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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7회] 역사의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 / 연규홍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4 14:34
조회
1439

[7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5922() 오후 5-7

역사의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 -

연규홍 박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 교회사)

머리말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도 없다”(The Truth is rarely pure, never simple - Oscar Wilde).

최근 들어 우리 사회는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과거청산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해방된 지 60주년을 맞이하지만 한국 민족은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의 과거 잔재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이 반민족적인 행태들이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때로는 반민족 행위자들의 행태가 미화되어 애국자로 추앙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친일자가 아닌 이가 친일자로 매도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의 사실을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진실은 시공간의 사실의 토대 위에 서지만, 진실은 시공간을 넘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갖는 공간적 상황성과 전후의 시간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의 관련성을 제거하고 사실이 즉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배제한 역사실증주의적인 이해이다.

필자는 김재준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와 같은 실증주의 역사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김재준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 만의 역사적 사실성만을 가지고 본다면 분명 그 자신의 고백에서도 확인되듯이 그는 신사참배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사참배를 했기에 그는 당연히 친일파요, 반민족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는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김승태 목사는 김재준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였기에 “친일행적이 뚜렷하다”고 지적하고 “어떠한 변명으로도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다”1)고 말하였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최덕성 교수는 신사참배로 일제에 순응한 김재준 목사가 이끈 조선신학교는 태생적으로 “황국을 위한 학교였고, 신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2) 친일 교육기관이었다고 주장한다.

1) 김승태, “과거사 청산 안 했기에 사회 신뢰 잃어”, [뉴스앤조이(NewsnJoy)], 2005. 6. 24.
2) 최덕성, “한국기독교 과거사 무엇을 청산해야 하나?”, 한국기독언론협회, 제1회 기독언론 포럼, 2005. 5. 26., [교회연합신문], 2005. 6. 5., 그리고 그의 저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서울: 본문과 현장사이, 2000), p.299.

본 논문은 김재준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적 다양성을 전제하면서 “그 사실의 진실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역사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의 역사, 하나의 기억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김재준 목사의 신사참배에 대한 논의를 다음에서 몇 가지로 정리하고, 그에 대한 비판에 논리적 타당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토론하고자 한다.

[1] 김재준의 신사참배와 친일논의에 대한 주장

김승태 목사는 장공 김재준의 신사참배는 조선신학원 설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장공이 1936년 4월 평양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직한 것이 당시 교장이던 김항복의 신사참배 동참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말하며, 신사참배 강요를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 예배강요와 유(類)를 같이하는 것이었다”는 그의 초기 입장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원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부득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김승태 목사는 이와 같은 김재준의 입장 변화를 후에 그가 쓴 글에서 “주기철 목사 등의 저항은 역사참여라는 기독교 윤리의식에서라기보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종교적 계율준수”라고 폄하한 것을 비판한다. 더욱이 장공이 말한 해방 후 석방된 출옥성도 자신들이 스스로의 의를 과시하고 형제들과 유대를 파기한 율법적 공적사상이나 우상숭배 금지의 계율주의에 집착해서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이라는 언급을 강하게 논박한다. 왜냐하면 장공의 이와 같은 판단에는 “당시 상황을 무시한 것이며 더욱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떤 이유로든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3)에서라고 김승태 목사는 말한다.

3) 김승태, “돌아보는 기장 50년”『기장 50년, 돌아보고 내다보고』, 2002. 6. 3.

즉 김승태 목사의 비판을 정리하자면, 첫째, 장공 김재준은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했지만 신학교육을 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내심으로 거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였다는 것, 둘째, 그러면서 해방 이후 입장을 바꿔 신사참배자들을 역사참여의식이 없는 종교적인 우상숭배 금지의 계율적 입장이라고 비판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였다는 것, 셋째, 결국 장공의 말은 어떠한 이유로든 변명되지 않는 1930년대의 상황을 무시한 궤변이라는 것이다.

최덕성 교수는 김재준 목사의 신사참배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조선신학교 설립과 운영의 친일적 성격과 장공의 교회론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학적 요소를 비판하고 있다.4)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9회 총회록(1940년)에 조선신학교 설립에 관한 보고에 학교의 목적과 주요 과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5)

4) 최덕성, “고신교단 설립의 교회론적 기초”, pp.175-182.
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제29회 총회록』, pp.43-44.

