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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6회] 장공 김재준의 경세사상 / 강원돈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7 11:32
조회
1419

[제16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8년 5월 8일(목) 오후 5시 - 7시

長空 金在俊의 經世思想

강원돈 교수
(한신대학교/사회윤리)

[I] 머리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공 김재준은 교회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참여하여 독재와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 비판을 한 인물로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예언자 아모스에 대한 연구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서 불의한 현실을 비판하고 삶의 전 영역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노력하였다.1) 해방 후 점철된 독재와 부패에 대해 침묵하는 교회에 대해 장공은 “이 시대를 자기의 베개로 삼고 안면하는 수면병”에 빠졌다고 질책한 바 있다.2) 박정희 정권의 성립 이후 김재준은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반대, 독재를 합법화하기 위한 삼선 개헌 저지, 유신독재에 대한 항거, 캐나다 망명 이후 한국 민주화 지원과 통일 운동 등에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실참여의 신학과 윤리에 대한 많은 글들을 썼다.3)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가 죽임을 당했던 어두운 시기에 장공은 교회의 예언자적 책임을 강조하고, 반독재민주화와 인권 옹호를 위한 정치참여에서 혁명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4)

1) 김재준,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1933), 『김재준전집』 제1권,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서울:한신대학출판부, 1992, 33. 아래서 이 전집에 실린 글을 인용할 때에는 논문의 제목을 명시하고, 가급적 논문의 집필연대를 괄호 안에 표기하고, 『김재준전집』 뒤에 권수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2) 김재준,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 (1958), 『김재준전집』 IV, 493.
3) 김재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1967), 『김재준전집』 VIII, 26~36; 또한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장공 김재준 논문 선집』,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이하 『선집』)에 실린 "역사참여의 신학" (1971), “한국에서 기독교의 위치와 사명” (1973),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1974), “교회와 세상” (1976) 등의 글들은 현실참여에 대한 김재준의 관심을 잘 드러낸다.
4) 1976년에 집필한 "교회와 세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사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소위 사회참여, 사회개량 등등에는 많이들 참여하고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정치참여’에 있습니다. 교회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신화’ 때문에 정치불참이라는 사이비한 위장이 연출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서는 교회가 정치에 참여할 뿐 아니라, 좋은 정치의 실현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에 발언한다면 그 말의 책임으로 참여까지 해야 할 것은 사실입니다. 정치참여에는 정부의정책을 개선한다는 liberalism과 정치를 바꾼다는 revolution과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교회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때와 정황에 따라 작정될 것입니다. 교회가 liberalism에는 동조할수 있어도 revolution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교조적으로 고정시킨다든지, 시끄러우니 역사참여는 애당초부터 거부하고 교회주의에 농성한다든지 하는 것은 한 ‘데나리온’을 땅 속에 묻었다가 주인에게 본전만 돌리려던 ‘악하고 게으른 종’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교회가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 있다면 그럴수는 없을 것입니다.”(『선집』, 425f.)

이와 같은 장공의 예언자적 비판 활동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에 비하면, 장공이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 근거하여 현실을 형성하고 세상을 운영하는 원칙과 방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한 경세가였다는 점은 별로 부각된 적이 없는 것 같다. 장공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5)라는 비전을 갖고서 인간 생활의 전 부문을 책임적으로 형성하는 “생활신앙”의 원리를 제시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선택과 정책 방안을 꼼꼼하게 구상한 걸출한 경세사상가였다.

5) 아래서 보겠지만, 장공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등의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여기서는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채용하기로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나는 이 글에서 장공의 경세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장공의 경세사상을 이끌어가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비전을 살피고(제II장), 그 다음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생활신앙”의 원리와 그 방법으로서의 사회윤리를 분석하고(제III장), 끝으로 장공이 어떤 이념과 정책적 방안을 갖고서 자신의 경세사상을 펼쳤는가를 밝히고자 한다.(제IV장)

다만 분단의 극복과 민족의 통일에 관한 장공의 사상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6)

6)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김경재에 의해 선구적으로 수행된 바 있다. 김경재, “김재준의 정치신학: 신학적 원리와 사회·정치변혁론 - 1970~1980년대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제124집,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4/봄, 55~86을 보라.

[II]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장공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우 스케일이 큰 윤리적 구상을 제시하였으며, 이 구상은 장공의 장년기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과 경세사상을 꿰뚫는 주조음(cantus firmus)이라고 볼 수 있다.7)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갖고서 장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그 나라를 땅 위에 이루고자 하는 교회의 실천을 밝히고자 했으며, 성육신을 통한 속량의 은혜를 입은 인간이 제자직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7)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장공 사상에서 갖는 의의를 추적한 첫 논문은 장일조, “김재준의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신학연구』 제42집,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71~94를 보라.

[1] 하나님 나라와 교회

장공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57년에 쓴 “그리스도인과 자연”8)이라는 에세이에서였지만, 그 단초가 되는 표현은 1945년에 발표한 “기독교와 건국이념”이라는 강령적 성격의 글에 이미 나온다. 그는 이 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8) 김재준, “그리스도인과 자연” (1957), 『김재준전집』 IV.

“기독교인의 최고 사상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인 내세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내세에까지 생생발전하여 우주적 대극의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모일 것이다.”9)

9)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 국가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 (1945), 『김재준전집』 I, 159. (이하 “기독교의 건국이념”)

이 글에서 장공은 하나님 나라가 내세천당의 관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가 성령의 활동하는 임재를 통해 현 세상에서 구현될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평화로 실현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는 우주적 대극의 대낙원에 참여하는 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인용문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하나님 나라의 구현 과정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임마누엘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세상에서 분투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전투하는 삶이 신앙생활이라면, “‘교회’는 이 거룩한 전투를 위한 하나님의 병단(兵團)이다. 이 악의 지배와 죄의 질곡에서 자연과 인간을 속량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속속들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출전병사가 곧 크리스챤이다.”10)

10) 김재준, “생활의 복음” (1947), 『김재준전집』 I, 186.

