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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29회] 1930년대 신학 :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 박용규 목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7 11:43
조회
798

[제29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2년 9월 6일(목) 오후 5~7시


1930년대 신학 :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1] 들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선교사 중심의 리더십이 한국인 중심의 리더십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계뿐 아니라 신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들이 장감의 신학교 교수로 채용되었고, 장감의 기관지 역할을 감당해 온 神學世界와 神學指南은 물론 동양선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도 한국인들이 맡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리더십의 변화는 한국교회에 신학적 다양성을 태동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 결과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신학 조류를 이해하지 않고는 1930년대의 한국교회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사상과 영향력은 한국교회에 깊이 자리 잡았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도 1930년대 구형되어 신학적 흐름으로 형성된 한국교회의 세 신학 조류, 즉 정경옥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그리고 박형룡으로 대변되는 정통주의를 당시의 시대적 사상적 신학적 배경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고찰하려고 한다.1)


1) 본고는 졸저 <한국기독교회사 2권 1910-1960>(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571-627에 있는 내용임을 밝힌다.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장로교단이 교단을 초월하여 100주년의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장로교 역사 연구를 통해 한국 장로교의 정체성과 미래적 방향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는 상호 이해를 위한 작은 시론(試論)이었으면 한다.


[2] 정경옥의 자유주의


거대한 미시간 호수가 바라보이는 호반의 도시 에반스톤의 한 언덕에는 명문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학문과 대학의 낭만을 동시에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대학이다. 이 대학 캠퍼스의 한가운데 아담한 벽돌 건물에 자리 잡은 연합감리교회 교단신학교 게렛신학교(Garrett-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가 한눈에 보인다. 현재 25명의 교수, 478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이 학교의 전신이 바로 정경옥이 졸업한 게렛성경학교(Garrett Biblical Institute)이다.2) 정경옥은 이 학교에서 26살 나던 1928년 가을에 입학해 2년 후인 1930년 9월 3일 이 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3) 유럽의 자유주의, 특히 슐라이어마허(F. D. E. Schleiermacher, 1768-1834)와 리츨(Albrechte Ritschl, 1822-1889)의 사상을 북미에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프랭클린 롤(H. Franklin Rall) 교수가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던 그때 정경옥은 롤 교수가 있는 게렛신학교에 유학했다. 정경옥과 자유주의 신학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Bulletin 42, Part 4 for the Academic Years of 1996-97(Pittsburgh: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1996), 33.
3) 정경옥의 Garrett Biblical Institute Academic Transcript. 1994년 여름 필자는 이 학교를 방문, 도서관 사서의 도움을 받아 그의 석사학위 논문을 복사하고 성적증명서를 복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 정경옥의 생애


송길섭 교수가 그의 韓國神學思想史에서 정경옥을 가리켜 “한국교회의 신학 정초기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을 확립한 신학자”4)라고 기술한 것은 정확한 평가였다. 사실 정경옥은 1930년대 감리교가 신학적 변화를 맞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박형룡이 보수주의 신학의 대변자, 김재준이 진보주의 신학의 대변자, 김교신이 무교회주의 대변자, 이용도가 부흥운동 신비주의의 대변자라고 한다면, 정경옥은 자유주의의 대변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정경옥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도덕적 인격성과 기독교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창했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감리교 신학자였다.5)


4) 宋吉燮, 韓國神學思想史(서울:기독교출판사, 1988), 330.
5) Ibid., 342.


1903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한 정경옥은 박형룡보다는 6살, 김재준보다는 2살 아래였다. 그의 가정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의 가정은 진도에서 농업을 하거나 어업을 생계로 하는 평범한 가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형룡이 그렇듯이 정경옥도 소년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해 어려움을 극복하며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발생해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가 3․1운동을 주도하다 검거돼 목포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했다.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은 이때였다.6) 출옥한 정경옥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YMCA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지우 김재준을 만난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정경옥은 더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정경옥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1927년에 졸업했다. 다음해 그는 에반스톤에 있는 게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에 유학해 만 3년을 공부했다. 송길섭은 그의 韓國神學思想史에서 정경옥이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게렛신학교에서 신학사(B.D.) 과정을 공부했다고 했으나, 그가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8년 가을이고 2년 후인 1930년 9월 3일에 졸업했다.7)


6) Ibid., 331.
7) 필자가 게렛신학교에서 정경옥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 실제 수학은 1938년 가을에 시작했다.


게렛신학교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경옥은 1928년 첫 학기인 가을학기에 신약과목으로 “基礎 헬라어”와 조직신학 과목 “종교의 본질”을 수강했다.8)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학 첫 학기라 지도교수는 그에게 두 과목만 수강할 것을 조언했다. 게렛신학교는 1년 4학기(quarter)제였기 때문에 12월에 가을학기가 끝나고 1월에 겨울학기가 시작되었다. 겨울학기에 정경옥은 신구약 각 한 과목과 조직신학 한 과목 등 세 과목을 수강했다. 가을학기에 좋은 성적을 받은 정경옥은 상당히 자신감을 얻었고, 지도교수 역시 세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특히 겨울학기에 그가 수강한 세 과목 중 조직신학 과목인 “성서적 신론 및 세계론”(Biblical Doctrine of God & World)은 정경옥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겨울학기에 “구약문학의 개관”이라는 과목도 수강했으나 정경옥은 구약에는 그리 대단한 흥미를 느끼지 못해 타 과목에 비해 성적도 약간 낮았다.


8) 정경옥의 Garrett Biblical Institute Academic Transcript.


미국에 유학 와서 맞은 세 번째 학기인 1929년 봄학기에도 조직신학 인간 및 구원론을 비롯해 세 과목을 수강했다. 정경옥은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신약을 택했기 때문에 매 학기 조직신학 한 과목을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매 학기 세 과목씩 수강하면서 1년을 지낼 경우 공부에 지쳐 흔히 여름에는 수강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정경옥은 1년간 쉬지 않고 풀타임으로 공부했으면서도 1929년 여름학기에 조직신학, 교회사, 사회학 분야 각 한 과목씩 세 과목이나 수강했다. 미국 유학생활 2년째인 1929년 가을에는 종교철학을 비롯한 세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 중에 조직신학이 두 과목이었고 나머지 한 과목은 윤리학 과목이었다. 1930년 겨울학기에는 “종교철학과 공관복음문제”를 비롯한 세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 중 조직신학 과목이 둘이었다. 유학생활 1년 6개월이 지나면서 조직신학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1930년 봄학기에는 “메시아 희망”이라는 구약과목을 제외하고는 두 과목 모두가 조직신학 과목이었다. 정경옥은 지도교수 롤 박사의 조직신학 과목, “종교경험방법론”을 수강했다. 그리고 1930년 신학사(B.D.) 과정 마지막 여름학기에 전공과목인 “기독교세계관”과 “기독교윤리” 두 과목을 수강했다. 그가 만 2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학기 동안에도 풀타임으로 수강했고 한국감리교신학교에서 이수한 과목 중 종교교육과 인문주의 분야의 다섯 과목의 학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신학사 과정을 마친 정경옥은 노스웨스턴대학과 공동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게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그는 조직신학을 좀 더 체계 있게 연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930년 가을에 한 과목, 1931년 겨울학기에 세 과목, 그리고 1931년 봄학기에 한 과목 등 다섯 과목을 수강하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1930년 여름학기에 수강한 두 과목을 대학원 과목으로 인정받아 코스웍을 마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에 석사학위논문으로 “신비주의의 저등형태와 고등형태 사이의 구분과 관련하여 류바(J. H. Leuba)의 종교신비주의 심리학 연구”9)를 제출해 1931년 5월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조직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9) K. O. Chyung, “An Examination of J. H. Leuba’s Psychology of Religious Mysticism with Reference to the Distinction Between the Lower and the Higher Forms of Mysticism” M.A. Thesis, Northwestern University, 1931.


학교 성적기록부에 나타난 그의 학업성적은 우수했다. 특별히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종교심리학과 종교신비주의였다. 이것은 그의 스승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스승 롤 교수는 슐라이어마허의 경험론적 기독교와 리츨의 도덕적 기독교를 융합한 경험주의-도덕주의 종교 옹호론자였다.10) 김재준이 청산학원에서 바르트의 초월론으로 학위논문을 쓴 후 일생 동안 바르트의 사상이 깊게 드리워졌듯이 정경옥의 생애와 사상에는 종교신비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게 신앙과 경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감리교의 전통과 밀접히 연계되어 한국의 감리교에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10) 宋吉燮, 韓國神學思想史, 331.


2) 정경옥의 사상


미국에서 신학교를 마친 정경옥은 고국의 모교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부르자 주저하지 않고 돌아왔다. 당시 김재준은 웨스턴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고, 박형룡은 평양신학교에서 열정적으로 교수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교수를 시작한 것은 1931년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신학교에서 “가장 실력 있고 인기 있는 교수로 당시 신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 그의 명강의와 설교를 통하여서 신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취시킨 인물이었다.”11) 1931년 10월 神學世界에는 롤 교수의 “그리스도의 가르침”(The Teaching of Christ)이라는 논문이 두 차례에 걸쳐 연속으로 게재되었다. 정경옥의 직접적인 논문이 나타난 것은 다음해였다. 1932년 神學世界에는 정경옥의 “종교기원론의 본질적 비판”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정경옥은 이 논문에서 기원이라는 어원의 의미를 먼저 지적한 후에 종교의 생물학적 기원, 심리학적 기원, 그리고 사회학적 기원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이 세 가지 기원론은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기원론이 아니라 종교를 “종교 아닌 다른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정한 종교의 기원은 계시론에 근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정경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재로 宗敎는 宇宙 안에 잇스나 宇宙를 超越한 實在를 믿는다. 우리는 特殊를 經驗하기 前에 總全을 直覺한다. 그리고 우리는 分解와 統合의 方法으로 알 수 없는 靈界의 行動世界가 잇는 것을 主張한다. 여긔에서 宗敎는 超然的 實在가 啓示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잇다.


둘재로 宗敎는 이러한 宇宙的 實在의 도움을 求한다. 하나님의 도움이라면 우리의 힘으로도 넉넉하나 좀 붓잡아 주면 수얼하겟다는 것이 아니다. 宗敎의 根源은 神의 意志 그 道德的 權威를 絶對로 依賴한다는 積極的 態度이다 “내 마음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이다”라고 祈禱 올니는 그곳에 참 宗敎의 싹이 난다. 魔術과 宗敎의 區別은 사람의 便宜을 따라 神을 부리라는 態度와 環境과 自我를 죽이고서도 正義를 좃치랴는 態度의 다름에 있는 것이다. 啓示란 사람의 적은 偏見과 약한 힘을 버리고 宇宙의 大靈에 잠기여서 그 뜻과 그 힘을 받는 活動이며 結果이다.12)


11) Ibid.
12) 정경옥, “宗敎起源論의 本質的 批判,” 神學世界, 17(1932년 3월), 98.


정경옥은 일단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이며 사회학적 기원을 거부하고 계시에 기초한 종교관을 주창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계시에 근거한 종교란 “신의 의지와 그 도덕적 권위를 절대 의뢰”하는 데 생명이 있다. 그는 종교를 신의 의지와 관련시키고, 다시 그 신의 의지는 도덕적인 권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체험의 신학자


신앙의 역사적 표현인 종교는 믿는 자의 경험과 역사 속에 존재해 온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경옥에 따르면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특수한 종교신앙의 역사적 표현이며 진보 발달하는 생활 자체이며 개인과 사회생활의 동적 표준이 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 사실을 조직적으로 고찰하며 그 경험 사실의 진리성을 이론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13) 이 때문에 정경옥은 기독교는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체험의 역사적 표현이며 기독교 신학은 이런 종교적 체험들을 편견 없이 실제적 가치를 찾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경옥은 기독교 신학이 다루는 범위도 단순히 신앙이라는 차원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경험과 생”만큼이나 넓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 정경옥, “나의 신조”, 神學世界, 17. 3(1932년 5월), 14.


정경옥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확신했던 당대의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들과 달리 기독교를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접근했다. 정경옥은 기독교를 “세계 제 종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는 세계 여러 가지 다른 종교들과 같이 간주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정경옥이 후대 감리교 자유주의 신학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점이다. 종교사학파들과 같은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일반 문화사적 접근 때문에 정경옥은 문화자유주의의 원조로 평가받고 있다.