1) 목적 : 본 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충량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2) 수업연한 : 당분한 3개년.
3) 주요 교과목 : 국민도덕, 국어, 국사, 구신약개론, 구신약신학, 교회사, 교리사, 종교철학, 조직신학,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영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

최덕성 교수는 위와 같은 설립보고서를 근거로 조선신학교는 그 출발부터 일제의 황민화의 도장으로 “황국을 위한 신도주의의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반민족적 친일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이다. “펄럭이는 일장기와 번쩍이는 일본도(刀)의 권위로 개교한 학교는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로 “재정지원을 다소간” 받아 황민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 대표적인 것이 경성노회와 더불어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여 교역자와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신일본의 건설을 인식시키고 황국신민학교로서 충성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1944년 졸업생의 증언을 들어 조선신학교가 황국의 충량유위한 신학생이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고 졸업을 보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신학교가 일제가 제공한 기회를 호기로 삼아 한국교회를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특히 신사참배를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불의한 권력 사탄의 힘 우상 앞에서” 그들과 타협하고 야합하는 배교의 전위대로 순일본 기독교, 곧 “신도교 신학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6)고 말한다. 그 역사적 근거로 최덕성 교수는 일본인 교수를 채용하여 국어(일본어), 국사(일본사), 국민도덕(일본도덕) 등의 교과목을 가르치고 제2대 이사장으로 마쯔모도 다따오(松本卓夫)를 비롯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를 선임하였다는 점을 열거하고 있다.7) 이 점은 김승태 목사도 동일하게 비판하고 있다. 신학교육의 장으로 교회 건물을 빌려주고 강사로 출강한 일본 기독교단 정동교회의 목사인 키요히꼬 같은 인물은 일본적 기독교와 종교보국을 선전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과, 조선신학교의 임원이나 교수, 강사 가운데 적잖은 부일 혐의가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에 오염되지 않은 신학교육을 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신학교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호응하여 평양신학교가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먼저 개교한 상황일지라도 조선신학교가 신사참배를 하며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교육이란 명분을 내걸고 개교한 것은 절대적 명분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덜 친일적인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변명도 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8)

6) 앞의 책, 최덕성, p.302.
7) 최덕성 교수는 이 점을『한신대학 50년사』에서 삭제한 것을 역사날조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후에 다른 글에서 논하고자 한다.
8) 김승태, “돌아보는 기장 50년”, p.8.

결국 이들의 비판점을 하나로 통합하자면 이러한 것이다.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것은 철저히 신앙의 본질을 포기하는 배교행위이며 민족배신, 즉 친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일제 종교정책에 호응하여 개교한 조선신학교는 일본 신도주의에 교회사 양성을 통해 내선일체의 신일본 건설을 위한 친일적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이다.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들의 비판점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다.

첫째, 김재준의 신사참배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요,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행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우상숭배인가? 그리고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신앙을 포기하고 일본신도주의로 개종하는 배교행위인가?

둘째, 김재준이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여 조선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한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명될 수 없는 반민족적 친일행위인가? 그렇다면 반민족적 친일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신사참배자들은 모두 반민족적 친일행위자인가?

셋째,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1940년 3월, 경기도지사의 학원인가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일본인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일본어, 일본사, 일본도덕 등을 배웠기에 민족 주체적인 신학교육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 주체적인 신학교육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일제 하에서 일본 교육자로부터 그리고 일본에 관한 교과목을 교육받은 것은 다 주체성이 없는 친일적 교육이냐는 것이다.

[2] 김재준의 우상숭배와 배교행위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신사참배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전략이었다. 재래적 민간신앙인 신도를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결합시켜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국민동원에 도구화한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종교적 성격 이전에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를 좀더 신학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말 그대로 신사참배가 한국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쓴 식민정책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신사참배를 통해 일제가 기독교를 비롯한 한국전통종교를 억압하고 일본의 천황제 신도교에 종속시켜 전시상황에 한국민족을 동원하고 애국심을 종교적으로 불러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만을 억압하고 기독교 세력을 박멸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따라서 위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신사참배하는 것을 배교행위라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리적 근본주의의 해석이요 반응이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교회 내에도 신사참배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나 교회공동체적 대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사참배는 과연 우상숭배행위인가? 아니면 국민의례인가? 신사참배를 하면 궁극적으로 배교행위가 되는 것은 왜인가? 신사참배를 단순한 국가의례라고 동의하자는 말이 아니다. 1930년대의 맥락에서 신사참배의 기원과 성격은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논의해야 한다.

