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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2회] 장공의 정치사상 / 김동환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22 10:06
조회
1543

[32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31121() 오후 5~7

장공의 정치사상

김동환 교수
(연세대 신학윤리)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현 시대적 의미를 파악해보려는 것이다.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현 시대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을 화두로 던지고 이에 답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궁극적인 관심이자 목표이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첫째로 그의 정치사상의 출발점, 둘째로 그 구체적인 내용, 셋째로 그 최종적인 지향점을 단계적으로 점검해본다. 이러한 단계적 점검을 통하여 발견되는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자유’이다. 풀어 말하면, 첫째로 인간의 본성을 자유로 파악하는 그의 통찰력 있는 인간 이해로부터 그의 정치사상은 시작되고, 둘째로 그에게 있어서 자유가 정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담겨질 수 있는 최적의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이며, 셋째로 그러한 정치적 내용들을 담아냄으로써 그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던 바는 전 우주적 자유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가로서의 그의 현상학적 모습이나 사회적 업적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그가 자유에 뿌리를 둔 뚜렷한 정치(신학)사상적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며, 이에 더 나아가 이처럼 자유에 근거한 그의 깊이 있는 정치(신학)사상은 그가 살던 시대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아니 자유가 추구되어야하는 모든 시대와 상황 속에서 유효하며 필요하다는 것을 밝혀준다.

주제어

김재준, 정치사상, 자유, 민주주의, 현실주의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earch for the contemporary meaning of Kim Jaejoon's political thought. What does his political thought mean nowadays? This article casts this prime question and seeks to answer it. For this, it examines (1) the starting point of his political thought, (2) its concrete content, and (3) its ultimate goal. It is freedom that is discovered as the core of his political thought throughout this examination. Concretely speaking, (1) his political thought begins with his insightful interpretation in which the essence of man is considered to be freedom, (2) the most suitable political system that can actually contain freedom in this world is liberal democracy, and (3) what he ultimately pursues in his political thought is the community of freedom in the entire cosmic scale. This analysis can uncover the fact that he had already established his own profound political-theological thought before he came out as a political actor for social freedom, and that his considerate political thought rooted in freedom is effective and necessary not only nowadays, but also in the future in which freedom is pursued.

Key Words

Kim Jaejoon, Political thought, Freedom, Democracy, Realism

김재준의 정치사상1)

1) 본 논문은 2013년 11월 21일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 32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임.

[1] 들어가는 말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지금도 유효한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정치사상은 정치적으로 암울하여 앞이 깜깜해보였던 그 당시 한국의 정치 현실 속에서는 한줄기 빛과 같았으나, 현재 21세기의 정치 현실 속에 그 빛을 가져다 놓았을 때 과연 계속 빛날 수 있겠는가? 그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드는 질문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에 잇대어 비유적으로 다시 말해 보자면, 그 당시 영웅이 여전히 지금의 영웅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되겠다. 정치사상이 주제이니 이를 정치사상에만 국한해서 파악해보면,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계속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정치사상가들은 본질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 그들의 뛰어난 정치 활동의 모습도 아니었고, 그들이 남긴 정치적 업적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활동이나 업적 ‘이전에’ 혹은 그 ‘아래에’ 깊이 뿌리내려있던 학문적(정치학적) 밑바탕이다. 만약 김재준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과정속에서도 그러한 학문적(정치신학적) 밑바탕이 발견된다면, 그는 분명 지금 이 시대에서도 조명 받아 마땅한 영웅일 터이고, 그의 정치사상은 특정 시대와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귀한 정치사상일 것이다.

이처럼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현실 유효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과연 그의 정치사상의 출발점은 무엇이고, 둘째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며, 셋째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단계적으로 규명해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김재준의 정치사상에 대한 본 논문은, 이러한 세 가지 연구 단계의 과정들을 토대로, 그리고 그 과정들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위의 기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치사상적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과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2] 출발점: 인간의 본성 - 자유

장공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을 목도하면서 그가 남긴 유명한 논문인 “기독교의 건국이념”의 첫 문장인, “기독교인의 최고 사상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2)일 것이다. 비단 대한민국의 건국만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건국을 기대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정치사상은 시작되며 그의 정치사상의 내용들은 채워진다. 사상적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의 정치사상은 그가 당시 크게 영향을 받았던 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의 사상에 입각해있는 것이 분명하다.3)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을 통한 그의 신앙 고백이 신정통주의의 ‘위로부터의’ 사상을 통해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의 방향은 오직 위로부터 아래로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하향적인 종교”이다.4) 그는 단언하기를, “예수의 종교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선 그 방향에 있어서 하늘이 땅에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역사 가운데 오신 종교다.”5)

2)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 이념,”『장공 김재준 논문 선집(이하 논문 선집)』(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329. 3) 보다 근본적으로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종교개혁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는 그러한 종교개혁 사상의 근원적 뿌리를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 속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4) 김재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논문 선집, 490.
5) 김재준,『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서울: 삼민사, 1985), 17.

이런 점에서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시작은 ‘성육신’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요, 신앙적 사건이요, 또한 정치적 사건이다. “정치는 우리 생활 전체를 규제하는 권력행위”6)라는 그의 정치에 대한 정의가 맞다면, 인류의 생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초역사적, 초신앙적 사건인 성육신의 사건은 초정치적 사건이다. 성육신의 사건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전적으로 개입한 사건이며 이를 세상의 용어로 풀어 말하면 ‘하나님의 정치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기본적으로 신정(theocracy)에 잇대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6) 김재준, “개혁교회의 개혁,” 논문 선집, 149.

