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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23회] 장공 영성과 한국교회 / 이덕주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01 18:38
조회
3062

[제23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0년 9월 9일(목) 오후 5-7시

장공 영성과 한국교회

이덕주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 한국교회사)

[I] 머릿글

어른이 그립다. 그냥 어른 말고 참 어른이 그립다. 그저 얼굴만 봐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존경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어른. 그 앞에만 서면 자연스럽게 무릎이 꿇게 되는 그런 어른. 집안에서, 자기 동네, 자기 교회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그런 어른이 아니라 장소와 위치, 종파를 떠나 어느 누구에나 권위를 인정받는 그런 어른 말이다. 나라와 교회가 혼돈과 갈등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요즘과 같은 때에 사리사욕에 매이지 않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솔선수범 정도(正道)의 길을 보여주고 걸어가는 그런 참 어른이 그립다.

말씀이 그립다. 그냥 말씀이 아니라 참 말씀이 아쉽다. 듣는 순간 눈이 열리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말씀. 듣고서는 그대로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말씀. 입에서 귀로 전달되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감동과 감격의 말씀. 교리와 신앙이 달라도 듣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말씀 말이다. 함부로 말하고 쓰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가 한 말과 글에 대해서는 전존재를 걸고 실천해 보임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 그런 말씀이 실로 그립다.

영성이 그립다. 그냥 영성이 아니라 참 영성이 그립다. 걷잡을 수 없는 감동과 감격으로 임하여 버리지 못했던 과거의 잘못된 생각과 관행을 일거에 척결하도록 만드는 영성. 그러나 은사 조금 받았다고 혼자 성령을 받은 냥 설치고 떠들고 남을 판단하는 그런 가짜 영성 말고 받을수록 고요하고, 깊을수록 잠잠하고, 오랠수록 겸손해지는 그런 영성 말이다. 설교자의 말과 행실이 다르고, 신도들의 교회 안 생활과 밖 생활이 다르고, 신학자의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것으로 인해 교회와 신학의 권위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절에, 정말 가슴에서 시작되어 머리를 통해 몸에 이르기까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과 순종을 이끌어내는 그런 영성이 그립다.

이처럼 참 어른, 참 말씀이, 참 영성이 그리운 것은 오늘 한국교회 현실이 너무도 세속적이고, 형식적이며, 비신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에 취하여 교인 숫자와 예배당 크기, 화려한 치장과 과시적 행사에 취하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붕괴의 검은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위기와 시련의 역사였지만 참으로 순수한 영성의 말씀이, 권위 있는 지도자들의 희생이 있어 위기를 기회로, 시련을 은총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런 역사에서 지혜를 얻어 오늘 위기를 극복할 방도를 찾는 길 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일제말기, 그리고 해방 후 분단 시대를 목회자로, 신학자로 살면서 올곧게 자신의 신념을 삶으로 표현해 냈던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의 말씀을 읽기로 했다. 그의 말재주는 별로였지만 글재주는 대단하여서 그가 글로 쏟아낸 말씀이 너무도 많아 취사선택이 어려울 정도인데, 이번에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주제로 삼아 골라 읽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늘 한국교회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목회와 신학의 ‘영성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먼저 ‘영성’이란 개념을 정리하고 들어가자. ‘영성’에 대한 장공의 정의다.

“인간에게는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사귈 수 있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 위에서 자기를 객관화하여, 자기를 비판할 능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영성’(靈性)입니다. 하느님 형상의 작업입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연 안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날마다 걱정하면서 노동의 괴로움을 겪습니다. 내 사회, 내 나라 없이 사는 슬픔을 면하려고 적과 싸워 목숨을 나라의 제단에 바칩니다. 그래서 역사가 창조됩니다.”1)

1) “歷史의 原點,”《金在俊 全集》(이하《전집》) 18, 한신대학출판부, 1992, 222쪽.

장공은 ‘영성’을 ‘인간과 하느님의 인격적 사귐’, ‘인간의 자기 초월’, ‘하느님 형상화 작업’, ‘자연 속의 역사 창조’ 등으로 설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속의 초월 체험과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성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것이다. 현실과 초월의 만남, 그것이 종교요, 역사다. 장공이 평생 종교(기독교)와 역사에 솔직하고 충실하려 노력하였던 것도 이런 ‘영성’ 체험과 구현의지 때문이었다. 이것을 ‘장공영성’(長空靈性, Changgong spirituality)이라 부르겠다. 따라서 이 글은 현실에서 장공이 초월을 어떻게 체험하고 해석하였으며, 그렇게 체득한 초월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하며 살았는지 그 삶의 여정을 추적하는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Ⅱ] 고향, 조상들의 땅

장공은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두만강 국경 마을에서 1901년 9월 26일 경주김씨 가문의 김호병과 채씨 사이 2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2) 장공은 생애말년, 특히 캐나다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한 1983년 이후에 강연과 설교, 집필과 답사 등으로 바쁜 틈틈이 족보 정리와 가문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여행을 즐겼다. 그런 식으로 1984년 8월, 후배 몇 명과 함께 영남지방을 여행하던 중 경주에 들러 경주김씨 시조설화를 머금고 있는 계림에서 특별한 ‘혈연감’(血緣感)을 느끼기도 했다.

2) 김경재,《김재준평전: 성육신과 대승 기독교》, 삼인, 2004, 11쪽.

“始林 또는 鷄林에도 들렸다. 김씨의 最高始祖이기 때문에 血緣感이 있다.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 자신은 閼智의 61세손으로 되어 있다. 밤중에 닭이 울었다는 전설과 金궤가 결려 있었다는 居木도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어딘지 친근감이 심장에 와 닿는다.”3)

3) 김재준.《歸國直後》, 184쪽.

그 한 달 전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가문의 중시조(中始祖) 익화군(益和君)의 묘소를 찾았다.

“族譜에 적힌 대로, 또 北靑 忠賢祠誌등 허다한 문헌대로 본다면 李朝以來의 우리 近祖는 開國 一等功臣 益和君 金仁贊氏로 되어 있다. 仁贊氏는 左贊成封益和君典楊根伯諡忠愍墓在楊州君左基洞酉坐原이라 적혀있다. 우리 代는 閼智(世祖王)으로부터 61世, 敬順王으로부터 35世, 益和君으로부터 29世孫이다. 그런 관계로 서울 근처인 양주에 있는 익화군 묘소에 성묘할 생각이 간절했다. 李春雨 장로가 자기차로 모신다 해서 동승했다. 자세한 지도를 얻어 그대로 찾아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坡平尹氏네 先山이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4)

4) 위 책, 131쪽.

중시조 익화군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건국한 ‘개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좌찬성 벼슬을 했고 양근(양주)을 식읍으로 얻어 그 후손들이 퍼져나갔는데 그 중 한 갈래가 조선 후기 함경도 경흥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집안 할아버지들로부터 이런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장공은 ‘글 하는’ 유교선비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서당 교육’을 받는 것으로 의식(意識) 세계를 세워나갔다. 그 시절, 그가 살았던 경흥 땅은 옛 질서와 새로운 문명, 전통 종교와 새로 들어온 종교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곳이었다.

경흥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낯선’ 종교를 전하는 기독교 매서인, 전도자들도 있었다. 장공의 부친도 그런 매서인들에게 종종 전도를 받았으나 일언지하에 “나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하는 사람이오.” 거절하였고 설혹 매서인이 유교와 기독교에 공통점이 있으니 성경책을 한 번 읽어보라 식으로 권할라치면, “공호이단(攻乎異端)이면 사해야이(斯害也已)라고 했오. 나같이 공맹의 정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예수교에 공맹의 말씀과 비슷한 것이 있다 셈치더라도 이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으니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도 닦는데 손해 볼 것 뿐일 것 같소.”하고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장공은 이런 부친과 전도인의 ‘영적 전쟁’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공은 훗날(1961년), 그 장면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전도인은 아침에 또 전도를 했으나 종시 말이 들지 않았다. 그는 몹시 답답한 모양이어서 옆에 있는 쇠화로를 부저로 ‘땅’ 치면서 ‘쇠도 때리면 소리 나는데 주인장은 왜 그렇게도 반응이 없으시오?’ 했다. 그리고서 그는 하룻밤 자고 식사한 신세 갚음이라면서 국한문 신역성경 한 권을 두고 갔다. ‘주인장께서는 안 믿어도 후에 자손들 중에서 믿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 성경을 잘 간직해 주시오.’”5)

5) “인생의 만추”,《전집》5, 308~309쪽.

어린 장공은 아버지가 이겼다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세파와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기개이자, 자신이 믿고 따르는 가르침에 대한 자부심과 자손심의 표현이었다. 장공은 자신도 그렇게 살리라 결심했다.

“나는 물론 철저한 아버지 편이었다. 너무 재잘거리는 전도인을 경멸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예수쟁이는 안 된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그 후에도 딴 전도인들이 여러 번 들려서 ‘쪽복음’ 같은 것을 두고 갔었다. 우리 형은 그 쪽 복음을 뜯어 거기다 담배를 말아 먹었다. 나는 일부러 먹을 갈아 그 쪽 복음 책에다 먹칠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전에 받은 큼직한 국한문 신약 성경책은 아마도 감히 다치질 못했고 형님도 자기 궤짝 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다.”6)

6) 위 글, 309쪽.

이처럼 기독교에 대해서는 완고하였던 부친이었지만 급변하는 세상물정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장공에게 ‘신식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장공은 9세 때 경원 향동소학교에 편입하였고 계속해서 경원보통학교를 거쳐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16세에 회령군청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세 때 집안 어른들의 주선으로 한 살 아래 ‘순박한 농녀’ 장분녀(莊粉女)와 결혼했다.7) 그리고 결혼과 함께 직장을 웅기금융조합으로 옮겼는데, 주변에서는 결혼도 했겠다, 직장도 안정적이겠다, 이제는 평탄한 생활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정작 장공의 고민과 도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항구도시 웅기는 경흥이나 회령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특히 은밀하게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지사들을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넓은 세상을 향한’ 장공의 꿈이 영글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교적 외경심’으로 시작되었다.

7) “아내 이야기”,《전집》18, 483쪽.

“내가 19세 때 웅기에 있었는데 하루는 웅상에서 고개를 넘어 웅기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완경사의 길 중턱쯤에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습니다. 신사래야 작고 작은 막사 같은 것이어서 사람이 지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제법 큰 문짝 없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웬셈인지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숭엄한 외경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경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게 내재한 종교성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교에서의 제사 때보다 훨씬 더 짙은 종교 감정이었다고 하겠습니다.”8)

8) “조약돌 몇 개”,《전집》18, 399~400쪽.

장공은 집안의 전통 종교인 유교의 제사의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숭엄한 외경심’을 일본인 신사(神社)에서 느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며칠 후에 나는 꿈에 다시 그 고장에 가서 웅기항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웅기항에 아주 화려하고 찬란한 목선이 한 척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지개를 싣고 오는 배인 것 같았습니다. 그 배에 사람이 하나 타고 있었는데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백옥석 비석 하나를 배에 싣고 와서 항구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석을 내가 서 있는 곳에 운반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백석은 매끈하게 다듬은 것이었습니다만 글자는 새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비석을 가져온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 네 스스로 이 비석에 새길 비문을 지어 새겨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해서 망설이는 동안에 꿈에서 깨었습니다.”9)

9) 위 글, 400쪽.

항구, 배, 낯선 사람,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백옥(白玉) 비석. 당시로서는 해몽하기 어려웠지만 장공에겐 긴 세월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80년 긴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서야 그 꿈의 계시가 감격으로 확인되었다.

“그때에는 나는 예수교 신자도 아니었고 신자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80평생을 지내고 보면 하느님이 나를 알고 계셨다는 은혜의 감격을 느끼게 합니다. 웅기에서의 나의 기록은 부끄러운 참회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10)

10) 위 글.

올곧은 선비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시작하여 국경마을에서 겪었던 변화의 시대 체험, 매서인이 놓고 간 국한문 성경책, 일본 신사 앞에서 느낀 종교적 외경심, 그리고 꿈속에 본 웅기 항구의 빈(空) 비석. 모든 것이 장공이 살아야 할 미래에 대한 암시이자 계시였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어 살아갈 미래를 예비하여 미리 보여준 은총의 계시였다. 칼뱅과 웨슬리가 공히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구원의 첫 단계로 제시한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장공에게 ‘선행은총’의 구체적인 계시는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 1898~1950?)을 통해 임했다. 장공보다 세 살 위인 만우는 장공과 같은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출신으로 12세 때 가출하여 북간도 명동촌에 가서 교육을 받고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려 했으나 이동휘로부터 “너는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 서울 피어선기념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할 즈음 삼일운동을 맞았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그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음은 물론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총독 저격사건과 독립운동 유인물배포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8월 석방되어 요양차 고향을 방문했는데, 그 참에 웅기와 회령 등지 교회를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하였다.11) 만우의 고향 웅상교회에서도12) 그런 강연회가 열렸다. 그렇게 해서 웅기에 내려온 만우를 장공이 만났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만우가 장공을 찾아가 만났다. 이 대목에 대한 장공의 증언이다.

11) 송우혜,《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 도서출판 생각나눔, 2008, 41~88쪽. 12) 경흥군에서는 1906년 서포항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이어서 1909년 웅기읍 웅상교회, 1910년 경흥읍교회, 1915년 굴포교회, 1921년 서수라교회, 1924년 아오지교회와 일유동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 신문내교회, 1928, 321쪽;《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 연세대학교출판부, 199~208쪽;《조선예수교장로회연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1940, 363~368쪽.

“[웅상]교회에서는 사흘 동안 특별강연회를 연다고 광고가 나 붙었다. 나는 교회 집회에는 냉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하숙방에 그이가 일부러 찾아왔다. 말끔하게 세련된 서울식 미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 같은 풋내기를 먼저 찾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이튿날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무척 반기면서, ‘지금 3·1운동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 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요!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잖습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 했다. 그 언어가 정답고 진실했다.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속으로는 들떴다.”13)

13) 《범용기》1, 독립신문사, 터론토, 1981, 59쪽;《전집》13, 42쪽.

만우의 단호한 ‘지시형’ 권면은 장공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動)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우의 “공부하라!”는 권면에 대한 반응이었지 그의 종교에 대해서까지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장공은 ‘유학(遊學)’을 결심했다. 마침 집안에서 일찍 개화물을 마셨던 백부가 그 무렵 서울에서 장도빈과 손을 잡고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차리고 문서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친도 “서울에 공부하러 가겠다.”는 아들의 계획을 막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장공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창 12:1) ‘이향’(離鄕)이 이루어졌다.

[Ⅲ] 거듭남, ‘영의 사람’이 되다

1920년 여름, 서울에 올라온 장공은 중동학교(中東學校) 고등과에 편입해서 ‘나이어린’ 학생들 틈에서 공부하면서 동시에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학관 영어부에도 등록하여 수업을 받았다. 훗날 장공과 함께 한국 신학계의 대표적 ‘진보주의’ 신학자로 활동하게 될 정경옥(鄭景玉)이 같은 반에서 영어를 배웠다.14) 장공은 기독교청년회 학관을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그에게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방인들의 종교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읽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명사들의 추천도서’에 성경이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것을 보고 고향의 ‘형님 궤짝’ 속에 들어있던 (어느 매서인이 놓고 간) 국한문 신약전서를 갖고 와서 읽어보았지만 감탄할 정도도 아니었고 흥미도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제일 좋은 책’이라고 하는 바람에 버리지 않았을 뿐이었다.15) 그런 그에게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4) 《범용기》1, 68쪽. 철마(鐵馬) 정경옥(1903~1945)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제적당한 후 고향 진도로 내려가 그곳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일본 유학을 준비하며 기독교청년회 학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선한용, “철마 정경옥 교수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정경옥 저작전집(1): 기독교신학개론》,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2005, 8쪽. 15) “인생의 만추”,《전집》5, 312쪽.

1920년 10월,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경기충청노회 연합사경회를 겸한 특별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강사는 김익두(金益斗) 목사였다. 3·1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는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16) 신유와 이적이 많이 일어나 교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승동교회에서 열린 연합부흥회에는 수천 명 군중이 몰려온 중에 “반지 20개, 비녀 200개, 은시계 20개, 금시계 2개를 포함하여 2,500달러 규모의 헌금이” 답지하여 선교사들까지 놀랄 정도였다.17) ‘인산인해’를 이룬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는 신도들보다 호기심을 갖고 온 구경꾼들이 더 많았다. 장공도 그런 구경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16) “김목사의 이적”, <동아일보>, 1920. 5. 30. 17) H.A. Rhodes, Some Results of the Kim Ik Tu Revival Meeting", The Korea Mission Field, May, 1921, 113~114쪽.

