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12회] 장공 김재준 목사의 평화사상과 신학 / 정지석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24 09:55
조회
1262

[제12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07년 3월 22일(목) 오후 5-7시

장공 김재준 목사의 평화사상과 신학

정지석 박사
(한국기독교 평화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장공이 살았던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고, 장공 또한 여러 전쟁들을 직․간접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장공은 역사와 인간의 삶을 신학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또 그 자신 믿는 바 진리를 살고자 했던 “생활신학”자이자 “생활신앙”인 이었다. 신학적 숙고의 대상으로 역사와 인간의 삶을 외면하는 신학자가 어디 있으랴마는 장공은 특별히 교회의 역사 참여를 강조했으며 기장과 한신은 장공의 영향 속에서 사회참여의 신앙과 신학 전통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런 분이었기에 인간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과연 장공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과 신학적 성찰을 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구하고자 한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장공은 평화에 대한 글을 역사적 시기마다 써 놓았다. 본 글은 먼저 장공의 평화사상을 분석함에 있어 한국전쟁, 핵무기와 핵전쟁, 월남전쟁과 한국군 파병, 그리고 군사주의 문제에 대한 장공의 입장을 기독교 평화론의 대표적인 두 이론인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그 다음에 장공의 평화사상을 형성하는 신학적 근거를 밝혀본다. 이는 장공의 평화신학적 사고를 살펴보는 일이 되며, 아울러 장공 평화사상에 미친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끝으로 장공 평화사상의 내적 터전인 평화 영성의 면모들을 그의 삶과 인격 차원에서 조명해 본다.

본 글의 한계를 밝혀둔다. 현대 평화론에서 평화는 전쟁과 군사주의에 국한되지 않은 더 큰 개념으로 이해된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은 인간 삶 전체의 안녕과 복지를 의미한다. 에큐메니칼 평화신학 논의에서도 평화를 전쟁의 부재로만 이해하지 않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장공의 평화사상을 논하려면 이런 전 분야를 다뤄야 하며 그것은 곧 장공의 삶과 신학 전 체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 글은 평화를 반전 반 군사주의라는 개념으로 국한하여 장공의 평화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공 또한 이런 관점에서 평화에 관해 논하고 있기에 본 글도 장공이 밝힌 평화사상에 국한하여 다룬다는 점을 밝혀둔다.

[2] 장공 평화사상의 전개

장공의 평화사상은 주로 전쟁, 핵무기, 군사주의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고 있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2.1. 한국전쟁

장공은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했다. 범용기에 보면 목사이며 신학교의 교수 신분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공산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지내며 고생하던 이야기를 적어놓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생사를 오가는 큰 고생을 했고, 또 민족적으로도 큰 재앙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전쟁을 겪고도 장공은 의외라 할 만큼 한국전쟁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 한국전쟁 중에 쓴 글과 전후 20년을 기억하면서 쓴 글 두 편이 있어 이를 분석해 본다. 1952년 장공은 '자유, 독립의 정신적 기반'이란 글에서 한국전쟁은 공산 노예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장공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이 철의 장막 속에 갇혀 3천만이 다함께 노예가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민주진영에 가담하여 3천만이 다같이 자유 해방을 누리느냐 하는 갈래에서 이 3천만의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세계 자유 국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다.1)

1)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김재준 전집』2, (서울: 한신대학 출판부, 1992), 122. 이하 전집이라 칭함.