(2)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국민의례로 받아들인 일부 적극적인 친일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교회와의 연합을 통해 종래의 교회를 떠나 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를 세우자고 한 것을 한국교회 전반의 모든 기독교인이 수용한 과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전부가 반대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순천노회의 신사참배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혹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교회공동체를 유지해 간 예도 있는 것이다.

(3) 신사참배의 문제는 식민정책이라는 성격 차원의 정치적인 사안이다. 이것은 교회에만 강요한 것이 아닌 타종교와 한국민족 모두에게 강요한 것이다. 따라서 삶의 총체적 현실로서의 정치의 영역은 교회생활의 영역보다 넓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치적 현안 문제들을 신앙고백적 차원으로 모두 수렴하여 종교적 의제로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대응에 미숙함을 뜻하는 것이다.9)

9) 종교의 개인적 영역과 정치의 공적 영역의 구분에 대해서는 윤해동,『식민지 시대의 회색지대』, (서울: 역사비평사, 2003), p.36. 참조.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김재준은 이와 같은 면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앞의 논리를 근거로 두 가지 입장을 가진다. 개인신앙에 있어서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적 요소를 가진다고 생각하여 1936년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스스로 사직하여 신앙고백적인 선택과 결단을 하였다. 그러나 1940년 피할 수 없는 마지막 공간인 북간도에까지 신사참배 강요가 밀려올 때 그는 이것이 갖는 정치적 차원을 함께 고려하였다고 본다. 모든 것이 강요되는 감옥 같은 식민지 사회 현실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적 순수성을 나만이 지키기 위해 도피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할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신사참배를 수용할 것이냐. 이 기로에서 김재준이 선택한 것은 제3의 길이었다. 그것은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의 종교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개인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도 훌륭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 비록 신사참배를 할지라도 교회의 공동체를 지켜 나가기 위한 순응의 노선을 성숙한 차원에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점에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는 차원보다는 기독교적인 역사의식과 참여윤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분리해 보는 것이다. 신사참배는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고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억압의례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여도 그것이 기독교에 대항하거나 기독교를 대체할 종교로서의 내용과 구성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신사참배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일제말기 조선신학원 역시 신사참배문제가 컸읍니다. 신사참배 안하면 무조건 학교 취소였읍니다. 이사장 함태영 목사께 의논했지요. 그랬더니 함 목사님이 ‘나도 올라가지…’ 해서 남산 신궁에 함 목사님과 함께 올라갔읍니다. ‘함 목사님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난 이렇게 기도했네, 어서 속히 이 남산에서 이 일본놈의 귀신을 쫓아버리고 여기에 예배당이 서게 해 주시오. 그리고 어서 속히 독립되게 하소서….’ ‘그럼 나도 그렇게 기도하지요.’ 그렇게 신사참배 기도(?) 하면서 신학교를 밀고 갔읍니다.”10)

10)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장공 김재준 박사의 회고”,『한국기독교사 연구』, 1985. 9. 20. 제5호, p.6.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간구하는 것은 그의 이중성이기보다 그의 역사의식을 단면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가 버린 것은 자기만의 순수를 주장한 그 의를 버렸고, 신사를 우상숭배로까지 두려워하여 크게 생각했던 공포를 버린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죽은 이념과 형식적 의례에 따랐다고 해서 그가 그의 뜻을 모두 꺾은 것은 아니다. 최성일 교수는 이 점에서 장공의 신사참배를 단순히 박해를 피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1)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전쟁포로와 같은 상황”12)에서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것은 김재준 자신만이 책임질 몫은 아니다.

11) 최성일, “일제박해 시대의 선교 유형에 관한 연구”,『신학사상』, 2005년 여름, p.216.
12) 김재준, “한국사회에 나타난 신교자유의 투쟁”, 김재준 전집 7권, pp.397-398.

우리의 바람과 요구를 단지 후대에 태어난 특권으로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역사적 평가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한계적 상황에서 신앙에 근거한 신학교육의 장을 새롭게 열고자 한 것이다.