“나도 구경삼아 나갔다. 아마도 두 주일 가까이 계속했던가 싶다. 마감 날 나는 그의 설교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건 ‘닭이 달걀에서냐? 달걀이 닭에서냐?’ 하는 얘기였는데 창조주신 신앙이 없다면 모든 것이 순환일 뿐이요 해결은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옳다!’ 고 생각되자 ‘믿겠다!’고 결단했다. 갖고 온 예의 성경은 있었지만 찬송가는 없었다. 찬송가까지 사서 손에 든 때 내 가슴 속에는 무언가 뜨거움이 타 올랐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고장을 보면 기도할 의욕부터 생긴다. 성경을 밤새가며 읽었다. 감격해서 빨강연필로 줄을 무턱대고 그으면서 탐독했다.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났다.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 전 생활은 ‘분토’ 같이 여겨졌다. 나는 ‘새 사람’이 됐다고 느꼈다.”18)

18) “인생의 만추”,《전집》5, 312쪽.

그것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 어거스틴의 ‘밀라노 체험’,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체험’과 같은 것으로, 체험 전과 체험 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결정적 삶의 ‘분기점’(turning point)이었다. 장공도 이 체험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시절’(B.C.)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A.D.)이 나뉘었다. ‘거듭남’(重生)과 ‘신생’(新生)의 체험을 통과함으로 ‘기독자’ 장공의 삶이 시작되었다. 장공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신앙과 신학, 삶의 여정을 소개할 때면 예외 없이 ‘그 날의 사건’을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마감 날이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설교했다. ‘닭이 달걀에서 나오고 달걀이 닭에서 나오고’ 이렇게 암만 따져도 해결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포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만들어서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만물 중의 하나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요!’ 그 때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오! 등등. 나는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19)

19) 《범용기》1, 66쪽;《전집》13, 48쪽.

의심만 가고, 믿어지지 않더니 그 날, 김익두 목사의 입에서 나온 “믿으시오, 그러면 새 사람이 될 것이요.” 하는 말에 “그래, 믿어보자.” 결심하는 순간부터 ‘이상하게’(strangely) 말씀이 믿어지고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성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바로 ‘초월’의 체험이었다. 비로소 장공은 ‘영의 사람’(man of spirit)이 되었다. 그리고 장공에게도 ‘영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재현되었다. 전에는 지루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져 밤새 읽게 되었고 기도도 저절로 터져 나왔다. 장공은 그것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구도자는 다시 회상합니다. 내가 어찌하여 기도할 수 있었는가? 내가 어찌하여 성경을 발견하고 탐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엠마오 ‘길’에서의 두 제자와도 같이 구도자도 ‘그 누구’인 한 분을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우리’ 가슴이 뜨겁지 않더냐? 하고 그들도 회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를 이루어 역사 안에 나서 자라서 수고하며 사랑하며 가르치고 전파하며 두루 다니며 선을 행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몸으로 제물삼아 만민을 대속하신 이, 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승천하시고 재림을 약속하신 그이를 만났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도자가 그에게 알려지고 그에게 부름 받은 다음 그는 만족했습니다.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샘물’이 되고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서 솟아남을 느꼈습니다. ‘네게 오늘 구원이 임하였다!’ 하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무섭던 죽음의 환상이 저절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 이 말씀 하나로 죽음의 폭군은 허수아비같이 탈진해 버렸습니다.”20)

20) 위 글, 122쪽.

사실, 장공은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 참석하기 직전, ‘죽음의 문제’로 적지 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해 여름 호열자 전염병이 서울과 지방을 휩쓸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특히 그를 아껴주던 시집간 누이가 그 병으로 죽은 일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떠나지 않았는데, 그날 그 체험 이후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고 ‘새 생명’, ‘새 생활’에 대한 감격만이 그 안에 충만하였다. 그리고 그 체험은 그의 미래 삶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았다.

“‘내가 오늘 주님을 만났다.’ 그 순간 ‘나는 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들아!’ 하고 하는 불러주시는 하나님! ‘아바 아버지여’ 하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나! 새로운 감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도자’는 ‘순례자’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아니 사명을 가지고 외치며 달음질치는 ‘傳令者’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뜻이 인간사회와 자연에까지 이루어져서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변화하는 영광을 바라보며 아직도 ‘길손’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21)

21) 위 글, 123쪽.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자연인에서 ‘신앙인’으로, 구도자에서 ‘전도자’로 존재가 바뀌면서 그 삶의 목표도 바뀌었다.

[Ⅳ]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 영성’

‘영의 사람’이 된 장공은 자연스럽게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 3년 동안 세례 받기를 거부했다. 먼저 믿은 사람들, 특히 소위 ‘제직’이라 불리는 교회 지도자들의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신앙생활이 그로 하여금 제도권 교회 편입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승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구(金永耈) 목사로부터 “세례 받는 건 자네가 예수의 사람 됐다는데 대한 교회로서의 ‘공인증’이란 말이야.” 하는 말에 순종하고 1924년 4월 세례를 받았다.22) 장공은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삶으로 구현하는 김영구 목사에게서 참 목회자를 보았다.

22) 《범용기》1, 80쪽;《전집》13, 95쪽. 김영구 목사는 한말 대한제국 정부 탁지부 주사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한 “신비경험을 진주같이 간직한 지성인” 목회자로서 청년들에게 인기 많은 명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교회를 찾아오는 고아와 거지들을 정성으로 돌보면서 “생활은 청빈하여” 별세할 때(1928년)까지 “무일푼의 절량(絶糧)”을 실천했던 ‘고난의 목회자’였다. 김충렬 편저,《김영구 목사 ‘연설’ 들으러 가자》, 대한기독교서회, 2009, 175, 180쪽.

개종직후 장공의 신앙생활은 진리를 향한 탐구, 그 자체였다. 청년회학관 성경공부와 교회 예배 설교로는 채워질 수 없는 탐구의 우물이었다. 그는 성경공부와 강연으로 부족한 부분을 독서로 채웠다.

“신앙의 첫 결심이라, 성경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1961년] 탑동공원 입구에 있는 경성도서관에 매일 들어가 거기 있는 기독교 서적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내촌(內村), 하천(賀川) 등의 저서가 제일 많았는데, 무슨 책이구간에 감격으로 읽었다. 그 내용의 자세한 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 같은 데는 착념할 사이도 없이 미리부터 만족하면서 읽었다.”23)

23) “蔓生餘錄”(1961),《전집》5, 178쪽.

일본의 무교회주의 신학자 우찌무라(內村鑑三), 기독교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고베에서 결핵환자와 빈민 공동체운동을 전개하던 가가와(賀川豊彦)의 책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 무렵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톨스토이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공이 일생에 그리스도 다음으로 ‘본 받아 살고 싶어했던’ 성 프란체스코를 만났다.

“앗시시의 성푸랜체스코에 관한 책들도 있는 대로 다 읽었다. 특히 그 때 막 서점에서 새로 나온 宮崎安右衛門씨의 ‘앗시시의 성 푸랜체스코’란 책은 낭만적인 미문으로 된 것이어서 큰 감명에 눈물겨워하며 읽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아본다고 무일푼의 ‘탁발행각’을 꿈꾸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 거지한테 단벌 외투를 벗어 입혀 보내구서는 황혼에 그이 뒤를 몰래 따라가면서 ‘저이가 혹시 예수님으로 화하지나 않나!’ 하고 진지하게 기대해본 적도 있었다.”24)

24) 위 글, 179쪽.

장공은 이 대목을 이렇게 증언하기도 했다.

“나는 아씨시 성프란시스의 전기를 탐독했다. 그의 출가 광경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일푼의 ‘탁발승’으로 평생 걸식 방랑한 ‘공’(空)의 기록. ‘공’에 회리바람처럼 몰려드는 하나님의 사랑-그것이 퍼져가는 인간과 자연에의 사랑-이런 것이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하천풍언의 ‘고베’ 빈민촌 생활을 동경하며 ‘일등원’(一等園) 그룹의 무소유 생활도 그려봤다. 그런데로 가서 그런 그룹에 동참하고 싶었다.”25)

25) 《범용기》1, 74쪽;《전집》13, 54~55쪽.

그 무렵 장공은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활형편으로 보면 영적으로는 ‘충만’ 그 자체였지만 육적으로는 ‘궁핍’ 그 자체였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향 집에선 생활비 지원을 중단했고 초기 유학생활을 도와주었던 백부도 사업 실패로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그가 프란체스코를 읽고 감동을 받을 즈음엔, 아내가 보내준 ‘명주이불’마저 밀린 하숙비 대신 볼모로 잡혀놓고 하숙집에서 쫓겨난 형편이었다. 이런 경제적 궁핍 속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난 것이다.

“그 때는 내가 돈과 인간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던 때였습니다. 첫째,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 집, 자기 밭을 사고 넉넉하게 살자. 둘째,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은 선한 살업을 하자. 셋째. 그저 자기 생활할 만큼 최소한도의 생활비만 갖고 소위 안부모보처자(安父母保妻子)로 조촐하게 살자. 넷째, 온전히 돈을 무시하고 살자. ‘돈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무일푼으로 살자 하는 네 가지 과제였습니다. 결국 나는 제4를 택했습니다. 그러던 무렵이라 하숙에서 쫓겨난 것이 오히려 개선장군 같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나는 소복하게 내리고 아직도 내리는 하얀 첫 눈에 첫 발자욱을 인치면서 한 없이 걸었습니다.”26)

26) “아시시 프란시스와 나”(1986),《전집》18, 213~214쪽.

영적인 사람에겐 시련과 고난이 은총으로 새겨지듯 돈이 없어 하숙집에서 쫓겨난 장공에게 프란체스코는 새로운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장공은 이 무렵 성경 다음으로 프란체스코를 탐독했다. 장공이 어느 정도 프란체스코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는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송창근에게 보낸 원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원고는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 기관지 <사명>(使命) 제3호(1926년)에 “예찬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아씨시의 성자여, 볼딩구라 거친 초방(草房)의 한 구속에서 제단도 사제도 없이 주의 성찬을 지키시고 깊은 침묵 가운데 저 세상으로 옮기신 성자여, 당신이 가신지 700유여년 움부리아의 봄풀은 해마다 푸릅니다. 그러나 흐르고 으르는 큰 물결의 한 구비인 이 세상은 너무 변하지 않았습니까. 성자여,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가슴에 안기셨습니다. 거만(巨萬)의 부(富)를 가질 수도 있었으며 영예로운 무사(武士)도 될 수 있었습니다. 청춘의 붉은 노래 속에서 향연의 왕이라고 젊은이의 찬탄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막히게 맑은 움부리아 창공에 흰 구름이 흐르고 무너진 아씨시 성 틈에 하염없는 풀이 푸른 봄날, 교외로 거니는 병여(病餘)의 당신 가슴 속에는 하염없는 공허가 느끼어졌습니다.”27)

27) “예찬의 말씀”, <使命> 3호,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 1926;《전집》1, 1쪽.

장공은 계속해서 “성자여! 당신은 사랑으로 만상을 포용하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의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대로에서 통곡하셨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시고 참회를 끊이지 않으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가장 작은이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참으로 순진하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성자여! 그러나 당신의 자광편조(慈光遍照)하시는 거룩한 인격 속에는 아무도 손대지 못할 준엄한 힘이 숨어 흐름을 봅니다.”는 제목으로 프란체스코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한 후, 프란체스코 관점에서 당시 한국교회와 사회현실을 비판하였다.

“성자여! 당신이 가신 후 700여년. 세상에는 성빈(聖貧)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맘몬의 발아래 엎드려 잇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기계와 기계의 접촉같이 차갑게 되었습니다. 유혈과 다툼이 진리가 되었습니다. 자비는 자기 죄악의 엄식물(掩飾物)이 되었으며 위선자의 피난처만 불었습니다. 나팔과 꽹과리 소리에 가두(街頭)는 소연(騷然)합니다. 영리한 조그만 요마(妖魔)가 지붕에서 지붕으로 원숭이같이 춤을 춥니다. 수만(數萬)의 발자국 소리는 망령(亡靈)의 영탄(詠嘆)과 함께 멸절로 흘러갑니다. 성자여. 당신이 세상에 계실 때 교회당 안에는 도박과 고리대금이 공개되었으며 승직(僧職)을 매매하며 빛 다른 여자가 방황하였다 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눈으로 어찌 그 현상을 참고 보셨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겸손하게 말없이 앉으셔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성자여. 지금은 말세라고들 합니다. 미래세계의 물결소리가 원뇌(遠雷)같이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거치른 우리 영혼의 폐허를 바라보며 성자의 발자취를 사모하여 예찬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아멘.”28)

28) 위 글, 2~3쪽.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고 모든 것을 초월하였던 프란체스코의 청빈 수도와 사랑 실천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장공에게 구체적인 좌표가 되었다. 그가 ‘장공’(長空)이란 호를 얻게 된 내력도 프란체스코 때문이었다.

“내 원고 뭉치를 받은 동경의 만우 형은 나에게 ‘장공’(長空)이란 호를 지어 보내왔습니다. 그 속에는 ‘무일푼의 방랑자’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나는 내 눈동자가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행복을 조물주께 감사합니다. 나는 길바닥에서 배를 땅에 붙이고 꿈틀거리며 움직이다가 밭의 흙 속에 파고들어 흙에 묻혀 죽은 굼벵이는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아시시 성자는 나의 보호 성자입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사람을 나도 존경합니다.”29)

29) “아시시 프란시스와 나”,《전집》18, 217쪽.

장공은 프란체스코 ‘예찬’ 원고와 함께 자신이 읽었던 프란체스코 전기를 만우에게 보냈던 바, 그것을 읽은 만우는 장공보다 더한 ‘프란체스코 광(狂)’이 되어 ‘성빈’(聖貧)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았다.30) 아무튼 이후 장공은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생활에서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생애 말년까지 프란체스코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다.

30) 장공은 만우에게 프란체스코 책을 보냈던 것을 회고하면서 “내 생각으로는 만우 형이 아시시의 성자와 친하게 된 것은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적었다. 위 글.

“나는 오랜 후에 선린형제단이란 것을 구상하여 동지 그룹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동기도 성 프란시스의 감화였습니다. 조금 기준을 낮춰서 ‘우리는 자기와 자기 직계 가족의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를 갖지 않는다. 남는 것은 모두 이웃 사랑을 위하여 바친다.’하는 생활강령의 하나도 프란시스적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1986년]도 무일푼입니다. 향린 동산에 분양된 땅이 한 3백 평 있습니다만 거기에 내 집을 짓고 살아볼 기회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의 영토라면 10피트×6피트의 방 하나라 하겠는데 그 좁은 공간에 전 우주와 세계의 신비를 간직하고 불평도 불만도 없이 삽니다. 그래도 아시시 성자보다 과분한 생활을 한다고 미안해하며 삽니다.”31)

31) 위 글.

이후 장공이 일본과 미국 유학시절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번듯한 ‘일자리’ 없이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에도,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신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 심지어 ‘이단 신학자’라는 억울한 누명과 모함을 받으며 교회 밖으로 추방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살벌했던 군사독재시절 온갖 탄압과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난과 고난과 고독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살았던 프란체스코의 ‘청빈 영성’(淸貧靈性, honest poverty spirituality)을 사모하고 따르려 했던 장공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Ⅴ] 인도 성자 선다싱의 ‘전도자 영성’

프란체스코 영성에 사로잡혀 가난과 고독을 나름대로 ‘즐기며’ 살던 장공은 영양실조에 이질까지 겹쳐 육신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장공은 ‘순교’의 기회를 엿보며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호기’(豪氣)를 부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형이 올라와 그를 강제로 데리고 내려감으로 ‘영웅적 죽음’을 보여줄 기회를 놓쳤다. 1924년 여름, 억지로 끌려 고향에 내려간 장공은 그것을 가족전도의 기회로 알고 열심히 전도했다. 하지만 부친은 전보다 더 완강한 자세로 거부했고 ‘이단사설’에 빠진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가족과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장공은 당시 자신의 처지를 “이방인 진영에 포로가 된 심정”, “북새에 귀양 간 충신의 고독”으로 표현했다.32) 귀향이 아니라 귀양 생활이었다.

32) “조약돌 몇 개”(1986),《전집》18, 409쪽.

장공으로 하여금 그 고독을 벗어나게 만든 것이 소학교 교사생활이었다. 서울에서 고등과를 나온 청년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인근 노서면 용현동(龍峴洞)에 있는 소학교에서 교사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용현동에는 침례교 계통의 ‘대한기독교회’ 교인들이 있어 장공은 그들 집회에 가서 설교도 하면서 신앙생활의 숨통이 조금 틔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향 근처 8개 마을 주민들이 기존 서당들을 폐지하고 대신 상하면 귀락동(貴洛洞)에 소학교를 세우고 장공을 고등과 교사로 초빙하였다. 장공은 거기서 학생들에게 신학문과 함께 기독교 신앙도 가르쳤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자신감을 얻고 교실에서 주일예배를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소학 교육을 시키려고 학교를 창설한 것이지 예수장이 만들려고 학교 하는거냐?’ 그러나 나는 밤에도 학교 교실에서 기도하며 혼자 지냈습니다. 식사는 옆집에서 시켜왔습니다. 설교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요령 없이 지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듣고 무언가 감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 있을 때 경성도서관에 다니며 되는 대로 읽은 것들이 소재 구실을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도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가 듣는 사람들 마음속에 작용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당나귀를 통해서도 그의 뜻을 전했다니 말입니다.”33)

33) 위 글, 410쪽.