장공은 6.25 전쟁을 북한 공산군의 침략 전쟁으로 인식했다. 이점에서 6.25 전쟁은 악한 전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정당한 전쟁으로 생각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교회는 이념적 분열에 따라 갈라져서 자기편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장공은 남한 교회의 편에서 6.25 전쟁을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공은 공산군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일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 평화는 공산 노예로부터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장공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추구했던 세상사에 초연한 내적 평화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입장은 이듬해인 1953년 한국전쟁에 대해 쓴 '환란과 평화'2)란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장공은 평화에 관해 논하면서 기독교 평화는 불교나 도교가 말하는 도를 깨우친 상태, 도인이나 해탈한 사람이 말하는 평화와는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의 평화는 세상 안에서 하늘의 평화에 기반하여 세상의 악과 싸워 만드는 평화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장공은 요한복음 15장 18~19절, 16장 2~3절과 32~33절을 들면서 현실 참여적이고 사회변혁적인 기독교 평화론을 주장한다. 세상사에 초연하고 오직 신앙의 내적 평화만을 추구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의 평화에 대한 태도는 “사랑 없는 율법주의적 평화”라고 규정하고 “크리스챤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평화개념”이며 “자기 중심적인 심리적 도피성이요 기독교적 실재는 아니라”3)고 역설하고 있다. 평화는 전쟁을 끝내는 것도, 전쟁 참여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장공에게 평화는 전쟁에 참여하여 공산 침략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신학적으로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전집 3: 40-43. 3) Ibid., 41.

한국전쟁에 대한 장공의 입장은 1970년, 6.25 전쟁 20년을 맞아 쓴 두 개의 글, '6.25와 세계평화'(새가정지)4)와 '망치 태평서의 엑소더스'(자유지)5)란 글에서 좀더 상세하게 나타난다. 앞의 글에서 장공은 6.25 전쟁은 공산주의의 침략적 본질을 잘 증명해 준 전쟁이라고 비난하고 공산 진영의 평화론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비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 혁명을 위해 전쟁 수단을 정당하게 여기며 국제연합에 가맹하는 것도 평화에 기여키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비판한다. 장공은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이 평화 수호자의 역할을 했으며, “국군의 용감한 전투력과 국민의 일치된 반공정신과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이 뒷받침한 데서 유엔은 한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6)고 말하고 있다.

4) 전집 9: 215-221. 5) 전집 9: 222-228.
6) 전집 9: 220.

'망치 태평서의 엑소더스'란 글에서 장공은 6.25 전쟁의 교훈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6.25 교훈을 후손에게 전해야 하는데,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은 철저한 안보와 무장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6.25 전쟁은 공산군의 기습 침략이었는데 남한이 허술한 경계태세를 했기에 일어난 것이라고 장공은 주장한다. 김일성의 남침을 한시도 잊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당시 논의되던 주한미군 감축에 우려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신속한 국군 근대화를 역설하고 있다. 둘째, 공산당 점령 아래서의 자유의 박탈을 절실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장공이 체험에서 증언하는 것이다 : “공산치하에서 자유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꼈다. 주인이 각자의 정신적 왕국을 송두리째 점령당하고 종으로 되어 버린다는 것은 가장 심한 인간성 박탈이다.”7)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공산주의를 미화하고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 이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충고한다. 셋째, 한국 전쟁 중에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 생활의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보람을 느꼈던 기억을 잊지 말자고 말한다. 인생의 의미와 보람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한 삶에서 온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자고 한다. 넷째, 자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교훈으로 준 것이 6.25 전쟁의 교훈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 교훈을 통해 장공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평화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7) 전집 9: 223.

6.25 전쟁에 대한 장공의 태도는 공산군 침략에 맞서 싸워 공산 노예화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한 전쟁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공산군 침략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론은 장공의 현실적인 평화론을 나타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2.2. 월남전과 한국군 파병