그럼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김재준에 의하면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느님, 창조주시요 온 우주의 주재자이신 살아 계신 거룩한 하느님께서 ‘세상’, 즉 이 ‘사바 세계’라는 ‘인간들의 사회’를 먼저 찾아오시는 소식, 그리고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시는 ‘말씀’에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됩니다.”7)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그의 관심의 대상은 인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점은 오직 사람들을 찾아 그에게로 부르시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정치사건의 대상은 바로 인간이며,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방식으로 바르게 다스리기 위하여 곧 정치(政治)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7) 김재준, “기독교의 기본 문제,” 논문 선집, 196.

따라서 하나님의 정치사건 곧 성육신 사건의 이유이자 대상인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김재준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김재준의 인간 이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로운 인간’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바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한 그의 설명은 특별하다: “인간은 자유하는 주체다. 하나님도 그 자유에는 손대지 않으신다.”8)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표현상 지나친 감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도 손대지 않으실 정도로 귀중한 본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본성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그의 논조로 이해할 수 있겠다.9)

8) 김재준, “역사참여의 신학,” 논문 선집, 396. 9) 김재준에게 있어서의 자유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오갑, “장공의 자유론,”『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17회(2008) 자료집 참조 요망.

김재준에 의하면 인간의 근원적 본성인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본성이다. 자유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자유하심 속에서 특별히 인간에게만 불어넣어주신 본성이 바로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의 근원이 하나님의 자유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김재준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자유와 해방의 선각자라고 말하고 그의 사회적 정치참여를 논하기 이전에, 그가 말하는 자유가 인간의 본성 자체라는 사실과 그 본성이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그의 정치사상의 신학적 근거가 굳건해질 수 있으며 그의 정치사상의 출발이자 핵심인 하나님의 정치사건 곧 성육신의 정치사건의 내용이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당시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할 때 그 비판의 근저에는 그가 기독교의 기본 신앙 곧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기본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중심적인 사상을 내세운다는 뉘앙스가 잔뜩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자유론을 들여다보면,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이 그에게 적용될 때의 그 자유 개념 자체가 결코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래 신정통주의의 사상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말하듯 자유의 수호자이자 주창자는 분명 인간이었으나, 그 인간의 본성적인 자유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소위 보수주의적 신학사상이 만연하던 초기 한국기독교 신학 정착기에는 신정통주의 사상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서구의 신학사상으로 느껴졌다는 시대적 정황으로 이러한 흐름을 지금에야 쉽게 이해할 수 있겠으나, 기독교가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데 있어서 그 외치는 자유와 해방의 근원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전제해주는 것은 어떠한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라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신학적 작업이다. 보수주의자이든 신정통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그 어떤 정치사상을 드러내더라도 항상 그 드러내는 사상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이 신학적으로 분명히 뒷받침될 수 있다면, 그 정치사상은 신학적으로 굳건하며 건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마도 많은 김재준 연구가들이 소위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김재준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그 속에서 오히려 소위 보수주의적인 면들(예를 들어 그의 성령체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을 많이 발견하며 의아해하게 되는 이유 또한, 그의 사상이 사회적으로 표출된 현상학적 결과들 이전에 이미 근본적으로 신근원적(God-oriented) 혹은 신관계적(God-related) 신학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맨 앞서 제시된 기본 질문은 일차적인 답을 얻게 된다. 우선 그 질문의 내용을 되새김질하면 이렇다: 도대체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무참히 억압되던 당시의 한국 시대 상황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현 21세기 정치 상황 속에서 김재준의 정치사상이 되새김질 되어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 이유가 단지 그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멋진 투쟁적 모습들을 회상하거나 혹은 그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이룩해놓은 업적들(예를 들어 한국신학대학교나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설립에 대한 공헌)을 기념하려는 것에 있다면, 감히 말해보건데 김재준에 대한 연구는 이제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사려 된다. 그러나 만약 그 이유가 김재준이 이룩해놓은 그러한 자유 쟁취의 인본적 업적 이면에, 아니 그 근원에 하나님 중심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발굴해내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의 신근원적 혹은 신관계적 신학은 어느 시대 상황에서도 필요한 것이며 그러했기에 그의 사상(특별히 그의 자유를 향한 정치사상)은 그 시대에서나 지금 이 시대에서나 반드시 필요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면, 김재준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의미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한다고 또한 감히 말해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다시 인간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면)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이 자유인데 그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김재준의 통찰력있는 신학적 인간 이해를 재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김경재는, 김재준이 자유라는 개념을 통한 인간 본성과 하나님 본성 사이의 이러한 유비를 하나님 형상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 풀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재준은, 자유란 인간이 인간 되는 근본 조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에서 ‘하나님 형상’의 핵심적 본질 또한 ‘자유’라고 본다.”10)