정경옥은 개인구원이 반드시 사회구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세계에 혁명과 개조와 발전의 창조적 사업에 간여하여 우주적 목적의 최고이상을 실현할 것을 맹세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창했다. 하나님과 신앙의 경험론적 관계는 개개인의 일상생활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 반드시 그렇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을 가진 이들은 “경제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정치생활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정경옥은 기독교의 근본 목적이 인간에게 삶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데 있지만 “경제운동과 정치운동에 직접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이론을 반대한다.”14)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가 기독교의 근본 목적과도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경옥은 기독교가 경제, 정치에서, 더 나아가 인류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경옥은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로서 나사렛 예수의 생활과 죽음에 나타난 그 위대한 인격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과 사랑과 소망에 넘치는 생활과 기독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 있어서 인류 역사 가운데 간단없이 진보하며 실현된 종교적 문화에 기초하여 있다는 것을 믿는다.”15)


14) Ibid., 20.
15) Ibid., 16. 정경옥은 기독교가 계시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범위는 폭이 넓었다. “계시종교로서 우주적이며 윤리적인 신관과 인격적이며 통일적인 우주관과 인생의 가치에 대한 탁월한 이상을 함축하며 믿는다.”


감리교 신비주의자


정경옥은 게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연구하면서 지도교수인 롤 교수의 영향을 받아 종교신비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신비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그의 경험론적 종교관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귀국 후 형성된 감리교의 신비주의부흥운동은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경험론적 신앙관에 토양을 제공했다. 1932년 7월 神學世界에 실린 “종교적 신비주의의 의의와 가치”라는 논문은 이런 정경옥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아마도 이 글은 당시 감리교 안에 일고 있는 이용도의 신비주의운동이 교단에 찬반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부흥운동 신비주의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일종의 답변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경옥은 먼저 신비주의의 다양한 정의를 소개한 후에 신비주의를 종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신비주의를 “個我가 신과 합일하는 직관”, “지식의 시간적 규범을 초월한 직관”, “물체와 감각의 세계를 초월한 지식의 적법한 추구”로 정의했다.


정경옥에 따르면 신비주의는 직접적 경험을 중요시하지만, 직접적 경험이 반드시 감정이나 직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있고 직관이 있는 동시에 이지의 작용이 있고 도덕적 활동이 동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경옥이 신비주의를 종교일반의 영역으로 확대해 신비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직접적 경험을 중시하며, “유물론, 형식론과 제도주의를 반대하고 내적 세계를 동경”하며, “신의 현존을 의식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정경옥의 신비주의 사상을 정의하면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지, 감정, 직관, 의지 여하를 물론하고 사회 전체로서나 혹은 개인의 자아의 인격적 총체로서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직접적 관계, 즉 합일적 융합을 의식하며 이와 같은 합일의 경험에서는 인격이 근본가치와 우주의 절대목적을 [이루고] 지식의 객관적 확실성을 얻는다고 보는 종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16)


16) 정경옥, “종교적 신비주의의 의의와 가치”, 神學世界, 17. 4(1932년 7월), 28.


이런 정경옥의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는 종교의 기원에 대한 그의 정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라는 영역을 확대하고 절대존재와의 관계를 종교의 일차적인 원리로 설정한 정경옥은 신비주의라는 의미를 종교일반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신비주의를 종교적 신비주의로, 더 나아가서 종교일반의 현상으로 확대하고 있다. 기독교의 의미를 신과의 합일적인 관계로 정의해 결국 그의 관점에서는 신비주의와 기독교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비주의를 종교의 근본현상으로 이해한 정경옥은 신비주의가 “결코 접신술이나 미신이 아니며 회의주의나 불가지론”도 아니며, “‘바울’과 ‘요한’의 사상에서 그 첫 싹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정경옥이 신비주의를 옹호하기는 하지만 모든 신비주의 현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의 극단적인 면이 신비주의의 본질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요소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정경옥은 그 약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宗敎的으로 본 神秘主義는 大體로 보아서 外的 儀式과 敎理를 反對하며 歷史的 系統을 가지고 잇는 遺傳的 典型思想의 價値를 否認하고 神을 直接으로 直觀的으로 意識하려는 努力이라고 하겟다. 宗敎的[으로] 渴急[한 신앙]이 宗敎對象에 集中되어서 有限한 個性을 滅却하고 窮極的 實在 안에 沒入하려고 할 때에는 혹은 意識으로 혹은 無意識的으로 恍惚情態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經驗은 普通常軌을 버서나서 말하자면 變態的 心理現象을 이르키는 때만 많다.17)


17) Ibid., 36.


그러나 정경옥은 이런 약점이 신비주의의 본질은 아니라고 한다.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안에 움직이고 하나님의 뜻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도록 만들어 주며, 그에게 “하나님과 연합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감”과 “힘”을 공급해 준다는 의미에서 종교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18) 따라서 진정한 신비주의는 “변태적인 심리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이어야 한다. 이런 정경옥의 경고와 충고는 당시의 이용도로 대변되는 신비주의운동이 극단적인 심리현상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8) Ibid.


신비주의는 비윤리적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삶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신비주의의 첫 번째 특징이라면 건전한 도덕적 삶은 신비주의의 두 번째 특징이다. 신비주의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율법폐기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은 도덕적 생활을 통해 이어져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宗敎的 神秘主義의 둘재 特色은 道德的 生活로 말미암아서 神을 認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淸潔한 者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것이 이것이다. 勿論 神秘主義는 大體로 否定的 方法에 置中하는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이러한 “否定的 方法”도 말하자면 積極的 價値의 保存을 爲하여서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은 反社會的이며 反道德的인 것보다도 그들의 行動을 깨끗하게 하고 性格을 鍊磨함으로써 生의 極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참된 뜻을 가지고 努力한다.19)


19) Ibid., 6.


정경옥의 신학은 경험론적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신비주의적인 하나님과의 교통, 현대신학자 중에서는 바르트보다는 슐라이어마허나 리츨의 노선에,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전통에서는 라틴의 전통보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었다. 정경옥의 관점에서 보면 당대 정통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전통보다는 라틴의 전통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때문에 초대 라틴교부들이 갖고 있던 바 “지적 문화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나 이성은 감정이나 경신심(敬神心)보다 저열하다고 생각한 것이나 철학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한 것”은 “오늘날 유의할 만한 점이라고” 힘주어 강조한 것이다.20)


20) 정경옥, “기독교 사상의 계통”, 18. 3(1933년 5월), 26.


3) 온건한 현대주의자


흔히 그렇듯이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면 먼저 외국에서 자신이 접하거나 연구한 분야를 소개하고 그 다음은 외국의 학문적 조류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계나 교단에 소개하는 것이 관례이다. 정경옥 역시 1931년 조선에 돌아온 후 신비주의의 학문적 가치를 경험론적 감리교 전통 속에 융해시켜 한국에 소개한 후 자연스럽게 당대의 학문적 조류의 소개로 관심을 옮겼다. 1932년 神學世界 17권 5호에는 “위기신학 요령”이라는 정경옥의 논문이 게재되었다.21) 이 논문은 당시 한창 발흥하고 있던 바르트의 신학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글이었다. 이 논문을 읽는 사람은 정경옥이 당대의 신학조류에 얼마나 민감한 인물이었는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자료를 토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집어 쓴 것”인데도 내용이 충실하고 글의 전개도 논리적이다.


21) 정경옥, “위기신학의 요령”, 神學世界, 17. 5(1932년 9월), 14-24.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채필근이 기독신보에 네댓 차례 “변증학적 신학”을 소개하고, 송창근이 평양신학교에서 바르트 신학에 대하여 특강을 한 적이 있었지만 바르트 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그 영향력을 학문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한 것은 정경옥의 글이 처음이었다. 정경옥은 이 논문에서 바르트의 신학이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사상에, 사회적으로는 당시의 정치, 경제, 윤리의 위기에서, 교회적으로는 암흑기에 발흥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책,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책”으로 믿고 있었다. 정경옥은 바르트의 성경관과 근본주의 성경관이 차이가 있음을 힘주어 강조했다. 바르트의 성경관은 “요새 흔히 보는 ‘근본주의자’들”처럼 성경에는 “정확무오한 진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지 아니한다”고 강조한다.22) 바르트가 고등비평을 수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보고 있다. 그가 바르트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는 결론 부분에서 언급한 두 문장, 즉 “나는 바르트에게서 배운 것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바르트의 종교적 정신에는 공감할지언정 그의 신학적 이론에만은 따라갈 수 없는 점이 적지 않다”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23) 정경옥은 종교의 근본정신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의 종교사상을 따르면서도 체험적인 신학체계보다는 계시에 근거한 말씀의 신학체계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22) Ibid., 22.
23) Ibid., 24.


위기신학을 다룬 그 다음 호 神學世界에는 “스피노자의 종교”라는 제목의 신학논문이 실렸다. 정경옥의 현대사조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당대의 신학적 조류뿐만 아니라 현대사상의 근본뿌리에도 같은 비중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以上에 筆者는 스피노사[자]의 生活 自體에 나타나 잇는 現實的이며 具體的인 宗敎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스피노사[자]의 宗敎的 精神, 혹은 態度에 나타난 宗敎, 즉 그의 獨特한 神秘主義를 말하엿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經驗의 基礎가 되는 그의 信仰의 理論을 簡單히 疏槪하엿다. 筆者는 지금 여긔에서 스피노사의 生活이나 宗敎的 精神을 批評하랴고 하지도 않고 그의 理論에 不完全한 것이나 矛盾이 있는 것을 指摘하여 볼 생각이 없다. 그가 난 지 三百年 째 되는 오늘에 그를 紀念하고 그가 남기신 敎訓 가운대 現代宗敎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잇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4)


24) 정경옥, “스피노자의 종교”, 神學世界, 17. 6(1932년 11월), 36.


정경옥의 관심과 학문적 폭은 이렇게 넓었다. 그는 정통주의자들처럼 자신의 신학체계를 단순히 성경과 순수신학에만 국한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일반철학이나 종교일반이라는 측면에서 신학을 정립하고 그런 방향에서 서구의 학문적 동향을 소개하기를 원했다. 그가 소개한 엘랜 박사의 “현대 기독교 신학의 일반적 동향”과 “신학적 현대주의 강요와 비판”이라는 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학적 현대주의 강요와 비판”에서 정경옥은 신학적 현대주의라는 말을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정경옥은 이미 1930년 초에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라는 미국의 신학적 갈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경옥이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게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프린스톤신학교 교과과정이 재편되고 메이첸과 그의 동료들이 프린스톤을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는 일련의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을 피부로 실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신교 현대주의란 말은 미국에서 많이 쓰는 술어로서 근본주의란 것과 대립되어 있다. 영국에서 현대주의라 하면 이는 전통사상을 반대하는 신학사상을 지적하는 것이나 미국에서 현대주의라는 말은 근본주의란 특수한 신학적 체계를 대항하는 신학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개신교 현대주의가 무엇인 것을 이해하려면 이 신학사상과 대립되어 있는 근본주의의 독특한 주장이 무엇인 것을 먼저 살펴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25) 정경옥은 당시의 미국과 유럽의 신학조류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5) 정경옥, “신학적 현대주의 강요와 비판”, 神學世界, 20. 4(1935년 6월), 15-22, 16.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두 조류 중에서 정경옥은 스스로 자신이 서 있는 노선이 현대주의라고 밝힌다. 정경옥에 따르면 현대주의로 대변되는 “자유적 개신교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통적 개신교를 개혁하려는 사상이며 운동이다. 16세기에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의미에 있어서 자유적 개신교가 전통주의를 반대하고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는 주로 반동적 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26) 우리는 여기서 정경옥이 현대주의 사상 혹은 자유주의운동을 종교개혁과 비교함으로써 자유주의운동을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진정한 개혁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26) Ibid., 19.