장공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일찍부터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물론 장공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생활의 전 부문에 걸쳐 “세속역사가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역사로 변질”하는 과정임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 사실이지만,11) 로마서 8장 18~25절을 근거로 작성된 1957년의 “그리스도인과 자연”이라는 글에서 장공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모든 자연을 사랑 안에 포함”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12) 서구 신학에서 생태계 위기가 크게 부각되어 생태학적 담론이 본격적으로 모색된 때가 1960년대 초였음을 감안하면, 장공이 “자연학대”를 경고하고 “하느님 자녀의 사랑으로 자연도 사랑받기를 몸부림치며 애원한다.”고 갈파한 것은 시대를 앞질러간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공의 사상은 말년에 이르러 더욱 더 가다듬어졌다. 그는 자연을 주격으로 보지 않고 “물상화”, “대상화”해 온 기독교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였고, “전 우주의 생명이 내 안에 감싸여 있고 내가 전 우주의 생명에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범신론’이 아니다. ‘사랑의 공동체 의식’인 것”이라고 갈파했다.13) 이러한 사상은 다음의 인용문에 보석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11) 김재준, “평신도선교대회” (1985), 『김재준전집』 XVIII, 58. 12) 김재준, “그리스도인과 자연” (1957), 『김재준전집』 IV, 473.
13) 김재준, “자연은 인간의 큰 집”, 『김재준전집』 XV, 112.

“전우주적인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은 어떤 모습일까요?…우리는, 우리만이 아니라,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자연을 사랑하고, 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내 나라의 삼천만이 아니라, 이 지구 위의 만물만이 아니라, 범우주적인 모든 존재를 사랑하여 한 공동체 의식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모두가 한 몸의 지체고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합일된 만유입니다. 그 때에도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만유 안에 있어 우주만유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통전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됩니다. 전우주만물이 사랑의 공동체에 감싸입니다.”14)

14) 김재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김재준전집』 XVI, 350ff.

장공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범위가 작은 데서부터 큰 것으로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식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장공이 세상을 뜨기 직전인 1986년 10월에 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읽어 보면, 이러한 인상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생명이 신자의 심장 속에서 치솟는 생명샘입니다. 샘터가 자기 가슴 속에 있으니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도덕적이니 거기에 죄악이 없습니다. 공의가 바다에 물 덮이듯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필로스를 모두 갖춘 사랑입니다.…이런 사랑의 범위를 넓혀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확충시키려는 것이 사랑의 공동체운동입니다.…사랑의 범위를 전우주적으로 넓힐 때 우리의 공동체는 우주적으로 넓어집니다. 그것이 땅 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15)

15) 김재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1986), 『김재준전집』 XVIII, 530f.

교회는 하나님이 주도하여 이루어가는 이 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 운동에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성육신을 통해 구현된 그리스도의 속량사업에 응답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2] 성육신 신앙과 사랑

장공이 하나님 나라를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해석한 까닭은 하나님 나라를 움직이는 동력이 사랑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사랑은 성육신과 십자가 속량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기독교인은 바로 이 사랑을 본받아 세상에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일꾼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 역사에 ‘성육신’하셔서 인간과 인간에게 속박된 모든 생명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최후의 한 방울 피까지 이 흙에 쏟으시고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같이 그리스도인도 그리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역사 안에 보냄 받은 것은 역사에서 도피하거나 역사를 초월하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그 전존재를 쏟아 그리스도의 속량의지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우리 생활의 각 부문에서 그리스도 정신이 그 조형 이념이 되고 그 ‘혼’이 되게 하는 데 책임적으로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16)

16) 김재준,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는가?” (1957), 『김재준전집』 IV, 435f.

성육신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속량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세계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못 다하신 속량사업”17)을 맡아서 봉사하는 종이며, 그 사업을 추진하는 힘은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장공은 수직축과 수평축이 교차하는 십자가의 은유를 통하여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기관임을 역설한다. “교회는 수직선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수평선적인 사람끼리의 사랑이 십자로 어울린 교차점에서 불타는 성애(聖愛)의 공동사회(community)”라는 것이다.18)

17) 김재준, “그리스도와 세계” (1965), 『김재준전집』 VII, 228. 18) 김재준, “한국교회 무엇을 할 것인가?” (1946), 『김재준전집』 I, 243.

그러나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는 이 사랑이 정의와 함께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공은 한국 교회가 사랑을 앞세우면서 정의를 등한시하는 것을 큰 문제로 생각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거나 정의를 단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식의 보복의 원리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바른 것이 좋은 것이고, 정의와 사랑이 같은 동전의 두 면임을 깨달아야 한다. 장공은 정의가 관계의 개념임을 전제하면서 사랑과 정의의 내적 연관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의 의는 사랑 안에서의 정의입니다.…정의와 사랑은 일체양면입니다. 사랑 없는 곳에 정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그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정의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19)

19)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 『김재준전집』 V, 416f.

이러한 통찰에 충실할 때, 교회는 “역사적인 책임에 철저하여, 불의를 방관 또는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건덕’으로 생각하던 옛 습관을 버리고, 의에 용감하며 사랑에 진실”할 수 있을 것이다.20)

20) 김재준, “한국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 (1960), 『김재준전집』 V, 69.

[3]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하느님의 형상인 인간이 맡은 역할

장공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인간이 맡은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만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속량사업까지도 인간을 통하여 성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구원사를 완성하려 하신 것입니다.”21)

21) 김재준, “성육신” (1955), 『김재준전집』 IV, 155.

