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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4회] 장공 김재준의 한국교회 신앙신학사에 대한 인식 / 서정민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6 08:25
조회
2126

[제14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7년 9월 6일(목) 오후 5-7시

장공 김재준의 한국교회 신앙신학사에 대한 인식

서정민 교수
(연세대학교, 교회사)

[1] 서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적 영역’이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장공 김재준과 그의 동지들에 의한 ‘새로운 신학의 소개와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적 사유의 전개가 있었고, 선교행위와 교회의 성장, 사회적 참여, 신앙적 운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분명히 한국교회 안에도 ‘신학적 현상’들은 있어 왔다. 그러나 신학적 이론이 일정한 논쟁적 차별성을 창출하고, 그것의 인식적 폭이 ‘보혁’이라는 양 측면을 지닌 스펙트럼의 형태로 구형되어 토론의 여지가 만들어 진 것은 김재준의 등장 이후, 한국 장로교 내에서 일정한 신학적 긴장이 형성된 때로부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장공 김재준은 한국교회 초기 상황의 지형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학적 사고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함경도, 즉 캐나다교회 선교 관할지 출신이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미국의 프린스턴과 웨스턴신학교 등의 유학을 통해 역시 당시로서는 새로운 신학적 사유를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였다. 귀국 후 본인의 성서신학 연구 결과의 발휘를 통해 당시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신학풍토와 긴장관계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또한 1934년 이른바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이라는, 한국교회사의 신학적 사건의 중심에 서면서 한국 신학운동의 한 축으로 역할 하였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일제 말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새로운 신학운동과 신학교육의 연계를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보수, 교권주의 신학으로부터의 집중적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명실상부 한국 신학의 진보적 스펙트럼의 한 극점에 서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미 일제 하 시기부터 시작된 박형룡 신학과의 논쟁, 해방 후 조선신학교에서의 신학적 파동, 장로교 총회 내에서의 김재준 신학에 대한 토론과 공격, 마침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설로 이어지는 장공의 신학사상에 대한 한국교회의 주목, 비판에 맞선 장공의 변증과 실천적 결행은 한국 신앙신학사의 중추이며, 내용이 되어 왔다.

물론 이 논의에서도 개략적인 김재준 신학의 배경과 내용, 한국 신학사의 흐름에서 장공의 역할과 의의는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시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한국 신학사의 핵심적 주체이며, 계기이며, 관건이었던 장공 자신이 한국 신학의 변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곧 김재준이 본 한국 신앙신학사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는 김재준 신학의 특성을 그의 신학이 지닌 경향성이나, 그의 신학과 여타 신학적 관점이 부딪쳐 일어난 사건과 결과로서의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한국 신학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을 통한 접근을 의미한다. 다행히 그가 1960년에 기록한 “한국교회의 신학운동-그 회고와 전망”1)이라는 글은 이러한 관점을 성립시키는 주요한 근간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장공 이후의 한국 신학의 전개, 현하 한국 신학의 과제를 장공의 관점을 원용, 유추하여 진단해 보는 것을 이 논의의 마지막 과제로 여기고자 한다.

1) <基督敎思想>, 1960. 1, 韓國神學大學 編, 『長空 金在俊 著作 全集』제1권, 1971, pp.174-181 수록.

[2] 장공 김재준의 신학적 배경

장공 김재준은 함북 출신이다. 그의 고향이 함경도라는 것은 그의 신앙과 수학의 기반이 한국 선교신학의 역사적 판도 상 캐나다교회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그를 신학의 길로 인도한 이가 만우 송창근으로 그 역시 함경도를 기반으로 하는 인물이며, 캐나다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회, 특히 1925년 본국 캐나다교회가 연합교회로 통합된 이후의 캐나다연합교회 한국선교회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다른 어느 선교회에 비해서도 진보적 신학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 캐나다에는 과학과 성서비평이 크게 유행하였고, 결국 이러한 도전이 기독 교 자유주의(즉,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을 불신하고 기독교윤리에 집중하는 경향)의 발전을 가져왔다. 캐나다에서 기독교 자유주의는 20세기까지 계속해서 성장하였다.”2)

2) 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p.256.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 파송되어서 활동한 캐나다 선교사들이 다 자유주의자라든가. 그들의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 지역이 그러한 신학적 영향권 하에서만 있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더구나 김재준에게 영향을 준 국내의 신학적 기반인 캐나다교회가 ‘자유주의’였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상대 비교적으로 살필 때 김재준의 출신지요, 신앙적 연고가 되는 함경도 지역과 그 선교관할자로서의 캐나다교회 선교사들은 신학적 사유의 자유로움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는 비교논리에 지나지 않다. 같은 캐나다 출신으로 한국선교를 담당한 영(L. L. Young)3)이나 펜윅(M. C. Fenwick)4)과 같은 선교사는 어떤 근본주의자 못지 않은 보수적 신학경향을 띠었던 것도 사실이다.