월남전은 미국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한국정부가 미국의 요청을 수락하여 1965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이 비전투 한국군 2천 명, 1966년 9월 전투병을 파병함으로서 한국의 전쟁이 되었다. 1965년부터 대대적인 월맹폭격을 가하면서 미국내에서는 대규모 반전 평화운동이 일어났고, 미국 신학계에서도 월남전을 둘러싼 논의가 벌어졌다. 1965년 3월 미국의「기독교와 위기」誌는 라인홀드 니버와 존 베넷이 미․소간 세계 냉전에서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론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월남 공산당과의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옹호하는 글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장공은 1965년 2월에 쓴 '평화에의 의지와 노력'8)이란 글에서 미국의 월남전을 비판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장공은 공산진영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폭격과 무력 사용이 “당연한 처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력 사용이 효과를 내지 못할 때에는 막대한 전비를 경제발전과 같은 평화 산업 건설에 투자하여 공산주의를 막는 방법이 더 유용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고 있다. 장공의 이런 입장은 정당한 전쟁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평화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또 자서전겪인 범용기에 보면 장공이 박정희의 월남 파병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공은 한국군 파병을 미국의 꼬임에 빠진 박정희의 결정으로 “우리 청년들이 연달아 명분 없는 전장에 피를 쏟게 됐다”고 하면서 “우리나라도 본질적으로 월남과 같은 제3세계인 처지에서 제3세계의 적과 어울려 제3세계를 때린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조롱거리가 아닐 수 없겠다”9)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월남 파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군사력 증강과 한미동맹강화를 통해 부국강병책을 추구했던 박정희의 파병책에 대해 장공은 “불난 집에 불끄러가서 도둑질하는 것은 창피하고 비열”10)한 짓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8) 전집 7: 283-285. 9) 전집 14: 57.
10) Ibid., 58.

당시 한국 기독교계는 월남전 파병에 대해 대체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한국 NCC 총무였던 길진경 목사는 월남 파병은 국가 정책이므로 교회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고, CCC 총무였던 김준곤 목사도 월남전은 공산 노예로부터 해방을 위한 전쟁이기에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면서 대학생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였다.11) 김준곤 목사의 논리는 한국전쟁을 보는 장공의 논지와 유사하나 월남전에 대한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공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남의 나라 전쟁에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파병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수치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월남 파병에 항거하여 단식 투쟁을 벌였던 함석헌이 파병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의 침묵, 특히 장공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는데, 장공은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1) 김성환, '불안한 평화', 『기독교사상』1967, 1월호, pp. 109-115 참조.

월남전에 대한 장공의 태도는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란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한 전쟁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미국의 무력 사용의 비효용성을 비판하면서 보다 실효성있는 평화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실용적 평화주의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군 파병에 관해서는 정치․경제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입장에서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3. 핵무기와 핵전쟁

장공은 핵무기와 핵전쟁에 대해 비교적 많이 거론하면서 절대적인 반핵 평화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처음 개발되었던 원자 핵폭탄이 가까이 일본에서 처음 투하되어 그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장공이었기에 핵무기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제2차 세계전쟁 이후 미․소간 핵무기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에 맞선 반핵 평화운동도 세차게 일어났기에 이런 사상적 흐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1950년대 세계 평화 논의와 운동의 주된 관심은 반핵 반전 문제였다.

당시 한반도도 핵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핵무기 사용을 주장한 바 있고, 정전이후 미․소간 핵경쟁의 여파가 급기야 남한의 주한미군 기지에 핵무기가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남한이 미군 핵우산 아래 들어간 것은 1957년 7월부터이며, 주한 미군 기지에 핵무기 배치를 공식 선언한 것은 1958년 1월이다.12) 이는 우선적으로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곳은 북한이었고, 또 중공이었다. 사실상 북한이 핵억제력을 위한 핵개발을 시작하게 된 때는 이 시점부터라고 볼 수 있으며 위협을 느꼈던 중공은 핵개발에 착수해 1964년 10월 원폭 실험에 성공한다.

12) 한겨레 사회정치연구소 정치분과 엮음, 『남북한 45년사』(서울: 월간다리, 1990), pp. 126-127.

이런 일련의 상황 전개는 장공으로 하여금 동시대 가장 긴요한 평화의 문제로서 핵무기와 핵전쟁 문제에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표명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날짜가 나타나진 않지만 1950년대 후반에 쓰여진 '라멕의 검가'13)라는 글에서 장공은 원자 핵전쟁에 대한 절대적 반대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에는 주한 미군의 핵무기 도입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고 있지 않으나 매우 강력한 톤으로 핵무기의 힘을 통해 안전을 추구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원자 전쟁은 인류 최후의 불의 심판이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장공은 인간이 사는 길은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신앙적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14) 장공은 핵무기를 경쟁하는 국가에 대하여 핵무기 생산을 중지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국제 관리하에 놓고, 군비를 축소하고 원자력을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하는 일이 동시대 교회의 가장 긴요한 선교적 사명이라고 역설한다.15)

13) 전집 4: 458-463. 14) Ibid., 463.
15) Ibid.

