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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20회]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선교사관(宣敎師觀) / 김승태 목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7 15:05
조회
1816

[제20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9년 9월 10일(목) 오후 5-7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선교사관(宣敎師觀)

김승태 목사
(세움교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I] 머리말

시대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시대를 이끌어 간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널리 인정되다 시피 김재준 목사는 한국 신학의 발전과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한신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원의 창설자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장공 김재준 목사의 생애 가운데서 선교사들과 맺은 관계와 그가 선교사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가 하는 것을 해방 전과 후로 나누어 정리해 보려는 것이다.

[II] 일제강점기 선교사와의 관계와 선교사관

1) 미국선교사의 한국 사진전시회

김재준은 1984년 7월에 발표한「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이라는 글에서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필자가 프린스턴 초년생으로 있을 때 안식년에 귀국한 한국주재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사진전시회를 연 일이 있었습니다. 촌노인들이 솔잎을 긁어 큼직하게 단을 만들어 황소 잔등에 걸쳐갖고 남대문 밖에서 사가는 사람, 기다리는 장면, 길바닥에서 소변보는 광경, 누더기도 없이 알몸으로 코범벅이 되어 거리를 다니는 극빈 아동들의 모습 등이었습니다.”1)

1) 김재준,「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1984.7)」,『김재준전집』17, 1992, 367~368쪽.

김재준의 프린스턴 초년생 때면, 1928년 9월에 프린스턴에 입학해서 이듬해 9월에 웨스턴신학교로 전학했으니까 그 무렵이다. 당시에 프린스턴에는 한경직, 김성락, 윤하영이 같이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한경직, 김성락과 의논하여 이 사진전시 자료와 그 동기에 대하여 항의하기로 했다. 연설문은 김재준이 맡고, 연설은 한경직이 맡았다. 항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국 같은 뒤떨어진 나라에 가서 수고하시는 선교사 여러분께 감사한다. 그러나 여러분의 한국 소개 자료는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에는 찬란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있다. 학자들의 문집만 하더라도 한 도서관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 제씨가 서투른 한국말 몇 마디 배우고 한국말로 쓰인 신문, 잡지, 한시(漢詩) 한편 읽을 줄 모르면서 어떻게 한국 문화를 소개할 수 있겠는가? 오늘 여기 전시된 재료가 모두 사실임에는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문화의 전부인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유감이다.

우리도 미국의 빈민거리 구석진 뒷골목을 다니면서 한국의 빈민촌보다 못하면 못했지 별로 낫지는 않은 추잡한 광경을 본다. 우리가 만일 카메라를 갖고 그 광경을 찍어 한국의 이런 최고급 학원전시장에 걸어놓고 마치 이것이 미국의 전부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너희가 선교비 헌금액을 높이기 위하여 피선교지의 미개성을 과시하고, 우리가 이런 족속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생하고 있으니 우리를 알아달라 그리고 선교비 헌금도 아낌없이 내어달라 하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내용의 전시회를 열었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을 부끄럽게 함으로 너희 선교열을 드높이려는 설계인데, 우리 민족의 긍지와 염치가 결코 그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너희가 일본교회를 소개하는 데도 이런 방법을 쓰느냐?”2)

2) 김재준,「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1984.7)」,『김재준전집』17, 1992, 368~369쪽.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선교사들의 불순한 의도가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주어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김재준의 선교사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러한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덜된 우월감이 한국교회의 열등감을 조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의 후진성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선교사 자신들의 고귀한 희생성과 영웅적인 모험성과 개척자로서의 영예를 과시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과 반발은 1920년대 국내에서도 있었다. 국제선교연맹(IMC) 회장 모트(J. R. Mott)가 세계선교대회를 앞두고 의제발굴과 한국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 방한하여 서울에서 선교사 대표 31명, 한국교회 대표 31명을 조선호텔에 초청하여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朝鮮基督敎奉役者會議)를 열었다. 1925년 12월 28~29일 양일간 열린 이 회의에서 선교사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제를 건의했다.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업을 개척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으나 그러나 그 개척시기에 쓰던 사업방침은 오늘에 조화되지 못하고 선교사 중에 혹은 이 돌변하는 시대를 따르지 못하고 조선인과 조선인 인도자에게 대하여 시대에 不合한 방법과 태도를 가져 동료 선교사나 조선교역자 사이에 不好感이 생기기도 하니 그런 故로 선교사와 조선교역자 間의 관계를 再考함이 必要함.”3)

3) 『朝鮮基督敎奉役者會議(錄)』(1925년 12월 28일~29일, 경성 조선호텔), 4쪽.

그리고 이 회의록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이 회의에 참석한 한석진(韓錫晉) 목사가 한국교회의 당면한 문제의 하나가 자치․자립의식의 결여인데 이는 선교사의 계속적인 영향력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선교사업을 성공시키며 가장 효과적으로 하려면 선교사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고 교회의 기초가 서게 되면 그 사업을 원주민에게 맡기고 다른 곳에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면 자기가 세운 교회이며 학교라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영도권을 행사하려고 하게 되니, 이것은 참된 복음정신에 위배되며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요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4)

4) 채필근,『韓錫晉과 그의 時代』, 대한기독교서회, 1971, 229~230쪽.

