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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8회] 장공 김재준 목사와 미국신학 / 서보명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7 13:13
조회
1229

[제18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9년 3월 19일(목) 오후 5시 - 7시

장공 김재준 목사와 미국신학

서보명 교수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I] 머리말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사상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는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살면서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고 그의 신학을 공부할 기회가 사실 없었고,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그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전집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은 장공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나의 노력과 생각이 매우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또 그동안 진행된 장공사상 연구의 성과를 전혀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복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얘기를 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사담으로만 남는 글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다.

다소 엉뚱한 주제라 생각될 수 있는 ‘장공과 미국신학’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도 무의식 중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제가 정당성이 있다면, 몇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20세기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까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나라이고, 미국의 역사가 출발한 이래 그 본질에 대한 학문적이고 정치적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다. 나는 그동안 미국 밖의 학자들이 본 미국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진보신학의 김재준 목사가 그의 신학적 입장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신학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떤 지적 동반자와 대화를 했었는지를 살펴보는 건 그가 간절히 원했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연대, 한국신학의 세계화와도 연관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신학적 인상을 정리하고, 그가 보았던 미국은 어떤 곳이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신학과 미국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이 글을 통해 김재준 목사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부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거나, 그의 사상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입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II] 내가 읽은 김재준 목사의 학문론

김재준 목사의 사상은 다양한 분석과 평가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신학자로서의 평가가 두드러지게 많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학자로서는 성서학자로 더 부각된 면도 이유가 있고, 신학 특히 조직신학이라는 ‘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보지 않았던 자의식도 거기에 한몫을 했다고 보여진다. 신학자로서의 장공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깊게 받은 인상이 바로 그 자의식과 연결된 것이다. 즉 자신의 신학적 역량이나 성과에 대해 항상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는 것, 자신이 ‘학’으로서의 신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 등이다. 자신의 신학을 말하면서 “ ” 안에 넣고 “신학”이라 쓴 것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신학을 따옴표 속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신학을 따옴표 신학이라 할 수 있을까?(아니 그 누가 따옴표 없이 신학을 얘기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말과 뜻이 분명히 담긴 글이지만, 어디선가 듣고 읽었던 것을 되새긴 것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그였다. 성경이 빠지지 않는 그의 신학 논증은 그가 생각했던 신학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즉 신학은 주어진 텍스트, 주어진 역사,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장공은 신학이 체계적일 수 있는가 묻는다. 역사 속에서의 체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인 체계도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할 것이라 생각한다. 신학이 어떤 사회나 정치체제에 순응하여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체제적인 학문일 수는 더더욱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신학은 자유로워야 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끊임없는 외침과 따옴표는 모순적이지 않다. 신학의 자유는 우리가 싸워서 쟁취한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 속에서 주어진 자유이고, 신학의 비판은 자기비판과 고백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장공은 신학적 언술이 본질적으로 Provisional하고(잠정적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항상 되묻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옴표가 그 작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을 하면서 혹시 자기가 사기를 치고 있지나 않나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학에 더 잘 적용이 되는 말이다. 장공이 평생 교리적이고 비판적이지 않은 신학을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은 노년기 자신의 설교, 강연, 산문 등을 범용기라는 이름으로 엮으면서 자신의 글을 평가하기를 “‘설교’라기에는 너무 속되고 ‘논문’이라기에는 너무 짜임새 없고 감상문이라기에는 너무 윤기가 없는” 것들이라 하였다. 그래도 버리긴 아깝다는 자신의 글들을 ‘설화’라 표현했다. 선언과 선포 대신 속된 세상이야기가 많은 것이라면 설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떠나 설교라는 Praxis에 대한 비판은 아닐까. 자신의 글이 짜임새가 없고 Footnote도 없어 논문이라 할 수도 없다는 말은 Footnote로 표상되는 논문 문화를 비판하는 말로, 수십 년에 걸친 그의 글쓰기 작업을 반체제적이고, Non-Conformist적이었던 그의 삶 자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1) 설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있지 않은 그러나 있어 왔던 이야기이다. 저자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Footnote가 아니라 따옴표 속에 존재한다.

1) Footnote라는 제도에 대한 장공의 반감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Footnote를 체면을 세우려는 일이라며, 학문의 자립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면서 세계를 향하는 신학정신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신학을 추구했던 후배 신학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남동과 윤성범 같은 이들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했고, 그 작업을 계승할 후배들이 어디 있나 찾았다(18.110).