장공의 반핵 반전 평화주의 입장은 1960년대 들어서서 장공 평화사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1960년대 들어와 핵무기는 미소 양국에서 여러 나라들로 확산되었고, 핵무기 문제에 대한 토론과 반대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핵전쟁이 적과 아군의 구별 없이 모든 생명의 멸망을 초래하는 전쟁인 이상, 신학계에서도 기존의 주류 교회의 입장이었던 정당한 전쟁론이 후퇴하고 평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다.16) 장공이 핵문제에 관한 한 절대 반전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던 것은 이런 세계 신학계의 흐름과도 일치되는 것이었다. 장공은 “3차전의 유발을 묵과해선 안 된다. 이것은 전 인류의 사멸을 모함하는 것이므로 전 인류가 이를 한사코 저지해야 한다”17)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반전 반핵 평화주의 입장은 1965년 3월「사상계」에 쓴 '세계평화의 문제'란 글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장공은 핵전쟁이 될 수밖에 없는 제3차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당면한 평화운동의 과제라고 강조한다. “핵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광인의 소행일 것이며 그것은 전쟁행위가 아니라, 온전한 살인행위, 즉 살인을 위한 살인행위 밖에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18) 또 장공은 “핵무기 생산이란 신경적으로 냉전용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열전용으로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악마적인 것”19)이라면서 핵억제론으로 대변되는 핵현실주의에 대하여도 철저히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16) Lisa Sowel Cahill, Love Your Enemies(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4), pp. 1-14. 17) 전집 7: 284.
18) 전집 7: 323-324.
19) Ibid., 324.

장공의 반전 반핵 평화주의는 단지 신념을 증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핵무기 경쟁과 핵전쟁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정치적 차원에서 모색한다. 그래서 전 세계 민심에 호소하는 것은 종교적 도덕적 이상주의일 뿐이라고 보면서 이보다 구체적인 정치적 실행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장공은 당시 제안되고 있던 핵사찰 방안을 주목하여 보면서 핵무기 보유국가들이 핵사찰 제도를 상설하여 핵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또한 장공은 정치적 군사적 힘의 균형이란 관점에서 평화를 보면서 이를 위한 정치적 방안으로 대륙별 지역 연방제와 세계 보편문화 건설을 옹호했다. 보편문화론을 제기한 것은 양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세계 냉전을 극복하자는 의도에서이며, 지역별 연방제는 미소 강대국이 지향하던 일국체제를 넘어 세계를 더욱 가까이 할 수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장공은 평화론에 있어 신학적인 논의보다 정치적으로 실용적인 방안을 찾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 실제적인 평화 방안에 관심하는 것은 장공 평화사상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2.4. 군사주의에 대한 태도

장공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남북한 대립상황에서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의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공은 또 한국전쟁을 남한과 미국의 허술한 안보책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보고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한 방위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장공은 군수공업의 발전, 자주적 국방력, 국군 장비 현대화를 주장했다. 주한미군 감축 움직임에 대해서도 장공은 우려하는 입장을 보였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후 쓰여진 '국민 국회 안보'란 글에서 장공은 “미국이 진정 세계 평화를 원하고 군력의 침략불허 정신을 준수한다면 한국에서 중공에 맞설 수 있는 방위 결의를 재천명하여, 공산침략을 단연 불허한다는 강경한 결의를 표명하는 것이, 그리고 감군보다도 오히려 증군을 선언하는 것이 호전적인 적의 행동을 막아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20)고 말하고 있다. 장공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전쟁 예방의 현실적인 방안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장공의 평화사상이 언제나 현실론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장공의 입장을 '현실적 평화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20) 전집 9: 279.

그러나 장공이 비록 적대적 인간 현실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의 필요성을 인정했을지라도 그가 본질적으로 군대를 지지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장공은 “지금의 군대는 국가의 간성이라지만 그 심층에는 동질의 비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21)라고 하면서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드러내고 있다.