이 말을 듣고 분노한 마펫(S. A. Moffett)이 항의하려고 일어나자 마펫을 향해, “마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라고 했다.5)

5) 위의 책, 231쪽.

당시에 公刊되지는 못했지만,『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의 총론에서도「선교사 형편」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 조선을 사랑하시사 태평양 수만리외와 대서양 수만리외에 在한 미국 남북장로파 선교사와 영국, 가나다와 오스트렐리아 장로파 선교사를 파견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순교의 고와 핍박의 난을 備經하고 교회를 출산하여 四長老派가 합동하니 一總會를 조직하였으니 영광은 세세에 주께 귀할지어다. 宣敎師 諸君의 功과 力이 진실로 義하고 감사할 것은 四長老派가 문호를 各立하지 않고 합동하여 一總會를 成함이 神의 旨를 성취한 美擧요 盛事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후에는 독립하여 何傳道局에도 속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선교사 제군이 역시 自證明하는 바인데 何故인지 선교사 제군이 자기 노회와 전도국에서 이명하지 않고 엄연히 조선 노회와 총회의 회원이 되며 또 회원이 될 시에는 其會에 속함이 분명할 것인데 何故인지 조선노회와 총회가 治理할 權이 無하다 함으로 此로 由하여 모순이 심하지 아니한가. 此는 無他라 선교사 제군이 조선교회를 同人視하며 兄弟視하지 않고 野蠻視하며 奴隸視함이다. 선교사 제군이여 聖神으로 始作하여 肉體로 結局하려느냐. 速히 悔改할지어다. 此外 個人의 不足은 擧論하지 아니하노라.”6)

6)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 연세대학교출판부, 1968, 53~54쪽.

이것은 이 책의 후기가 1930년 8월 20일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20년대의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인식과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7)

7) 위의 책, 404쪽.  

2) 어느 선교사의 편지와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

김재준의 선교사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사건은 1932년 5월 웨스턴신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석사(S.T.M)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려던 무렵에 받은 한 선교사의 편지다. 그는 이 사건을 그의 회고록인『범용기』「어느 선교사의 편지」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하루는 난데없이 한국의 모 선교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선교사 편지란 난생 처음이다. 편지 내용이란 즉은 ‘네가 학업을 마쳤으니 귀국해야 할 텐데 네 신학노선을 알아야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기에 편지한다’는 것이었다. ‘네가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라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 속히 알려달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나를 위해 한 이야기겠지만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곧 회답을 보냈다. ‘…… 나는 무슨 「주의」나 내 신앙을 「주조」(鑄造)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주의자」라고 판 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하여는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꼬올」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주의」냐고 한다면「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 ……’”8)

8) 김재준,「범용기(1)」,『김재준전집』13, 1992, 119쪽.

당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신학을 공부했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진보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도 꺼려했다. 더욱이 한국인들이 진보적인 신학을 배우고 돌아와서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쳤더라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재교육을 받고 면접시험에 통과해야 목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보낸 선교사는 편지를 받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안식년 귀국길에 김재준을 찾아와 그의 신학사상을 검증하고자 했던 것 같다. 김재준은 그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리고서는 편지 거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그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 일부러 나를 찾아, 내 씽글 베드에서 같이 하룻밤 지내며 이야기했다.

그는 단순한 편인데 모르는 게 탈이랄까? 나는 그를 신학생그룹에도 소개하여 한국선교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질의문답할 기회도 만들었다. 몇마디 대화로 통로는 막혔다. 학생들은 그가 너무 묵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9)

9) 김재준,「범용기(1)」,『김재준전집』13, 119~120쪽.

김재준은 그 선교사를 신학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너무 묵은 사람으로 인식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마펫도 그런 보수적인 선교사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34년 선교희년 기념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했다.

“근래에 와서 교회 내에서도 종종 이런 말이 들린다. 교회를 좀 변경해야 한다. 혁신해야 한다. 복음을 전과 같이 전하면 듣는 자가 좋아하지 않는다. 새 시대에 옛 복음은 적당치 않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들의 지혜는 바울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바울은 그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할만 하였으나 결단코 아니하였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지식의 풍부한 훌륭한 철학자이었고, 또한 권세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다. 그의 기록한 서신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아니하기로 힘썼다. 그렇게 한지 50년 후에 그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 어떤 신학자들은 마포 목사는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옛 복음에는 구원이 있어도 새 복음에는 구원이 없는 데야 어찌하랴. 우리들이 바울의 전하신 옛 복음을 그대로 전할 때는 교회가 매우 왕성하였다. 무엇 때문에 옛 복음에 새 복음을 대치하겠는가? 복음을 변할 수 있는 자격을 논한다면 바울 이상 가는 인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

近來에 新神學이니, 新福音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교회 형제들이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나와 한석진 목사가 13도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던 그 복음,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 전하던 그 복음, 양전백 목사가 선천에 전하던 그 복음은 저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聖神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도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傳하라. 바울이 청년 목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 같이 나도 조선에 있는 원로 선교사와 노인 목사를 대표하여 조선 청년교역자들에게 부탁한다.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들의 전한 복음을 그대로 전하라.”10)

10) 김양선,『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190~191쪽; 馬布三悅, 「朝鮮敎會에 寄함」,『宗敎時報』1934년 10월호, 10쪽.

김재준은 귀국해서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3년 4월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교목 겸 교사)로 있으면서, 그 해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활동했다.

