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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13회]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과 활동 / 김흥수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4 14:10
조회
609

[제13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7년 5월 17일(목) 오후 5-7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과 활동


김흥수 박사
(목원대학교 교수/교회사)


[1] 들어가는 말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이하 '민주동지회')는 19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결성되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온 기독교인들의 국내외 연대조직이다. 민주동지회의 조직과 활동은 1980년대 후반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90년대 들어서서 박상증의『제네바에서 서울까지』, 이삼열의 “유신시대 유럽에서의 사회선교(UIM)” 등에서 경험담 형식으로 소개되었다. 민주동지회는 2001년 일본에 보관해 두었던 방대한 양의 활동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에 위탁했으며, 2004년 1월 민주동지회의 핵심인물 박상증과 오재식이『기독교사상』좌담회에서 민주동지회의 태동, 결성 및 활동을 밝힘으로써 그 정체가 더 분명히 드러났다. 동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해외 한국민주화운동 자료 전시회,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민주동지회 자료와 활동을 소개하였다.1) 그 후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주동지회 자료를 정리하여『한국민주화운동 자료목록집 2』(2005)을 간행되었다.


1) 박상증,『제네바에서 서울까지』(새누리신문사, 1995); 이삼열, "유신시대 유럽에서의 사회선교(UIM)", 박상증 편저,『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운동』(대한기독교서회, 1992). 2004년 10월 1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국사편찬위원회의 학술회의 발표자는 다음과 같다.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활동과 의의"(박상증), "국편 소장 한국민주화운동 자료의 구성과 성격"(최영묵), "유럽에서의 한국민주화운동의 전개와 자료"(김흥수), "일본에서의 한국민주화운동의 전개와 자료"(조기은).


민주동지회 자료는 지난 70년대부터 독일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삼열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다량의 문서군과 김경재가 캐나다에서 입수한 김재준 목사 소장 문서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김경재 교수에 의해『북미주․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자료』(2004)라는 세 권의 자료집으로 간행되었다. WCC 도서관에도 1975년 민주동지회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WCC 도서관의 한국 민주화운동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서 수집되어『한국민주화운동 자료목록집 2』에 소개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원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과정 및 결성 후의 활동을 정리하는 데 있다.


[2]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배경


민주동지회는 해외의 에큐메니칼운동 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중심의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그것의 등장은 더 직접적으로는 1970년대 전후 형성된 새로운 선교세력의 등장 및 억압적 정치상황과 밀접히 연관되어 나타난 반응이었다. 기독학생운동은 1969년 KSCF로 통합되어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KSCF의 첫 사업으로서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현장에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려는 운동이었다. 산업현장과 도시빈민 지역에서는 조지 오글 목사와 조지 파시의 산업선교 및 도시빈민 운동이 교회선교의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의 이런 흐름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가시화된 것이 1973년 남산 부활절예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73년 4월 2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의 부활절 예배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지가 배포된 사건인데, 6월말 박형규 목사와 KSCF 회원, 빈민선교 활동가들이 부활절 예배장소에서의 전단지 배포와 관련하여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회 대학생회의 기도회와 가두시위가 등장하고 마침내 10월 2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250여명이 4.19기념탑 앞에서 자유민주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남산부활절 사건과 10.2데모 이후의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인권운동이 조직화되고 있었다. NCC가 인권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1974년 4월이었다.2)


2) 1970년대 전후의 기독교청년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병호,『한국기독청년학생운동 100년사 산책』(땅에 쓰신 글씨, 2005) 참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은 해외에서도 등장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해외도피 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1972년 유신체제 이후 해외에서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데, 1973년 7월 김대중을 지지하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주본부를 결성했다. 한민통 미주본부가 결성된 후 김대중은 일본에 가서 한민통 일본지부를 결성하던 중, 8월 동경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미주, 유럽에 있는 한인 교포들에게 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재 투쟁 소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박형규 구속과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5월 20일에는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1973년 5월 이후 비밀리에 국내외에 유포되어 한국사회는 물론 빠르게 아시아교회협의회 및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교회들에게도 알려졌다.3)


3) 이 선언의 작성 과정 및 배포에 관해서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오재식, 지명관을 초청해 가진 좌담회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의 작성 경위",『한국기독교와 역사』제9호(1998년 9월) 및 김흥수,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의 작성과 배포과정",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식』(1998년 1월) 참조. 이 선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목사와의 협의 하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명관, 오재식, 김용복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성명 발표는 독일에서도 뒤따랐다. 1973년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독일복음교회 동아시아선교부가 남독 바일쉬타인에서 주최한 한국 기독교인 수련회에서 “재독한인 그리스도인의 선언”이 발표되었다.4) 안병무(한국), 박봉랑(한국), 박상증(스위스, WCC), 강문규(스위스, WSCF), 임순만(미국) 등이 참석했고, 재독 한인교회 목회자, 유학생, 그리고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독일 목사들이 참석한 수련회에서 작성된 이 성명서는 “한국의 현 정권은「10월 유신」이란 위장된 구실 아래, 민주적 헌정질서를 하루 아침에 파괴하고, 일인 영구집권의 독재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이에 항거하는 양식 있는 지성인과 학생 및 종교인을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며 제어하고 있다”면서 박정희 정부를 격렬히 비난하였다.5) 선언은 이어서 “우리 재독 그리스도인들은, 인권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국내외의 민주수호자들과 함께 공동의 유대의식을 가지며, 우리의 빛난 조국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각 방면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엄숙히 결의”하였다. 여러 나라로 유포되어 반독재운동을 자극한 이 성명서는 국내의 1973년의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에 대한 독일 거주 교포 기독교인들의 지원인 셈이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국내와 미주, 일본, 유럽을 연결하는 해외 기독자들의 민주화운동 연결망이 형성되었으며, 이 연결망을 통해 국내에서 나오는 반독재운동 문서가 독일로 전달되기도 했다.6)


4) 이삼열, "유신시대 유럽에서의 사회선교(UIM)", p.184.
5) "재독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1973년 11월 25일 Beilstein에서 한국 그리스도인 유지 일동.
6) 이삼열, "유신시대 유럽에서의 사회선교(UIM)", p.184.


