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6회] 장공 김재준의 신학여정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 / 정종훈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4 12:17
조회
1292

[제6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일시 : 2004년 12월 2일(목) 오후 5-7시
장소 :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효촌관 세미나실

장공 김재준의 신학여정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

정종훈 박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 기독교윤리학)

[1] 문제제기

오늘 우리 사회에는 교인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많지 않으며, 교회는 많으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해명하고, 실행하기 위해 기독교윤리적인 과제를 긴급히 요청받고 있다.

한국교회사의 한 획을 그은 장공(長空) 김재준은 한국 교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부끄러운 현실을 성찰하고, 기독교윤리적인 과제를 설정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김정준의 말대로 “보수와 진보, 어느 하나에도 자기 발을 붙이지 않는 진보적 보수주의, 보수적인 진보주의 사상을 글귀마다 펴나가는 폭넓은 진리의 탐구자, 신앙과 윤리, 교회와 사회, 신학과 철학, 전통과 혁신의 테두리를 자유스럽게 넘나드는 자유의 탐구자, 이런 진리와 자유에서도 높고 깊고 폭넓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1) 김용복의 말대로 “그의 사상은 개혁의 동력이며, 그의 역사참여 행동은 역사 변혁의 횃불”로서 “그의 신앙과 지성과 역사참여의 삶은 한국 민족사의 한복판에서 증거된 복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

1)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p.1. 장공전집 간행에 부치는 글
2)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서울: 삼민사, 1984), p.412.

김재준 자신은 기독교윤리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이익보다 공의를, 물적 소득보다 인간적 존엄을 앞세우는 것으로 이해했다.3) 그는 기독교를 최고의 윤리적 종교라고 말하면서 개인윤리만이 아니고 사회윤리야말로 현대의 요청이라 주장했다.4) 또한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중 이기주의를 지적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현세 복락주의, 내세 복락주의, 기계주의 등과 결합하면 원시 종교로 타락한다고 경고했다.5)

3) 김재준, <고토를 걷다>(서울: 선경도서 출판사, 1985), p.132. 김재준의 글에는 하나님과 하느님이 혼용되고 있고 후기에는 거의 하느님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4) Ibid., p.214.
5)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서울: 삼민사, 1984), p.133.

김재준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란 역사 안에 보냄 받은 존재로서 역사 안에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 부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지에 충성해야 하는 존재이다.6) 때문에 기독교인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우리 생활의 각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책임 있게 봉사해야 하며, 이 점에서 기독교윤리는 사회 한가운데서 적용되는 응용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재준의 기독교윤리 이해를 통해서 개인윤리는 사회윤리의 빛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개인윤리는 언제나 사회윤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분명한 방향을 발견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김재준의 신학여정을 살핀 후 그의 기독교윤리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로 분석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삶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려는 데 있다.

6) Ibid.

[2] 김재준의 신학여정

신은 절대적이지만, 신학은 절대적일 수 없다. 신학은 시대와 사상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이미 수립된 신학이라 할지라도 다시 무너지고 새로운 신학으로 수립된다.7) 김재준 역시 ‘시대의 아들’로서 신학의 관심과 강조점을 학문의 노정과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신학과 윤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순례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7)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신학사상 제50집(1985년 가을호), p.249.

2.1. 청산학원 : 자유주의

김재준은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회심한 후 만우 송창근의 주선으로 일본 청산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공사장 인부로부터 잔디깎이, 유리창닦이, 곳간정리 등 닥치는 대로 용돈을 벌어가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당시 그는 신학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목사가 될 생각은 더군다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보다 문학에 관심이 있어 <톨스토이전집>, <도스토예프스키전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참회록>,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흑기사>, 명치시대 백조파 작가들의 작품 등 많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고, 스스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했다.8)

8)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서울: 삼민사, 1984), p.249.

그러나 그는 청산학원의 자유로운 학풍 속에서 마음껏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후에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고수했던 그의 입장을 배태시켰다. 이때 그의 마음에 들었던 선생은 ‘히야네’ 교수였다. 히야네의 전공은 비교종교학으로 ‘세계종교사’, ‘일본종교사’ 등의 방대한 저서를 냈는데, 화한양(和漢洋) 세 학문을 자유로이 넘나든 분이라고 그는 이해했다.9)

9) 김재준, <범용기>(서울: 장공 자서전 출판위원회, 1983), p.68.

