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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26회] 장공 김재준과 에마뉘엘 레비나스 : 타자 인식 문제를 중심으로 / 김성호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9 18:45
조회
1493

[26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191(주일) 오후 5~7

장공 김재준과 에마뉘엘 레비나스 : 타자 인식 문제를 중심으로

김성호 박사
(배동교회 / 기독교윤리학)

[I]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장공 김재준 목사(1901. 9. 26-1987. 1. 27)의 신앙 및 신학사상과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5. 12. 30-1995. 12. 25)의 사상을 비교하고자 한다. 만우(晩雨) 송창근 목사(1898. 10. 5-1950. 8. ?)가 20대를 살던 김재준 목사에게 장공(長空)이라는 호(號)를 주었고 김재준은 그것을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겼다.1) 만우는 장공의 호를 짓고 6․25동란 이후 피난을 거부하다가 목사 40여명과 함께 납북됐다.2) 남은 자로서 장공은 전 생애 동안 주어진 호처럼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살고 죽었다.

1) “자연을 대변한다”,『김재준 전집』5, 245. 2) “잊을 수 없는 晩雨 ”,『김재준 전집』11, 63.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20세기의 격동기를 살았다. 레비나스는 러시아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내와 딸을 제외하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레비나스는 이런 고통 속에서 타자의 윤리를 차분히 만들어갔다.

필자는 장공의 신앙 및 신학사상과 레비나스의 사상을 비교할 부분을 몇 가지 범주로 간추렸다. 첫째, 필자는 타자로서의 성서 텍스트와 윤리에 대한 장공과 레비나스의 인식을 고찰할 것이다. 둘째, 필자는 타자로서의 예언자와 예언에 대한 장공과 레비나스의 인식을 고찰할 것이다. 더불어 사형제와 혁명에 대한 양자의 의견을 들어볼 것이다. 셋째, 필자는 장공의 타자로서의 예수 이미지를 고찰하고 그 이미지를 레비나스의 신-인[성육신] 사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필자는 타자로서의 타종교와 종교간 에큐메니칼 정신에 대한 장공과 레비나스의 인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II] 타자로서의 성서 텍스트에 대한 인식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디모데후서 3장 16절)

장공은 정통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모두 버리면서 모두 살리는 건설적인 참된 정통신학, 또는 옛것을 살리면서 새것을 포섭하는 생명적인 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나는 이 두 神學을 揚棄하면서 둘을 다 살리는 建設的인 참된「正統」神學이 樹立되기를 祈願하여 스스로 勞力해 왔습니다. 卽 옛것을 살리면서 새것을 包攝하는 生命的인 神學이 誕生하기를 渴望한 것이었습니다.”3) 장공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4)하기 위해 “소위 정통주의자라는 사람들의 조개껍데기를 부수기 위해서 망치”5)를 든다. 정통주의자들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근거해 성서에는 현재의 과학과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틀린 내용이 절대로 없다는 성서 절대무오설을 주장했다. 그들은 성서 절대무오설을 보장하기 위해 소위 축자영감설을 보험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장공은 성서 절대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제 욕심대로 지어낸 학설”6), “경건한 기만”7)이라고 일축했다. 장공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된 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영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8)하는지 물으면서 겸손을 요구한다. 장공에 따르면 통속적인 영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이 최대한으로 활동하고 사람은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영감은 더 커진다고 믿는”9)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비판하기를 이것이 “온전한 영감”이라면 “그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주 기계처럼 되어서 자기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접신하였다는 무당같이 되는 것”10)이다. 이런 민속적 이해 곧 최대와 자기의식조차 없는 최소의 이분법에서 생기는 축자영감설은 인간을 객체화하고 사물화한다. 장공은 축자영감설의 그릇된 기원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영감의 성질”과 "성서의 사실"을 기준으로 결정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성서의 사실은 무엇인가? 장공은 성서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밝힌다.

(1)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때에는 그 받을 사람에게 영감으로 일하시되 결코 그의 인격을 억압하거나 무의식상태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더욱 앙양하고 순결케하여 어디까지나 자기로서의 인격적 반응이 철저하게 하시는 것이다. (2) 성경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기존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며 그것을 비판 정리 취사하는 저술가로서의 정칙을 무시하지 않았다.
(3) 하나님이 사람에게「말씀」을 주실 때 그는 그의「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다닥 집어 넣어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말씀」을 축음기판처럼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4)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중요 내용은 두 가지다. 즉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가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그것이다.
(5)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서 역사나 과학이나 년대표 등에 절대 무오를 기하지 않으셨다.11)

3) “大戰前後 神學思想의 變遷”,『김재준 전집』1, 375-376. 4)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6.
5) “믿음이 없는 세대여”,『김재준 전집』2, 359.
6) “大戰前後 神學思想의 變遷”,『김재준 전집』1, 388.
7)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6.
8)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17.
9)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17.
10)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17.
11)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6-29.

우리는 정통주의자들의 생각을 논박하기 위해 장공의 하나님 이해를 잠깐 살펴야 한다. 장공은 하나님을 절대타자로 보고 있다."「절대타자」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의 추리에서 발견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자기계시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12) 장공은 하나님을 인간의 추리를 초월하고 자기계시를 갖는 자율의 분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객체화, 주제화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주격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장공은 하나님의 절대 주격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님 편에서의 인간에 대한 사격화(斜格化)를 피한다. 그러니까 장공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본다. 여기서 최대와 자기의식조차 없는 최소라는 이분법은 사라진다. 장공은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하는 얼핏 보면 믿음이 큰 것 같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간편하고 게으른 이분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최대와 자기의식조차 없는 최소는 모두 서로에게 서로를 환원시켜 흡수, 사멸시키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는 것은 각자의 유아론적이고 폭력적이며 살인적인 제국의 팽창이다. 이와 다르게 장공은 상호 사물화, 객관화, 주제화를 거부한다.

12) “내가 믿는 하느님”,『김재준 전집』18, 185.

하느님은 절대「주격」이십니다.…인간과 하느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고 주체와 주체의 관계니만큼,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사격화하여 단순한 연구 재료로 쓸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13)

13) “지식인의 미망”,『김재준 전집』1, 250.

신은 절대 주격자입니다.…인간도 절대 주격적 존재자입니다. 물건과 같이 객관화할 수가 없습니다.14)

14) “신학의 거소”,『김재준 전집』18, 277.

장공은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과 믿음의 이름으로, 사물화하지 않았다. 정통주의자들과 장공은 바로 여기서 갈라진다. 정통주의자들은,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많은 根本的 眞理를 保守해 온 功績이 크다”15)해도, 비록 “성경을 사랑하는 그의 고충을 상상할 수 있으나”16)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사물화하고 기계화했다. 하나님을 빙자해 인간을 사물화하는 자는 하나님 이하의 권력에게 인간을 양도할 것이다. 역사와 문화를 멸시하는 정통주의자들과 다르게 장공에 따르면 자신만의 인격과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요, 개성과 특이성을 지니고 있는 자이므로 그 자신의 지식과 특성과 그 처해 있는 환경과 시대색 등이 그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말씀」에 반영”17)된다. 따라서 “하나님의「말씀」자체는 절대 무오”하지만 그 말씀을 “표현하는 양식과 그 표현에 사용된 소재 등은 사람과 시대를 따라 다양성을”18) 가지는 것이다. 성경기자들은 시대와 언어에 제한받지만 그 제한된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19)을 해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과 개성”20)을 통해 말씀을 선포한 성경기자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장공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며” “죄인을 구속하려는 일관한 목적”21)이다. 다시 말해 성경기자들은 “성경의 문자자체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정신과 교훈의 소개에 치중했던”22) 것이다. 장공에 따르면 그 정신과 교훈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교훈이다. 장공에게서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 무오한 확실한 법칙」”이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의 신구약 성경”23)이다. 따라서 구약조차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재비판돼야 하는 것이다.24) 이로써 우리는 장공이 “문자나 의식으로의 양식에 사로잡힌 율법이 아니라, 영적 인격적인 복음의 자유로서의 하나님 말씀”25)이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중심으로 한 구원과 영생의 목적을 가지고 성서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 “大戰前後 神學思想의 變遷”,『김재준 전집』1, 382. 16)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5.
17)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0.
18)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0.
19)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0.
20)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0.
21)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0.
22)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2.
23)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8.
24)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8.
25)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8.

그러나「聖書無誤說」을 나는 다른 角度에서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주신 것은 科學이나 歷史를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구원」얻는 길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요한 五장 三十절에「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하였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하려는 것인데 영생을 주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나」즉 그리스도라는 살아계신 人格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方便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事實일진대 성경은 그 目的을 달성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얻는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에는「성경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目的한대로 다 이루어 주는 데 무엇이 틀렸다 할 것입니까?…성경에는 現代天文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이 틀렸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目的한 바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신 구약 성경은「신앙과 본문에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데 더 견실한 태도인줄 믿는 까닭입니다.26)

26) “大戰前後 神學思想의 變遷”,『김재준 전집』1, 388.

이렇게 성경을 성경의 설 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인 면에서 성서무오설을 수립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나 대담하게 전도할 수 있다.27)

27)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김재준 전집』2, 29.

그런데 장공은 그리스도의 정신이라는 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정”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무한대의 아가페다. “그리스도의 心情! 그 無限大의「아가페」”28) 우리는 “「인격과 인격의 세계」” 곧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만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볼 줄 아는”29) 것이다. 장공은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30)을 가진 분으로 이해한다. 장공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율법 조문과 쓰여진 계시의 문자와 정통 교리를 다시 읽고 재비판하고 재인식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율법의 최초의 본의를 지키고 살린 점에서 보수주의자다.31) 장공은 우리가 이런 동시성을 가진다면 문자 이상의 근원적인 길이 발생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장공은 정통주의[근본주의, 보수주의]도 자유주의[현대주의, 신신학]도 아닌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32)자였다.

28) “생활의 복음 외 17편”,『김재준 전집』1, 204. 29) “생활의 복음 외 17편”,『김재준 전집』1, 216.
30) “생활의 복음 외 17편”,『김재준 전집』1, 203.
31) “생활의 복음 외 17편”,『김재준 전집』1, 203-204.
32) “미국 3년”,『김재준 전집』3, 119.

(1) 하나님의 心情(하-트)이 육신으로 나타난 이가 그리스도시다. 그는 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율법을 재인식하였다. 그는 이 심정으로 그 굳은 율법과 儀禮를 애기의 보드라운 몸으로 化하시었다. 그의 심정이 숨어든 때 굳은 껍질 마른 뼈 같은 율법 條文은 심정의 율법으로 再生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自由主義者였다. (2) 그러나 이 율법의 儀文이 나타내고저 하면서도 다 나타내지 못한 그 儀文以前의 根源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遡及하여 그 最初의 本意를 살린 점에 있어서 그는 가장 가장 철저한 保守主義者였다.
(3) 지금 우리도 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쓰여진 啓示의 文字를 다시 읽고 당하는 온갖 事爲를 再批判 再認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되고 현재를 領導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크리스챤은 언제나 進步主義요 自由主義다. 그러나 쓰여지기 전 그리스도의 本心情 聖靈의 本意에 遡及하는 의미에서 크리스챤은 가장 철저한 保守主義者이다.
(4) 이 그리스도의 心情으로 正統 敎理를 보고 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現代主義者를 보자. 그리하면 정신은 우리에게 文字 以上의 그 本路를 示竣하실 것이다.33)

33) “미국 3년”,『김재준 전집』3, 119.

문자 이상의 근원적인 길이 열리기 위해선 장공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존재론적인 “고정적인 정신” “자기 경화의 고질”34),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자신과의 평화”,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는 자아의 통일성[일치]”35)을 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록된 계시, 권위화된 성경,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에 자족하고 “종이 法王”36)을 신성시하는 “絶對 固定主義”37) 곧 우상숭배로 떨어진다. 소위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텍스트 안에 유일회적으로 고정시켰다. 비록 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 세운 공로가 있다 해도,38) 그들은 우리의 의식과 지식 너머에서 또 다른 의미 생성을 향해 우리를 초대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그 결과 의미가 무한히 울려퍼지는 생성의 텍스트를 존재의 텍스트로 고정시켰다. 다시 말해 정통주의자들은 동일자[나]에 대한 타자[텍스트]의 외부성[외재성, 바깥]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통주의자들은 내재성의 감옥에 갇혀 외부로의 초월을 향한 욕망을 정죄했다. 한국교회의 성서에 대한 보수적 반지성주의는 하나님의 영감을 빌미로 성서나 성서해석을 절대화함으로써 의미의 의미인 “절대적으로 다른 것을 향한 형이상학적 욕망[Le désir métaphysique de l'absolument autre]”39)을 제거했다. 욕망은 타자[텍스트]로 인한 동일자의 불안인데, 이 불안은 결핍이 아니라 탐구, 물음이다.40) 탐구와 물음이 차단된 결과 남은 것은 이론․실천적으로 자기로 귀환하는 게으름과 권태로움, 권위주의와 폭력, 사회․역사․자연에 대한 무관심이다. 정통주의자들이 자기로부터의 탈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사실 현대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다르게 장공은 구도자적 심정을 가지고 “이 이상한 책, 언제나 새로운 책, 가리우면서도 드러난 책”41)을 마주했다. 장공은 우선적으로 성서에 대해 변증법적 분열과 종합 이전의 타자성의 태도를 가지고 성서를 다르게 노래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서의 젊음은 우리가 성서의 타자성의 상처 아래 다르게 노래하는 데 있다. 이로 인한 성서를 젊어지게 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이웃, 사회, 역사, 자연, 세계, 우주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바로 장공이 그랬다. 아무튼 열린 태도를 가진 장공은 특히 정통주의자들의 폐쇄된 태도-우리는 이 태도의 원인에 대해 고통해야 한다-로 인해 핍박을 받았다. 정통주의자들의 폐쇄된 태도와 다르게 장공은 당시에는 영감의 사람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영감은 말해진 것과 들려진 것 너머에서 우리의 말함과 들음과 깨어난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 또다른 의미다.

34) “믿음이 없는 세대여”,『김재준 전집』2, 359. 35) Emmanuel Levinas, De l'évasion. Ed. Jacques Rolland. Montpellier: Fata Morgana, 1982 [1935-36], 67.
36) “생활의 복음 외 17편”,『김재준 전집』1, 216.
37) “傳統과 進步”,『김재준 전집』3, 160.
38) 장공이 추측하고 있듯이, 우리는 성서의 권위를 구교와 신교와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신교는 구교의 권위를 능가하는 객관적 권위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신교에서는 구교와의 쟁패전에서 구교의 권위에 못지 않은, 자기들이 의존할 객관적 권위자를 소유하기 위해 성서의 권위를 객관적, 문학적으로 확립하려 한 것이었을 것이다.”(“正統과 異端”,『김재준 전집』11, 78.)
39)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1, 213.
40) 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aris: Vrin, 1982, 130.
41) “不滅의 憧憬”,『김재준 전집』1, 122.

영감: 말하고-싶음의 직접적 의미 아래를 관통하는 또 다른 의미, 들려진 것 너머에서 듣는 들음에 신호를 보내는 또다른 의미, 극단적 의식 곧 깨어난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 또다른 의미.42)

42)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137.