독일에서 “73년 재독한인 그리스도인 선언”이 발표되던 무렵 국내에서는 12월 장준하, 함석헌, 김재준, 김수환 등이 가담한 “유신헌법 개정청원 1백만명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1974년 1월 이 운동을 탄압하는 긴급조치 1, 2호가 발표되었다. 헌법을 비판하면 15년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1, 2호만으로는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을 막아낼 수 없게 되자 정부는 동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대학생, 종교인, 재야인사 등으로 구성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하였다. 검찰은 “유혈폭력혁명”를 통해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했던 이 사건에 “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세력”도 들어있다고 발표하였다. 이 일로 이직형, 안재웅, 정상복 등 KSCF 임원과 실무자들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소식이 외국 교포들에게 전달되면서 국내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해외 민주화운동도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해나갔다.7)


7) 민청련 사건 발표 직후에 간행된 독일 민건회의 기관지『광장』제1호(1974년 7월 15일 간행)는 강돈구의 "민주학생들이 공산당인가? 민청학련사건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북미주지역에서는 1973년 한민통 미주지부의 결성과 1974년 뉴욕과 토론토에서의 민건회 조직 이후 한국인권 및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유럽에서의 한국 민주화운동은 1974년에 조직화되어 나타났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 조직이 필요한 시점에서 독일 동포들은 1974년 3월 1일 강돈구, 박대원, 송두율, 윤이상, 이영빈, 이삼열, 이화선 등 55명의 이름으로 “뜻을 같이 하는 국내외 동포들과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뭉치고저” 다짐하는 “민주사회건설을 위한 선언서”를 발표하고,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약칭 민건회)를 조직하였다. 민건회는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민주사회의 건설을 촉구하기 위해 3월 1일 본의 뮌스터 광장에서 열린 성토대회와 가두시위에 함께 참석했던 교포 노동자, 유학생, 종교인, 지성인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민건회는 유신치하에서 투쟁하는 한국민중들과 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유럽 최초의 한국 민주화운동 단체였다.8)


8) 독일 민건회의 창립과정에 대해서는 "민주사회건설을 위한 선언서" 및 이삼열이 작성한 보도자료, "서독의 한인교포들 반독재 데모-본에서 3.1절 맞아,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의 주최로" 참조. 이삼열 기증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일에서 민건회가 조직된 것은 당시 광부와 간호원 등 동포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고조, 국내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한 유학생들의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비판과 반대 시위,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과 연대, 동백림 사건 피해자들의 반독재 투쟁 같은 동포사회의 환경과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박대원,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과제", 인터넷신문 민족통신 2004년 3월 6일.


민건회는 헌장에서 “민주사회의 이념과 그 실천방법을 모색하며, 국민대중의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건설적인 사회참여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그 근본과제로 삼는다”고 선언하였다(1976년 10월 9일 개정 헌장). 민주사회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자 하는 재독 한국인을 회원으로 둔 민건회는 초대의장에 송두율 교수를 추대하였다. 민건회는 해마다 삼일절이나 4.19에 맞춰 박정희 독재에 항의하는 교포들의 집회와 시위를 가졌으며(1974년 3월 1일 본, 1975년 4월 26일 프랑크푸르트) 한국의 안병무 교수, 미국의 임순만 교수, 선우학원 교수, 캐나다의 김재준 목사,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다 추방당한 죠지 오글 목사나 제임스 시노트 신부 등을 초청해 한국에서의 반독재 투쟁 상황을 재독 한인들과 독일교회에 알리는 활동도 하였다.9) 민건회는 그밖에도 기관지『광장』(1974년 7월 15일 창간호 발간)과『민주한국』(『광장』을 1976년 1월부터『민주한국』으로 개편) 같은 간행물을 통해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주요 인사는 10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주로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13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0)


9) 1974년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김재준 목사의 독일 순회강연에 대해서는 민건회 의장단 명의로 1974년 11월 23일 보낸 실행위원들에게 보낸 "김재준 박사 방독 및 순회 강연회, 좌담회 개최에 관하여" 그리고 민건회 보도자료, "김재준 박사 서독에서 순회강연-민주사회건설협의회 주최로 한달 동안", 이삼열 기증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재준 목사는 이 때 EKD 서남선교부 주최의 한독기독자 타궁에 주제강사로 초청되었다.
10) 1975년 11월 제네바 회의에서 발표한 독일교회 보고서 "Contribution to the struggle for the human rights in Korea from the German side", 이삼열 기증문서.