10) 김경재,『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110.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 자유라는 생각은 실로 김재준의 인간 이해의 핵심 내용이다. 많은 위대한 신학 사상가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많은 위대한 신학적 해석을 해왔다. 그 많은 해석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보자면, 첫째로 어거스틴의 입장을 받아들인 라인홀드 니버의 실재적(substantive) 해석으로서,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유비(analogy of being)을 말함으로써 특별히 신으로부터 존재적으로 답습한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부각시키게 되는 해석이다. 둘째로 폰 라드의 기능적(functional) 해석으로서, 이는 존재적 유비가 지닌 지나친 인간 능력의 부각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인간의 정신적 측면뿐 아니라 육체적 유한함을 인정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정(regency)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차이를 확인하는 해석이다. 셋째는 칼 바르트의 관계적(relational) 해석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삼위적 관계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적 유비라기보다는 존재적 차이가 우선하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관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형성된다는 해석이다.11)

11) 김동환, “Technological Imagination of Artificial Intelligence in the Light of Decalogue,”『기독교사회윤리』24집(2012), 69-89 (이 세 가지 분류는 Noreen L. Herzfeld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이 세 가지 해석들 중 김재준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정확히 어느 하나를 따르고 있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이 신정통주의 노선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폰 라드의 기능적 해석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차이를 확인하는 해석에 친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라인홀드 니버와 칼 바르트는 익히 알려진 대로 그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이기에 이 둘의 입장들에 대해서도 다분히 친화적이다. 즉 인간이 지닌 자유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해석하는 점에서 다분히 존재적 유비를 통한 인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실재적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그러한 유비의 기원은 분명 하나님의 자유하시는 본성에 있다고 봄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나 그 관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관계적 해석도 따르고 있다.

우선 자유를 향한 그의 투쟁의 진면모가 부각되면 될수록 자유를 쟁취하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자유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적 유비를 가진 능력 있는 존재라는 실재적 해석을 그가 주로 따르고 있다고 파악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앞서 그의 정치사상이 신근원적 혹은 신관계적 신학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처럼) 그러한 실재적 해석이 하나님 중심의 관계적 해석과 함께 혹은 그 바탕 위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세상적인 힘을 향해서는 단호히 독립을 외치는 자유이나, 인간의 자유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독립을 주장할 수 없는 자유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절대자존자가 아니므로 절대자유를 주장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의 창조주를 떠나 절대자유를 감행한다면 그것은 제 손으로 제 터전을 ‘세상’에 빠트려 파괴하는 셈입니다. 마치 대해에 떠가는 배에 탄 사람이 ‘자유’한다고 배에서 뛰어나가면 물에 빠질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12)

12) 김재준, “기독교의 기본 문제,” 논문 선집, 215.

그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입장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함이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본성이 자유이고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형상인 인간의 본성 또한 자유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자유한다는 것 혹은 독립한다는 것은 불가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결별의 선언을 의미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 곧 자유를 지닌 인간의 본성상 하나님의 자유가 곧 인간의 자유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비인격적 발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3] 구체적 내용: ‘최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자유에 초점을 둔 김재준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죄에 대한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선 그가 죄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는 않고 있기에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에게 있어서 죄는 ‘자유의 상실’이라고 파악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형상의 핵심적 본질이 자유이기에 자유를 상실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인간성 자체를 상실한 비인격적 존재 곧 죄된 존재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분명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니버는 그의 유명한 『인간의 본성과 운명』제1권에서 인간의 본성이 그의 자유이다(“The essence of man is his freedom.”13))라고 명시한다. 차이가 있다면, 니버는 자유의 상실을 죄 혹은 죄된 상태로까지 여기지는 않고 있는 반면, 김재준은 그렇게까지 여긴다.

13)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 vol 1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7.

잘 알려져 있듯이 니버에게 있어서 죄는 교만이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욕망이 교만의 최종 행태이다. 이러한 교만으로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김재준은 분명 니버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기독교윤리학자였다. “기독교와 정치: 라인홀드 니이버의 경우”라는 논문에서 그는 니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꿰뚫고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 ‘관계됨’을 단절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이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나타나는 모습은 ‘인간 교만’이다. 인간은 교만한 태도로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다.14)

14) 김재준, “기독교와 정치: 라인홀드 니이버의 경우”, 논문 선집, 264.

니버의 이러한 인간 이해에 김재준이 깊이 영향을 받은 흔적은 그의 많은 글들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니버에게서와는 다소 다르게 김재준에게 있어서 죄의 나타나는 모습은 교만이기도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자유의 상실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도 손대지 않으실 정도로 귀중한 인간의 본성인 자유가 빼앗긴 혹은 자유를 빼앗는 상태가 가장 죄된 모습이다.15) 그러한 자유 상실의 모습이 니버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장 교만한 인간의 죄된 모습이라고 하겠다.

15) 여기서 자유 상실의 주체를 명확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김재준에게 있어서 자유 상실이 죄라고 말할 때, 죄를 짓는 교만의 주체는 분명 자유를 빼앗는 자들이지 결코 자유를 빼앗긴 자들이 아니다. 즉 자유를 빼앗긴 자들은 교만한 자유 강탈자들에 의해 형성된 죄된 상태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된 정치적 약자 혹은 피해자들이다.