김재준이 또 한 번 보수적인 선교사와 부딪힌 사건은 1934년 신생사에서 출판한『단권 성경주석』의 내용과 번역 참여자를 문제삼은 이른바 ‘아빙돈 성경주석사건’이었다. 이 단권 성경주석은 미국 아빙돈출판사에서 기획 출판한 것으로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집필하여 1930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을 감리교의 유형기 목사가 김재준을 비롯한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학자들로 번역․집필진을 구성하여 1934년 자신이 경영하던 신생사에서 발간했는데, 이것을 1935년 9월 장로회 총회에서 문제삼은 것이었다. 즉 황해노회장이 헌의한 “경성 신생사 발행 단권성경주석은 구독치 않도록 장로교회에 선포하고, 장로회 각 기관으로 동서(同書) 선전 편의를 불허할 것”을 정치부로 보내 검토한 결과,11) 정치부에서 “황해 노회장 헌의 중 신생사 발행 성경주석에 대하야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한 고로 우리 장로회에서는 구독지 않고 그 주석에 집필한 본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 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케 함이 가한 줄 아오며”라는 보고를 받고 가결했던 것이다.12)

11)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4회 회록』(1935년 9월, 평양 서문밖예배당), 9쪽. 12)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4회 회록』(1935년 9월, 평양 서문밖예배당), 50~53쪽.

이에 따라 김재준이 소속되어 있던 평양노회에서도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회 정치부장과 평양신학교 실천신학 교수를 맡고 있던 클라크(C. A. Clark, 곽안련) 선교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김재준은 이 위원회에 소환되어 주로 위원장 클라크 선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문 : ‘그 책에 집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소?’ 답 : ‘그렇게 생각지 않소 !’
문 : ‘그 책이 재판(再版)될 때, 당신 글을 뺄 생각이 없소?’
답 : ‘그럴 생각이 없소 !’
문 : ‘그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란 것을 알텐데……’
답 : ‘다른 사람들이 쓴 글에 대해서 개입할 생각은 없소. 나는 내 글에만 책임을 질터인데 내 글에는「이단」이랄게 없소’
문 : ‘그 책 때문에 교회가 소란해진데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소?’
답 : ‘책임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그것 때문에 소란하게 된 교회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오.’
문 : ‘노회에서 작성된 대로 성명서(각서)를 내겠소?’
답 : ‘내겠소 !’”13)

13) 김재준,「범용기(1)」,『김재준전집』13, 135~136쪽.

그리하여 1935년 11월호『신학지남』에 송창근․한경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금번 문제된 신생사 발행 단권 성경주석에 대하야 본인 등은 총회의 권고에 따라 좌와 여히 성명함. [1] 본인 등이 집필한 부분은 장로회신경에 위반됨이 무(無)함.
[2] 타인 등이 집필한 부분이나 전체 편집에 대하야는 본인 등은 상담 혹 관여한 사가 무(無)함.
[3] 본 주석의 내용에 대하야는 이미 제24 총회에서 결정된 것인 바 본인 등은 집필자의 일원으로서 유감의 의(意)를 표(表)함.
(1935년 10월 19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14)

14) 『神學指南』17권 6호(1935. 11), 53쪽;

그 무렵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일어나고, 그 후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되자, 김재준이 근무하던 숭인상업학교에서도 신사참배에 순응하고, 교장이 김재준에게도 신사참배에 동행할 것을 요구하자, 1936년 4월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15) 그러다가 그 해 여름 숭실전문학교 교장이자 웨스턴신학교 동문인 모우리(E. M. Mowry)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8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유(교목 겸 성경교사)를 맡았다. 소속 노회도 동만노회로 옮겨 1937년 3월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5) 김재준,「범용기(1)」,『김재준전집』13, 146쪽.