민건회는 독일 내 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민주단체들과도 연대해 공동 심포지엄 및 성토대회를 제네바, 파리, 도쿄, 뉴욕, 워싱턴 등지에서 개최한 바 있다. 독일에서는 서백림 민건회, 뒤셀도르프 민건회, 프랑크푸르트 민건회 같은 지역 민건회가 조직되었다. 1970년대 중반 독일에는 민건회 외에도 “남북사회문제연구회”와 “재독한인노동자연맹”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독일 외 지역에서도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민주화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프랑스의 “한국자주통일추진회”, “자유동포협의회”, “한국민족문제연구회”, 스위스의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스웨덴의 “민주수호협의회”, 덴마크의 “민족문제협의회”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일본에서는 1973년부터 민주화 투쟁 소식이『世界』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글에 소개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 후반 교회 일각에서는 산업선교, 빈민선교, KSCF 학사단 운동 등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1970년대 들어서서는 남산부활절예배 사건, 한국그리스도인 선언 등으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이에 대한 지원으로 독일, 미국, 일본 등에 거주하는 교포 및 유학생들의 민주화운동도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이런 활동들을 기반으로 해서 민주동지회가 결성되었다. 민주동지회가 결성될 단계에서는 이미 회원들 간에 네트워크가 단단하게 맺어져 있었다.11)


11) "지하연대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물꼬 텄다", 기독교사상 좌담-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 『기독교사상』(2004년 1월), p.179.


[3] 1975년 제네바 회의


한국의 열악해져 가는 정치상황과 인권문제는 국제기구 중에서도 WCC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으며, WCC 회원교회들로는 독일교회, 미국교회, 일본교회가 한국의 인권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74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WCC 중앙위원회에서 WCC 선교위원회(CWME)는 정치적 압제상황에서 인류의 고난을 짊어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고난 받는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책무임을 천명했다.12) 에밀리오 카스트로 박사가 총무로 있던 WCC 선교위원회는 권위주의적인 박정희 정부에 맞서 싸우는 한국의 교회들과 기독교 단체와 긴밀히 접촉했다. 1975년 4월 박정희 정부는 민주 및 인권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관석 NCC 총무, 조승혁, 박형규 목사 등을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의 구속 소식을 들은 세계교회의 충격은 컸다. 5월에 미국 NCC 대표, WCC 대표단이 내한했다. WCC 대표단은 아시아교회협의회(CCA) 의장 시마투팡 박사, WCC 중앙위원 윌리암 톰슨, 폰 바이제커 박사, WCC 국제문제위원회 레오폴드 니일루스 등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한국인권문제를 위한 북미주연합”(The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이 탄생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도 한국교회와 선교협력 관계를 맺은 교회단체들이 연합해서 한국 인권문제를 협의하는 기구를 구성했다. 스투트가르트의 EMS, BFW, 백림선교회, 프랑크푸르트선교회 등이 중심이 됐으며, 영국교회의 크리스천 에이드, 화란의 ICCO, 스웨덴의 자유교회들과도 긴밀한 연락관계를 가졌다. 유신체제의 세계교회에 대한 도전과 교회의 대응인 셈이었다.13)


12) "Aide Memore. Informal Consultation on Korea. Geneva, November pp.6-7, 1975," 이삼열 기증문서. 이 비망록은 박상증이 16쪽으로 정리해서 회의 참가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1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1970년대 민주화운동』1 (1986), pp.36-37.


마침내 1975년 11월 6-7일 WCC 세계선교위원회는 제네바 시내의 가톨릭영성센터(Spiritual Center Le Cenacle)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긴급 비공식 모임을 소집했다. 이 모임은 한국교회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기독교인들과 KSCF, 도시산업선교, 교회여성연합회, 그리고 NCC 같은 에큐메니칼 단체들을 지원하기 위한 장단기 활동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틀 동안 열린 이 회의에는 미국, 스웨덴, 독일, 캐나다, 일본, 영국, 싱가폴, 스위스, 화란의 기독교 단체로부터 약 40명의 사람들이 토론에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김관석, 안병무, 문동환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출국금지로 참가할 수 없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참석자들은 11월 5일과 11월 8일 이틀 더 모임을 가졌는데, 김재준(캐나다), 이상철(캐나다), 이승만(미국), 손명걸(미국), 김인식(미국), 오재식(일본), 최경식(일본), 장성환(독일), 이삼열(독일), 신필균(스웨덴), 박상증(스위스)이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14) 이 모임에서는 일본, 서독, 미국, 영국, 캐나다, 스웨덴 그리고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표들이 활동을 보고했다. 이 무렵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여러 활동단체들의 포럼인 "The 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for Human Rights in the Republic of Korea"가 8월에 조직되었고, 일본에서는 1974년 1월 민주화투쟁에 나선 한국 기독교인들을 후원하는 “한국문제 크리스챤 긴급회의”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지난 세기에,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영국성공회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고 한국전쟁을 제외하고는 한국문제는 유럽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영국의 크리스챤 에이드, 독일의 세계를 위한 빵, 스웨덴교회와 네덜란드 선교협의회 같은 유럽 교회단체들이 한국 기독교인들을 지원하는 에큐메니칼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독일교회의 지원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1965년 이후 한국 NCC와 독일복음교회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15)