[3] 김재준의 신사참배와 반민족적 친일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3․1운동 이후 한국 민족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국외에서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찾겠다는 항일무장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독립 역량을 길러 해방을 이루겠다는 민족계몽운동이다. 한국교회는 후자와 연결되어 민족 계몽운동으로 농촌계몽운동, 사회생활개선운동 등을 통해 독립 준비를 해 나갔다. 따라서 이때의 한국교회 민족운동은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무력투쟁을 하기보다는 생활개선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등 독립의 역량을 비축하기 위한 사회문화적인 개조운동과 교육활동에 치중하였다.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되는 1930년대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친일과 항일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보다는 친일과 반일의 중간지대에서 민족의 계몽과 생활개선 등을 통한 독립 역량의 육성과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커다란 민족운동의 노선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타협적 기독교 민족운동은 적극적 친일파로 하여금 친일노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재준이 신사참배를 한 ‘유보적 수용’의 교육활동이 과연 반민족적 친일행위이냐 하는 것이다. 위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란 정치적 행위를 종교적 행위로 집약하고 수렴한 종교유일주의와 달리 이것은 신사참배란 종교행위를 곧 반민족적인 친일행위로 연결시키는 확대된 일종의 종교적 보편주의이다. 신사참배를 했다고 해서 꼭 반민족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은 반드시 민족적인 것인가? 중세기 종교국가와는 다른 세속국가에서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다름을 전제하지 않고 종교의 사항을 정치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2)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선악의 이원론주의 못지 않은 이원론적 역사인식이다. 일제의 식민지 상황은 개인의 선택적 자유가 없음을 전제한다. 그러할 때 억압과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그들 모두를 친일 부역자로 매도한다면 애국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특히 1930년대 일본의 문화통치상황 하에서 친일과 반일 사이에 모순과 이중성을 내포한 타협적 민족운동 노선의 중간지대가 있다는 측면을 간과하는 것은 역사를 단순한 도식주의로 보는 오류이다.

(3) 신사참배 문제를 직접적인 민족적 문제로 연결시키는 것은 종교적 행위에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것이 결코 민족적인 행위가 될 수 없듯이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그것만으로 곧 반민족적인 친일행위가 아니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종교적 저항운동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민족적인 항일운동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김재준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1932년, 당시 국내의 상황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웨스턴 신학교까지 졸업하여 ‘출세’한 장공은 왜 식민지 하의 척박한 고국으로 돌아왔을까? 그리고 그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장공이 오래 전 그의 인생관과 민족관을 세웠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신학에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이 물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 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그래도 교육밖에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들에게 ‘혼’을 불어넣어 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 중, 고, 대학까지의 교육왕국을 세워보려고 마음먹었다.”13)

13) 김재준 전집 13권, p.84.

1920년대 말 미국의 경제공황은 장공의 박사과정 진학을 가로막았지만 그것이 그가 고국으로 돌아와야 할 절대적 이유는 아니었다. 누구의 후원도 없이 떠난 미국 유학이었던 것만큼 그는 그만큼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송창근, 한경직과 더불어 식민지적 조국의 미래를 위한 교육적 사명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미국 유학생으로 한국교계에 뚜렷한 지지인맥도 없고 오히려 선교사들의 경계를 받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의 참여이었다. 그가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사직하고 옮긴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이며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선교 초기부터 미국장로교회와 달리 일본 제국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캐나다교회가 설립한 은진중학교는 북간도에 흐르는 민족독립운동의 맥락과 연결되어 1930년대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장공은 이곳에서 민족혼을 불어넣는 교육과 더불어 민족을 계몽하는 개인잡지 <십자군>을 발행하였다. 1940년 조선신학교 개교에 장공의 참여는 결코 우연한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한 줄기인 민족계몽운동을 통한 독립 준비론의 한 형태로서 장공이 견지해 온 민족 주체적 신학교육을 실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1930년대의 민족운동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의 구조를 승인하며 그 내재적인 독립 역량을 배양하는 타협적 민족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신사참배라는 외부적 규제에 순응하면서도 내부적 민족운동을 해야만 하였던 그 이중적 복합구조를 단순히 1910년대의 민족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장공의 조선신학교 운영을 위한 신사참배 문제를 그의 생애의 단면만을 절단하여 반민족행위로 예단하고 일제의 회유책에 놀아난 친일행위로 평가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한 이들이 모두 반민족 친일분자일 수는 없다. 1930년대에 국내 민족운동이 타협적인 노선을 전제할 때 신사참배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저술활동을 통해 민족계몽과 독립역량을 고취한 이들의 민족운동도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일정한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장공은 이와 같은 면에서 신사참배를 하였어도 그는 결코 반민족 친일행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4] 조선신학교와 황민화 교육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하에서 신사참배와 근로노역을 하는 조건으로 개교를 허락 받아 운영되었다. 이와 같은 개교 시의 상황과 운영과정을 볼 때 조선신학교가 일제의 황민화를 위한 친일 교육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한국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군수품으로 징발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교회의 억압구조가 발생한 것이 이때이다. 식민지 하 일본의 근대화 수탈노선과 방향을 같이 해온 한국교회에는 1930년대에 들어 교회의 구조 내에 보수적 종교권력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교회 내의 다양성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교리체제를 가지고 진보신학사상과 교회의 개혁운동을 억압하였다. 특히 장로교회는 여권문제 논쟁, 모세오경 논쟁 등의 신학논쟁들과 함께 지역갈등에서 비롯된 교권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들의 지원과 교세 면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온 서북교권은 이 시기에 커다란 보수적 종교권력으로 부상되었다. 조선신학교 설립 배후에는 한 면으로 서북교권세력을 견제하며 한국장로교회의 개혁과 민족교육을 하고자 한 진보적 교계지도자들의 힘겨운 노력이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1932년에 초교파적인 적극신앙단을 통한 교회개혁운동이었고, 또 하나가 진보적인 신학교 설립운동으로서 조선신학교의 개교였다. 한국장로교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교역자의 수준을 일반 신도보다 조금 높고 선교사들보다는 낮게 하여 한국교회의 자치권(Self Governing)을 유보해 온 상황에서 신학교육은 주체적인 민족 교회 형성의 관건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권력과 함께 사상적 억압구조를 개혁하는 민족 주체적인 교회개혁운동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세 번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할 수 있다.