그러나 그가 전도와 집회에 열중하는 만큼 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핍박도 거셌다. 실제로 어느 여름 날, 동네 청년들이 술에 만취하여 밤중에 떼를 지어 몽둥이를 들고 ‘예수쟁이’를 쫓아낸다며 학교 숙소로 몰려온 적이 있었다. 그의 하숙생활을 도와주던 부인이 달려 와서 “어서 피하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맞아 순교할’ 작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날 일을 장공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웬일인지 마음이 유난스레 평안했다. ‘괜찮습니다. 어서 댁으로 돌아가 보세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염려 마십시요.’ 했다. 부인은 불안해 하면서 그대로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고함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앉은 대로 잠시 기도했다. 그렇게 평화롭고 기쁠 수가 없었다. 성령의 위로란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인간의 감정, 판단, 설계, 심리작용 등등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어지는 ‘영’의 감격이었다. 가까워지는 것 같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다들 도중에 가버린 모양이다. 나는 영속하는 영의 감격을 염원하면서 아쉬운 새벽을 앉은 대로 맞이했다.”34)

34) 《범용기》1, 93쪽;《전집》13, 69쪽.

장공에게 그날 밤은 “황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고 기쁨이 넘치고 즐거운” 밤이었고 6년 전,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믿기로 결심하면서 얻은 중생의 은총 이후 “두 번째로 받은 성령의 충만” 경험이었다.35) 그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원동력을 얻었다.

35) “조약돌 몇 개”,《전집》18, 410~411쪽.

“나는 성령의 내주(內住)를 경험했다. 맨 처음 믿기로 작정한 때에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성령의 하늘 위로와 기쁨, 그리고 복음증거 때문에 사람 없는 외따른 집 독방에서 핍박자의 쇄도를 기다리던 깊은 자정(밤 12시)에 내 생명 속에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의 기쁨이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성령 안에서 고요히 살고 있다. 오히려 살려주심을 받고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내가 산다.’는 바울의 체험 비슷한 것이 내게 조금 있다는 말이다.”36)

36) “나의 생애와 신학”(1985), 《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삼민사, 1985, 279~280쪽;《전집》18, 187쪽.

이 날 체험으로 전도자로서 살겠다는 장공의 결단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 장공이 만난 또 다른 영성의 주인공이 있었다. 살아서 ‘성자’ 칭호를 받았던 인도의 전도자 선다싱(Sundar Singh, 1889~1932?)이었다. 장공은 1926년 1월부터 6월까지 서울에서 발행되던 초교파 교계신문 <기독신보>에 13회에 걸쳐 “성자 썬다싱그”란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은 <사명>에 수록되었던 “예찬의 말씀”과 함께 현존하는 장공의 글 중에 가장 먼저 발표된 글로 여겨진다.37) 성 프란체스코를 그린 “예찬의 말씀”처럼 “성자 썬다싱그”도 초기 장공영성의 실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37) 장공은 회고록에서 서울 유학시절 장도빈이 발행하던 <學生界>에 “이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글을 처음으로 발표하였고, 귀락동소학교에 교사 시절에는 기독청년면려회 기관지 <眞生>에 “瑩該辭”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범용기》1, 70쪽;《전집》13, 65쪽)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장공의 “성자 썬다싱그”를 읽다보면,38) 자신의 신앙체험을 선다싱의 그것과 일치시켜(overlap) 보려는 의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독실한 시크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선다싱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으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종교교육을 철저하게 배격하였을 뿐 아니라 성경책까지 불살라 버릴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충일했는데, 그 점은 장공의 개종이전 상황과 유사하였다. 그 후 선다싱은 번민 속에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무엇이 참 진리인지 가르쳐 주소서.” 기도하던 중, 환상 중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언제까지 나를 핍박하려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는 음성을 듣고 ‘무한한 희열과 평화’를 느끼게 된 것도 장공의 회심 체험과 비슷하였다. 회심 직후 선다싱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부친에게 전했다가 냉정하게 배척을 당한 것도 장공과 같았다.

38) 장공은 1925년 일본 도쿄에서 출판된 사이토(佐藤繁彦)의《聖サンダル·シング》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日本キリスト敎歷史事典》 東京: 敎文館, 1988, 592쪽.

“그[선다싱]는 즉시 부친 압헤 달녀가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앗습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오날 나는 그의 제자가 되엿습니다. 지금부터는 그를 따르며 그를 섬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엿습니다. 그의 부친은 너무나 돌변한 그의 태도에 놀나서 반신반의하엿스나 그 때부터 썬다의 행동은 전연히 변하야 그리스도교에만 열중하는 고로 그 일로 인하야 가내에는 일대파란이 일어나고 썬다에게는 여러 가지 유혹과 박해가 생겻습니다.”39)

39) “聖者 썬다싱그(二)” <기독신보> 1926. 1. 13.

선다싱의 개종은 그 부친과 가족의 노여움을 촉발시켰다. 그럼에도 선다싱은 가족과 친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였고 이런 그를 죽이려고 그의 음식에 독을 넣은 친척까지 있었다. 결국 그는 집에서 추방되어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아주 쫗겨나서 다시는 문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엿습니다. 그날 밤 그는 나무 밋헤서 자고 잇튼날 未明 새찬 아침 엷은 의복 한 벌을 이븐 채 약간의 먹을 것을 품에 넛코 파터일니까지의 차비를 엇어가지고 정다운 넷집을 떠나 다시 못올 길을 방향도 업시 떠나갓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엇기 위하야 아버지를 일코 집을 일코 全家族을 일코 廣漠한 세상에서 孑孑單身의 漂迫兒가 되엿습니다. 그러나 찬 하늘 아래 나무 밋헤서 새이던 옛집의 최후의 밤은 그가 예수의 제자로서 十字架의 생애를 밟은 최초의 一步이엿스며 天國의 첫날 밤이엿습니다. 그는 그날 밤에 말할 수 없는 깃붐과 平和를 늣겻다 합니다.”40)

40) “聖者 썬다싱그(三)” <기독신보> 1926. 1. 20.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부친과 친척들로부터 냉대를 받은 것도 장공과 비슷했다. 선다싱은 1905년 9월 시물나에 있는 영국성공회 사제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되었는데 세례를 받으면서 힌두교식으로 1백일 금식기도에 들어가 ‘내적인’ 그리스도와 합일과 교제를 체험하였다. 이후 선다싱은 힌두교 성자(sadu)들처럼 법의(法衣)를 두르고 전도여행에 나섰다.

“세례밧은 후 三十三日 만에 그는 인도의 聖者들이 입는 싸프론色의 두루마기를 입고 ‘주머니에 金이나 銀이나 銅이나 가지지 말고 길에서 쓸 전대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집행이를 가지지 말라’ 하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그대로 직히여서 新約全書 한 권 밧게는 아모 것도 가지지 안코 다만 살아계신 救主로 唯一의 힘을 삼어 용감한 證人이 되려고 傳道의 길을 떠낫습니다. 그는 수개월 전에 자기를 쫓아내고 毒殺하려던 고향으로 向하엿습니다. 벌서 그에게는 두려움 곳이 업스며 그의 열심을 식힐 자가 업섯습니다. 그는 지금 새로운 使命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드러가는 집집마다 또는 婦人들께까지 자기의 체험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축복과 평화를 말하며 사랑하는 救主를 증거하엿습니다.”(2.10)

자신을 내쫓았던 고향을 찾아 여전한 냉대와 괄시를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선다싱은 장공이 형 손에 붙잡혀 고향으로 ‘끌려 내려와’ 소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중에 여전히 가족과 동네주민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받는 것과 흡사하였다. 선다싱이 가는 곳마다 살해 위협을 받았듯, 장공도 귀락동에서 동네청년들의 폭행위협을 받았다. 선다싱은 온갖 위험과 위협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보호 가운데 초인적(超人的) 전도사역을 감당하여 인도 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북미까지 ‘살아있는 성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 모습은 장공이 그리는 자신의 미래이기도 했다.

“그의 風采는 그리스도의 사진에 보이는 風采와 심히 흡사함으로 간 곳마다 ‘그리스도 갓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엇다 하며 그 뜨겁고 明瞭하고 솔직한 설교와 謙遜하고 사랑이 넘치는 風采는 聽衆으로 하여곰 一刻의 餘裕도 업게 緊張하게 하엿다 함니다. 어느 나라 어느 宗派 어느 階級을 물론하고 그의 거룩한 빗나는 낯을 대하면 꼿 피는 봄 동산 속에 안즌 것 갓치 거저 깃브고 平和롭게 되며 아모리 차듸 찬 사람이라도 반다시 땃듯한 感化를 밧게 되엿다 함니다.”41)

41) “聖者 썬다싱그(七)” <기독신보> 1926. 4. 7.

‘그리스도를 닮은’(imitatio christi) 풍채. 장공이 선다싱에서 발견한 ‘영적’ 전도자의 모습이었다. 바로 이것이 환경과 조건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에 포로가 되었던 선다싱의 ‘전도자 영성’(傳道者靈性, evangelistic spirituality)이었다.

이로써 장공은 1926년 프란체스코의 청빈 영성, 선다싱의 전도자 영성으로 무장하고 전도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가 서구 기독교 역사 속의 성자였다면 선다싱은 현재 진행형인 아시아(인도) 선교현장의 성자였다. 이처럼 장공은 역사와 현실에서 만난 성자들의 영성을 양날개 삼아 바다 건너 미래의 세계로 날아올랐다.

[Ⅵ] 일본과 미국 유학, 보수와 진보의 ‘조화 영성’

장공은 1926년 여름,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본 유학을 실행에 옮겼다. 학교는 만우가 먼저 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로 정했다. 장공은 아오야마 ‘청강생’으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오야마는 일본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총본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산학원이라면 ‘자유’가 연상된다. 학생이고 선생이고 간에 개인자유, 학원자유, 학문자유, 사상자유, 모두가 자유분위기다. 물속의 고기같이 자유 속에 살았던 것이다.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그 당시 ‘뉴욕 유니온’ 그대로였던 것 같다. 신약교수 ‘마쯔모도’(松本貞夫)는 유욕 유니온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 구약교수 ‘와다나베’(渡邊善太)는 독일 튀빙겐 박사였다. 그러니 ‘자유’를 넘어 ‘과격’(Radical)에 가깝다 하겠다. 다만 조직신학만은 ‘베리’ 박사 담당이어서 비교적 ‘보수’였으나 근본주의는 물론 아니었다.”42)

42) 《범용기》1, 125쪽; 《전집》 13, 92~93쪽.

장공은 그곳에서 ‘학문자유’ 소중한 가치를 체득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절제한 ‘방종’, 파괴적 ‘과격’이 아니었다. 장공은 베리 교수의 보수적 신학 강의에서 자유의 절제와 균형을 배웠다.

장공의 일본유학은 그의 서울유학 시절처럼 ‘고학’의 연속이었다. 장공은 근로학생을 위한 기숙사 ‘근우관’(勤友館)에서 생활하면서 방과 후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할애했다. 방학이 되어도 여비가 없어 고향을 찾지 못했다. 가난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그런 고독이 그에게는 오히려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1927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날짜는 8월 24일이었다. 나는 단 혼자서 아오야마 기숙사 2층에 드러누워 해질 무렵까지 공상을 하고 있었다. 건너편 여학생 콩크리트 3층 거대한 집에 무장야를 넘어 반조하는 석양이 유리창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것이 몹시 찬란하였다. 내가 대체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 때문에 나는 거의 실망한 상태에서 그 석양을 무심코 바라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무슨 조수에 밀린 사람같이 무엇에 밀려가는 것이었다.”43)

43) “蔓生餘錄”,《전집》5, 158쪽. 장공은 이 글에서 ‘1926년의 일’로 회상하고 있으나 《범용기》에서는 ‘아오야마 2학년 때’ 일이라 기록하였는데(《범용기》1, 112~113쪽), 만우가 아오야마를 졸업하고 떠난 후의 일인 것으로 미루어 1927년이 맞다.

혼자 기숙사 방에 남아 가난한 유학생활, 불안한 미래, 고독한 현실을 생각하며 ‘거의 실망한 상태’로 창문너머 석양을 바라보다가 불현 듯 ‘조수처럼 밀려오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벅찬’ 감동 속에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붓을 찾아 생각하는 대로 내 ‘생활규범’을 적었다. 그리고 내 ‘사업계획’을 썼다. 그것은 결국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수련이었고 사업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통일된 제 문화의 건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흑인 지도자 ‘조오지 워싱턴’의 ‘알버케키학원’ 같은 것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동지를 모으고 교육자로서의 학업을 닦고 경제적인 준비도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과의 관계는 어쨌든 기독교적인 ‘사랑’에서 교회적으로 극복한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서는 스스로 감격했던지 좀처럼 안 나는 눈물까지 몇 방울 흘렸다고 기억된다.”44)

44) 위 글, 158~159쪽.

그것은 현실의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찬란한 미래에의 꿈(vision)이었다. 장공은 그것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계획도 수립하였다. 그래서 “기원(祈願)의 함을 만들고 거기에 남은 돈을 넣으며 무시로 기도했다. 어떤 때는 금식하고 식대(食代)를 거기에 넣기도 했다.”45) 아오야마에서도 프란체스코 모방은 계속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외투 하나를 샀다가 그대로 남에게 준 것이다.

45) 범용기》1, 113쪽.

“나는 간다(神田) 고물점에 들렀다가 싸디 싼 외투 하나를 샀다. 훨씬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인연으로 어느 고학생 숙소에 들렀다가 그가 내복도 없이 여름학생복 속에서 떨고 있는 걸 보고 내 외투를 벗어줬다. 그는 초면인 나를 놀란 낯으로 쳐다보다가 미안하다면서도 받아 입었다. ‘무사시노’ 거센 바람을 안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발길이 가볍고 춥지도 않았다. 기분이 만점이다. 예수님이 축복하시나보다 하며 혼자 기뻐했다.”46)

46) 《범용기》1, 114쪽;《전집》13, 85쪽.

1928년 3월, 아오야마를 졸업한 장공은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항상 그보다 한발 앞서 갔던 만우의 ‘지시형’ 권면이 작용했다. 만우는 장공의 프린스턴신학교 입학 수속과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다. 장공은 윤치호에게 유학비(여비)를 받아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박형룡과 한경직, 송창근이 다녀간 프린스턴신학교에 들어갔다. 아직은 근본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메첸(G. Machen)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주로 메첸의 강의를 택했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의 투사라는 의미에서 인기가 있었고 강의도 무던히 명석했다. 나는 ‘아오야마’에서 ‘신신학’ 일변도로 지냈기에 여기서는 보수신학’ 계열을 주로 택했다. ‘메첸’의 저서는 다 읽었다. 그의 강의 ‘바울종교의 기원’, ‘처녀탄생’ 등도 들었다. 즈위머의 ‘모하메트’ 강의, 바스(Vos)의 메시아론, 어드맨의 성서약해 등등. 강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책은 읽을 수 있었고 시험 때에는 학생들이 프린트한 강의록과 과거의 시험문제집을 돌려주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도 회람되는 것이었다.”47)

47) 장공의 메첸에 대한 인상과 평가는 아주 호의적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메첸 박사는 신약전공이고 히랍어 교본도 손수 쓰신 분이다. 독신이어서 기숙사 방 둘을 얻어 하나는 서재, 하나는 침실로 쓰셨다. 낭하에 뚜껑 뗀 사과궤짝을 놓아 가고오는 학생이 맘대로 주어먹게 했다. 가담 가담 ‘파티’를 열고 학생들을 불러 다과를 나누며 맘대로 대화하게 한다. 장기도 두고 췌커도 잘한다, 그러나 원래가 ‘투지적 근본주의’의 ‘총수’(總帥)였기에 ‘사랑’이 ‘투지’에 눌려 낯에 화색이 없었다. 이건 내 추측일 것 뿐이다. 그는 나를 가까이 해 주셨다.”《범용기》1, 143~144쪽;《전집》13, 104~105쪽.

장공이 프린스턴에서 메첸을 비롯한 근본주의 신학자들의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은 것은 아오야마에서 받은 자유주의 신학 교육과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진보와 보수, 양극단의 어느 한 편을 취하기보다 서로 다른 이론들의 공존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장공의 학문적 경향노선이었다. 장공이 신학자로서 평생 봉사하면서 진보와 보수, 이성과 체험, 학문과 현장, 신앙과 생활 사이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도록 만든 것도 이처럼 일본과 미국에서 양극단의 신학을 접했음에도 둘 사이의 일치를 추구했던 ‘조화 영성’(調和靈性, harmonizing spirituality) 때문에 가능했다. ‘극단’ 혹은 ‘전투’란 용어로 표현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신학운동을 경계하였다. 프린스턴에서 1년 공부를 마친 장공은 만우를 따라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3년 공부를 마치고 1932년 5월, 신학사와 신학석사(구약) 학위를 받았다.