14) 11월 5일과 8일의 모임에서 논의된 것은 이삼열 기중문서 중 "Geneva 회의록 개요" 참조.
15) 1975년까지의 독일교회의 인권운동 지원에 대해서는 1975년 11월 제네바 회의에서 발표한 독일교회 보고서 "Contribution to the struggle for the human rights in Korea from the German side" 참조. 이삼열 기증문서.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정보 및 전략에 대한 국제적 조정에 대해서 그리고 관심 있는 해외 거주 한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단체를 만들면 세계교회가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국인 참석자들은 현재까지의 운동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토론하였는데, 1)인권옹호, 구속자 가족돕기 같은 당장의 요구에만 호응하는 활동을 해왔고, 장기적 목표나 운동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없이 사업을 진행한 점이 논의되었다. 2)참가자들은 또 이제까지의 민주운동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설계와 청사진이 없었다는 점, 단순의 박정희 정권의 교체에서 더 나아가 민중의 해방과 남북통일까지 내다보는 민족사의 방향제시가 결핍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世界』1974년 11월호에 게재된 김재준 목사의 글이 전환점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3)해외 각지의 운동들이 국내와의 밀접한 연결과 균형 없이 이루어지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국내외의 제반운동들을 연결하며 전략전술을 세워가야 할 기능적 중심부가 부재했던 데 근본원인이 있기에 앞으로의 운동은 국내운동체들이 양성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해외에 본부를 두어야 하며, 운동을 조직화 체계화하고, 전문화 직업화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현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내ㆍ국외의 제반운동을 범세계적으로 연결시키며, 조직활동, 외교적 활동, 국내지원 활동을 통제 강화할 수 있는 중심부(centre)를 설치하는 일과, 이를 담당할 인적 자원을 중심부에 결집시키는 일”이다. 중심부와 연락망이 짜진 뒤에 민족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언문 및 프로그램의 작성, 제반활동의 전략 전술적 검토, 인적 자원의 기능적 활동분담 등을 수행할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 설립의 구체적인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a) 김재준 박사님을 이 조직체의 상징적 지도자로 하며, 김박사의 주변에 중심적 기능을 담당할 인적 자원을 team으로 보강하여 중심부를 구성한다.


b) 이 범세계적 조직체는 기왕에 조직된 지방적 조직, 그룹들을 성급히 흡수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 regional group들을 그대로 두면서 각 운동체의 중요한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묶어 핵심체(core group)로 만드는 작업이 된다. 다양한 조직들의 성급한 일원화는 오히려 분파작용의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c) 중심부의 기능은 1)정보자료의 수집, 평가, 분배(information, interpretation, documentation), 2)세계여론 형성을 위한 외교적 활동(lobby and press work), 3)공보선전 활동(press work), 4)국내운동의 물질적 전술적 지원활동(support action), 5)해외 제반운동체와 활동들의 연락조정(action coordination)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d) 중심부를 김재준 박사가 계신 Toronto에다 설치하며 center의 기능들을 coordinate할 staff로서 지명관 교수, 박상증 선생을 선출한다. 지교수가 이를 수락하고 현실적으로 Toronto에 이주할 때까지 표면적으로 노출시키지 않으며, 잠정적으로 Toronto와 Tokyo를 연결하는 선에서 중심부가 존재하도록 한다.16)


16) "Geneva 회의록 개요", 이삼열 기증문서.


이 모임은 11월 8일에는 6, 7일 양일간의 한국에 관한 비공식회의가 해외의 지원활동 강화와 국제적 조정 네트워크 구성을 강조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범세계적 조직체와 중심부의 구성에 관한 토의 후에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를 결성하고 토론토에 거주하는 김재준 목사를 의장에 추대하였다. 김재준 목사가 의장에 추대됨에 따라 그는 1976년 8월 북미주 한민통 의장직을 사임하고 세계민건의 의장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임원진에는 의장 김재준, 사무총장 지명관, 사무차장 겸 대변인 박상증, 회계 손명걸, 감사 이승만과 김인식이 포함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은 북미의 이상철, 이승만, 손명걸, 김인식, 홍동근, 일본의 오재식, 지명관, 김용복, 최경식, 유럽의 박상증, 장성환, 이삼열, 신필균, 국내의 이태영, 강문규 등으로 구성하였다.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는 1976년 5월 시카고에서 열린 모임에서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로 개칭되며, 1977년 10월 뉴욕회의에서 다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로 바뀌었다.


[4] 1981년 밧볼 회의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 결성 후 해마다 한 번씩 모여 활동방향을 토론하였다. 제네바회의에 이어 민주동지회의 2차 회의는 1976년 5월 3일부터 5일까지 시카고 맥코믹신학교에서 열렸다. 그후 3차 토론토회의(1976. 5. 3-5), 4차 뉴욕회의(1977. 10. 23-25), 5차 회의(1978) 등으로 이어졌다.


시카고 회의에는 제네바회의에 참석했던 김재준, 이상철, 박상증, 손명걸, 이승만, 이삼열 외에도 동원모, 구춘회, 이신행, 이선애, 김상호, 지명관, 선우학원, 홍동근, 차현희가 참석하였다. 이회의도 먼저 일본과 국내상황(지명관), 서독(이삼열), 북미주(이승만, 동원모, 손명걸, 이상철)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의 한국기독교인들은 주로 일본기독자 긴급회의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고, 한민통과 연결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한민통의 정보망이 CIA와 조총련계에 연결되어 있어 국내의 동지들에게 폐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독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는 유학생, 노동자, 교수, 목사 등 10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건회 안의 일부 젊은 유학생 층에서 정치의식이 급진화 되어 가고 있고,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반외세, 반자본주의 운동의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미국의 경우는 민통, 민건, 민협, 민촉, 구국향군, 남가주국민회의, 인권옹호회, 목요기도회 등 다양한 민주운동 단체들이 지역별, 이념적 차이, 인간관계 등으로 다양하게 존립하고 있으며, 연락과 협조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각 지역의 보고를 듣고 민주동지회 의장 김재준 목사는 민주화운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코멘트하였다. 이 문제는 제네바회의 때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1) 민주화운동의 정지작업을 위해 “우리가 누구냐?”, “투쟁의 목표가 무엇이냐?”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지식인이며, 소시민계급이고, 풍요사회에서 복지를 누리고 있으면서 불만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가 liberator로서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revolutionary로서의 준비를, 각오를 가져야 한다. 투쟁의 target은 남북한 모두의 독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인간을 어떤 型에 집어넣는 제도는 모두 반대해야 한다.