정치사상적으로 볼 때 인간의 죄된 모습 곧 교만한 인간의 모습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사회체제를 찾는 것으로부터 니버의 정치사상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된 모습 곧 자유가 상실된 인간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사회체제를 찾는 것으로부터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전개된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유사해보이나 강조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들도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니버에게 있어서는 죄가 교만이기에 그의 정치사상은 교만을 올바르게 '다스리는'(control) 사회체제를 찾으려는 내용들로 채워진다. 즉 어떤 사회체제가 인간의 교만함 곧 죄된 모습을 합리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지는 찾는 것으로부터 그의 사회체제 연구 조사는 시작된다. 반면 김재준에게 있어서는 죄가 자유의 상실이기에 그의 정치사상의 내용들은 상실된 자유를 다시 '회복시키는'(restore) 사회체제를 찾으려는 것들로 채워진다. 즉 어떤 사회체제가 자유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 곧 죄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으로부터 그의 사회체계 연구 조사는 시작된다. 결국 교만은 제재하여 다스릴 개념이나 자유는 북돋아 회복시킬 개념이라는 점에서 니버와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강조점은 다르며, 따라서 전개되는 두 정치사상의 내용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에게 있어서 인간의 죄된 교만의 모습을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이자 사회체제는 민주주의였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여타 다른 ‘주의’들은 이러한 인간의 죄된 모습을 다스리기에는, 기본 사상적인 큰 흠은 없었으나 그 추진된 과정에서 많은 역효과를 낳았다. 평등을 지향하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의 독재를 통해 파쇼적 공산주의로 변질됨으로써 가장 교만한 체제가 되었으며, 합리성을 지향하던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의 시장경제구조 창출을 통해 비합리적 세속주의로 변질됨으로써 역시 가장 교만한 체제가 되었다. 이러한 부산물들을 목도하며 니버가 찾은,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선택은 민주주의였다.16)

16)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김재준의 구체적인 현실 방안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 이념,” 논문 선집 참조 요망.

변질된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김재준의 비판의 내용은 니버와 아주 유사하다. 또한 그러한 비판 속에서 김재준이 선택한 정치체제도 역시 민주주의였다. 최상은 아니나 최선의 정치체제를 택하려는 니버의 유명한 근사치적 접근 방식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김재준에게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유산이며 가장 문명한 제도이며 사실 생활로서의 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가 지향하는 인권에 대한 천부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목표와 일치하는 현실과의 가장 이상적인 근사치를 갖는 정체”17)였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점은, 그의 최선의 선택이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개념 속에 자유는 이미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김재준도 민주주의를 택했다고 그냥 말하면 될 것 아니냐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껏 강조한 대로, 그가 추구한 핵심 내용은 오직 자유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그릇이 민주주의였기에 그가 민주주의를 택한 것이며, 그러했기에 그가 택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만 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니버가 택한 민주주의를 ‘정의로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면, 김재준이 택한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니버의 초점이 정의에 있었던 것처럼, 김재준의 초점이 자유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움이 상실되는 ‘주의’는 아무리 최상의 ‘주의’라 하더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자유가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주의’는 어떠한 ‘주의’라도 최선의 이데올로기요 사회체제였다. 그 최선의 이데올로기요 사회체제가 민주주의였기에 그는 민주주의를 택했고, 따라서 그 민주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만 했다.18)

17) 김재준, “인간 운동,”『제3일』27호, 4. 18)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유념해야할 점은, 김재준이 선택한 정치사상 혹은 정치체제가 본 소제목에서 제시하듯 ‘최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설명 없이 그가 선택한 최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그저 근대 이후 정치사상 논의에서 많이 회자되어온 자유민주주의로서 일반화시키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어떤 특별한 국가나 사회적 정황 속에서 이슈가 되어온 특정한 형태의 자유민주주의로 소급시킨다면, 이는 그의 정치사상을 크게 오해 내지는 왜곡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김재준이 민주주의뿐 아니라 다른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열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열린 자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자세가 그저 열려있는 자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변화무쌍 내지는 (심하게 표현하면) 정치적 소신이 정확히 없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듯한 인상까지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경험하면서 투철한 “경험적 반공주의자로 변신”19)하여 기독교의 건국이념을 제시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몰이해한 적대 행동을 취하여 신을 모독하며 성역을 유린(蹂躪)하고 신자를 모욕 살해하며 패륜의 도를 감행하는 등 심히 불쾌한 인상”20)을 남겼다며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가, 왜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공산주의자들도 사회 정의 수립을 위한 하나님의 종임을 자각하고 모름지기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께서 특별 은총의 기관으로 수립하신 교회를 중히 여겨 받들어 나가면 자본주의 시대보다도 더욱 친밀하게 교회와 제휴할 수 있으며 교회로부터 받는 조력도 더욱 클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할 것”21)이라며 공산주의의 긍정적 가능성을 치켜세우는가?

19)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28. 20)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 이념,” 논문 선집, 333.
21) Ibid., 334

그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제껏 강조해왔듯이 김재준이 신학적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초지일관 관심을 보였던 개념이 자유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려 된다. “상술(上述)한 제(諸) 자유만 확보한다면 공산주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22)는 그의 말은 위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 될 수 있다. 자유를 가장 잘 추구할 수 있는 사회체제는 그 어떤 사회체제라도 받아들일 열린 자세가 그에게는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본래 성경주의, 타계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 교회주의까지 기본적으로 ‘주의’ 혹은 “어떤 ‘론’을 펴는 데 매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23)기에 때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기독교의 예언자들과 예수의 민중전통”24)을 탐구하려 노력한 그였으나, 그러한 예언자적, 그리스도적 전통이 현실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달갑지 않던 이데올로기들도, 사회체제들도, 그 무엇도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감수하고서라도 힘껏 받아들이겠다며 열려있었던 것이다.