본인의 글을 ‘학’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했다. 그러나 ‘글’을 달라는 곳은 많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마감에 맞추어 써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줄에 반전이 있다. 그렇게 글을 쓰게 되지만 자신의 ‘붓’은 피곤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쓰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뜨거움이 내 뼛속에 숯불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12. 136-전집 12권 136쪽). 피곤해지지 않은 붓, 글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아니었으면 18권의 전집, 20권의 번역을 설명할 수 없다. 그의 글의 문체는 오히려 말년에 더 명쾌한 자유로움이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해방 후 급하게 변해온 한글이 장공의 글 속에도 시간이 가면서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고, ‘글’과 ‘학’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년기의 풍요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중년에 글이 떠난 듯 안타까워하며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얘기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장공이 학문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학문의 세계”란 글에서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더 맞는 말을 한다. “요새 전문가(Professional-필자의 번역)란 것은 기계의 한 부분으로 기계와 함께 움직이는 인간입니다. 주체적, 창조적인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원형에서는 멀리 소외된 존재라 하겠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기관인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면서 스스로 비인간화해 가는 것이 현대 학문의 분야에서 되어가는 운명입니다.” 지식의 전문화로 부족해 학문의 전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시대,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기관인으로 인생을 마치기를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채찍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학문이 “빛을 잃고”, “상품화” 되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시대에 학문은 없다고 장공은 말한다. 그는 “학”은 정권의 기관도, 기업의 기관도 아니라, ‘진리의 기관’이라 한다. 진리에 의해 움직이고, 진리를 말하고 대변하고 실천하는 장이 학문의 장이라는 말일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하느님의 진리, 그 역사적으로 계시된 진리”를 대상으로 하고 그 활동장소는 의를 위한 역사의 무대”(18.282)라 말한다. 신학을 하는 사람은 교회라는 기관의 직장인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신학이 교회의 학문이어야 하는 사명을 잊어서도 안 된다.

김재준 목사는 체계화된 신학을 생명의 힘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를 밝혀내기보다 저자의 학문의 탑을 쌓는 역할을 한다는 의심을 한다. 그리고 예수를 ‘學’으로 대하는 것을 거부했다. 사실 신학이 조직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근대 이후 유독 신학만이 받아왔다. 신학의 학문성을 의심받던 역사의 산물이다. 장공은 그 요구를 거부한다. 그에게 신학의 당위성은 사회과학으로부터 받은 인증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받쳐줄 교회의 학문으로,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교회를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신학의 생명은 생명력 있는 교회를 통해 나타나고, 종국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받는 세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된 곳에는 인간의 학문도 이미 종언을 고한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생활신학”을 말한다.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날마다의 내 생활 자체가 신학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믿음과 행동의 일치에 노력해 왔다는 정도에 불과한 인간”이었다는 고백을 한다(18.367). 장공은 신학을 하는 사람은 신학을 “살아야”한다며 존재와 행위의 구분을 짓지 않는데, 바로 그 ‘구분없음’을 그는 ‘생활’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장공은 생활신앙을 전제로 하는 이 생활신학을 조직적인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보았다 할 수 있다.

내가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고 그의 지적이고 인간적 성향에 대해 떠오르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Non-Conformist라는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믿습니다’하는 다짐과 함께 뜨거운 마음과 기쁨이 충만한 체험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음이 깊어갔지만 교회에서는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설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우찌무라와 같은 이들의 일본어 기독 서적을 통해 영적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동경의 청산학원 신학부에 입학하게 된 것도 신학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목사가 되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고 한다. 그곳은 자유로운 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정작 졸업논문을 쓸 때는 바르트의 신학을 다룬 글을 쓴다. 당시 일반적인 미국유학은 미국선교사들의 추천을 통해 가는 것이었다. 송창근 목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따로 선교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추천을 부탁하는 요식행위도 따르지 않았다. 귀국 후에는 선교사들을 통하지 않고 미국유학을 했다는 이유로, 또 교단의 추천이 없었다는 이유로 장공은 노회에서 푸대접을 받는다. 프린스톤에서 그는 근본주의 신학자 메이첸의 과목을 많이 들었다. 그 이유도 일본에서의 공부와는 다른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알고 싶었다는 것이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두 파로 갈라져 싸우는 판국에 의도적으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비교적 온건했던 웨스턴 신학교에서 마치 신학적 논란에서 한발 물러나 “원점”에서 연구해보려는 듯 구약을 전공분야로 선택한다. 졸업 논문을 두 개나 쓰면서 여러 성서 사본들을 인용한 “히브리어 문헌이 너저분하게 인용되었으므로 제법 ‘학’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근대 서구 학문의 학문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했던 ‘각 주’를 다는 행위에 대해서 그 학문적 유용성을 인정하지 않은 듯 하다. 귀국 후 김재준 목사가 장로교 주류의 신학이었던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지 않고 그로인해 겪은 아픔, 자유로운 신학을 주장하고 자립적이고 민족적인 교회를 갈구하면서 얻은 상처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의 Non-Conformism은 70대 노인의 몸으로 캐나다에서 반독재 북미운동권을 이끄는 모습에서 절정을 이룬다.