3) 조선신학원 설립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신학교이던 평양신학교가 1938년 6월 봄학기를 끝내고 방학에 들어가 9월 가을학기에 개학을 해야 했지만,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개학을 하지 않고 무기한 휴학에 들어갔다. 이것은 신사참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실상 폐교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더욱이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선교사들의 반대 항의를 묵살하고,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선교사들은 신학교육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그러자 교계 일각에서는 한국인들이 이를 인수하거나 새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육을 재개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은 이듬해부터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태동하였다. 서울에서는 1939년 3월 장로회신학교설립 기성회장 겸 위원장 채필근 목사의 명의로 “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 설립 취지”문을 발표하였다.16) 이 신학교설립 기성회 실행위원회는17) 그 해 6월경 김대현 장로의 30만원 신학교 기금 헌금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신학교 위치 문제로 위원들 사이에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제4차 위원회에서 서울에 세우기로 확정하고 그 추진 실무를 송창근 목사가 맡게 되었다.18) 평양에서는 1939년 2월부터 평양신학교 재개교를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기독교계 친일단체인 평양기독교친목회 상무이사 오문환과 평양노회장 나기환 목사 등이 1939년 9월 10일 평양신학교 개교촉진회를 구성하여 “① 평양신학교를 속히 개교할 것, ② 개교가 불가능할 때는 그 경영권을 조선교회에 양도할 것, ③ 개교도 양도도 불가능한 경우에는 교사(校舍)를 빌려줄 것”을 대리교장 클라크 선교사에게 요청하였다.19)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인식, 김화식(金化湜), 황보덕(黃甫德), 김인준(金仁俊) 목사 등은 채필근(蔡弼近) 등이 경성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에는 반대하여 유지재단의 조직을 하기까지 1년 간의 경비 3만 원을 갹출하여 가교사(假校舍)에서 신학교를 경영할 것을 계획하고, 9월 5일 평양 연합당회에서도 이러한 의향을 표명하고 9월 8일부터 신의주에서 개최된 장로회 제28회 총회에 제안하여 허락을 받았다.20) 이 총회에서는 평양신학교 이사로 이문주, 이승길 등이 16명을 선임하였는데 이승길 목사 등 이른바 혁신파들이 주동이 되어 10월 18일 신학교 설립 인가원을 총독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장로회신학교 기성회 위원장 채필근의 청원에 대해서도 신학교 설립 경영을 총회가 인정하고, 기성회 실행원 13인도 총회가 파송한 것으로 승인하며, 지정은 신학교가 완성된 후에 하기로 가결하였다.21) 그러자 이들은 총회가 끝난 이튿날인 9월 16일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김대현 김영철 함태영 채필근 등 9명의 이사를 선임하고, 9월 18일 승동예배당에서 채필근의 사회로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사장에 함태영, 상무간사에 송창근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는 당시 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상태여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부산에 내려갈 예정이었으므로 신학교 설립 실무를 용정에 있던 김재준에게 부탁했다. 송창근 목사의 부탁을 받고 김재준 목사는 이 신학교 설립의 실무를 1939년 10월 13일부터 맡게 되었으며 곧 이어 총독부 학무국에 설립인가신청을 냈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에서 평양의 한 신학교만 인가할 방침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12월 20일 김길창 목사 등 24명의 명의로 서울의 신학교를 인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학무국에 제출하였다. 이듬해 1월 22일 조선신학교는 인가할 수 없다는 학무국의 내정 방침이 알려졌으며, 채필근 목사는 결국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내정되고, 2월 9일에 평양신학교 인가가 공식으로 발표되었다. 그러자 조선신학교측은 학무국의 신학교 인가는 포기하고 대신 경기도에 1년 단위로 갱신하는 강습소 인가를 3월 4일에 신청하여 22일에 인가증을 받아 4월 2일 조선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승동교회를 빌어 개원하였다. 그해 제29회 총회에 조선신학원 이사장 함태영 목사의 명의로 보고한 보고서에는 그 설립 목적을 “본 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22)고 규정하고 주요 과목으로서 당시 일제의 국책과목이었던 국민도덕(수신), 국어(일본어), 국사(일본사)를 포함시키고 있다.23) 이런 조건이 아니면 그나마 강습소 인가조차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런 시기에 그런 기관을 설립하려고 김재준이 노력했을까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사실 당시에도 교계에는 이러한 신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갈리어 있었다. 당시 원로 목사였던 한석진은 1939년 초 채필근으로부터 신학교 설립 자문을 받고 “우리 손과 우리 머리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보자는 말인가. 조선에 벌써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이런 운동도 없었다는 것은 너무 늦었지, 선교사와 조선교회야 언제든지 정의좋게 헤어질 줄 알았는가. 그 사람네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우리가 할 일이야, 우리가 하여야지……나야 물론 마음으로야 전폭적으로 찬성하지” 하였다는 것이다.24) 그러나 1939년 9월 말경 김재준이 신학교 설립 실무를 맡기 위해서 김대현 장로를 방문하였을 때, 김익두 목사로부터 온 편지에 대한 회답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신사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신학교 문을 닫고 갔는데 당신이 신학교를 새로 한다는 것은 선교사에 대한 의리로 보든지 신앙적 양심으로 보든지 배교에 가까운 잘못이 아니야”고 호되게 나무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25)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교육의 필요성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거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 하는 문제였다. 김재준 목사는 개인적으로는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직장을 사직하기까지 했지만,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 문제는 그러한 신앙양심을 희생하고서라도 이룩해야 할 더 큰 가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16) 「부록 1 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神學硏究』제9호, 한국신학대학 신학회, 1965, 263~264쪽; 50년사편찬위원회, 『한신대학 50년사』, 한신대학출판부, 1990, 463~464쪽. 17) 실행위원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50년사편찬위원회,『한신대학 50년사』, 한신대학출판부, 1990, 11쪽). 위원장 : 채필근(경성), 서기 : 김우현(경성), 부서기 : 윤인구(김해), 회계 : 이학봉(평양), 부회계 : 이인식(평양), 위원 : 조희염(원산), 함태영(경성), 김길창(부산), 차재명(경성), 한경직(신의주), 백영협(선천), 김관식(평양), 김응순(해주), 기성회 사무소 경성부 종로 기독신문사
18) 「부록 2 김대현 장로님으로부터 김재준목사님께 보내온 교수청빙장」,『神學硏究』제9호, 한국신학대학 신학회, 1965, 265쪽. 이 편지는 1939년 7월 26일자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김재준 목사가 받아보지 못하고 김대현 장로의 아들 김영철 장로가 보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식 ‘교수청빙장’이라기보다는 그간의 상황을 알리면서 귀국의사를 묻는 편지이다.
19)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고등외사월보』제6호, 1939년 12월, 1940년 1월분, 64~70쪽
2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 회록』,1939, 66쪽.
21) 위와 같음.
2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회록』,1940, 43쪽.
23) 위와 같음.
24) 「부록 1 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神學硏究』제9호, 한국신학대학 신학회, 1965, 264쪽.
25) 위의 책, 9쪽.