22) Ibid., 333. 23) 김경재,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관하여,” 『장공 사상 연구 논문집(이하 연구 논문집)』(서울: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285.
24) 손규태, op. cit., 125.

이처럼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던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 현실주의적이었다. 현실에 가장 적합한 사회체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사상은 다시한번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의 초점이 자유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한번 그의 정치사상은 니버의 현실주의와는 어긋난다. 니버의 정치사상의 핵심 단어는 분명 정의였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가치인 사랑을 현실적으로 이루기위해 니버는 정의가 필요했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현실적 대안은 정의 사회 구현을 슬로건으로 삼는 민주주의가 당연했다. 한편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핵심 단어는 자유였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가치인 사랑을 현실적으로 이루기위해 김재준은 자유가 필요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할 점은, 그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현실적 대안은 반드시 민주주의이어야할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즉 선택한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일 때에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사회주의, 자유공산주의, 자유자본주의는 어떠할까? 물론 유효하다. 이들 중 가장 역효과가 있지 않고 심히 변질되지 않아온 자유의 선봉자가 민주주의였기에 그는 자유민주주의로서 민주주의를 택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재준의 정치사상은 니버의 현실주의와 함께 존 C. 베네트의 절충적 현실주의에도 가깝다. 실제로 그는 베네트의 주저인『그리스도인과 국가』(1961),『공산주의와 기독교』(1985)를 번역할 만큼 베네트의 정치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세계대전 이전에 기독교적 사회개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라우센부쉬식 사회복음주의 운동과,25)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기독교적 사회개혁의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피력한 라인홀드 니버식 기독교 현실주의 사이의 절충적(eclectic) 노선을 제시했던 베네트식 기독교 현실주의는, 사회체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자유라는 모토 아래 기존의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김재준의 정치사상과 다분히 연결된다. 베네트식 절충적 정치 노선에서 바라보면, 사회 정책 수립에 있어서 그가 다소 막연 내지는 주관 없어 보이듯 제시한, “소련의 공산주의, 미국의 뉴딜 정책, 영국의 제반 사회정책 등을 평심담회(平心擔懷) 참고하여 조선의 실정에 조합(照合)하여 최적의 길을 취할 것”26)이라는 논리 전개도 이해가 간다. 물론 절충적 입장이라곤 하나 그의 이러한 정치 입장이 건국을 앞두고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식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던 당시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많은 의문을 자아냈으리라는 것을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찌 보면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르는 것보다, 이러한 절충적 입장이 (물론 이런 입장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으나 만약 옮겨졌다면) 오히려 그 당시의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대안이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의 절충적 입장이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이긴 했으나, 그러하기에 결국 실제로 취해야할 그가 말하는 “최적의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보다 명백히 제시해주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니버는 현실주의적 접근 속에서 막연해보이던 근사치적 접근, 즉 정의를 통해 사랑을 근사치적으로 성취하려는 다소 추상적인 접근 방식을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실제 정치 형태의 방법으로서 ‘힘의 균형’과 ‘힘의 분산’을 제시했다. 한국을 포함한 정치적 제3세계의 입장에서 이러한 제1세계적 단순 논리가 주는 폐해가 적진 않았으나,27) 당장 실용적인 정치 행태의 방법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니버의 정치 방법 제시는 당시 미국의 정치 활동가들의 구미에 맞았고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김재준의 절충적 정치 입장이 제1세계가 아닌 제3세계에서 시도될 수 있는 보다 실용적이며 구체적인 ‘최적의 길’을 (니버처럼 당장 적용 가능한 정치 행태 방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사상적 방향으로나마 제시해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25) 김재준은 “글래든이나 라우센부쉬 등에 의한 사회적 복음 운동”(김재준, “종교와 역사”, 주재용 엮,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 풍만출판사, 1986), 118)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이 많았다. 26)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논문 선집, 339.
27) 노정선,『통일신학을 향하여』(서울: 한울, 1988), 79-101.

[4] 종착점: 전 우주적 자유의 공동체

절충적 정치 입장에서 베네트가 나름대로 구체적인 최적의 길로 제시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였다. 즉 하나님 나라의 지상 실현을 담당할 수 있는 최적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이며,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지상 실현은 가능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28) 그렇다면 김재준식 절충적 정치 입장에서 말하는 최적의 길 또한 교회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선 그 대답이 ‘그렇기도 한’ 이유는, 김재준에게 있어서 교회가 베네트에게 중요했던 것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논문 제목으로 붙일 정도로 그토록 주장한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1967)는 교회의 정치 참여라는 말로 대체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교회는 그의 정치사상이 구체화되기 위해 필요한 최적의 길이었다. 손규태가 분석하듯, “장공은 교회와 정치의 관계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루터파 전통에 서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권통치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행사를 주장하는 개혁교(장로교) 전통에 서”29)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치 참여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중요시여겼다.

28) John C. Bennett, Christians and the Stat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195-204. 29) 손규태, op. cit., 119.

한편 그 대답이 ‘그것만이 다는 아닌’ 이유는, 김재준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의 주체가 교회이기 이전에 인간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이 인격적 존재자란 것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자유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곧 인간존재 자체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30)라고 말할 때,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것은 교회를 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교회의 정치 참여이기도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 각 개인의 정치 참여이다. 왜냐하면 자유가 상실되는 죄악된 모습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비인격적 모습이기에,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이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그의 소속이 어디인가에 상관없이 그 어느 누구라도 개인적으로 취할 수 있으며 그 어느 누라라도 취해야 마땅한 인간의 가장 우선적인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30) 김재준, “자유와 종교,”『김재준 전집(이하 전집)』4권(오산: 한신대학출판부, 1992), 422.