그렇다면 이 엄청난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장공은 그 나름의 신학적 인간학을 다섯 가지 요점으로 정리한다.22) 첫째, 인간은 피조물이다. 따라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됨의 요건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본능이나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을 초월한 “주체적, 인격적, 자유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런 자유하는 자격적(自格的) 주체인 인간은 하나님이란 ‘영원한 너’에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셋째, 인간은 성숙한 정신적 실체이다. 성숙한 정신적 실체인 인간에게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통전적 관계에 있으며, 참 인간의 불멸성은 영혼이라는 실체에 부여되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넷째, 인간은 남녀양성으로 되어 있으며, 바로 그것이 인간의 공동사회성을 보여주는 원초적인 표지이다. 다섯째,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도록 인허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법도를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수호 육성할 것과 인간이 그 이성과 창의를 활용하여 문화를 건설할 것을 제정한 말씀이다.”

22) 김재준, “기독교적인 인간상” (1964), 『김재준전집』 VII, 135f.

그러나 이처럼 창조된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하였다. 이 때 “죄는 인간 개개의 도덕행위에 그 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신화(神化)하여 거짓 절대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23) 이렇게 타락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

23) 김재준, 앞의 글, 138.

따라서 인간을 다시 찾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회복은 오직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속량에 힘입어 후패한 자기 자신을 베어버리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에 접붙여져서 전체로서의 인간성을 갱신할 수 있게 된다.

새 인간은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 그리고 여러 사람들(사회)의 삼각적인 ‘관계됨’에서 성장한다.” 이 새로운 인간이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는 “세상 안에 존재하는 전적인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제반 인간사위(人間事爲)의 동기와 가치와 소망을 지도하게” 한다.24)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은 무엇인가? 장공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관련해서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 특히 죄인, 소외자, 눌린 자, 약한 자, 병든 자,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했다.”는 것이고, “지극히 적다 하는 ‘소자(小子)’ 하나하나에게 자기를 일치”시킨 점이다. 그리스도의 섬김이 화해와 연합을 위한 봉사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25)

24) 김재준, 앞의 글, 148. 25) 김재준, 앞의 글, 149.

“요컨대 그리스도 이메지로서의 기독교적 인간상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성령의 내주(內住)를 느끼는 인간으로서 자유하는 기쁨으로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적인 사랑으로 인간들을 섬기며, 섬기는 수난에서 그대로 즐거움을 가지며 하늘의 위로에 부단(不斷)의 격려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의 온갖 사건에 책임을 느끼며 이에 참여하되 화해와 연합을 위한 방향에서 최선을 다한다.”26)

26) 김재준, 앞의 글, 152.

그리스도의 속량사업으로 인해 거듭난 새 사람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운동에 동참하는 역군으로 활동하는데, 바로 이 역군의 신앙이 “생활신앙”이다.

[III] 생활신앙의 원리와 방법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장공의 경세사상을 이끌어가는 비전이라면, “생활신앙”27)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운동에 동참하는 기독교인의 실천적 신앙이다. 그리고 이 “생활신앙”의 원리에 따라 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사회윤리이다.

27) “생활신앙”이 장공 사상에서 갖는 의의에 대한 연구로는 장일조, “김재준의 사회윤리사상: 자유는 인간 존재자체인 것이다”, 『신학사상』 제50집,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가을, 486-511; 정종훈, “장공 김재준의 신학여정과 생활신앙의 기독교윤리, 『신학논단』 Vol. 39,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269~297을 보라.

[1] 생활신앙: 참여와 경세의 원리

장공의 실천론은 흔히 개인도덕과 구별되는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공은 개인의 변화를 중시하였으며, 변화된 사람이 나서서 사회와 국가를 변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량사업에 힘입어 거듭난 사람이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이와 같은 장공의 실천론은, 나중에 다시 살피겠지만, 계급대립의 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인간의 진정한 변화를 등한시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 의해 강화되었다. “모든 문제는 결국 ‘나’의 문제에 귀착한다.”28)고 한 장공의 말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 의식을 잘 드러낸다. 해방 직후에 장공이 기독교가 새 나라 건설에 가장 크게 공헌할 점이 새 인간의 공급에 있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였다.29)

28) 김재준, “한 크리스챤의 선언” (1939), 『김재준전집』 I, 90. 29) 김재준, “건국과 기독교” (1945), 『김재준전집』 I, 156: 기독교는 “새 사람을 제공”하여 새 나라를 세우게 한다. 이 때 새 사람은 “속죄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성(聖性)과 서로 사귀어”, “하나님의 성신이…내주(內住)하여…신생, 성화, 영화의 끊임없는 도덕적 인격의 생성을 성취케 한”사람이다.

이처럼 장공은 개인의 변화를 지극히 중시하였으나, 개인의 변화만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볼 만큼 소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구조악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구조악은 개인의 선행이나 자선이 제아무리 많이 시행된다고 해도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구조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구조 그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구조를 개혁하지 못한다 해서 개인도덕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공은 개인도덕과 구조악에 대한 대결을 병행할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큰 일은 큰 일대로 작은 일은 작은 일대로,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내 삶의 바탕으로 하는 방향에서 매진할 뿐이다.”30)

30) 김재준, “공산주의의 후진국 침투와 교회의 책임” (1968), 『김재준전집』 VIII, 294f.

장공은 그리스도의 속죄애를 체험한 사람의 “거룩한 열심”에 주목한다. 거룩한 열심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전존재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한다.” 거룩한 열심에 이끌리는 신자의 실제생활은 “복음선전”과 “사랑의 실행”으로 요약된다. 그 생활은 그대로 “기독교의 사회적 진출”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만인에게 삼투시키려면 또는 우리가 사랑을 ‘실행’하려면 이 사회의 만반사위(萬般事爲)에 직접 관계하여 그것을 기독교적 이상에 가까운 기관으로 화하려는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1)

31) 김재준, “신앙생활의 조화” (1940), 『김재준전집』 I, 141.