3) 캐나다장로교회 한국선교사로 내한하여 활동하다가 본국 캐나다교회가 연합교회로 재편되면서, 진보적 경향을 띤 선교사들이 내한하자, 선교회 소속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선교사로서 재일한인 선교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보수 신학의 입장을 끝내 견지한 선교사이다. 4) 캐나다 출신의 평신도 개인 선교사로 내한하여 활동하다가 미국의 침례교회 선교부와 연결되었다. 한국에서 대한기독교회(후에 동아기독교회)를 창설하여, 모든 세속적 영향으로부터 기독교의 보수적 신앙신학을 지키고자 하는 선교신학을 폈다. 이 교회는 한국 침례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한편 김재준은 유학길에 올라 먼저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5)에서 수학하였다. 아오야마학원대학은 일본 메소디스트 계통의 대학으로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배경을 지닌 대학이어서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가 가능한 대학이었다. 이후 김재준은 미국 유학에 올라 먼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는 특히 1920년대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논쟁이 가열되던 신학공동체로 결국 이 신학교의 교수였던 메이첸(J. Gresham Machen)이 보수적 신학노선을 주장하여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신학교는 분열되어 메이첸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별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의 신학적 경향을 근본주의의 대표적 그룹으로 볼 수 있다. 즉 메이첸파가 분리해 나간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적 성향은 지극히 진보적인 노선 하에 설 수 밖에 없었다.

5)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은 미국의 감리교회가 일본에 파송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여 만든 학교이다. 1874년 설립된 아자부에 설립된 영어학교인 여자소학교, 1878년 츠키지에 설립된 耕敎學舍과 1879년 요꼬하마에 설립된 신학교를 통합하여 1949년 아오야마학원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초기의 학교에서부터 계산을 하면 설립 130년을 넘기고 있는 전통있는 대학이다. 그래서인지 아오야마 학원대학은 여학생이 많은 대학,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하는 기독교 명문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캠퍼스는 도쿄에 아오야마의 본교와 세다가야, 도쿄 인근에 아츠기, 相模原 캠퍼스가 있다. 각각의 캠퍼스는 대학본부와 문과대학과 이공대학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교통은 시부야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http://ilbonportal.com/waseda/index.php/67)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다시 송창근을 따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2학년에 편입했다. 1929년 9월이었다. 송창근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하 고 있었는데, 이번 편입학에도 그의 도움이 컸다.”6)

6) 천사무엘, 『김재준』살림, 2003, p.73.

김재준의 신학적 배경의 또 다른 요소는 선배 송창근이었다. 그 역시 김재준과 같은 지역으로 함경도 출신이었고, 일본 유학은 물론 프린스턴과 웨스턴신학교에 이르는 신학수학, 그리고 향후의 귀국과 새로운 신학운동,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틀 조성에 이르기까지 동지적 유대를 함께 했다. 한편 웨스턴신학교는 미국장로교회 직영신학교의 하나로 당시 미국신학의 흐름의 한 중심에 있었는데, 김재준은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사(S.T.B.)와 신학석사(S.T.M.)학위를 취득하였다. 특히 그의 신학석사학위 논문은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었는데, 당시 구약성서 신학의 주요 연구주제를 다룬 것이다.

살핀 바와 같이 김재준의 신학적 배경과 수학과정은 당시 한국의 주류 장로교회의 신학적 분위기로부터 볼 때는 역시 진보적 경향성을 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재준 그 자신, 혹은 세계적인 신학사조의 흐름 안에서 볼 때는 적어도 중도 이상의 균형과 일정한 보수적 성향마저 지닌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그가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하나의 에피소드를 그의 평전을 쓴 천사무엘은 다음처럼 소개하고 있다.

“졸업할 무렵 한국의 어느 선교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직장 소개와 관련하여 신학노선을 묻는 것이었다. ‘네가 학업을 마쳤으니 귀국해야 할 텐데 네 신학노선을 알아야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기에 편지한다, ... 네가 근본주의자냐? 자유주의자냐? 근본주의자라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 속히 알려 달라...’ 김재준은 곧 답신을 보냈다. 자신은 근본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자라는 것이었다. ‘...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 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7)

7) 위 같은 책, p.76.

역시 김재준이 당시 한국 장로교회의 주축을 이루던 근본주의적 분위기에 적합하지는 않았음이 여실하다. 그러나 그가 첫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성명한 편지의 내용처럼, 그렇다고 향후 김재준을 신학적으로 공격하는 근본 보수 경향자들의 견해로서의 자유주의자나 급진주의자, 즉 좌극단의 신학 성향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음 또한 명백하다.