김재준은 청산학원에서 신학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정립 이후에 비로소 신학에 대한 흥미와 사명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가 정립한 신학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나는 신학함에 있어서 그것이 학으로서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요소를 더 많이 앞세워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있었다.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과의 주체적인 응답일 것이요, 무슨 원리원칙이거나 도덕 교훈이거나를 앞세울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학과목들에 대해 반발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 그러나 연륜이 생김에 따라 좀더 완숙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신학이 객관화, 물상화의 과정을 밟아 다시 인격적, 주체적인 생명에 화신하여 하나의 고백으로 선포되는 때 그 신학은 학문이면서도 학문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발언으로 선포되는 것이며, 그것은 창백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피와 살이 꿈틀거리는 예언의 외침으로 된다는 그것이었다.”10) 필자는 김재준이 청산학원에서 정립한 신학의 예언적 의미가 오늘 우리의 신학에도 그대로 유효할 뿐 아니라, 요청되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10)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pp.431-432.

2.2. 프린스톤 신학교 : 보수주의

청산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끝낸 김재준은 윤치호 선생과 만우 송창근의 도움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했다.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그는 주로 메첸(Gresham Machen)의 강의를 택했는데, 메첸은 근본주의 신학의 투사라는 의미에서 인기가 있었고 강의도 명석했다고 보았다.11) 그가 메첸의 강의를 주로 택한 이유는 청산학원이 거의 극단적 자유주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극단적 보수주의를 알고자 했기 때문이라 했다.12) 훗날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방향을 재측정함으로써 새로운 자극과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근본적인 것과 시대적인 것, 계시와 문화의 분간을 혼동하지 않고, 언제나 시대에 앞서면서 시대를 포섭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서를 다시 보자는 노력 - 그 비슷한 방향이었다.”13)

11) 김재준, <범용기>, p.85.
12)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p.250.
1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p.432.

아마도 그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 교계에서 근본주의적 정통주의와 신학적으로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근본주의의 실체를 깊이 경험하고 그 한계를 분명히 깨달은 데 기인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는 청산학원과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순례에 대해 “내가 1925년 이래 일본청산학원에서 공부한 때는 자유주의 신학이 전성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졸업할 때 나 자신은 자유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마를 부딪힌 것 같은 느낌으로 이것을 지양할 길을 찾아 고민하였습니다. 그 후 곧 미국 프린스톤에 가서 메첸 박사의 강의를 열심으로 들었습니다. 그 심경과 생활태도와 행동규율 등을 보았습니다. 많은 배움이 있었으나 그곳을 떠날 때 나는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이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발악하는 고민상을 여실히 보았습니다”14)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신학순례에 통전적 조화를 위한 새로운 순례의 여정이 있어야 할 것을 암시했다.

14)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81.

2.3. 웨스턴 신학교 : 그리스도 중심

김재준은 역시 만우 송창근의 권면으로 프린스톤을 떠나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로 갔다. 그는 미국생활도 익숙해진데다 만우 송창근과 같은 방 생활을 하게 되어 ‘Everything O.K.’를 느끼며 웨스턴 신학교 생활을 시작했다.15) 그러나 그는 청산학원과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순례를 경험한 뒤인지라 이른바 학(學)을 한다고 자부했지만, 학(學)보다는 상상이 앞서고 기록이나 글자보다는 인간 자체의 신비한 세계가 더욱 유혹했으므로 학(學)에 몰두하지는 못했다고 했다.16) 그가 이해한 웨스턴 신학교의 학풍은 학문적인 진실과 목회적인 경건을 겸한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구약을 전공한다는 생각으로 히브리어 시간을 모조리 택했고, 그밖에 ‘마이너’로 조직신학, 신약개론, 교회사 특강 등을 택하여 공부했다.17) 졸업할 당시 그의 성적은 B+가 하나 있었을 뿐 모두 A학점이었고, 히브리어에서 특별상을 받을 만큼 구약에 열심이었다.18)

15) 김재준, <범용기>, p.91.
16)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pp.432-433.
17)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p.252.
18) 주재용 편집,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 풍만, 1986), p.25.

그 후 김재준은 귀국하기 전에 한국에 있는 어느 선교사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회답에서 우리는 웨스턴 신학교에서 다듬어진 그의 신학적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선교사는 김재준의 신학적 입장이 근본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를 물으면서 근본주의라야 취직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회신했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19) 여기서 우리는 김재준의 신학이 특정 신학에 종속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신학으로서 사분오열된 한국의 장로교를 통합할 수 있는 신학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19) 김재준, <범용기>, pp.96-97.