장공이 학위를 받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귀국 후 장공 앞에 전개될 순탄치 않을 행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루는 난데없이 한국의 모 선교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선교사 편지란 난생 처음이다. 편지 내용이란 즉은 ‘네가 학업을 바쳤으니 귀국해야 할텐데 네 신학노선을 알아야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기에 편지한다.’는 것이었다. ‘네가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라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 속히 알려라...’ 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사실 그는 나를 위해 한 이야기겠지만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곧 회답을 보냈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鑄造)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가 없오.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하여는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꼬올”(goal)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느님께서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 그리고서는 편지 거래가 없었다.”48)

48) 《범용기》1, 161쪽;《전집》13, 119쪽.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냐?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아니, 안정적인 취직을 위해서라면 근본주의 노선을 취하라는 충고였다. 같은 프린스턴 출신이지만 박형룡은 공개적으로 ‘메첸의 적자(嫡子)’로 자처하여 곧바로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지만 한경직과 송창근은 그러지 못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 국내 상황을 언급하며 ‘슬기롭게’ 노선을 택하라는 선교사의 편지에 장공의 ‘비위’가 거슬렸다. 장공은 자신의 신학노선을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귀국 후 사역은 ‘하나님의 경륜’에 맡길 뿐이라 당당하게 답장을 썼다. 그리고 돌아왔다.

[Ⅶ] 평양 사역과 ‘예언자 영성’

일제시대 미국 유학을 하였다면 모두 우러러볼만한 경력이고 학위까지 받고 왔으니 ‘금의환향’이라 할만 했으나 장공에겐 그렇지 못했다.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어도 설교할 강단도, 강의할 교실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본 유학도 그러했지만 미국 유학을 했어도 “선교사 소개도 없이 노회나 총회의 추천도 없이 제멋대로 나갔던 사람”이란49) 이유로 냉소적 대접을 받았다. 귀국직후 고향에 들렀다가 마침 회령교회에서 개최된 함북노회에 참석했지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뒷자리에 앉아 얼마동안 방청하고 나왔다. 그래도 웅상교회를 비롯하여 경흥군 일대 교회를 순방하며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49) 《범용기》1, 170쪽;《전집》13, 128쪽.

장공보다 먼저 귀국한 만우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자로 내정되어 평양노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형편이었다. 장공은 만우가 있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1933년 4월부터 산정현교회의 오윤선 장로와 김동원 장로, 조만식 장로, 기림교회 김항복 장로 등이 설립, 운영하고 있던 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장공으로서는 오랜만에 얻은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장공은 평양에서 지낸 3년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로 취임했다. 나는 거기서 영어, 조선어,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식구들이 다 올라와서 3년 동안 비교적 잘 지낸 셈이다. 교회는 산정현에 직분으로는 집사로 있었다. 새벽기도회에도 열심이었고 날마다 모란봉 외따른 솔밭 바위 밑에서 혼자 기도도 했다. 걸으면서도 기도했다. 평양의 남산현감리교회에서는 미국서 학위를 받고 갓나온 정일형 박사가 목회하고 있었다. 나는 장차 신학공부하려는 학생들을 한 주일에 한 번씩 산정현교회 기도회에 모이게 했다. 그룹 멤버는 그 때 숭전 재학중이던 김정준, 숭중 다니던 정대위, 그 밖에 네댓 명이었다.”50)

50) “나의 생애와 신학”,《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258쪽;《전집》18, 163쪽.

근본주의 신학노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은 관계로 평양신학교 강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혁(南宮爀) 교수의 배려로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에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학적 관용노선을 취하였던 남궁혁 교수는 장공을 비롯한 송창근·한경직·채필근 등 진보적 신학을 접하고 돌아온 신진학자들을 ‘동인(同人) 형태 기고자’로 선정하여 <신학지남> 편집 실무를 도우면서 매달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보수 일변도’로 나가던 <신학지남>에 반짝,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글들이 실렸다. 장공도 활발하게 자기 글로 발표했다. 그가 2년 동안 <신학지남>에 발표한 글이다.

“욥記에 나타난 靈魂不滅觀”, <신학지남> 15권 3호, 1933. 5. “傳記的으로 본 예레미아의 內面生活”, <신학지남> 15권 5호 1933. 9.
“巡禮의 讚歌-詩篇 84편”(번역), <신학지남> 15권 6호, 1933. 11.
“아모스의 生涯와 그 預言”, <신학지남> 15권 6호, 1933. 11.
“이사야의 ‘임마누엘’ 預言硏究”, <신학지남> 16권 1호, 1934. 1.
“만세반석 열리니-作家와 그 感化”, <신학지남> 16권 1호, 1934. 1.
“流謫의 怨恨-詩篇 137편”(번역), <신학지남> 16권 2호, 1934. 3.
“새 良心의 創造”, <신학지남> 16권 3호, 1934. 5.
“逼迫: 요한 칼빈의 說敎”(번역), <신학지남> 16권 4호, 1934. 7.
“實在의 探究-傳道書를 읽음”, <신학지남> 16권 5호, 1934. 11.
“自覺·整頓·建設”, <신학지남> 17권 1호, 1935. 1.
“뿍맨運動과 그 批判”, <신학지남> 17권 1호, 1935. 1.
“그리스도의 復活에 대한 硏究”, <신학지남> 17권 2호, 1935. 3.
“偉大한 終結-예레미야의 悲痛한 最後를 追慕함”, <신학지남> 17권 3호, 1935. 5.

이 시기 장공이 <신학지남>에 발표한 글들을 살펴보면, 우선 구약의 예언서 전공자답게 왕국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 예언자와 지혜문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이들 구약의 포로기 문학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 한민족 상황에 견주어 해석하면서 독자들에게 은유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귀국 후 처음 발표한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론”이란 논문을 보면, 도입부분에서 서구 성서학계의 최근 욥기 연구경향을 자세히 소개한 후 결론 부분에서 ‘고난 받는 의인’으로서 욥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거를 ‘하나님의 의(義)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에서 찾았다.

“사실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하야 똑똑하게 끈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설적인 신앙인 음산한 쉬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정의감은 이에서 만족을 늣기지 못하였다. 그는 희미하나마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영혼불멸의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결백한 양심’에 그 적은 싹을 돗치였다. 마치 적은 상수리나무 열매가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 그 조고만 싹을 돗친 것 같치.”51)

51) “욥記에 나타난 靈魂不滅觀” <신학지남> 15권 3호, 1933. 5. 36쪽.

‘결백한 양심’, ‘가시덤불 속에 돗친 조고만 싹’은 일제말기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민족의 순결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논문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아의 내면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조명한 글인데, 그가 살았던 ‘왕국 멸망’의 시대를 일제말기 사회와 교회 상황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몰여치는 暴風雨 가온대 잇서서 그는 참으로 鐵柱, 銅城 같은 存在이엿다. 不義 橫暴한 王을 책망하며 썩어지고 俗化한 祭司들을 꾸짖으며 自意로 預言하는 거짓 預言者들과 싸우며 귀머거리 같은 庶民들을 위해 탄식하며 淺見短慮의 政客을 敎導하는 피와 눈물로 짜내인 多端한 平生도 이제 虛事이엿던가. 紀前 五八七年 反逆의 族 유다는 北方으로 잡혀가고 여호와의 新婦 같은 聖都는 荒廢한 옛터만 남게 되엿다. 暴風雨는 지나갔다. 幕은 닫치엿다. 그윽히 囑望하던 異國의 治者 게달니아미즈바에서 凶劒에 너머진 후 이 老預言者의 靈的 經驗은 그 絶頂에 달했으니 곧 ‘새 言約의 預言’이 그것이다(렘 31:31-34). 이리하야 不純한 儀式的 國家的 宗敎는 道德的 靈的 個人的 宗敎로 淨化되여서 그리스도의 길을 豫備하엿다. 우리는 이제 神의 위대한 經綸을 讚嘆함과 동시에 不世出의 大預言者 예레미야의 一生을 仰慕하여 말지 안는다.”52)

52) “傳記的으로 본 예레미아의 內面生活” <신학지남> 15권 5호, 1933. 9. 51쪽.

장공은 ‘망국의 폭풍우’, ‘거짓 선지자들의 사기행각’으로 혼란한 시대상황에서도 ‘영적 체험’의 절정에서 도래할 ‘메시야의 새 날’을 선포했던 ‘노 예언자’를 흠모하였다. 그런 신앙열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믿음과 소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런 확고한 신념과 충성이 위기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했다. 장공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를 다룬 “아모스의 生涯와 그 預言”란 논문에서 그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참으로 ‘義 思慕하기를 주으리고 목마름 같이 한 者’이엿다. 그는 왼 世上의 政治, 經濟, 宗敎, 敎育 등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義 우에 세워지고 運行하여 지기를 바라고 그를 爲하야 싸우다가 그를 위하야 죽은 者이다. 이제 우리는 이 不義로 가득 찬 世代에 있어서 이 義의 預言者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預言者의 義를 일우어주신 그리스도의 義만을 宣布하며 그를 위하야 또 生命을 바람이 맛당할 것인가 한다.”53)

53) “아모스의 生涯와 그 預言” <신학지남> 15권 6호, 1933. 11. 47쪽.

장공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의 양심’으로 바꾸어 설명했다. “새 良心의 創造”라는 수필에서 다룬 내용이다.

“지금 우리 朝鮮敎會는 아니 全世界의 基督敎會는 새 世界의 탄생을 앞두고 劬勞를 거듭하는 중이외다. 우리는 거저 一時의 安逸을 위하야 困循姑息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總力量을 기우려 이 ‘새 世界’의 指導原理가 될 ‘새 良心’ 誕生의 産婆役을 맡어야 할 것을 切感하는 바이외다. 어떤 이는 ‘예수를 믿고서 貞直하게 부즈런하게 존절하게 살앗기 때문에 財産과 地位가 아울러 상당하게 되엿으니 恩惠罔極합니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야 그의 良心이 지극히 맑지고 높아져서 그 良心의 소리에 충성되기 위하야 가졋던 財産, 가졋던 地位 모든 것을 여호와의 祭壇 앞에 불사룬 이가 있다면 그이야말로 새 社會의 主人公이외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神으로 씻음을 받고 새로 지음받은 깨끗한 良心일란 일치 맙시다.”54)

54) “새 良心의 創造”, <신학지남> 16권 3호, 1934. 5. 33쪽.

‘하나님의 의’와 ‘새 양심’의 빛에서 바라본 당시 한국교회 모습은 비판을 면할 수 없는 ‘타락’ 현실이었다. 장공은 ‘보수 일변도’의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도 가했다. 특히 선교사 의존적인 한국교회의 신앙행태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웠다. 예를 들어 ‘선교 5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성대한 축하행사를 벌였던 1934년을 보내고 나서 이에 대한 감상을 1935년 1월호 <신학지남> 권두언에 “자각·정돈·건설”이란 제목의 글로 발표했는데55) 그 내용이 자못 신랄하다.

55) 장공은 남궁혁 박사의 부탁을 받고 1935년 1월호 <신학지남> 권두언을 썼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평양에서 거행된 선교50주년기념 행사에 대한 당시 감상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1934년 평양에서 선교 50주년 기념 축하식전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선교사에게 드리는 ‘화환’이었음과 동시에 선교사 중심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鐘)’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 50년의 ‘약력’을 억지로라도 좋게 꾸미려는 ‘의례’이기는 하였으나 금후 50년의 새 세대를 건설할 하등의 젊은 이상도 박력도 없는 말하자면 하나의 수선스러운 ‘장례식’ 기분이었다. 그 때 늙은 목사님들이 축하받기 위하여 올라앉은 이층 ‘원두막’이 그 과중한 짐 때문에 견디다 못해 찌그러져서 하마터면 많은 사람이 다칠 뻔 했다는 웃지못할 하나의 희극이었다.” “미국 장로파 선교사와 한국장로교회”(1952), 《전집》2. 261쪽.

“朝鮮의 歷史는 참된 自覺, 自立, 自尊의 毅然한 精神下에서 움즉인 記錄이 아니냐. 玉碎언정 瓦全을 不肯하며 鷄口언정 牛後를 不願하는 士道의 體顯은 아니였다. 우리교회 五十年史가 또한 어느 정도까지 그 轍을 밟지 안었는가를 疑心않을 수 없다. 바울의 소위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 자랑을 虛되게 하지 않겠다.’ 한 것 같은 高潔한 自覺, 自立, 自尊의 精神이 지금 우리 役군들의 가슴 가운데 사모쳐 있는지를 삷혀볼 것이다.”56)

56) “自覺·整頓·建設”, <신학지남> 17권 1호, 1935. 1. 1쪽.

장공은 다가올 미래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립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를 촉구했다.

“미래 五十年의 朝鮮敎會는 長子의 權利를 粥 한 그릇에 팔어먹은 敎會여서는 안되겠다. 被動的 模倣에서 能動的 創造에로 자라가야 하겠다. 우리는 財政으로, 事業으로, 智的으로, 思想的으로 九鼎의 무게를 가진 丈夫가 되어 毅然히 서서 흔들리지 안는 敎會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하야 지금까지에 받은 바를 점검하야 우리 집 구석에 제 곳을 찾아 整頓하고 위대한 비죤을 보며 새 건설의 役事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쉰 한 살 먹고도 ‘三寸’ 德에만 살려는 못난 아들 둔 아버지의 心情을 생각하면서 새해를 마즘이 어떠할가.”57)

57) 위 글.

선교 50주년을 맞아 교세로 보나 역량으로 보나 이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선교사 눈치를 보며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려는 한국교회의 ‘유아기적 행태’를 “50세가 되었어도 여전히 삼촌 덕에 의지해서 살려는 못난 아들”에 비유하였다. 장공은 당시 한국교회를 선교사에게 포로로 잡힌 상황으로 묘사하였다.

장공이 <신학지남>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글, “偉大한 終結-예레미야의 悲痛한 最後를 追慕함”이란 논문도 그러하였다. 1933년 9월 발표한 “예레미야의 內面生活”이란 논문의 후편으로 쓴 이 글에서 장공은 예레미야의 마지막 행적을 주로 다루었다. 특히 예레미야가 왕국 멸망 후, 애굽에 가서 거기 ‘애굽의 풍속을 따르며’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타락을 고발하다가 결국 “同族의 손으로 던지는 돌멩이에 맞아 異域의 모래밭에 그 義血을 부어버렸다.”는 최후를 소개하면서 장공은 ‘의인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늙어 七十에 異域에 가서 실흔 소리 안한들 무어라 하리만 그의 選民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罪를 보고 黙過할 수 없엇든 것이다. 그리하야 말 끝마다 侮辱밖에 오는 거 없건만 그의 말은 끝까지 變함없었다. 聖職에 부름받은 者 또한 마낀 羊들의 죄를 짊어지는 의식으로 거륵한 困苦를 피하지 안는다면 얼마나 平和와 祝福을 느낄가 하는 생각이 난다. 이스라엘의 남은 族屬들은 예레미야의 기나긴 受難生涯를 회상하는 가운데서 救贖의 苦難에 대한 啓示의 意義를 얼마 깨다엇을 것이다. 그리하야 여호와의 종 그리고 더 높이는 罪도 없고 하나님의 어린 羊, 고난을 겪으시고 슲음을 아시며 세상 罪를 지시고 ‘엘리 엘리 람마 사박다니’의 괴로운 呼訴를 남기신 하나님의 어린 羊의 十字架 그림자가 이 예레미야의 生涯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거룩한 受難者의 위대한 終結이온저!”58)

58) “偉大한 終結-예레미야의 悲痛한 最後를 追慕함”, <신학지남> 17권 3호, 1935. 5. 53쪽.

결국 1933~35년 장공이 <신학지남>에 발표한 논문과 논설들을 종합해 보면, ‘고난 받는 의인’에게 희망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의’, 그런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선포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다 희생된 예언자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공이 미국에 유학하면서 전공했던 예언자 신앙과 신학이었다. 귀국한 장공의 눈에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교권주의, 신학적으로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생기와 의지를 상실한 ‘50살 먹은 어린애’ 같아 보였다. 이처럼 왜곡된 한국교회 현실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에 확고한 예언자 신앙과 정신이었다. 그럼 점에서 장공은 위기시대마다 빛을 발하는 ‘예언자 영성’(預言者 靈性, prophet spirituality)의 회복을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공의 호소에 돌아온 응답은 냉담과 조소였다. 오히려 교권을 장악한 보수주의 진영에서 볼 때 장공은 방치해서는 안 될 ‘도전적 위험 요소’였다. 장공을 비롯하여 ‘선교사 추천이나 허락 없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신진 학자’들이 그동안 평화롭게 유지되어 온 ‘보수일변도’의 장로교 신학풍토를 훼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경계하고, 필요하다면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다. 1935년 일어난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사건’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59)

59) ‘아빙돈 단권주석’이란 미국 아빙돈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1931년 출판한 ‘단권 성경주석’을 한글로 번역하여 1934년 12월, 감리교 유형기(柳瀅基) 목사의 신생사에서 출판한 것을 말한다. 유형기 목사는 이 책을 번역, 출판하면서 당시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장로교와 감리교 목회자, 신학자 50여 명을 동원하였던 바, 김재준은 미가서와 소선지서, 송창근은 데살로니가전후서, 한경직은 고린도전후서를 맡아 번역하였고 이이들 외에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인사들로는 채필근·문재린·오천석·조희렴·김명선·이대위·윤인구 등이 있다. 柳瀅基편, 《單券 聖經註釋》, 신생사, 1934, 2~3쪽.