[3] 한국 신학의 전환적 계기로서의 장공

한국의 주류 장로교회의 신학적 성향과는 다른 배경을 지닌 김재준이 귀국 후 맞이했던 신학적 시련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을 ‘외톨이’라 칭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저의 입장은 한국 장로교 내에서 외톨이에 가까웠습니다. 선교사 추천도 없이 개인 자격으로 프린스턴과 웨스턴에서 공부한 저는 제 출신 노회인 함북노회에서 강도사 시취를 받는 데에도 여간 어렵지가 않았어요. 당시 노회 정치만 하더라도 꽤 율법주의적인 경직성을 띠고 있었는데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는 강도사 시취 구두 문답 시 시험관이 ‘당신 지상천국을 믿소?’ 하고 심문하듯 물었습니다. 저는 ‘지상천국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했습니다. ‘땅 위에도 천국이 있다고 믿느냐?’였지요. 당시의 천국관은 사후의 천당이었습니다. 곧 지상천국 개념은 신신학의 표상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이 전 우주에 아니 계시는 데 없으니까 하나님 계신 데면 다 천국이겠죠’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흠잡을 데는 별로 없고... . 가까스로 저는 시취에 합격했습니다.”8)

8) 서정민 녹취 기록, “長空 金在俊 博士의 회고,” <韓國基督敎史硏究>, 제5호, 韓國基督敎史硏究會, 1985. 12. 5, pp.4-5.

당시로서는 가장 고등 수준의 신학을 수학하고 돌아 온 장공은 기본적인 절차인 목사안수를 위한 시취과정에서부터 국내의 신학적 분위기에 의한 견제와 경계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김재준과 장로교회 해외 신학 유학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진보적 신학성향을 지녔던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장로교의 보수 근본주의 신학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사건은 이른바 1934년의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시각에서의 접근과 해석적 정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김재준 자신이 회고한 사건의 시말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당시 저와 제 학우들이 한국 장로교회 교권신학과 일단 부딪친 큰 사건이 아빙돈 단권주석 말썽입니다. 감리교의 유형기 박사가 번역 출판한 것이 장로교회에서 문제된 것입니다. 아빙돈은 물론 역사비판적인 주석으로, 유형기 씨는 장로교회 인사로는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그리고 나에게 원고를 청탁했습니다. 제게는 요나서를 제외한 열두 소선지서를 청탁했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학자들의 책을 참고하면서 나름대로의 주석을 썼습니다. 진정 거기에는 이단이랄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평양에 나타난 그 해 여름, 평양노회에서 거센 풍랑이 일었습니다. 총회 차원에서도 금서로 낙인 찍히고 모조리 거두어 불사르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평양노회도 일부 소장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이 있어 보수일색의 극단만으로 진행되지는 못하고 시비를 일단 가리자는 의견 끝에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심사위원장인 클라크 목사 앞에 불려갔고 아마 다음과 같은 문답을 벌인 듯 합니다. ‘그 책에 집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소?’, ‘그렇게 생각지 않소!’, ‘그 책이 재판될 때 당신 글을 뺄 생각이 없소?’, ‘그럴 생각이 없소!’, ‘그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라는 것을 알텐데...’, ‘다른 사람들이 쓴 글에 대해서 개입할 생각은 없소. 나는 내 글에만 책임을 질 터인데, 내 글에는 이단이랄 게 없소’, ‘그 책 때문에 교회가 소란해진 데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소?’, ‘책임이랄 것 까지는 없어도 그것 때문에 소란하게 된 교회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오’, ‘노회에서 작성된 대로 성명서를 내겠소?’, ‘내겠소.’ 우리 중 채필근 목사는, ‘잘못했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이고, 재판이 발행될 때에는 자기 글을 뺀다’고 다짐, 성명을 했습니다. 송창근, 한경직, 그리고 나는 성명 없이 몇 달 지났습니다. 그 후 <신학지남> 편집자인 남궁혁 박사에게 우리를 집필진에서 제거하라는 압력이 점점 가중했다고 합니다. 남궁혁 박사는 난처했고, 그는 우리에게 성명서 내기를 권했습니다. 우리들은 함께 <신학지남>에 성명서를 써 보냈는데, 내용은, ‘첫째, 우리는 단권주석 전체로서의 편집에 관여한 바가 없다. 둘째, 우리가 쓴 글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셋째, 그러나 우리 글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성명자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사실 하나마나한 성명이었습니다.”9)

9) 위 같은 기록, pp.5-6.

직접 관련자의 한 사람인 김재준의 회고에 의한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의 생생한 전말이다. 이러한 내용은 함께 연루되었던 추양 한경직의 회고10)에서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보임으로써 가장 사실관계에 접근한 경위라고 아니 할 수 없다.

10)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에 수록된 “한경직 목사와의 대화” 참조.