따라서 영감은 나의 말하고 싶음, 들음, 지향적 의식 이전에 나에게 말 걸어오는 의미다. 타자[텍스트]에 대한 책임은 타자[텍스트]에 대한 나의 관념을 넘어 타자[텍스트]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노출은 상처다. 영감은 타자가 나에게 주는 상처 곧 윤리와 연관돼 있다. 정통주의자들처럼 “聖經冊과 啓示와의 全然 同一視하”43)면서 주체가 영감받지 않으려하는 것은 다시 말해 상처받지 않으려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의 삶[psychisme] 그 자체에서 자기가 포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포함하면서 무한에 의해 영감받”44)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소위 케노시스의 부재다. 무한에 의해 영감받아 생긴 상처의 변화는 영혼의 영, 영혼의 삶, 타자가 동일자에게 요구하는 것, 영감, 동일자 안에서 이뤄지는 나의 핵분열, 소외 없는 변화다.

43) “大戰前後 神學思潮의 變遷”,『김재준 전집』1, 375. 44)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33.

직접 타자를 기다릴 시간을 결코 남겨두지 않는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상처로 인한 지배력[영향력]. 주체는 영혼의 이 변화를 통해 생명을 준다. 그 변화는 영혼의 영 그 자체다. 영혼의 삶[Le psychisme]은 동일자와 타자의 논리를 넘어, 동일자와 타자의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넘어 타자가 동일자에게 요구하는 것 또는 영감[l'inspiration]을 뜻한다. 그것은 동일자 안에서 이뤄지는 자아의 실질적 중심[핵] 제거[Dénucléation du noyau], 응답으로의 이 소환에 의해 어떤 피난처도, 어떤 탈주[la dérobade]의 기회도 남기지 않는 이 소환에 의해 주체의 “내재성”의 “신비스러운” 중심[핵] 분열이고, 그처럼 자아임에도 불구하고[malgré le moi] 또는 더 정확하게 자기임에도 불구하고[malgré moi], 무-의미[non-sens]와 완전히 반대로 소외나 선택받음 없는 변화다.45)

45)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21-222.

성서가 영감받아 씌어졌다는 특권적 지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성서 텍스트를 우상숭배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가 영감받아 씌어졌기 때문에 책 중의 책인 성서가 초월의 행위인 주석과 주석의 주석을 허용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주석은 텍스트의 삶”이고 “어떤 텍스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텍스트를 주석하기 때문”46)이다. 따라서 성서가 영감받아 씌어졌기 때문에 주석된 진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담고 있다.

46)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163.

우리가 이제까지의 작업 속에서 금방 봤던 읽기의 과정들은 우선 주석된 진술은 그것이 발생하는 말하고 싶음[le vouloir-dire]을 초과한다는 것, 그것의 말할-수 있음[son pouvoir-dire]이 그것의 말하고-싶음을 초과한다는 것, 그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담고 있다는 것, 어쩌면 끝없는 의미의 넘침이 그 문장의 구문론적 구조들 속에, 그 낱말-군(群)들과 어휘들, 음소들과 글자들 속에, 잠재적으로 늘 의미하는 이 모든 말함의 물질성[matérialité du dire] 속에 아직도 감금돼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석은 이 기호들에서 특징들 아래 은근히 타오르거나 글자들의 이 모든 문헌 속에 감기는 매혹적 의미를 해방시키게 될 것이다.47)

47)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135.

끝없는 주석을 허용하는 영감은 유혹이고 이 유혹이 해석을 유혹한다. 해석으로 유혹받은 해석자들의 복수성 그 자체는 “의미의 의미[la signification du sens]의 불가피한 순간”이고 “영감받은 말의 운명”48)이다. 따라서 “영감받은 말의 취소된 것의 무한한 풍요는 말해질 수 있거나 또는 영감받은 말의 말함의 의미는 쇄신될 수 있다.”49) 또한 주석된 진술 또는 진술의 구조에 내재하는 취소된 것은 텍스트의 무게로 소멸되지 않고 글자들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50)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된 말이 남길 인상들과 주관적 반성들을 주석과 동일화하지 않고” “성서들에 대해 쉽게 만족하지 않는 읽기”51)가 될 것이다. 우리는 정통주의자들에 대한 장공의 비판과 장공이 받은 핍박을 이런 영감에 의한 지속적 읽기의 관점에서(본문 비평이든 역사 비평이든 그리고 미래의 다른 무슨 비평이든 간에)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이 지속적 읽기는 멈출 수 없다. “흐르지 않는 물보다 더 나쁜 물은 없습니다.”52) 우리는 장공의 선구자적 영감과 그 후학들의 쇄신을 넘어서야 한다. 복수의 해석자들은 그저 의미의 복수성을 가져오는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치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을 때 그 해석들은 스피노자주의의 진리를 배제하지 않고 스피노자주의를 증언하”53)듯 성경의 진리를 배제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기의 학자들이 갖는 다수의 입장들이 유일한 독법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 자체를 구성하며” “그들 모두는 살아 있는 신의 말들[paroles de Dieu vivant]”54)이기 때문이고 성서 주석이 바로 “초월을 향한 길[voie vers la transcendance]”55)이기 때문이다.

48) 같은 책, 136. 49) 같은 책, 136.
50)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136.
51) 같은 책, 136.
52) 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aris: Vrin, 1982, 157.
53)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206.
54) 같은 책, 125.
55) 같은 책, 126.

이제 필자는 장공에게서 성경이라는 타자를 보는 눈과 타인이라는 타자를 보는 눈이 통전돼 있음을 살펴보려고 한다. 장공에게서 문자를 넘어 성경을 다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부당한 고통을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조건 또한 그리스도의 심정이다. 문자를 넘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보는 눈과 이웃의 부당한 고통을 깊이 듣는 귀는 분리되지 않고 통전된다. 장공의 위대함은 “형이상학적 초월의 방식들”56)인 이론과 실천의 일치, 신앙과 생활의 일치 곧 생활신앙을 향한 모험에 있다. 장공의 생활신앙은 나의 영예와 번영 뒤에 있는 타자들의 고통을 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56)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1, 15.

榮譽의 背後에 움직이는 魔手를 보는 마음, 내 침상, 내 食卓, 내 취미에서 어려운 兄弟의 淋漓한 피를 보는 마음, 이것을 나는「깨보는 마음」이라 부르며 이 마음의 소유자가 곧 새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바이다.57)

57) “不滅의 憧憬”,『김재준 전집』1, 102.

자기집 바람벽에 붙인 그림종이에서 가난한 여자의 피를 보는 양심, 이것이 깨보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58)

58) “不滅의 憧憬”,『김재준 전집』1, 103.

아무리 有名한 神學者 아무리 神秘한 宗敎經驗의 所有者라도 만일 그가 巨萬의 富를 擁한 者이면서 飢餓에 시달리는 할머니, 거리에 헤매는 어린이에 對한 거룩한 責任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모든 繁榮의 背後에 숨어 흐르는 억울한 피를 볼 줄 모른다면 그는「새 世界에서 살 새 良心」의 所有者라고는 말할 수 없다.59)

59) “새 良心의 創造”,『김재준 전집』1, 135.

장공의 그리스도의 심정과 깨보는 마음은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의 심정과 깨보는 마음은 타자의 죽음과 죽을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장공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자기에 대한 염려에 앞서는 인간의 열림”60)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레비나스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시내 산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는데 장공의 깨보는 마음과 유사하다.61)

60)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228. 61) 레비나스는 철학 작품과 종교 작품(비철학적 또는 고백적 작품)을 구별했지만 양자는 상호침투하고 상호작용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성서구절에는 내밀한 힘과 권위가 있고 철학은 종교적인 경험들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미 종교적 경험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칠십인역이다. 또한 철학 텍스트에서 성서구절은 증거의 일을 하지 않고 예시의 일을 하며 철학 텍스트는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고백적 텍스트에 대한 주석이다. 다시 말해 철학의 진리는 성서구절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성서구절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지만 이성의 탐구를 허용한다. Malka, Lire Levinas. Paris: Cerf, 1984, 107; “The Paradox of Morality: an Interview with Emmanuel Levinas,” conducted by Tamra Wright, Peter Hughes, and Alison Ainle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ethinking the Other, edited by R. Bernasconi and D. Woo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l, 1988), 168-180. 그리고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98-199; François Poirié, Emmanuel Levinas, Qui êtes-vous?. Lyon: La Manufacture, 1987, 110-112 참조.

구약에는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늘 총쏘는 데 가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생애에서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아침에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커피를 끓이지 못하는 에티오피아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계명을 이해해야 합니다.62)

62) “The Paradox of Morality: an Interview with Emmanuel Levinas,” conducted by Tamra Wright, Peter Hughes, and Alison Ainle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ethinking the Other, edited by R. Bernasconi and D. Woo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l, 1988), 168-180.

장공의 깨보는 마음은 나의 음모만이 아니라 나는 나다, 라는 동일성 또는 나는 그것과 무관한 좋은 양심이다, 를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깨보고 문제 삼는 마음 곧 장공의 말대로 그저 양심이 아니라 새 양심, 거룩한 책임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프란츠 카프카와 유사하게 “최초의 유죄[coupable]라는 개념에 앞서는 책임” 또는 “잘못 없는 유죄 가능성[culpabilité]”63)이라고 불렀다. 장공처럼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나의 음모와 나의 동일성을 문제 삼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좋은 양심을 문제 삼는 마음은 “타자의 죽음을 미리 보는 것[Vor-Sicht]”으로서 이것은 “타자에 대한 인정의 시작”64)이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동일성의 깊이에서 소외된”65) 책임이다. 레비나스는 살인하지 말라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단순한 살인금지를 넘어 그 의미를 더 넓힌다.

63)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52. 64) 같은 책, 138.
65)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22.

“살인하지 말라” 또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살인의 폭력을 금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 악덕에서, 자연적 삶의 모든 결백한 잔혹함에서, 가까이 있고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좋은 양심”의 무관심에서, 그리고 우리의 객관화와 주제화의 거만한 집요함에서까지, 우리 개인들의 원자량[poids atomiques]과 사회질서의 안정을 위한 모든 성스러운 불의에서 저질러지는 느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암살과 관계 있다.66)

66)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28-129.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좋은 양심을 가진 일상의 죽임, 모든 결백함에서의 죽임”처럼 “죽이는 방식은 다양하다”67)는 것, “많은 존재 방식 가운데 타자를 짓밟는 방식”68), “마치 자기 존재의 강제 자체가 늘 누군가의 삶[생명, la vie]을 침범하는[해치는] 것처럼, 폭력적 존재의 긴장[전념] 그 자체인 폭력 행위와 살인 행위에 대한 지속적 조심성인 존재의 인간적 사건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나 기술”69), “너는 타자의 생명을 지켜라”70), “타자가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라”71), “유일한 존재인 타자에 대한 끝없는 책임으로의 부름”72), “존재 유지에 대한 제약”73)이다. 특히 레비나스에게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신의 명령과 신의 계시를 듣는 것이 신을 아는 것이다. 장공은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이론적으로 추상화하는 데에 있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에 옮기는”74) 데 있다.

67)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132. 68) 같은 책, 53.
69) 같은 책, 62.
70) 같은 책, 192.
71) 같은 책, 272.
72) 같은 책, 236.
73) “The Paradox of Morality: an Interview with Emmanuel Levinas”, conducted by Tamra Wright, Peter Hughes, and Alison Ainle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ethinking the Other, edited by R. Bernasconi and D. Woo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l, 1988), 168-180.
74) “現代人의 迷妄”,『김재준 전집』1, 269.

레비나스에게서 살인하지 말라는 나의 자유에 대한 소극적 제한에 그치지 않고 나의 향유 이전에 나의 적극적 책임을 요청한다. 우리가 직접, 간접으로 에티오피아인의 노동력 착취와 커피를 둘러싼 불공정 거래를 눈감는 적극적, 소극적 태도는 가난하고 연약하고 죽음으로 노출된 타인의 타자성의 명령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어떤 익명의 법, 어떤 법의 본질이라는 추상에 준거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염려[두려움, la crainte] 속에서 타인의 존재할 권리에 응답해야 하는 것. 나의 세계-내-존재 또는 나의 “태양 아래의 자리[장소]”, 나의 집은 이미 나로 인해 억압받거나 굶주리고 제3세계로 추방된 타자들에게 속하는 자리[장소]들에 대한 침탈이 아닌가? 다시 말해 배척하고 배제하고 추방하고 약탈하고 살인하는 것이 아닌가? 파스칼은 ‘태양 아래의 나의 자리[장소]는 모든 세계[땅]에 대한 침탈의 시작과 이미지’라고 말했다. 나의 존재함이-의도와 의식에서 결백하다 해도-폭력과 살인으로 저지를 모든 것에 대한 염려[두려움]. 좋은 양심을 향해 있는 순전한 존재 보존의 모든 귀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자기의식” 뒤에서[바깥에서] 오는 염려. 나의 거기에 있음[현존재, Dasein]의 거기에[Da]서 누군가의 자리[장소]를 차지하는 것에 대한 염려[두려움]. 자리[장소]를 가질 수 없음, 곧 심오한 유토피아. 타인의 얼굴에서 나에게 오는 염려.75)

75) Emmanuel Levinas, Altérité et Transcendanc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5, 44. 레비나스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다소 변주하면서 반복한다. <어떤 익명의 법, 어떤 법의 본질이라는 추상에 준거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염려 속에서 타인의 존재할 권리에 응답해야 하는 것. 나의 “세계 내 존재” 또는 나의 “태양 아래의 자리”, 나의 집은 이미 나로 인해 억압받거나 굶주린 타인에게 속하는 자리들[장소들]에 대한 침탈이 아닌가? 다시 파스칼을 인용해 보자: “이것은 태양 아래의 나의 자리다. 여기에 모든 세계[땅]에 대한 침탈의 시작과 이미지가 있다.” 나의 존재함이 내가 의도[목적]와 의식에서 결백하다 해도 폭력과 살인으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염려. 좋은 양심을 향해 있는 순전한 존재 보존의 모든 귀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자기의식” 뒤로 되돌아가는 염려. 타인의 얼굴에서 나에게 오는 염려. 현상의 조형적 형태들을 찢는 이웃의 얼굴의 극도의 직접성. 방어할 수 없는 죽음으로의 노출의 직접성. 그리고 모든 언어와 모든 언어 없는 몸짓 이전에 절대적 고독의 깊이에서 말건네진 나에 대한 요구. 말건네진 요구 또는 의미가 된 명령, 나의 현존과 나의 책임에 대한 문제삼음.>(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148-149) <타인의 타자성은 “살인하지 말라”의 극점이며 내 안에서, 나의 존재함이 그 의도[목적]가 결백하다 해도 폭력과 침탈로 저지를 위험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염려다. 거기에 있음[Dasein]의 거기에[Da]서 타자의 자리[장소]를 차지하고 그 결과 구체적으로 그를 추방하고, 그를 어떤 ‘제3세계’나 ‘제4세계’ 속의 불행한 조건에 운명지우며, 그를 살해할 위험. 따라서 이 타인에 대한 염려 가운데 있는 무한한 책임, 우리가 결코 떠나지 않는 책임, 비록 그 책임이 타인의 죽음과의 무력한 대면 속에서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로 응답할 뿐이라 해도 이웃의 최후의 순간에 그만두지 않는 책임이 드러날 것이다. 분명 사회성의 비밀을 보존하는 책임. 우리는 그 사회성의 철저히 거저 주는 무상행위를 비록 그것이 완전히 헛되다 해도 이웃에 대한 사랑, 욕정 없는 사랑, 그러나 죽음처럼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라 한다.>(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170-171)

레비나스에게서 살인하지 말라는 얼굴에 대한 주제화 이전에76) “얼굴의 의미함 그 자체[la signifiance même du visage]”77)와 동일한 것이다. 레비나스의 얼굴은 훑어보여진 얼굴[dévisagé]이 아니라 “벌거벗음이고, 힘이 없음, 어쩌면 죽음으로의 노출”, “‘살인하지 말라’ 및 ‘내가 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절대명령이다.”78)

76) 장공은 레비나스처럼 주제화할 수 없는 얼굴을 자기 사상의 소재로 자주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공은 카메라 맨이 거리에서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얼굴을 절취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장공은 자기에 대한 성찰 속에서 “얼굴의 판권소유”에 대한 “법률화”를 언급하고 있다. “자동차는 그만 두고라도「카메라 맨」의「횡포」란 대단하다. 거리에 나가면 특히 딸애라도 데리고 나가면 거의 예외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아무 허락도 없이 남의 낯을 섬광으로 침략하여 다짜고짜로 그것을 상품화한다. 낯이 잘생겼던 못생겼던 그것이「내」라는 인간의 대표적「간판」인 이상 아무 예고도 없이 거리의 값싼 상품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경우가 아니다. 나는「얼굴의 판권소유」를 법률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하고 자조해 본다.”(“진실에의 향수”, 『김재준 전집』4, 253) 77)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1, 294.
78)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95. 145.