21) 전집 14: 58.

군사주의에 대한 장공의 현실적 접근은 5.16 군사 쿠데타에서 군사적 힘의 사용을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폭력 혁명이 비민주적인 수단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을 전적으로 죄악시한다는 것은 너무 과한 완전주의라 하겠다. 역사는 그 생동 과정에서 때로는 그런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22)

22) 전집 9: 447.

5.16 군사 쿠데타가 비록 군사력을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더라도 필요한 경우라면 무력 사용이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이다. 장공은 5.16 군사혁명을 다른 나라의 정치혁명과 같이 비상수단을 사용한 혁명이고, 또한 무혈혁명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국가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응급 수술이라는 것으로 국민의 양해를 구한 것”23)이란 입장을 밝히고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장공의 이런 태도는 당시 무능하고 혼란스런 민주당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근저에 자리잡고 있었던 데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에 장공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이 드러났을 때 이에 맞선 전적인 민주화 투쟁을 투신했다. 이는 장공의 평화사상이 철저하게 정의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신독재의 폭력적 탄압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을 무렵인 1975년 장공은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3) 전집 9: 449.

이런 현실에서 국민이 이에 적응하거나 체념하여 무기력한 침묵만을 계속한다면 한국 역사는 침체되고, 한국 민족은 위축되어 세계 역사의 진전과정에서 탈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미 독립운동은 민족적 항거였습니다. 항거란 것은 당장 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항에 대한 횡포권력의 부정입니다. 국민생활에 있어서 법적인 의무와 도덕적인 의무와의 사이에 충돌이 생겼을 때, 법적인 것보다도 도덕적인 것을 우위에 두려는 실천적인 주장이 항거행위인 것입니다.24)

24) 전집 16: 93.

또한 1981년 5월 17일 힘의 정의를 내세우는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글에서는 약육강식의 강자 중심의 진화론적 사고보다는 샤르뎅의 생물 안에 내재한 스스로 창조하는 능동성을 중시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군사정권의 폭압을 비판한다.

지금 한국의 별같이 불꽃같이 폭발하는 지성들이 저급한 폭력에 눌려 창조와 진화의 행진에서 탈락된다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범죄에 해당된다. 백만 년 걸린 하나님의 성업을 똥 뭍은 군화로 짓밟은 것은 죄가 아니겠는가.25)

25) 전집 15: 39.

[3] 장공 평화사상에 나타난 신학적 입장

3.1. 장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핵무기와 핵전쟁에 대해서는 절대적 반핵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전쟁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의 신념을 지키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장공은 절대 평화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즉 현실적인 악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평화주의는 무기력일 뿐이라고 반대했다. 그는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행동을 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평화를 중시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공은 무저항주의자이거나 절대 평화주의라기보다는 실천적이고 개혁적인 평화주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장공은 필요하고 정당한 이유를 가진 전쟁과 무력 사용은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예를 들어 공산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으로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지지했던 것이 그 예이다. 또 국가안보를 위한 군사력 증강을 지지하고 정당한 이유나 피치 못할 비상상황에서는 폭력 사용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런 입장은 주류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취해온 정당한 전쟁론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장공의 이런 신학적 입장은 라인홀드 니버의 입장과 유사하다. 니버는 정당한 전쟁론에서 절대평화주의를 비판했다. 장공은 니버를 연구하고 잘 이해했다. 1962년 11월 「사상계」誌에 '기독교와 정치 라인홀드 니버의 경우'란 글에서 장공은 니버 신학의 요점을 개괄하면서 니버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아래에 정리하여 전개된 니버의 입장은 장공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절대적 비전론적 평화주의가 과연 기독교적일까? 그것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이다. … 우리는 이런 경우에 ‘비교적 적은 악'(Lesser Evil)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능한 최선'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최고의 목표를 보임과 동시에 현실에서 대결한다. 우리는 다시 전쟁이 없도록 최선의 평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국제연합은 최대한으로 선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 정황에서 실현될 수 없다. 그것은 강대국간에 전란이 벌어질 때 그 두 편을 함께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세계국가란 당분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26)

26) 전집 5: 405-406.