[III] 내가 읽은 김재준 목사의 신학

장공의 사상에 있어서 신학적인 면의 본질은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모습과 연관이 있다. 보수정통 신학을 승계한 이들은 근본주의라는 신학운동으로 재무장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대결을 했고, 자유주의 신학을 승계한 이들은 신정통주의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신학운동을 펼치면서 시대의 위기감과 가능성을 받아드리고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적 유산을 계승한다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미국신학의 Reinhold Neibuhr, H. Richard Neibuhr, Paul Tillich 등이 그 다양성의 예라 할 수 있다. 장공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보수적인 자유주의”라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이 표현에 무게를 두고 장공식의 20세기 초 신학의 딜레마 탈출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보수적 자유주의란 두 진영의 일면을 따온 표현이다. 그러면 이것은 신정통주의 신학과 어떻게 다를까? 신정통주의 운동이 다양한 이름과 성격으로 전개되었다면 장공의 보수적 자유주의 신학도 신정통주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신학을 현재에 와서 명칭을 두고 논란을 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일단 신정통주의 신학의 주된 내용이라 생각하는 것들과 장공의 사상은 다른 점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 장공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신정통주의라 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둘째, 한국이 기독교 전통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 이유가 있겠지만, 장공은 기독교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로 자리 잡아야 하고, 교회가 국가와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국가의 일에 적극 참여하여 협조와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서 신정통주의의 일반적인 입장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자유주의’에서 보수적이란 입장에서는 신정통주의이고 나아가 보수정통주의적인 면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주격으로서의 하나님 이해, 일관된 성서이해를 기초로 한 혹은 성서신학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장공의 사상을 말한다. 그러나 장공의 보수성은 교리적 역사이해에 반하는 비판적 역사이해에 기초한다. 비판적 역사이해는 성경까지도 대상으로 삼는다. 장공은 그가 평생을 두고 주장했던 자유로운 인간, 하나님의 주권, 인간해방의 복음, 사랑의 공동체 등의 개념이 성경을 통해서 또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상통하는 것으로 믿었고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다.

장공의 탈출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한국적 신학의 모색을 통해서였다. 한국신학을 의도적으로 찾는 것은 후세대들의 작업이었지만, 장공의 신학의식 속에는 자유주의든 보수정통이든 한국의 신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의 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세계’라는 것이다. ‘한국’과 대비되는 것으로도 보여질 수 있는 ‘세계’이지만, 그 세계는 한국의 교회가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자세로, 그리스도교가 민족의 종교라는 자세로 참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민족의 종교여야 한다는 신념은 한국의 역사를 종교사 차원에서 이해하고 뜻을 추구하게 만든다. 장공의 글에는 유달리 한국역사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성경을 다루고 신학을 다루는 글도 한국역사 풀이로 논의가 빠지는 경향도 있다. 후에는 아예 한국역사만을 다루는 글도 많이 썼다. 특히 3.1절을 기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독립운동이 나타내는 독립과 자유와 자주에 대한 열망이 그에게는 한국의 교회에서 그리고 신학으로 이뤄내야 할 자유로운 인간상과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원형이었다. 여기서 장공의 신학 전체를 아우르는 전제를 찾을 수 있다면 그가 신학을 한국역사와의 대화 속에서 했다는 것이다. 장공은 한국역사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본다. 그 종교역사를 한국 그리스도 신학의 자료로 삼는 것은 당시 신학계의 현실에서 볼 때 용기 있는 일이었고, 신학방법론 차원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장공의 이런 모습은 자유주의 신학의 비역사적인 면과 근본주의 신학의 무비판적인 역사인식에 대한 신학적 대응이라 볼 수 있다.