이처럼 정경옥은 정통주의와 현대주의 두 조류 가운데 주저하지 않고 현대주의 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가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옥이 현대주의가 발흥하게 된 외적인 배경으로 현대과학이 성취한 결과와 그 방법의 수용, 계몽주의 철학의 영향, 현대의 급격한 사회적 변천을, 내적인 배경으로 전통적인 기독교가 지나치게 형식과 조건에 치우친 나머지 삶에 적용되지 않아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개신교가 교회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 그리고 신조와 교리의 권위를 주장하는 반면 현대자유주의는 이들 세 가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외부적 권위에 호소하기보다는 “종교와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 이성과 양심에 호소할 것이오 교회나 경전이나 교리까지라도 최종에 이르러서는 이성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7) 정경옥은 현대주의를 대변하는 자유주의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종교경험에 기초”한 종교로서, 이는 자유주의야말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명제를 가장 잘 대변한다는 의미이다.


27) Ibid.


현대주의에 상당히 긍정하고 있지만 정경옥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친히 자신을 현대주의 맥락 속에 분류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 즉 1. “인간의 이성과 직관인 양심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점, 2. 경험일반을 종교화함으로써 종교행동을 혼동한 점, 3. 역사적 기독교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한 것, 4. “기독교의 구속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 등을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다.28) 그것은 1939년 “푸로이드의 종교관”을 비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29)


28) Ibid., 22.
29) 鄭景玉, “푸로이드의 宗敎觀,” 24권 5호(1939년 10월), 11-15.


정경옥이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섭렵했으면서도 급진적인 자유주의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한국에서 받은 복음주의적 감리교 영향과 협성신학교 안에 있었던 남감리교의 복음주의 신앙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19세기 말부터 진행되었던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이 현대주의의 급진적인 도전 때문에 비롯되었으며, 결국 이 논쟁이 아무 유익이 없는 소모전으로 끝나고 말았던 역사적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경옥의 전체적인 톤은 현대주의를 옹호하기보다는 비판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경옥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털어 놓는다:


美國에 있어서 根本主義와 現代主義는 오늘날까지 長久한 時日을 두고 猛烈히 싸워 왔다. 어느 때에는 그리스도의 根本精神에서 離脫이 되었다 하리 만치 曲解와 偏見을 가지고 서로 怨讐와 같이 對하여 온 것도 事實이다. 現代主義는 오늘날까지 많은 무리들의 贊同을 얻지 못했다. 그 原因은 大衆의 宗敎에 對한 認識程度에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現代主義 自體 안에 있는 思想의 缺陷에도 있다고 할 것이다.……첫재로 現代主義는 人間의 理性과 直覺인 良心을 너무도 過大評價한다고 할 것이다.……둘재로 現代主義는 生의 全局面에 있어서 表示되여 있는 宗敎的 意義와 經驗 一般을 宗敎化하랴는 宗敎行動을 混同하는 點이 많다.……셋재로 現代主義는 大體로 보아서 歷史的 基督敎의 特殊性을 沒覺하는 同時에 基督敎의 絶對性을 否認하고 말었다. 이는 歷史의 實在性을 떠나서 廣寞한 抽象에 依據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非現代的인 哲學主義에 빠진 것이다. 酷評을 하자면 基督敎 自體를 現代的으로 理解하랴다가 正當한 意味에 있어서 基督敎가 아닌 딴 宗敎偶像을 만들어 基督敎의 명패를 부치는 것이다. 넷재로 現代主義는 甚한데 이르러 基督敎에서 救贖的 要素를 除去하랴는 傾向이 있다. 그들은 救贖이 없는 宗敎啓示가 없는 基督敎를 現代가 要求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基督敎에서 하나님의 創造的 救助와 恩惠의 活動을 빼여 바린다면 남은 것은 社會的 理想主義에 더 지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人本的인 功利主義만 가지고는 宗敎가 成立되지 아니한다. 더군다나 이것으로 基督敎를 代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現代主義가 傳統的 改新敎로서 우리의 宗敎的 情緖에 滿足을 주지 못한 缺陷을 補充하랴면 반드시 以上 몇 가지 條件을 愼重히 考慮할 必要가 있을 것이다. 이제 美國에서는 根本主義 對 現代主義의 白熱戰은 거의 終息되어 있는 感이 있다. 이러한 惡夢이 우리 朝鮮敎界에 移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成算 없는 싸움을 싸웠다. 이 싸움에서 얻은 것도 많었던 것을 認定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러한 싸움을 하지 않고라도 그들이 경험으로 배운 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할 일이 많은 이 땅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惡戱(악희)를 反復할 必要가 없다고 생각한다.30)


30) Ibid., 22.


우리는 박형룡이나 김재준에게서 발견하는 한 인간의 사상적 발전과정을 정경옥에게서도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사상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배경을 갖고 있으며 그 사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격변의 3․1운동과 더불어 회심이 시작된 정경옥의 사상 속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받은 4년간의 교육을 통해 한국형 감리교 신학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다. 그것은 곧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사상이었다. 웨슬리의 전통이 한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뿌려지면서 한국에 부흥운동과 회심의 경험을 중시하는 감리교 본연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했고 이것이 한국의 감리교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감리교의 신학과 신앙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3년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턴대학과 게렛신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면서 구체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곳의 롤 교수의 이상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현대주의의 사조에 상당한 조예와 식견을 가지고 당시 미국의 현대주의 사조를 주도했던 롤 교수의 과감한 신학방법은 정경옥의 신학방법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 감정과 리츨의 도덕적 종교, 그리고 바르트의 계시종교는 정경옥의 신학사상의 기둥이 되었다.31) 슐라이어마허가 정경옥에게 체험신앙의 중요성을, 리츨이 도덕적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면, 바르트는 계시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어 그가 극단적인 현대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 주었다.32) 이것은 그가 자신의 신학적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1939년에 출판된 기독교신학개론에서 “나는 신앙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요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란 입장을 취한다”33)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정경옥은 송길섭의 말대로 “자유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대주의 신학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읽고 있는,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가 극단적인 현대주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했던 인물이다.34) 정경옥은 기독교의 사회구원을 외치면서도 개인구원을 무시하지 않았다.35) 그런 의미에서 정경옥은 현대주의자였으면서도 현대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감리교가 급진적인 자유주의로 흐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31) 鄭景玉, 基督敎神學槪論(경성:감리교신학교, 1939), 序. 4-5.
32) Ibid.
33) Ibid., 3.
34) Ibid., 334.
35) 鄭景玉, 基督敎神學槪論, 394-395.


그러나 정경옥의 이상은 건강의 악화와 시대적 장벽으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채 해방을 눈앞에 두고 42세의 나이에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미완성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이었다. 정경옥은 한국교회에 문화자유주의라는 신학전통을 구체적으로 뿌리내렸고, 이것은 한국감리교의 신학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후대의 감리교 신학자들은 정경옥의 과감한 신학방법을 채택하면서도 그가 우려했던 현대자유주의의 급진적인 특성에 대한 지적은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감리교신학교는 서구와 같은 현대주의의 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평가절하하는 종교다원주의와 민중신학이라는 급진적인 노선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택하고 말았다.


[3] 김재준의 진보주의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이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36)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37)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교단적으로 장로교 목사였던 김재준의 사상과 생애는 한국교회에서 정경옥과 박형룡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36) 주재용, “김재준의 생애”,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풍만출판사, 1986), 24;한철하,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정통주의 신학”,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316;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서울: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2000), 115.
37) 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서울: 大韓예수敎長老會總會宗敎敎育部, 1956), 190.


초대교회 오리겐이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논쟁적인 인물이었듯이 김재준 역시 시각에 따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재준을 동정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측면에,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의 신학적인 변천과 그의 사상의 저변에 깊이 뿌리내려진 이유 모를 반항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앞으로 김재준을 기념하기 위한 작업에서가 아닌 순수한 역사적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 작업이 속히 나와야 할 것이다.38) 김재준의 생애는 출생부터 회심까지, 회심부터 조선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기 전까지 그리고 조선신학교 교수 시절 등 크게 셋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38)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작품으로는 주재용 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을 들 수 있다.


1) 김재준의 성장 및 교육배경


김재준은 20세기가 막 시작하던 1901년 출생해 일제 36년, 6․25전쟁, 세 차례의 장로교 분열, 4․19혁명, 5․16군사혁명과 유신정권, 그리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의 대사건을 목격했다. 이런 엄청난 변혁의 현대사는 김재준의 일생에 싫든 좋든 깊게 드리워져 있었고, 현대사를 구성해 온 굵직한 사건들은 김재준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경흥의 독실한 유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김재준은 시를 좋아했고 문학을 즐겨 읽었으며 사서삼경을 자주 외웠다. 이런 한학과 유학에 대한 탐구는 그의 문학적 자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재준은 비록 문학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일에 문학가 못지않은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은 “내가 ‘문학인’이라든지 ‘작가’라든지 하는 축에 언급될 수도 물론 없다”39)고 고백했지만 장공 김재준의 작품에는 문학적 소질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39)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기독교사상, 23.


그는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9살부터 12살까지 외갓집 경원 함양동에서 소학교인 향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3년을 다녔다.40) 향동학교를 졸업한 후 13살부터 16살까지 3년간 회령간이농업학교에서 수학하고 향동학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김희영 선생의 도움으로 16살부터 18살까지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 고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41) 당시의 풍습에 따라 18살의 어린 나이에 같은 동향 장석연 씨의 맏딸과 결혼한 김재준은 1920년 회령군청에서 옹기금융조합으로 전직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나진 개발 설계도를 입수한 일본인 간부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김희영에게 나진 땅을 구매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김희영은 김재준에게 이를 부탁해, 그는 옹기금융조합의 직원으로 받는 것보다 상당한 금액의 돈을 거간으로 챙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김재준은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고 공부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상경했다.42)


40)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서울: 한신대학출판부, 1992), 22.
41) Ibid., 29-38.
42) Ibid., 38.


김익두의 승동집회 때의 회심


서울에 올라온 김재준은 지금까지 시골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과 환경을 접하면서 조금씩 도시인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인생의 방황자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포기할 수 없는 향학열, 그리고 한 가장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감당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갈등으로 번민하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서울에 올라온 그가 1920년 가을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서 주님을 만난 것이다.43) 승동교회에서 열린 서울장로교회 연합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는 당시를 그의 범용기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 무렵, 서울 시내 장로교회 연합 사경회가 승동 예배당에서 열렸는데 강사는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었다. 그는 원래 장돌뱅이 깡패 두목이었는데 목사가 돼서 주로 부흥집회를 맡는다고 했다.
서울에는 첫 “데뷰”다. 언어가 서민적이고 표현도 “속인”(俗人) 그대로였다. 거기에 또 병 고치는 데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샀다. 예배당 안은 부인들로 찼고 남자들은 바깥 뜨락과 담장 위에까지 앉았다. 설교는 예배당 이층 바깥 현관에서 했다. 사람이 하두 많기에 나도 웬일인가 싶어 가 봤다. 말씨가 구수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마감 날이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설교했다. “닭이 달걀에서 나오고 달걀이 닭에서 나오고” 이렇게 암만 따져도 해결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포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구 만들어서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만물 중의 하나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요!”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오! 등등 나는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 “塞翁之馬”는 하늘의 복을 내게 심는 길닦이가 된 셈이었다.44)


43) Ibid., 47.
44) Ibid., 47-8.


경흥읍교회 장학생으로 서울에 유학 와 한 방에서 생활하던 두 살 아래 김영구(金永九)의 죽음은 김재준에게 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45)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경험 때문에 물세례 같은 것은 군더더기라고 느꼈던” 김재준은 승동교회 김영구(金永耈) 목사의 간곡한 권위에 못 이겨 예수를 믿은 지 3년 만에 세례를 받았다.46) 회심한 후 얼마 동안은 회심의 감격에 젖었으나 곧 “교회에 대한 이유 모를 반항”47)이 점점 더 그의 신앙을 좀먹기 시작했다. 김재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출판되는 신앙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의 솔직한 표현을 빌리면 “분간 없는 풋내기 감격으로 덮어놓고” 읽었던 것이다.48) 이 시절에 읽었던 일본에서 출판된 신앙서적들은 김재준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5) Ibid., 51-58.
46) Ibid., 59.
47)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3.
48) Ibid.