2) 맹자의 말처럼 전투에 있어서는 기회(天時)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그보다 地利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화이다. 기회는 늘 있으니까 민주운동을 장기적으로 계획해 보아야 한다. 국내외의 공동전선을 세우고, overall한 계획하에 역할 분담이 있어야겠다.


3) 이제까지 우리는 냉혹한 전쟁을 도피하며 violence 없는 혁명을 소리 질러 왔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독일의 나치는 결국 전쟁을 통해서 해결되었는데, 전쟁은 가장 큰 폭력행위이다.


4)이데올로기 문제의 정립을 위해 각 지역의 운동의 거점들이 study center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운동의 구체적 방법을 탐구하여야 하며 장기적인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교회의 사회화이며, 사회의 민주화이다.17)


17) "Chicago 회의록", 1976년 5월 3일-5일. 이삼열 기증문서. 시카고회의에 관해서는 구춘회, "북미주 인권운동의 회고와 전망", 이상철 목사 고희기념출판위원회, 한 나그네의 삶. 그의 꿈과 비전(대한기독교서회, 1994), pp.149-150 참조.


명칭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는 시카고에서 열린 모임에서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로 개칭되었다. 제네바회의에서 만든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는 마치 지역 민건만의 연합체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다른 단체에 속한 사람의 참여를 위해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로 개칭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임원도 회장 김재준, 부회장 지명관, 국내 1인, 사무총장 이승만, 대변인 박상증, 회계 손명걸, 감사 동원모와 구춘회로 정했다.


민주동지회는 1977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뉴욕 교외에서 모였다. 이 회의는 조직의 문제에서 먼저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는 지역적으로 떨어지고, 전담기구와 직원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 취지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우므로 우선 동지적 결속을 강화하는 작업에 치중할 것을 결의하고 명칭도 “기독자민주동지회”(International Christian Network for Democracy in Korea)로 변경하였다. 임원으로는 회장, 총무, 상임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회장에 다시 김재준, 총무에 손명걸, 상임위원에 이상철(캐나다), 이승만(미국), 지명관(일본), 장성한(서독)을 선임했다. 이 회의에서도 주로 국내 국외운동의 방향정립 문제가 토의되었다.


2)특히 주한미군 철수 문제, 기독교와 반공노선의 문제, 민주화와 통일에 관한 정치이념적 문제, 반박 민주화운동의 연합전선 문제 등에 관해 국내외에 산재한 여러 가지 대립된 견해들을 타진해 보고, 동지들이 가진 의견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교환했다. 토론의 결과는 현재의 운동을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노선에 고착시킬 수가 없으며,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나 상황의 변동에 따라 운동이념이나 목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우리의 운동이 여기에 대해 조심스럽게 또한 유연성(flexible)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며, 계속 방향모색을 해야 한다는데 모두 공감했다.18)


18) "New York 회의록“, 1977년 10월 22일-25일. 이삼열 기증문서.


민주동지회 모임은 1979년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일본 동경 교외에서 제5차 연례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총무를 박상증으로 임명한 것 외에는 조직상의 변화는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총무 박상증이 회원들에게 보낸 서신은 “남북통일 문제를 민주화운동과 유기적인 관계에서 포착하여 앞으로 적극적으로 검토 토의해 간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민족통일 과업에 대한 관심은 이 모임의 회의 결의문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동지들은 “자유와 정의와 인권을 보장하는 참된 안정과 민주화, 그리고 올바른 경제발전과 평화통일의 개념을 밝혀서, 시대적 양심과 민중의 의지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할 것을 새롭게 다짐”하면서 “특히 국가의 안정과 민주화에 필수적 함수관계에 있는 민족통일 과업을 위해 기독자로서의 사명과 기여를 다하도록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19)


19) “1979년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회의록”, 이삼열 기증문서.


1980년대 들어서서는 1981년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40여 명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독일 스튜트가르트 근교 밧볼아카데미(Bad Boll Academy)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홍콩, 오스트리아, 싱가폴, 영국, 화란, 스위스, 불란서, 스웨덴, 한국 등에서 왔다. 이 때는 전두환 정권이 기반을 다지고 있던 때로 앞으로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화 투쟁의 대열과 전략을 재편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투쟁 전략을 다시 논의해야 될 정도로 미국 외교정책은 반동화하고 있었고, 북한의 평화공세와 남한 일부 민주세력의 급진적인 과격화도 투쟁 전략을 재고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었다.