장공의 탈출법의 또 따른 방식은 “생활신앙”이란 개념을 통해서인데, 이 개념 역시도 4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그가 줄곧 사용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자신의 오랜 신학활동 가운데 유일하게 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신앙의 생활화가 아니라 생활의 신앙화란 차원에서 철저한 그리스도적인 삶을 강조했음을 느낄 수 있고, 자유주의적인 신앙과의 타협을 거부했다고 볼 수 있다. 장공의 생활신앙의 사상이 신근본주의적인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과 다른 이유는 “생활”이라는 용어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생활신앙의 근거로 야고보서의 “행함”없는 믿음에 관한 문구를 주로 언급한다. 성서적 근거를 거기서 찾는 것이지만, 행함이나 행위 또는 행동마저도 생활과는 엄격히 다른 것이다. “생활”이 담고 있는 역동성 있는 존재의식을 “행”이란 말이 담아낼 수 없다. 장공의 신학적 고민 속에서 나온 말이라 본다. 생활이 나타내는 신앙의 진취성, 적극성은 장공이 율법주의적이라 표현한 근본주의의 신앙과 차이가 있다.2) 생활은 또 역사적인 개념이다. 한국 역사의 고난 속에 간직해온 삶을 지향하는 정신은 종교역사 속에 남아있고, 생활신앙은 그 정신과 의지로 그리스도교를 민족의 종교로 만드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장공의 20세기 초반 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특징은 세속적 역사라는 기존신학의 규범적 요소 밖에서 돌파구를 찾았다는 것이다.

2) 장공 자신은 이렇게 말을 한다: ‘생활’이란 것은 자유하는 주체로서의 능동적이고 사회적이고 상황적이면서 창조적인 경우에만 건설되고 약진한다. 피동적이고 상황에 적응하고 남을 모방만 하고 자기안전 제일주의에 농성하고 보수에만 급급하면 구차스러운 생존은 가능할지 몰라도 건설적인 ‘생활’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신앙과 생활관계에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용어까지도 ‘생활신앙’으로 바꿨다(12.157).

[Ⅳ] 장공과 미국

18세기 이후 미국은 많은 유럽의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Alexis de Tocqueville에서 최근의 Bernard-Henri Levy까지 미국은 개인주의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 비역사적인 나라, 미래 중심의 나라, 대중문화의 나라 등으로 알려져 이론의 대상,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는 미국을 경제와 정치의 종속을 요구하는 패권주의 국가로 문화매체를 통해 의식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극복의 대상이 되어왔다. 최근에는 9.11 사건 이후 과거의 제국이 미국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했다는 논리와 더불어 미국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미국을 돌아본 많은 학자들의 공통적인 인식 중 하나는 미국의 광활한 평원을 보고 자유란 개념을 공간적인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자유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 미국역사의 종교적 유산만이 아니었고, 미국 시민사회 속 개인주의를 규정하는 용어만도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지형적 공간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 공간성은 일반인들의 생활과 습관 속에 배어있고, 바로 이런 일상성이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불란서 혁명의 실패이후 미국에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했는지를 목격하러 온 Tocqueville,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 자본주의의 타락에 관심이 있었던 맑시스트 비평가 C.L.R.James, 포스트모던 시대의 공허함을 미국에서 확인한 Baudrillard, 그리고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에게 까지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이다.

김재준 목사가 미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질문은 필자가 평소 갖고 있던 미국론 또는 미국의 이론화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최근 같은 관심으로 함석헌 선생의 미국관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함석헌은 생전에 미국을 6번 방문했었고, 그 소감을 여러 차례 편지나 에세이를 통해 남겼다. 나는 특히 1962년 첫 번째 방문과 1970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함석헌의 시각 차이에 주목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62년 방문 때는 이상화된 미국-에머슨과 링컨과 휘트먼과 같은 이들이 키워낸 미국-에 대한 그의 생각에 도전을 주는 모습을 보더라도 의도적으로 좋게 해석하려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70년도 방문에는 이미 달라진 관점을 갖고 있어 미국의 불의한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두 지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변화를 함석헌 선생이 63년부터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투쟁하면서 느꼈던 국제정치의 현실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함석헌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난 김재준 목사의 미국관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과는 달리 김재준 목사는 미국에서 4년을 유학했다. 젊은 시절의 4년이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기간 미국의 문화, 사상, 신학을 접하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물어보는 것은 정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이 정당하다고 그에 맞는 좋은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4년 동안의 체험을 통해서 받은 영향을 글에서 찾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만약 Non-Conformism이라는 표현이 그의 성향에 어울린다면, 그것만큼 미국의 본질적인 정서에 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장공이 미국에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유산이 그런 자립적이고 자주적인 가치임에는 분명하다.