아빙돈 주석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유명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주석의 내용으로 ‘축자영감설’을 신봉하는 근본주의 신학에서 용납할 수 없는 성서비평학적 연구결과를 반영한 것도 포함되어 있어 한글로 출판되어 나오자마자 보수 진영에서 ‘이단서적’이라며 이를 규탄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1935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24회 총회에서는 “신생사 발행 성경주석에 대하야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부합한고로 우리 장로회에서는 구독치 않고 그 주석에 집필한 본 장로회 사역자의게 소관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케 함이 가하다.”고 결의하였다.60) 결국 번역에 참여했던 장로교 인사들에 대한 ‘교리 심사’가 시작되었다. 만우와 한경직, 그리고 장공이 그렇게 해서 노회 심사를 받았다.

60)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회록>, 1935, 53쪽.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던 장공으로서는 ‘번역집필’ 문제로 노회에 소환되어 교리 심사를 받는다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장공의 착잡했던 당시 심경을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9월 11일 (수). 學校勤務 如前. 放課後에 入浴. 理髮. 總會 求景 갔댔으나 畢했길래 보지 못하고 歸來. 밤 幼年禮拜 引導. 다만 Christ와 함께 가장 가까운 同志와 손잡고 獨立獨步하여 주의 일 할 것이오 總會, 老會 云云의 旣成 敎權機關과 關聯맺을 것은 아니다. 全然 絶緣함이 可하다.”61)

61) 《장공일기》, 1935.

총회에 대한 실망감은 교회 정치와 거리를 두고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가까운 동지와 손잡고 독립, 독보할 것”을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장공은 이 일로 평양신학교 후견인 남궁혁 박사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9월 12일(목). 學校勤務 如例. 秋夕名節인 故로 午後는 休業. 南宮爀博士 往訪. 總會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섭섭하다. 그러나 너무 그렇게 悲觀할 것도 아니겠지. 오직 主님만 믿고 依支하고 傳道하며 奉仕하면 그만일 것이다.”62)

62) 《장공일기》, 1935.

역시 “오직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면 그뿐이다.”는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 총회 결의에 따라 소집된 평양노회 별위원회에 소환을 받아가서 심사를 받고 온 날에 쓴 일기엔 조소까지 담겨 있다.

“10월 4일(금). 今夜 八時 單券註釋問題로 平壤老會 別委員의 부름이 있어 가서 質問에 答하다. 新神學者, 異端者로 몰려는 모양이나 桓心可笑일 뿐이다.”

‘신신학을 이단으로 몰려는’ 의도가 분명한 ‘짜여진 각본’의 청문회였다. 그러했기에 장공은 마음의 동요 없이 ‘가소로운’ 미소로 응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남궁혁 박사의 중재로 만우, 장공,한경직 등이 ‘알맹이 없는’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63)

63) <聲明書> 본문은 다음과 같았다. “今番 問題된 新生社發行 單券 聖經註釋에 對하야 本人等은 總會의 勸告를 따라 左와 如히 聲明함. (一) 本人等이 執筆한 部分은 長老敎信經에 違反됨이 無함. (二) 他人等의 執筆한 部分이나 全體 編輯에 對하야 本人等은 相談或關與한 事가 無함. (三) 本註釋의 內容에 對하야는 이미 制二十四總會에서 決定된 것인바 本人等은 執筆者의 一員으로서 有感의 意를 表함. 一九三五年 十月 十九日. 宋昌根 金在俊 韓景職 <신학지남> 17권 6호, 1935. 11. 53쪽.

이로써 아빙돈단권성경주석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사건을 겪으면서 장공은 심신의 피로를 느꼈다. 신학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보수적 교계 풍토에 대한 실망감도 더해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공은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신신학자’ 반열에 오르게 된 장공의 교회 내 입지도 더욱 축소되었다. 직장인 숭인상업학교 분위기도 예전만 못했다. 아빙돈주석 문제로 곤욕을 당하기 시작할 무렵의 일기다.

“9월 14일 (토). 學校勤務 如例. 放課後에 宋兄댁 訪問. 白永燁 牧師를 餞送. 歸家 讀書 少愁. God help me out. Give me some opportunity to put my whole body & spirit willingly for my most congenial work in the Kingdom! Just now I am nothing more than a bread carrier.”

“나는 지금 식량 배달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 가운데 내 적성에 맞는 일에 내 모든 육신과 혼을 기울여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는 기도에서 당시 장공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한경직은 신의주로 떠났고 장공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우마저 산정현교회의 ‘보수적 장벽’에 한계를 느끼고 1936년 4월, 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떠났다, 장공은 홀로 버려진 고독감을 느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받고 있던 숭인상업학교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진’ 장공은《성자 열전》을 빌려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번역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했다.

“이때의 신사참배 거부는 사도시대의 황제예배 거부와 성질이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숭실학교 도서관에서《성자열전》(Stories of Saints) 50권을 빌어 왔다. 한 번에 한 두 권식 빌어다 읽고서 반환하고 또 그다음 책 몇 권을 대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로마 가이사 예배나 헬라의 신들에게 제물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태연자약하게 순교한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골라 번역했다. 그 처벌 방법도 가혹했다. 산 채로 불어 집어넣기도 하고, 끓는 가마에 산 채로 삶아 죽이기도 하고, 토옥에 집어넣어 구더기가 파먹게 하고, 당장에 목 자르기도 하고, 톱으로 켜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64)

64) 《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260쪽; 《전집》18, 166쪽.

이처럼 장공은 순교자 열전을 쓰면서 자신에게 주어질 또 다른 미래 사역을 기다렸다.

[Ⅷ] 용정 은진중학교 사역과 ‘십자군 영성’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고 있던 장공에게 새 일을 주선해 준 인물은 숭실전문학교 교장 모우리(E.M. Mowry)였다. 장공의 웨스턴신학교 20년 선배였던 모우리는 북간도 용정에 있는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주 경영의 은진중학교로부터 교목 겸 성경교사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장공을 추천했다. 장공은 1936년 8월 가족을 이끌고 용정으로 이사했다. 이로써 장공의 용정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면서 첫 번째로 한 설교는 “첫 제자를 부르심”(막 1:16~20)이었다.

“그대들은 학생이다. 지식을 낚는 어부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예수님이 ‘지식’만이 아니라 ‘사람’ 즉 ‘인간’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그대들을 부르신다. ‘인간’은 전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주체’다. 나는 그대들이 이 ‘인간’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고 여기 왔다. 그리스도가 그대들을 부를 때 그대들도 ‘곧’ 대답해야 한다. 이 부름은 그대들의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이 도전에 대한 응전은 ‘예’ 아니면 ‘아니오’다. ‘예’ 하면 ‘사도’가 되고 ‘아니오’ 하면 어부로 남는다. 위대한 미래에의 갈림길이다.... 한 5분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긴장했다.”65)

65) 《범용기》1, 201~202쪽; 《전집》13, 156쪽.

그렇게 해서 은진중학교에서 장공에게 낚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강원룡과 안병무, 김영규, 전은진, 김기주 등이 있었다. 장공은 용정으로 옮기면서 중단했던 목회자 과정을 밟고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평양에서 준비했던 순교자 열전 원고를 책으로 묶어내려고 용정주재 일본 영사관에 문의하였던 바, 영사관에서는 출판 불가 판정을 내린 것으로 부족해 검열하겠다며 가져간 원고까지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장공은 ‘사전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잡지를 통해 순교자 이야기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김재준의 첫 번째 개인 신앙지 <십자군>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장공은 창간호에서 <십자군>의 간행 목적과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本紙의 宣言 一, 우리는 그리스도敎를 全的으로 各方面의 主張과 活動에 調和를 齎來하고저 노력한다.
二, 우리는 朝鮮敎會의 全一과 協同을 期하며 統一된 朝鮮敎會를 通하여 主님께 忠誠을 다하고저 한다.
三, 우리는 過去의 모든 基督敎 遺産을 尊重하는 意味에서 偉大한 信仰의 祖先들을 우리敎會에 다시 살리며 同時에 現代의 偉大한 信者들과 그 思想, 運動 등을 紹介하야 우리 信仰의 深化運動에 努力하려 한다.
四,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自身을 總帥로 모시고 福音宣傳과 愛의 實行을 軍法으로 삼으며 聖神을 參謀로 받들고 聖經으로 武裝한 行軍中에 靈的 十字軍임을 意識하는 점에 잇어서 聖經硏究와 傳道와 온갖 善한 社會事業에 가장 充實한 親舊되기를 期約한다.”66)

66) <십자군> 1권 5호, 1938. 2. 안표지.

잡지 발행소는 용정 은진중학교 안의 신앙운동사(信仰運動社)였고 인쇄는 서울의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하였는데, 서울에서 개인잡지 <새사람>을 펴내던 전영택(田榮澤) 목사가 교정을 도와주었다. 그런 관계로 장공은 <새사람>에도 글을 실었는데,67) <새사람> 1937년 5월호에 실린 “영웅대망론”이란 글에서 <십자군>을 내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67) 장공이 <새사람>에도 기고한 글로는 “英雄大望論”(<새사람> 5집, 1937. 5.), “冒險의 信仰”(<새사람> 6집, 1937. 6.) 등이 있다.

“혹 말하되 朝鮮사람은 물질로 너무 빈약하야 바칠 것이 없다고 하리라. 그러나 ‘金과 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일홈으로 이러나라!’ 고 부를 수는 있지 않은가? ‘내게 아모 것도 없아오니 이 몸 바침네다!’ 하는 참된 捐補의 기회가 眼前에 있지 않은가? 지금 朝鮮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意義있는 있이 무엇인가? 十字架의 道를 十字架的 生涯를 통하야 만방에 전파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모 것도 없음을 나는 확실히 믿는 바이다. 돈으로 전도하면 돈 냄새 나고 權勢로 전도하면 權勢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赤手에 十字架를 들고 十字軍的 意識下에 奮往하는 전도자에게서는 十字架 냄새 밖에 날 것이 없는 것이다. 朝鮮사람이 무엇으로 세계에 貢獻할가? 무엇으로 세계에 君臨할가? 科學? 金力? 政權? 文化? 이런 것은 벌서 落伍된지 오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때 도로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길, 즉 죽어도 살고 弱한 때에 强하게 되는 길은 오직 이 十字架의 道理뿐인 것이다.”68)

68) 김재준, “英雄待望論”, <새사람> 5집, 1937. 5. 20~21쪽.

장공의 ‘십자군’은 중세 ‘성지 회복’이란 명분하에 이교도를 추방하고 살육하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고 정복전쟁에 나섰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십자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빈손’에 오직 ‘십자가’만 들고 ‘십자가 냄새’를 풍기며, 모든 것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죽어서 살며, 약한 때 강해지는 ‘십자가의 도리’만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그것은 ‘무일푼’으로 용정에 들어와 잡지를 시작하는 자신의 처지이기도 했다. 이런 포부와 기대를 갖고 발행한 <십자군>에 수록된 글들은 다음과 같다.69)

69) 필자가 실물로 확인한 <십자군> 1권 3호(1937. 9.)부터 2권 1호(1938. 2.)까지 총 4권에 수록된 글들을 정리한 것이다.

3편의 글을 제외하고 모든 글을 장공이 직접 쓰거나 번역한 것이었다. 장공은 <십자군>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아쉬움 없이 펼쳐나갔다. 주제와 내용도 다양하였다. “施惠의 聖者 알렉산드리아의 요한과 그 逸話”(1937.9.)와 “民謠의 盲聖者 성 허베 哀話”(1937.12.)는 압수된 ‘순교자 열전’ 원고 중 일부였고, 창세기 번역과 성 어거시틴의 참회록 번역, 그리고 히브리서 주해를 연재하였다.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를 위해 설교와 예화를 다양하게 소개하였으며. 성탄 특집으로 성탄과 관련된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 소개하였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국내외 교계 동향인데 국내 총회 소식 외에 1937년 10월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에큐메니칼 ‘신앙과 직제회의’ 내용과 의미를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이제 <십자군>을 통해 발표한 장공의 글 가운데 이 시기 그의 영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글 몇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우선, “信仰의 三重性”이다. ‘믿음의 본질’을 다룬 이 글에서 장공은 신앙을 1) 교리나 신조에 대한 지적(知的)인 승인으로서 ‘신인’(信認 believe), 2) 절대자에게 모든 문제를 맡기고 살아간다는 정적(情的)인 의지로서 ‘신임’(信任 혹은 信賴, trust), 그리고 3) 신앙의 마지막 완성단계로 ‘신종’(信從, obedience)으로 구분하였다.

“이 信從은 실로 신앙생활의 最高絶頂이오 그 核心이고 結實이다. 이는 意志的 行動에 속한다. 내 意志를 하나님의 依支에 絶對順從식히는 것이니 이는 신앙의 열매 곳 生活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부라함의 신앙생활이 그 完成을 告한 것을 입증한 열매는 곳 獨子를 燔祭로 들이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絶對順從한 그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最後 最高의 축복을 나리섰다. 우리는 여러 가지 辨解와 口實로 하나님의 뜻을 信從치 안코 回避하려 한다.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는 이 絶對信從의 表現이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날에서 일운 것 같이 땅에서도 일루어지이다.’ 주를 믿고 그대로 행하는 者 되어지이다.”70)

70) “信仰의 三重性” <십자군> 1권 3호, 1937. 9. 2쪽.

신인이 지적 활동, 신임이 정적 활동이라면 신종은 의지적 활동이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 굴복시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 자신을 비우는 단계 믿음이다. 장공은 이처럼 신앙을 세 단계로 정리한 후 다음과 같은 기도로 글을 맺었다.

“‘信認’ ‘信任’ ‘信從’의 세 겹 信仰이 우리의 것이 되여지이다. 주여 우리의 不足한 신앙으로 스사로 驕慢하야 남을 편론하며 깔보는 일을 그만두게 하시고 오로지 謙虛하야 주님 앞에서 내 不足을 自服하고 警醒하야 最高의 目標에 달려가게 합소서.”71)

71) 위 글.

신인과 신임, 신종이 조화를 이루면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겸비한 자세에서 보다 완전한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게 된다. 이런 신앙의 완전한 경지를 향한 장공의 기원은 “靜思와 祈禱”라는 글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이 글에서 장공은 ‘교만’과 ‘우리’, ‘자존’, ‘예수만’, ‘빈들에 때 저무니’, ‘그가 다시 살으셨나니’란 주제어를 갖고 성구 묵상에 기도문을 참가하였는데 기도문만 읽어보기로 한다. 우선 ‘교만’(오바댜 3~4)에 대한 묵상기도다.

“내가 진실로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진대 어찌 감히 내 지식을 云謂할 생각이 나랴. 어찌 감히 내 믿음을 자랑하야 형제의 判官으로 자처할 생각이 나랴. 주여 범사에 謙遜하게 합소서. 스사로 별들 사이에 둥이를 틀었다가 당신의 손에 붓잡히여 땅바닥에 던져지는 무서운 審判에서 구원해 주소서. 아멘.”72)

72) “靜思와 祈禱” <십자군> 1권 3호, 1937. 9. 7쪽.

다음은 ‘우리’(막 9:3~8)에 대한 묵상기도다.

“‘우리’ ‘우리’! 퍽으나 情다운 말이다.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玉座에 안치고 그리스도 대신에 우리를 내여 세우면 결국 이 ‘우리’는 暴君이오 ‘우리’의 행사는 暴政이 되는 것이다. 다만 ‘복음의 宣傳’과 ‘사랑의 실행’을 위한 ‘우리’, ‘섬기기 위한’, ‘우리’만 잇게 하옵시고 權利잡기 위한 信仰統制를 위한 우리는 결코 생기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야 주님 모든 데에 直接主管하시며 모든 權勢와 榮光을 주님의 것으로만 있게 하소서.”73)

73) 위 글, 8쪽.

다음은 ‘자존’(느헤 6:6~14)이다.

“얼마나 壯快한가? 毅然한가? 信仰을 위하야 眞理를 이하야 이와같은 自重自尊을 가져야 하겠다. 주여 이 阿諂附從이 많은 世代에 있어서 저이를 붓들어 정말 제 人格이라도 保存하게 합소서. 정말 生死를 決할 위협이 닥처올 때 ‘나 같은 사람이 도망하리란 말이냐?’ 하는 壯談이 우리 입에서 서슴치 안코 나올 수 있게 합소서. 이것이 敎會를 살리는 殉敎者의 精神이로소이다.”74)

74) 위 글.