[3] 김재준의 생활신앙

장일조는 김재준의 신학을 삶의 신학이라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활신앙이라는 중심개념이 없었다면 우리가 김재준의 신학을 하나의 대표개념 속에 집약적으로 표현할 언어를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개념이야말로 김재준 신학의 본질을 드러내고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의 앞뒤를 연속적으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의 주변과 중심을 서로 구심점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개념은 종교와 문화와 정치의 서로 다른 차원을 무리 없이 연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20) 이처럼 김재준의 신앙과 윤리적인 삶,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을 연결하는 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활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 장일조, “김재준의 사회윤리사상", 신학사상 제50집(1985년 가을호), p.493.

3.1. 생활신앙의 개념

우리는 김재준이 말하는 ‘생활신앙’의 개념을 정리하기 전에 생활신앙과 방향을 달리하는 신앙생활의 한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재준은 우리가 신앙생활이라 할 때 경제생활, 정치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 등에 덧붙여진 생활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기 쉽다면서, 액세서리로서의 신앙생활은 아무 위신도 명령권도 없기 때문에 불편하면 언제나 버릴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21) 그리고 기독교의 ‘영원한 생명’이란 표현은 ‘죽은 다음에 천당가는 내 영혼의 영원한 복락’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려서 대사회적 책임이나 세상생활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등한히 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의 삶에서 유리되거나 무관심하게 될 때, 그 삶은 확실히 생명적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22)

21)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p.356. 그는 생활신앙과 신앙생활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말로 생활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22)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229-230.

또한 김재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관념적인 믿음, 이성적인 인정에 불과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신앙은 교리에서 싹터서 생활에서 열매 맺는다. 생활 없는 믿음은 열매 없는 나무다. … 신앙은 멀리 바라보는 무지개가 아니다. 그려진 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호흡보다 더 긴박하고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하나의 현실이다. … 생활이라면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문화 무엇이건 우리 생활형태에서 제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활화한 신앙이란 생활의 전 부분을 포섭한다. 종교가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것은 현대인이 만들어 낸 가장 공교한 기만이다.”23)

2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16-17.

따라서 김재준은 현존의 기독교가 너무 경화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신앙생활이라는 과거의 방향에서 생활신앙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24) 우리는 그가 잘못된 방향의 설교가에 대해서 규정했던 말을 지금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배우는 상상을 현실같이 연출하나, 설교가는 현실을 상상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를 살지 못한 종교가이기 때문일 것이다.”25) “좋은 이론과 좋은 생활은 다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그것이 생활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로 때우려는 습성이 생깁니다. 특히 설교자의 경우에 그렇습니다.”26)

24)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176.
25)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50.
26)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77.

우리는 김재준이 신비경험의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을 더 강조했던 이유가 생활신앙의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부여되는 건전한 신비경험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자기 심령과 하나님과의 직통만을 즐기려는 비역사적 신비경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없고, 신비경험을 자랑하는 지도자들은 신비경험을 상품 삼아 더 많은 이익을 거두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기독교에서 이탈한 신비경험은 선을 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악마의 도구이며 자기도취의 아편”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27)

27) Ibid., pp.351-352.

그렇다면 김재준이 말하는 생활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신앙과 생활, 생활과 신앙의 긴밀한 통합이다.

“우리의 삶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모든 부분이 불가피적으로 얽혀 있다. 여기서 초연할 수도 없고 도피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행동한다, 믿음으로 산다 할 때 그것은 모든 생활 부분을 신앙 안에 통합하는 것이요, 신앙은 모든 생활 부분을 통하여 고백되고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다.”28)

28)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245f.

둘째로, 교리와 신비적 영교, 그리고 사회적 실생활의 조화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생활신앙]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교리요, 둘째는 신비적 영교요, 셋째는 사회적 실생활이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임과 동시에 서로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너무 극단으로 고조하는 때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변태가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악마에게 틈탈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다.”29)

29) Ibid., p.19.

셋째로,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드러나는 일관성이다.

“평신도의 신앙생활[생활신앙]은 주일예배가 6일간의 직장생활에서의 봉사로 구현되는 데서 실질화한다. … 평신도의 종교[생활신앙]는 시간의 문제에 있어 7일 중 1일간의 종교가 아니라 교직자와 마찬가지로 전 시간의 종교인 것이다.”30)

30)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157.

넷째로, 수난과 부활의 변증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만민의 죄를 속하시고 부활에서 영원한 생명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생명에 동참한 자로서의 약속을 또한 믿고 있다. … 죽음을 극복한 삶만이 참생활 건설의 신앙을 형성한다. 생활종교[생활신앙]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생명의 샘터를 찾는다. …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삶, 죽음을 삶의 권내에 포함시킨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 안에서만 생활의 참건설이 가능한 것이다. 순교자의 모습, 고난에서 찬양하는 삶은 부활에서 오는 진정한 생활종교[생활신앙]의 모습이다.”31)

31)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124.