서울에서 방황하고 있는 3년여 동안 김재준은 YMCA 영어전수과 3학년에 수학하면서 평생의 지우 정경옥을 만났고, 그를 변함없이 이끌어 준 송창근도 만났다. 서울을 떠나 고향 소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은 김재준은 스물다섯 살 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일본에 건너간 동기는 신학을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보다 강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49) 이끌리어 시야부행 전차를 타고 야오야마(靑山) 육정목에서 내려 청산학원 신학부 기숙사를 찾아가 “졸업반에 있던 송창근 형 방문을”50) 두드리게 되었다. 비록청강생이지만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 청산학원에서의 신학수업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51) 그가 신학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과 고심 속에 택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신학을 시작한 김재준은 자신의 방향을 먼저 설정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수많은 책을 “돌아가며 되씹어 봤다.”52) 김재준은 신학을 하면서 신학을 학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먼저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개방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개방적인 사고는 김재준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신학서적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신학서적들을 섭렵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49) Ibid.
50)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 78.
51) Ibid., 92. 청강생으로 수업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후에 베리 교수에게 논문도 제출하고 졸업시험도 치르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내가 정식으로 졸업생 명단에 드는지 안 드는지 나도 몰랐다. 원래 ‘방청생’이었고 그 후에 정규학생으로 등록된 일도 없는데다가 한 학기를 빼 먹은 셈이니 수업시간도 한 학기 부족이다. 학기금, 학우회비, 기숙사비 등도 한 푼 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특별한 교수회의 배려로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52)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3.


청산학원에서의 교육


김재준은 청산학원의 개방적인 분위기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김재준이 공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본과 그가 재학하고 있던 청산학원은 상당히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김재준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그때 일본, 특히 청산학원은 거의 래디컬한 자유주의였고(조직신학 부문은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당시 뉴욕 유니온의 출장소 격이었다”53):


청산학원이라면 “자유”가 연상된다. 학생이고 선생이고 간에 개인 자유, 학원 자유, 학문 자유, 사상 자유, 모두가 자유 분위기다. 물 속의 고기같이 자유 속에 살았던 것이다.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그 당시 “뉴욕 유니온” 그대로였었던 것 같다. 신약교수 “마쯔모도”(松本貞夫)는 뉴욕 유니온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 구약교수 “와다나베(渡邊善太)는 독일 튜빙겐 박사였다. 그러니 자유를 넘어 과격(Radical)에 가깝다 하겠다.54)


53) Ibid., 24.
54)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 93.


이곳에서 신학을 하는 동안 김재준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상가는 바르트였다. 김재준은 바르트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르트의 초월론”에 대해 졸업논문을 썼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일본 신학자 다까구라가 바르트를 소개하기는 했지만 초보적인 자료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청산학원의 분위기에서 볼 때 바르트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재준은 자료 역시 충분하지 않았지만 급진적인 청산학원의 분위기와 한국의 보수적인 분위기 중간의 노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바르트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55) 그러나 김재준은 신학을 단순히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나는 신학함에 있어서 그것이 “학”으로서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요소를 더 많이 앞세워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있었다.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과의 주체적인 응답일 것이요, 무슨 원리 원칙이거나 도덕 교훈이거나 나를 앞세울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학과목들에 대하여 무슨 반발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객관화, 물상화한 “학”으로서의 “신학”이란 것은 다른 어느 학문과도 다를 것 없는 하나의 “학”일 것뿐이므로 그리 낭만적인 것도 못 되고 “드릴”을 주는 것도 아니라고 불평했다.56)


55) Ibid., 92.
56)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4.


청산학원 시절 김재준에게 깊은 감화를 준 교수는 히야네야스사다(比屋根安定) 교수와 벳쇼카이노스께(別所海之助)였다. 히야네(比屋根) 교수의 “한서와 일본의 고문헌과 서구인(영독불)의 기독교 및 일반종교 연구문헌 등에 대한 그의 광범한 발섭” 그리고 그의 순수한 인간미는 20대의 김재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벳쇼카이노스께의 동양적 정취 또한 문학적인 감각이 뛰어난 김재준에게 인상적이었다. 청산학원에서 4년을 수학한 김재준은 프린스톤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지형 송창근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청산학원을 졸업한 송창근이 먼저 프린스톤에 유학해 그곳에서 직접 주선해 입학허가서와 장학증서를 동봉해 보내 주었다.


미국 유학


김재준의 일본행은 신학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미국 유학으로 이어졌다.57) 보이지 않는 강한 손에 이끌리어 일본에서 신학을 한 김재준이 이제는 보이는 강한 손에 인도되어 명문 프린스톤에 유학할 수 있었다. 김재준은 청산학원에서 받은 급진적인 자유주의가 미국에서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는 몇 년간의 조정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프린스톤의 분위기는 청산학원의 신학적 분위기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김재준이 유학 가던 해가 1928년 가을이었기 때문에 프린스톤신학교에는 아직 그레샴 메이첸이 재직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프린스톤에서 전혀 다른 “알짜 보수주의”58) 신학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급진적인 자유주의에 깊이 빠져 있던 김재준이 쉽게 신학적 입장을 돌이킬 수는 없었지만, 프린스톤에 재학하는 동안 보수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실존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59) 김재준은 메이첸 교수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의 강의를 택했고, 또 그의 저서들을 거의 다 읽었다.”60) 메이첸 교수도 김재준을 위해 주었다. 김재준은 프린스톤 유학 시절 청산학원의 급진적인 자유주의와 다른 보수주의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주로 메[이]첸(Grasham Machen)의 강의를 택했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의 투사라는 의미에서 인기가 있었고 강의도 무던히 명석했다. 나는 아오야마[청산학원]에서 신신학 일변도로 지냈기에 여기서는 보수신학 계열을 주로 택했다. 메[이]첸의 저서는 다 읽었다. 그의 강의 “바울 종교의 기원”, “처녀탄생” 등도 들었다. 즈위머의 모하메트 강의, 바스(Vos)의 “메시아론”, 어드맨의 “성서약해” 등등 강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책은 읽을 수 있었고 시험 때에는 학생들이 프린트한 강의록과 과거의 시험문제집을 돌려주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도 회람되는 것이었다.61)


57)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99. 그의 미국 여비는 윤치호 선생이 지원해 주었다.
58)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5.
59) Ibid.
60) Ibid.
61)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 104-105.


이곳에서의 신학수업은 김재준에게 일본에서 받은 신학 방향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향이 있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일깨워 주었다. 나아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를 연상하듯 일본에서의 급진주의와 프린스톤의 정통주의 사이에 새로운 중립적 입장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가 그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가지 상반되는 신학적 조류를 접한 김재준이 자연스럽게 내면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설정한 신학적 입장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던져 주며 자유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말씀에 근거하는 정통주의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김재준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서의 자유주의와 프린스톤에서의 신학방향 재측정에 새로운 자극과 전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확실히 보유하면서 자유하는 복음을 천명한다. 그 근본적인 것과 시대적인 것, 계시와 문화와의 분간을 혼동하지 않고 언제나 시대에 앞서면서 시대를 포섭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서를 다시 보자는 노력-무슨 그 비슷한 방향이었다.62)


62)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5.


1928년부터 1929년까지 1년을 프린스톤에서 보낸 김재준은 지형 송창근이 있는 웨스턴신학교로 옮겼다. 혹자는 프린스톤의 신학적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리버럴한 웨스턴신학교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가 옮긴 학교는 프린스톤과 같은 교단 신학교인 데다 신학적으로 그리 차이가 없었다.63) 그가 피츠버그의 웨스턴으로 학교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 송창근이 재학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곳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가을 새학기에 나는 프린스톤을 떠나 피츠벅의 웨스턴신학교로 갔다. 아예 낮춰 붙어 2학년에 등록했다. 학비, 기숙사비 모두 면제고 장학금은 프린스톤보다 백 불 더한 삼백 불이다. 식비만 있으면 된다. 내가 번 돈 삼백 불이 “일용할 양식”을 보장할 거라 믿어 맘 든든했다.64)


63) David Wells, ed., Reformed Theology in America(Grand Rapids:Eerdmans, 1986), 60. 이 학교는 유명한 B. B. Warfield가 프린스톤으로 적을 옮기기 전에 한동안 가르쳤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교단 신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64)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 112.


웨스턴에서의 3년간은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에게 값진 시간이었다. “구약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기에 히브리어 시간은 모조리 택했다.”65) 그러나 학을 경멸하는 습성이 있었던 김재준으로서는 웨스턴에서도 깊은 연구에 몰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학보다도 사상이 앞서고 기록이나 글자보다도 인간 자체의 신비한 세계”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다. 미국에서의 4년간의 연구는 일본에서의 자유주의를 중화시키는 계기, 그래서 청산학원의 급진주의가 프린스톤과 웨스턴을 거치면서 진보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전향되었던 것이다.


65) Ibid., 113.


김재준이 웨스턴에서 우수한 성적에다 히브리어 특별상까지 받으며 신학사(STB)와 신학석사(STM)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32년 겨울이었다. 미국은 갑작스런 경제공황으로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처하게 되었고, 만주사변이 발생해 한국 내 정치, 경제 상황은 참으로 불확실한 가운데 있었다.66) 송창근은 덴버신학교와 아일리프대학이 조인트한 프로그램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경직도 요양원에서 나와 귀국 도상에 있어서 김재준도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67)


66) Ibid., 118. 이승만이 N.B.C. 방송을 통해 “한국독립의 때는 왔습니다. 모든 한국 동포는 궐기하시오”라고 연설하며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촉구하고 있었다.
67)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김재준 전집 13권, 범용기(1) “새 역사의 발자취”, 117.


귀국 후 김재준은 간신히 평양숭인상업학교68) 교사 겸 교목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새 세대에 좀 더 트인 비전을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좀 더 세계적인 호흡 속에서 자라게 해야 하겠다는 각도에서 자신의 일에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는 남궁혁의 도움으로 神學指南의 특별기고자로 발탁되어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형 송창근이 산정현교회 목사로 재직하고 있어 평양에서의 생활이 자연스러웠지만 그는 당시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적지 않게 실망하고 말았다. 김재준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서른두 살 되던 겨울에 귀국했다. 교회도 사회도 숨이 막힐 정도로 閉塞[과] 체증에 걸려 있었다.……나는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한국교회에 어딘가 숨쉴 구멍을 틔워 줘야 하겠다고 느껴 간도 있을 때부터 십자군이란 작은 잡지를 내 봤다. 그러다가 서울서 새로 신학교를 한다고 올라오라 하기에 새 세계의 교역자를 길러 한국교회에 기구라도 열어 보려고 맘먹었다.69)


68) Ibid., 131.
69)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5.


2) 김재준의 사상적 틀: 전형적인 바르트주의


김재준의 사상의 원동력은 부분적으로는 청산에서 받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생관과 귀국 후 소선지서를 탐독하면서 체득한 예언자적 의식에서 발원했다. 그는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밀폐된 한국교회에 숨통을 터 주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대적 사명감은 귀국 후 소선지서를 연구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것은 유동식의 표현을 빌리면 현대적 의미의 역사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70) 그에게 역사란 한 인물이 자주적, 창조적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현장과 그것을 구현하는 주인공, 즉 역사의 주체가 필요하다.


70) 柳東植, 韓國神學의 鑛脈(서울: 展望社, 1982), 202-203.


반선교사상, 반정통주의 주도


김재준은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고 또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의식의 사상적 기초는 예언자 연구를 통해 터득된 것이다. 김재준에게 예언자는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정의를 외치는 자이며, 의는 교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김재준의 사상은 정경옥의 신앙과 맥을 같이했다. 표면적으로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화란의 개혁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바 영역주권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영역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기 때문에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이 분야에서는 불신자와 기독교인의 협력이 필요하고, 기독교 영향력은 이 일반은총의 모든 영역, 즉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문학 등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김재준의 사상은 이런 개혁주의적인 체계에서 기원된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카이퍼의 영역주권과도 차이가 있었다. 젊은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의식은 그를 반선교사상과 반정통주의, 진보적인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교육, 그리고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 신학 조류의 합류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이끌었다.


김재준의 예언자적 외침은 반선교사상으로 표출되었다. 김재준은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다. 이 때문에 김재준은 “정통주의 신학은 신(新)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71)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가 한국교회를 선교사의 교회, 한국교회사를 미국의 선교사의 한 토막, 그리고 한국교회를 미국의 사상적 노예라고 힐난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김재준에게 거부감을 안겨 준 것은 감리교 선교사들이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양대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 중에서 감리교는 신학의 추이에 대하여 상당히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문제되지도 않았으나 결국 신학, 특히 정통주의 신학 지상주의를 고집하기 위하여 극성부린 교파는 장로교”라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다.72)


71) 김재준, 새사람 11호(1946).
72) 김재준, “한국교회의 신학운동:그 회고와 전망”, 기독교사상(1960. 1), 11.