1934년에 일어난 이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은 같은 해 한국교회의 신학적 파동으로 기록되는 ‘김영주 목사 모세 창세기 저작 부인사건’,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발언 사건’과 함께 한국교회가 마침내 신학적 논의를 시작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는 성숙한 신학적 토론의 장이 마련된 계기였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보수적 교권 신학에 의해 새로운 신학적 주제와 의견에 단속이 가해지고, 억압적 분위기를 창출한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본과 미국에서 새로운 신학적 사조를 접하고 귀국한 신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스스로의 신학적 입장을 개진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해 나간 시작으로서의 의미로는 한국 신학사의 중요한 전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중심에 장공 김재준의 역할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이후로도 김재준의 신학에 대한 보수적 한국교회의 경계와 지목은 지속되어 왔으나,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본격화 된 것은 역시 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둘러 싼 신학적 파동으로 볼 수 있다. 교회사가 김양선은 일정한 선입관을 지니고 김재준의 신학과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경향을 자유주의로 단정하였다.

“金在俊 敎授에 依하여 指導되는 朝鮮神學校는 韓國敎會에 自由主義 神學을 樹立한 基盤이요 母體이었다는 것은 否認할 수 없는 事實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朝鮮神學校의 設立은 金在俊 敎授의 말과 같은 韓國敎會의 新出發을 意味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自由主義 神學의 韓國敎會 史上에 一地位를 占케되는 歷史的 轉換期를 만든 것만은 틀림없는 事實이다.”11)

11) 金良善, 『韓國敎會解放十年史』,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p.196.

조선신학교 재학생 일부의 김재준 교수에 대한 신학적 탄핵진정, 박형룡 목사의 김재준 교수에 대한 신학적 공격, 김재준 교수의 변증과 신학적 성명이 이어지면서, 이른바 신학적 명분이 게재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수립은 김재준의 신학을 중점에 두고 역사적으로 전개되었다. 장공 김재준과는 필생의 신학적 상대자였던 박형룡은 자신의 입장에서 김재준의 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 경계하였다.

“金敎授는 聖經이 神學으로서의 權威를 認定한다고 말하나, 聖經의 權威를 破壞하는 高等批評을 承認한다. 곧 그는 聖經이 著作者, 著作地, 著作時 著作 方法에 關한 傳統的 所論이 批判的, 科學的, 歷史的 硏究考證으로 말미암아 變更되었으나 ‘聖經이 神言되는 點에는 何等 影響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批評家들의 ‘文書說은 輕히 이를 물리칠 수 없으나 이것을 是認한다고 해서 모세와 無關하다는 것은 勿論아니다’라고 말하고 ‘모세로부터 傳承한 것을 後人들이 記錄한 것임은 마치 예수님의 精神을 體得한 使徒들의 경우를 따라 편지한 것이 福音書와 同樣으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함이니, 이것은 모세는 五經의 著作者가 아니라는 說明인 同時에 高等批評家의 所謂 文書說의 變化이다. 그런데 高等批評을 受納하되 聖經의 神言으로서의 權威와 그 靈感問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은 참말이 아니다.”12)

12) 朴亨龍, “金在俊 敎授의 陳述書에 對한 批判,” 중, 위 같은 책, pp.229-230.

그러나 당시 김재준의 신학적 입장은 확고하였다. 신학적 사유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참 복음의 진리에 다가서는 길이라고 믿었고, 한국 신학이 교권에 사로잡혀 있음은 그것 자체로 한국 신학의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김재준의 입장은 총회에 제출한 신학적 메니페스토인 이른바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신학교를 개교할 때 사명을 정하고 그것을 몇몇 항목으로 정리하였다는 내용에 이르면, 당시 그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는 명확한 내용을 간파할 수 있다.

“1) 우리는 朝鮮敎會로 하여금 福音宣布의 實力에 있어서 世界的일 뿐 아니라, 學的 思想的으로도 世界的 水準에 到達하게 할 것. 2) 그리하기 爲하여 우리 神學校는 敬虔하면서도 自由로운 硏鑽을 經하여 自律的으로 가장 福音的 인 信仰에 到達하도록 指導할 것.
3) 敎授는 學生의 思想을 抑壓하는 일이 없이 充分한 同情과 理解를 가지고 神學의 諸學說을 紹介 하고 다시 그들이 自律的인 結論으로 칼빈神學의 正當性을 再確認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聖經硏究에 있어서는 現 批判學을 紹介하되 그것은 聖經硏究의 豫備知識으로 이를 採擇함이요 神學樹立과는 別個의 것이어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朝鮮敎會의 建設的인 實際面을 考慮에 넣는 神學이어야 하며, 信仰과 德에 活力을 주는 神學이어야 할 것, 神學을 爲한 紛爭과 憎惡謀略과 敎權 利用 等은 朝鮮敎會의 破滅을 일 으키는 惡德임으로 삼가 그런 論爭을 避할 것.”13)

13) 金在俊, “片紙에 代身하여,” 중, 위 같은 책, pp.233-234.