그러하기에 김재준이 제시하는 ‘생활신학’의 주체도 우선적으로 자유로운 인간 각 개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역시 개인 자유의 신성불가침에 있습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도 손대지 못합니다(『고토를 걷다』, 238쪽).”31) 앞서 인용했던 문장에서처럼 하나님도 손대지 ‘않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도 손대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때, 그 개인 스스로는 곧바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한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라면 더더욱 자유를 향한 행동이 그의 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바로 나타나야하기에 이를 김재준은 ‘생활신학’이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생활신학은 교회생활 이전에, 아니 어떻게 보면 교회생활 여부에 상관 없이라도 기독교인이라면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따라야할, 자유를 향한 실존적 참여 신학이다.32) 물론 자유를 향한 각 기독교인의 생활신학들이 함께 모여 공식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기독교의 공동체적 참여가 교회의 참여이긴 하겠으나, 그리고 그러할 때 가장 이상적이긴 하겠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라도 각 기독교인은 언제든 적극적으로 자유를 향한 행동가로서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한다. 김재준이 기독교 정치인의 활동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화를 통하여 화해에의 길을 모색하는 직책을 사명으로 느끼는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 . . 크리스천이 정치참여에 있어 이 화해의 중매자직을 담당한다는 것은 제 격에 맞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영예로운 타협’의 명수로 등장해야 할 것이다.33)

31) 유동식, “장공의 역사의식과 민족목회,” 연구 논문집, 263에서 재인용. 32) 김재준의 신학에서 ‘참여’라는 개념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손규태는 “장공의 삶과 사상, 즉 인식론과 실천론을 결합시키는 개념은 ‘참여’라는 개념이다”라고 단언한다(손규태, op. cit., 111-112).
33) 김재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논문 선집, 391.

기독교의 정치 참여에 있어서 ‘영예로운 타협의 명수’ 곧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기독교인 정치인의 정치 참여는 교회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한 정치 참여 못지않게 중요하다. 뛰어난 기독교인 정치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자유를 향하여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한다면, 그는 이미 자유를 향한 최적의 기독교적 정치 참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재준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최적의 길은 반드시 교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김재준에게 있어서 교회는 기독교적 정치 참여를 하는 최적의 길--베네트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적 정치 참여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연결해주는 “중재자”(mediator)34)--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정치 참여가 최적으로 이루어진 인간 공동체의 모습을 기독교적으로 가장 잘 묘사해줄 수 있는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각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그 자유가 기독교의 최상의 가치인 사랑 안에서 활짝 피어오른 인간의 최적의 정치적(올바로 다스려지는) 공동체의 모습을 적절히 표현한 기독교 용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김재준은 그가 전 인생에 걸쳐서 줄기차게 궁극적으로 제시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거점’”35)을 교회라고 표현한 듯하다. 실제로 그의 글들을 훑어보면 “김재준은 교회를, ‘전 우주적 생명의 공동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창조적 사랑의 공동체’,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등으로 표현했다.”36) 물론 표현은 그렇다 손 치더라도, 과연 그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그 모습으로건 개념으로건 결국 교회로 귀결되는가? 그렇지는 않는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인간 자유의 최적의 상황을 기독교적으로 묘사하자면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장 적합하기에 교회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표현’한 것이지, 그런 사전적 설명 없이 존재적으로 교회가 곧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지상적 모형이 있다면 그것이 교회일 수는 있겠으나 (그리고 교회이어야 하겠으나) 교회 자체가 혹은 교회로 표현되는 최적의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모습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완성 혹은 결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34) John C. Bennett, op. cit., 204. 35) 김재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논문 선집, 495.
36) 천사무엘,『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서울: 살림출판사, 2003), 214.

결국 김재준이 제시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교회를 포함한 그 어떤 지상에서의 공동체의 모습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추측하건데 (물론 그럴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하겠으나) 만약 그가 최적으로 선택한 자유민주주의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지상에서 설립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그가 제시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지상적 (혹은 육신적) 틀 속에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적이었으나 지상과 함께 지상을 넘어서는 영적으로도 생동하는 공동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그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체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을 김경재는 적절하게 풀이해주고 있다.

그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현재 땅 위의 역사 현실 안에 갇혀 있거나 제한되는 ‘휴머니즘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전일적 세계로서 우리가 죽음 이후에 ‘영생하는 몸’으로서도 계속 그 안에서 살아갈 신비한 생명 공동체이기도 한 것이다.37)

37) 김경재,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관하여,” 연구 논문집, 279.