다음은 ‘예수만’(막 9:7~8)이다.

“우리의 信仰은 오직 예수, 우리의 生活目的이 또 예수에게 옴겨야 하겠다. 그를 爲하야만 살고 또 죽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오직 ‘예수만’ 보게 합소서. 오직 그의 말슴만 듣게 합소서. 예수에게만 받치게 합소서. 우리의 英雄은 너무나 많고 우리의 目的은 너무나 散漫합니다. ‘예수만’이, 主님만이 저이와 함께 계시옵소서.”75)

75) 위 글, 9쪽.

다음은 ‘빈들에 때 저무니’(마태 14:14~21)다.

“主여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는 曠野에 모힌 烏合之衆이외다. 이곳은 진실로 빈들이외다. 그리고 또 때는 이미 말세를 기대리는 黃昏이외다. 그러면 어찌하오리까. 우리는 굶은 창자를 움켜쥐고 각기 主님을 떠나 저의 집, 저의 마을로 도라가오리까? 이제 우리는 배곱흐다고 主님을 떠나 世俗의 마을로 도라가리까? 먹고 나서 다시 主님을 찾어오리까? 올습니다. 돈 벌어가지고 主님께 다시 오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러나 主여. 당신은 이것을 윈하지 안습니다. 主께서는 우리를 배곱흔 채 그대로 보내시는 主님 아니십니다. 그리고 主님은 道自體이시오니 ‘道不可須由離’라 우리가 어찌 잠시인덜 主를 떠나오리까? 主께서는 永生이시오니 우리가 主를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우리로 하여곰 우리의 物質生活에 있어서도 主를 믿고 나가게 합소서. 그리고 우리의 적은 所有라도 주님께 바치며 主께서 祝福하사 奇籍을 보여 주실 것이오니 主여 우리로 하여곰 우리의 있는 것을 主께 바치게 하옵시며 主의 祝福이 우리를 通하여 大衆에 미치게 하옵소서. 아멘.”76)

76) 위 글.

마지막으로 ‘그가 다시 살으셨나니’(눅 24:5)에 대한 묵상과 기도다.

“骸骨아 네 이김이 어듸 잇느냐? 죽엄아 네 存在가 어듸 잇느냐?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닙는 靈의 勝利를 좀 더 徹底하게 깨닫자! 이 믿음이 確實치 못한 자에게 殉敎者的 熱情과 覺悟를 求하는 것은 마른 나무에서 꽃 피기를 바라는 셈이다. 主여 우리로 하여곰 참말 生命에 부다치고 主의 復活을 體驗하게 합소서.”77)

77) 위 글.

교만에서 출발하여 부활에 이르는 6편의 짧은 묵상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완전’(perfectio christi)을 향한 장공의 신앙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회개와 중생에서 시작하여 성화와 완전에 이르는 신앙의 진화단계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공은 “선지자적 심정”이란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언자 신학을 영성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는 예언자를 ‘대언자’와 ‘영감의 사람’, ‘대망의 사람’ 등으로 규정하고 각 항목별로 신학적 의미를 설명한 후 그 빛에서 한국교회 목회자 현실을 비판하였다. 먼저 목회자의 ‘대언자’ 권위 문제다.

“先知者!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使命을 받들어 하날 權勢로 하나님 말슴이 이 땅 우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代言者이다. ‘獅子가 고함치거니 누가 무서워하지 안켓느냐? 主 여호와께서 말슴하시니 누가 預言하지 안켓느냐?’(아모스 3:8) 한 아모스의 告白은 그대로 先知者的 使命을 明示한 것이였다. 크리스챤아! 너는 하나님의 代言者가 아니냐? 聖經에 씨여진 하나님의 말슴이 聖神의 感化로 네 心靈에 體驗되여 다시 世上에 宣布되는 때 너는 하나님 말슴의 代言者이며 先知者이다. 信者가 ‘긔도하고 말슴하기에 全力을 다한’(행 6:4) 使徒들의 代言者的 태도를 實行에 옮긴다면 그의 人格이 獨特해지지 않으며 그의 感化가 비범하지 안켓느냐? 이 하나님의 말슴을 내 것으로 가진 者는 ‘天使를 심판할’(고전 6:3) 權威를 가진 者이니 하물며 世上 일이랴! 그렇컨마는 現代 우리 信者들 中에는 이 하나님의 代言者 預言者로서의 高貴한 職分을 自侮하고 스사로 世俗化하여 돈을 사랑하며 世上權勢에 阿諂하야 道人의 心情을 더럽히고 그 權威를 일어 마츰내 맛 일흔 소곰 같어 바람을 자취하니 可歎할 바 아니랴!”78)

78) “先知者的 心情” <십자군> 2권 1호, 1938. 2. 2~3쪽.

목회자가 진정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한다면 세상 어떤 권세도 그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 목회자들은 스스로 세속화되어 세상권세에 아첨함으로 그 권위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이 한국교회의 위기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의 ’영적인 권위‘ 회복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先知者! 그는 靈感의 人 거룩한 感激에 사는 사람이었다. ‘여호와의 말슴이 림하시매’ 그 말슴에 感激하야 엄연히 선 사람들이 곧 옛날의 先知者들이었다. ‘말세에 내가 내 聖神을 萬人에게 부어주리니 너의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오 너의 젊은이는 이상함을 보고 너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한 요엘의 預言은 聖神의 充滿한 感動으로 말미암아 永遠을 透視하며 幻像을 보며 大夢에 사는 크리스챤의 生活을 그대로 預言한 것이었다. 크리스챤의 生活! 그는 곳 感激의 生活이다. 크리스챤에게서 聖愛의 感激이 식어진 때 그는 곳 生命을 일흔 자이다. 그에게 진실로 그리스도의 贖罪愛에 感激한 바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야 ‘全存在’를 바치지 안코는 결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聖神에 感動者는 그리스도의 救贖愛를 體驗하는 것이며 이 거룩한 사랑을 느낀 자에게는 거룩한 熱心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熱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야 全存在를 犧牲하지 안코는 견듸지 못하게 한다.”79)

79) 위 글, 3쪽.

성령의 영감은 삶의 감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감동과 감격 가운데 자신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다. 장공은 이를 ‘거룩한 열심’이라 표현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이런 ‘거룩한 열심’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교회 안에 ‘거룩한 열심’ 대신 ‘직업적 열심’이 만연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지금 우리敎界에는 이 거룩한 感激이 없이도 熱心히 일하며 또 그 名聲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熱心은 ‘職業的’이며 그의 名聲은 그대로 그의 審判이 되는 것을 알어야 한다. 나는 이 ‘職業的 熱心’(professional earnestness)이란 무서운 陷穽에 대하야 좀 더 설명할 義務를 느낀다. 만일 이 聖靈의 거룩한 感激이 없이 神學을 講解한다면 그 ‘神學校’는 그야말로 ‘牧師之法’을 가르치는 職業學校는 될지언정 ‘牧師’를 養成하는 거룩한 心情의 傳受處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牧師的 心情’ 先知者的 心情을 培養하지 못하고 다만 敎理, 敎條와 敎派熱과 敎界 處身術이나 배워가지고 나온다면 그 ‘得業士’는 진실로 한심한 得業士임을 切感한다. 그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聖役을 맡는 때 그 注入된 方法論에 따라 ‘熱心’으로 일하야 많은 ‘能率’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불길은 굉장해도 뜨겁지 않으며 雷聲은 굉장해도 雷光은 안 보인다’는 세음으로 人格의 서로 부딧치는 生命의 感激이 거기에 있지 못한 것이다. 이 ‘職業的 熱心’의 所有者는 敎會生活의 外部的 方面에 그 活動의 中心을 두는 것이다. 그는 敎會機關의 增設에 熱中한다. 그는 大集會를 얻기 위하야 힘을 다한다. 그는 소위 正統敎理의 擁護, ‘異端’의 排斥에 광분한다.”80)

80) 위 글, 3~4쪽.

장공은 한국교회가 외형적 결과물, 과시적 집회에 집착하는 것도, 정통교리 수호를 내세우며 ‘이단’ 심판을 하고 자신과 다른 신앙에 대해서 배타적 정죄와 판단을 일삼는 것도 모두 ‘직업적 열심’에 사로잡힌 때문이라 해석했다. ‘거룩한 열심’은 순종과 겸손과 평화를 가져오지만 ‘직업적 열심’은 교만과 소란과 분쟁만 일으킨다. 장공은 신학교가 이런 ‘직업적 열심’에 충실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다음으로 목회자는 ‘대망’을 품은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

“先知者! 그는 大望에 사는 者이다. 모든 先知者들의 메시아 預言은 곳 그들의 所望의 기록이다. 이와 같이 ‘所望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또한 우리 크리스챤의 心情이다. 그런데 이 所望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再臨하실 때 信者가 얻을 終末觀的 所望만 말한 것이 아니라, 現實生活의 온갖 事爲에 있어서 언제나 落心하거나 悲觀하지 안코 不滅의 憧憬과 希望으로 ‘不死身’的 活動을 계속하는 生活의 總括的 表現을 이름이다. 위대한 所望은 위대한 幻像(vision)을 보여주며 위대한 幻像은 위대한 事業을 成就케 한다.”81)

81) 위 글, 4쪽.

1930년대 한국교회는 길선주 목사의 ‘말세부흥회’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희구하는 내세지향적 신앙에 몰입되어가고 있었다. 장공은 이런 현실도피적 신앙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대망’이 재림 심판에만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여러 가지 불리한 환경과 장애요인들을 뛰어넘어 위대한 사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장공은 그런 믿음의 눈에 보이는 ‘환상’은 믿음의 사업을 통해 ‘현실’이 될 것을 지적하였다. 장공은 한국교회에 이런 ‘거룩한 환상’을 가진 목회자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지금 朝鮮敎會의 問題는 무엇인가? 行路難이 問題가 아니라 遠大한 所望에 불타는 者, 偉大한 幻像에 그 마음 뛰노는 者 있고 없음이 問題이다. 指導者들의 보는 幻像이 地域的으로 朝鮮을 넘지 못하며 敎派的으로 自敎派를 넘지 못하고 敎理的으로 ‘바리새’(分離, 排他)主義를 버서나지 못한다면 어느 밭에서 世界的인 指導者가 자라나며 누구로 말미암어 敎會聯盟의 運動이 이러나며 어찌하야 聖徒의 거룩한 交際, 사랑의 聯合이 이루어지랴! 그 마음속에 거룩한 幻像을 품지 못한 者로서 다만 敎條와 言辯과 謀略을 材料삼아 自己中心의 ‘職業的 熱心’에 마끼여 敎會事를 籠絡한다면 그 結果는 必然的으로 紛爭 排擊 등의 惡德을 빚어낼 것이다. 이는 自己營業의 繁榮을 위해서는 自然 그 競爭者를 없이하고 自己가 그 權益을 獨占하려는 것이 職業戰線의 原則인 이상 그런 ‘職業的 熱心’者가 二人以上 되는 때에는 반다시 거기에 分列, 抗爭이 있을 것인 까닭이다.”82)

82) 위 글, 5쪽.

이로써 장공이 <십자군>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신앙과 신학, 목회의 방향과 내용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드러났다. 교회의 문제와 위기가 교인과 목회자의 영적 능력과 권위 상실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던 그는 ‘거룩한 열심’, ‘성령의 감격’의 회복이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라 했다. 그런 면에서 미래 한국교회는 오직 겸비와 순종의 십자가 도리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 그리스도의 향기와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는 평화의 사도, 사랑의 십자군, 영적 예언자를 양육하고 배출하는 것에 ‘위대한 사업의 비전’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십자군을 양성하는 것이 장공의 꿈이었다.

장공은 이러한 ‘십자군 영성’(十字軍 靈性, crusade spirituality)을 실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기를 기다렸다. 장공이 평양에서 기도하였던 바, “하나님 나라 사역 가운데 내 적성에 맞는 일에 내 모든 육신과 혼을 기울여 봉사할 수 있는” 그런 현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서울의 조선신학교가 그를 부른 것이다.

[Ⅸ] 조선신학교 이단시비와 ‘바울 영성’

이번에도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는 만우의 전보가 그를 움직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대체할 새로운 교단직영 신학교를 서울에 설립하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올라와 실무를 맡아보라는 전갈이었다. 장공은 용정 일을 정리하고 1939년 9월 서울로 올라왔다.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가 신학교 설립 기본금으로 50만원 상당의 재산을 내놓은 것 외에 준비된 것은 별로 없었다. 설립인가 신청과 교수진 확보, 학생 모집, 교실 마련 등 난제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관청을 상대로 한 인가신청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보다 평양신학교에 미련을 둔 ‘보수진영’ 목회자들의 방해도 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그래도 애쓴 보람이 있어 1940년 3월 경기도청에서 조선신학원 설립인가가 나왔다. 함태영 목사를 교장으로 모시기는 했지만 학교 운영의 실무는 장공이 맡아보았다.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주변에는 지지와 호응보다 질시와 견제가 더 많았다. 자신의 능력과 학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힘들어하던 어느 날, 장공은 ‘한 꿈’을 꾸었다.

“꿈에 나는 창골집 우물가에 있었는데 샘물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빈 탱크 실은 자동차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탱크에 물을 가득하게 퍼부었다. 운전할 사람도 없고 어디로 가져갈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운전할 줄 모르지만, 어쨌든 핸들을 잡아 이리저리 돌렸다. 자동차는 제법 길을 따라 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하느님의 암시라고 생각했다. 믿고 해볼 수밖에 없었다.”83)

83) “나의 생애와 신학”,《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276쪽;《전집》18, 183쪽.

이번에도 꿈을 계시로 해석하고 신학교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런 꿈을 꾼 직후 장공은 나름대로 ‘조선신학원의 건학정신’을 적어 내려갔다.84)

84) 위 글.

1) 우리는 신앙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신학교육에 있어서 세계 석학들의 제학설을 공정하게 소개하며 조선교회의 신학수준을 세계수준으로 향상시킨다.
3) 우리는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발전적으로 수용한다.
4) 우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조선 역사와 조선교회의 토양에 심어 그리스도 자신의 영적·윤리적·사상적 교통을 우리 생명체에 화신하게 힘쓴다.
5) 우리는 전인적인 생활신앙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에 책임적으로 관여한다.
6) 우리는 역사와의 상관관계에서 신학의 가변성과 그 강조점의 전위를 인정한다. 교권에 의한 소위 정통신학의 독재는 복음의 율법화와 교회의 정체성을 조장한다.
7) 신학은 교회의 봉사자요 교회는 인간, 특히 피압박 계층의 봉사자다. 교회는 심판하는 지배자가 아니고 사랑으로 섬기는 봉사자다. 그리스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8) 우리는 역사의 그리스도화에 적극 공헌한다. 그것이 최선의 선교방법이기도 하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조선신학원 설립의 가장 큰 의미는 한국 신학교육사에서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배제된 ‘한국인에 위한, 한국인의, 한국인 신학교’가 탄생했다는 점이다.85) 그것은 오랜 세월 선교사들의 지휘와 관리 하에 주체적이지 못했던 한국 신학교육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85) 이 대목에서 장공은 한국 장로교회 초대 7인 목사 중 1인으로 누구보다 선교사의 간섭과 지배로부터 한국교회의 독립을 희구하였던 한석진(韓錫晉) 목사로부터 조선신학원 설립 소식을 치하하는 편지를 받았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한석진 목사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만, 내가 한국신학교를 시작했을 때 한석진 목사님은 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요지는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신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교수들이 가르치게 됐으니 내 생전의 염원을 하느님이 이루어주신 줄 믿고 감개무량하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고 완성하시오!’ 하는 격려의 서신이었습니다. 이런 선배님이 계신 것이 자랑스러워서 그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었는데 6·25 때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1984), 《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237쪽.

이런 기대감 속에 출발하였지만 조선신학원의 행로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에 조선신학원 설립운동에 참여했던 채필근 목사가 얼마 후 평양으로 올라가 폐쇄되었던 신학교 문을 열고 소위 ‘후평양신학교’라 불리는 또 다른 교단 신학교를 개설함으로 조선신학원과 경쟁관계를 맺게 된 것이 혼란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종교통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신학교육의 방향과 내용까지 간섭하기 시작했고 1943년에는 서울의 조선신학원과 감리교신학교, 성결교 경성성서학원을 통폐합, ‘합동신학교’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 장공은 처음 구상했던 대로 신학교육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 시대 교회와 신학교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련이었다.

해방 후에도 조선신학교와 함께 장공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신학교는 동자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만우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한층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남쪽의 유일한 교단 직영신학교가 된 조선신학교를 접수하려는 보수진영의 공세로 장공과 신학교는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보수진영은 장공 신학의 ‘이단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공세를 폈다. 그 단초를 만들어 준 것이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1947년 장로교단 총회에 제출한 “김재준 교수와 송창근 교수의 신학을 조사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였다. 총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장공 신학을 심사하기 시작했다. 장공의 고독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장공은 자신의 신학 문제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전개된 1947년 총회를 지켜 본 ‘심정’을 “자유와 보수”란 제목의 글로 표현하였다.