이로 보면, 김재준의 입장은 전체적으로 중도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성서연구의 비판학 도입 자체도 전제를 둔 것이며, 목표로서의 칼빈신학의 재확인도 성명하고 있다. 그는 훗날 박형룡 등 당시 장로교 보수 교권 신학과의 대결 과정을 재정리하며 회고한 바 있다. 결국 그 요지는 결코 박형룡 신학과 자신의 신학이 논쟁의 상대가 되는 대립적 각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박형룡 신학 자체가 논쟁적 성격을 띤 학적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고, 당시 박형룡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을 공격한 갈등 자체가 신학적 토론이 아니라 교권이나 교회 정치의 산물이었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사실 나의 신학이 문제되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단이라고까지 일컬었으나 태도가 자유롭다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들 박형룡의 신학과 나의 신학을 비교하는데, 그 신학의 논쟁은 논쟁의 성격을 띨 수가 없어요. 그는 아주 골수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일단 논쟁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번 얘기하면 그만이거든요. 자기 것이 절대니까, 같은 소리 여러 번 할 수도 없고, ‘내가 하는 말이 진리다, 이것 아니면 다 비진리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요, 자유로이 여러 번 새롭게 접근하거든요. 자동적으로 그들은 방어적(defensive)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일단 디펜시브는 창조적이지 못하죠. 난 그래서 박형룡을 신학적 상대로 생각지 않았어요.”14)

14) 앞의 서정민 녹취 기록, p.7.

이어 김재준은 교권적 갈등, 서북계 월남 기독교 세력과의 주도권 문제로 그 갈등의 핵심을 설명했다. 장공은 결국 총회의 결정이라는 것도, “신학적 이슈를 놓고, 신학에 눈뜨지 못한 많은 수의 시골 교역자와 장로들에게 거수로 결정하라는 겁니다. 지방색, 이해관계, 그냥 거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 정죄의 명분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15)라고 하여 당시의 신학적 갈등 자체가 교권 지배구조의 산물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지(分枝)의 배경을 신학적 명분을 앞세운 비신학적 이유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섭리의 대세였음은 부인하지 않았다.

15) 위 같은 기록, pp.7-8.

“결국 기장의 분립은 세인들이 얘기하는 조선신학교나 김재준의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때문도 아니요, 예장측이 숭상하는 정통신학, 보수신학의 고수 때문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일찍부터 상존했던 한국 장로교회의 지방적 교권갈등, 비판 없는 신학독재의 타성 등이 중심 이유로 작용했으며, 특히 남북분단과 북한의 다수 교권세력의 대거 남하와 기득권 대립, 그들의 존재기반 구축 등이 이면에 깔린 문제였습니다. ...... 그러나 어떤 이유나 명분도 한신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고 기장의 분지도 한국교회 역사나 섭리의 대세였다고 느껴집니다.”16)

16) 위 같은데.

장공의 회고를 중심으로 본 한국교회 신학적 갈등사는 그대로 한국교회 신학사의 한 축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신학사와 그 획기적 전환점을 이해하는 중심 내용이 됨 또한 사실이다.

[4] 한국 신학운동과 그 역사에 대한 장공의 견해

“선교사들이 교역자 양성기관을 세울 때 한국인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할 능력보다도 선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너무도 과도히 주입시킨 까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때의 선교사가 과연 어떤 신학을 강요했었는가가 문제다. 그들이 겸손하게 세계교회의 동향을 살피며 한국교회도 그 제체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함께 배우고 함께 일할 수 있게 지도했었다면 선교사들에게 복종하는 것 자체가 악덕일 것은 없겠기 때문이다.”17)

17) 金在俊, “韓國敎會의 神學運動-그 回顧와 展望,” 『長空 金在俊 著作全集』, 제1권, 1971, p.176.

김재준은 한국교회 초기부터의 신학교육, 그리고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의 편협한 신학의 전수와 제한정책에 대한 이의를 지녔다. 이는 향후의 한국 신학이 진행되는 방향과 특성을 결정하는 토대였고, 그것이 제한적이므로 해서 신학운동의 경직성이 나타났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김재준의 한국교회 초기 신학제한 상황이해의 가장 뚜렷한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가 1896년에 제시한 ‘한국목사훈련요항’에 있다.

“1) 선교사가 어떤 韓人에게 목사 공부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당사자에게 그런 뜻을 알리지 말 것. 2) 될 수만 있으면 외국 돈으로 교역자를 사용하지 말 것.
3) 미국에 보내 교육시키지 말 것(적어도 선교사업 초기에 있어서는).
4) 영적 경험의 높은 영역에 적응되도록 할 것. 무엇보다도 ‘성신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
5)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사실에 철저히 근거하도록 할 것.
6) 젊은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정으로서 고난에 참을 수 있도록 훈련할 것.
7) 한국 신자가 文化와 현대문명이 진전함에 따라 한국 목사의 교육정도를 높힐 것. 그가 국민의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기에 족한 정도로, 일반 교인보다 높은 교육을 시킬 것. 그러나 동떨어지 게 높아서 남의 羨望을 자극시킨다든가 分離感을 주는 일은 없도록 할 것.”18)

18) 위 같은 글, pp.174-175에서 재인용.