[III] 타자로서의 예언자에 대한 인식

장공이 볼 때 예언자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하고 그것을 호흡한 사람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聖神의 感化로 네 心靈에 體驗”79)된 사람이다. 장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끊임없이 호흡했던 사람을 “靈感의 人, 거룩한 感激에 사는 사람”80)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권력자들 앞에서’, ‘대중들 앞에서’, ‘교권자들 앞에서’”81) 과감하고 용감하게 선포하기 이전에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한 이후에만 용감하게 서게 된다. 예언자의 사명과 선포는 영감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감의 사람 곧 예언자는 제사장과 智者와 다르다.

79) “先知者的 心情”,『김재준 전집』1, 145. 80) “先知者的 心情”,『김재준 전집』1, 145.
81) “예언자의 성격과 사명”,『김재준 전집』12, 459.

그러나 先知者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祭司長처럼 하나님 말씀의 條文化, 儀式化로서 滿足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啓示의 근본정신을 취하고 그 儀文을 버리려는 것으로 그 根本 義를 삼았었으며 智者들처럼 哲理的 或 實利的으로 事物을 靜觀함을 能事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새로운 啓示에 感激하여 그 받은 말씀으로 그 世代를 向한 하나님의 代言者가 되었으며 同時에 그의 넘치는 靈感을 힘입어 未來世界의 메시아的 理想王國을 미리 보며 기뻐한 것이었다.82)

82) “先知者的 心情”,『김재준 전집』, 1, 144.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문화, 의식화함으로써 그것을 정형화하고 경직화한다면 예언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근본정신을 수용하고 의문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 智者가 이성적으로 조용히 질서있게 사물을 정관한다면 예언자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에 감격하여 말씀을 받는다. 따라서 예언자는 제사장과 智者와 다르게 하나님이 순간순간 주시는 새로운 말씀과 계시에 노출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다르게 말하는’ 영감의 사람이다. 장공에 따르면 예언자는 “기계적으로 마치 축음기판같이 그 말씀을 재생산하지 않”83)는다. 장공이 말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에 대한 감격과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말함은 레비나스의 예언, 영감, 영성[정신성] 이해에 따르면 자아[동일자]의 현존의 주권, 의식, 지식 중심에서 내려오는 케노시스[자기 비움]에서만 가능하다.

83) “구약성서”,『김재준 전집』6, 58.

그러므로 현재의 이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지식(지식은 의식으로서[의식의 형태로] 의식의 구조다)에서 내려오려는 시도이고, 지식에서 굳어지는 동일자에서 내려오려는 시도다(왜냐하면 지식은 다양성과 다수성에서 동일자를 재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그리고 첫눈에 주체의 영혼이 예언을 향해 영감을 향해 동일자가 자기를 확신하지 않고 자기를 세우지 않는 영성[정신성]을 향해 펼쳐지지만 타자가 동일자를 뒤흔드는 이 수준을 잇는[이 수준에서 태어나는] 문제다.84)

84)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35.

예언은 타자가 동일자를 뒤흔드는 것이다. 예언은 후설에게 확실했던 현존 중심을 벗어나 “시간의 불일치 자체에서의 일치를 통해 의미하는 새로움”의 “유의미성[signifiance]과 아직-오지 않음[son à-venir]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 미래의 유의미성으로의 접근”, 또는 “지속 그 자체”에 “무엇인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관조 없는 이 경험, 이 새로움으로의 접근”인데, 레비나스는 이것을 “시간의 예-언[pro-phétie du temps]”85)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지속 그 자체는 망상가들과 점쟁이들의 환상[vision]과 다른데, 왜냐하면 그들의 예언이 윤리와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다르게 레비나스의 예언은 “시간의 신을-향한 운동[à-Dieu] 그 자체” 또는 “시간의 영감”86)으로서 이웃, 타인, 이방인과 관계에서 구체화된다. 레비나스에게서 신은 타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예언은 “윤리와 분리할 수 없는 미래의 구체성이고, 현재보다 더 신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말하려는 시도[une tentative] 또는 적어도 유혹[une tentation]”87)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그의 주저 중 하나인『존재와 다르게 또는 본질을 넘어』에서 예언을 명령에 대한 지각 이전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이 명령의 의미와 일치하는 급전환으로 정의한다.

85)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269. 86) 같은 책, 269.
87) 같은 책, 269.

명령에 대한 지각이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이 명령의 의미[la signification]와 일치하는 이 급전환[retournement]을 우리는 예언[예언의 삶, prophétisme]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예언은 영혼의 삶 자체, 그러니까 동일자 안의 타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영성[정신성, spiritualité]은 예언자적일 것이다.88)

88)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33.

내가 부르기 전에 먼저 응답하는 하나님처럼 순종과 응답은 나의 참여보다 더 빠르다. 다시 말해 나는 하나님보다 더 늦다. 따라서 명령에 대한 지각, 이해나 재현, 맹세에 앞서는 순종 곧 충성, 책임이 명령에 대한 들음을 낳는다. 그리고 “주체로서 내가 종속된” 그러나 지배도 강제도 아닌 “명령은 내가 오직 내 자신의 말함(Dire)에서만 듣는 이해[l'entente que j'entends seulement]에서 온다.”89) 또한 순종, 충성, 책임에서 동일자 안의 타자, 영감과 예언, 무한[신, 무한하고 재현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는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이 발생한다.

89)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36.

명령에 대한 들음, 영감이나 예언의 시대착오에 우선하는 순종은 상기의 회복할 수 있는 시간에 따른 신탁을 통한 미래의 예견보다 더 역설적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이사야서 65장 24절)라는 정식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타자에게 다가가면서 만날 약속 시간에 늘 늦는다. 그 명령에 대한 이해 없이 가는 명령에 대한 이 유일한[고유한, singulière] 순종, 재현에 앞서는 이 순종, 모든 맹세 이전의 이 충성, 참여에 앞서는 이 책임은 분명 동일자-안의-타자, 영감과 예언, 무한의 발생함[le se passer]이다.90)

90)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35.

순종, 충성, 참여에 앞서는 책임은 동일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노예화하지 않는 동일자-안의-타자[또는 자기 자신이나 대속, 선함의 탁월함], 영감과 예언이다. 동일자 안의 타자는 “‘자기를 위한[pour soi]’ 모든 확신에 대한”, 책임적 주체로의 “전환 자체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삼음”91)을 의미한다. 영감과 예언에서 “자기와의 일치의 순간과 동일성의 안정의 순간”92)이 파열되고 초과된다. 책임을 통해 주체는 권태와 우울한 동어반복, 본질의 단조로움, 그리고 “내”가 자기-자신으로 인해 숨막히는 얽매임(l'enchaînement)에서 해방된다.93) 장공은 말한다. “책임이 잘 수행될수록 자유는 늘어가고 무책임할수록 자유는 박탈된다.”94) 영감과 예언에서 무한은 존재론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부름에 응답하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의 목적격[l'accusatif du ‘Me voici’]에서 그 넘침[sa démesure]에서 증명된다.”95)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없는 무한은 증언 이전이 아니고 증언에서 의미한다.96) 동일자가 뒤흔들리는 예언은 타자[타인과 역사] 앞에서 증언한다. 증언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는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장 8b절)다. 부름받은 윤리적 주체는 이웃과 역사와의 관계에서 책임과 거룩함으로 나타난다. “책임의 깊은 수동성과 그로 인한 나의 진실함”97)과 증언과 말함에서 무한은 유한을 지나가고 찬양받는다. 장공은 바로 세계와 한국역사, 교회와 일상에서 나의 응답에 대한 반성 이전에 처음부터 목적격 속에서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는 “나를 보내소서”98)라고 증언하고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사람이다.

91) 같은 책, 176. 92)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36.
93) 같은 책, 209-210.
94) “자유와 종교”,『김재준 전집』4, 427.
95)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36.
96) 같은 책, 236.
97)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36.
98)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는 응답. 비워진 나의 현존, 어쩌면 타인을 위한 현존과 책임의 거저 주는 운동[무상행위].>(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127) <타자에 대한 책임의 전환은 나의 수축,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에서 이 동일성-자기를 물어뜯는 동일성-자체를 물어뜯으면서 동일성 아래쪽으로 들어가짐[une allée en deça de l'identité]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주체에게 생기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주체 안에 있는 본질에 앞서며, 타인에 대한 참여에 사로잡히게 될 자유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늘 소송과[en cause] 관계되고[기소당하고] 다시 말해 박해받는다. 동일성의 원리[근원] 없이 자기의 수동성 안에 있는 자기성은 포로[otage]다. 나라는 말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응답하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를 뜻한다.>(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80-181) <개념 바깥에 있는 유일성[고유성], 광기의 씨앗으로서의 영혼, 이미 정신병인 영혼, 자아[un Moi]가 아니라 소환된 나[moi]. 잘못은 없지만 자기를 대체하게 할 수 없음 속에서 책임의 응답을 위한 동일성에 대한 소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만이 끊임없이 긴장된 이 명령에 응답할 수 있는데, 여기서 대명사(代名詞) “나”는 목적격 속에 있고, 모든 변화[굴절] 이전에 변화되며, 타자에 의해 소유되고, 아프며, 동일하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는 듣기 좋은 말의 선물도 노래의 선물도 아닌 영감[숨을 들이쉬기]의 말함이다. 가득한 손으로 주는 것으로의 수렴, 그리고 결국 신체성으로의 수렴.>(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222)

장공의 역사참여 의식은 구약의 예언운동에 기인한 바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는 여기서 장공의 구약예언자 인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예언의 근원을 살펴보자. 장공에 따르면 예언자는 무아의 신비경이 아니라 명백한 자기의식을 가지면서 “‘하나님이 말하게 해서 말하는 사람’”이고, “온전히 자기 양심과 인식능력과 의지적 결단과 감격을 가지고 그 주어지는 말씀에 전 인격적으로 대답하는” 사람이다. 곧 예언자는 “신앙고백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증언자”99)다. 그리고 예언자는 돈 많은 자, 권세 잡은 자, 민중의 대언자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대언자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대언자가 될 때만 민중의 대언자가 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예언자는 예언의 반응을 미리 타산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거짓 예언자는 자기 자신의 심리적 속임수로 예언한다.100)

99)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05. 100)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와 장공이 다소 차이나는 지점은 레비나스의 경우 보통 예언과 책임이 장공처럼 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지만 주체의 의지적 결단 이전에 다시 말해 주체의 참여 이전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결심 이전에 세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다. 메시아주의[Le messianisme], 그것은 내 안에서 시작하는-이 존재 안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cet apogée de l'être]-“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뒤집힘이다.101)

101)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76.

그러나 레비나스가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를 다루면서 결단을 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장공과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레비나스의 메시아를 통속적인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탈존재론적인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 그것은 나다.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다. 메시아 그것은 고통받는 의인이고 그가 타자들의 고통을 책임진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나”라고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결국 누가 타자들의 고통을 책임지는가? 타자들의 고통이 강요하는 짐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기성 그 자체를 결정한다. 모든 사람이 메시아다. 세계의 모든 고통을 책임지는 나로서의 나는 이 일을 위해 홀로 임명받는다. 그렇게 임명받는 것, 부름[부르짖음, 호소]이 울리기 이전에 응답할 만큼 빠져 나가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세계에 대한 모든 책임, 그렇지만 얀켈레비치가 비난했던 사모-츠바네츠(le Samo-Zwanetz), 진정한 의미로 사모-츠바네츠, 그러니까 자기-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질 것을 결심하는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모든 사람의 모든 고통을 책임질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가 이미 이 고통을 책임진 만큼만 나라고 말할 수 있다. 메시아주의는 중앙집권, 집중으로서의 존재 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또는 나의 자기에 대한 비틀림[탈구, torsion]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치 자기가 메시아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메시아주의, 그것은 그러므로 역사를 멈추는 어떤 인간의 도래의 확실성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는 나의 힘이다. 그것은 내가 이 힘과 나의 보편적 책임을 알아보는 순간이다.102)

102)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129-130.

둘째, 예언의 동기를 살펴보자. 장공에 따르면 참예언자의 예언의 동기는 레비나스처럼 여호와의 말씀에 충성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거룩한 하나님은 부정 부패, 범죄, 종교적 타락”에 맞서 “충고, 경고, 반대, 심판선고 등으로 대결한다.”103) 이것이 예언의 내용이다. 따라서 예언의 동기는 신앙적, 윤리적 갱신에 있고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경륜 곧 갱신은 남아 있다.104) 이와 반대로 거짓 예언자는 국가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사람들이 좋아할 예언을 찾아 사람들의 비위에 맞춰 예언한다. 따라서 거짓 예언자는 집권자나 유력자 앞에서 비겁하고 그들의 소원에 맞춰 예언하며 주인의 환심을 사려는 시녀와 같다.105) 레비나스에 따르면 예언자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치적이다.

103)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1. 104)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2.
105)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1-312.

물 음: 당신은 유대 텍스트들이 정의를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레비나스: 유대교에 속하는 것은 전통, 곧 매우 오래된 전통에 속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다시피 예언자들은 우선 영생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말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종말만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106)

106)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95. 162. “예언자들은 성전의 희생제물보다 정의를 더 좋아한다. 예언자는 죽음에 의해 결정된 인간의 비극을 결코 말하지 않고 영혼불멸에 몰두하지 않는다. 인간의 불행은 사회를 파괴하고 찢는 불행에 있다. 살인은 죽음보다 더 비극적이다.”(Emmanuel Levinas, Les Imprévus de l'histoi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4, 160-161)

물 음: 예언자의 말과 같은 말의 형태는 국가와 반대되는 것입니까?