3.2. 장공 평화사상은 그의 신학적 사고의 중추가 되는 이웃사랑과 자유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장공의 신학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학문이었다. 일찍이 성 프란치스와 톨스토이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것도 그들의 사랑 실천의 삶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장공의 평화사상의 기저에는 사랑의 실천이 자리잡고 있다.

장공이 기본적으로는 전쟁을 부정하면서도 정당한 전쟁론의 입장에 서고, 정의를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근본 배경에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장공의 신학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장공 신학의 봉우리라 평가할 수 있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론에서 장공 평화사상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83년 토론토 연합교회 설교에서 장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나라의 산천만이 아니라, 이 지구 위의 만물만이 아니라 범우주적인 모든 존재를 사랑하여 한 공동체 의식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사랑보다도 전쟁을 들쑤시는 데서 흥미를 돋굽니다. … 인간에게 창조주는 낙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대로는 지구가 우주의 낙원입니다. 이 지구라는 낙원을 사랑한다면 원자탄 수소탄을 던져 폭파시키고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독약으로 오염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생각합니다. 힘센 딴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38선을 그어놓고 우리동족끼리 추켜 싸움을 붙입니다. 뭣 때문에 싸워야 하는가? 뭣 때문에 서로 원수같이 미워하는가? 그까짓 것 38선이야 있든 없든, 우리끼리서는 서로 사랑하자. 우리 역사는 사랑의 공동체다 하고 욕지거리 대신에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조성을 호소한다면 그 큰 테두리 안에서 인간 사랑이 인정되어 그립고 보고싶고 만나고 싶고 젊은이들은 남남북녀든 남녀북남이든 결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27)

27) 전집 16: 351-352.

장공은 말년에 쓴 6.25에 대한 단상에서 국군에 쫓겨 들어온 공산군 패잔병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목사로서 해야 할 일임을 밝히고 있다. “국군에게 들켜서 적을 숨겨준 죄로 잡혀가도 목사에게는 오히려 차원 높은 긍지가 영광스레 남을 것”28)이라는 것이다. 그의 인간 사랑의 신념이 반공주의 신념을 앞서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8) 전집 15: 42.

이웃 사랑의 신학적 입장은 장공의 평화사상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제국주의 억압으로부터 제3세계의 해방, 자유와 민주주의 등은 장공 평화사상의 주요 내용을 구성한다. 1960년대 초반에 쓴 '전후 새 역사를 위한 기독교의 사명'이란 글에서 장공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한 것은 이웃 사랑의 정신을 망각했던 잘못이라고 질책하고 있으며, 국가들이 선린우호관계를 맺어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운동을 기독교 이웃 사랑 정신을 국가관계에 적용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장공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의 길로 들어서자 “3천만 동포가 자유냐 억압이냐의 기로에 섰을 때 수수방관한다면 위선자로서의 명패를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다. 또 본인 스스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이끌면서 반독재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장공의 이런 입장과 행동은 이웃 사랑의 정신에서 비롯된 평화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관계에 대한 장공의 입장도 기본적으로 이웃 사랑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장공은 교회와 국가는 상호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협력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장공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인간 공동 사회의 적극적인 복지건설을 위하여 국가는 항구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국가가 시도하는 모든 건설적인 사업에 솔선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이웃을 위하는 기독교 윤리의 실천 과정임과 동시에 국가를 통하여 또는 국가 안에서 인간의 현세 생활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29)

29) 전집 5: 132.

그러나 장공은 또 국가가 전체주의가 되어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또는 교회의 신앙 내용에 간섭하려 할 때에는 교회는 순교적 각오를 갖고 항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장공의 반군사 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서게 되는 것은 이런 신학적 입장에서이다. 장공은 기본적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를 전쟁 기구로 인식하는 반전 반국가론자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다. 그렇기에 장공은 국가방위를 위한 군사력 보유, 공산당의 침략에 맞선 안보태세 확립 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관은 장공의 현실적 평화론에 영향을 미친 요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공 평화사상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핵심 가치는 자유이다. 장공은 공산주의 독재와 억압을 자유 없는 평화라고 규정하면서 이는 “강제된 침묵이며 원한의 굴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장공에게서 공산당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하는 근본 이유는 자유 수호였다. 이는 장공의 평화사상이 기본적으로 '자유 있는 평화'였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점에서 장공은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투쟁한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정의와 질서와 자유가 일체화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자유”라면서 “질서가 중요하나 자유를 유린한 질서는 민주가 아니라 독재”30)라고 주장했다.