1975년 제네바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포함, 이런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민주동지회 동지들과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미국과 독일, 일본 등의 이름 난 인사들, 에밀리오 카스트로, 나이난 코쉬, 죠지 토드 같은 WCC 간부들이 함께 모였다. 이 회의는 1975년 11월 WCC 세계선교위원회에 의해서 열린 한국문제에 관한 모임과 같은 형태, 같은 목적을 가진 모임으로 이번에도 세계선교위원회 디렉터 에밀리오 카스트로 박사와 그의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 모였다. 이 회의를 준비하면서 WCC는 국제문제위원회 디렉터 레오폴드 니일루스와 세계선교위원회 디렉터 에밀리오 카스트로 명의로 회의 참석 예상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남한에서의 상황변화에 따라 한국 및 세계교회의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지도자들이 1975년 제네바회의와 같은 모임이 다시 개최되기를 원하고 있다면서 이 회의를 알렸다. 이 회의의 의제는 독일교회도 협력해 주었으며 후일 독일 대통령이 된 바이제커 박사, 베를린교구의 샤프 주교도 참석하였다. 바이제커는 기민당의 고위급 인사 및 독일교회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모임의 의제는 토론의 전반적인 콘텍스트를 제공하는 한국측의 주제발표, 한국교회 및 기독교인들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 한국과 일본, 독일, 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발표, 에큐메니칼 전략 및 실제적 협력을 위한 구체적 문제의 토의 등이었다. 샤프 주교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민주화투쟁의 신학적 의의”(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Democratic Struggle of the Korean Churches and Christians)라는 제목의 발표를 맡았다. 동경대의 사까모도 요시카주(“Japan and Korea in a Macro-Historical Perspective”), 그레고리 핸더슨(“American-Korean Relations and the Korean Dilemma”)도 지역적 관점을 발표했다. 이 회의는 박정희 사망과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상황변화 가운데 열린 회의라서 전체회의 주제는 “한국의 새 사태와 한국교회의 자세”였다.20) 이 모임에서 중요하게 토의된 것은 민주화운동의 이념을 어떤 방향에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회의는 “기독자 민주동지들은 독점자본주의적 체제와 공산독재체제의 비리와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제3의 이념의 가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21)


20) 샤프, 사카모도, 핸더슨의 글은 이삼열 기증문서에 들어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카모도의 강의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다음 문제는 평화다. 한반도의 평화문제는 동북아시아의 상황이 바뀌어야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는 요지의 발표를 했다. “지하연대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물꼬 텄다”, 기독교사상 좌담-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기독교사상』(2004년 1월), p.190 참조.
21)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방향설정에 관하여”, 밧볼 회의의 토론을 요약한 문서. 이삼열 기증문서. 1981년 5월 1일. 이 회의에 관해서는 박상증, 제네바에서 서울까지, pp.64-66; 박명철, “장공의 해외활동과 그 성격”,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장공 사상 연구 논문집』(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참조.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방향설정에 대하여


I.이념적 방향모색의 중요성이 국내외 민주동지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인식되고 이념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과 연구가 시급한 과제로 요청되었다.


1)반체제 학생운동의 일부가 현 체제를 군부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들의 연합전선으로 외세와 결탁한 매판재벌, 매판관료, 군벌을 타도하는 이념적 투쟁으로 급진화 시키려는 현시점에서 기독자민주동지들은 사회 현실 분석과 이념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면서 지금까지의 미비한 자세를 반성하며, 보다 적극적이며 체계적인 연구와 탐색이 긴급히 요구되었다.


2)한편 현 정권이 위장된 민주주의와 정의의 깃발을 들고 노동운동, 학생활동, 언론기관을 극심하게 탄압하며, 이념서클을 말살시키고, 이념서적을 금지시키는 상황에서 기독자민주화운동은 극우적 이념과 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공감했다.


3)외세의 지배와 종속으로부터 탈피하며, 민족분단의 비극을 극복하지 않고서 참된 민주화의 달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는 오늘,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 강대국들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통일의 상대방으로서의 북한의 지배체제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이해하며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심각히 느낀다.


II.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방향설정은 70년대를 이어온 이념의 핵심이었던 민주, 민중, 민족, 다시 말해서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민족적 주체와 자립의 가치개념들을 새로이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적 정치상황과 여건 속에서 구현하는 방향에서 찾아져야 하며, 이념적 목표와 함께 실천적 방법론이 구비된 새로운 체제와 사회의 설계도로서 부각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1)민주화운동의 진보적 세력들이 주장해 온 반독재 반특권, 반외세 반분단의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설명하는 이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현 집권세력이 극우적인 폭압통치와 수탈경제 체제를 가속화하고, 광주학살 사건 등으로 절망상태에 빠진 반체제세력들이 극좌노선으로 극렬화될 경우, 우리는 극단적 좌우이념의 폭력적 대립이 생길 것을 염려하면서 기독자 민주동지들은 독점자본주의적 체제와 공산독재체제의 비리와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제3의 이념의 가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


3)현 집권세력의 지배이념인 안보와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안보, 민중의 생존과 복지가 보장되는 경제발전, 전쟁과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방안 등,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차원 높고 실현성 있는 정책들을 제시하며 투쟁해야 한다.


III.기독자민주동지들은 한국의 사회적 정황 속에서 나타난 민중신학, 사회선교신학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인간, 자연, 역사, 사회에 관한 성서적, 신학적 가치관들이 한국의 현실분석에 기초한 정치적 이념의 설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다 근원적이며 상황적인 연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1)기독자들은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도, 기독자가 아닌 다른 모든 민주세력들과 협력하여야 하며,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위한 공동의 광장(Forum)을 마련하여야 한다.


2)외세의 지배와 경제예속, 정치적 탄압 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삼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연대하여 그 공통적인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이들의 역사와 사회구조 정치적 이념들을 깊이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3)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자들의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기독교신학과 교회의 역사가 갖고 있는 보수성과 반동성을 스스로 비판해야 하며, 철저한 자기비판과 끊임없는 갱신을 통해 기독교가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역사의 창건과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사회의 건설에 기여토록 노력한다.