3.2. 생활신앙의 전거

우리는 김재준의 ‘생활신앙’이 무엇을 전거로 형성되었고, 발전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그가 즐겨 인용하는 성서 구절에서 기인되는 전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엡 1:21).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고 그의 안에 선다”(골 1:1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 김재준은 이 성서 구절들에 근거해서 이 땅의 정권 따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되어질 까닭이 없는 것이며, 역사는 절대주권 앞에 반드시 심판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역사에 무관심하여 스스로 초연을 자랑하는 것은 게으른 종으로서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2)

32)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196.

또한 김재준은 “사흘째 되는 날에”란 글에서는 다음의 성서 구절을 인용했다: “바로 그때에 어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 계셔야 하겠습니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 나의 일을 완전히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눅 13:31-33). 이 성서 구절에 대한 김재준의 해석을 볼 때, 이 구절 역시 생활신앙을 위한 중요한 성서적 전거라 할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 하고 무덤을 헤친다. …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33) 이 글에서 김재준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되는 순교자적 생활신앙은 바로 부활의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3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431.

둘째는, 김재준 자신이 이해한 역사참여의 신학에서 기인되는 전거이다.

(1) 김재준은 히브리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사건들을 볼 때 하나님의 설계는 언제나 역사적이었음을 지적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의 주였다. 그의 행동목표는 인간 자유의 완성이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하여 역사 속에서 주격으로 일하신다. 예언자들의 심정 속에 있는 말씀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이었다.”34)

34)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468.

(2) 김재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유사한 방향을 보면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는 직접 사회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아픈 곳을 직접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라는 말로 가르쳤지만, 그것은 우리 편에서 하는 말이요,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는 역사적 예수임과 동시에 역사적 그리스도인 것이다.”35)

35) Ibid.

(3) 김재준은 사랑은 역사 가운데서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역사나 종말까지의 역사적 기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없다. 다만 우리의 현실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역사 방향에 참여하여 그의 역사행위에 응답하며 제자직에 충성할 것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불신성한 세속이라 하여 우리 생활에서 배제한다면 무엇으로 그리스도 사랑을 표시하며 무엇으로 이웃사랑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36)

36) Ibid., p.471.

셋째는, 김재준의 하나님 신앙에서 기인되는 전거이다.

“우리는 창조주시며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이 세상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하늘 위나 하늘 아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을 재확인한다. 그러므로 정치, 경제, 과학, 철학, 예술, 문화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37) 이는 기독교윤리의 주요한 입장인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을 하나님에게 적용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37) Ibid., p.195.

넷째는, 김재준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 자체로부터 기인되는 전거이다.38)

(1) 기독교는 창조주시요 온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 ‘인간들의 사회’를 먼저 찾아오심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2) 기독교는 선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엄숙히 이행하는 윤리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3) 기독교는 백인, 흑인, 인도인, 한국인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개방된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4) 기독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영원히 살아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온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38)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p.191-195.

김재준의 기독교 이해에 근거해 볼 때,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전통과 개신교가 획득한 신앙의 자유를 따라 우리 삶의 모든 자리인 이 세상에서 생활신앙의 윤리를 지니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39)

39) Vgl.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257.

3.3. 생활신앙의 현장

김재준은 세상을 향하여 나팔 불기는 쉬워도 세상 속에 들어가 사랑으로 종노릇하기는 어려우며,40) 입에서 음미할 때는 꿀같이 달콤한 것이 진리의 말씀이나 그것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소화시켜 삶의 기록으로 몸에 섭취하려는 것은 달콤한 낭만이 아니라고 말했다.41)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초월과 신비로 가득한 산 위의 신앙으로부터 생활 한복판에다 십자가를 세우려는 산 아래 신앙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제안했다.42)

40) Ibid., p.251.
41)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285.
42) Ibid., p.61.

또한 김재준은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세속을 위하여 설립된 것이며,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끼리의 내향적인 ‘게토’사회를 만들고자 기독교인 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개방하고 세속에 들어가 세속과 함께 또 세속을 위하여 모든 선한 일을 도모하고자 기독교인 된 것이라 말했다.43) 그리고 그는 하늘이란 우리가 가고자 원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고장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여기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 안에서 사는 생활이라고 말했다.44)

4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p.345.
44)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255.