김재준은 프린스톤 출신들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장로교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로 만들어 버렸다고 보았다.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9년, 신학교가 자유주의로 전향하고 보수주의를 대변하던 메이첸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소수의 모반자로 전락하는 일련의 시대상을 목도한 김재준은 정통주의는 실패했고 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통주의로 획일화된 한국교회의 진범은 선교사라고 보았다. 김재준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十九世紀 末葉의 프린스톤 出身들이 韓國의 初代 宣敎師로 나오게 되어 그 正統主義 科[神]學의 沒落 直前의 몸부림을 韓國에 移植하고 “鐵의 帳幕”으로 둘러막아 五十年을 保護育成한 것이 곧 韓國長老敎會의 正統主義 王國인 것이다. 그러나 大院君의 鎖國主義가 自由世界의 波壽를 막아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韓國宣敎師(美, 南北長老敎 所屬)들의 그것이 오래 갈 理가 없는 것이었으며 그 동안에 뒤떨어지고 低落한 것은 불상한 韓國敎人들이었다. 韓國敎會 五十年 來의 敎會 指導者들이 宣敎師 諸位로부터 배운 것은 正統神學의 注入과 그에 대한 盲從밖에 없었다. 自由도 批判도 없었다. 그러므로 人格的이라고 할 것이 못 되며 따라서 學問도 成立되지 않았고 眞理도 闡明되지 않았다. 慣習化한 傳統이 信仰의 탈을 쓰고 敎權을 專橫하여 理性과 良心을 유린하는 暗黑時代를 造成한 데 不過하였다. 이것이 過한 酷評이라고 느껴질지 모르나 解放後 十年의 들어난 열매가 그런 것임을 어찌하랴.73)


73) 김재준, “大韓基督敎長老會의 歷史的 意義,” 십자군 25호(1956. 6), 4.


1960년에 基督敎思想에 실린 “한국교회의 신학운동”이라는 논문에서 김재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 몹시 근시안적”74)이었으며 그것이 “선교사들이 범한 본의 아닌 과오였는지 또는 의식적인 식민정책”75)이었는지는 모르지만 “50년이 지난 그때에도 이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심한 무반성의 자기교만이었다”76)고 개탄한 적이 있다.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시켜 주지 못하고 무조건 선교사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전근대적인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74) 김재준, “한국교회의 신학운동:그 회고와 전망”, 11.
75) Ibid.
76) Ibid.


그러나 김재준이 볼 때 이보다도 더 문제되는 것은 선교사들이 뿌리내린 정통주의 신학교육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를 통해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 곧 “근본주의”를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성경의 절대무오와 같은 교리를 절대화시켜 이것을 표준으로 교역자와 신자의 신앙을 심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재준은 조소 섞인 어조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폐쇄주의, 특히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경관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그들은 걱정한다. 만일 성경의 어느 한 점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의심하고 구원의 확실성도 의심하고 신자의 윤리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무오를 믿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 전체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고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비판을 악마시한다. 그것은 성경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때 그들의 공식적인 체계가 그 터전에서부터 무너진다고 보기 때문이다.77)


77) Ibid., 13.


김재준이 볼 때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강하게 변호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보통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의 무오성을 견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신학교육이 가능하고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본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일찍이 정경옥이 외쳤던 바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모토를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다. 강신석이 “한국교회사의 맥락에서 본 김재준의 사상”에서 지적한 것처럼 “1930년대부터 그는 한국교회에 구약의 문서설과 자료설을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예언자 연구를 통하여 예언자의 외침이 당시 한반도에 그대로 들려질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해방 후에는 축자영감설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한국 신학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근본주의 우상이었던 거친 황무지에 불을 질렀다.”78) 그의 시각에서는 한국교회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생명을 걸고 변호하는 행위는 성경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해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이 주장하듯, 미국의 신학교들이 성경의 권위, 곧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였을 때 다른 교리들도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78) 강신석, “한국교회사의 맥락에서 본 김재준의 사상”;주재용 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풍만출판사, 1986), 138-9.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세 사람이 교계로부터 호되게 비판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1935년 神學指南에 실린 송창근 목사의 “감격의 세월”이라는 교계 평론 때문이었다. 송창근은 이 평론에서 정통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교권주의 모두를 싸잡아 혹평했다. “정통이 밥통”이라는 비판에서부터 당시의 부흥집회의 잘못된 동기에 이르기까지 교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배당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목사 주택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열어야겠습니다. 성신이여 강림하사……그대들은 성신이 그대들의 소사인 줄 아느냐?”라는 원색적인 문구는 교단의 어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천노회, 강서노회에서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직접 항의를 했고, 이들을 특별기고자로 끌어들인 남궁혁 목사는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神學指南의 필진에서 제외되었고, 김재준은 평양을 떠나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 겸 성경교사로 자리를 옮겼다.79) 이곳에서 그는 일생 동안 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지원해 준 강원용과 안병무를 만났다. 2학년 학생 강원용은 전체 학생회를 인도하고 지도력이 있었고 “머리도 비상해서 시험에는 언제나 최우등”의 모범생이었다.80) 전영택이 서울에서 새 사람이란 잡지를 내고, 송창근이 부산에서 성빈이라는 잡지를 내는 동안 김재준은 이국 땅 북간도에서 십자군이란 잡지를 출간하기 시작했다.81)


79) 김재준, 장공 김재준 저작 전집 13권, 149-156.
80) Ibid., 156.
81) Ibid., 160.


김재준이 평양을 떠나던 그 즈음 한국의 교계는 신사참배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식민지에 대한 신민화정책을 가속화했고 그것은 신사참배로 이어졌다. 자연히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 국내는 신사참배문제로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1935년으로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십 년간은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신학문제는 한국교회 안에서 온전히 종적을 감추고 오직 이 일제의 일본화운동에 각양의 반응을 보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82) 신사참배문제는 한국교회에 대한 시험대였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배우지 못했다. 초대교회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시와 같이 관리들을 매수해 리베루스와 같은 증서를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교회는 거부하든지 타협하든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인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타협이나 참배보다는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의 요구가 너무 크고 가혹해 타협의 길을 택한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신사참배가 배도의 길이라고 믿고 거부했다. 이 문제로 해외선교부는 한국의 선교지 철수를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미션스쿨들은 폐교를 맞았다.


82) 金在俊, “韓國敎會의 神學運動:그 回顧와 展望,” 基督敎思想 4(1960. 1), 16.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김재준은 어떤 뚜렷한 자기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외치는 예언자적 소리는 마치 미래의 한국교회를 예견하고 외치는 것처럼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외침이 단순한 신학적 지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외침을 호소력 있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신학이 단순히 학문의 영역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재준은 신학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철학을 털어놓는다:


신학이 객관화 물상화의 과정을 밟아 다시 인격적, 주체적인 생명에 화신하여 하나의 고백으로 선포되는 때 그 신학은 학문이면서도 학문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증언으로 선포되는 것이며, 그것은 창백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피와 살이 꿈틀거리는 예언의 외침으로 된다는 그것이었다.83)


83) 김재준,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24.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철학에, 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신학은 바르트의 사상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그에게 실존주의는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신학체계였다. 김재준이 바르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라는 글에서 김재준은 “바르트에게, 브루너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김재준과 이들 사상가들과의 연계성은 이들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의 기독론 중심의 신학은 김재준에게 급진적인 진보주의와 극단적인 정통주의 양쪽의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중도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신학노선으로 비추어졌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은 “한국교회와 신학운동”이라는 김재준의 회고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 맘에 모시고 사는 신앙생활을 그 핵심으로 삼는다. 그가 우리의 죄를 밝혀 심판하심과 동시에 그 죄를 속량하신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심정과 이성을 밝히셔서 주 앞에서 다시 얻은 겸손한 자유로 진리에 대하여 질문하며 탐구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 더군다나 어떤 성경관이 그리스도를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과 그의 심정으로 성경을 재평가하며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정통주의자의 성경에 대한 축자적인 광신을 피함과 동시에 자유주의자의 회박하고 방자한 막연성을 막는다. 성경이 또한 그리스도가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성경의 객관성과 우리의 주관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소재를 찾는 것이다. 교리신조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사도시대로부터의 교회로서의 공동고백을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빛과 심정으로 나 자신의 인격적인 음미를 통하여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으로 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신앙의 창조적인 고백을 과거의 신조 속에 억지로 동결시키려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지하게 교리를 연구하며 될 수만 있으면 거기에 체계도 세워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거기에 지상 또는 절대 등의 개념은 결코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인격적인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격적인 자유를 절대 존중한다. 따라서 추상화한 관념 체계나 신조를 가지고 어떤 진지하는 신자의 신앙 또는 학문의 양심을 외부적으로 억압하려는 정통주의 신학태도를 배격한다. 정통신학자들은 흔히 말하기를 자기들은 초자연주의요, 우리는 자연주의자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신본주의요 우리는 인본주의라고 평한다. 그리고 흔히 기적과 초자연적 계시와를 직접 연결시켜서 성경의 기적 기사를 하나하나 여자적으로 승인하지 않으면 다짜고짜로 자연주의니 인본주의니 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초자연과 자연과를 그렇게 관념적으로 구별하여, 초자연 편에 섬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자랑하려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우리 심정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시요 또 참 사람이신” 그의 안에 초자연과 자연이 하나님의 실존으로 되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를 모시고 있는 우리의 새 실존에서도 그러한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초자연주의”니 “자연주의”니 하는 데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가시덤불 하나하나에 불 탄다”던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소명 경험으로 우리는 만족할 뿐이다. 기적의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하나의 기적 기록을 여자적으로 승인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쯤은 우리에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 된” 그리스도 자신이 최대의 기적이요, 이 절망과 공허와 죄책에 침륜된 죽을 인간인 “내” 속죄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이 지금의 내 실존에서 샘솟고 있다는 그것이 또한 최대의 기적인데, 요것조것을 꼬집어 그것들의 기적 여부를 논쟁하는 좀스러운 흥분이 차지할 고장이 어디 있겠는가? 신본주의니 인본주의니 하는 데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의 안에 있으면, 신본이니 인본이니 할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사람”이신 그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불러일으키시는 한, 우리는 소위 신률적인 의미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84)


84) 金在俊, “韓國敎會의 神學運動,” 16-17.


김재준은 바르트의 전통을 따라 자연과 초자연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역사와 초역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객관과 주관도 합일시키려고 했다. 성경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위에 두려고 했다. 성경의 기적을 여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적을 실존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신학의 중심이 있다. 김재준은 정통과 자유, 양극단을 해결하는 소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있다. 객관적인 계시를 강조하면서도 생명력을 상실한 정통주의, 기준 없이 자유하는 자유주의의 방자한 막연성에 대한 해답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은 전형적인 실존주의 신학자였다.


3) 김재준에 대한 평가


박형룡이 서투른 자신의 작업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된 서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았다면, 김재준은 완성된 서구의 것보다는 서투르지만 자신의 신학세계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아무것도 못된 ‘나’대로의 세계를 즐긴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고백이었다. 바로 이 인생철학 속에서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세계를 개척해 갔던 것이다.