1981년 5월 1일
기독자민주동지회 Bad Boll 모임


밧볼회의는 그밖에도 이제까지 캐나다에 두었던 중심을 동경으로 옮기고, 동경에 Documentation Centre를 설립하여 민주운동에 관한 정보 및 문서를 수집, 해석, 배포하고, 국내교회의 발언을 대변하는 역할도 수행하기로 하였다. 민주동지회는 미주, 일본, 독일, 국내 등을 거점으로 하여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였지만, 활동의 중심이 일본이 되면서 동경의 오재식, 지명관, 김용복이 다른 나라 및 국내의 정보와 자금을 배급하는 일도 담당하게 되었다. 민주동지회는 Documentation Centre의 설립 이전부터 자료와 정보를 중시하였다. 국내 정세 및 국내외 민주화운동의 파악은 민주화운동의 지원단체로서는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위해 민주동지회는 기관지『민주동지』를 영어, 일어, 한글로 발행하면서 동경 Documentation Centre를 통하여 국내외 언론매체의 국내정세 및 민주화운동 기사를 스크랩하여 활용하였다.22) 민주동지회는『민주동지』외에도 기관지로서 Korea Scope를 발행하였다. 1978년에 처음 간행된 민주동지는 3개 국어(한글, 영어, 일어)로 발행되었으며 발행지도 일본, 캐나다, 미국 등지로 바뀌어가면서 간행되었다. Korea Scope는 미국에서 영어로 발행된 기관지로 선동보다는 주로 논설과 해설, 과학적인 전망을 제시하였다. 민주동지회는 자체의 정보수집을 통해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 소식을 지명관 교수에게 제공하였으며, 그는 일본의 시사월간지『世界』에 1972년 11월부터 1988년 3월까지 매월 한국정세 및 민주화투쟁을 알리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집필하였다.


22) Documentation Center 설립에 관해서는 “Dear Friends”, 박상증 서신. 1981년 7월 7일. 이삼열 기증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최영묵, “국편 소장 한국민주화운동의 구성과 성격”,『한국민주화운동자료목록집 2』(2005), xiii 참조.


민주동지회는 이때부터 회장제를 두지 않고 사무총장 또는 총무제를 두었으며, 세계지역별로 코오디네이터를 선정하여 운영하였다. 1983년 당시 지역별 코오디네이터는 손명걸(미주), 김군식(일본), 오재식(국내), 장성환(독일), 안재웅(아시아)이 맡았다.


1981년 독일 밧볼에서의 모임이 끝나고 나서 6개월 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유럽과 미주의 교포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북한 대표들과 만나는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모임이 놀랄 만한 이유는 비록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기는 하지만 남한 출신 인사들과 북한 지도자들의 분단 후 첫 만남인 데다가, “기독자간 대화”라는 이름으로 모였기 때문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조국의 통일문제였다. 이 대화 모임은 어렵게 성사되었는데, 이 모임을 계기로 유럽과 미주에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선후 문제가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남한 내 민간단체의 통일운동은 정부의 제지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남북 종교 간의 교류나 통일운동은 국내의 정치상황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운 외국에서 시도되던지 국제 종교기구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대화에 나선 것은 유럽과 미주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동포들로 구성된 “조국통일기독자회”(기통회)였다. 기통회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구미의 민주화 운동 참여자들 중에 이북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그룹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기통회를 발족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대화를 시도하는『통일과 기독교』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해외 민주화운동 참여자 가운데서 북과의 통일대화 참가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간의 민주화운동 노선에서 이견 그룹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귀국해야 할 유학생들이 다수인 데다가 처음부터 독재체재의 거부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온 민건회로서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에서 좌파 교포들과 민주운동을 같이 하기를 부담스러워 했는데, 그럴 경우 자기 자신들이 좌익으로 의심받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연대운동 세력까지 같은 혐의를 받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23) 민주동지회 역시 이념적으로는 대체로 반공사상이 분명한 사람들, 반공이념의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하거나 공개적으로 북한 지지를 표명하는 자들이 주도하는 단체에는 가담하기를 꺼려했다. 이런 이유로 민주동지회는 일본을 근거로 하는 한민통과도 관련을 맺지 않았고 “보수, 반동, 친미세력”으로 또는 “눈치를 보는 민주운동”으로 비판받는 받는 경우도 생겼다.24) 민주동지회는 전략적 차원에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서 친북주의자들 및 북한과 관계를 갖지 않으려고 했다. 민주화나 통일운동 뿐만 아니라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WCC와 관계를 맺는 일에도 전략상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한국 NCC는 1981년 비엔나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해외교포 기독교인들의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가 열릴 때는 친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라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방해하였는데, 이 경우는 전략적 차원만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케이스였다.25)