우리는 김재준이 말한 생활신앙의 현장이 바로 여기서 경험되는 우리 삶의 역사현장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생활신앙의 현장과는 반대방향을 취하고 있거나 생활신앙의 현장에 소극적인 사람들이 없지 않은데, 김재준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무섭게 경고했다: “어떤 독실한 교회인의 생활을 보면 매일 가정예배를 보고, 새벽기도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연보도 남하는 것만큼 하고, 아무 파렴치죄를 범하는 일도 없고, 흠 없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일반 사회의 되어 가는 일에는 영리하게 적응하는 정도에 머물고 적극적인 참여는 안 합니다. 학생들이 억울하게 잡혀가서 병신이 될 정도로 얻어맞아도 그 학생을 위하여 한마디 대변도 하지 않습니다. 노무자들이 유례 없는 저임금으로 12시간 혹사를 당한다 해도 그 기업주에 대하여 한 번도 충고하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가 자기 본위적이기 때문에 직접 내가 당하지 않는 한 내 알게 뭐냐 하는 교회이기주의, 개인이기주의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활과는 정반대의 생활양식입니다. 기독교 신자로서의 그는 실질적인 이단자입니다. 영웅은커녕 속인도 못되는, 권외 인간일 것입니다.”45)

45)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p.80.

이제 우리는 김재준이 말한 생활신앙이 표현되어야 할 현장은 어디인가를 세분화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현장이다.

“크리스천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소신을 갖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가장 큰 작용을 하는데 거기에 책임 있는 발언을 하지 않고 책임사회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46)

46)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356.

둘째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전체로서의 제도이다.

“빈곤과 천대에 희생되는 대다수의 인류를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와 권력에서 구출하기 위한 전면적이고 총력적인 공방전을 시도해야 하겠습니다.”47)

47)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p.259.

셋째는, 오는 사람만을 상대하기보다는 이제는 오는 사람, 온 사람을 다 데리고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교회이다.48)

48)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154

“교회갱신이란 것은 다만 교회 안에서만 논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교회생활은 세상과 관련된 생활이니만큼 그 갱신도 세상과의 관련에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49)

49)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154.

넷째는, 살아 있는 신앙으로 역사를 변혁해야 할 인간실존이다.

“그리스도 형성의 역사 안에서 참 인간이 참 인간다운 인간역사를 이루게 된다. … 역사변혁 속에서 인간변혁의 실적을 거두려는 방향은 불가피하다.”50)

50)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471.

앞에서 우리는 김재준이 말한 생활신앙의 현장을 구분해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 없으며, “기독교 신자 모두는 전적인 인간생활, 즉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생활 전 부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정신을 성육시켜야 한다”51)는 그의 말대로 우리 삶의 모든 자리가 예외 없이 생활신앙의 현장이라 말할 수 있다.

51) Ibid., p.154.

3.4. 생활신앙이 요구하는 삶의 자세

이제 우리는 김재준이 생활신앙의 현장에 임하는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제안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생활신앙은 봉사의 자세를 요청한다. 우리는 진정 사회 전체가 내 안에, 내가 그 사회 안에 있어 몸과 지체처럼 하나의 생명체로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필연과 의무감에서 겸손하게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52)

52)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271.

둘째, 생활신앙은 순교자의 자세를 요청한다. 우리는 민중에게 타살된 순교자의 씨앗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순교자의 정신을 사회에 계획적으로 작용해서 갱신의 활력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53)

53) Ibid., p.419.

셋째, 생활신앙은 세상 욕심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요청한다. 기독교인들이 역사에 책임적이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세상 욕심에 집착하지 않아야 세례 요한처럼 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54)

54)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38.

넷째, 생활신앙은 말씀과 빵을 조화시키는 자세를 요청한다. 말씀 없는 빵은 인간을 물건으로 만들어 비인간화시키고, 빵 없는 말씀은 인간을 역사에서 유리시켜 유령화함으로써 역시 비인간화시키기 때문에 말씀과 빵은 동시에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55)

55) Ibid., pp.232-233.

다섯째, 생활신앙은 현실 지향의 자세를 요청한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진리도, 우리의 신학도 모두 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56)

56)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68.

여섯째, 생활신앙은 인접 학문, 특히 사회과학과 대화하는 자세를 요청한다. 우리는 우선 현대사회 자체의 구조와 현실태를 연구․파악하고 그 정황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발견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윤리적 적응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57)

57)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165.