레비나스: 예언자의 말은 매우 과감하고 대담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늘 왕 앞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비밀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지하에서 계시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이것은 놀라운데-왕은 이와 같은 직접적인 대립을 받아들입니다. 놀라운 왕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폭력을 감수합니다. 왕들에게 아첨하는 영원한 거짓 예언자들을 잊지 맙시다. 오직 참된 예언자는 환심사려는 생각 없이 왕과 백성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윤리를 상기시킵니다. 구약에서 국가 자체에 대한 거부는 확실히 없습니다. 국가가 세계정치로 순전히 단순하게 동화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왕을 달라고 요구할 때 사무엘에게 충격적인 것은 모든 민족들과 같은 왕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엔 왕권설이 있습니다. 국가는 법과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윤리적 국가라는 이념은 성서적입니다.107)

10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124. 장공은 예언자, 시인을 양심분자로 보고 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는 예언자 시인 등 양심분자의 활동도 큰 바가 있었으니”(“신앙과 양심”,『김재준 전집』3, 273) 레비나스에 따르면 자유 국가에서 예언자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언론, 시인들과 작가들이다. “제가 말하고 있었던 것과 자유 언론을 가진 자유 국가로 돌아가자면…당신은 성서의 예언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정의를 실행하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왕에게 가 말합니다. 예언자는 비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는 왕 앞으로 가서 그에게 말합니다. 자유 국가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은 언론, 시인들과 작가들입니다.”(Raoul Mortley, French Philosophers in Conversa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1, 11-22)

셋째, 예언자의 역사의식 문제다. 장공에 따르면 참 예언자는 역사의식이 있고 거짓 예언자는 역사의식이 없다. “참 예언자는 역사의 사건들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경륜을 읽”고 “역사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 예견한다.”108) 그리고 “참 예언자는 책임적으로 역사에 참여한다.”109) 이와 반대로 거짓 예언자에게 “역사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자기 생존을 위한 직장의 일부”이고 “역사전반에 대해 책임적으로 헌신한다는 의도”110)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장공은 데모를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으로 본다. “‘데모’는 예언운동에 있어서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Symbolic Action)에 유사한 표현방법입니다.”111) 그리고 장공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진리운동으로 본다. “우리의 반독재 민주운동은 정치운동이기 전에 진리운동입니다.”112)

108)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2. 109)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2.
110)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김재준 전집』10, 312-313.
111) “민족의 파수꾼”,『김재준 전집』16, 81.
112) “3. 1 정신과 한국역사의 현 단계 ”,『김재준 전집』16, 93.

장 폴 사르트르보다 덜 참여적인 레비나스는 프랑스 1968년의 사건 또는 68혁명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철학적으로 답했다. 레비나스는 먼저 젊은[jeune]이라는 형용사를 “존재 위로 의미가 넘치는 것”113)으로 규정한다. 그러니까 ‘젊은’이라는 형용사는 탈존재론적 모험을 함축한다. 그러고 나서 레비나스는 젊음을 “고백[증언]의 난폭함과 행동의 폭력이 아니라 타인으로의 접근, 이웃에 대한 책임인 진실함을 통해, 인간의 상처받기 쉬움에서 생기는 진실함을 통해”114) 정의한다. 레비나스는 “모든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상처받기 쉬움” “타자에 대한 빚”115)을 통한 인간성을 젊은이들에게 주문했다. 일례로 레비나스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방문하는 학생들을 상찬한 바 있다. 물론 학생들이 늘 무한한 책임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파업 노동자들을 방문하는 학생들은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사람들이고 레비나스의 윤리적 용어로 말하면 거룩함, 책임, 대속의 사람들이다.

113) Emmanuel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2, 113. 114) 같은 책, 113.
115) 같은 책, 113.

물 음: 누군가는 당신이 말하는 윤리적 책임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빠졌다고 썼습니다. 이런 비판은 가치가 있습니까?

레비나스: 저는 소위 인간의 즉각적인 나타남에서 인간의 현실을 기술하지 않고 인간의 타락 자체가 없앨 수 없는 것, 곧 거룩함으로 인간이 부름받은 것을 기술했습니다. 저는 인간의 거룩함을 주장하지 않고, 인간은 거룩함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논박할 수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대학에서 그리고 대학 주변에서 벌어진 논쟁의 해인 1968년에 모든 가치들은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타인의 가치 말고는 “미결정 상태”였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온갖 형태의 오락과 무질서에 빠진 젊은이들은 그 날 마지막엔 마치 그들이 기도하러 가는 것처럼 르노에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방문하러 갔습니다. 인간은 거룩함과 자기에 대한 망각을 인정하는 존재입니다. “자기를-위함/향함pour soi”은 늘 회의에 빠집니다. 우리는 정의의 사상이 이 최초의 자비에 쌓여진 국가에 살고 있지만, 인간은 이 최초의 자비에 삽니다. 정의 그 자체는 자비로 다시 올라갑니다. 인간은 하이데거처럼 존재가 뜻하는 것을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에서 거룩함의 명령을 이미 듣고 이해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 근원에 이타주의적 본능들이 있다고 말할 때도, 이미 신이 말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는 매우 일찍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능의 인간학적 의미! 매일의 유대인 예배에서 아침 제일 먼저 하는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낮과 밤을 구별하도록 수탉을 가르친 세계의 주인이신 신께 찬양을.” 수탉의 노래에서의 최초의 계시, 곧 빛을 향해 깨어남.116)

116)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225-226.

또한 레비나스는 민중의 위기만을 말하는 예언자적 학생 집단과 지식인 집단을 상찬하면서 양심의 유토피아를 가지고 역사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 곧 자기-자신에 대한 비핵화[탈중심화]가 역사의 구체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그것의 인내와 길이[지속성]에서, 그 기다림에서, 어떤 ‘지향성’이 아니고 어떤 최종성(무한의 최종성-얼마나 우스운지!)도 아닙니다. 시간은 무한에 속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의 통-시성을 뜻합니다. 벨기에 루뱅에서 어느 날, 이 생각들에 대해 강연한 뒤, 사람들이 그곳에서 “교육학[pédagogie]”이라 부르는 기숙사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거의 모두가 사제이지만 무엇보다 남미의 상황에 사로잡힌 남미 학생들이 저를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인간성의 가장 높은 시련으로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에 대해 제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분열을 겪을 만큼 타자에게 사로잡힌 동일자[나]를 어디서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빈정거림 없이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여기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의 내적 완성을 매우 잘 보살필 수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위기만을 대화의 주제들로 삼은 이 학생 집단과 지식인 집단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사로잡힌 포로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양심의 유토피아는 제가 있던 방에서 역사적으로 완성됐습니다. 저는 이 양심의 유토피아들을 통해 역사에 관여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117)

117) 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eé. Paris: Vrin, 1982, 131-132.

그러나 우리는 레비나스가 그의 주저『존재와 다르게 또는 본질을 넘어』에 있는 제사(題詞)에서 에스겔서를 인용하는 것처럼 장공도 에스겔서 3장 16-21절을 언급하면서 행악자의 범죄뿐만 아니라 의인의 범죄를 경고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잠들지 않고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

“의인”이 그 의에서 떠나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의는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3:20) 그러므로 너는 행악자를 깨우치는 것과 같이 “의인”도 깨우치라고 한 것입니다.…사실, 큰 업적을 남긴 사람도 삶의 황혼기에 들어서 불의에 말려드는 일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가 저축했던 기왕의 의는 무효가 되고 마감의 불의만이 남아 그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경종입니다.118)

118) “민족의 파수꾼”,『김재준 전집』16, 81

마지막으로 필자는 예언과 예언자와 관련해 사형제 폐지와 혁명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사형문제다. 장공은 사형제 폐지를 예언과 예언자에 연관시켜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자기의 죽음으로 인간을 용서한 예수가 사형을 찬성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119) 예수가 “죄를 심각하게 다루었”지만 “인간을 더욱 존귀하게 여겼”120)기 때문이다. 장공과 유사한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사형제 폐지의 근거를 나와 타자의 고유성[유일성]을 통한 보편성 그 자체의 향상에서 찾는다. “고유한 내가 고유한 타자와 함께 보편성 그 자체를 높이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형폐지가 분명 거기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121) 사형제 폐지는 랍비 아키바를 따라 정의와 자비의 모순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사형제 폐지는 “정의 이후의 자비” 또는 “정의와 정의의 열림이라는 진보의 이념” 또는 “진리에 따라 심판하고, 심판받은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체계”122)다. 레비나스에게서 사형제 폐지 곧 정의가 자비로 열리는 것은 정의의 폐지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정의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형제는 정의의 범주들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123) 레비나스는 이 자비와 자선의 가능성을 “종교적 호흡” 또는 “예언자적 정신”이라고 부른다.

119) “장공잡기(2)”,『김재준 전집』10, 400. 120) “장공잡기(2)”,『김재준 전집』10, 400.
121) “The Paradox of Morality: an Interview with Emmanuel Levinas,” conducted by Tamra Wright, Peter Hughes, and Alison Ainle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ethinking the Other, edited by R. Bernasconi and D. Woo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l, 1988), 168-180.
122)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51.
123)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261.

정의를 넘어 그 필연적 가혹함에 추가돼야 하는 모든 긴급한 소환, 국가로 집합한 각 시민들 안에 있는 인간의 유일성에서 나오는 모든 긴급한 소환, 연역될 수 없고 입법의 일반성들로 환원될 수 없는 가능성에서 나오는 모든 긴급한 소환. 제도들의 정치적 구조로 사라지지 않을 자선의 가능성, 다시 말해 인간 안에 있는 종교적 호흡 또는 예언자적 정신.124)

124) 같은 책, 239.

두 번째로 혁명의 문제다. 장공은 혁명을 전쟁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지만 그것들이 갱신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의 혁명은 정치, 사회적인 외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 치중하여 인간성 그 자체의 근본적인 혁명에는 실패했다.126) 장공이 보기에 혁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부단히 혁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27) 장공에 따르면 부단한 혁명은 “집권한 혁명세력이 날마다 혁명하는 기분으로 모든 시책에 더 나은 길을 추구하여 대중본위로 개선에 개선을 거듭”128)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이런 노력이 변화를 가져온다 해도 인간에게 원죄성이 있기 때문에 참혁명은 힘들다고 생각한다.129) 그런데 이 원죄성을 지배하여 인간혁명의 길을 연 분은 예수다. 장공은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125) “혁명과 그리스도”,『김재준 전집』10, 190. 126) “혁명과 그리스도”,『김재준 전집』10, 190.
127) “혁명은?”,『김재준 전집』10, 193.
128) “혁명은?”,『김재준 전집』10, 193.
129) “혁명은?”,『김재준 전집』10, 193.

우리가 정치적․이념적인 차이를 넘어서 다만 인간을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사랑과 인내와 소망으로 대하고 혁명의 고뇌를 스스로의 내적 경험에 섭취하면서 그것을 인간애로 극복하여 더 높은 종말학적인 차원에서 완성을 기대한다면 어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종교적․신앙적으로 떳떳하게 그리스도인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130)

130) “혁명과 그리스도”,『김재준 전집』10, 191-192.

결론적으로 장공은 참된 혁명은 예수의 인간혁명에 입각한 기독교적 인간혁신과 정치․사회적 혁신운동과의 긴밀한 연대관계에 있다고 보고 양자의 만남의 내용과 조건을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31)

131) “혁명은?”,『김재준 전집』10, 193.

레비나스는 혁명의 근본 동기에는 찬성하지만 장공처럼 혁명이 혁명 이후에 억압체제를 낳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물 음: 1968년 이후의 텍스트인 “유대교와 혁명”에서 혁명은 해방이고, 경제적 결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격적인 것은 매매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인격적인 것은 물물 교환을 낳지 않을 것입니다.

레비나스: 현대성은 혁명이라는 낱말을 풍요롭게 사용함으로써 자기를 정의합니다. 거기엔 심지어 국가사회주의 혁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무엇보다 필요, 절박함,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그들의 조건을 벗어난 인간 존재들, 곧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출현으로 태어납니다. 억압체제를 만드는 혁명을 말하는 것은 표현상 모순입니다.132)

132)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162.

장공이 혁명의 실패를 부단한 혁명의 실패에서 찾았듯이 레비나스 또한 혁명 이후의 혁명의 연속, 곧 연속혁명을 주장한다. 연속혁명은 혁명 이후 타인의 타자성과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존재 유지의 정지 그리고 자기에 대한 문제삼음에 입각한 그러니까 책임과 대속, 초월에 입각한 부단한 항거와 혁명을 말한다.

얼굴의 벌거벗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처럼 어떤 조국에도 속하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형태로 초월, 존재로부터의 탈출, 따라서 특히 공정함 그 자체가 생기는데, 이 공정함을 통해 객관성의 과학과 나로서의 인간성이 가능할 것이다. 과학적 엄격함의 요구처럼, 반(反)이데올로기처럼, 정의 없는 사회에 대한 항거는 우리의 시대 정신을 표현한다. 비록 사회가 불의 가운데 균형 잡혀 있고 법에 의해 통치되며 힘에 종속돼 있고 질서, 국가, 도시, 민족, 동업 조합을 구성한다 해도, 정의 없는 사회에 대한 항거. 다른 사회를 위한 항거, 그러나 다른 사회가 이뤄지자마자 다시 시작하는 항거. 질서가 세워지자마자 세워지는 불의에 대한 항거, 다시 말해 서구의 오랜 진보주의 내부에서의 새로운 색조, 젊음의 색조. 마치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과 그것들의 학설에 대한 모든 의존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혁명의 기술에 대한 모든 참조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무질서 또는 연속혁명, 틀에 대한 파괴, 죽음처럼 모든 것과 전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신분들의 소멸인 만큼 우리가 인간을 혁명 속에서 다시 찾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관리[administration]도 결코 타인에게 다다를 수 없을 타자성 속에서 타인을 다시 찾고-또는 접근하는-것처럼 말이다. 마치 정의를 통해 관료주의가 비록 그것이 혁명적 기원을 가졌다 해도 그것의 보편성 자체를 통해, 타인의 고유성[유일성, 단수성]이 보편성이 포함하는 개념으로 진입하는 것을 통해, 봉쇄하는 차원이 타인 속에서 열려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모든 본질을 빼앗긴 타인과의-그처럼 유의 개체로, 인간의 유의 개체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관계의 형태로 본질 너머[본질 너머에 있음, 본질 너머에 있는 것, l'au-delà de l'essence] 또는 이상주의 속에서 그 말의 강한 의미에서, 본질의 중지[une suspension de l'essence]라는 의미에서 무-사심[le dés-intéressement]이 열릴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가난-그리고 이미 착취받은 그의 조건-은 타자로서의 타자의 절대적인 이 가난, 형태의 단순한 변화를 넘어 형태가 없기까지 변형[일그러짐]일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의심받는 이상주의? 그러나 그것은 매우 조금 이데올로기적인-획득된 상황에서의 정지 및 자기 만족과 매우 조금 유사한-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자리-없음[퇴위]으로 타자를 위한 것으로 제기되는 자기에 대한 문제삼음이다. 무(無)로의 추락이 아니라 타자를-위한-책임, 힘으로 떠맡어지지 않는 책임, 포로처럼 내가 곧바로 노출되는 책임을 의미하는 문제삼음. 결국 내 안에서의 나의 “태도”, 타인에 대한 나의 대속의 깊이까지 의미하는 책임. 무사심의 형태로 생기는 초월! 이웃을 위해 대속하기까지 호흡의 회복 없이 이웃의 접근의 형태로 생기는 초월.133)

133) 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aris: Vrin, 1982, 26-28.

레비나스에 따르면 참된 혁명은 인내와 연민에 입각한 유대관계에 있다.

우리는 혁명의 정신을 반대해 포기를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혁명을 인내의 정신과 결합시키는 본질적 유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인내의 미덕들을 되찾아야 한다. 혁명은 큰 연민에서 생긴다. 무기를 쥐는 손은 그 행위의 폭력 그 자체를 통해 반드시 고통받는다.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은 혁명가를 파시즘의 극한으로 데려간다.134)

134)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218-219.

그리고 참된 혁명적 행위는 위험[카타콤]과 양심의 고통이라는 이중적 비밀 속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고립된 사람의 행위다.