바로 이것이 장공이 말하는 “생활신앙”이다. 장공은 신앙생활이라는 표현이 신앙을 일요일 신앙 정도로 혹은 생활의 액세서리 정도로 축소시키는 폐단이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이 생활의 전 부문을 조형(造形)하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활신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조금 길기는 하지만 생활신앙에 관한 장공의 말을 인용하기로 하자.

“그러므로 교리, 교육의 성문화한 것은 신앙의 일부 외곽에 불과한 것이요 그 진정한 생명은 그리스도와 우리 각자 인격과의 친교에서 생기는 자유로운 경험으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이 우리에게 현실화한 것이 곧 생활이다.…이 현실화한 신앙, 생활화한 복음은 이제 생활의 각 부문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생활이라면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문화 무어구간에 우리의 생활 형태의 어느 하나라도 제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화한 신앙은 생활의 전부문을 포섭한다. 종교가 문화의 일부문이라는 것은 현대인이 만들어낸 가장 공교한 기만이다.…종교는 부분이 아니다. 우주 전체를 포함한 대 ‘씨스템’이요 인간의 전부를 번제로 요구하는 엄숙한 명령이다. 우주와 인생 어느 적은 부분이라도 이 종교에서 제외될 권리를 가진 것이 없다.”32)

32) 김재준, “생활의 복음” (1947), 『김재준전집』 I, 183f. 이러한 생각은 『제3일』에 수록된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에 그대로 반복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재준전집』 IX, 152f.를 보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 전체를 주관하시고 그 생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앙에 계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 신앙은 “모든 생활부문을 통하여 고백되고 모든 것을 통합”하여야 한다.33) 이러한 신앙은 더 이상 타계적인 것을 향하지 않고 역사적인 것을 지향한다. “기독교의 무대는 역사 그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사회는 한 신앙생활 안에서 어울려 돌아간다. 분별되어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다. 누룩이 가루 반죽에 섞여 온 반죽이 부푸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역사의 문제는 그대로가 신앙의 문제로 되는 것이다.”34)

33) 김재준, “신앙과 생활” (1969), 『김재준전집』 VIII, 311. 34) 김재준, “불의에 대한 투쟁도 신앙이다” (1967), 『김재준전집』 VIII, 12.

장공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거듭난 사람의 “거룩한 감격”을 강조하여 개인의 변화를 중시하지만, 바로 그 개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중심을 이루고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는 신앙에 근거하여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문화 등 삶의 전부문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형성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장공의 “생활신앙”은 역사에 참여하고 현실을 형성하는 경세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사회윤리: 생활신앙의 방법

장공의 “생활신앙”은 그 자체가 참여와 경세의 원리이기 때문에 현실을 분석하고 변혁하는 방법을 찾게끔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공은 사회윤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라인홀드 니이버, 하인리히 리처드 니이버, 제임스 거스타프슨, 존 C. 벤네트 등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자신의 사회윤리 방법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였다.

장공의 사회윤리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윤리적 판단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황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유연성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윤리적 방안을 모색할 때 사회과학적인 현실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셋째, 에큐메니칼 사회윤리가 제시하는 “중간공리”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그는 윤리적 판단 기준과 관련해서 결의론적 윤리의 한계를 비판하고 상황윤리적 입장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스도교적 가치판단은 고정적일 수 없다. 사회가 변하고 문제가 달라짐에 따라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이해와 결단도 달라지는 것이다. 다만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정과 성령의 자유하는 사랑의 생명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세대를 통하여 변하는 정황에서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재조정, 재창조 또는 재평가하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언제나 새롭게 그 세대를 이끌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35)

35)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고” (1964), 『김재준전집』 VII, 116.

그 다음, 윤리적 결단을 내릴 때 사회과학적 현실분석을 중시해야 한다는 장공의 생각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나중에 다시 살피겠지만,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 사회과학적 현실분석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을 정책적으로 제안하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공에게 소로킨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 직후 WCC가 제공한 200권의 주요도서들 가운데 소로킨의 사회학 서적이 끼어 있었는데, 그를 통하여 장공은 사회과학의 주요 쟁점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장공은 그 당시의 사회과학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던 가치판단 논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당시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자들은 사회적 사실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어떠한 가치관도 미리 전제해서는 안 되고, 사회과학의 과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다. 장공은 이러한 실증주의적 관점이 “정확한 사실파악이 곧 도덕적 판단의 내용”이라는 주장으로 극단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가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자들과 비판적 거리를 두었던 소로킨의 입장에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공에 따르면, 소로킨은 “가장 정확한 사회적 사실을 연구하여 그 병징(病徵)의 가장 미묘한 데까지를 어김없이 진단함과 동시에 그 병원(病原)을 명백히 지적하고 회생의 길을 명시”하는데, 장공은 이를 가리켜 “사실에 즉(卽)한 도덕적 명령”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한다.36) 이러한 소로킨의 입장은 장공의 사회윤리를 이끌어가는 관점과 방법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36) 김재준, “사상의 귀일” (1947), 『김재준전집』 I, 279.

장공은 역사에 참여하고 현실을 형성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현대사회 자체의 구조와 현실태를 있는 그대로 연구, 파악하고 그 정황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며 그 구체적인 문제들을 발견하는 대로 그 하나하나에 대처할 기독교적 윤리적 적응성을 찾아 이에 성실로 봉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Sentimentalism이나 Utopianism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현실분석에 따라 문제 해결 방안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37) 장공이 라인홀드 니버의 사회윤리 방법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38)

37)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고” (1964), 『김재준전집』 VII, 123. 38) 장공은 니버가 상아탑에서 신학체계를 세워 가지고 초연한 선인인 양 세속에 임하지 않고 “현실을 과학적으로 관찰, 비판, 분석하여 그 성질을 깊이 규명함과 동시에, 그 모든 사건들의 근저에 깊이 흐르는 내면성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그 사건들을 다시 비판하여, 그 해결책을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재준, “기독교와 정치 - 라인홀드 니버의 경우” (1962), 『김재준전집』 V, 399를 보라.