장공은 70년대 초반 “미국의 이미지”라는 짧은 글에서 미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회고한다. 어린 시절 그가 갖고 있었던 미국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고 이상화된 것이었다. 양심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 자유라는 이상의 비전을 수백 년을 통해 개척해 낸 사람들의 나라. 노예제도로 큰 오점을 남겼지만 노예해방을 위해서 전쟁을 통해 속죄했고, 한일합방 때 일본에 동조했으나 6.25 참전으로 위신을 회복한 나라. 그 후 공산주의와 대결하면서 후진국들을 도와 새 역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챔피언. 장공의 미국 인식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글에서 “요새 와서는 미국의 이미지가 다소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을 만든 이상과 비전이 현실제일주의로 전락했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자유, 평등, 정의, 평화의 이상이 돈과 무기와 장삿속과 욕심이 지배하는 현실로 바뀌었다는 지적이었다. 여기서 “요새”가 지적하는 시기는 장공이 현실정치에 관여하게 된 60년대 이후라 생각된다. 그 이후 장공의 글에는 미국이 건국의 이상과 이념을 회복해야 한다는 기대 섞인 언급도 하지만 주된 논조는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었다.

장공은 192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2년 돌아왔다. 4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분석은 따로 없다. 1932년 귀국 당시 미국이 겪고 있었던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기록한다. 후버 대통령이 경제 실패로 쫓겨난 상황이나 루즈벨트가 정치적으로 뜨는 상황을 기록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변하는 모습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당시 미국의 상황보다 한반도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잦은 시립도서관 출입으로 한반도와 아시아 쪽 상황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는데도 미국 언론이 무관심한 것에 분개하기도 했다. 일미전쟁이 곧 일어나리란 사실도 예측했고, 그것이 귀국을 생각하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장공은 휴전 협정이 맺어졌던 1953년 7월 “썩어가는 제국”이란 글을 쓴다. 로마제국의 몰락하는 과정을 짧게 서술한 글이었다. 끝부분에 미국과 러시아의 제국 건설 과정을 언급하면서, 그 본질을 세속주위와 무신적 물질주의로 규정한다. 두 나라 모두 썩어갈 과정을 밟고 있지만 러시아는 정치적 억제로 미국은 교회의 역할로 부패를 견제한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의 빛과 소금으로 현대문명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당시 미국에는 세속주의와 기독교 정신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론을 펼친 많은 학자들은 개인주의적인 자유와 그 자유가 어떻게 제도화 되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장공에게도 자유는 인간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유론을 펼쳤지만 미국에서 발전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자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자유는 원천적으로 개신교 운동에 의해 발견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간의 자유는 사회계약이나 민주적 제도를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의 본질적인 요소로 본 것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자유가 정치적으로 보장받고 정치적 자유로 존재하기 때문에 허무와 혼란을 야기하고 결국 폭력으로 치닫는다고 보았다.

장공의 미국관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억압과 6.25 전쟁의 아픔 그리고 냉전시대의 대립적인 논리를 통해 형성되었다. 의외로 유학시절의 경험이 미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한 관점을 유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기독교인으로 사회주의 차원의 비판적 시각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자본주의의 타락과 종말을 예고하지도 않았고, 또 그의 Non-Conformist적인 기질 때문에 미국적인 것을 무작정 선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도 않았다고 본다. 6.25 전쟁까지의 20세기 한반도 역사를 기독교인으로 체험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를 신뢰하는 역사관을 갖게 만들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장공은 6.25 당시 미국의 엄청난 폭격을 사실로만 기술했지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하지 않았다. 무신론적인 공산권과 생존이 걸린 전쟁을 하면서 남쪽이 이겨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원인을 얘기하면서 약간의 여운을 남기는 말을 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의 생각에 미국의 전쟁 유도설이 있다는 것이다(13.254). 본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한국의 정치적 사건에 미국이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그의 생각에 빗대어 보면 그런 생각이 아주 없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장공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때 미국이 미리 알지 못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그때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계속 되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세계사적인 조롱거리”가 됐다고 했다(14.57). 그 이후 전두환 독재정권의 시대까지 미국에 대한 장공의 강한 비판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란 경고까지 한다. 미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언제나 힘센 자 편에” 서는 미국. “Power Politics만이 현실이라고” 믿는 미국. “영양과잉의 거인,” “Big Brother”가 되어버린 미국. 미국이 이렇게 된 이유를 장공은 “맘몬주의”에서 찾는다. 맘몬의 신은 다국적 독점기업을 통한 경제침략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카터가 내세운 인권을 우선시 하는 외교정책도 독점 기업체 이익 앞에는 꼬리를 내렸다. 장공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실상은 세속주의적 맘몬신을 국교로 신용하는 나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12.235). 당연히 이런 비판은 현재까지도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장공은 냉전 시대까지만 목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레이건과 함께 등장한 신자유주의 세력까지도 목격했다(11.394). 미국이 잘못되기 시작한 원인은 인종차별, 즉 “다른 인간을 비인간화”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인디언들의 처절한 비극과 흑인노예들의 강제 노동력이 미국을 만들었다. 맘몬주의가 등장한 것은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 때문이라 보았을 수도 있다.