나는 길에서 승리에 찬 시위가 갖는 집단적 성격으로 혁명적 행위를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시스트들은 이보다 더 성공적인 시위를 알고 있었다. 혁명적 행위는 무엇보다 위험 속에서 그러나 또한 양심의 고통 속에서, 다시 말해 카타콤[catacombes]과 양심의 이중적인 비밀 속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고립된 사람의 행위다.135)

135) Emmanuel Levinas, Du sacré au saint. Paris: Minuit, 1977, 38.

[Ⅳ] 타자로서의 예수 또는 성육신에 대한 인식

장공은 기성교회의 예수상에서 “‘신 인간’으로서의 예수 ‘이미지’”가 “자취를 감췄”136)다고 탄식하면서 예수의 성육신 사상을 오늘에 복권하려고 한다. 장공은 성육신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인간화, 하나님이 육신을 이룬 분, 초월적 하나님이 자기를 열어 인간이 되신 것으로 이해한다.

136) “예수 이미지”,『김재준 전집』16, 158.

이제 그리스도는 하느님 자신이 인간화-하느님이 육신을 이룬 분이라고 요한복음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숨어 계시던 하느님,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자기를 온전히 열어 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137)

137) “존재현상의 저편”,『김재준 전집』3, 329.

장공은 인간이 된 신 곧 성육신과 신이 된 인간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신이 된 인간이 니체적인 “힘의 찬가”138)를 부르는 “귀족적인 지배자”139), “십자가 없는 영광”140)이라면 인간이 된 신은 “하느님이 세상에 오시는 방향”, “높은 이가 낮은 이를 방문하는 방향”, “하늘나라가 땅에 임하는 방향”141), “신의 인간화 방향에서의 구체적인 사건”142)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낮춤이다.

138) “네 힘이 너를 고발하기 전에”,『김재준 전집』10, 115. 139) “예수 이미지”,『김재준 전집』16, 160.
140) “그리스도의 마음을 마음으로”,『김재준 전집』10, 145.
141) “하나되는 교회”,『김재준 전집』8, 280.
142) “혁명과 그리스도”,『김재준 전집』10, 189.

레비나스는 “신-인간?”이라는 논문에서 “신-인간”이라는 개념이 암시하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 두 가지를 성찰한다. 먼저 첫 번째 의미부터 알아보자. 레비나스에게서 신-인간의 문제는 “최고 존재가 당하는 낮춤[비천함, 겸손]의 이념, 곧 창조주가 피조물의 수준으로 내려오는 하강의 이념, 그러니까 가장 능동적인 능동성의 가장 수동적인 수동성으로의 흡수의 이념을 포함”143)하는 문제다. 레비나스는 이처럼 신의 자기 낮춤[겸손]을 긍정한다. 그러고 나서 레비나스는 신의 겸손이 없는 몇 부류들을 비판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교의 시(詩)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들의 수난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인간들-신들의 출현”으로서 이것은 결국 신들의 신성의 상실을 낳고 그 결과 “철학자들은 인간들의 정신 속에 있는 신들의 신성을 보존하기 위해 도시의 시인들을 추방한다.”144) 플라톤의 신은 “선이라는 비인격적 이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사유되는 사유”이며 헤겔을 비롯한 철학은 “인간들의 세계에 무관심”145)하다. 이처럼 철학자들의 정신 속에서 신들의 신성은 보존되지만 “겸손[condescendance]이 없다.”146) 다시 말해 “무한은 유한 속에[dans le fini] 나타나지만, 유한에[au fini] 나타나지 않으며” 그 결과 “인간은 더는 신 앞에[coram Deo] 있지 않게 된다.”147) 따라서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것은 신의 초월의 모호한 열림이다. 레비나스에게서 자기를 열고 자기를 낮추는 신은 지배자적인 인간-신이 아니라 신의 흔적으로서의 타자의 얼굴과 결합돼 나타나면서 자기의 내재성을 돌파하는 신의 자기 낮춤[비천함, 겸손] 곧 박해받은 진리의 이념이다. 레비나스에게서 자기를 낮추는 신은 더 구체화된다. 그에게서 자기 낮춤의 신은 “정복당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쫓기는[박해받는] 사람들”148)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기’(이사야서 57장 15절) 위해 자기를 낮추는 신, ‘이방인[무국적자], 과부와 고아’의 신, 세계에서 배제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해 세계에 나타나는 신”149)이다. 질서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타자성[절대 차이, 3인칭성]을 유지하는 신의 근접성은 비천함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서 비천한 자와 결합돼 나타나는 예수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비천함이라는 신-인의 성육신 사상은 우리의 초월과 열림, 그리고 소통의 신앙을 요구한다. 장공은 말한다.

143)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69. 144) 같은 책, 70.
145) 같은 책, 70.
146) 같은 책, 70.
147) 같은 책, 70.
148) 같은 책, 71.
149) 같은 책, 73. <요청(부름, 소환, La sommation)은 정확히 유일성(고유성)을 고양시키는데 왜냐하면 그 요청이 무한한 책임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책임의 무한은 그것의 현재적 광대함이 아니라 책임을 떠맡자마자 곧바로 책임이 증가하는 것을 표현한다. 의무들은 그것들이 이행되자마자 곧바로 확대된다. 내가 나의 의무를 더 많이 이행할수록 나의 권리들은 더 적어지고, 내가 옳을수록 나는 더 책임이 있다.…“나”를 말한다는 것-변명이 계속되는 환원할 수 없는 유일성[고유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나를 면제시킬 수 없는 책임들에 대한 특권적 자리를 소유한다는 것을 뜻한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나(le moi)다. 개인의 변명의 성질은 내가 나로 완성되는 이 선택받음에서 유지된다. 나로서의 나의 수행과 도덕은 단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과정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도덕은 평등[같음] 속에서 태어나지 않고, 무한한 요구들이 세계의 하나의 점을 향해 모인다는 사실에 있으며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를 섬긴다는 사실에 있다.>(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1, 273-275)

이 복음서의 마감 부분에서 최후심판의 기준이 예수에 대한 무의도적인 봉사, “지극히 작은 자”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조건부 아닌 순수한 봉사가 인간 운명의 최후를 결정한다는 가장 광범하고 위대한 humanism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니 이방이니 하는 한계선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150)

150)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김재준 전집』10, 110.

장공은 예수를 “인간을 민족적인 편파심과 민족적 이기주의에서 구원”151)하는 분으로 보았다. 예수처럼 자기의 국경과 한계선을 돌파하는 것, 곧 내재성을 돌파하여 “버림받은 인간, 인간 대접 못 받는 인간”152)을 향하는 신앙은 성육신의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장공이 말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정신이다. “창조적인 사랑의 정신이 물질 문명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의 방향이다.”153) 장공에게서 창조적 사랑의 정신은 그간 담론에서 배제된 바른 노동신학과 생활양식을 정립할 것을 요청한다.

151) “인간 구원”,『김재준 전집』12, 441. 152) “소유욕에서 벗어난 자유”,『김재준 전집』18, 436.
153) “자유에의 獻詞”,『김재준 전집』5, 274.

모세의 율법에서도 노동자 농민, 과부와 고아 등을 억울하게 다루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며 존경하여…예언자들은 솔직하고 강렬한 정의감을 갖고 노동자 농민, 피압박자, 착취당한 자, 천민, 서민 등을 대변했습니다. 예수님도 30년 동안 노동자로 지냈습니다. 목수였다고 생각됩니다만 농사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어쨌든, 그는…소외당한 자들을 위하여 노동자 이상의 노동을 하셨습니다.…노동자 농민의 실생활속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 크리스챤 자신의 십자가를 세우려는 이 노동에의 바른 신학과 생활양식을 추진시키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를 우리 진영에 이끌어들일 소망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우리는 이 노동자 관심이 한 시대적 ethos일 뿐 아니라, 기독교 본래의 모습이란 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그것이 선교활동 자체이기 때문입니다.154)

154) “노동의 신학”,『김재준 전집』4, 277-279.

레비나스는 아마도 장공의 노동신학과 생활양식 정립의 내용155)을 “참된 휴머니즘” “유물론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을 것이고 노동자의 대우 개선과 관련해선 “디저트를 걱정하는 숭고한 유물론”156)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더욱이 레비나스는 “수치스러운 유물론”157)을 넘어 인간에 대한 관심과 무한책임을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불렀다.

155) “노동운동 지도자의 자세”,『김재준 전집』10, 320-324 참조. 156) Emmanuel Levinas, Du sacré au saint. Paris: Minuit, 1977, 16-17.
157) 수치스러운 유물론이라는 말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이 수치스러운 유물론이 된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존재의 계시가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의 거주에, 신들에 대한 기다림과 인간들의 함께 있음에 있다고 생각하고, 풍경이나 ‘고요한 삶(靜物, nature morte)’을 인간의 근원으로 삼는다.”(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1, 333)

아브라함의 후예는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과 관계된 성서와 탈무드 전통을 상기해 보자. 믿는 자들의 아버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들을 맞아들이고 먹일 줄 알았던 사람. 다시 말해 그의 천막이 사방으로 열렸던 사람. 이 모든 열림을 통해 아브라함은 통행인들을 영접하기 위해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아브라함이 제공하는 식사? 우리는 아브라함이 천사라는 그들의 조건을 알아채지 못한 채 세 명의 천사에게 제공했던 식사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천사들을 훌륭히 맞아들이기 위해 구두쇠 그 자신은 이전과는 딴판으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통행인을 세 명의 베두인, 곧 네게브 사막의 세 명의 노마드, 그러니까 세 명의 아랍인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들 앞으로 달려 간다. 그는 그들을 “각하들(Messeigneurs)”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후예, 다시 말해 우리가 완성하지 못한 타인에 대한 의무들, 우리가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명령, 신체에 대한 모든 형태의 의무들 이전에 의무가 갖는 명령, 먹이고 보호해 주는 의무라는 어려운 전통을 조상이 물려줬던 인간들. 그와 같이 정의된 아브라함의 후예는 모든 민족에 속한다. 다시 말해 진실로 인간인 모든 인간은 아마도 아브라함의 후예일 것이다.…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솔로몬 왕의 식사를 제공할 때조차 나는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아브라함의 후예들인 우리가 고용하는 노동자들의 먹을거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인간들인 인간들에 대한 의무의 정도는 무한하다. 한 번 더 리투아니아 랍비 이스라엘 살란테르(Israël Salanter)의 말, 곧 나의 이웃의 물질적 필요는 나를 위한 정신적 필요다, 라는 말을 상기해보자.158)

158) Emmanuel Levinas, Du sacré au saint. Paris: Minuit, 1977, 19-20. <타인을 위해 정의[la justice]를 요구하는 것은 도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도덕의 도덕성 그 자체로! 그러나 그의 가난 속에, 그의 집 없음[non-installation] 속에-그의 벌거벗음 속에-그의 프롤레타리아의 조건 또는 무조건[condition ou incondition de prolétaire] 속에 있는 타인에 대한 이겨낼 수 없는 염려는 이데올로기들의 의심스러운 목적성을 벗어난다.>(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aris: Vrin, 1982, 26) <타자로서의 타자는 지향적 “드러남”의 과정 속에서 다른 형태들과 연결된 이해 가능한 형태가 아니라 얼굴, 프롤레타리아의 벌거벗음, 가난이라는 것; 타자는 타인이라는 것; 초월은 근접성[가까움]이라는 것, 근접성은 타자에 대한 책임, 타자에 대한 대속, 타자에 대한 속죄, 포로의 조건-또는 무조건-이라는 것; 응답으로서의 책임은 앞선 말함[le préalable Dire]이라는 것; 초월은 단순한 기호들의 교환을 넘어 “증여[선물, le don]”, “열린 집[maison ouverte]”을 내포하는 소통이라는 것, 바로 여기에 몇 가지 윤리적 표현들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초월은 인간성 또는 무-사심인 탈자태로서 의미한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이상주의.>(Emmanuel Levinas,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aris: Vrin, 1982, 33)

특히 우리는 장공의 성육신 신학 곧 창조적 사랑의 정신이 노동신학 및 생활양식 정립과 함께 “기계의 ‘인간화’”로 확대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됨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인간’이 되어 ‘참 인간’으로 모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인간 구원을 이룬것과 같이 인간도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은대로 기술 사회속에 들어가 자신을 기계에 성육신 시킴으로써 참 기계의 위치에서 운영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기계가 그 운영과정에서나 생산결과에서나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일하게 함으로써 기계의 ‘인간화’를 이룩한다는 것이다.159)

159) “기술학과 인간”,『김재준 전집』10, 385.

우리는 성육신 신학을 기계에 적용시키지 않았다. 장공은 기계가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참 기계가 되도록 기계의 운영과정과 생산결과 및 안전문제 따위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배려를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장공의 성육신 신학은 기계[타자]에 대한 책임과 배려로 확대된다. 우리가 장공의 이런 생각에 찬성한다면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장 9절)라는 가인의 물음만이 아니라 ‘모릅니다. 제가 기계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는 물음을 던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인간과 기계 모두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공의 성육신 신학의 관점에서 교회 또한 장공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장공이 오늘의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레비나스처럼, 타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주는 개방성과 모험정신이다. 장공의 예수 이미지에 따르면 예수가 과격할 만큼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160)

160) “예수는 이 점에서 과격할만큼 개방적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이론은 간단하다.”(“歷史的 宗敎”, 『김재준 전집』18, 92)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참으로 교회가 아닌가?161)

161)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150.

「그를 교회에서 개방하여 전 인간에게 주라」이것이 오늘의 절규다.162)

162) “인간이기에”,『김재준 전집』5, 197.

개척적이요 혁명적이고 영웅적인 기백은 조직교회라는 틀 속에서 벌써 질식해 버린 느낌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고난에의 동참을 제일의적으로 자랑하는 모험정신이 없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차디찬 재에 깊이 묻힌 작은 불씨 정도로 숨겨져 있다.163)

163) “그리스도 고난에의 참여”,『김재준 전집』10, 154.

레비나스가 볼 때 가장 어렵게 열리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집의 문이다.

마음은 노동계급에게 아주 쉽게 열린다. 돈지갑은 더 어렵게 열린다. 가장 어렵게 열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집의 문이다.164)

164) Emmanuel Levinas, Du sacré au saint. Paris: Minuit, 1977, 16.

이런 관점에서 레비나스 또한 교회의 개방성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참으로 교회가 아닌가?165)

165)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150.

하나님의 자기 낮춤 곧 성육신의 신앙은 위험을 동반한다. 그래서 장공은 크리스챤에게 필요한 것은 “감히「다르게 사는」용기”166)라고 말했다. 성육신의 신앙, 열림, 소통은 존재와 다르게다. 레비나스에게서 성육신의 신앙은 윤리적 관계다. “존재와 다르게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존재와 다르게는 타인과의 관계, 곧 윤리적 관계입니다.”167) 한국교회에 현격히 부재하는 것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다. 존재와 다르게는 자기의 존재보다 타자의 존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존재와 다르게는 존재의 한 양태로 떨어질 다르게 됨(다른 존재)이 아니라 "다르게 '있는(est)' 존재의 주체성"168)이다. 다르게 있는 존재의 주체성은 억압받는 타자에 대한 자유/비자유의 쌍 이전의 책임, 타자가 나에게 갖는 책임에 대한 책임, 추가적 책임이다. 이 책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레비나스는 이 책임을 “은총의 인간성”169)이라고 부른다. 존재와 다르게는 은총에 이끌린 인간다운 삶이다. 장공이 말한 “감히「다르게 사는」용기”는 존재와 다르게 존재하는[사는] 주체성, 또는 “영의 질서에 돌아가는 인간”, “자연질서에 전적으로 매몰되지 않으려는 인간”, “하느님의 형상 그대로의 인간원형에 복귀하려는 인간”170)으로 번역될 수 있다.