결국 선교사들이 한국인 성직자를 길러냄에 있어 일정한 수준을 조절하고자 하는 제한적 프로그램 자체는 한국 신학의 자율적 사유를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에 주목한 것이다. 김재준은 이러한 자신의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회사가 백낙준(白樂濬)의 비평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 목사 양성 방침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중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以上에 列擧한 신학교육 정책에 품긴 높은 동기도 인정한다. 그러나 최선의 의도까지도 그것이 극단으로 실시될 때에는 흔히 惡結果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 정책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이 먼 장래를 바라보는 百年大計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自尊과 自信이란, 교육받은 지도자들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목사들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 바친 봉사의 후계자가 될 사람들이다. 한국 목사의 지적 훈련과 문화적 품격이 높은 선까지 올라감으로 말미암아서만 외국선교사들과 그들과의 사이에 생기는 불유쾌한 차별적 비교와 넓은 간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한국 목사의 지적 수준을 될 수 있는 대로 저하시키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선교사들은 대학과 신학에서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후계자인 한국 목사는 겨우 일반 교인보다 조금 높은 교육 밖에 받지 못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보는 대로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하층의 무식한 대중 속에 그 뿌리를 뻗쳤다. 그러므로 그들보다 조금 높은 지식수준이란 것은 그리 높은 것이 못 된다. 자라나는 청년들은 일본 기타 외국에 가서 文理며 科學 方面에 높은 교육을 받고 온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지난 간 세대의 사람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 목사들이 국민에게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도록 한다는 그 선언은 오히려 正反對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19)

19) 백낙준, 『韓國改新敎史』, pp. 205-206, 위 같은 글, pp.175-176에서 재인용.

이 문제에 대한 시각은 장공 김재준과 용재 백낙준의 견해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특히 장공 김재준의 한국 장로교 신학에 대한 중심적 이해는 그 신학교육의 풍토와 신학 발전의 범주가 같은 궤에 놓였다는 생각이고, 그 중추적 핵심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보수적, 근본주의적 신학교육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육 기관은 온전히 선교회의 직영으로 되어 있던 1901년에 설립된 ‘평양 장로회신학교’였다. 그들은 이상에 소개한 교육정책에 의하여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을 주입시켰다. 미국에서의 根本主義 그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敎理, 信條를 正統的으로 是認해야 한다는 敎理 第一主義를 강조한다. 그러면 교리 중에서는 어떤 것이 제일 基本的인 것이냐 하면,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2) 그리스도의 肉體的인 부활, 3) 피로서의 속죄, 4) 성경의 절대무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표준으로 모든 교역자와 신자를 심판한다. 그 중에서도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확보하려는데 전 정력을 다한다. 그것이 정통주의 신학 옹호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다.”20)

20) 김재준, 위 같은 글, pp.176-177.

결국 김재준이 목도한 해방 이전 평양 장로회신학교 중심의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함축된다. 첫째,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주입이다. 둘째, 교리 제일주의의 신봉이다. 셋째, 기본 4대 교리를 중시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역자와 신자를 심판한다. 넷째, 성경의 객관적 권위 확보를 최우선 순위로 한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신학의 발아와 성장을 가로막는 협소한 신학환경으로 이를 지목하는 의견인 것이다. 특히 김재준 당시 한국 장로교 주류신학의 성경관, 즉 이를 축자영감설로 규정하고, 그러한 성경 이해가 지닌 신학적 조바심을 경계하였다.

“그 전술로 그들은 폴라누스(1609)가 제창한 성경 축자영감설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걱정한다. 만일 성경의 어느 한 점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의심하고, 구원의 확실성도 의심하고 신자의 윤리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무오를 믿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 전체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고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批判을 악마시 한다. 그것은 성경이 비판의 대상이 될 때 그들의 公式的 體系가 그 터전에서부터 무너진다고 보기 때문이다.”21)

21) 위 같은 글, p.177.

김재준이 이해한 당시 주류 장로교 신학의 성경이해는 성경무오설을 통한 단일의 신학적 체계 유지가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김재준이 제시하는 견해는 바로 이들의 신학이야 말로, 성경 자체나 기독교 신앙 자체의 수호에 있지 않고, 오직 그들 스스로 세워놓은 체계, 곧 도그마 자체를 위한 이론적 틀이며, 거기에 함몰하는 역설적인 신앙파괴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한 ‘씨지’의 비판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體系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갈릴레오가 水星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표했을 때, 플로렌스의 ‘天文學者’ ‘씨지’라는 이가 이것을 반박해 말하기를 ‘사람의 머리에는 일곱 구멍이 열려 있는데, 두 눈, 두 귀, 두 코 구멍, 한 입이 그것이다. 한 주일에는 일곱 요일이 있다. 그와 같이 하늘에는 일곱 별이 있다. 이렇게 7數로 오묘하게 체계화한 데다가 또 하나의 다른 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수인 <7>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全體系가 崩壞된다고 부르짖었다’ 한다. 그는 자기가 꾸민 체계에 하늘의 별들이 들어맞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우리 신학에 있어서도 어떤 체계를 세운 교리, 특히 그들의 성경관에 성경 자체의 실존이 얌전하게 들어맞아야 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이 ‘體系’에 맞지 않을 때, 체계는 물론 붕괴한다. 그러나 ‘체계’의 붕괴가 ‘별’의 붕괴나, ‘성경’ 또는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22)

22) 위 같은 데.