[4] 생활신앙과 기독교윤리

4.1. 기독교윤리의 출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재준은 기독교윤리가 내가 계명을 준행한다는 I-it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한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독교윤리는 I-Thou의 인격적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면서,58) 신앙은 개인인 ‘나’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너’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에 대한 ‘예!’라고 규정했다.59)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다만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신임, 숭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라는 말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라는 말로 끝을 맺지 못하는 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요 ‘예수인’이 아니다.”60)

58)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158.
59)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203.
60)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171.

김재준에 의하면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자기 성격으로 화육한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은 그분의 생활기록, 즉 삶에서 알 수 있기 때문에,61)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주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재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이해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61) 김재준, <고토를 걷다>, p.126.

(1) “그리스도와 인간해방”이란 글에서 김재준이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에 시달린 사람들을 정상적으로 고쳐 주심으로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리스도는 걱정과 불안과 절망 등 실질적 허무에 빠진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그들을 사랑의 십자군으로 만드심으로써 탐욕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개인과 전체적인 인간사회가 세모꼴을 이룬 완전한 공동사회 ‘하나님의 나라’로 인간을 해방시켰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가치인 하나님의 의, 인간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도는 종말에 실현될 새로운 인간 실존의 ‘처음 익은 열매’로 부활하심으로써 인간해방을 완성시켰다.62)

62)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p.450-452.

(2) “기독교적인 인간상”이란 글에서 김재준이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원래의 인간과 실존의 인간을 알았다. 그리스도는 수난의 종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동일화함으로써 인간에게 봉사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상충되는 인간의 일들에 화해의 중보자로서 봉사했다. 그리스도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창조주의 영광을 예배하는 화해의 기쁨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주가 되시며, 그 안에서 전통과 창조가 함께 자라나고 있다.63)

6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p.436-441.

(3) “우리가 예수를 보고자 하노라”란 글에서 김재준이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시골사람이었다. 시골사람을 낮춰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노동자였다. 노동자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인간 - 특히 가난한 인간, 병든 인간, 천대받는 인간, 소외된 인간을 좋아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까지 인정한 유명한 교사였다. 지식만을 전달한 교사가 아니라 몸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가르친 생활교사였다. 예수는 하늘의 신비, 하나님과 그의 경륜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계시자였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인간들 가운데 오셔서 자기를 보여 주시는 사랑의 계시자로 화신하시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다. 예수는 철저한 승리자였다. 공중에 권세 잡은 악령과 광야의 마왕은 졌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살았다. 예수는 속량자였다. 창세 이래로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지은 죄, 지을 죄, 그리고 그 죄과와 죄벌을 대신 짊으로써 자신을 속죄의 번제물로 불태웠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를 만날 때 하나님의 나라에 입적하는데, 그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64)

64)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pp.170-175.

(4) “성육신”이란 글에서 김재준이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종교의식, 제도, 계명, 율법 등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그 주인이 되게 하셨다. 예수는 인간을 도덕률 이상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성속, 귀천, 빈부 겉치장과 상관없이 인간을 높이셨다. 예수는 여성, 어린이 등의 생물학적 사회적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셨다. 예수는 사회생활의 모든 차등을 넘어 인간 차별을 해소시켰다.65)

65)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p.399-404.

우리는 김재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앙고백하느냐 하는 것이 자신들의 윤리적인 삶의 내용을 결정하는 출발임을 알 수 있다.

4.2.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

김재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를 정의하기를,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를 우리의 혼과 역사의 온갖 일들 안에 형성해 가는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핵심적 생명이라고 했다.66) 그는 신앙의 출발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위대한 만남이라면서67)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혼과 생활 안에 실체화해 가는 크리스천의 경우에만 참 ‘크리스티아누스'라고 했다.68) 그는 교회가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자부한다면 교회는 그 사고나 생활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닮아야 하는데, 사랑으로 산 그리스도와 달리 형제끼리 미워하고, 죽기까지 봉사한 그리스도와 달리 지배욕으로 지배하려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반문했다.69)

66) Ibid., pp.449-450.
67)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p.281.
68)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p.222.
69)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261.

그러므로 김재준은 우리의 생활목표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우리의 제1차적 관심이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우리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이며, 우리의 영광이 그리스도를 빛내는 것이며, 우리의 사업이 복음의 증언인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부로 삼는 생활이라고 했다.70) 그는 만약 그리스도의 속죄행위를 모든 것을 단번에(once for all)라는 식으로 이해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시질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윤리적으로 배은망덕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71)

70)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p.247.
71)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p.240.