166) “다르게 산다는 용기”,『김재준 전집』10, 302. 16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Paris: Grasset, 1991, 134.
168)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05.
169)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111.
170) “말씀을 새긴다”,『김재준 전집』12, 373.

이제 장공과 레비나스의 성육신 이해 중 두 번째 의미를 알아보자. 장공에 따르면 인간이 된 신의 참 뜻은 예수가 “속죄적 사랑의 죽음”으로「참 인간」곧 “인간성을 아름답게 하는 분”171) 또는 인간적인 분이 됐다는 뜻이다.

171) “그리스도 고난에의 참여”,『김재준 전집』10, 156.

「신이 된 인간」이라는 방향과는 온전히 다름에 주의해야 한다. 그가「참 인간」이 됐기 때문에 인간은 그를 무시도 제거도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됐다는 것은 생리와 심리에서 인간 모습이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가 참으로「휴매인」(인간적)하게 됐다는 것이다.172)

172) “인간이기에”,『김재준 전집』5, 196.

그리스도는「道成肉身」한 인격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적 인간이 된 「로고스」(道)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병자, 약자, 타락자, 폭군, 직업화한 종교자, 무정한 부자, 범죄자 등을 현실 그대로 공의와 사랑으로「대속」하려 하였다. 하늘의 질서를 이 역사 안에 수립하려는 것이 그의「천국」운동이었다. 그는 결국 이「역사」를 부둥켜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173)

173) “종교와 역사”,『김재준 전집』2, 250.

필자는 예수가 “정의와 사랑, 또는 정의로운 사랑”174)으로 각기의 사람들을 속죄하고 대속하였다는 것을 레비나스의 철학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신-인간?”이라는 논문에서 성육신 사상의 두 번째 의미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한다. 레비나스는 성육신 사상의 두 번째 의미를 대속, 물질화[성육신], 비움, 속죄로 보고 있다. 이 모든 개념들은 인간의 인간성 곧 “모든 사람에 의한 소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175)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를 “모든 사람을 위해 살고 죽는 것”176)으로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장공은 예수를 생리와 심리, 가정적 이기주의, 사회적 비인간화, 종교적 인간학대, 국가라는 폭력주의적 정치권력 구조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분으로 이해한다.177) 따라서 장공에게서 폭군, 부자, 범죄자 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오셨고 인간 구원을 위하여 목숨바치신 분입니다.…천하 만민이 다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178) 장공이 볼 때 큰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모든 사람을 섬기려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179) 장공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성적 섬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섬김은 예수의 크기에 근거한다. “그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그의 자유로운「삶」과「죽음」그것만으로 그의 종교는「충만」이었다. 그는 만인의 친구, 그의 말씀은 만민의 양식이었다.”180)

174) “예언자의 성격과 사명”,『김재준 전집』12, 461. 175)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77.
176)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92.
177) “인간 구원”,『김재준 전집』12, 439-444.
178) “成肉身”,『김재준 전집』4, 159.
179) “하나게 되게 하옵소서”,『김재준 전집』17, 17.
180) “인간이기에”,『김재준 전집』5, 197.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예수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은 타자들에 대한 예수의 책임을 통해서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예수의 책임은 “정치적(또는 반-정치적) 의미에 우선”하고 “국가를 방해[교란]하”181)는 “무원리적 수동성의 사로잡힘, 무원리적 자기”182), “물질의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183),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절대 수동성”184), “행위와 결합된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이 수동성”185)에 근거한다. 의지적 떠맡음이 아닌 수동성의 책임은 “이타주의적 의지, ‘자연적 호의’의 본능”186) 또는 “(최초의 자유를 전제하는) 죄의식 콤플렉스” “신적 ‘본능’”, “사랑이나 희생의 추세[경향성]”187)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중심주의와 이타주의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책임 이후에 온다.”188) 수동성은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사유된다. “무에서 발생한 존재가 명령을 듣기 전에 순종했기 때문에 창조에서 존재로 부름받”는데, 부름받은 존재는 “존재에 도착할 수 없었던 부름에 응답한다.”189) 이 순종이 자기의 동일성을 벗어나 근원적 선함, 무죄 이전의 책임, 박해와 살을 에는 듯한 수난의 주체를 낳는다.

181)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60. 182) 같은 책, 182.
183) 같은 책, 180.
184) 같은 책, 170.
185) 같은 책, 181.
186) 같은 책, 177.
187) 같은 책, 198.
188) 같은 책, 195.
189) 같은 책, 180.

수동성-능동성 사이의 선택에 앞서는 수동성, 모든 부동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은 기소, 박해, 타자들에 대한 책임이라는 윤리적 용어로 기술된다. 박해받은 자는 자기 자리에서 추방되고 자기를 마주함[soi à soi] 말고는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자기 머리를 둘 세계에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 박해받은 자는 모든 놀이와 모든 전쟁을 빼앗긴다. 여전히 능동성인 자기-촉발을 넘어, 비록 자기가 엄격하게 자기의 수동성과 동시적이라 해도, 자아는 박해에서 노출되는데 기소는 피조물의 절대 수동성, 대속의 절대 수동성에서 박해와 분리되지 않는다. 자아의 제국주의를 박탈하면서, 타자로 인해 촉발됨[l'hétero-affection]은 새로운 거절할 수 없음을 세운다. 다시 말해 마치 자기가 틀림없이 떠맡지 않으려는 이 기소가 자기로부터 오는 것처럼, 절대적 기소에 종속된 자기를 세운다. 책임에서 자기를 물어뜯는[se ronger] 자기[se]-이것은 또한 물질화[성육신]이다-는 나[moi]에 의한 자기[soi]의 객관화가 아니다. 자기[Le Soi], 곧 박해받은 자는 자유에 앞서 자기의 잘못을 넘어 기소되고, 바로 거기서 부끄러운 결백[무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상태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피조물의 근원적 선함이다. 박해받은 사람은 언어로 변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박해는 변명할 자격을 박탈하는 실격이기 때문이다. 박해는 주체가 로고스의 매개 없이 침범당하거나 접촉되는 정확한 순간이다.190)

190) 같은 책, 192-193.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예수가 생리적으로 병든 타자들과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곧 “정신분열, 정신착란”, “가난과 천대와 압력에 시달려 불안과 공포 때문에 인간성이 위축되고 무기력하고 비겁해진”191) 타자들의 자유에 책임적일 수 있었던 것은 물질이 아닌 물질이 되는 물질화[성육신]의 극단적 수동성 곧 대속, 자기 비움 때문이다.

191) “인간 구원”,『김재준 전집』12, 440.

“물질화”[성육신, l'incarnation]의 극단적 수동성[Passivité extrême] 곧 질병, 고통, 죽음으로 노출되는 것은 공감[la compassion]으로 노출되는 것이고, 자기로서 비용이 드는 선물[don]로 노출되는 것이다. 부동성[l'inertie]과 무[néant]의 제로[zéro] 이전에 있고, 존재 안에서[dans l'être]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결핍[déficit d'être en soi] 속에 있으며, 바로 머리를 두는 곳 없이, 자리-없음[장소-없음, le non-lieu] 속에서 따라서 조건 없이 자기-자신은 세계를 짊어지면서, 세계를 고통하면서 정지와 조국의 실패 속에서 세계를 짊어지는 자로 나타날 것이고, 박해의 상관자 곧 타자에 대한 대속이다.192)

192)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72.

레비나스에게서 사랑의 시작인 공감과 연민, 감정이입을 허용하는 것은 심리적 사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속죄와 대속인데 속죄와 대속은 타인을 위해 고통하는 것이다.

포로는 대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속은 마치 “내가 나를 누군가의 자리[입장]에 놓아” 그 결과 내가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대속은 다만 모든 공감을 허용할 수 있는 속죄로서 타인을 위해 고통함[un souffrir pour autrui]을 의미한다.193)

193)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11-212.

타자에 대한 나의 대속은 심리적 사건의 경험에 속하지 않은 어떤 의미의 영역이고, 이 의미에 의해 의미하는 감정이입[une Einfühlung]이나 공감[une compassion]의 영역이다.194)

194)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99-200.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성은 “타자의 입장에 자기-자신을 놓는 희생”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 희생은 대속의 주체성 뒤에서 주체의 의지가 남겨둔 어떤 영역을 전제할”195)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바로 “처음부터 타자의 입장(자리, place)에 놓인 대속”196)이다.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주체성은 “공감이나 내부의 고통 일반의 심리적 사건이 아니라 어떤-타자의-입장[자리]-에-자기를-놓을 역설적인 심리적 가능성들을 가능하게 하는 대속”197)의 주체성이다. 이 대속의 주체성은 “세계 또는 존재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기계적 연대와의 단절”198)을 가져온다. 따라서 속죄와 대속, 타인을 위한 고통이 공감과 연민, 감정이입, 형식적 연대에 앞선다. 장공 또한 예수의 고통을 언급한다. 장공은 예수의 십자가를 “‘고통’의 가장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모험”으로 보고 “고통의 선용”199)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가난한 자, 갇힌 자, 포로된 자 등을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들려면 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이상의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이고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배후권력의 총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00) 장공의 예수는 배후권력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인내 속에서 “타자의 잘못으로 인해[par]” 고통하고 “타자들의 잘못을 위해[pour]”201) 고통하며 그들을 아래에서 떠받쳤다. 그러기에 장공의 예수는 존재론적 수축의 팽창을 통해 모든 고통을 짊어진 사람이다. “세계의 모든 고통은 분리, 곧 존재의 본질의 전환이 발생하는 점[le point]을 짓누른다. 점은 모든 것을 위해 자기를 대속한다.”202) 이 대속으로 인해 예수는 머리 둘 곳 없었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장공이 자의식 속에서 자신을 방랑자로 여긴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5) 같은 책, 228. 196) 같은 책, 228.
197) 같은 책, 228.
198)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202.
199) “고난의 도전과 수난자의 응전”,『김재준 전집』16, 245.
200) “고난의 도전과 수난자의 응전”,『김재준 전집』16, 246.
201)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99.
202) Emmanuel Levinas, Quatre lectures talmudiques. Paris: Minuit, 1968, 108.

마지막으로 장공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상을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는다. 장공의 그리스도는 자연 자체를 구원하는 분이다.

예수는 자연 자체를 구원한다. 자연은 인간의 삶의 광장이다. 그런데 인간이 못되먹은 탓으로 자연도 곤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자연도 하느님의 묻 자녀가 나타나서 자연 자체가 하느님의 낙원으로 회복되게 해 주기를 고대하며 신음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거나, 산 위에서 변모했다거나, 떡 몇 덩이와 물고기 몇 마리로 몇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든가 하는 설화는 예수에 의한 자연변혁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묵시록에서 이(21장)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이란것도 예수의 자연변혁과 직결된다.203)

203) “인간 구원”,『김재준 전집』12, 444-445.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자연구원은 예수의 행동에 종속된 신의 자기 낮춤이다. 곧 신의 자기 낮춤은 예수의 행동을 요구한다. 레비나스는 신의 낮춤과 관련해 탈무드와 카발라를 연구하는 전문가였던 리투아니아 랍비 볼로진의 하임의 책『생명의 영혼Nefesh Hahaïm』에서 케노시스를 발견한다. 레비나스는『생명의 영혼』에 대한 해석에서 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발전시킨다. 첫 번째 관점에 따르면『생명의 영혼』에서의 우주론 곧 일반 존재론에서 신은 위계질서화된 세계들의 영혼으로 묘사된다.204) 그리고 두 번째 관점에 따르면 이 위계질서에서 이스라엘의 영혼인 인간 영혼은 신과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205) 다시 말해 인간은 신이 이 세계들과 연합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해야 할 소명이 있는데, 이 연합의 조건은 토라에 충실한 인간의 행동이다. 신은 오직 윤리적 명령을 매개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통치한다. 따라서 신은 예수와 인간을 통해 우주와 타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에 종속된 신의 자기 낮춤 곧 케노시스다.

204)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42. 205) 같은 책, 143

존재는 윤리와 인간을 통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l'univers]를 책임진다. 인간은 세계들을 만들고 해체하며, 높이고 낮춘다. 신의 통치는 나에게 달려있다[Le règne de Dieu dépend de moi]. 신은 자기의 유효성-실재와 실재의 현존 그 자체와 신의 연합-을 나의 공로와 잘못으로 종속시켰다. 그래서 정확히 신은 존재가 타자를 책임지는 윤리적 명령을 통해서만 통치한다. 세계는 그것이 존재를 보존하기 때문이 아니고 존재가 자기의 고유한 존재 이유였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 존재가 자기의 존재에서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를-위한-존재의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든 존재함에 대한 정당화다. 세계는 구체적으로 토라에 대한 동의, 따라서 확실히 이미 토라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무사심을 통해 자기 존재에서 정당화된다. 신의 전-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힘[능력, puissance]을 인간에 대한 윤리적 동의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케노시스의 원초적 의미들 가운데 하나가 있기도 하다.206)

206)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45.

[Ⅴ] 타종교에 대한 인식 문제

장공은 한국교회가 타종교를 마귀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무지를 비판한다. 장공에 따르면 모든 종교들이 자기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고 최종 궁극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자기 충족적이고 따라서 다른 데서 배우려는 마음의 겸허”207)가 없기 때문이다.

207)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6.

장공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자세와 태도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세 가지 태도는 저마다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배타주의적 태도다. 배타주의는 “배격과 투쟁에 의한 승리를 지향하는 태도다.”208) 둘째는 초월적 태도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타종교가 아무리 기독교와 비슷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에 연결될 수는 없다는” 태도다. 이것은 “「斷絶」과「他性」(Discontinuity, Otherness)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대화나 노력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209) 장공에 따르면 이 태도가 현존 기독교를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고, “歷史的 基督敎가 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심판되어야 한다는 것”210)을 강조하는 입장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存在樣式에 전적으로「아니다!」하는 부정을 선포해야 하고” 바로 이런 “斷絶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이 내게 체험된다”211)는 입장이다. 셋째는 포괄과 성취의 태도다. 이것은 “排他(exclusiveness)가 아니라 包攝(inclusiveness)을 중심으로 하고 생각하려는 자세”다. 또한 이 태도는 “타종교에도 많은 단편적인 진리가 있지만 완전하지” 못하고 “최선의 것도 아니”므로 기독교가 “이것을 완성한다”212)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올 때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이다.213)

208)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7. 209)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7.
210)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7.
211)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7-338.
212)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8.
213)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8.

장공은 모든 종교가 같고 결국에는 한 곳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생각을 단호히 반대한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동등이고 결국에는 한 고장으로 간다는 무책임한 논조에 찬성하라는 것도 아닙니다.”214) 장공은 모든 종교는 진리 탐구와 영원, 구원을 위한 진지한 순례의 기록이라고 긍정하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태도를 취한다.

214)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김재준 전집』5, 421.

他宗敎가 악마의 소산이라는 것보다도 自由하시는 聖靈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단편적인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받는 인간의 情況이 어스름 달밤처럼 희미한 데서 그 나타남이 흐리고 또 단편적인 것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함을 이루었다.215)

215)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42.