23) 이영빈,『경계선』, pp.242-243. 1977년 8월 일본 한민통이 주동이 되어 유럽, 미국, 캐나다의 민주운동 인사들이 동경에 모여 북미주, 유럽, 일본을 연결하는 해외의 운동 연합체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회”(한민련)를 결성하였다. 민건회는 10월 일본 도쿄에서 발족한 한민련 가입을 결의하였다. 한민련의 유럽본부 의장은 윤이상이 추대되었다. 그 직후 유럽의 한민련 조직은 윤이상, 김길순 등의 “주체 라인”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우려가 민건회 내부에서 제기되는가 하면, 한민련의 결성으로 해외 각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세계적 연결망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해 갔으나 일본 사무국이 운동을 지시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들로 1977년 연말부터 민건회는 분열과 대립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1978년부터는 유럽 한민련의 조직 문제로 일부 민건회 회원들은 “한국민주사회건설 재독협의회”(한민건)라는 이름으로 민건회로부터 분립되었는데, 한민건은 한민련과도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 갈등에 대해서는 1977년 12월 30일 김윤수, 서돈수, 손덕수, 이삼열, 이완수 명의로 작성된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동지 여러분께” 및 한민련에 소속되지 않은 민건회 회원들이 한민련 소속 “민건회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1978년 3월 24일 참조. 이삼열 기증문서.
24) 박상증,『제네바에서 서울까지』, pp.57-58 그리고 “기독교계 민주화운동, 그 질곡의 역사”,『크리스천투데이』, 2004년 10월 19일. 이영빈,『경계선』, p.243.
25) 김관석 목사 고희기념문집출판위원회 엮음,『이 땅에 평화를: 70년대의 인권운동』(김관석 목사 고희기념문집출판위원회, 1991), p.364.


이 통일대화는 1978년 유럽, 미국, 캐나다의 교포 기독교인 34명이 북한 기독교인 앞으로 대화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1980년 9월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기통회를 결성한 다음 1981년 6월 독일에 거주하고 있던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의 간부 이화선(목사), 이영빈(목사), 김순환 세 사람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정계 인사와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표단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사회민주당 대표들과 만나 통일대화에 합의했으며, 그 합의는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로 나타났다.26)


26) 이 대화에 대해서는 이영빈 김순환,『통일과 기독교』(고난함께, 1994), pp.203-264;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그리스도교신자간의 대화”, 『조선대백과사전 17』(백과사전출판사, 2000), pp.495-496; 김흥수․류대영,『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pp.246-251 참조.


기통회의 입장과는 달랐으나 민주동지회 역시 미소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공존관계가 형성되면서 한반도의 긴장, 평화문제, 통일문제 등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박상증의 증언에 의하면, 민주동지회는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WCC로 하여금 통일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27) 그것도 한반도 평화를 직접 거론할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라는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거론해보자는 신중한 제의였다. 이 제의는 마침내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WCC 국제문제위원회가 개최한 도잔소협의회로 나타났다. 결국 도잔소회의의 조종도 민주동지회가 한 것이었다.28) 이 협의회는 남한교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을 초청하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회의를 축하하고 성공을 비는 전문만을 보냈다. 이 회의에서 남한교회 대표들은 “세계교회협의회는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와 협력하여 가능한 한 남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화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한다”는 도잔소협의회 제안에 동의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불과 3년전 비엔나에서 열린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를 방해했던 일을 생각하면,29) 그 동의는 그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민주동지회의 북한 및 통일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주동지회의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그 후 1986년의 글리온회의로, 1988년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연결되어 남북 통일대화와 남한교회의 통일운동을 지원해 주었다. 이것은 도잔소협의회와 글리온회의를 기점으로 북과의 관계 및 통일운동에서 민주동지회의 입장이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신중론”에서 “참여론”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전략적 선택과 신학적 선택이 공존해갔다.30)


27) “지하연대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물꼬 텄다”, 기독교사상 좌담-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 p.189.
28) 위 글 p.190.
2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회장 강원용, 총무 김소영 명의로 1981년의 통일대화에 반대하는 전문을 WCC 총무 필립 포터와 간부 콘라드 라이저에게 보냈다. 전보 전문은 김흥수 엮음,『WCC도서관 소장 한국교회사 자료집-조선그리스도교련맹 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p.52 참조.
30) 북미주에서의 민주화 및 통일운동에서 양자간의 우선에 대한 갈등에 관해서는 김경재, "김재준의 정치신학: 신학적 원리와 사회ㆍ정치변혁론",『신학사상』124집(2004년 봄), pp.79-82 참조. 북한과의 관계에서 민주동지회보다 더 개방적 입장을 취한 기통회의 핵심인사는 독일의 이영빈, 이화선, 미국의 선우학원, 홍동근, 강위조 등이었다.


[5] 맺는 말


이 글은 1975년 제네바에서 결성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 과정 및 그 후의 활동을 이 단체가 생산한 문헌을 통해 정리하였다.


지난 7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진보적인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와 국내 민주화운동에 대한 독일, 일본, 미국교회들 및 WCC의 지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협력 및 지원관계는 1975년의 제네바 회의나 1981년의 밧볼 회의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한국교회 자체의 운동이기도 하지만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성사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는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서도 유지되어 왔으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들을 연계시켜 준 것은 민주동지회 회원들이었다. 이 점에서 이 조직은 민주화운동 단체로서의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국내의 민주화운동을 세계교회들에게 소개하여 연대의식을 갖게 하기 위한 결성 당시의 목표에 충실하였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으로서의 동지적인 결속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민주동지회는 국내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강력한 지원자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


민주동지회는 운동방법에서 한편으로는 국제 종교기구 및 세계교회들과 연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운동과의 관계에서 선민주, 후통일 노선에 서서 활동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남북 종교인들 사이의 통일대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갔다. 김재준 목사는 이 조직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국민주화의 비전을 민주동지회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김흥수 박사


목원대학교(신학사, 1975)
한신대학교(신학석사 - 교회사, 1980)
미국 Boston University(신학석사 - 교회사, 1984)
Baylor University(문학석사 - 교회와 국가 관계, 1986)
서울대학교(철학박사 - 종교학, 1998)
미국 Vanderbilt University Divinity School(연구교수, 1999-2000)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2001-2004)
현재) 목원대학교 교회사 교수,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저서)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2002)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연구(1999)
해방후 북한교회사(199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