장공은 “사회를 위한 어떤 추상적, 원칙적 가치를 내세우고, 그것이 적용될 경우에 산출될 어떤 이상적 사회 형태를 상정한 다음에, 현존 사회상을 이에 맞도록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보다는 정황 분석을 정직하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런 작업을 제대로 수행한 다음에 비로소 윤리적 결단을 책임 있게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도덕적 행위에 원칙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의 상호관계됨에서 보고 그 관계됨에서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사회과학의 데이터에서 그것들의 내적 역사적 의미, 즉 Richard Niebuhr가 말하는 internal history의 의미를 포착하고 거기서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내가… (1) 기독교적 계시와 신앙 (2) 자아의 분석 (3) 사회적 구조와 과정에 대한 이해를 기독교 윤리 결단의 삼 요소로 지적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39)

39)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 『김재준전집』 V, 413; 참조: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고” (1964), 『김재준전집』 VII, 115f.

끝으로, 장공은 벤네트의 사회윤리를 소개하면서 중간공리(middle axiom) 개념의 의의에 주목한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본래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에서 중간공리 개념을 강구한 대표적인 지도자는 조지프 올드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매개하는 방법으로 중간공리를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역사에서 그 나라를 직접 지향하면서 행동할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이정표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올드햄은 책임사회를 바로 이러한 의미의 이정표로 설정하고, 책임사회의 구현을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과제로 삼은 바 있다.40)

40) 장공은 중간공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정표’와 같아서 우선 그 푯말 있는 데까지를 목표 삼고 걸어가면 그 다음 노정은 거기서 또 알려질 것이라는, 기독교윤리의 점차적인 구체화 과정을 노리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고” (1964), 『김재준전집』 VII, 112를 보라.

장공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운동과 관련해서 그 나름대로 중간공리를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유, 정의, 평화가 그것에 해당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심점으로 해서 움직인다면,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우리 역사에 구현하는 정열쯤은 냉각시키지 말아야 할 것”41)이라는 장공의 말 속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점진적인 노력을 강조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41) 김재준, “선교전략협의회 장기계획 마무리 모임” (1985), 『김재준전집』 XVIII, 44.

[IV] 경세의 이념과 방안

장공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고서 생활신앙의 원리와 방법에 입각해서 역사에 참여하고 현실을 형성하는 경세의 이념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경세사상은 일차적으로는 해방 이후에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던 국가형성에 집중되어 있다. 민족과 국토의 분단은 국가형성의 과제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데, 장공은 이러한 국가형성 과정에서 작은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는 경세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아래서는 장공의 경세사상을 권력에 대한 이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국가 등에 관한 견해를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1] 권력의 원천

장공의 경세사상에서 권력의 원천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서 경세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공은 캘빈의 정치신학에 입각하여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권력의 원천도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하나님이 국가를 설립하고 통치자에게 권력을 허용한 것은 악에 대항하여 선을 장려하고, 질서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의 현실에 적응하여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치자의 권위를 허여하신 것이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이 그것이다.”42)

42)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김재준전집』 I, 161.

따라서 관헌(官憲)이 관헌 자체 내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관헌은 그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명심하고 그 권세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사명에 충실하여야 한다. 민의가 최고권위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도 폐단이다. 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야 한다.

말년에 장공은 기독교의 건국이념을 밝히는 글에서 권위 문제부터 다룬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나라의 권위가 정부 수반에게 있느냐? 국민에게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어느 편에서도 궁극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 분의 ‘청지기’며 그의 앞에서 청산해야 할 책임적인 ‘종’일 것뿐이라는 것이다.”43)

43) 김재준, 『凡庸記』, 장공자서전출판위원회 1983, 156.

이처럼 권력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고백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세우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2] 교회와 국가

장공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여러 맥락에서 다루고 있지만, 그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룰 때 참조하는 대표적인 성서 구절은 마태 22:15 이하와 마가 12:13~17이다. 장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예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묻는다. 가이사의 통치구역과 하나님의 통치구역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이 둘은 “두 겹으로 겹쳐져 있다.” 이런 점에서 국가와 교회의 온전한 이분론도 불가능하다.44)

44) 김재준, “국가와 교회” (1956), 『김재준전집』 IV, 266.

장공은 누구든 국가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납세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은전을 내어 놓으라고 예수가 말한 것은 그들이 국가 체제 안에 이미 살고 있음을 암시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도 장공은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45)

45) 김재준, “정교분리와 군목의 위치”, 『김재준전집』 V, 104. 여기서 장공은 “국가는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인은 질서를 만드는 국가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장공은 전체주의 국가의 자기 절대화에 대한 단호한 반대한다는 취지에서 “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주어진 한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맡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삶의 질서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에 해당하는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것”이며, 국가는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여 국민생활을 외부적으로 규율한다. 그 법은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러한 법의 요구로부터 이탈할 때 국가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라는 무한궤도적인 악에 떨어진다.

교회는 교회대로 따로 할 일이 있다. 교회는 개인의 양심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본래 사명이지만, 정부가 무궤도적으로 권력을 악용하는 경우에는 정부를 규탄하여야 한다. 특별히 “정부가 자기를 신화하여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기 말을 절대화하고 양심적으로 그에 불응하는 양심범을 구속, 투옥, 고문한다면…그것은 인간의 영적 자유, 양심적, 도덕적 선택의 자유, 진리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 인간의 지성소를 침범, 유린하는 것”이기에 교회는 이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46) 국가가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 머물러 있도록 경계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책무이다.

46) 김재준, “국가와 교회” (1956), 『김재준전집』 IV, 267.