30) 전집 5: 109.

결론적으로 장공은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불의, 억압,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에게 평화 실천은 이웃 사랑과 자유를 위한 실천이었다. 그러므로 장공은 개인의 내적 평화, 절대신념으로서만 지키는 평화보다는 역사 현실 속에서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평화를 추구했다.

[4] 장공의 삶과 인격에 나타난 평화 영성의 면모

장공의 삶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성 프란치스는 청빈과 영성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평화의 영성을 갖고 몸소 실천에 옮겼던 평화의 성자였다. 장공은 3.1운동이후 1920년대 서울에 와서 톨스토이를 읽고, 성 프란치스를 읽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무저항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장공의 자서전에는 장공이 이들 두 평화 영성의 대가들로부터 평화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장공은 성 프란치스의 버림과 하나님 사랑, “무일푼의 탁발승으로 평생을 걸식 방랑한 공의 기록, 공에 회(오)리 바람처럼 몰려드는 하나님의 사랑 - 그것이 퍼져가는 인간과 자연에의 사랑 - 이런 것이 나를 매혹시켰다”31)고 적고 있다. 또 같은 시기 톨스토이가 귀족으로서 자기 재물을 털어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자기 비허의 정신에 감동을 받았으며 일본의 성자 하천풍언의 빈민촌 생활에 감동해 무소유 삶을 그리워했다고 적고 있다 : “나는 톨스토이에게서 … 물질을 소유하는데 대한 바른 태도를 배웠다.”32) 장공이 이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청빈과 사랑의 정신은 평화영성의 핵심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장공은 성 프란치스의 무소유를 “사랑을 위한 공간”33)으로 이해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장공의 평화신학적 사고의 중추를 이루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

31) 전집 13: 54. 32) Ibid., 66.
33) 전집 15: 11.

장공의 평화영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간디이다. 장공은 간디를 깊이 존경했다. 1948년 간디의 암살 소식을 접하면서 쓴 글에서 장공은 '세기의 태양이 지다'란 제목을 달면서 “깐디 어른! 그는 예수를 믿노라고 떠들지 않았으나 확실히 예수를 산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34)라고 적고 있다. 장공이 간디의 위대한 점으로 본 것은 그의 평화주의 정신과 실천이었다. 그는 간디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인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영제국을 사랑할 수 있는 심정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무저항적 저항! 그것이 확실히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서 암시 받은 길이었다.”35) 장공은 평화를 말하되 사회적 현실의 불의를 해결하는 평화에 관심을 가졌고 평화적으로 불의를 해결하는 간디의 길을 존경했다. 장공은 간디를 통해 배운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4) 전집 1: 211. 35) Ibid.

사랑은 진리다. 정의도 진리다. 사랑하면서 불의와 싸우는 길, 그것은 오직 자발적인 희생을 통한 무저항적 저항이 있을 뿐이다.36)

36) Ibid., 212.

장공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구도자요 순례자의 인생이라고 여기면서 인간적인 인격도야에 깊이 관심했다. 장공이 자기 성찰의 인격을 구했음을 알게 해주는 예로서, 차표 파는 역원의 깔보는 듯한 태도에 화를 내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했어”37)라고 자책했다는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40대에 접어든 장공의 인간됨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평화영성은 이렇게 내면적인 자기 성찰에서 빗어지는 산물이다. 그리고 거기서 빗어져 나온 평화영성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부른다. 장공은 모든 “종교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처럼 양심의 중요성을 고조하는 종교는 아마 없을 것”38)이라면서 그리스도 양심의 실천적 면모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37) Ibid., 129. 38) Ibid., 132.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 아무리 신비한 종교 경험의 소유자라도 만일 그가 거만의 부를 가진 자이면서 기아에 시달리는 할머니, 거리에 헤매는 어린이에 대한 거룩한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모든 번영의 배후에 숨어 흐르는 억울한 피를 볼 줄 모른다면 그는 새 세계에서 살 새 양심의 소유자라 말 할 수 없다.39)

39) Ibid., 135.

