육형태에서 그리스도 품격형성의 영성훈련 교육체계로 전환, (2)예배공동체가 살아나야 하고, 예배를 연출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신학교의 예배시간에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 경험'을 하도록 변화되어야 하고, (3)만우의 '복음주의적 경건신학'과 장공의 '개혁주의적 역사참여신학'은 신학교육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동시에 살아있도록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빛의 원무'를 출 수 있다는 것으로 그 통전적 신학교육을 제안하고 있다.

[3]

우리는 김 교수의 이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 신학교수들의 회개와 성령의 체험, 그리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교육에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하고, 둘째는 신학과 신학교육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된다는 것이며, 항상 미래 교회를 위한 예언자적인 통찰력으로 개혁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매우 미안하지만, 자기 강의만 하고는 시간 강사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교수, 강의 이외에는 거의 모든 학교일에 불참하는 교수, 학교의 교육적 사명보다 밖의 일에 더 열성적인 교수, 학생들의 신학적․개인적 고민을 함께 하지 않는 교수, 목회자적 소명의식이 분명치 않고 봉급에만 관심이 있는 교수들로서는 김 교수가 제안한 신학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디지로그'(DOGLOG) 시대, IT의 시대에서 RT(relation technology)의 시대를 내다 보면서 신학교육을 하여야 한다면, 우리는 그 동안 한신대의 교육이 장공의 신학과 신학교육으로 일관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장공의 예와 아니오에서 학자적으로 물러섬이 없는 교육에서 예 속에 아니오를 담고 있고, 아니오 속에 예를 담고 있는 어찌 보면 역설적인 인간 교육적 신학교육에로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이것이 만우가 말하는 일즉다(一卽多)의 사상이었다. 만수 김정준 목사가 한신대에서 경건의 신학교육을 실천하려고 그렇게도 노력했음에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냉정하고 깊이있게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논평자가 교수와 총장시절에 수유리에 반(半) 또는 현대적 의미의 수도원적 신학교육의 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논평자에게서 중세 수도원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이 꿈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기숙사 건축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만우의 신학교육은 아카데미즘과 논리를 초월한 실천적 목회자로서 교육이었다. 결혼한 신학생이 여름방학에 기숙사에서 혼자 외롭게 남아 있을 때, 그를 찾아가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만우는 눈깔사탕 한 봉지를 사 가지고 와서 학생에게 주면서 집에 가서 둘만이 이불 속에서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이 그의 신학교육이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성남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사가 기도를 철학적 용어로 장황하게 하자, 기도 중지를 명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골교회에서 영수가 담배를 피우다가 만우를 보고 급히 담뱃대를 등뒤에 숨기자, 그 영수를 보고 등 디겠다고 하고, 그 다음 주일 예배에서 교인들에게 아무개 영수는 속병이 있어 담배를 피우니 교인들은 그렇게 이해하라고 해서 그로 하여금 담배를 끊게 하는 실천적․목회적 신학교육자였다.

만우가 일제 말기에 국민복을 입고 시찰경내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일경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위로와 격려를 한 일이 있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만우를 친일인사의 명단에 넣고 있지만, 그는 제자 목사들에게 난들 왜 이러고 싶겠는가? 은신수양이나 하고 싶지만, 내 하나 편하자고 교회와 양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옥중에서 고난 받는 친구들도 훌륭하지만…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현실 교회를 지키는 것도 목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나라도 이 꼴을 해야 다른 사람이 피해를 안 입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는 6․25 전쟁 중에서 다른 모든 교수들을 피난가게 하고 마지막까지 학교를 지키다가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이것이 만우의 신학교육자로서의 자세였다. 그는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학교 정문에 묻어 학생들이 내 시체를 밟고 다니도록 해 달라고 한 신학교육자였다. 그의 말이 지금 만우관 입구에 돌에 새겨져 있지만 몇 사람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개인과 교회가 처한 시대의 상황 속에서 만우와 장공의 입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일차적 자기의 견해로 받아드려야 할 때, 지금 한신대는 어느 견해를 일차적으로 받아드리고 다른 한편의 견해도 깊이 인지해야 하겠는가? 장공의 신학교육인가 아니면 만우의 신학교육인가? 이것은 김 교수가 반대하고 있는 양자택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신대는 장공의 입장을 일차적 자기의 견해로 받아드리고 온 것이 사실이고 그 선택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either/or'의 시대에서 'both/ and'의 시대로 가야 하는 시대이다.

아무리 통전의 과제를 주장한다해도, 그리고 한신대의 교육에서 만우 없는 장공, 장공 없는 만우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신학교육의 현실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갈 수 밖에 없다. 즉 '학문에서 경건'인가 '경건에서 학문'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의 영성은 경건과 교육, 학문(pietas and erudition)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시 한번 시기 적절하고 좋은 발제를 해 주신 김 교수에게 감사하고, 참고로 연규홍 교수의 장공에서 만우에게로 (『광야의 첫 사람들』, 경건과신학연구소, 2006, pp.205-222)는 김 교수의 발제와 함께 한신대의 신학교육의 방향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우리는 만우와 장공을 존경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반듯이 재해석을 통한 계승, 우리의 창의력을 통한 계승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우상화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