김재준의 비유는 매우 적절하다.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 신학이 주창하던 정통적 신학의 체계나 단일한 관점이 만약 그 신학 자체의 파수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학을 위한 신학이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오히려 신앙이나, 생동적 감동의 신학적 지평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인본주의적 도그마 속으로의 침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신학이나, 체계나, 이론이나, 교리 자체를 버리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성경 진리의 진리 자체가 보존될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진정한 신학의 길이며, 방법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에서 본 장공 김재준의 견해, 곧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신학적 활동을 시작할 무렵부터 파악한 한국 장로교 주류 신학의 특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바로 그 자신의 신학활동의 근거가 된다. 그는 비록 소수의 신학적 소신으로 현실적 위해를 당하더라도 한국 신학의 지평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미 살핀 1930년대 이래 겪은 일련의 신학적 파동과 비판,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새로운 신학교육, 그리고 마침내 해방 이후 ‘기장’의 수립에 이르는 끊임없는 신학적 활동의 근간에는 이러한 한국 신학사 이해가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함축적으로 그는 한국의 주류 장로교 신학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고, 성경의 진리와 생동을 저해하는 체계화된 인본주의의 도그마임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무오설이나, 축자영감설, 나아가 근본주의 신학 자체가 ‘체계를 위한 체계’로서 기독교나 성경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경직된 사고임을 가장 주목한 것이다.

[5] 결론-장공 이후의 한국신학과 과제

한편 김재준 신학에 대한 보수측의 평가, 해방 이후 기장 창립 당시의 비판은 김재준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파괴자요, 성경을 일반화시키는 인문주의자의 극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김재준 스스로 당시 자신이 보수 신학자들로부터 어떤 평결을 받았는지 회고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분명히 당시 예장측이 나와 조선신학교를 문제삼아 들고 나온 표면 이유는 신학문제였읍니다. 그들이 ‘신신학’이란 명패를 붙여 나에게 총공격을 감행할 때는 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전쟁윤리가 적용되듯 무서운 것이었고 아마 중세기쯤이었으면 이 사람은 벌써 종교재판소에 걸려 분살됐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규정, 정죄한 나의 신신학이란게 바로 이렇게 정리되었어요. ‘첫째, 김재준은 성경을 보통 고전(classic)문학 가운데 하나일 뿐 거기에 신의 특별계시가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둘째, 김재준은 예수의 기적,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는다. 네째, 김재준은 모세5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다섯째, 김재준은 성경무오설을 부인한다. 여섯째, 김재준은 선교사를 배척한다.…’ 아무튼 이런 억측의 김재준론은 마치 상품 광고지 같이 인쇄, 선포되었으며 각 지교회와 노회를 순회하면서 김재준은 성경파괴자고 교회문란자라고 선동까지 했습니다. 일부 순진한 교인들은 김재준을 ‘마귀’라고 무서워한다는 소문까지 들렸습니다. 참으로 착잡한 심경이었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읍니다.”23)

23) 앞의 서정민 녹취 기록, p.8.

결국 김재준을 비판하는 측의 주장은 김재준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파하는 자이며, 성경을 인문학적 고전으로 전락시키고, 성령이나 신앙의 영감을 가로막는 인문주의자로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의 일편에서 비판의 대상을 폄하하거나 공격할 때 그 요소는 ‘반신앙’이어야 하며, ‘적그리스도론’이어야 할 것임에는 어김이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재준을 몰아붙이는 쪽이나, 김재준이 평결한 보수적 교권신학의 핵심이 모두 ‘서로 인본주의적 경향이라는 비판점’에서 일치한다는 점에는 주목해 볼 여지가 있다.

이상 개략적으로 살핀 장공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비평의 입장을 감안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몇 가지 김재준 신학의 특징을 가늠할 수 있다.

첫째, 김재준의 신학은 포용적이지, 분리적이지 않다. 즉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과 상반되는 보수 근본주의 신학의 약점에 주목하고, 우려하면서도 그러한 신학적 입장 자체를 공격하기 위한 일에 신학적 승부를 건다던가, 그와 같은 신학이 존재하는 것 자체의 문제를 문제시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신학은 좀 더 자유로운 지평 위에서 여러 가지 다각적인 관점을 지니고 논구되어야 한다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김재준의 신학은 인문학적 기독교나 성경이해에 몰두되어 있지 않다. 김재준은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나 성경이해의 목표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 진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결코 성경의 일반화나 기독교 신앙의 격하에 있지 않고 다양한 접근을 통한 성경 진리의 극대화, 기독교 신앙의 선양에 있다.