이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삶을 닮아야 할지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섬김의 봉사와 화해의 길을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한 것과 같이 우리도 인간을 대하고,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하여 섬긴 것 같이 우리도 봉사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를 성립시킨 것과 같이 우리도 그 화해의 소식을 위탁받은 자로서 그와 같이 또 그와 함께 행동해야 한다.”72)

72)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246.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섬김의 봉사를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섬긴 것 같이 교회[기독교인]도 세상의 최전선인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생활 부문 속에 들어가 봉사해야 한다.”73)

73)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p.273.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방향을 닮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국한된 존재들이므로 예수가 보여준 역사의 총체적인 스킴의 한 부분인, 우리가 배당 받은 국한된 현실 역사에서 가능한 최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역사 방향을 추진시켜야 한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역사나 종말까지의 역사적 기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없다. 다만 우리의 현실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역사방향에 참여하여 그의 역사행위에 응답하며 제자직에 충성할 것뿐이다.”74)

74)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p.45.

넷째로, 죽음으로써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야 한다.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산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게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75)

75)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p.3.

4.3. 기독교윤리의 사회적 지평: 사회변혁

먼저 우리는 사회변혁을 위해 김재준이 제시한 동지운동에서 지켜야 할 기본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변혁은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동지들이 함께 전개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기독교인의 친교가 사랑으로 교제하여 피차에 즐겁고 화평하고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상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건설이란 공동목표를 향해 맹우들이 함께 행진하는 동지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지운동에서 지켜야 할 네 가지 기본원리를 제시했다.76)

76)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p.85-89.

첫째는, 피차의 신뢰와 신임이다. 생각이 같아서 인격적으로 피차 신임해 주지 않으면 참으로 동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용감한 자기 소신이다. ‘예’와 ‘아니오’를 양심대로 못하는 사람은 사상을 운위하거나 신앙을 운위할 자격이 없는데, 이는 사상이나 신앙은 ‘예’와 ‘아니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나누고 순복하는 생활이다. 초대교회에서 신앙과 소유를 나눈 것처럼 동지끼리는 생활을 공동으로 책임지며 그 자녀의 부양과 교육도 책임져야 한다. 또한 동지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사랑 안에서 피차 순복할 때 동지생활은 활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직장에 대한 공동목적이다. 서로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동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다는 공동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려면 각자가 속한 직장부터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준은 기도 없는 사회변혁은 있을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기독교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환경이 너무나 물질적으로 비참하니 만치 그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을 좀더 개선하려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회제도의 개혁만을 생각하고 기도도 군소리다, 교리도 추상적 유희다, 다만 빵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질적 노력이 시급할 것뿐이다 하고 외치는 일이 많다. 이는 극단의 주장이다.”77)

77)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p.21-22.

이제 김재준이 이해하는 사회변혁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만족스런 사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변혁시켜야 할 대상이다. 김재준은 사회변혁의 필요성과 교회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와 세계이며, 그리스도의 관심사는 하나님과 세계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와 세계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못 다하신 속량사업을 맡아 봉사하는 종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 세상을 위해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현대는 개인의 문제가 그대로 전 사회문제로 얽혀져 버렸다. 아무도 단독자로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갱신 봉사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의 구조, 법률, 경제, 조직, 교육, 문화 문제 등등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교회와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그러하다.”78)

78)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p.228.

또한 김재준은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에게만 집중되면 세계와 유리되어 신비와 타계적인 데에 황홀 몰입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게 될 것이고, 우리의 관심이 교회에만 집중되면 교회주의에 의한 종교제국건설에 열중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관심이 세계에만 집중하면 세속주의화하여 수직적 차원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신앙의 자기정체성과 사회변혁으로서의 관계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79)

79)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p.177.

그러나 김재준은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흔히 차용되는 혁명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80)

80) Ibid., pp.102-103, pp.479-481.

첫째로, 혁명은 종말적 요소가 주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 사회는 더 이상 개량할 여지가 없으니 어쨌든 두들겨 부수자는 것이 혁명의 첫 생각으로 현존 질서에 대한 무자비한 심판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로, 혁명은 자유의 깃발아래 진행되나 결국 노예화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폭군정치와 귀족계급,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혁명으로 해방되지만, 새 계급, 새 우상이 그들을 포착하여 여전히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혁명은 사회발전이란 신념에 심취하여 예외 없이 유토피아즘을 내세운다고 보았다. 점진적이 아닌 돌발적으로, 중용지도가 아닌 극단적으로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과거와 현재를 십자가에 못박고 역사의 비극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혁명은 그것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자체가 순진하다고 보았다. 혁명이란 가능성과 폭력의 저울질에 의거하여 승리한 후에 자기를 정당화하는 모든 이성적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혁명은 복수심의 아들이라고 보았다. 과거의 축적된 증오감정 없이 혁명이 되어지지 않으므로 반드시 미워할 적, 심지어는 가상의 적까지 세워 놓는다는 것이다.