(1) 조선신학교 설립이 1937년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공백기를 이용하였다는 비판이다. 평양신학교의 폐교가 조선신학교 설립 진행에 다소 가속화 작용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변적인 요인일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적 교권세력화의 상황에서 개교의 기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개혁을 위한 주체적인 신학교육은 일찍이 1920년대 초반부터 준비되었다는 사실이다.14) 조선신학교 설립 문제에 인간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여과 없이 대입하는 것은 역사적 정황을 오도하는 판단이다.

14) 송창근, “교회발전에 대한 우리의 할 일”,『청년』, 제1권 3호, 1921. 5.

(2) 조선신학교가 그 설립목적에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 명시한 문구는 1930년대 신설학교 설립에 명기되는 공식 문구이다.15) 따라서 축자적으로 이 부분을 가지고 조선신학교를 일본 군국주의에 주구(走狗)역할을 한 교회사 양성기관이라 말한 것은 기록사실만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과장하는 것이며, 특히 “다소의 재정지원”이란 말은 설립보고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교과목만을 가지고 교육 결과를 재단하는 것은 교육주체를 빼버리고 교육과정을 무시한 환원주의적 평가이다. 오히려 교과목에 일제가 금지한 구약개론, 구약신학, 히브리어 등을 넣은 것은 일제의 교육지침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15) 김승태, <일제강점기 종교정책사 자료집(기독교 편 1910-1945)>,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p.301.

(3) 조선신학교가 태평양전쟁 하에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여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는 극한 상황에서 양식 있는 일본인 목회자를 교수와 이사장으로 세웠다는 것이 결코 민족 주체적인 교육내용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하 미국 선교사에게 배운 한국교회는 모두가 친미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반일적이라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한 반일이지, 일본 그 자체에 대한 반일은 아니다. 한국인 가운데 친일파가 있듯이 일본인 가운데 친한파가 있을 수 있다. 국적만을 가지고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에의 연대와 협력을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재는 것은 또 하나의 국수주의적인 시각이다.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장공 김재준의 이름이 한국교회에 알려진 것은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이었다. 물론 그 이전, <신학지남>에 게재된 글로 인해 박형룡과의 신학적 갈등과 선교사들과의 대립이 있었지만 형식적이나마 총회 앞에 공식 사과의 글을 발표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은 장공으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깊이 자각하게 하며 또한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교리적 근본주의의 신학풍토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 그리고 성장한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보수적 교권주의 세력 가운데서 그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교육의 갱신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한국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북교권 세력의 완강한 거부와 일제의 강력한 통제가 그것이었다. 김재준이 이와 같은 이중의 벽을 뚫기 위해 선택한 것이 형식적이나마 신사참배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교육을 할 수 있는 가능한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차적인 벽으로서 학교운영을 방해하는 보수적 교권세력들의 완강한 거부의 벽을 뚫은 것이다. 이것은 이차적으로 일제로부터의 간섭의 벽을 뚫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조선신학교가 일본 식민지 하의 민족 모순을 전제하면서도 먼저 교회 내의 보수적 교권세력과의 갈등과 모순관계를 풀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신학교가 민족 모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소극적 참여로 일제의 지시에 순응한 것이었지만 학생 중에는 박학수 열사를 비롯한 순교자 김은도 등16)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 신앙적 양심으로 생명을 바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은 조선신학교의 민족적 성격을 새롭게 규명하는 것이다.