전 우주적 (혹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이상적이고 참 멋진 표현이긴 하나38) 정치 사상적으로 볼 때에는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문은 그 공동체를 지향 혹은 건설하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처음부터 밝혔듯이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출발점이자 핵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로서 그 지향하는 방향은 위로부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정치 곧 성육신의 정치이다. 이와는 달리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건설 방향은 위로부터라기보다는 (물론 처음 방향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즉 위로부터였겠으나 그 구체적인 건설의 최종 방향은) 아래로부터이다. 물론 그 전체 과정을 성육신하여 내려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는 과정에 비유하자면 이해가 된다. 위로부터 내려오신 성육신의 하나님이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아래로부터 다시 위로 오르시는 것이라 묘사할 수는 있겠다. 큰 그림을 그려보면 논리적으로 이해는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제시하는 궁극적인 관심 혹은 구체적인 초점의 방향은 어디었는가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실현은 하나님 나라의 위로부터의 지상 건설에 집중되어 있었는가, 아니면 그러한 지상 건설은 과정이었고 최종적으로는 말 그대로 ‘전 우주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어떤 새로운 기독교적 사랑의 공동체를 아래로부터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38) 김경재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감성적 표현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보다 학문적인 표현으로 바꾸어서 ‘대승적 기독교론’이라고 풀이해 나간다(김경재,『김재준 평전』, 199-204).

정치 사상적으로 보면 이러한 논의는 그가 정치적 이상주의자였는가39) 아니면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는가 하는 논의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가 베네트식 절충적 입장을 정치사상의 방법론으로서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둘 다라고 말하고 지나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지나가기에는 그의 정치사상을 명확히 분석하기도 어렵거니와, 특히나 그의 정치사상이 현재 정치현실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제시하기도 어렵다. 앞서 파악했듯이 기본적으로 그는 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에 근거하여 위로부터의 하나님의 정치를 제시하였고, 그 하나님의 정치의 성육신적 지상 건설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라인홀드 니버식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가장 많이 따른 것이 확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에 더 가깝고, 따라서 그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건설의 최종 방향은 결국 아래이며 건설의 장(場)은 지상에 집중되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39) 여기서(이 문단에서) 말하고자하는 이상주의는 지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이 가능할 거라고 낙관하는 라우센부쉬식 정치적 이상주의의 의미도 있으나, 이보다는 정치적 관심의 방향과 초점을 지상 곧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곳에 둔다는 의미에서의 이상주의를 뜻한다.

여기서 다시 되돌아가 드는 의문은, 그렇다고 할 때 김재준이 말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었으니 그저 흔히 말하듯 하나님의 나라로 규정하면 되는가? 하지만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그가 근본적으로 신정통주의자로서, 그리고 현실주의자로서 말해오던 하나님의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그 속에는 현실주의뿐 아니라 이상주의와 초월주의와 신비주의까지도 함께 모두 엉켜있는 듯하다. 이렇게 혼재된 양상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이유는 용어에 있어서 ‘전 우주적’과 ‘공동체’라는 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혼재로부터 말해볼 수 있겠다. 우선 ‘전 우주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나 인간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전 우주적 하나님 혹은 하나님은 전 우주적이라는 표현은 어울리나, 전 우주적 인간 혹은 인간은 전 우주적이라는 표현은 썩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물론 김재준의 사상 속에 인간 중심적 사상이 강한 것이 사실이나 근본적으로 그의) 신정통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신에 도전하는 듯할 정도로 지나치게 인본 중심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런 점에서, 전 세계적/세상적/지상적/인류적이 아닌 전 우주적이라는 표현과 어울리는 정치 방향은 여전히 위로부터가 합당하며 그 방향의 근본 주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반면 ‘공동체’라는 표현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더 잘 어울린다. 특별히 하나님은 공동체적이다라는 표현보다는 인간은 공동체적이다라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공동체라는 말은 인간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적 조직에 적용되기에 편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적/세상적/지상적/인류적 건설임이 합당하며, 이와 어울리는 정치 방향은 아래로부터, 그리고 그 실제 동인(動人)은 (물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겠으나)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40)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공동체를 왜 김재준은 굳이 ‘전 우주적’으로 실현하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 우주적 + 공동체라고 할 때의 정치 구현의 방향은 분명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가 혼재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로부터 아래로의 구현 이후에 (이것이 김재준이 계속 말한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인데) 이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아래로부터 (여기서 아래로부터는 이미 위로부터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아래로부터를 뜻하는데41)) 전 우주적으로 (여기서의 정확한 방향을 잘 모르겠기에 문제이나) 구현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로 김경재가 해석한 것처럼 신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신비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논리에 맞도록 정치 사상적으로 정확히 해석하기에는 매우 난해한 표현 혹은 개념이 아닐 수 없다.

40) 김재준에게 있어서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체가 누구인가하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그의 신학사상이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인가 신본주의적인가하는 논의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둘 모두를 종합하고자 한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종합적 관점은, 모든 종합적 입장이 그러하듯 항상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사람이 하려는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씨이저(Caeser)가, 가장 성공한 통치자였다거나 나폴레옹이나 진시황이 위대한 통치자였다 할지라도 그들도 여전히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 또는 「역사적 필연」이랄까에 위협을 받고, 떨며 그 앞에 서 있었다”(김재준,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 전집 4권, 523). 41) 김재준에게 있어서, 이처럼 위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구현의 모습의 시작은 ‘변질’(transfigure)이라는 단어로부터 묘사될 수 있다. 즉 그 모습의 시작은 “세속 역사를 하나님 나라 역사로 변질시키는”(김경재,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관하여,” 연구 논문집, 295)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변질의 개념을 토인비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으로는 그가 영향을 많이 받은 또하나의 인물인 리처드 니이버의 변화(transformation) 개념과 연결시킨다(김재준, “변모설화의 신학적 고찰,” 논문 선집, 249; “리처드 니이버의 신학과 윤리,” 논문 선집, 282).