장공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율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을 정교분리라고 본다. 그 까닭은 첫째, 정교분리가 “교회 자체의 온전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요, 둘째, “국가를 교회의 통제에서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요, 셋째, “교회와 국가가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게” 되기 때문이다.47)

47) 김재준, “정교분리와 군목의 위치”, 『김재준전집』 V, 104f.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 아래서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 직접 간섭하거나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간접적으로 국가에 봉사한다. 예를 들면, 교회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공동사회의 정신과 풍조, 도덕적 감수성, 가치체계 등에 감화를 준다. 이것은 “전체적인 공동사회의 양심을 조성하는 일”이다. 또한 그때그때의 큰 사회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국가를 위한 건설적인 비판과 계몽과 교육을 한다.

장공은 국가가 하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조한다. 위에서 오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국가가 하는 일에 책임적으로 동참하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48) 장공은 국가가 인간의 범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필요하다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인간 공동사회의 적극적인 복지건설을 위하여 국가는 항구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국가가 시도하는 모든 건설적인 사업에 솔선 협력하여야 한다.”고 말한다.49)

48) 김재준, “정교분리와 군목의 위치”, 『김재준전집』 V, 106. 49) 김재준, “4․19 이후의 한국교회”, 『김재준전집』 V, 132.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를 몸으로 실천하였던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장공은 에베소서 1장 21절과 골로새서 1장 16절에 근거하여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사에 참여하여 거기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50) 그렇다고 해서 장공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교회가 직접 정치활동을 펼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교회의 정치 간섭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헌법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택했으며 국가로서는 세속국가요 교회로서는 자유교회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직접 정권을 노리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인으로서 정치에 헌신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국민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은 장려해야 한다.”51)

50) 김재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1967), 『김재준전집』 VIII, 28. 51) 김재준, 앞의 글, 36.

[3] 이데올로기 선택

이데올로기 선택의 문제는 장공의 경세사상이 전개되는 방향을 결정짓는 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공이 해방 이후 자신의 경세사상을 펼쳐나갈 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절박하게 대두해 있었다. 이 둘을 넘어서서 제3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장공은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1) 민주주의의 옹호

장공은 자신의 경세사상을 펼치며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한다. 그 까닭은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기성품도 아니고 완성품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성취해가는 도중에 있으며, 바로 이와 같은 “자기겸허”야말로 민주주의의 위대한 점이라는 것이다.52) 이러한 생각은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철학이요, 사회제도요, 그 운영방법이라는 후기의 언급에서도 재확인된다.53)

52) 김재준, “민주주의론” (1953), 『김재준전집』 III, 21. 53) 김재준, “민주주의는 피할 수 없다”, 『김재준전집』 IX, 292.

해방 직후에 장공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전을 갖고서 국가형성의 설계도를 그리기에는 아직 현실의 여건이 따르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구성될 새 나라에서 자유권적 기본권이 보장되는 체제에 당분간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되면 감사할 것이다. 이런 자유가 상호충돌될 때에는 각개의 경계선에 대한 상호경의를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할 일이다.”54)

54)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김재준전집』 I, 162f.

1953년에 쓴 “민주주의론”에서 장공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장공은 신학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빈부, 귀천, 성별, 인종, 능력, 지식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살리는 것인데, 이러한 민주주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피압박민에 대한 공의와 자비를 옹호한 예언자 전통”과 “죄인과 세리의 친구를 자처한 그리스도의 선언”에 잇닿아 있다고 본다.55)

55) 김재준, “민주주의론” (1953), 『김재준전집』 III, 9.

장공은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를 다섯 가지로 꼽는다. (1) 개인 인격의 신성함에 대한 존중, (2) 자유, (3) 다수결 존중으로 표현되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 (4) 사회연대성, (5) 자율성의 존중 등이 그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존엄성과 자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부연할 것이 없지만,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들에 대한 장공의 이해에서 돋보이는 것은 자유에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과 사회적 연대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사회적 의무에 의해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장공은 기업의 자유가 절대화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길을 열어놓는다. “사회 전반의 공통복리를 파괴하거나 전체적인 경제질서를 착란하는 경우에는 그 자유는 사회적인 제약을 받아야 한다.”56) 그 다음, 장공은 민주주의가 오직 사회연대성을 기반으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공은 민주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을 원자론적으로 파악하는 데 반대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공동체 능력이 있는 개인이며, 또 그렇게 육성되어야 한다.57) 이런 점에서 보면 장공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자유권적 기본권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6) 김재준, 앞의 글, 14. 57) 김재준, 앞의 글, 16: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모래알 같이 따로 떨어져 구르는 개체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적 존재자로서의 개인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현실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몇 가지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함의 첫째는 “경제적 불평등”이고, 둘째는 민중의 무지, 무능, 무관심이요, 셋째는 세속주의 경향이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서 장공은 민주주의가 자유를 생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의 경제제도가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이 자본주의가 오늘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즉 부의 편재(偏在)와 그에 따르는 실직 무직자의 증대, 식민지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생산품의 ‘덤핑’(축적), 주기적으로 오는 공황, 이런 것을 다소 인위적으로 시정하여 미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58)

58) 김재준, 앞의 글, 18.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볼 수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작은 자들을 편드는 실천이다. 이에 대한 장공의 생각은 아래서 살피게 될 것이다.

2) 공산주의 비판

공산주의에 대한 장공의 견해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체험적 반공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능력에 대한 평가이고, 마지막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절대화의 위험에 대한 경고이다.

우선, 장공은 체험적 반공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몰이해한 적대행동을 취하여 신을 모독하며 성역을 유린하고 신자를 모욕살해하며 패륜의 도를 감행하는 등 불쾌한 인상을 남긴 것”이 기독교인들의 반공주의적인 입장을 강화시킨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59)

59)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김재준전집』 I, 163. 말년에 가서 장공은 “카인의 아우 아벨의 피로부터 공산당에게 학살된 간도 조선인의 마지막 핏방울까지 일푼의 용서도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공산당의 머리 위에 내리는 하느님의 저주로부터 용서받을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극언하기까지 했다. 김재준, “진리속에 살다”. 『김재준전집』 XVIII, 457.