격변의 시대에 태어나 한국교회사와 맥을 같이해 온 김재준은 자신이 시대를 이끌어 갈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이런 역사의식은 김재준의 세계관을 넓혀 주었고,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받으면서 양국 신학 조류의 장단점을 간파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프린스톤의 정통주의가 김재준의 사상 속에서 진보주의라는 독특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신학은 청산학원에서부터 받은 칼 바르트의 사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보주의 신학은 구자유주의에 대한 우향적 개혁이었던 칼 바르트 풍의 진보주의와는 달리 반정통주의 노선에 충실한 저항적 정신(抵抗的 精神)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다. 이런 저항적 진보주의 사상은 한국장로교의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 예언서의 연구를 통한 예언자적 의식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김재준은 박형룡의 정통주의나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진보주의 사조를 한국교회에 뿌리내리는 역사의 주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4] 박형룡의 정통주의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실존과 무관한 신학을 정립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던 김재준은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신학적인 변천과정,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외국의 진보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신학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끝없이 노력했다. 따라서 김재준은 자기의 어린 시절부터 한 신학자로 성장할 때까지의 여정을 비교적 상세히 고백하고 있다. 즉 자기가 어떻게 성장하여 회심하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솔직하게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박형룡 박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기술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그것은 칼빈처럼 드러나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류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85)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옥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86) 귀국 후 그는 지금까지 정신학(正神學)과 정신앙(正信仰)을 생명으로 여겨 왔던 한국장로교 안에도 현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마포삼열이 지적한 것처럼 “今日에 許多한 異端이 敎授되며 敎會 안에라도 僞敎理와 反基督理論을 가르치는 人物들이 있다는 사실은 決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87) 박형룡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세력을 확장하는 자유주의와 현대주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의 정통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철저한 자의식을 가졌다.88)


85) 朴亨龍,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平壤:平壤朝鮮예수敎長老會神學校, 1935), 840-847.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 후반부 “敎會의 對策”에 나타난 박형룡의 제안은 당시 일고 있던 현대주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86) Ibid., 814-47.
87) Ibid., 2.
88) Ibid., 839.


귀국 후 그는 처음부터 한국교회의 중앙 무대에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프린스톤신학교와 남침례교신학교에서 4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27년에 귀국한 박형룡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한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 현장을 배우면서 평양신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평양신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된 1930년부터 그는 새롭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 세력에 전투적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의 역작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은 이런 배경 속에서 역사에 태동되었다.89)


89) 朴亨龍,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平壤:平壤朝鮮예수敎長老會神學校, 1935). 이 책은 무려 847페이지로, 다룬 주제만 해도 광범위하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루이빌의 서든남침례교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변증학에 대한 수준 높은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특히 유학시절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미국 북장로교 안에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논쟁의 핵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그것도 근본주의를 대변해 온 메이첸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한국교회를 향한 특별한 소명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정통주의 정체성을 가진 그의 귀국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1935년 11월 5일 그가 메이첸에게 “한국교회 내에서의 현대주의의 해악은 진정 두렵습니다”90)라고 하며 한국에서 발흥하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90)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1935년 11월 5일;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119-200에서 재인용.


1) 박형룡의 성장 및 교육 배경


1897년 3월 28일 평북 벽동에서 출생한 박형룡은 백낙준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한 선천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16년 당대의 최고 명문인 평양 숭실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숭실을 졸업했다. 순수한 민족주의보다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지배했던 숭실에서의 교육은 그에게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자의식을 서서히 심어 주었다.91) 3․1운동은 한국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적지 않은 민족주의를 심어 주었고, 조선인으로 태어난 젊은이라면 겪는 인생방향에 대한 갈등과 고민을 그도 예외 없이 겪어야만 했다.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 요람 숭실에서 교육받는 동안 숭실의 교수, 졸업생,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주도한 평양의 3․1운동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92) 1920년에는 숭실전도단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전국 순회전도집회를 통해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앞장서다 목포에서 “天의 劍”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문제되어 목포형무소에서 10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93)


91) 박용규 엮음,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서울:총신대학교 출판부, 1996), 355.
92) 숭전대학교 80년사, 337.
93) “朴亨龍 씨 출감 歸平,” 기독신보, 1921년 2월 23일.


정치적인 독립의 한계와 현실적 제약 속에 갈등하던 박형룡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한국교회에 기여함으로 민족의 장래에 공헌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는 정치적인 독립을 위한 생의 투자는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20년 숭실을 졸업하자마자 박형룡은 중국의 금릉대학에 유학해 그곳에서 3년을 보낸 후, 다시 1923년 미국 프린스톤으로 유학을 떠났다. 박형룡이 희망했던 학교는 원래 프린스톤신학교가 아니었다. 그가 프린스톤신학교를 택하게 된 데는 선천중학교 시절 은사인 소열도 선교사의 영향이 컸다. 소열도 선교사는 자신의 회고록 한국 기독교 대변자들(Yin Yang Korean Voices)에서 박형룡 박사를 언급하면서 프린스톤이 아닌 다른 학교로 유학을 가겠다는 그에게 프린스톤신학교로의 유학을 강력하게 권하여 프린스톤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94) 박형룡이 처음부터 프린스톤신학교를 희망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가 희망했던 신학교는 어디였을까? 정확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맥코믹신학교로 가려고 했거나 아니면 레이놀즈 선교사의 영향으로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를 희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94) T. Stanley Saltau, Yin Yang Korean Voices(Wheaton: Key Publishers Inc., 1971), 66.


1923년 미국에 도착한 박형룡은 여름 동안 접시닦이를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면서 그 동안에 히브리어를 자습으로 습득하고 시험을 봐 학기 중에 이수해야 할 정규 과목 헬라어를 면제받았다.95) 메이첸 박사는 박형룡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소열도 선교사가 메이첸을 만나 박형룡에 대해 묻자 메이첸 박사는 “내 밑에서 지금까지 지도받은 학생 중 가장 탁월한 동양학생”96)이었다고 답했다. 박형룡은 1923년 가을학기부터 1926년 봄학기까지 3년을 머물면서 신학사(B.Th.), 신학석사(Th.M.) 학위를 마쳤는데 이것은 남들이 5년을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95) Ibid.
96) Ibid.


박형룡 박사가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3년부터 1926년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97) 이곳에서의 유학생활은 단순히 학문적 연마의 기간만은 아니었다. 프린스톤신학교 내의 신학적 갈등, 해리 에머슨 파스딕(Fosdick)과 어번선언, 다섯 가지 근본 진리의 천명을 둘러싼 총회 내의 신학적 갈등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98) “박형룡은 자신을 칼빈주의로 그리고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면서 기독교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특별히 성경의 무오를 변호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이런 일련의 사건이 한국 신학의 장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99)


97)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The Shaping of the Twentieth 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New York: Oxford University, 1980), 175-190.
98) 朴亨龍, 基督敎近代神學難題 選評, 842.
99)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130.


그가 미국에서 유학했던 기간은 지난 200년 이상을 지배해 온 미국의 청교도 보수주의가 무너지고 고등비평과 진화론 그리고 산업화로 인한 세속화와 물질주의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위협하는 위기의 시기였다.100)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를 사랑하고 고수하려는 이들은 현대주의에 전투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현대주의 역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모토를 내걸며 근본주의 신앙과 전통에 동일한 자세로 반기를 들었다. 이런 대립과 대결의 격전은 프린스톤과 북장로교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따라서 박형룡 박사는 처음부터 이런 격변의 시대에 격변의 장(場)인 프린스톤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앞으로 한국에 닥칠 똑같은 위기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101) 이런 시대적 배경은 자연히 박형룡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연히 프린스톤의 교육과정에서 그가 매력을 느꼈던 것은 변증학과 조직신학 분야였다. 특별히 당시에 명성을 날리던 프린스톤신학교의 변증학과 조직신학 교수들의 강의는 박형룡의 이상과 너무도 맞아떨어졌다.


100)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에는 그가 친히 경험한 미국 기독교계의 신학적 변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朴亨龍, 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 841-42.
101) 박형룡,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자유주의”, 神學指南(1964년 9월), 8-9; 간하배, 한국장로교신학사상, 59; 박용규,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362.


프린스톤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마친 박형룡은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1926년 남침례교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로 옮겼다. 당시 남침례교는 현대주의운동의 타도라는 측면에서는 북장로교와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특히 남침례교신학교의 변증학 교수 뮬린스(Edgar Youngs Mullins)는 1905년 역사적 신앙의 진실성을 변호한 왜 기독교는 진리인가?를 저술한 후 북미 신학계에서 학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102) 박형룡 박사가 남침례교신학교로 적을 옮긴 것은 바로 그의 문하에서 변증학 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코스웍을 마친 그는 1927년 귀국했다. 1928년 평양신학교 강사로 시작해 1930년에 교수가 되었다.103) 당시 그의 제자였던 박윤선은 박형룡 박사를 회고하면서 “그는 인격적 감화가 큰 동시에 신학자로서 인상 깊은 교수였다”104)고 증언한 적이 있다.


102) Woodbridge, Noll, Hatch, Gospel in America, 박용규 역(서울:총신대학교, 1992), 73.
103)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97.
104) 박윤선, “나의 생애와 신학(5)”;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98에서 재인용.


1933년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인 유추”(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라는 제목으로 남침례교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05) 논문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박형룡 박사의 최종적인 관심은 변증학에 있었다. 이런 변증학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은 이미 프린스톤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박형룡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숭실대학의 교수진들 상당수가 구학파의 전통인 프린스톤 출신들이어서 박형룡은 숭실 시절부터 이들로부터 보수주의 사상을 접했다.106) 이런 보수적이고 변증적인 성향이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미국 프린스톤에서 교육받는 동안 더 강화된 것이다. 그는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을 실존적으로 체험한 셈이다.


105) Hyung Yong Park, “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D. thesis, 1933.
106) 박용규,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362.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박형룡은 수년 후 미국에서 경험한 똑같은 신학적 대립과 논쟁을 한국에서도 목격하게 되었다. “1934년은 한국선교 50주년인 동시에 한국교회 창립 50주년이었는데 미국에서 프린스톤신학교가 개편되어 자유화한 지 5년 후였다. 그때는 한국에서도 벌써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가지가지가 학교의 교단과 교회의 강단에서 성히 선전될 뿐만 아니라, 선교잡지와 신학서류의 분포에 의하여 보급되는 중이었다. 특히 서양의 저명한 신신학 서류들이 간행되고 또 염가로 판매됨에 따라서 자유신학운동은 더욱 활발히 움직였다.”107) 한국에 돌아온 수년 후 박형룡은 프린스톤에서 겪었던 똑같은 경험을 한국에서도 겪은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메이첸으로서 한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사상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107) 박형룡, 박형룡 저작 전집 XIV(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383.


2) <표준성경주석>과 <근대신학난제선평> 출간


박형룡은 한국에서 진행된 일련의 상황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메이첸과 그의 동료 교수들에게 수시로 알려 주었고, 메이첸은 그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한국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1934년 7월 20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울리(Wolley) 교수에게, 그리고 1935년과 1936년 사이에 적어도 메이첸에게 4번의 편지를 보냈다. 1935년 11월 5일자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는 장로교 총회가 끝나고 그 동안에 진행된 일련의 진행상황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총회에서 아빙돈주석, 적극신앙단, 김영주와 김춘배의 모세저작권과 여권의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사실과 아빙돈단권주석에 맞서 표준성경주석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108)


108)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1935년 11월 5일;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138-139.


여기서 우리는 잠시 표준성경주석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표준성경주석은 감리교의 아빙돈단권주석에 맞서 총회가 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34년 장로교 총회는 종교교육부의 제안에 따라 성경주석전서 간행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신학교와 종교교육부에 위탁했다.109) 이듬해 봄 신학교와 종교교육부가 모여 박형룡과 나부열을 비롯한 6명을 성경주석편집위원으로 선임했고 동년 5월 3일에 편집위원회가 서울 허대전 선교사 집에서 1차로 모여 장로교 선교사와 목사를 중심으로 주석집필자 25인을 선정하고 주석의 내용설계와 경영 방침에 관한 결의를 했다.110) 위원회는 1935년 여름과 가을 사이 주석집필자에 대한 역할 분배의 교섭이 진행되어 “歐美 帝國 칼빈주의 神學者 五十餘 人事에게 聖經에 관한 論文의 寄稿를 請하는 書狀을 發送했다.”111) 그 후 편집위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편집과 출판에 관한 토의와 결의를 했다. 특별히 1936년 5월 4일 금강산수양관에서 모인 표준주석위원회에서는 첫째, 주석간행이 영구히 계속되기 위해 출판 후에도 주석을 “保全 或 修正”하기로 하고 위원 중 결원(缺員)이 생길 시에는 위원회가 자유로 후보를 보선하여 총회의 재가를 받기로 하고, 둘째 “본 주석의 판권은 신학교와 종교교육부의 공동소유로 하고 출판과 판매는 종교교육부에 위탁한다”는 결정을 했다.112)


109) 박형룡 편, 標準聖經註釋(京城: 총회종교교육부, 1937), 18.
110) Ibid.
111) Ibid.
112) Ibid., 18-19.