이런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상적인 입장에서 결론을 내려 본다면, 김재준이 말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그가 기본적으로 신정통주의자로서 말한 기존의 하나님 나라 + @이다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이것은 아마도 라우센부쉬식의 이상주의가 니버식 현실주의와 함께 어우러져서 새롭게 제시되는, 즉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을 긍정적으로 제시한 라우센부쉬식 이상주의가 니버식 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이 지상에서의 실현은 불가능하나 ‘최적으로’ 실현해볼 수는 있다고 파악하면서 그 최적으로의 실현은 하나님 나라의 지상 건설에 국한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지상에서만이 아닌 그 다음의 단계, 말하자면 ‘전 우주적’으로--여전히 전 우주적이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실현해야겠다는, 일종의 통전적인(holistic) 정치사상으로 파악된다. 말하자면 정치적 이상주의, 현실주의, 초월주의, 신비주의, 실현주의가 함께 어우러진 독특한 김재준식 정치사상인 것이다.

끝으로, 이와 더불어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이러한 김재준식 정치사상 속에서 제시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은, “죄의식이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인 인간의 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외교 등의 자유를 포괄하는 인간의 외적인 자유”42)가 총체적으로 보장되고 누려지는 최적의 자유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최고 가치인 사랑이 그의 정치사상 속에서 구체화된 최적의 가치가 ‘자유’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감수성에서 표현된 그의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정치사상적 틀 속에서 ‘전 우주적 자유의 공동체’라고 바꾸어 표현해 본다 해도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42)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45.

[5] 나오는 말

김재준의 신학은 무척 방대하다. 그가 남긴 글들을 모은 전집의 분량만 18권에 이르니 심히 방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장공은 분명 신학자였지만 그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지 못했다”43)는 황성규의 이야기처럼, 그 스스로가 체계적으로 그의 신학을 정리하지 않고 떠났기에 그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가 그의 신학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았기에 연구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그의 신학을 조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의 정치사상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나,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기에 나름대로의 정치사상적 안목을 가지고--물론 다른 안목을 가졌을 때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으나--김재준의 정치사상을 마음껏 조명해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43) 황성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 op. cit., 20.

그 나름대로의 안목을 가지고 가장 관심을 둔 부분은,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작금의 의미이다. 즉 그가 살던 다소 암울했던 정치적 현실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현대 정치 현실 속에서,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를 기리는 (엄밀히 말하면 그를 기려야 마땅한) 입장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를 넘어서서 전체 한국의 현 정치상황 속에서 김재준의 정치사상을 논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정치사상의 내용들 중 그 시절에는 매우 절박하고 큰 의미가 있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자면 다소 진부하게 여겨지는 내용도 솔직히 적진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결국에는 그 진부한 듯 여겨진 내용들 속에서 마치 보화처럼 빛나는 그의 귀한 정치사상의 핵심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고, 이것은 그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큰 기쁨이자 수확이었다.

그것은 바로 김재준의 정치사상의 키워드가 ‘자유’라는 것이었다. “장공을 한 마디로 자유의 사상가라고 본다”44)는 이오갑의 분석은 김재준의 정치사상에서도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유이며 그 자유의 근원은 자유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한다고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곧 자유라고 보는 그의 인간 이해와, 그러한 자유가 상실된 상태가 곧 죄라고 파악하는 죄에 대한 그의 통찰은, 자유의 행동가로서 드러난 그의 모습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얻어낸 그의 현상학적 결과물들이 있기 ‘전에,’ 이미 그의 정치사상이 자유라는 틀 속에 뿌리를 둔 깊이 있는 신학적 바탕 위에서 추진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도록 해준다. 또한 이는, 그가 신정통주의에 근거하여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 있었다는 그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시작점과 지향점이 자유였다는 것을 밝혀줌으로써, 그가 추구한 정치체제는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만 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정치 방법론에 있어서 그가 취한 다소 애매해보이던 절충적 입장이 오히려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최적의 체제를 찾기 위한 의도에서 취해진 현실적 입장이었다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며, 결국 (니버가 정의를 통해 사랑을 근사치적으로 추구하였던 기독교 현실주의자였던 것처럼) ‘김재준은 자유를 통해 사랑을 최적으로 추구하였던 기독교 현실주의자였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그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김재준이 자유를 통한 사랑의 구현, 특히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건설의 명확한 정치적 방향과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해주지 않아서 여전히 애매한 부분이 없진 않으나, 이 또한 자유라는 큰 틀 속에서 보자면, 그것의 최종적인 건설은 자유의 실현이었기에 자유 실현을 위해서라면 그 정치적 방향과 방안이 어떠한 형태이든 그것이 그 시대와 상황에서 자유 실현을 위해 최적이라면 어떤 것이든 유효하다는 그의 열린 입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자유에 초점을 두고 볼 때, 그의 정치사상은 그 때뿐 아니라 자유가 추구되어야하는 모든 시대와 상황 속에서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최적으로’ 유효하며,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을 조명하는 것은 자유라는 가치가 추구되고 있고 추구되어야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할 필요성을 얻게 된다.45)

44) 이오갑, “장공의 자유론,”『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 2. 45) 비유하자면, 정의가 추구되고 있고 추구 되어야하는 한 니버의 정치사상은 계속 유효하며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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