얼핏보면 장공이 포섭과 성취의 태도를 취하는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해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와 완전성을 성취해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위의 문장을 자기의 동일성[정체성]을 확인하는 그저 자기 소외 없는 그리스도중심적 태도로 봐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타자의 완전성들 앞에서” 갖는 “어떤 존재의 탈자태(황홀경, extase)”216)에 장공이 찬성할 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탈자태에서 자기 소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장공은 자기 소외 없는 그리스도중심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폐쇄사회를 깨고 타종교에 대한 존경과 이해와 사랑으로 대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216) Emmanuel Levinas, Noms propres. Monpellier: Fata Morgana, 1976, 123.

그렇다면 대화의 길은 어떻게 열리는가? 다시 말해 대화에 앞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장공에 따르면 그 방법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217) 장공은 하나님은 절대자이고 인간과 인간의 행위는, 비록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해도,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교만하여 자기나 자기 종교를 신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18) 장공은 서로 다르지만 일치를 추구하는 방향의 타당성을 바로 “우리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라는 그 신앙”219), “한 하나님이 天地 萬物의 창조주이며 歷史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獨生子를 주시기까지「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신앙”220)에 두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黑人이나 白人이나, 信者나 不信者나, 回敎徒나 儒敎人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文明人이나 野蠻人이나, 富者나 貧者나, 强者나 弱者를 다 같이 同等으로 사랑하시고 平等으로 그 인품됨을 인정하신다.” 둘째, 타종교 앞에서의 겸손이다. 장공에 따르면 이 겸손은 신앙 태도의 비굴함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장공이 말하는 겸손은 자기 종교를 증거하면서 다른 종교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다른 宗敎를 존경하면서 자기 종교를 증거하는 것이다.” 장공은 타종교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태도가 자기 종교를 증거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장공은 자기 소외 없이 타자 지향적이다. 장공을 따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타종교인들에 대한 말없는 사랑과 친절, 우정과 신실이다. 이런 행위가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217)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161. 218)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160-161.
219)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9.
220)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9.

다른 종교인들도 인간이니만치 인간 실존으로서의 공통된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민과 불안과 고독과 그리고 온갖「삶」의 난문제에서 허덕일 때 그들에게 말없는 사랑과 친절과 우의와 신실을 나눠준다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는 증거되기 시작한 것이다.221)

221)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김재준 전집』5, 344.

장공은 주목할만하게도 다른 종교인을 나의 종교로 개종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지배욕의 종교에서 봉사와 사랑의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도 또는 어떤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기 전에 우선 나 자신이「지배욕」의 종교에서「봉사와 사랑」의 종교에로 개종해야 할 것이다. 교리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문제다. 사랑이 선행하는 때, 모든 장애는「대화」와「이해」에로 길을 열어줄 것이다.222)

222)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161-162.

여기서 우리는 개종에 대한 장공의 혁명적 이해를 읽을 수 있다. 사랑이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 교리와 제도, 이론, 역사, 규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간의 대화의 길을 여는 공통분모는 사랑이다. 장공은 공자의 인(仁)도 사랑, 불교의 자비도 사랑, 이슬람교도 겉으로는 전쟁신 같지만 본심은 사랑에 있다고 보고, 천도교의 인내천도 사랑을 말한다고 역설한다.223) 따라서 장공은 종교간 대화의 방법에 있어서 “사랑의 진실”224)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랑 속의 일치는 “抛棄나 折衷主義를 의미함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 하나되는 一致”225)이다. 사랑에서만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초월적, 포섭적 태도 곧 “소유의 평화”226)를 넘어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하면서 하나되는 길이 있다. 더 나아가 장공이 볼 때 타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키는 가장 건설적인 방법은 “기성교회의 흠집, 基督敎史에 나타난 온갖 慘劇들, 그런 암흑면만을 들추는 것보다도” “그리스도 모습을 인간으로서의「이미지」로 삼고 역사 안에서 그의 삶을 계승하는 것”227)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작은 사건들”과 “사회나 국가 전반으로서의 機構 자체의 큰 事件”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사는 종교”228), 타자들을 “살리는 종교, 곧 “생활 종교”229) 또는 생활 신앙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삼는 생활 종교 또는 생활신앙은 윤리적 다름이고,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자면, 인간의 인간성이 시작되는 나의 거룩함, 나의 타자성[다름]이다. 장공은 말한다.

223) 장공은 유교는 너무 세속화돼서 종교라는 범주에 넣기 어렵다고 말한다. 장공은 불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중에서 우열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윤리성, 둘째는 그 종교가 만들어 놓은 열매로서의 문화 또는 문명, 셋째는 그 종교가 과거와 미래에서 더 좋은 인간과 사회를 빚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人間과 人權”,『김재준 전집』11, 126 참조. 장공은 특히 통일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통일교를 협잡종교로 보고 있다. “長空 칼럼”,『김재준 전집』11, 294 참조. 224)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161.
225)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9.
226) Emmanuel Levinas, Noms propres. Monpellier: Fata Morgana, 1976, 123.
227)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44.
228) 장공은 신학자도 신학을 살아야 하고 학자가 되기 전에 우선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자는 신앙과 학적 양심에 충실해야 할 것이고, 자기 자신이 신학을 ”살아야“할 것입니다.>(“학문의 세계”,『김재준 전집』18, 526) ”우리는 학자가 되기 전에 우선 인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학문의 세계”,『김재준 전집』18, 526.
229)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44.

크리스챤의「다름」은 윤리적인「다름」입니다. 불의와 부정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는 다름, 이기적 탐욕 속에서도 남을 돕는 봉사의 다름, 실망과 낙심 속에서도 희망에 밝은 다름, 죽음의 선에도 노래하며 넘는 다름 등-얼마나 숭고한 도덕적․영적 다름입니까? 그런 것이 신자의 맛입니다.「맛」은 인간의「멋」입니다.230)

230) “다르게 산다는 용기”,『김재준 전집』10, 302.

레비나스에게서 장공의 윤리적 다름의 주체성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을 통해 나의 주권이 버려지는 타자성[다름]”231)의 주체성이다. 필자는 기독교인이 자신부터 우선적으로 지배욕의 종교에서 봉사와 사랑의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장공의 견해를 제1의 개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들이 타자들에게 생활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우리도 모르게 타자들의 심정에 변화가 생겨 우리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타자들의 행위를 제2의 개종이라고 부른다.

231)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98-99.

레비나스는 유대교를 정의하면서 유대교는 “인간 사이의 평화를 최고의 종교적 가치와 궁극적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유대교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누군가를 개종시키는 것이 유대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232) 그러고 나서 레비나스는 탈무드의 노아의 후예(Noachide)라는 개념으로 개종의 문제를 다룬다. 레비나스는 “동일성 없이”라는 논문에서 노아를 이웃으로서의 타자들(사람과 동물)에게 헌신하는 자로 언급한다.

232) Emmanuel Levinas, Les Imprévus de l'histoi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4, 162.

자유로운 인간은 이웃에게 헌신하고, 그 누구도 타자들 없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영혼의 뒤집힌 영역은 안[내부]에서 닫히지 않는다. 창세기 텍스트는 감탄할 만큼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들어가니, 주님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창세기 7장 16절 하반절) 인간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어떻게 자기를 닫을 수 있을 것인가? 노아의 대홍수가 위협하지 않는 때가 있는가?233)

233) Emmanuel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2, 109.

따라서 노아 이후의 “노아의 후예는 자기의 종교적 신념들과 관계 없는 도덕적 존재다.”234) 노아의 후예는 탈무드에서 더 구체화된다. 다음의 7가지 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대제사장과 비슷한 노아의 후예다. 6가지 부정적인 법은 1) 우상 숭배, 2) 신성 모독, 3) 살인, 4) 방탕, 5) 아직 살아 있는 동물을 자른 고기 먹기, 6) 부정하고 폭력적인 사유화다. 나머지 긍정적인 법은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235) 이렇게 노아의 후예는 도덕에 의해 정의된다.236)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예배에 가담하지 않고 노아의 후예의 도덕법을 준수하는 이방인(guer tochav)을 포함하는 노아의 후예와 심지어 노예에게조차 유대인들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237) 또한 만약 그/그녀가 노아의 후예라면 자기가 개종한다 해도 자기의 자녀를 개종시키지 않는다.238) 이렇듯 탈무드는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지위”, 곧 “예배 없는 인간 존재”239)를 생각하고 있다.

234) Emmanuel Levinas, Les Imprévus de l'histoi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4, 164. 235) 같은 책, 164.
236) 같은 책, 164.
237) 같은 책, 164.
238) 같은 책, 164.
239) 같은 책, 164.

두 번째로 노아의 후예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의 자연권 또는 자연법의 토대로서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미리 알리는 사람”240)이다. 이교도와 우상숭배자들 가운데 의로운 자들과 경건한 자들도 노아의 후예다. 이들은 종교를 넘어 “사회적 유대”로써 “종교적 일치의 범위와 깊이”241)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중세 철학자 마이모니데스 또한 평화의 길을 위해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의무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도 노아의 후예다. “우리는 가난한 우상 숭배자들을 먹여야 하고 그들의 환자들을 방문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242)

240) 같은 책, 165. 241) 같은 책, 165.
242) 같은 책, 165.

이제 레비나스가 어떻게 타종교를 인식하는지 살펴보자. 레비나스는 타종교와의 대화 이전의 새로운 성숙, 진지함, 무거움, 인내를 가진 온순한 양의 태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길들여진 양”243)이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갖는 타자에 대한 책임의 태도다. 타종교와의 대화 이전의 태도는 “텅 빔[le vide], 영점[point zéro]과 묘지들의 평화[paix des cimetières]”244)의 태도다.

243) “그리스도 고난에의 참여 ”,『김재준 전집』10, 158. 244)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175.

대화를 넘어 새로운 성숙과 진지함, 새로운 무거움과 새로운 인내,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성숙과 진지함. 마돌 씨(M. Madaule)의 주재로 파리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우정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공통분모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갈등들에선 설득 그 자체가 폭력과 억압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개종 권유와 포교(전도)를 단념했다. 따라서 폭력도, 계략도, 단순한 외교술도, 단순한 재치도, 순전한 관용도, 단순한 공감조차, 단순한 우정조차 아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의 이 태도는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가? 이 태도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어떤 문제 앞에 있는 사람들의 현존. 염려와 지킴(경계) 곧 어쩌면 시간의 종말까지 잠들지 않는 것. 어쩌다가 한 번 말로 사라지지 않고, 기술에 골몰하지 않으며, 제도들이나 구조들 속에 응고되지 않는 사람들의 현존. 대체할 수 없는 동일성의 충만한 힘, 피할 수 없는 책임의 충만한 힘 속에 있는 사람들의 현존. 이 해결할 수 없는 실체들을 인정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그 실체들이 폭력, 계략, 정치 속에서 파열하지 않게 막는 것, 갈등의 온상 앞에서 보초를 서는 것, 새로운 종교성과 연대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모른다. 그러나 사실 비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표현인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성숙을 비웃기 이전에 나의 젊은 학생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에게, 코끼리를 잡아먹는 보아뱀만을 그릴 줄 아는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 줄 것을 요구하는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어린 왕자가 원하는 것이 양처럼 온순한 그 유명한 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그려진 그 어떤 양도 어린 왕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려진 양들은 폭력적이고 뿔이 있는 숫양이거나 너무 나이가 들었다. 어린 왕자는 나이를 많이 먹음에 으레 따르는 부드러움을 경멸한다. 그래서 비행기 조종사는 어린 왕자가 아주 만족할 만큼 평행 4변형 곧 양이 잠자는 상자를 그린다.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그리는 법을 모른다. 해결책은 서로 가까워진 사람들이 돌보는 상자 밑바닥에서 아직 잠자고 있다. 나는 어떤 이념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이념의 이념 곧 평행 4변형의 추상적 그림 그러니까 우리의 희망들의 요람을 갖고 있다. 나는 어쩌면 불가능성이 잠자는 가능성의 이념을 갖고 있다.245)

245) Emmanuel Levinas, Altérité et Transcendanc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5 100-102.

그 다음은 이론적인 문제로서 진리의 구조 그 자체와 관련된 공생의 문제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와의 화해의 사상, 종합이 아니라 공생 또는 특권적 이웃됨, 나눔의 삶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로부터 배운다. 이 공생은, 장공이 거부했듯이 두 개의 항이 하나로 수렴되는 종합이나 혼합주의가 아니라 심오한 공생, 진리의 구조 그 자체와 연계된 공생이다.246) 로젠츠바이크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진리는 스스로-결코 진리의 역사의 우연한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본질에 의해-두 가지 형태, 곧 유대교적인 것(토라의 형태로)과 그리스도교적인 것(연민의 형태로)으로 나타나고 이 두 가지 형태가 서로 대체될 수 없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될 수 없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절대 필요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247) 그리고 로젠츠바이크는 유대인은 주님과 가까이 있고, 세계는 아직 주님과 가까이 있지 못하며, 그리스도교는 주님과 가까이 있지 못한 사람들이 세계를 통해 그 분을 향해 가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248) 레비나스에 따르면 로젠츠바이크는 일치 없이 두 가지의 진리의 형태로 하나의 진리를 언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249)

246)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95. 247) 같은 책, 71.
248) 같은 책, 71.
249) 같은 책, 71.

신을 향해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모든 사람을 부릅니다. 유대교에선 이미 끝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 다르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계기. 이 주장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부분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놀라운 사건은 남아 있습니다. 종교사에서 최초로 일치 없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 두 가지 진리의 형태로 하나의 진리를 언표하는 것. 우리들이 있지만 그와 똑같이 타자들도 있습니다. 이 이원성이 일상적 의식의 일부로서 살고 생각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엄격하고 완전한 지성에 의해, 매우 순수한 사람에 의해, 매우 통전적인 유럽 문화를 가진 사람에 의해 이것이 사유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늘 새로운 평화의 선구자의 특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250)

250) 같은 책, 71.

레비나스는 이 공생을 마치 그 공생에 추가[보충]의 풍요로움이 있고, 증가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비유대적 예술이라고 부른다251): “로젠츠바이크에게서 본질적으로 유대적 천재에 속하지 않았던 예술을 향한 우리의 접근이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과의 공존을 통해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비유대적 예술이었습니다.”252) 레비나스는 이 공생의 사상에 따라 이스라엘 국가도 그리스도교 세계와 공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251) 같은 책, 95. 252) 같은 책, 95.

유대교의 진리는 늘 이미 주님“께 가까운” 민족, 그러나 세계를 보지 않는 민족에게 주어진 진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주님께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의 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과 세계에 대한 경험은 또한 이 이웃됨 때문에 유대교에 주어집니다. 이단의 신학? 또는 오히려 확실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연결된 운명들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이해.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국가도 그리스도교 세계와 공존해야 하고, 그리스도교적임을 부인할 수 없는 유럽 전체의 그리스도교 작가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라신, 빅토르 위고를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젠츠바이크가 제게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253)

253) 같은 책, 95.

레비나스는 이스라엘의 선택받음 곧 의무의 넘침을 가지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의 화합[이해]에 대해 말한다.

스승이 나에게 가르쳤듯이 탈무드에서의 이스라엘 개념은 선택받음의 특수성과는 다른 모든 특수성과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선택받음은 의무의 넘침을 뜻한다.254)

254)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152.

이스라엘이 반불교, 반이슬람이나 반브라만교로 정의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와의 대립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도덕과 결합된 모든 사람과의 화합[이해]을 원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은 우선 문명에서 우리의 이웃들과 동료들인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과의 화합[이해]을 원한다.255)

255)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156.