김재준 목사는 이 시기의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보았고, 선교사가 신학교육을 독점하고 이른바 “정통주의” 신학을 강요하던 시기로 보았다. 후대에 한 언론에 기고한 글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선교사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외국선교사의 문제란 것은 선교사가 피선교지 교회내에서 지배적 위치라고 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무슨 保護者格의 지위에 있어서 그 피선교지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從屬的’인 실상에 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해방 전 일제말기까지의 60여 년 동안은 전혀 선교사의 지도권 하에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신교의 최대교파인 장로교에서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신학교는 창설이래 줄곧 선교회의 직영으로 되어 있었고, 소위 장로교 총회에서는 아무 실권도 없었으며 그 지도 이념에 있어서도 아무 검토한 바 없었다. 그 당시의 선교사 교수들이 가르치는 소위 正統主義學이 유일한 神學인줄 알았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비평을 운위하면 ‘斯文亂賊’과 같이 몰려서 이단자의 苦刑을 받았다.

무조건 선교사의 말을 신임하지 않으면 ‘宣敎師排斥’이라는 罪名 下에 背恩忘德者로 몰리기 일쑤였다.”26)

26) 김재준,「외국선교사의 위치(상)」『동아일보』1958년 2월 15일자.

[Ⅲ] 해방 후 선교사와의 관계와 선교사관

1) 신학적 대립과 장로교의 분열

한국교회의 신학적 대립은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렵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귀국하고, 일부 선교사 가운데도 새로운 신학적 조류를 지지하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이들의 교육을 받은 평양장로회 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노회와 총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으므로, 자유로운 발표나 토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문제로 선교사들이 1938년 9월부터 사실상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이던 평양신학교의 문을 닫자, 그 후 조선신학원과 (후)평양신학교가 설립되어 전시체제 하 일제의 강요에 순응하면서 장로교의 신학교육을 담당했다.

해방 직후 남한 지역에 장로교의 신학교는 김재준이 원장 겸 교수로 있던 조선신학원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이사진과 교수를 보강하고, 미군정과 교섭하여 일본의 교파신도인 천리교의 건물과 부지를 인수받아, 일제 말기 강제징용으로 파행을 겪고 있던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학교 명칭도 ‘조선신학원’에서 ‘조선신학교’로 바꾸고, 미군정 당국에 인가신청을 하여 학교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다. 조선신학교는 이듬 해인 1946년 4월 송창근이 학교장을 맡고, 6월 장로교 남부총회(제32회 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1938년 폐교 이전의 보수적인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꿈꾸던 목회자들과 신학자, 신학생들이 조선신학교의 ‘진보적’ 신학 교육내용을 문제삼아 교단분열로까지 이어진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1947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 조선신학교 재학생 51명이 이른바 “서울 조선신학교, 정통(正統)을 사랑하는 학생동지들”이름으로 “진정서”를 내서 총회에서 이자익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하게 했다. 이 때 학생들이 낸 “진정서”는 “1. 호소 2. 현재 조선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1) 성경관, 1) 신구약 권위를 인정치 않는 점 2) 성경에 오류가 많다는 것, 3) 신약 공관복음 재료 문제, (2) 교리문제, 정통공격(正統攻擊) (3) 신관(종교관), (4) 학교정치에 관한 문제, 3. 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27) 내용은 주로 김재준과 송창근의 신학 교수 내용과 학교운영, 발언 등을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결론이자 총회에 요구사항인 다음과 같은 “탄원” 내용일 것이다.

27) 등사된 원문에는 번호가 일괄성이 없어 필자가 임의로 번호를 부여한 곳도 있음.

“탄원(嘆願) [1] 현재 남선 각 지방에 난립하는 여러 신학교 중 정통주의(正統主義) 신학교들은 대국적 견지에서 속히 소소한 지방 관념을 떠나 중앙에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주실 것
[2] 정통주의의 신학자들로서 교수 진용을 강화해서 장로교 정통에 입각한 신학교육의 순결(純潔)과 완실(完實)을 도모해 주실 것
[3] 순수한 신학교로 학제를 변개(變改)하되 목회와 학적 탐구의 양방면을 겸전(兼全)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실 것이며 빈약한 재단(財團)에 관하야 적극 노력하야 주실 것”

요컨대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정통신학교”를 세워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 이 탄원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학교 정치에 관한 문제”에서 “조선신학교는 캐나다 선교회 경영이란 평이 있는 바 한 계통의 교수진만으로 독재하고 있는 감(感)이 유(有)함”이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 조선신학교는 다시 돌아온 각 선교부에 교수 선정 파송과 재정 지원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미 북장로회 선교부와 호주장로회 선교부는 이 요청을 유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 남장로회 선교부는 다음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a] 교육 방침에 있어서 순 정통적인 성경해석과 신학을 가르칠 것
[b]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현 교수진을 총 사퇴시킬 것
[c] 이상 2개항을 수락한다면 시험적으로 교수 1인과 이사 그리고 경상비 약간을 보조하겠음.”

이러한 제안은 조선신학교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선신학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만 1946년 9월부터 스코트(William Scott)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고, 재정적 지원도 했다.