그 다음, 장공은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정책제시 차원에서 공산주의를 긍정한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그 더 좋은 재건을 기도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60) 더 나아가 장공은 “착취당하는 대중의 생활향상과 인간적 존귀를 위하여 경제와 경제기구의 가장 과학적인 개혁을 행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전연 비기독교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61)

60)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김재준전집』 I, 163. 61) 김재준, 앞의 글, 164.

끝으로, 장공은 세계관적 차원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공산주의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각개 인격의 존엄을 위하여” 공산주의를 감연히 거부하여야 한다.62)

62) 김재준, 앞의 글, 163.

1953년에 쓴 “공산주의론”에서 장공은 공산주의를 더욱 더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참으로 공산주의는 현대문명에서 나온 새 문명의 형태인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대문명의 사전(死前)에 생긴 최종의 발악으로서 자기몰락을 촉진하는 것이오 결코 새 시대 창건의 역군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단언한다.”63) 흔히들 이러한 장공의 공산주의 비판이 한국전쟁에서 체험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물론 그런 점도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견해를 수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토인비는 현대 문명이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발전하고, 무신론적 경향으로 띠고 세속주의로 들어갔다고 보았는데, 공산주의는 바로 이러한 세속주의의 극단적 형태라는 것이다. 장공은 “전투적 무신론, 절대현세적 과학만능신봉, 유물적 인간관의 강화, 힘의 철학의 무자비한 응용, 철저한 전쟁윤리, 도덕의 상대성 등” 공산주의가 보이는 모습으로는 현대 문명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64)

63) 김재준, “공산주의론” (1943), 『김재준전집』 III, 166f. 64) 김재준, 앞의 글, 167.

또한 장공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절대성 요구로 인하여 “제3자의 입장에서 재비판할 자유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절대화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려고 드는 한, 공산주의 사회는 공산당의 지령과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경찰력과 밀고에 의지하여 독재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자유와 주체성의 전면적 상실이다.65)

65) 김재준, 앞의 글, 174.

물론 장공은 스탈린 사후에 “공산주의의 종교적 후광”이 쇠퇴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특히 흐르시초프 이후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보다는 국가이익에 더 많이 기울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미래의 언어일 수 없다. “공산주의는 세계혁명, 새 세기의 탄생을 위한 메시아적 열정보다는 자유만 생활향상의 도구 또는 방편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미래세기는 역시 기독교적 인간혁명에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화하고 있다.”66)

66) 김재준,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이론적 대결” (1966), 『김재준전집』 VII, 425.

3) 제3의 길: 작은 자들과의 일치

장공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위시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고, 자본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1954년에 쓴 “새 세기를 지향하는 그리스도교”에서 장공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문제를 다함께 넘어서는 제3의 길을 구상한다. 장공은 이를 “위대한 종합체계”라고 말한다.

“위대한 종합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개인주의적 자기분립에 의한 무중적(無中的) 분산과 그 반동으로 생기는 무리한 전체주의적 강제통합, 거기서 생기는 또 하나의 허무와 광태(狂態)! 그리고 종국에 대한 아무 정견(定見)도 없이 자연적인 욕심이 지향하는 대로 확장, 행동강화, 추진, 투쟁 등을 감행하므로 생기는 도로(徒勞)와 충돌 등이 그 치명적인 붕괴현상을 증진시키고 있다. 전우주적인 대조화를 위한 치명적 종합체계가 재수립되어야 하겠다.…생명적이오 인격적인 의미에서 이론체계 이상인 사랑의 대조화에서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사위(人間事爲)의 온갖 중심이탈 작용은 창조주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적 이탈에서 기인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한 절대적인 중심을 행하는 때 거기에 진정한 조화와 종합이 가능하게 된다.…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전인류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로 되는 것을 대원(大願)으로 삼는 그리스도교에서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67)

67) 김재준, “새 세기를 지향하는 그리스도교” (1954), 『김재준전집』 III, 311.

이러한 종합체계를 이끌어가는 사랑은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일치시킨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 구체적인 사회적 형태를 갖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갱신, 봉사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의 구조, 법률, 경제조직, 교육, 문화문제 등등에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68)

68) 김재준, “그리스도와 세계” (1965), 『김재준전집』 VII, 229.

장공이 노동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여러 맥락에서 글을 쓴 것도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가 충돌하는 현대 세계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서가 노동을 긍정하고 축복하였지만, 기독교는 도리어 노동을 천시하는 헬라 전통을 수용하고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체제를 옹호함으로써 “너무나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이교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르크스를 시켜서 기독교회를 때렸다고 보았다.69) 장공은 노동의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로 본다. 경제적 자유를 본위로 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되고 노동자들이 “물적인 경제가치”로 환산되어 인간이 “상품이나 재산목록으로 계산”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을 가리켜 장공은 “노골적인 인간소외”요, “인간의 비인간화”라고 고발한다.70)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공이 제안하는 것은 노동과 자본의 “공동운영체” 형성이다.71) 이에 대한 자세한 글을 남긴 바 없기는 하지만, 장공이 이 개념을 갖고서 무엇을 생각하였는가는 어느 정도 분명하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기업주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고 협력과 공생의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주와 노동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상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72) 이런 점에서 보면 장공의 노자 공동운영체 구상은 노동과 자본이 기업 차원에서 “대립 속의 협력”을 하도록 강제되고 있음을 전제하고서 노동과 자본의 공동결정 제도를 발전시킨 독일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69) 김재준, “노동의 신학” (1956), 『김재준전집』 IV, 279. 70) 김재준, “인간이해와 인간형성” (1963), 『김재준전집』 VII, 7.
71) 김재준, “현대문명 속에서의 인간”, 『김재준전집』 XVIII, 86.
72) 김재준, 『귀국직후』, 서울: 선경출판사, 1985, 210.