“(1) 하나님의 심정(하-트)이 육신으로 나타난 이가 그리스도시다. 그는 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율법을 재인식하였다. 그는 이 심정으로 그 굳은 율법과 의례를 애기의 보드라운 몸으로 化하시었다. 그의 심정이 숨어든 때 굳은 껍질 마른 뼈 같은 율법 條文은 심정의 율법으로 再生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自由主義者였다. (2) 그러나 이 율법의 儀文이 그 나타내고저 하면서도 다 나타내지 못한 그 條文以前의 근원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소급하여 그 최초의 본의를 살린 점에 있어서 그는 가장 철저한 保守主義者였다.
(3) 지금 우리도 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쓰여진 계시의 문자를 다시 읽고 당하는 온갖 事爲를 재비판 재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되고 현재를 영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크리스찬은 언제나 進步主義요 自由主義다. 그러나 쓰여지기 전 그리스도의 本心情 聖靈의 本意에 遡及하는 의미에서 크리스찬은 가장 철저한 保守主義者이다.
(4) 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정통 교리를 보고 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현대주의자를 보자, 그리하면 정신은 우리에게 문자 이상의 그 本路를 示唆하실 것이다.
(5) 그러나 사람들은 제 심정으로 하느님을 보고 제 심정으로 계명을 보고 제 심정으로 교리를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정신을 잃은 儀文의 싸움에 빠지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다시 팔린다.
(6) 그리스도는 고독하셨다. 진리는 단두대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聖意는 미래를 지배한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판 것을 주께서 제일 슬퍼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전에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제자에게 팔린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을 듯 생각난다. 사랑하는 내 제자의 손에! 사랑하는 탓으로! 사랑하는 탓으로! 하는 ‘로맨스’가 꺼지기 전에!”86)

86) “자유와 보수”(1947), 《전집》1. 203~204쪽.

장공은 복음과 기독교 역사 전통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가치관임을 지적하였다. 누가 더 ‘그리스도의 심정’에 가까운가, 그것이 핵심일 뿐이다. 여기서 장공은 자신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의 진정서로 인해 이단시비에 걸리게 된 자신의 현실을 제자의 손에 팔려 십자가를 지게 된 그리스도의 심정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위로를 얻었다. 특히 마지막 항목에서 “주께서는 자기 제자에게 팔린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을 듯 생각난다. 사랑하는 내 제자의 손에! 사랑하는 탓으로! 사랑하는 탓으로!”란 절규가 그것이다. 고독한 시련 속에서 장공은 그리스도의 심장(heart)으로 다가가려 노력하였다.

1948년 총회는 장공과 조선신학교에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신학교 접수가 여의치 않자 보수진영은 총회 직후 서울 남산에 별도 교단신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장공신학의 이단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갔고 그런 만큼 장공을 떠나는 친구들의 숫자도 늘어갔다. 1948년 총회를 지켜본 직후에 쓴 단상이다.

“그리스도는 억울하게 죽으셨다! 그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가시관을 씌우고 뺨 때리고 제 달릴 형틀을 지워 골고다로 몰아간 것이었던가? 그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가시에 찔린 이마에 피가 눈 언저리에로 뺨으로 흘러 손과 발에서 샘 솟는 붉은 피에 어울려 해골언덕 입 벌린 사탄의 拱笑에 乾杯를 들게할 것이었던고! 멀리 서서 우는 여인. 얼빠진 사람같이 쳐다만 보고 있는 제자들. 그밖에 어느 한 사람의 한 마디 변호인들 들을 수 있었던가? 그러나 그는 결코 변호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 자신의 죽음이 가장 웅변으로 그를 변호하는 까닭이다.
그가 만일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였더라면
그가 만일 자신을 구하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려 하셨더라면
그가 만일 그를 죽이는 원수를 조금이라도 미워하고 원망하였더라면
그의 십자가는 그의 몸과 함께 그의 영혼까지도 상처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에게는 부활과 승천, 영광의 재림은 제외되었을 것이다.”87)

87) “無怨”(1948), 《전집》1, 205쪽.

그렇다고 장공이 이처럼 적대세력에 ‘피동적’ 십자가 영성으로 응대한 것만은 아니다. 불의에 대한 ‘아니오!’도 있었다. 현실에 타협하여 살 길을 찾으라는 회유에 단호한 거부도 있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이단시비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장공은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을 변증하는 ‘성명서’(manifesto)를 1948년 신학교 기관지 <조선신학보>에 “편지를 대신하여”라는 제목의 공개편지로 발표하였다. 그는 이 문서를 통해 1) 신학교육에 헌신하게 된 동기, 2) 소위 ‘정통파’로 자처하는 일파의 암약, 3) 조선신학교 학생 51명 진정서 사건의 전말, 4) 총회 특별위원회와 신학교 이사회 관계, 5) 처벌학생의 복교 경위, 6) 자신의 신학에 관한 유언비어를 해명하였는데 이때까지는 평소 교실에서 강의하듯 차분한 어조로 글을 전개해 오다가 마지막 “이제 나 자신의 진퇴문제에 대하여 내 태도를 표명하려 합니다.” 항목에 이르러 장공의 톤이 높아지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나는 지금 갑자기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너무나 인간적인 심경이 눈앞에 잡힐 듯이 서연하여 집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려 하노라.’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88)

88)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5, 243쪽.

장공은 돌연 ‘바울의 언어’ 속으로 뛰어 들었다. 특히 파당을 만들어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담긴 말들이다. 감정이 듬뿍 실린 말들이다.

“저가 믿음의 증거를 가졌느냐? 나도 더욱 그러하다. 내가 유교와 한학의 열심 있는 집안에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어버이에게 끊어지는 쓰라림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증거를 얻었노라. 주께서 의롭다 하시나니 누가 나를 송사하랴! 하는 마음의 기쁨에 몰려 손에 쥐어진 하늘의 약속만을 가지고 바다로 육지로 오십 평생을 표랑(漂浪)하였으되 내가 부족함이 없었노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였느냐? 나도 그러하다.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외로우되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였도다. 저가 신학교육에 공헌이 있느냐? 나도 그러하다. 사면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노회도 총회도, 외면하고 지나갈 때 주의 막닥이가 나의 수 백 명 후진을 생각하고 하늘의 별을 세일 수 있음을 자랑하리라. 저가 현대주의의 결함을 아는가? 나도 그러하다.
저는 전망대 위에서 보고 웨쳤으나 나는 그들과 함께 피하는 거리를 순례한 사람이다. 나는 그 결함과 더불어 그 장점도 발견하고 있다. 저가 정통을 자랑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그는 관념으로서의 정통을 안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에 부디쳐 들어가는 전인격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저가 칼빈 신학을 수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창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신앙의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89)

89) 위 책, 243~244쪽.

이 대목은 바울이 로마 교인들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느낌이 흡사하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롬 8:31~34)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갈 11:22~29).

장공이 공개 성명서를 내면서 ‘편지’ 형태를 취한 것에서부터 그가 ‘바울 서신’의 정서를 빌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하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용에서도 ‘바울의 언어’, ‘바울의 어투’를 차용하여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장공은 ‘바울 언어’를 통해 ‘바울 심정’, ‘바울 정신’에 접근했다. 바울과 장공의 일체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1947년 자신에 대한 ‘이단시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친 후 1952년 4월 피난지 대구에서 개최된 37회 총회에서 마침내 ‘이단 혐의’로 목사 제명을 받는 순간까지, 장공은 흔들리지 않는 바울의 마음과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하였다. 자신에 대한 최종 ‘이단 평결’이 난 1947년 총회 직후에도 그가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바울의 ‘평정심’(平定心) 때문에 가능했다. 장공은 총회 직후, “이단재판의 성서적 근거”라는 꽤 긴 논문을 발표했는데 논지의 근거를 대부분 바울의 진술에서 취했다.

“바울의 성명은 계속된다. 너희가 나를 판단(심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일소에 붙이고 만다. 너희 인간들에게 타인의 심정 속 깊은 데까지 살필 능력이 어디 있어서 감히 심판한단 말이냐?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안다. 내가 내 속마음을 살필 때 나는 너희에게 ‘심판’ 받아야 할 아무 허물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의 심판주 노릇도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나를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죄가 나의 심정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누가 알 것이냐? 그러면 내가 나 자신도 판단 못하거든 하물며 남인 너희들이 어찌 나를 판단할 수 있겠느냐? 심판은 오직 주님께만 있는 것이니 최후심판 때까지 아무것도 심판하지 말라, 너나 내나 그때에는 다 주님 앞에 직고하게 될 것임이니라 하는 것이다.”90)

90) “이단재판의 성서적 근거”(1952),《전집》2, 93쪽.

같은 시기, 마찬가지 맥락에서 쓴 “양심의 성서적 위치”란 논문에서 장공은 총회에서 재판을 받고 제명된 자신의 처지를,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단 혐의’로 교권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던 장면(행 23:1~3)에 견주어 설명하면서, 이 재판을 교권과 양심의 대결로 해석했다.

“바울은 전 존재를 바쳐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내가 범사에 정통교리를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말하지 않았다. 이미 읽은 그대로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한 것이다. 바울은 교리 지상주의자가 아니라 양심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양심에 충실했다는 의미에서만 그 신앙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인 대제사장은 이 ‘양심’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에 그의 ‘교권’을 발동시켜 ‘그 입을 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바른 양심에 항거하는 교권이란 ‘회칠한 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91)

91) “양심의 성서적 위치”(1952),《전집》2, 104쪽.

이처럼 장공이 때로는 고독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장시간 전개된 ‘이단시비’와 ‘종교재판’ 한복판에서 때로는 혐의자로, 때로는 피의자로 ‘원치 않는’ 현실의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마음의 평정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나 능력이라기보다 그 속에서 역사하는 ‘초월적인’ 의지와 능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기득권층, 교권주의자들의 온갖 훼방과 음모, 협박과 회유, 탄압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 복음과 자유 양심에 충실하여 마침내 ‘최후승리’를 거머쥐었던 바울의 신앙과 정신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장공이 ‘바울 영성’(Pauline spirituality)으로 버텨냈다 하겠다.

이런 장공의 영성에 동조한 ‘창조적 소수’가 있었다. 그 결과 조선신학교는 ‘부활하여’ 오늘의 한신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이단’소리를 들으며 추방당했던 적은 무리가 새로 조직한 기독교장로회는 현대 한국교회사 속에서 역사참여의 기본 틀을 마련한 교단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장공은 그렇게 해서 부활된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이 되었고 1961년 군사정부가 급작스럽게 만들어 발표한 ‘60세 정년은퇴’ 지시로 학교를 떠나기까지 ‘한신 사랑’의 열정을 불태웠다.

[Ⅹ] 현실참여와 ‘야고보 영성’

장공은 ‘바울 영성’의 치열한 투쟁을 거쳐 탄생시킨 기독교장로회의 성격과 정체성을 ‘결과지’(結果枝)란 개념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실질상 ‘기장’과 ‘예장’은 분립된 셈이다. 나는 그것을 ‘분열’이 아니라 ‘분지’(分枝)라고 설명했다. 나무가 자라려면 줄거리에서 ‘가지’가 새로 뻗어나가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장은 ‘분지’ 중에서도 ‘결과지’(結果枝)다. 밋밋하게 자라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과수원 농부’는 끝을 베어내고 못 견디게 가세질한다. 고난을 겪게 한다, 그래야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기장’은 ‘결과지’다, 소망 없는 ‘수난’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부활의 서곡이다. 부활한 생명에는 숱한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하고 나는 스스로 긍지를 느꼈다.”92)

92) 《범용기》2, 136~137쪽; 《전집》13, 328쪽.

‘결과지’-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실천적’ 신앙을 의미하였다. 장공은 기장이 실천하는 신앙의 교회가 되기를 원했다. 장공은 일제시대부터 ‘신앙생활’ 대신 ‘생활신앙’이란 용어를 강조하여 사용했다. 그는 ‘생활신앙’의 성서적 근거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생활한다는 뜻이다, ‘실생활’ 내용으로 화하지 않는 신앙은 밖에서 겉도는 바람과 같다. 지나가면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과 같다. 장마나 태풍이 닥쳐도 끄떡없다. 그것은 그 기초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 7:24~25). 우리의 삶이란 제각기 자기 ‘집’ 짓는 것과 같다.”93)

93) “생활신앙과 생활신학”《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295쪽.

성서에서 ‘생활신앙’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야고보서다. 그래서 장공은 말이나 이론이 아닌 ‘생활신앙’, ‘실천적 신앙’을 설명할 때 종종 야고보서를 인용하였다. 1949년 <흥국시보>에 게재한 “사는 종교”가 대표적이다. 장공은 교리논쟁, 이단시비를 부추기는 교권주의자들의 ‘혀’를 야고보의 이름으로 규탄하였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참 경건은 우선 혀에 자갈 물려야 된다.’고. 요새 ‘정통’의 탈을 쓰고 모략적인 거짓말, 중상, 비방, 음해, 허보를 연발하며 교인 간에 증오와 분쟁을 조장하는 ‘혓바닥’이 너무나 지저분하게 많다. 그러면서도 ‘경건’을 위한 ‘거짓’이라는 ‘전쟁윤리’의 연막 속에 숨어 그 ‘혀’로 여전히 찬송을 부르며 설교한다. ‘철면피’쯤은 문제도 못되는 ‘금강면피’이다.”94)

94) “사는 종교”(1949), 《전집》1, 226~227쪽.

행동의 실천 없이 말로만 하는 거짓 경건을 고발한 것이다.

“야고보는 또 말한다. 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본다.’고. ‘주인 문간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 마리 개가 그 나라의 운명을 예언한다.’ 생생한 사람이 찔려죽고 맞아죽고 그리고 간데 온데 없어지고 예의도 염치도 우애도 애급의 상형문자같이 생소해진 이때 크리스찬으로서 ‘경건’을 산다면 어찌해야 될 것쯤은 말하는 자가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다.”95)

95) 위 글, 227쪽.

이처럼 야고보는 바울과 함께 해방직후부터 장공 신앙과 신학의 양축을 이루었다. 언뜻 보면 ‘행위보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과 ‘행위와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는 동전의 양면이 함께 있어 신앙의 조화와 완성을 이루는 믿음의 2중 원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장공에게 두 원리는 갈등과 충돌의 상극(相剋)이 아닌, 조화와 협력의 상생(相生) 관계로 작용하였다. 이미 앞서 살펴보았던 바 ‘바울 영성’은 장공으로 하여금 강고한 교권주의자를 상대로 하여 치열한 논쟁을 전개할 때 흔들림 없는 평정과 여유를 유지하도록 이끌어준 ‘내재적 동력’이었다면, ‘야고보 영성’(James spirituality)은 장공의 목회와 1970년대 이후 민주화투쟁의 ‘외향적 동력’이었다.

장공은 해방 직후 조선신학교 재건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교회 목회에 정성을 기울였다. 즉 해방직후 장공은 성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취지에서 조직한 선린형제단 가족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만우가 그 모임에 ‘성 야고보교회’란 명칭을 부여했다.96) 이것이 오늘 경동교회의 출발이다. 이 교회 초대 담임자가 된 장공도 ‘야고보’란 명칭을 좋아하였다. 그는 ‘야고보 영성’으로 교회를 지도했다. 1948년 4월 야고보교회(경동교회)에서 행한 장공의 ‘그리스도와 현실’이라는 설교다.

96) 만우는 같은 시기 동자동 조선신학교 부지 안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성 바울교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오늘의 서울 성남교회 모체다.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의 신분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네가 본 대로 가서 말하라!’ 하고 대답에 대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선과 악에 대해서도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판단하라.’ 하였습니다. 그 열매는 그 나무의 구체적인 표징이고 그 나무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와 생명을 말할 때에도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는 영혼불멸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활이 영생을 증거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토피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해서 너희 가운데 있다. 너희 안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이 어떤 것임을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죄와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 죽음으로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영(spirit)이 무엇이란 것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보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현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현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리도 현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도 현실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음악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음식(food)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정의와 화평의 종교입니다.
곤고한 이웃에게 구출의 손 한 번 빌리는 일 없이 잔뜩 도사리고 앉아 비판만 하는 것은 바리새 성격입니다.
우리교회의 첫 이름은 ‘야고보교회’였습니다. 야고보처럼 사랑을 실천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믿음이 산다는 것입니다. 산 믿음이 새 인간을 창조합니다.”97)

97) “그리스도와 현실”(1948), 《전집》1, 333~334쪽.