여섯째로, 혁명은 공포의 친구라고 보았다. 혁명의 승리는 폭력의 승리요, 그 폭력은 언제나 반항자를 상정하기 때문에, 혁명의 승리자는 언제나 반항자의 악몽에 포위된다는 것이다.

일곱째로, 혁명은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다고 보았다. 미워하고 없애버려야 할 과거로부터 미래의 낙원으로 비약하므로 현재의 방화, 학살, 허위선전, 이간, 모략, 증오 등도 미래의 낙원으로 모두 합리화되고 포섭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재준에게 있어서 혁명은 무서운 악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비신화화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신화화의 역할은 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나 초연하게 관조하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고, 혁명을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 받아들여 그 고뇌를 경험하고 날마다의 투쟁을 넘어서서 다시 일어서는 종교적, 묵시론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81)

81)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pp.56-57.

이제 우리는 사회변혁을 위한 김재준의 방법이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쟁취하려는 혁명에 있지 않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십자가의 수난과 희생의 방식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사회변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목적을 왜곡하고 전도시키는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희생을 통한 점진적인 방식만이 사회변혁의 명실상부한 방식임을 김재준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이다.

[5] 맺는말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남북관계나 한미관계,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청산 등에 대한 논란의 소리가 아주 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론분열을 운운하며 이러한 극단적인 현실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흑 아니면 백이라는 흑백논리와 모 아니면 도라는 싹쓸이 인식, 그리고 꿩 잡는 게 매라는 적대의식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인 두 입장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하나의 입장만 존재했고, 그 하나의 입장에 대해 찬성 아니면 반대만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 대립적으로 경쟁하기는 해도 두 개의 입장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독재정권 시절보다는 한 단계 진전된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는 관대한 자세와 자신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검토하려는 자기 성찰적인 자세, 그리고 자신의 주장과 상대방의 주장이 서로를 보완하여 제3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현실은 한국교회 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이며, 두 기구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거의 대립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이 두 기구간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지만, 과연 신학적인 입장이나 구성원들의 입장이 서로 첨예한 상황에서 기구통합이 가능할까 의심스럽다.

그러나 김재준의 신학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를 기초로 한다면, 한기총과 KNCC 두 기구간의 통합은 물론이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한국사회에서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기에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김재준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경험한 후에 그리스도 중심 위에다 자신의 신학을 수립했고, 혁명적인 사회변혁보다는 사랑의 희생적인 사회변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16)라고 규정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부정부패로 가득한 세상을 견제하고 저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어둠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하여금 제대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도록 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살며,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겠다”(갈 2:20, 롬 14:8)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소금과 빛으로서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해 소금과 빛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세상이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속성으로 오염시킬 것이고, 그러면 세상도 기독교인들도 더 이상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김재준의 신학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는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한국의 교회에 더욱 많은 시사점과 새로운 방향을 제공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재준, <고토를 걷다>, 서울: 선경도서출판사, 1985. 김재준, <광야에 외치는 소리>, 서울: 삼민사, 1983.
김재준, <귀국직후>, 서울: 선경도서출판사, 1985.
김재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인간의 길>, 서울: 삼민사, 1984.
김재준, <범용기>, 서울: 장공 자서전 출판위원회, 1983.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서울: 삼민사, 1985.
김재준, <현대의 위기와 기독교>, 서울: 삼민사, 1984.
한국신학대학 편,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1권 논문, 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논문, 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3권 성서연구, 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4권 강화, 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제5권 수상, 서울: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주재용 편집,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서울: 풍만, 1986.
장일조, “김재준의 사회윤리사상", <신학사상> 제50집(1985년 가을호)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신학사상> 제50집(1985년 가을호)

정종훈 교수
‧연세대학교 신학과(Th.B.)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Th.M.)
‧독일 괴팅엔대학교(Dr. theol.)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 교목
한국기독교윤리학회 서기

[저서와 역서] ‧Die deutsche evangelische Sozialethik und die Demokratie seit 1945: Der Beitrag der EKD-Denkschriften zur Demokratie (Frankfurt am Main / Berlin / Bern / New York: Peterlang Verlag, 1997)
<기독교 사회윤리와 민주주의>(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J. Moltmann,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대한기독교서회, 2000)
<정치 속에서 꽃피는 신앙>(대한기독교서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