조선신학교 학생들의 진정서(탄원서)가 제33회 장로회 총회에 접수되자 총회는 “조선신학교 학생 5명의 진정건은 다음 위원을 선정하여 조사케 하다. 위원 이창규, 계일승, 문승아, 노나복, 노해리, 김원희, 이자익”28)라는 결의를 하여 위원들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다. 이 위원회는 단순히 이 사실 여부를 조사한 것만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교수를 불러 교수 자격을 심사하는 심사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회장에 이자익, 서기에 계일승, 나머지 4인을 위원으로 조직하고, 1947년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피어선성경학교 안에 있던 총회사무소에서 회집하여 김재준 교수가 보내온 성경관, 교리관에 대한 진술서와 학생들의 호소문을 낭독 검토하고, 김재준 교수를 직접 소환하여 문답을 했다. 문답 후에 위원회는 “金 敎授(氏)의 陳述書와 口述을 직접 들었으니 이 교수한 것이 可하냐, 否하냐, 하는 것을 투표하기로 결정하고, 무기명 투표한 바 그 결과는 (否 5, 可 2, 棄權 1) 否하다고 결정”했다.29) 그래서 심사위원회는 “김 교수는 聖經無誤의 敎理를 否認한다는 심사보고와 동시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 2매를 첨부하여 신학교 이사회에 제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30) 그런데 여기서 선교사와 관련된 부분은 총회에서 선정된 위원들 가운데 보수적인 미남장로회 선교사 노라복(Robert Knox)과 미북장로회 선교사 노해리(Harry A. Rhodes)가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무기명 투표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쪽에 표를 던졌는지 알 수 없지만, 소속 선교부나 개인적 보수성으로 보아 부(否)측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추측이 맞는 것이라면, “김재준 교수가 성경무오의 교리를 부인한다는 심사보고서”는 이 선교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조선신학교 이사회는 1948년 5월 28일 전체 이사회를 열어 그대로 보고하고, 이사회에서도 김재준 교수를 불러 문답한 후 일반 교계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하여 그의 성서관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했다. 이 때 김재준이 마지못해 7월에 발표한 성명은 다음과 같다.

28)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3회 촬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1947, 10쪽. 29) 김양선,『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226쪽.
30) 위와 같음. 단 위 책에서는 필자가 밑줄친 부분인 “否認”이 “査認”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아마도 이 자료를 근거로 작성된 듯한『대한기독교장로회 제44회 총회 회의록』(1960)의 부록「대한기독교장로회 호헌사」에는 “시인”이나(107쪽) “사인(査認)”(124쪽)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문맥으로 보아 필자가 정정한 것처럼 “否認”이 맞은 것 같다.

“김재준교수의 성경관에 대한 성명서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 데 변함이 없음. [2]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영생의 말씀은 곧 구속의 결론인데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며 이 계시로서의 신구약 성경은 절대 무오함을 믿음.
[3]. 본인의 강의를 들은 일부 학생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물의를 초래한 데 대하여 교수로서 삼가 진사의 뜻을 표함.
상을 성명함.
김재준”31)

31) 김양선, 위의 책, 227쪽; 『대한기독교장로회 제44회 총회 회의록』,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 1960, 108쪽.

그렇다면, 과연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김재준의 견해가 신학교에서는 가르쳐서는 안될 만큼 비판받을만한 잘못된 것이었나를 당시 세계 신학적인 흐름 가운데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김재준의 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또 김재준의 신학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도 많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미국 북장로회 직영 맥코믹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조셉 하로투니안(Joseph Haroutunian, 1904~1968)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송창근 교수는 1949년 2월 미국 밥존스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건너가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위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를 가져가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국장로교회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들에게 발송하여 “1. 이 성명을 하는 김 교수가 장로교 신학교 교수될 자격이 있느냐? 2. 김 교수가 또한 장로교 목사가 될 수 있느냐?” 두 가지 점에서 회답을 요청했다. 여기에 대하여 대부분의 신학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문제를 말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욕설까지 했다. 그렇지만, 맥코믹신학교 교수 하로투리안은 대단히 길고 성실한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김교수의 성명서를 참으로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명서 중에는 현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에 조금도 배타됨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믿는 바 주장을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 신학교 전부와 그 모든 교수들은 거의 전부가 법정에 서야 할 것이 두려운 사실이라고 봅니다.

김교수의 의견은 금일 우리 교회의 정상적인 태도라 할 것이며 김교수의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이단적인 입장에 있음을 표시함이 사실입니다. 그 사상은 우리 헌법에 기술된 대로의 교회의 신앙이며 우리 교회의 목사직을 결속할만한 어떤 개인의 해석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주권하에서 적절한 자유를 가지게 하는 것은 복음 신앙의 정신이며 그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이사회가 지지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기는 귀교 이사님들의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32)

32) 『대한기독교장로회 제44회 총회 회의록』,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 1960, 126쪽.

특히 조직신학 교수로서 하로투리안은 축자영감설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축자영감설(the verbal inerrancy of the Bible)이란 것이 기독교인의 성경 사용에 기본적인 것이라 함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깊이 알지 못하는 무지를 보여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에 근거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서 있는 것이지 축자영감설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은 사실상 합리주의자들(rationalist)이라고 할 것이지 복음주의의(evangelical) 입장에 서 있지는 아니합니다.”33)

33) 위의 책, 127쪽.