1937년에 간행된 표준성경주석 서문에서 박형룡이 밝힌 것처럼 이 주석의 집필원칙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본 주석이 학구적이 되도록 “가급적 성경 각부의 역사적 배경, 언어학적 근원, 문법학적 함의 등을 구명하며” 필요한 경우 원어를 삽입하고 난문제에 있어서는 상이한 학설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본 주석이 현대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입장과 동향에 무지하지 않도록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본 주석은 다양한 사람들이 저술했지만 “칼빈주의 保守的 信仰”이라는 측면에서 신학적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넷째는 학구적, 비판적, 신학적 통일성을 중시하면서도 “실용적 방면에도 등한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주석이 실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용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본 주석은 정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本 註釋은 暴風雨를 만난 배와 같이 思想上 動搖가 可畏한 우리 敎界에 對하여 信仰善導의 깊은 責任感을 갖고 聖經의 참뜻과 情神을 밝히 들어내여 칼빈주의 正統神學의 確立을 使命으로 삼는다. 書中에 各種의 異色見解가 參考로 言及되더라도 칼빈주의 正統神學의 立場을 中心位置에 固守하여 左로나 右로나 逸脫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本書는 朝鮮敎會에 있어서 聖經解釋의 唯一한 標準, 따라서 敎會大衆의 信仰을 指導하는 唯一의 標準이 되려는 希望을 품고 出世한다. 本書는 學究的, 批判的, 實用的 諸 方面에서는 敢히 充分하기를 希望하지 못할지라도 統一된 正統信仰의 保守를 爲한 誠意에서 우리 敎界의 標準文書가 되기를 敢히 希望한다.113)


113) Ibid., 20.


우리는 인용된 마지막 부분에서 간행될 표준성경주석에 대한 박형룡 박사의 염원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박형룡은 메이첸에게 약 20면 정도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원고도 청탁했다. 메이첸은 즉시 “나는 당신이 장대한 일을 할 것이라고 소망하였는데, 이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박형룡의 부탁을 긍정적으로 수락했다.114) 박형룡은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지대한 책임의식을 절감하면서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전통적인 신앙이 한국교회에 더욱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어야 할 이중적인 책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총회로 하여금 최근의 움직임에 맞서 일련의 결정을 이끌어 내는 일과 그 후속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최근에 일고 있는 신학적 혼란에 정통주의적 답을 주기 위해 자신의 대표작 근대신학난제선평을 출간하는 한편,115) 아빙돈단권주석에 맞서 표준성경주석의 출판 책임을 맡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1935년 11월 5일 그는 메이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작년의 총회는 정통적이면서도 학문적인 새로운 성경주석을 집필하도록 신학교와 종교교육부에 명령하였습니다. 선교사 세 명과 한국인 세 명을 포함한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집필진은 총 26명의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로 구성되었고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주석은 단권이 아니고 15 내지 16권의 분량이 될 것입니다. 이 주석이 우리 교회의 성경을 해석하는 표준이 되기를 바랍니다.116)


114)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Nov., 5, 1935.
115) 박형룡은 이 책을 통해 정통신학이 무엇이며, 신신학, 슐라이허마허의 신학, 리츨 신학, 그리고 위기신학의 문제점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116)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Nov., 5, 1935.


박형룡 박사는 메이첸에게서 배운 “개혁신학”, “정통신학”을 성경주석에 그대로 반영하기를 원했다. 그가 메이첸에게 원고를 부탁했던 것도, 집필진을 그런 방향의 사람들로 구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형룡은 메이첸 풍의 전형적인 구칼빈주의자, 정통주의자였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박윤선을 프린스톤이 아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천거했던 것도 신학적인 이유에서였다. 1936년 여름 2년간 메이첸 밑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박윤선은 박형룡을 도와 표준성경주석 집필 작업에 전념했다. 박형룡은 메이첸에게 박윤선이 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것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 이상의 일”이라며 요청했다.117)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에서 성경원어를 가르치면서 주석 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부터 박형룡과 박윤선은 선명한 개혁정통주의 이상이 표준성경주석에 그대로 반영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7년 7월 1일 메이첸에게 편지를 보내 박형룡은 표준성경주석 편집위원회를 열어 “성경주석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습득하고 돌아온” 박윤선으로 하여금 편집의 일을 돕도록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렸다.118)


117)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April, 14, 1936;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153-154에서 재인용.
118) Dr. H. N. Park’s Letter to Dr. Machen, July, 1, 1936;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153에서 재인용.


박형룡에게 박윤선은 매우 준비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매우 시의적절한 협력자였다. 그것은 처음부터 표준성경주석 편집위원회가 “웨스트민스터 敎理的 標準을 忠實히 信奉하는 칼빈주의 保守的 信仰의 所有者”119)들을 집필자로 선정했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박형룡 밑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기 때문에 바른 신학을 지키려는 박형룡의 이상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후에 한국교회 장로교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두 신학자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19) 박형룡 편, 標準聖經註釋(경성: 총회종교교육부, 1937), 19.


표준성경주석 간행의 취지와 주석 편집위원회와 집필자들의 신학적 성향을 잘 알고 있던 마펫은 표준성경주석 서문에서 “本 註釋의 見地는 우리가 普通으로 ‘保守的’이라고 稱하는 그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집필자들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며, “原著者들의 쓴 대로 모든 部分이 다 참되”다고 믿었다. 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마펫이 주석 집필자들이 보수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보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박형룡의 말을 빌린다면 “칼빈주의 보수적 신앙”을 의미했다. 그것은 서문에 나타난 마펫의 글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本 註釋의 執筆者들은 聖經 全部가 萬書之中에 最大書요 神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聖經에 敎示된 眞理의 體系가 長老敎會의 @웨스트민스터 信仰告白과 要理問答에 善히 槪括되여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敎理的 標準은 朝鮮長老敎會의 信條를 構成하는 바, 本 註釋의 執筆者들이 이 信條를 믿음은 이것이 神의 말씀에 敎訓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執筆者들은 聖經이 이 信條의 諸箇條를 完全히 支持한다고 믿는다. 聖經에는 어떤 一部分을 單獨으로 取出하여 考察할 때에 이 敎理體系의 어떤 部分들에 矛盾하는 드시 보이는 句節들이 있으나 그런 句節들은 恒常 解釋에 依하여 聖經의 다른 敎訓과 調和되며 우리 웨스트민스터 敎理標準을 支援하는 것임이 發見된다.120)


120) bid., 2.


확실히 표준성경주석이 지향하는 것은 칼빈주의 정통신앙의 계승이었다. 이 점에서 표준성경주석의 집필자들은 통일성이 있었다. 이것은 박형룡이 가장 원하는 바였다.


3) 정통주의 신학의 대부: 한국의 메이첸


박형룡의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한 가지 꼭 언급하고 지나갈 것이 있다. 그것은 박형룡 박사가 전형적인 근본주의자였는가 하는 질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박형룡을 근본주의 범주 속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1927년 귀국 후 현대주의 신앙에 단호히 맞선 그의 신학활동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박형룡은 처음부터 “근본주의 대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한창 몰아치던 1938년 박형룡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정경옥은 기독신보에서 박형룡 박사를 가리켜 “성서의 문자적 영감과 석의를 고집”하는 “조선신학의 보수주의를 지키고 있는 분”, “‘직업적 칼빈주의자’란 말을 들으리 만치 소위 미국 근본주의의 대언자”121)라고 평한 적이 있다. 민경배 교수 역시 “박형룡 박사는 유명한 미국의 선교사 포스틱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보수주의 진영의 영수인 메이첸 박사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던 전형적인 근본주의자”122)라고 평가한다. 유동식 교수도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의 신학적 전통을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과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과 문화적 자유주의의 신학” 세 가지로 대별한 뒤 박형룡 박사를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의 대변자, “무너지지 않는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의 보루”라고 평했다.123) 우리는 여기서 민경배 교수나 유동식 교수 모두 박형룡 박사를 근본주의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21) 기독신문, 제 20호, 1938.
122)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412.
123) 柳東植, 韓國神學의 鑛脈(서울: 展望社, 1982), 29.


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진보주의 쪽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1979년 신학사상 주관으로 박형룡 박사 신학세미나가 열렸을 때 합동신학교의 신복윤 교수 역시 박형룡 박사를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자”라고 평가했다.124) 다만 그의 평가가 민경배 교수나 유동식 교수의 평가와 다른 것은 박형룡 박사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근본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했던 칼빈주의 근본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박형룡 박사의 아들인 박아론 교수는 1979년에 신학세미나가 열렸을 때 한마디로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 즉 지로적(指路的) 신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125). 그의 신학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를 한국의 메이첸, 근본주의자로 평가한다.


124) 신복윤, “박형룡 신학의 한국보수신학사적 의의”, 신학사상(1979년 여름), 237.
125) 박아론, “박형룡의 신학사상”, 신학사상(1979년 여름), 208-220.


박형룡 박사의 사상 속에는 메이첸의 이상, 즉 기독교와 자유주의에 나타난 것과 같은 정통신앙의 변호와 전수에 대한 열망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126) 그의 신학과 사상을 근본주의, 반지성주의, 반문화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니다. 우리가 그레샴 메이첸을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로 매도할 수 없는 것처럼 박형룡 박사를 무조건 근본주의자로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127) 그는 칼빈과 루터와 츠빙글리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프린스톤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적인 기독교를 이 시대에 구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그가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하던 1923년부터 1926년 4년 동안 그 논쟁의 핵인 프린스톤신학교와 남침례교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확신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경과 역사적인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한국교회가 처음 전해 받은 그 정(正)신앙을 그대로 계승하기를 원했다. 성경은 영감된 오류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프린스톤의 전통이 박형룡의 신학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점에서 구프린스톤의 정통주의를 그대로 가르쳤던 숭실전문학교의 함일돈 선교사와 정확히 일치했다.128)


126) 朴亨龍, “敬虔한 熱心과 其 報償,” 겨자씨 67호(1937년 3월), 35-39. 박형룡은 메이첸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았고, 귀국 후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며 메이첸과 두터운 교류를 나누었으며, 메이첸의 “不意의 早逝” 소식을 듣고 “神의 榮光을 爲하여 敬虔한 熱心히 그렇게 豊盛하던 師長”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27) 비록 수많은 교회사가들과 신학자들이 박형룡 박사를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로 분류하고, 박형룡 박사 자신도 근본주의를 긍정적으로 옹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를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옹호한 것은 근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근본주의 운동이 견지하는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128) 咸日頓, “敎會內 非基督敎的 思潮에 對한 牧師의 態度,” 神學報 春期號(平壤: 朝鮮耶蘇敎長老會神學校學友會, 1925), 15.


메이첸이 자신을 정통주의로 불려 주기를 원하였듯이 박형룡 박사 역시 정통주의를 즐겨 사용하였고 스스로를 정통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녀작 近代神學難題選評에서 “정통”에 대해 긴 설명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미국의 구학파(Old School)의 거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정되지 않는 청교도주의, 칼빈주의, 구칼빈주의(Old Calvinism)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129)


129) 개혁주의라는 말이 총신의 신학적 정체성이나 장로교의 신학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현상이다. 특히 박윤선 목사가 총신에 오면서 총신에서는 총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표현할 때 정통주의라는 용어보다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박형룡의 영향으로 1960년 이전까지 총신이나 합동교단에서는 개혁주의라는 말보다는 칼빈주의 혹은 정통주의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어떤 새로운 신학을 설정하거나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신학이 따로 있고 미국의 신학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구프린스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신학자의 소명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키는 인물로 이해했다. 따라서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한글이라는 매체와 한국인의 심성의 여과를 통해 표현되기는 했지만, 많은 면에서 프린스톤의 신학사상과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일치하고 있었다.130) 워필드나 메이첸이 강력하게 변호했던 성경의 영감, 특별히 완전 유기적 축자 영감은 박형룡 신학의 중심이었다. 성경관에서의 이탈이 신학적 현대주의로 흐르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박형룡은 성경의 무오성을 변호하는 일에 전투적일 만큼 강했던 것이다.131)


130) 朴容奎, 韓國長老敎思想史(서울: 총신대 출판부, 1992), 196-241.
131) Ibid., 229-230.