장공에게 ‘야고보 영성’은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가슴을 통해 손과 발로 연결되는 행동영성이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웃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 주는 행위로 증명되는 실천영성이다. 꿈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실천’이다. 그 사랑의 실천 대상을 ‘이웃’이라 한다. 결국 ‘야고보 영성’은 이웃사랑이라는 이상을 사회, 정치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신앙의지이고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의 역사참여, 현실참여가 이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항일 굴욕외교 반대운동’(1965년)으로 시작하여 <제3일> 간행(1970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1973)으로 이어지는 장공의 사회참여, 민주화운동이 나오게 되었다. 겉으로는 정치운동이요, 사회운동으로 보였지만 장공에게는 ‘이웃사랑의 실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은 말이나 광고가 아니다, 그것은 몸으로 수고하는 이웃에의 봉사다. 이웃이란 것은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원수’도 포함된다. 내 가까운 이웃은 삼천만 동족이다. 좀 넓게는 모든 인류가 내 이웃이다. 나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의 이웃관계를 실제로 운영하는 길은 정치다.”98)

98) “역사참여의 신학”(1971),《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44쪽.

이런 현실참여와 민주화운동에는 통제와 탄압이 따랐다. 장공도 1970년대 들어 지속적인 감시와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하였고 결국 1974년 캐나다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장공은 주로 캐나다에 머물면서 국내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북미주와 유럽, 아시아를 망라하는 해외 민주화운동 연대조직 결성을 지도하다가 망명 10년만인 1983년 9월 귀국하였다. 분단조국의 현실은 여전히 군부독재 통치상황이었고 반체제 저항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80을 넘긴 노구의 장공은 전처럼 활기차게 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종파와 계층을 초월하여 존경받는 ‘재야 원로’로서 ‘말씀’을 강연으로, 글로 남겼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그 동안의 모든 사회운동이 종교적 ‘진리운동’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우리는 그 동안에 인권운동도 하고, 민주화운동도 하고, 반독재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운동의 뿌리는 진리운동이었습니다. 진리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과 전략. 전술이기 이전에 그 진리를 향한 진실한 양심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실이 모든 운동의 뿌리임을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실과 성의가 그 뿌리를 지심까지 깊게 내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진실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고서 말씀을 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전폭적으로 믿어도 좋습니다. 또 믿어야 합니다.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99)

99) “진리운동”(1986),《전집》18, 458쪽.

여기서 장공이 ‘진리’로 표현한 것은 앞서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종교적 진리인 그리스도 사랑을 역사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각종 사회참여, 현실참여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바탕엔 약한 것 같은 강한 힘을 발휘하는 ‘야고보 영성’이 흐르고 있었다.

[Ⅺ] 귀국 후 역사의 원점에서 보는 전우주적 사랑공동체

1983년 9월 귀국하여 1987년 1월, 별세하기까지 장공의 말년 삶은 능동적이기보다 피동적이었다. 80이 넘은 쇠약한 노인이기에 남의 부축을 받아 거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탁을 받은 강연과 설교, 초청받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처음 귀국 2년 동안은 ‘팔십 노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다. 여행도 많이 했고 글도 많이 썼다. 장공은 1984년 9월, 귀국 1년을 맞아 귀국 후 각종 집회와 모임에서 강조한 연설 주제들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공’은 일년 동안 한 방랑전도자로서 간 데마다 기회 있는 대로 下記 항목들을 호소했다. 1) 교회가 ‘하나’ 되자는 것,
2) 교회만이라도 부정부패에 오염되지 말자는 것,
3) 교회가 義에 굶주린 청년학생들의 울타리가 되자는 것,
4) 민주체제를 촉진하자는 것,
5) 노무자와 기업주의 共生운동을 촉성할 것,
6) 남북통일의 공통분모를 인간회복에 두자는 것,
7) 일본의 재침략에 적극 항거하자는 것,
8) 國土愛와 민족주체성을 끊임없이 계발하자는 것,
9)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건설과 성장에 더욱 협력하자는 것 등등이었다. 내게 힘은 없으나 성의는 다했다.”100)

100) 《귀국 이후》, 169~170쪽.

장공이 귀국한 후 초청받아 간 모임에서 행한 강연이나 설교, 혹은 집필한 글에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 주제어는 단연 ‘역사의 원점’과 ‘전우주적 생명공동체’였다. 이는 귀국이후 장공의 집중적 관심의 내용일 수도 있지만 80평생을 신학자로, 목회자로, 민주화운동가로 살아왔던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추구했던 가치와 목표를 요약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역사의 원점’이란 단어에서 장공의 민족의식과 역사탐구 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장공이 귀국 후 쓴 글들은 대부분 강연이나 설교, 혹은 시와 수필 형태의 단문들인데 ‘역사의 원점’을 주제로 한 글들은 모두 장편의 학술적 논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101) 장공은 ‘역사의 원점’을 주제로 다룬 글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세계 기독교 역사, 그리고 한국 기독교 역사를 아우르면서 ‘바른’ 역사, ‘창조적’ 역사 원리를 규명해 내고자 노력하였다. 장공은 우선 역사의 원점을 성경의 창조기사에서 찾았다.

101) 예를 들어 1985년 7월 27일 한신대학원 강당에서 개최된 한국 퀘이커대회에서 행한 주제 강연 “역사 의 원점을 찾아서”(《전집》18, 77~81쪽)와 1986년 2월 17일 숭전대학교 교수전원 반성회 개회강연회에서 발표한 “역사의 원점”(《전집》18, 228~289쪽)이란 논문 등이다.

“기독교 성경의 첫 책은 창세기고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태초’란 것은 시간의 첫 시작, 즉 ‘하루 이틀’하는 시간 계산의 첫 數字를 의미함이 아니다, 그것은 無時間的인, 하느님 안에서의 설계에 품겨 있는 ‘原點’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믿음 안에서 보증(保證)된 未現의 증거, 소망의 實相이랄 수도 있겠다.(히부리 1:1)”102)

102) “역사의 원점을 찾아서”,《전집》18, 77쪽.

장공은 ‘역사의 원점’인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역사의 방향과 성격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원래 역사가 과거의 기록이긴 하지만, 기록이 모두 역사인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연질서만이 아닌 ‘영’의 질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영적 존재. 추락 이전의, 인간 원형으로서의 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의식하며 삽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곧 자기의 독립이라는 생각은 아예 염두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도 떠오를 까닭이 없습니다. 당장 내 앞에 아버님이 앉아 계신데 내 아버지가 있느냐 없으냐, 있다면 어느 분이냐 하고 물을 자녀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데서 인간과 역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103)

103) “한국역사와 그 원점”《전집》18, 221쪽.

장공은 창조 이후의 인류 역사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연 질서와 영의 질서, ‘가인의 세속역사’와 ‘아벨의 희생(구속) 역사’, ‘자기사랑의 타락역사’와 ‘하나님 사랑의 구속역사’ 두 해류(흐름)로 나뉘어 전승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인류역사는 이처럼 상반된 경향의 두 해류 사이의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는데 이런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원점인 사랑의 하느님께로 돌아가 새 바탕의 역사로 재출발하는”104) 일대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장공은 서로 다른 역사 해류들 사이의 대화와 화해를 위해 기독교 역사와 세속 역사를 상호 조명하며 살펴볼 것을 권하였다. 즉 (함석헌이《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기독교 진리의 빛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거기서 ‘잃어버린 가치’와 ‘되찾아야 할 가치’를 규명하자는 것이다. 장공은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가치’ 회복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104) “두 갈래 역사의 해류”,《전집》18, 379쪽.

“우리 민족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선을 위해 바르게 잃는 것은 우리 민족을 위해 영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데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고 험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점에 돌아가 새 역사 창조의 새 출발을 시도하는 그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새로 출발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돌이켜 새 역사의 길을 걷는 그것입니다.”105)

105) “역사의 원점”,《전집》18, 233쪽 .

진리를 상실하고 선(善)을 훼손한 역사는 폭력과 파괴, 전쟁의 역사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장공은 전쟁과 약탈, 폭력과 탄압이 점철되었던 한반도에서 그런 역사적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제라도 역사의 원점(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으로 돌아가 진리와 선과 아름다운 조화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여 평화 통일을 향한 새 역사를 만들어가기를 기대하였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원점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는 경쟁의 역사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사랑의 역사로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짝사랑은 괴롭기만 합니다. 예수 안에서의 사랑은 나누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감격이 이를 가능케 합니다. 내 힘 만으로가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함께 탄식하며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원점을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찾자는 말입니다.”106)

106) “현명한 통치자”(1985),《전집》18, 364쪽.

이처럼 장공은 10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국사 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며 연구하면서 신학적 반성의 기회를 얻었다. 그는 무엇보다 기독교와 한민족 역사 사이의 교류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한국의 신학자와 기독교인들이 서구 기독교 역사와 신학에 대해서는 서구인에 뒤지지 않는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음에도 정작 같은 언어와 문화의 한민족 역사와 종교 가치는 애써 무시하고 폄하하였던 서구 종속적 인식과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것이 민족 역사와 기독교의 화해를 위한 기초 단계였다. 장공이 귀국 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한민족이 당한 고난의 역사 흔적이 남아있는 고토(故土)를 찾아 순례한 것도 이런 반성과 화해의 시도였다.

역사의 원점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면 장공의 다음 주제, 우주적 사랑공동체는 그 역사의 결론, 목표가 된다.

“역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불리우게 하옵소서. 하느님 당신의 나라가 땅 위에도 임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 땅 에서도 이루워지게 하옵소서.’ 이것은 역사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의 임재와 성장과 종말을 기원하는 인간의 절규다,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의 믿음이며 소망이다. 우리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건설을 삶과 죽음의 의미와 사명으로 받아 헌신한다.”107)

107)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전집》18, 101쪽.

장공에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나 피안적 상상세계가 아니었다. 이 땅, 현실 속에 건설될 이상세계였다. 장공은 그런 하나님 나라 모형을 교회에서 찾았다. 그래서 전우주적 사랑공동체를 교회의 모형으로 설명한 경우가 많았다.

“교회는 全宇宙的 사랑의 共同體입니다. 그리스도의 天國運動이란 것은 死後天堂만을 의이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땅 위에 임하고 하나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위에서 영광 받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死고 生이고 모두가 하나님 품안에 품기는 것이고 하나님 생명에 脈박치는 것이므로 그것 자체가 天國입니다. 우리가 歷史關心을 강조하는 것은 世俗歷史를 하나님 나라 歷史로 變質시키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歷史逃避도 歷史疎外도 아니고 바로 歷史主役으로 등장하는 方向입니다. 歷史關心 歷史參與는 그대로 이웃사랑입니다.”108)

108) “청년에게 미래는 있는가”,《歸國直後》, 280쪽.

장공이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신학적 원리에 근거하여 1960년대 이후 현실참여,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도 결국 이 땅에서 전우주적 사랑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가 ‘전우주적’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사랑실천의 대상인 ‘이웃’을 민족, 혈통, 언어, 종교, 성별, 계층, 지역에 따라 제한하거나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공은 이웃에 대해 “너 이 외의 모든 사람이 네 이웃이다.”109) 설명했다. 따라서 전우주적 사랑공동체는 주변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고, 허기를 채워주며, 벗은 몸을 감싸주는 선한 이웃들로 구성된다. 그런 사랑 가운데 ‘하나님 생명’이 움트고 자란다. 그래서 장공은 전우주적 생명공동체란 용어도 사용하였다.

109) “교회는 무엇하는 곳인가”,《전집》18, 367쪽.

“교회는 전우주적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나서 자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을 터전으로 하고, 하느님께서 뿌리를 내린 共同體란 말입니다. 요새 말로 한다면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교회에는 군함도 전투기도 핵무기도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속량사랑을 믿고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한, 믿는 인간들이 있을 뿐입니다.”110)

110) “교회의 뿌리”(1985),《故土를 걷다》, 99쪽.

‘역사의 원점’도 그러했지만 ‘전우주적 사랑(생명)공동체’도 그 기원과 뿌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그 생명에 있다. 그 생명과 사랑이 충만한 생활공동체, 장공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교회가 지향할 이상으로 제시했다. 그 초월적 이상이 하나님의 속죄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사랑을 통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 나라는 점점 확장되고 공동체는 하늘 완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생명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에 갈등이나 분쟁, 다툼이나 약탈, 폭력이나 살육의 역사가 사라지고 대신 화해와 일치, 평화와 협력, 공생과 조화의 아름다운 역사가 전개될 것은 당연하다. 한평생 민족과 교회를 사랑했던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장공이 분단된 한반도, 조국을 향해 품었던 마지막 꿈이었다.

[Ⅻ] 맺음 말

말씀이, 어른이, 영성이 그리워서 읽기 시작한 장공의 글이었다. 요즘처럼 혼탁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어떻게 사는 것이 슬기롭게 사는 것인지 ‘한 어른의 영적인 말씀’을 듣고 싶어서 서가에 꽂혀 있던 장공 전집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들었다. 여전히 높지 않은 톤으로 조근 조근 말씀하시는 어른의 말씀에 가슴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은 과연 ‘영의 말씀’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위기의 순간마다 어떻게 초월을 만나고 체험했는지, 그 초월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현실에서 그 초월을 어떻게 펼치며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던 장공 영성의 밑그림을 어느 정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장공은 어린 시절 어른들을 따라 습관적으로 행하던 조상제사의식, 그리고 서당 공부에서 조상들의 오랜 전통인 유교 문화를 접했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낯선 매서인과 토론하는 부친의 꿋꿋한 모습에서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한 무한 충성의 존경심을 느꼈다. 그러나 웅기 언덕 일본인 신사에서 ‘종교적 외경’을 느끼면서 낯선 종교에 이끌리는 무의식적인 자아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향 선배 만우의 ‘지시형’ 권면에 서울 유학을 단행하였고 승동교회의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마침내 ‘믿기로’ 작정하면서 ‘꿀송이 같은’ 성경 말씀, ‘저절로 나오는’ 기도 생활에 빠져들었다. ‘영의 사람’으로서 장공의 생이 시작되었다.

장공의 영성은 경성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읽었던 독서생활을 통해 영글어저 갔는데, 그렇게 해서 만난 것이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와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었다. 그렇게 해서 프란체스코의 ‘청빈 영성’과 선다싱의 ‘전도자 영성’은 그의 ‘청빈의 전도자’로서 평생을 헌신하도록 만든 생활원리의 양축(兩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아오야마, 미국의 프린스턴에서 양극단의 신학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진보와 보수, 개혁과 전통 사이의 ‘조화 영성’을 습득하였다. 그는 서로 다른 것이 배타와 배척이 아닌 상생과 협력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신학자에서,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귀국해서 평양에서 3년, 북간도 용정에서 2년 생활하면서 많은 글을 발표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의하고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에 올곧게 응답했던 ‘예언자 영성’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손에 잡고 행진하는 ‘십자가 영성’이 그를 붙잡아 주었다.

1939년 이후부터 장공의 삶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와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는데 순탄치만은 않았다. 해방 후 전개된 한국 장로교회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장공과 조선신학교는 ‘이단시비’ 논쟁의 한복판에 내몰리게 되었다. 1952년 총회에서 결국 목사 제명을 당하고 내몰리기까지 억울하고, 지루하고, 피곤했던 긴 시간들 속에서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사방에 적들로 우겨 싸임을 당한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만 충성하였던 ‘바울 영성’이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장공이 선린형제단과 경동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면서, 또한 조선신학교에서 목회 지망생을 육성하면서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것은 ‘야고보 영성’의 믿음과 생활의 일치, 생활로 증명되는 믿음, ‘생활신앙’ 바로 그것이었다. 장공이 목사로서 1960년대 이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현장에 증명해 보인 것도 기독자로서 당연한 의무인 ‘이웃사랑의 실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캐나다 1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한 장공은 불러주는 모임, 부탁하는 강연, 독서와 서예, 여행과 병 치료 등으로 조용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 중에도 교회와 역사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은 연구와 집필활동으로 연결되었고 그렇게 해서 후배들에게 던져준 신앙과 신학의 화두는 ‘역사적 원점’과 ‘전우주적 사랑공동체’였다. 역사의 원점인 하나님의 사랑(생명)에 뿌리를 박고 믿음의 줄기와 성령의 가지에 맺히는 열매로 민족과 전 세계 인류가 하나 되어 평화를 이루는, 그런 초월의 세상을 이 현실에서 이루라는 노 예언자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면서 떠나왔던 고향으로 날아 올라간 장(長)--------공(空)! 이었다.

새벽 날개 타고111)

111) 이 노래 가사는 장공이 귀국하기 1년 전인 1983년 7월, 교회음악가 박재훈 장로와 함께 캐나다 온트리오주 알켄켄호수로 소풍을 나갔다가 차 안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歸國直後》, 19~20쪽.

[1]

이 우주는 하느님 집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 집

새벽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2]

이 눈이 하늘 보아 푸름이 몸에 배고
이 마음 밝고 맑아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켠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3]

땅에서 소임 받아 주님 나라 섬기다가
주님 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옮기나니

새벽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켠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이덕주(李德周)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신학박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부관장
․감리교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

- 저서 - 『한국 그리스도인의 개종 이야기』,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한국 토착 교회 형성사 연구』,『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 이야기』,『종로 선교 이야기』등을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