신학 문제, 신학교 문제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이 한상동과의 갈등으로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에 올라와 1948년 6월 ‘정통신학’을 표방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더욱 격화되었다.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5회 총회는 이 신학교도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하고, 신학교 합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신학교를 흡수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일도 여의치 않게 되자 1951년 5월 피난지 부산에서 속개된 제36회 총회에서 두 신학교를 다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여, 그 해 9월 미 북장로회 선교사 캠벨(Archibald Campbell)을 교장으로 하고 박형룡, 한경직 등을 교수로 하는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대구에 설립했다. 더욱이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는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는 자는 권징조례에 의해 시정․치리하도록 각노회에 지시할 것을 결의하고, 김재준 목사의 면직을 경기노회에 지시하는 한편, 캐나다연합교회의 스코트 선교사도 본국에 소환하도록 결의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출신의 졸업생에게 교역자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결정을 했다. 경기노회와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측은 즉시 총회의 불법적 결의의 취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1953년 6월 10일 “호헌총회”를 열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 분립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미남장로회 한국선교부는 1953년 6월 1일 성명까지 발표하여 “우리는 1953년 4월 24일~29일 사이에 대구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한국에 있는 공식 장로교 단체로 인정하고, 계속하여 이 단체와 협력하기로 한다.”고 하면서, 총회에서 이탈하려는 교회와 개인 신자들에게 “이 총회에 충성스럽게 머물러 있기를 권고”했다.34) 다만, 스코트 선교사가 소속된 캐나나연합교회 선교부만이 1955년 3월 총무 일행이 내한하여 시찰한 후 5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결별 통고를 하고, 새로 분립한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와 계속 협력하기로 결정했다.35)

34) 『총신대학교백년사』제3권(자료편), 총신대학교, 2003, 287쪽. 35) 『해외협력관계 역사자료집』,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해외선교국, 1994, 11쪽.

김재준은 이 시기의 신학적 논쟁으로 장로교 분열까지 초래했지만, 획기적인 신학적 계몽과 성장을 이룩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선교사 총퇴거 이래 가시밭 속에서 싹튼 한국교회의 새로운 自主思想은 1950(1945)년 해방을 계기로 놀랄만한 生長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再來한 舊선교사들을 배경으로 한 구세력의 반발로 波瀾도 심했고, 급기야 분열에까지 이르는 悲劇도 있었지만, 그 逆風 때문에 급속도로 전개된 啓蒙은 피차간에 劃世紀的인 것이었다.”36)

36) 김재준, 「외국선교사의 위치(상)」『동아일보』1958년 2월 15일자.

2) 선교사와의 관계 정립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가 한국신학대학과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지지했지만, 김재준은 종래와 같은 종속적인 선교사와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선교사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갔고, 선교사와 새로운 동역자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재준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1958년 2월『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 정립해야 할 선교사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그 실현에 노력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나간 이야기지만 현재의 위치에서 선교사와 우리 교회와의 소재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1] 우리 한국교회가 자주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되었다. 기구적으로 보나 사상적으로 보나 선교사의 발언에 좌우되는 교회는 아니다. 선교사들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선교사는 무용한가? 또는 무용하지 않다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共役할 것인가? 우리는 선교사가 무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自主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孤立主義와 間隙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제 국경과 교파를 넘어 世界 一家的 기관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본 모습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그러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소위 世界敎會(ECUMENICAL CHURCH) 운동이라는 것은 이것을 실현하려는 진지한 企圖며 이 운동에 新敎의 거의 전부가 가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 또는 다른 교파나 기관에서 한국이라는 지역의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기독교적인 봉사를 하겠다는 것을 마다할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다. ‘主’나 또는 ‘貴賓’이 아니라 순수한 同勞者로 와야 할 것이며 한국인의 처지에 몸으로 들어와서 한국인의 苦榮에 동참하는 참 친구로 와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를 한국인에게 일치시키느냐?’ 하는 것이 오늘 젊은 有志 선교사의 진지한 과제로 되어 있음은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동정적이요 친숙해야 할 것이다. 30년 이상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으면서 아직도 한국의 일간신문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한국인이 쓴 서적을 제대로 ‘리뷰우’는커녕 들쳐볼 염의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국의 정신계에서 옳게 일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그리스도의 멧세지를 가지고 있다셈 치더라도 그것이 유도탄처럼 기계적으로 상대방을 찾아가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그 상대방의 자유결단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일방적인 멧세지 전달로만 능사를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처럼 갸륵한 큰 맘먹고 한국의 일꾼으로 찾아온 준수한 크리스챤 使者들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정당하게 맞아 정당하고 친절하게 준비시켜 줘야 할 것이다.

[2] 법적으로 현재 우리가 도달한 실상은 이러하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교회와 선교회와가 일대일로 ‘선교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거기서 선교에 관한 예산․방침 등을 결정하여 그 실행은 한국교회 기관에서 주로 하고 특수한 것은 선교회 직영으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부터 3년 전 기독교장로회 측에서 선봉이 되어 일대일 관계로 성립된 ‘선교협의회’를 해소시키고 선교사가 다 한국교회 총회 안에 들어와 한 기관의 사람이 되어, 선교비도 한국교회의 예산항목 안에 넣어서 단일예산을 세우고, 선교사의 사업요항과 임지결정까지도 총회에서 의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교적 소속이 선교지 교회의 총회에 있고, 온전히 한국교회 총회에 이명될 수 없는 관계로 한국 총회와 선교지 교회 총회와는 일대일로 교섭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한국교회 총회의 相違한 작정이 선교지 교회 총회에서 가결되느냐가 문제거리였다.