이런 박형룡의 이상은 놀라우리만큼 설득력이 있었고 또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박형룡 박사는 1930년대 자신이 받은 미국의 신학교육과 교회 환경 속에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피부로 체득하고 배웠다. 1930년대 현대주의의 도전 앞에 기우뚱할 뻔했던 한국교회에 박형룡 박사가 등장했고, 곧 그는 보수주의의 대변자로 부상했다. 초기 선교사들, 길선주와 김익두로 이어지는 보수주의 정통신앙을 계승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정통신앙을 한국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복윤 교수의 말대로 박형룡 박사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에 의해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132) 그런 면에서 박형룡 박사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하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132) 신복윤, “박형룡 박사의 한국보수신학사적 의의”, 신학사상 25(1979년 여름), 27-41.


박형룡 박사가 1920년대 프린스톤의 메이첸 문하에서 교육받은 후 30년 동안 미국 기독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맥킨타이어에게서 전형적으로 찾을 수 있듯이 1930년대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폐쇄주의와 분리주의로 흐른 나머지 주변 사회와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고사하고 프린스톤의 정통주의와도 다른, 한 신학을 이데올로기화하는 분리주의적이고 반지성적인 신학을 태동시키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1930년대 미국 기독교를 가지고 한국교회를 이해한 나머지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형룡 박사를 맥킨타이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현대주의 도전 앞에 기독교 2천 년의 역사가 소중하게 견지해 오던 정통신학을 변호하는 것을 자신의 소중한 소명으로 여겼지만 결코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133) 감리교 갈홍기 교수와의 오랜 끈끈한 유대관계가 대변하듯 그는 신앙이 같은 사람들과 교단을 초월해 협력하는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한 신학자였다.


133) 박용규 편,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331-403. 박형룡 박사가 변호한 것은 근본주의운동 자체라기보다는 근본주의자들이 견지한 신앙과 신학이었다.


이종성 교수는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조직신학이 변증학적으로 이해되었다고 비판한다.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조직신학의 한 부분인 변증학이 조직신학의 왕좌에 앉게 되고 그 결과 변증학적인 접근방법이 한국의 조직신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134)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는 역시 바르트주의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것은 정통 신학이 그 자체가 변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이종성 교수는 박형룡 박사가 칼빈의 작품을 통해 칼빈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를 통해 칼빈을 연구하고 이해하였다고 혹평했다. 칼빈의 원작품들을 분석하고 해석해 칼빈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프린스톤의 정통주의 속에서 해석해 놓은 칼빈주의를 통해 칼빈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톤 칼빈주의가 곧 칼빈의 사상이라는 잘못된 전제 속에서 신학을 전개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적인 평가는 칼빈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이 바르트라는 이종성의 잘못된 선입관 속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칼빈의 신학을 그의 제자 베자가 사변신학으로 변질시켰고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그 전통을 계승했다는 바르트의 후예자들이 갖고 있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135) 하지만 칼빈의 신학을 가장 잘 계승한 이들이 청교도들이었고, 그 청교도 신학과 신앙을 가장 잘 함축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었고, 이 신앙고백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그대로 받고 그것을 계승한 이들이 미국의 장로교회였다.136) 그리고 그 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가 프린스톤신학교였다. 최근 호페커(W. Andrew Hoffecker)가 존스 홉킨스 대학 박사학위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프린스톤에는 개혁주의적 경건이 소중히 간직되어 왔다.137)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어느 학자들보다도 칼빈을 정확히 이해한 자들이었다. 박형룡 박사도 칼빈주의를 통해 칼빈을 이해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칼빈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미국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 of America)이라는 책에서 찰스 핫지에 대해 평했던 것과 똑같은 평가가 박형룡 박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데이빗 웰스는 서두에서 19세기 신학은 프린스톤 신학이었고, 프린스톤 신학은 곧 찰스 핫지의 신학이었다고 예찬하면서도 그러나 찰스 핫지는 역사가는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138) 그것은 핫지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변호하려 한 나머지 그 주변의 문화와 그 문화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읽는 데는 실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똑같은 평이 박형룡 박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139)


134) 이종성, “박형룡과 한국장로교회”, 신학사상 25(1979년 6월), 47-70; 이종성, “신학적 역사철학을 기대하며”, 기독교사상 23(1980. 1), 22.
135) 이와 같은 주장을 이종성이 처음 제기한 것은 아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신학자들도 이와 같은 주장을 제기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Jack Rogers & Donald McKim, The Authority and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An Historical Approach(New York: Harper & Row, 1979)이다.
136) David Wells, ed., Reformed Theology in America(Grand Rapids: Eerdmans, 1985), 3-5, 15-86;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Grand Rapids: Baker, 1983), 11-48.
137) W. Andrew Hoffecker, Piety and the Princetonian Theologians: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 and Benjamin Warfield(Grand Rapids: Baker, 1981).
138) David Wells, ed.,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36, 55.
139) 한국교회는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들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본의 아니게 보수주의자들이 가질 수 있는 약점들을 극복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의 객관성에 대한 강조가 말씀의 순종과 실천에 대한 강조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말씀에 대한 강조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맴돈 나머지 실존적인 적용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 바른 신앙을 계승해야 하지만 문화와 사회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폐쇄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신학적 보수주의가 신학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간하배 교수의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에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박형룡 박사의 위치를 평가절하시키지는 않는다. 찰스 핫지처럼 박형룡 박사 역시 한 시대를 거쳐 가면서 자신의 직무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그리고 그 직무를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였다. 우리는 그를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존 웨슬리가 이성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성을 초월할 수 없었던 이성 시대의 한 산물이었듯이, 1920년대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시대,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의 시대, 1940년대와 1950년대 분열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 박형룡 박사가 그런 신학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어떤 인물이 어떤 사상적 부류에 속하는지를 평가 할 때 적어도 참고해야 할 세 가지 있다. 평소 그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범주화시키고 있었는지 하는 것과 그가 남긴 글과 그가 보여준 행동이 그랬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평가했는지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정경옥은 자유주의로 김재준은 진보주의로 박형룡은 정통주의로 범주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볼 때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여겨진다.


정경옥은 자신을 현대주의, 자유주의로 스스로 인식하고 경험과 도덕과 신비주의 종교체험을 중시하는 리츌과 슐라이마허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것은 그가 유학하던 시절 그의 지도교수의 성향 그가 들은 과목들 그리고 귀국 후 그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종교적 경험을 중시했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정경옥도 그런 방향에서 자신의 신학을 집대성했다. 그가 감리교 안에 신비주의 부흥운동으로 비판을 받고 있던 이용도에 대해 전혀 비판적 언급이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신학자였고 그가 남긴 현대 신학자들에 대한 글은 그가 현대신학과 현대신학자들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재준은 그리스도 중심의 바르트 신정통주의에 깊숙한 영향을 받았고, 그 신학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주창해왔다. 청산학원 시절 바르트의 초월론에 대한 논문을 쓰고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그가 남긴 작품들과 글들 속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바르트 신정통주의가 얼마나 깊이 그의 신학을 구형하고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을 강조하지 않는 점, 성경의 권위 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강조하는 점, 전형적인 실존주의적 해석은 그가 남긴 글들 속에서 그대로 녹아 있다.


박형룡은 전형적인 정통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칼빈주의자, 개혁주의 신학자였지만 개혁주의나 칼빈주의라는 말보다는 정통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그의 명저로 평가 받고 있는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에서도 제일 먼저 정통주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이어 바르트, 슐라이어머어, 리츌을 비롯한 현대주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메이첸이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기독교를 변증했던 것처럼 그는 자의식을 가지고 이 일에 앞장섰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연구하다보면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모두 시대적 산물이라는 사실, 매우 전투적이라는 사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종의 사명을 어느 누구보다 확고하게 인식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 따라서 의식적이던 아니던 남다른 삶, 신앙, 신학의 여정을 밟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를 마무리하면서 이들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들의 초기 신앙적 입문에 대한 배경이다. 정경옥은 1920년부터 23년까지 YMCA 영어학교에서 1923년부터 1927년까지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며 전형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감리교 신앙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1920년 김익두 부흥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 장로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엄격하고 체계적인 양육과정을 거치지는 못했다. YMCA 영어학교에서 정경옥과 송창근을 만나 이들과 교류하며 직간접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장로교보다 감리교의 영향이 컸으며 그런 면에서 엄격한 신앙과 신학교육을 강조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와 달랐던 피어선 신학교 출신이었던 송창근과의 교류는 김재준에게 그가 훗날 주창하는 신앙함의 자유, 신학함의 자유를 갖도록 직간접의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반면 박형룡은 김익두를 통해 은혜를 받았고, 양전백과 선교사들의 영향이 매우 강했던 선천신성학교에 편입하여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았고 평양에 와서는 평양산정현교회 강규찬의 지도를 받으며 평양숭실대학을 다녔다. 이들 세 사람은 신앙초기 입문 과정에서도 신앙의 색깔을 달리했다.


둘째, 이들이 유학했던 그 시절의 미국 신학계의 사상적 흐름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가 처한 시대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정경옥, 김재준, 박형룡도 예외는 아니다. 정경옥, 김재준, 박형룡은 거의 동시대 미국에서 유학했다. 이들이 미국에서 유학했던 1923년부터 1932년까지는 미국에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조지 말스던이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시기라고 명명했던 1870년부터 1930년까지 그 중에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5대 근본진리를 재천명하고 1924년 어번 선언 사건이 있었으며,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진 스콥스 재판이 진행되었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교과과정을 재편하고 신학적 변천을 맞으면서 1929년 메이첸을 비롯한 6명의 교수들이 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기간이었다.


셋째, 이들이 유학했던 학교와 스승들의 영향이다. 첫 유학은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유학한 학교와 그 학교의 스승들의 영향은 그의 신학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귀국 후 그런 방향에서 자신의 신학을 개진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점에서 이들 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정경옥에게는 게렛신학교가, 김재준에게는 청산학원이, 박형룡에게는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 진보주의, 정통주의 신학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경옥은 자의식을 가진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로 경험과 도덕을 강조하는 프랭클린 롤 교수 문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스승의 현대주의와 자유주의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박형룡은 그 논쟁의 가장 중심이었던 북장로교 그것도 그 교단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메이첸에게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김재준은 라디칼한 청산학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보수적인 프린스턴에서 메이첸 과목을 들으면서 양극단을 경험했다. 김재준이 진보주의에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찾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경옥, 김재준, 박형룡은 그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싫던 좋던 한국교회 안에 자유주의, 진보주의, 정통주의 대변자로 그 같은 신앙과 신학을 한국교회에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30년대 형성된 이런 다양한 신학 흐름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 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박용규(朴容奎) 교수


학력 및 경력
[1982] 성균관대학교 졸업(B.A.)
[1985]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Div.)
[1986] Western Evangelical Seminary(M.A.)
[1991]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 M., Ph.D.)
[1999-2000]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객원교수(Visiting Scholar)
[2006-2007]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 객원교수(Visiting Fellow)
[1991-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1997-현재]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


저술
韓國長老敎思想史(서울: 총신대학교, 1992)
초대교회사(서울: 총신대학교, 1994)
근대교회사(서울: 총신대학교, 1995)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서울: 총신대학교, 1996)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서울: 두란노, 1998)
한국교회를 깨운다(서울: 생명의말씀사, 1998)
평양대부흥운동(서울: 생명의말씀사, 2000)
한국기독교회사 1권, 2권(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평양대부흥이야기(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평양산정현교회(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
부흥의 현장을 가다(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제주기독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서울: 한국기독교회사, 2011)


공저
총신100년사(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3)
총회100년사(서울: 총회출판부, 2006)
선교책무(서울: 생명의말씀사, 2011)


번역
Hatch, Noll, Woodbridge, Gospel in America, 기독교와 미국(서울: 총신대 출판부, 1992)
David Wells,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프린스톤 신학(서울: 엠마오, 1993)
David Wells, 웨스트민스터 신학과 화란개혁주의(서울: 엠마오, 1993)
David Wells, 남부개혁주의 전통과 신정통주의(서울: 엠마오, 1993)
Woodbridge, ed. Great Leaders of the Christian Church(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3)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서울: 생명의말씀사, 1998)
Peter Toon, 개신교 관점에서 본 카톨릭 교회(서울: 도서출판 나단, 1997) 그 외 다수.


공역
C. A. Clark, Korean Church and Nevius Method(서울: 기독교서회, 1994)
Woodbridge, ed. Renewing Your Mind in the Secular World(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