레비나스는 특히 성서와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타자에 대한 인정을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 또는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갈등 때문에 이 영성화[spiritualization]에 부족한 모든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반대편의 가장 명석한 사유자들과 가끔 타협해 이제 이 시련을 진정시킬 때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수난들[les passions]은 어떤 세속의 정신들이 단언하듯 진정 거룩한 글들(성서들)로 정신을 함양하는가? 추상적 벌거벗음 속에서 성서[la Bible] 및 코란[du Coran]과 분리된 생각들은 평화의 중요한 생각들이 될 수 있는가? 생각들은 순전히 정치적 게임 속에서 소외의 지속적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가? 민주주의와 “인권”은 위험 없이 자신들의 예언자적이고 윤리적인 깊이와 분리될 수 있는가? 평화를 위해 추구한 고요함은 단순한 무차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서들[les Ecritures]이 가르치는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서 이 타자에 대한 인정과 분리할 수 없다. 물론 “경건하지만 효과 없는 설교”, “너그럽지 못한 교조[독단]주의”, “헤게모니의 유일신론”과 같은 몇몇 진부한 생각들의 낡아빠진 철학으로부터 책들의 유토피아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우리가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만큼 유토피아에 대해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라는 조건 아래 우리는 그 사랑을 볼 수 있다.256)

256) Emmanuel Levinas, L'au-delà du verset. Paris: Minuit, 1982, 12-13.

레비나스는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는데 여기서 그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들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심지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비로 알았던 모든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잊을 수 없는 일들. 저는 결국 이 고문, 이 불행, 이 히틀러주의의 구렁텅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에서 직접 유대 주민에게 준 관용[이해심, compréhension]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거기서 유대-그리스도교의 관계들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257) 종교 사이의 새로운 시작은 윤리, 자비, 사랑에 있는 것이다. 장공은 인간과 신과의 화목보다 인간과 인간의 화목 곧 윤리성을 제1차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257)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70.

인간과 신과의 화목을 앞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어쨌든 결국은 인간과 인간과의 和睦을 성취하는 것을 第一義的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258)

258) “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44-345.

장공이 인간 사이의 화목이나 평화를 제1의적인 것으로 보듯이 레비나스는 신을 반대하지 않지만 “인간과 신의 참된 관계는, 마치 기대를 거는 신이 없는 것처럼, 인간이 충분한 책임을 떠맡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달려있다”259)고 본다. 레비나스는 모든 신앙인들이 평화의 부재를 자기들의 신의 부재로 느낄 만큼 평화를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

259) Emmanuel Levinas, Les Imprévus de l'histoi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94, 161.

이 평화에 대한 추구는 도그마들과 분리할 수 없는 종교를 반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그마들은 증명되지 않고 계시되기 때문이고 인간들을 통일시키는 생각이나 행동의 형태들과 충돌하며 인간들에게 불화와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신앙인들이 이 평화의 부재를 자기들의 신의 부재로 느낄 만큼 어떤 종교의 특수주의가 평화를 섬기는 데 있다면, 만일 가깝거나 먼 이웃들과 신앙인을 구별하는 주체의 사명이 신앙인을 압제적인 것으로도 침입하는 것으로도 만들지 않고 더 열려 있고 더 영접하게 한다면 종교는 세속성의 이상에 이른다.260)

260) 같은 책, 159-160.

레비나스는 더 구체적으로 자비를 베푼 사람들과 종교와 동물을 거명하면서 그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다. “레비나스의 가족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협력 아래 1940년 6월에 시작된 피의 대학살 시기에 나치에 의해 살해당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동생들과 어머니, 아버지가 코프노에 근접해 있는 나치에 의해 총살된 것 같다. 가깝고 더 먼 살해당한 가족들의 이름은 그의 두 번째 주저인『존재와 다르게 또는 본질을 넘어』에 대한 히브리어 헌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부인 라이사와 딸 시몬 레비나스는 처음에 용감한 프랑스 친구들, 특히 수잔 푸아리에(Suzanne Poirier), 베르뒤롱(Verduron)”, 그리고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문학비평가인 “모리스 블랑쇼(Blanchot) 부부가 보호했다.”261) 그리고 오를레앙에서 가까운 성 뱅상 드 폴(St. Vincent de Paul)이라는 수도원에서 부인과 딸을 숨겨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261) The Cambridge Companion to Levinas, edited by Adriaan T. Peperzak, Simon Critchley, and Robert Bernascon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ⅹiⅹ.

일반적으로 히틀러가 박해하는 동안에만 그리스도교의 자비가 수많은 우리들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의 역설. 저는 늘 혼자말로 아우슈비츠의 사형 집행인들이 그들이 개신교인이든 가톨릭교인이든 간에 모두 교리문답을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명의 시민 안에서 알려진 것, 다시 말해 수많은 우리들을 환대하고 도왔으며 자주 목숨을 구해준 소박한 신앙인들과 위계질서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로 잊을 수 없으며, 수많은 속임수와 위험이 있었지만 아내와 딸을 오를레앙에서 가까운 성 뱅상 드 폴(St. Vincent de Paul)이라는 수도원에 숨겨 목숨을 구해준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262)

262)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40-41.

레비나스는 “1940년 6월 제10 프랑스군과 함께 렌스(Rennes)에서 전쟁포로가 돼 몇 개월 동안 프론트수용소(Frontstalag)에 수용됐다. 레비나스는 그 뒤 북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와 가까운 팔린포스텔(Fallinpostel)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레비나스는 프랑스군 장교였기 때문에 일반 집단수용소가 아닌 군인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숲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그가 속한 포로수용소의 번호는 1492인데, 1492년은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강제로 추방된 해다. 유대인 포로들은 비유대인과 분리됐고,?JUD'라는 낱말이 적힌 유니폼을 입었다.”263) 레비나스는 포로수용소에서 비록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했지만 종군신부 아베 피에르(Abbé Pierre)의 형제애적 인간성을 존경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을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263) The Cambridge Companion to Levinas, edited by Adriaan T. Peperzak, Simon Critchley, and Robert Bernascon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ⅹiⅹ.

물 음: 수용돼 있는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레비나스: 우리가 독일 하노버 근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을 때 새로 온 사람들은 분리됐습니다. 다시 말해 한 쪽은 유대인, 다른 한 쪽은 비유대인으로 분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특공대로 보내질 운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기에 포로수용소에 있는 어떤 사람의 형제애적 인간성-이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매우 중요한 경험 가운데 하나입니다-을 존경했는데 이 분은 제가 포로수용소에서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몸짓 하나 하나가 우리 안에 있는 존엄성에 대한 의식을 회복시켰던 분입니다. 이 분의 성함은 아베 피에르(Abbé Pierre)였습니다. 그 분의 성씨는 몰랐습니다. 그 때부터 프랑스의 자비에 대해 쓴 기록에서 아베 피에르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도왔고 위로했던 이 분을 늘 생각합니다, 마치 악몽이 사라진 것처럼, 언어 그 자체가 잃어버린 자기의 악센트를 되찾고 타락 이전에 고귀함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나중에 유대인 특공대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베 피에로와 다시 말하기 위해 포로수용소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264)

264) 같은 책, 40.

레비나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동물은 포로수용소에서 독일인들과 다르게 포로들을 환대한 보비(Bobby)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개다.

이제 친절한 작은 개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작은 개는 어느 날 곧 일터로 갈 때 우리 포로들과 교제를 나눴습니다. 간수는 막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개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개는 특공대에 남고 우리만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매우 만족한 그 개는 깡충깡충 뛰면서 우리를 환대했습니다. 마을을 지나갈 때 주민들이 우리를 유대인들로 생각했을 독일의 이 구석진 고장에서, 그 개는 확실히 우리를 인간들로 대했습니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거나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확실했습니다. 이 작은 개는 수용소 입구에서 명랑하게 짖고 우리 주위에서 정답게 위아래로 펄뜩이면서 우리를 환대했습니다.265)

265) 같은 책, 41.

레비나스는 포로들을 유일하게 인간으로 대우한 보비를 독일 나치의 마지막 칸트주의자라고 부르고 심지어 동물의 신앙이라고 말할 만큼 높이 평가한다.

준칙들과 그것의 욕구들을 보편화하는 데 필요한 뇌가 없는, 독일 나치의 마지막 칸트주의자. 그 개는 이집트의 개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개의 다정한 개 짖는 소리-동물의 신앙-는 나일 강가의 자기 조상의 침묵에서 태어났다.266)

266) Emmanuel Levinas, Difficile Liberté. Paris: Albin Michel, 1976[1963], 216.

보비가 이집트의 개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출애굽기 11장 7a절(“그러나 이집트의 개마저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서는 짖지 않을 것이다.”)이 말하듯이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짖지 않을” 개가 바로 보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비는 포로들을 보고 짖지 않은 이집트의 개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친구들과 그리스도인의 도움과 개의 환대가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억 속에서 레비나스는 종교간의 대화에 희망을 건다. 레비나스는 장공처럼267)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뤄진 종교간 대화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67) “교회도 하나의 교회를 향하여 노력하고 있다. 세계교회 운동이 그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 일치 운동은 또한 기독교와 타종교들과의 관계, 신자, 불신자 관계에도 확대되고 있다. 나누이는 데서 합하는 데로, 다투는 데서 화해하는 데로, 지배하는 데서 봉사하는 데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非基督敎的 宗敎에 대한 이해”,『김재준 전집』7, 339)

‘비그리스도교 종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이라는 텍스트와 교황의 로마 회당 방문과 같은 사건들-이스라엘 국가 교회가 아직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심히 유감입니다-은 스스로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들을 증명하는 중요하고 매우 결정적인 사건들입니다.268)

268) Is it Righteous to be? Interviews with Emmanuel Levinas, edited by Jill Robbins. Palo Alto, California: Stanford UP, 2001, 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에 대한 나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제게 있어 하나의 논리적 결과고 우리가 지난 일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해 만든 하나의 증거입니다. 두 종교의 공통점을 자기 낮춤이라는 이론에서, 곧 모든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에서, 모든-인간들을-위함이라는 개념에서 허용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269)

269) Emmanuel Levinas, À l'heure des nations. Paris:: Minuit, 1988, 192.

[Ⅵ] 나가는 말

필자는 첫째, 장공의 성서 텍스트에 대한 인식을 고찰했다. 장공의 성서 텍스트에 대한 인식은 정통주의자와 현대주의자와 다르게 그리스도의 심정에 기초한다. 장공은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보려고 했다. 또한 장공은 성서에 대해 변증법적 분열과 종합 이전에 타자성의 태도를 가지고 성서를 다르게 노래하려고 했다. 필자는 장공이 당대에 영감에 의해 성서를 다르게 읽으려는 지속적 읽기의 과정에서 정통주의자들과 충돌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장공 이후 지속적 읽기의 과정이다. 지속적 읽기는 그저 포스트모던적 의미의 다원주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타자를 성서[타자]되게 하는 것이고 성서[타자]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장공의 타자의 윤리 또한 그리스도의 심정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깨보는 마음이다. 장공은 그리스도의 심정 곧 깨보는 마음을 가지고 죽음으로 노출됐거나 노출될 타자들을 인식했다.

둘째, 예언과 예언자에 대한 장공과 레비나스의 인식 문제는 큰 틀에서는 공명하지만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장공과 레비나스는 예언이 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발생한다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언에서 장공이 순종과 동시에 녹음기의 재생과 다르게 주체의 결단을 통한 다르게 말함을 강조하는 반면에 레비나스는 무한의 부름에 대한 주체의 참여 이전의 순종을 강조하는데 이 순종이 예언과 영감을 낳는다. 그렇지만 레비나스가, 그의 메시아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식적으로 인격적 결단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또한 양자는 모두 책임을 통한 자유를 말한다. 더불어 장공과 레비나스는 사형제 폐지에 의견을 같이한다. 혁명에 대해선 양자 모두 연속혁명을 강조한다.

셋째, 장공은 예수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에서 예수를 만인을 섬기는 큰 사람으로 생각한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만인에 대한 섬김, 사랑, 공감,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속, 속죄, 자기 비움, 책임이다. 대속은 처음부터 타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특히 장공의 성육신 신학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계의 구원이다. 우리는 사람과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기계를 지키는 자이다.

넷째, 장공은 타종교와의 관계 문제에서 그리스도중심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첫눈에 장공의 그리스도중심적 태도가 포섭과 성취의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장공이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와 완전성을 성취해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동일성[정체성]을 확인하는 그저 자기 소외 없는 그리스도중심적 태도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 장공은 나를 지배욕의 종교에서 봉사와 사랑의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 제1차적인 것이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장공은 사랑의 진실 속에서 타종교와의 일치를 추구한다. 레비나스는 로젠츠바이크를 따라 유대교중심적이지만 자신만의 유대교에 대한 해석을 통해 도덕과 윤리, 평화와 사랑을 제1차적인 것으로 본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레비나스가 도덕으로 정의되는 노아의 후예라는 탈무드 개념을 가지고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지위, 예배 없는 인간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대화 이전에 새로운 인내 곧 어린양의 태도를 강조한다. 또한 레비나스는 종교간의 대화와 공생의 가능성을 찾으면서 종합과 혼합주의 없이 하나의 진리가 두 가지 형태의 진리(토라와 연민)로 표현될 수 있음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로부터 배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되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대화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장공의 신앙 및 신학사상과 레비나스의 사상을 아우르는 말이 케노시스라고 생각한다. 장공은 말한다. “신앙은…순간순간 죽음에 직면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끼는 심정이다.”270) “신앙은 선(線)을 타고 미끄러져가는 것이 아니라, 점(點)과 점을, 그 단절(斷絶), 또는 종말에서 부단의 자기 부정과 동시에 부단의 신(神)의 긍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은총에서의 생활인 것이다.”271) 레비나스는 말한다. “주체성, 영혼은 타자를-위한-일자[나, 인간]로서의 타자를-위함에서 수동적으로 구조화돼 있다. 내 자신의 자세는 타자를-위함(le pour-l'autre),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나의 속죄다(왜냐하면 책임에는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처럼 자기의 자리를 상실한 사람이다. 이 상실 없이 나는 늘 하나의 점과 하나의 단단한 점으로 남아 있다.”272) “자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면서 끊임없이 죽고 자기의 순간에서 지속하며 ‘일생을 보내는’ 소환된 사람들의 철저한 인내 속에서의 동일성[정체성]. 자아의 자기로의 전환[회귀], 다시 말해 자아의 입장을 벗어남 또는 자아의 자리[장소]를-벗어남 그것은 표현과 줌을 바쳐진, 그러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바쳐진 신체적 삶으로서 무사심의 양태 자체다. 다시 말해 줌, 고통과 상처의 가능성 자체처럼 물질화[성육신]에서 자기를 무릅쓰는 자기.”273)

270) “同形化와 異質化”,『김재준 전집』7, 208. 271) “同形化와 異質化”,『김재준 전집』7, 208.
272) Emmanuel 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Paris: Grasset, 1993, 182.
273)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4, 82.

김 성 호 박사

한신대 신학과와 동대학원(Th.M.) 졸업 성공회대에서 손규태 명예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Th.D.) 받음
논문 제목: <케노시스에서 본 레비나스의 책임윤리- ‘나는 순간순간 죽습니다.’>

번역서

콜린 데이비스,『타자를 향한 욕망-레비나스 입문』, 다산글방, 2001

미간행 번역서 『존재한다는 것은 옳은가?-레비나스와의 대화』

현재 레비나스의『우리-사이』와 중남미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Enrique Dussel)의『해방철학』을 번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