셋째, 김재준 신학의 대개는 세계적 신학사의 조류로 볼 때 신정통주의계에 속한다. 국내 그의 비판자들의 제기한 자유주의자라는 특성은 그의 신학과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신학사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어떻게 정의하여 왔는가 하는 점과도 직결되어 있다.

“한국에서 거명된 자유주의는 대개 ‘상대적’ 의미의 자유주의, ‘광의적’ 의미의 자유주의, 이른바 ‘네거티브형’ 정의가 통용되었다. 그래서 정통 보수주의 신학 이외의 모든 신학적 경향이나 사조, 방법론은 모두 ‘신신학’, ‘진보신학’, ‘자유주의’로 혼용, 통칭된 과정을 밟아 왔다. 물론 이러한 정의나 구분법을 좀 더 세분하여 이른바 ‘사회복음’이라는 신학적 목표로서의 자유주의나 ‘역사적 고등비평’이라는 성서의 해석방법이나 신학방법의 차별로 자유주의를 볼 것인가에 따라 좀 더 다른 해석을 기할 수 있지만, 아무튼 한국 신학계에서는 신학적 방법으로서의 ‘고등비평’을 하나의 기준으로 하여 모든 새로운 신학적 시도를 자유주의로 규정한 것이다.”24)

24) 서정민, “한국교회와 자유주의,” 『한국기독교사상』,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p.199.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한국적 정의 환경에 의거하면, 김재준의 신학은 ‘자유주의’가 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이 지닌 요목들을 직시하면, 적어도 정통신학의 열린 계승을 주창하며, 지나친 자유주의적 인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신학을 경계하고자 하는 이른바 ‘신정통주의’의 넓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넷째, 김재준의 신학이론 자체도 결코 어느 쪽이던 극단을 취하는 극점의 신학은 아니다. 즉 상대방의 신학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자세로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신학도 일정한 폭을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선상(線上)의 신학’, 나아가 ‘스펙트럼’의 신학이다. 이러한 특성은 현대 에큐메니컬 신학의 가장 대표적 근저임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상의 정리를 통해 전개시켜 볼 과제는 비교적 자명하다. 장공 김재준의 신학적 사명은 단선적 몰입으로 협소한 일원주의를 지향하던 한국교회 주류 신학에 대한 극복이었다. 그러한 그의 신학적 사명은 그가 한국의 신학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였는가 하는 관점 속에서 충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김재준 신학의 완성이나 계승은 경직된 보수신학의 극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학적 활동이 자유로운 신학적 운신의 폭과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후학들은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신학의 집을 설계하고 지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제에 의하면, 김재준 신학 이후, 특히 ‘기장’의 신학 작업을 중심으로 외래 유입의 신학이나 창출신학을 불문하고 일련의 신학적 생산이 가능하였던 것은 소중한 유산이다.

현 시점에서 ‘민중신학’이나 ‘민주화신학’을 불문하고 새로운 정체기를 맞고 있음은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신학의 현실이다. 이러한 즈음에서 한국에서 비로소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열기 시작한 장공 김재준의 신학과 그 이해로 돌아가 새로운 과제를 찾아 볼 필요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 또한 몇 항목으로 축약되는 제언으로 논의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적 에큐메니즘의 회복이다. 신학적 갈등과 피아의 충격이 격렬하던 김재준 시대에도 김재준의 타 신학적 관점에 대한 용해된 이해는 그 폭이 장대하다. 오히려 상대의 관점이 지닌 출발과 진행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지니고 있다. 현하 한국신학의 풍향은 양극화의 골이 깊고, 그 요소 요소에는 수많은 벽으로 가로막혀 소통불능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다.

둘째,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의 관점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신학적 사유가 끊임없이 생산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 걸 맞는 신학적 사유의 진폭이 협소한 것은 김재준 이전 시대로의 후퇴와 같은 상황이다. 이 또한 장공의 신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다시 상고해 보아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셋째, 한국의 신학이 그야말로 이론의 범주를 넘어 행동하는 신학적 지평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 글에서는 깊이 다루지 못하였지만, 장공 김재준 신학의 특징과 그의 한국 신학에 대한 주문은 ‘행동하는 신학’이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삼선개헌 기도’로부터 가장 적극적인 신학적 참여를 견지한 실천적 신학자였다. 이는 역시 현하 한국 신학의 이론적 범주화에 경종을 울리는 질책으로 존재한다. 신학은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실천한 장공의 신학은 이 시대 한국교회 신학적 과제의 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서 정 민(徐 正 敏) 교수

현재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신학과 및 대학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수학

(저서) <한국교회의 역사>, <한일기독교관계사연구>,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제중원과 초기한국기독교>, <이동휘와 기독교> 외 저서 3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