장공은 이런 그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크리스천이 미국을 적국으로 여겨 멸망을 바랄 수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시종일관 악의 없는 진실로 ‘그 나라가 잘 되도록 힘쓰며 잘 되기를 하느님께 기원해야’(예레미야 29:7)”한다고 말한다(11.492). 장공의 미국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역으로 회개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미국이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감당해야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보았다. 냉전을 종식시키고 자유로운 인간과 사회로의 세계적 변혁은 그 시대 가장 비판이 자유로웠던 미국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할 시대적 요청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미국이 건국초기의 자유, 평등, 정의, 박애 등 건국이념, 다시 말해서, 청교도 시대의 이상주의 위에서 자기 역사와 세계 역사를 주름잡는 나라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National Interest 국가이익이 아닌 National Justice를 앞세우는 그런 나라가 되면 미국이 ‘존경’ 받을 것이다”(14.178).

[Ⅴ] 장공과 미국신학

장공은 20세기 미국의 주요 신학을 모두 목격했고 그 내용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자유주의 신학, 보수 정통주의 신학, 다양한 신정통주의 신학, 세속신학, 그리고 흑인신학까지를 비판적이고 자유로운 신학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그 장점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 어떤 신학과도 동지의식 이상의 감정으로 자신의 신학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의 신학적 성향이 그런 사상적 추앙을 허락하지 않았고, “한국의 Machen”이라 불리던 박형룡의 신학과 같이 근본주의적 정통신학을 무비판적이고 비역사적인 자세로의 수용이 교회와 신학교육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공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신학은 당연히 보수주의 정통신학이었다. 그 영향이 지극히 부정적인 것이었고 개인적으로 큰 상처를 가져다준 것이었지만, 장공이 노년에 되어서도 정통과 이단의 문제와 근본주의 신학의 폐해에 대해 글을 써야할 동기를 제공해줄 정도로 정신적이고 실존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신학은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신학이었다. 그 신학만을 유일한 신학으로 또 교회의 가르침으로 삼았던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의 교회, 특히 한국장로교는 신앙적 포로상태에 있었다고 보았다. 장공은 그 신학의 역사적 뿌리와 한계를 살펴보며 그로부터 탈출하려 애썼고, 그로인해 미국선교사들의 세력에 의해 매몰찬 공격을 받았다. 장공이 평생을 두고 맞섰던 근본주의 신학은 한국신학사의 한 장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근본주의 신학이 미국에서 사라진 신학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현재까지도 아직도 가장 강력한 신앙운동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공이 지속적으로 그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근본주의 신학이 시간이 지나도 왕성하게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10년 가까이 북미에서 생활하면서 그 문제를 새삼 느꼈을 수도 있다. 70년대 빌리 그레함 목사의 부흥집회가 백만 명 이상 초유의 인파를 동원하는 상황을 두고 장공이 분노한 이유는 한국교회의 비자주적인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시 근본주의 신학으로 무장한 선교세력이 한국에 상륙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위기감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장공의 신학은 지적 파트너들과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상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대립의 관계에 있었던 근본주의적 정통신학과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 면이 많다. 신학적으로 불행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투쟁을 통해 얻은 상처와 교훈으로 그에 반대되는 곧 자유롭고 비판적인 신학을 기초로 하는 신학운동을 시작하고 교회연합운동과 현실참여운동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 정통신학에 대한 장공의 평가는 분명하다. 선교사들이 들여와 한국교회를 70년이나 지배한 그 신학을 극단적인 보수주의라 평가한다. 복음을 “율법화”하고, 인간을 “물건화”하는 이 신학운동은 이미 유럽에서 생명을 다했으나, 그 잔존세력이 프린스톤 신학교에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프린스톤에서도 실패한 이 세력은 대거 한국으로 옮겨져 그 신학을 한국에 이식하고 한국을 극단적 보수주의 선교구역으로 만들었다(4.432). 이 근본주의 미국신학으로 인해 자유도 비판도 없는 신앙과 신학이 한국을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장공은 수없이 많은 신학과 인문학의 사조들을 번역과 저작으로 소개했다. 한국의 1세대 신학자로 신학이라는 학문이 한국에 자리 잡기 전, 아무도 신학적으로 이끌어 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부했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있어서 한국 교회와 역사의 현장 속에서 다양한 서구 학문의 조류들을 소개시키는 일을 선택했다. 실제로 그가 다루었던 인물이나 사상사의 흐름들을 모아보면 그의 독서와 중요한 개념들을 선별해내는 통찰력에 놀라게 된다. 신학과 성서학을 넘어 다양한 철학과 사회학을 다루었다. Pitirim Sorokin과 Lewis Mumford 같은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뛰어난 사회사상가들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장공이 다룬 미국 신학계의 많은 인물 중 H. Richard Niebuhr(1894∼1962)에 주목하고자 한다. 장공은 Niebuhr의 Christ and Culture를 1958년에 번역했고,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1963년에 쓰기도 했다. 한 인물의 사상을 다룬 글을 많이 쓰지 않았던 장공이었지만, 짧은 글을 통해 니버의 생애와 사상의 여러 부분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끝에는 그의 저술목록까지 첨부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니버의 사상에 장공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신학적 관심이나 개인적 인격에서 장공과 비교할만한 인물을 미국신학계에서 찾으라면 나는 니버를 말하고 싶다. 이런 비교가 별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장공이 높이 평가했다면 그 이유를 살펴보는 차원에서라도 다루어볼만한 주제라 생각한다.