1년 이상 절충으로 말미암아 결국 선교협의회를 해소하고 한국교회 총회 안에 들어온다는 원칙은 합의되었으며 그 구체안으로 한국 총회 내에 특별기획부라는 부서를 신설하여 거기서 外來선교비를 料理하는 예산 작성과 선교사업 및 인사배치 등을 의결하여 한국총회 전체회의의 가결에 의하여 한국교회를 통하여 시행하도록 낙착되었다.”37)

37) 김재준,「외국선교사의 위치(상)」『동아일보』1958년 2월 15일자.

김재준 목사는 이미 그 시기부터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와 캐나다연합교회와의 협의를 통해서 자주적 선교 동역 관계를 정립해 갔던 것이다. 그는 그 때의 일을 한 강연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선교사시대는 완전히 지나갔습니다. 다만 동역자 또는 친구로 의의를 서로 나누는 것 뿐입니다. 선교부란 것이 그들 본국에는 있지만 우리 총회에서는 그들의 총회원이 되고, 사업비도 본국에서 직접 그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총회예산에 편입시켜 총회 재정부에서 가장 긴요하다고 인정되는 일에 쓰도록 되었습니다. intermission 사업비로 오는 것도 총회예산에 편입되지만 총회를 경유하는 것뿐이고 재량권이 없으며 선교사들의 생활비로 오는 것은 총회가 관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선교사 파송에 관해서도 한국교회 총회의 요청에 의하여 적당한 인물을 파송하도록 되었고, 어떤 특수부문의 전문가가 필요한 경우에 한국인으로서 적격자가 없다고 인정될 때에만 해외선교당국에 요청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파송된 분 중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그 인간성이 한국교회 봉사에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총회의 심사를 거쳐 해당 선교사의 소환을 요청할 수도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장로회와 캐나다연합교회와의 관계에서 되어진 것인데 양측에서 동수의 위원이 선정되어 초안 작성에 십여회의 토의와 연구를 거듭하였고, 이 합동위원회의 초안에 양측 총회에서 약간의 字句 수정을 가하여 통과하기까지에는 3년이 걸렸습니다.”38)

38) 김재준,「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1984. 7.)」,『김재준전집』17, 376~377쪽.

김재준이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추구한 것은 형제교회로서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력 관계 즉 동역관계였다. 선교사와의 관계가 대등한 입장에서 동역관계가 될 때 선교사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고, 그 긍정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자율성도 확보․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송된 선교사는 반드시 그 파송받은 국가의 문화를 존중하고 동정적이고 친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사가 우월감을 갖거나 토착교회를 지배하고 지도하려는 것은 구시대의 잘못된 관계라는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생애 가운데서 선교사들과 맺은 관계와 그가 선교사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가 하는 것을 해방 전과 후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이제 이를 요약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김재준 목사의 선교사관은 1920년대 후반 미국 유학시절과 1930년대 귀국 후 목회 생활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당시에 김재준 목사가 접촉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우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보수적 신앙 내지 근본주의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동역자가 아니라 주인이나 귀빈처럼 행세했다. 평양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지배하여 그가 배운 미국의 신학에 비해 너무나 뒤떨어져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형성된 김재준의 선교사관은 선교사에 대해서 우호적일 수 없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가자, 한국교회는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김재준 목사는 1939년 9월경부터 조선신학원 설립의 실무를 맡았다. 그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목직을 사임한 바 있었지만,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은 그러한 개인의 신앙양심을 희생하고서라도 이룩해야 할 더 큰 가치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국 1940년 4월 조선신학원을 개원하여 교수를 맡았다.

해방 직후 남한 지역에 장로교신학교는 김재준이 원장 겸 교수로 있던 조선신학원밖에 없었다. 조선신학원은 이사진과 교수진을 보강하고 명칭도 조선신학교로 바꾸어 미군정의 학교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으며, 1946년 6월 장로교 남부총회(제32회 총회)에서 총회 지정 신학교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1938년 폐교 전의 보수적인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꿈꾸던 목회자와 신학자, 또한 그들의 신앙지도와 영향을 받은 일부 학생들이 김재준을 비롯한 조선신학교의 진보적인 신학교육에 반발하여 1947년 4월 제33회 총회에 이른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김재준 목사와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 후신)을 지지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1953년 6월 호헌총회를 열고,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전신)를 조직했다. 이러한 교단 분립 과정에서도 캐나다연합교회선교부를 제외한 재한 장로회선교부들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의 신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재준이 생각한 바람직한 선교사와의 관계는 형제교회로서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력 관계 즉 동역관계였다. 선교사와의 관계가 대등한 입장에서 동역관계가 될 때 선교사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고, 그 긍정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자율성도 확보․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와 한국신학대학을 지지한 캐나다연합교회와 선교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선교사와의 관계를 대등한 입장에서 동역자 관계로 정립했다.39)

39) 『해외협력관계역사자료집』,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해외선교국, 199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