우리는 장공이 추구했던 사회의식과 양심을 잘 볼 수 있다. 장공은 빈곤의 문제를 사회적 불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기독교 신앙 양심의 척도로 보면서 책임적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빈곤과 사회불의의 문제는 평화운동의 주요 과제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공의 평화 영성의 면모는 돋보인다 하겠다.

장공은 인간을 생명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고 기본적으로 폭력 사용을 싫어했다. 셋째 딸 혜원이가 출생했을 때 아들을 못난 아내의 미안해하는 말에 “내게는 계집애고 사내고 문제인 것이 아니었다. 저 가냘픈 생명이 험한 세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해서 애처러웠다”40)고 하며, 잠시 근무한 적 있는 숭인 상업학교 교무실에서 훈육으로 학생을 때리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41) 장공은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앞장서서 나서고자 한 분이었지만 막상 자신이 결부된 분쟁 사건에서는 맞서 싸우기보단 뒤로 물러나는 인격이었다. 1959년 한신대 교사 신축비를 사기로 날려버린 조선출이 책임 문제를 지방 차별의 정치적 문제로 끌고 가서 분쟁의 소지가 생기자 장공은 다음과 같은 심정을 밝히고 있는데, 그 태도가 평소 장공의 사회적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40) 전집 13: 137. 41) Ibid., 139.

나는 우울하고 격분했다. 신앙고백과 신학적 이해를 기초로 한 동지적 친교, 즉 코이노니아 위에 서야 할 기장이 지방감정, 교권욕 등등에 지배되어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슬퍼졌다. 그럴 경우에 나는 은퇴한다. 조용히 산 속에 숨기도 하고 탈속한 신선같이 명승고적을 순례하기도 한다. 공자보다도 노자를 관우 장비보다도 도연명을 택한다.42)

42) Ibid., 386.

인간관계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맞붙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탈속하겠다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무저항 평화주의자들과 통하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공자보다 노자를, 관우 장비보다는 도연명을 택하겠다는 태도도 분쟁을 정치적 무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장공이 60세에 생긴 일로서 장공의 근본 인격이 분쟁을 싫어하고 정치적 힘을 쓰는 것을 혐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공이 추구하고자 했던 삶과 신앙,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평화영성이 풍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장공 개인의 삶과 인격에서 부단히 추구되고 정련된 풍요로운 평화영성이야말로 장공 평화사상의 비옥한 토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지석 박사

한신대 신학대학원(M.Div)
한국기독교장로회 청암교회 목회(1987-199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사회국 간사(1992-1994)
크리스챤 아카데미 한국사회교육원 평화교육부장 3년(1994-1997)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평화와 국제부장(2001-2001)
아일랜드 평화와 에큐메니칼 대학원(M.Phil)
영국 선더랜드 대학(우드부록 대학원)(Ph.D)

(현재)
한신대교육대학원, 성공회대NGO대학원에서<평화사상와 평화 교육> 강의
성공회대학신학대학원과서울신학대신학대학원에서<평화신학과 영성>강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 평화 위원회> 위원
한국 YMCA 연맹<평화 통일 위원회>, <사회교육 위원회> 위원
대화문화아카데미 프로그램 위원
한국기독교 평화연구소 소장

[저서와 역서]

Ham Sokhon's Pacifism and The Reunification of Korea, A Quaker Peace Theology(The Edwin Mellen Press: Lewiston, Queenston, Lampeter, 2006)
'함석헌의 민중사상과 민중신학'(신학사상, 134호, 2006/가을)
'한국 기독교 평화 윤리의 연구'(기독교사회윤리, 11집 2006/여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