니버 사상의 특징을 말하자면 먼저 윤리적 입장에서 신학을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입장은 신학적 윤리였기 때문에 개인의 윤리를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이해한다. 니버에게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사회학의 이론을 빌린다. Kingdom of God in America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에서 그는 미국에서의 교단이나 종파운동은 민족적 배경과 문화적 유대감에서 출발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의 본질을 저버리는 행위로 이해했다. 이와 같이 교회와 세상, 성과 속, 기독교와 국가와 같은 문제는 니버에게 미국의 현존하는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세속문화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유형별로 정리한 Christ and Culture 역시도 미국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관심에서 출발했으며, 20세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 되었다.

이런 니버와 장공 사이에 유사한 관심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윤리의 문제를 신학의 한 부분으로만 취급하려는 경향을 반대하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신학자로 한국기독교와 미국기독교를 각각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는 데에서도 비슷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신학적 현장이 바로 그 나라의 기독교였고, 신학은 그 현실 속에서의 고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공도 언급한 적이 있는 니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교회의 현장과 역사가 그들의 ‘내적역사’였기 때문이다. 사실 니버나 장공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본질을 지키도록 교회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교회연합운동과 W.C.C.도 그들의 활동하는 장이었다.

장공이 프린스톤 신학교로 유학을 안 가고 예일로 갔으면 어떠했을까? 그의 신학발전에 좀 더 도움을 받을 학자들 밑에서 배우고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니버는 실제 장공이 웨스턴에서 공부할 때 예일대학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반대로 장공이 프린스톤으로 가지 않았으면 근본주의 정통신학을 그만큼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할 수 있다. 장공이 어디에서 공부했든지 개인적 성향 때문에 누구를 추종하고 따르는 일을 안 했더라도, 좀 더 같은 입장을 지닌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란 추측은 할 수 있다.

니버의 첫 저서였던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은 장공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인 1928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교단주의가 미국개신교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엽적인 문제에 빠지고 서로 경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본질적인 면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장공의 보수 정통주의 장로교단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면이 있다. 그는 정통주의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결국 우상숭배로 변했다고 한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본국에서 밀려나 한국에 정통주의 천국을 세우려고 했다고 비판한다. 그 천국은 배타적인 교단주의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장공에게 그 교단주의는 교리체계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삶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억압적인 구조로 극복의 대상이었다.

신앙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은 니버와 장공이 공유한 신학의 전제라 할 수 있다. 장공이 그 주체성은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자유로 발전시켰다면, 니버는 한 걸음 더 나가 주체성을 책임져야할 자아(Responsible Self)로 이해한다. 둘 사이의 차이는 신앙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과 자유가 실체를 잃어버리고 추상적인 방종으로만 흐르는 한국과 미국의 상황의 차이라 하겠다.