16) 김재준 전집, 13권 pp.197-201.

장공은 경기도지사의 사설학원 허락을 받아 어려운 재정 속에서 신학교육을 지속해 나갔다. 조선 혁신교단이 만들어져 한국교회의 주체성이 소멸될 때도 장공은 홀로 조선신학교를 지키며 성서의 유대주의를 배격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하에서 그는 구약 전공자답게 구약성서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교권세력들의 비난과 공격 속에서도 문을 닫지 않고 조선신학교가 해방을 맞이한 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장공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동안 조선신학원은 폭풍의 경랑 속에서 한 잎 낙엽같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침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같이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해방될 때까지 삼회에 걸쳐 졸업생을 냈다.”17)

17) 위의 책, p. 235.

김재준 목사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정치를 잘 안다면 보수적 교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일본정부당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신학교육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제3의 길로서의 “좁은 길”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이 식민지 하에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친일분자로 호의호식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목숨을 버려 순교자가 될 수는 없는 상황에서 그는 도피의 길이 아닌 참여의 길을 택하고18) 한 시대의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육에 나선 것이다.

18) 김경재, 『김재준 평전』, (서울: 삼인, 2001), p.73.

맺음말

친일 인명사전을 출판 중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 30일 제1차 친일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 중 종교계에 만우 송창근 목사가 들어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만우와 뜻을 같이 해온 장공 김재준 목사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에 다소 위안을 받았다. 해방 후 60년 동안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서, 그리고 그 가운데 민족의 양심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로서 부일협력을 해 온 과거에 대해서는 철저히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왜곡, 은폐, 축소 또는 금기시 된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에 따르는 적절한 조치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청산은 과거규명에서 끝날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통한 오늘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에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역사 사실을 넘어 해석의 진실을 찾는 차원이 있는 것이다. 단지 오늘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19)으로 김재준의 신사참배를 친일행위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죽은 자라고 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마구 비판하는 것은 과거사의 청산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오류와 상처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오류를 시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거사 극복의 방법은 무엇인가? 신사참배나 친일행위를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한 시대의 불행으로 보고 비판보다는 연민의 시각으로 과오를 지적하고 그 책임을 추궁함과 더불어 그 과오에 대해 함께 아파해야 한다. 결코 처벌과 단죄를 통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찰과 관용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미래 지향적으로 해결해 가야 한다.

19) 안병직, “과거청산과 역사서술”, 『세계의 과거청산』, (서울: 푸른역사, 2005), pp.411-413.

미국의 역사가 라카프라(D. LaCapra)는 말한다. 신사참배를 비롯한 고문, 학살 등의 충격적 경험은 일종의 정신적 외상(trauma)을 남긴다. 과거 규명과 성찰 작업은 이 외상의 치유과정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 불행한 역사의 경험에서 피해 및 가해의 당사자가 되는 심리적 전이(transference)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사실 규명은 과거의 충격적 경험의 재현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을 해소하려면 심리적 전이와 재현의 과정을 전제로 하지만 그보다 역사의 사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즉 진실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역사의 사실(경험)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여러 경험과 비교를 통해 그에 대한 객관적 입장을 취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해석적 시도를 하여 진실을 추구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20) 오늘 김재준의 친일 논의의 핵심 사안인 신사참배 문제가 일방적인 매도나 흑백논리에 의한 심판이 아닌 합리적 비판과 성찰의 방식을 통한 화해와 관용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사실의 규명작업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 D. LaCapra,『History and Memory after Auschwitz』,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 London, 1998), pp.43-72. 180-210, 안병직, 위의 글, pp.35-37에서 재인용.

우리는 김재준을 성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도 허물이 있고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것은 허물과 단점을 가진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모순에 찬 이 땅 위에서 시대적 소명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고난과 자기 희생의 길, 즉 제3의 길로서 “좁은 문”(마7:13)을 통한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