장공은 교회가 수탈과 억압 아래 있는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까지 기업주 편에 서 있었던 교회가 노동자 편에 설 수 있도록 “제3의 종교개혁”을 추진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73)

73) 바로 앞 글.

이러한 생각을 펼치고 있었기에 전태일을 추모하는 글에서 장공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의를 세우려면 불의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의에 대한 항거가 그대로 의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님은 젊은 생명을 제물삼아 이 부정, 불의, 부패, 탐욕, 인간학대에 도전했습니다.…예수님 말씀대로 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이것은…그가 극진히 사랑하던 근로대중의 비참이 경감되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포로된 자에게 해방, 눌린 자에게 자유와 평등이 선포되고 성취되게 하기 위한 다짐입니다. 이것이 달성되기 전에는 가신 전태일 님의 젊은 영혼이 편히 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 불타는 몸으로 통곡할 것입니다.”74)

74) 김재준, “의의 봉화” (1970), 『김재준전집』 IX, 331.

[4] 경세의 방안

장공은 국가 형성과 관련해서 자신의 경세사상을 구체적인 정책 제안의 형태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작업은 1945년에 집필한 “기독교와 건국이념”에 담겨 있는데,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은 거의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글에 제시된 정책 방안들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진부하다고 느낄 만도 하지만, 해방 직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사회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장공의 정책 제안은 퍽 참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공은 이 강령적인 글에서 “국토경영”을 “민정의 실제”와 분리해서 따로 다루었으나 그가 말하는 국토경영 방략은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경제개발정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에 정책제안의 틀에서 함께 다룰 만하다고 본다. 장공이 구상하는 경제개발정책에는 하나님의 동산인 국토를 아름답게 보전하면서 도시계획, 주택정책, 상하수도 설치, 도시 청소, 관광지 개발, 광업, 농수산업, 수산업, 교통기반시설, 치산치수 등 광범위한 과제들이 열거되어 있고, 특별히 사회경제적 인프라 구축과 관련해서는 “외인재벌”의 참여를 배제하고 “외인의 토지소유”를 허락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민정의 실제로는 교육정책, 사회정책, 국제정책, 교회정책, 재정정책, 국방정책, 문화정책, 생활문화 개혁 운동 등이 제시되고 있다. 교육정책은 국가검정교과서 채택, 10년 의무교육 등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종교와 교육을 통전시키자는 주장이 특이하다. 사회정책에서는 민간 사회사업을 장려하라는 제안이 눈에 띄며, 국제정책에서는 영세중립국을 형성하고 만주를 자유거류지역으로 개방하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하는 점이 이채롭다. 교회정책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을 제안하고, 재정정책에서는 사유재산 인정을 인정하되 누진세를 도입하여 소득재분배를 추진하고, 재산가들의 공공사업 경영을 장려하고, 공장주와 대지주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광산 국유화 조건 아래서 채굴 민영화를 추진하거나 광산 경영의 전면적인 국유화를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국방정책으로는 적산 무기 불하를 통하여 군비를 마련하고, 전투훈련보다는 봉공, 순국, 규율, 단체생활 등 국민교육을 중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문화정책에서는 세계적인 것을 체(體)로 하고 한국적인 것을 용(用)으로 하자는 제안이 독특하며, 의식주의 규모를 절도 있게 하는 생활문화 개혁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75)

75)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164~176.

장공의 정책 제안은 해방 직후에 좌익, 우익, 중도파 등 다양한 정파들이 홍수처럼 쏟아낸 무수한 정강 정책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장공의 작업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고서 생활신앙의 원리와 방법에 입각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서 제도 형성의 실현가능한 대안을 정책적으로 제안하려는 노력이었으며, 그것은 장공 특유의 사회윤리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소중한 것이다.

[V] 맺음말

나는 이 글에서 장공의 경세사상이 역사에 참여하여 현실을 제도적으로 형성하는 구체적인 정책 제안의 형태로 제시되었음을 보여주고, 이러한 정책 제안이 생활신앙의 원리와 방법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 생활신앙이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하는 장공의 거대한 비전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분석하고자 했다.

장공의 경세사상은 해방 이후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여야 했던 한민족을 위해 한 걸출한 신학자가 수행한 가장 진지한 봉사의 열매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격화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던 우리나라에서 새 인간의 창조와 새 나라의 건설을 위해 아주 선이 굵고 일관성 있는 사회윤리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의 사회윤리 구상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들과 스스로를 일치시킨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오늘 여기서 작은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다는 확신이다. 장공은 바로 이 점에서 민중신학자의 선구이다. 그는 작은 자들과 일치하려는 신앙의 운동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사회적 자유주의로 기울어 있던 그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교정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사회복지 국가의 건설이 진리의 길이라고 강조하고 노동자와 기업주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동 결정과 공생 운동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제3의 종교개혁이라고 역설할 수 있었다.

장공의 신학 작업이 종료된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오고 오는 세대에 의해 꾸준히 재해석되어 그 생명력을 끝없이 이어갈 것이다.

강원돈 박사

1955년 서울 출생 한국신학대학 신학과(Bechelor of Theology) 동 대학 대학원(Master of Theology)을 거쳐 1998년 1월에 독일 보훔의 루르 대학교 개신교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Dr. theol.) 취득 (논문제목 : "생태학적 노동 개념을 규명하여 경제윤리의 근거를 새롭게 설정함: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친화성을 갖는 노동을 형성하는 데 고려할 규준들과 준칙들에 대한 해명")

한신대학교 역사철학부 조교,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신학사상" 편집인, 성공회 대학교 연구교수, 배재대학교 교수 등을 거쳐 2007년 3월 1일부터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음.

저서 『물의 신학 - 실천과 유물론에 굳게 선 신학의 모색』(서울: 한울, 1992)
『살림의 경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3)
『인간과 노동』(서울: 민들레글방, 2005)
『지구화 시대의 사회윤리』(서울:한울아카데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