니버가 1930년대 미국역사의 혼란기 속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유일신 중심의 초월신앙을 주장한 방식은 장공이 전개한 신학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두 사람에게 큰 문제는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이나 근본주의 신학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시대에 맞는 신학을 할 수 있는 가였다. 니버는 자본주의, 인본주의, 민족주의 등의 이념과 타협하면서 세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진 교회와 종교적 상징의 초월성이 부정되던 신학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교회의 해방과 신중심적인 신앙과 신학을 주장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근본주의의 신학적 입장을 되풀이 할 수도 없었다. 바로 여기에 즉 모든 신학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성이라는 입장은 니버가 자유주의 신학의 바탕에 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지적한 방식은 역사분석이었다. 사회학적 유형론을 도입해 적용한 The Kingdom of God in America라는 책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니버는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은 미국역사의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는 지적을 하면서 신학운동의 시대성과 그 한계를 논했다. 그 한계는 다시 신학의 본질을 말해준다. 인간 언어의 한계와 신학적 언술의 주관성, 그에 따른 신앙의 우선성 등이 바로 그 본질이다.

장공은 “교회는 무엇을 하려는가”(1946)라는 글 즉 니버의 Christ and Culture보다 5년 먼저 쓴 글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교회와 세속과의 관계의 유형으로 판단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는 세 가지 유형을 말한다: 1)교회가 세속을 지배한 시대, 2)세속이 교회를 지배한 시대, 3)교회와 세속이 신사협약식으로 병행한 시대. 그러나 현대의 상황은 다르다고 한다. “세속이 교회와 대립 또는 대결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다만 대립 또는 대결할 뿐 아니라, 세속이 교회를 代行하려는 경향이 늘어갑니다.” 세속이 교회를 대행하는 시대란 평가는 전체주의 국가에만 적용되는 표현은 아니다. 교회의 종교적 역할을 교회가 못하는 사회에서 대중, 놀이 문화권에서 대행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 증명된 사실이다. 여기서 장공의 유형들이 니버의 유형들과 일차적인 유사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두 사람 모두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교회가 교회로 바로 서는 길을 모색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장공이 그의 저작 생활 초기부터 갖고 있었던 이 관심을 수십 년 동안 유지된다. 이 관심이 표현된 한 방식은 교회와 국가에 대한 연구이다. 교회 혹은 기독교와 국가의 문제는 장공에게 끝나지 않은 문제였고, 시대마다 또 사건이 있을 때마다 새롭게 생각되어야 할 신학적 과제였다.

장공과 니버를 연결할 또 다른 고리는 그들의 윤리관이다. 니버의 윤리는 정해진 법칙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행복과 목적을 추구하는 실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인간이 반응하고 응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나는 끊임없이 그 상황에 맞는 행위를 찾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보편적인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창조와 구속의 행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니버의 신학적 윤리관은 -장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적” 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니버의 윤리관에 비하면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좀 더 구체적이다. 장공은 창조된 자로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응답을 ‘사랑’이라고 한다.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은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즉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사랑도 성숙과정을 통해 이타적인 모습을 갖게 된다. “사랑의 범위를 넓혀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확충시키려는 것이 사랑의 공동체”이다(18. 531). 장공은 우주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까? 의외로 간단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우주에 수없이 많은 위성을 발사하고,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쟁이 환상이 아닌 상황에서 우주는 막연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행위의 영역이고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우주도 인간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다.

[Ⅵ] 끝내는 말

김재준 목사는 신학자였다. 생활, 세계, 역사, 자유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 신학자였다. 이 글은 그 개념들의 연대성을 찾아본다는 목적이 있었다. 장공의 글에 입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라, 그의 사상의 일반적인 면을 나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초반에 다루어야 했다. 따라서 장공과 미국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그 개념의 연대성을 살펴본다는 작업은 진행형으로 남는다. 장공은 한국교회가 신학적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와의 연대를 꿈꾸었고, 한국신학이 세계신학과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물론 그 연대와 대화는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다. 장공은 그런 입장에서 신학을 하면서 앞서 언급한 그런 개념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개념들의 연대성을 추구하는 길은 김재준 목사의 신학을 연구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한국신학의 지속적인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서보명 교수
미국에 고등학교 때 이민 갔고, New Jersey의 Drew 대학에서 B.A.,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 시카고 신학대학에서 목회학석사 그리고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현재 시카고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신학과 철학과 문화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년 전 시카고에 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라는 연구소를 설립해 한국기독교 신학을 영어권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