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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강좌 제40회] 논찬 : 이기영 목사님의 “동방 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을 읽고 / 김주한 교수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12 19:39
조회
2511

<논찬>

이기영 목사님의 동방 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을 읽고

김주한 교수
(한신대 신학과, 교회사학)

[1]

이기영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위 제목의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매우 흥미를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그 주요 키워드들(동방정교회, 영성, 장공, 십자군, 제3일의 영성)이 청량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만성적인 ‘도덕불감증’에 걸려 ‘사회적 공신력’이 크게 실추되어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동방정교회 영성과 장공의 제3일의 영성’을 접목시켜 기독교의 개혁적 유산을 현재화시켜 보려는 이 글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기영 목사님은 짧지 않은 글을 4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첫째 항에서 동방정교회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기독교세계가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된 주요 요인들을 설명하면서 동방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제도”, “그리스문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둘째 항에서 이기영 목사님은 동‧서방교회로 분열되기 이전 기독교계에서 개최되었던 일곱 개의 공의회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교회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논쟁들을 ‘공의회’를 통해 정리하였습니다. 따라서 보편공의회의 가르침은 ‘정통’으로 인정받아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로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저자가 초대기독교계의 주요한 일곱 개의 공의회를 굳이 소개한 이유는 동방정교회(Orthodox)야말로 기독교의 정통교리(Orthodoxy)의 수호자라는 점을 부각시켜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본론 부분은 셋째와 넷째 항입니다. 전자 항에서 이기영 목사님은 “동방정교회 영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면서 그 핵심을 “예배, 수도사들의 영성, 예수기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동방정교회 영성을 토론한 이유는 후자, 즉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장공의 영성을 “초월적이며 현실적이고, 종교적이며 역사적”이라고 정리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대목은 “십자군 영성”과 “제3일의 영성”이란 표현입니다. 저자는 장공에게 “십자군 영성”이란 ‘정복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둠의 시대 상황에 계몽과 선한 사회사역을 추구하는 복음”을 의미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글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 “제3일의 영성”에서 이기영 목사님이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가 나름대로 밝혀져 있습니다.

[2]

본 논찬자는 이기영 목사님의 글에서 계몽적이며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을 다음 몇 가지 항으로 구분하여 성찰적 평가를 해 보겠습니다.

(1) “공의회의 최대 목적은…합당한 성서적 교리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새삼 오늘의 한국개신교회를 향한 교훈이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개교회주의가 심화되고, 성서근본주의가 지배한 현실에서 공교회적(혹은 공동체적) 성서해석과 기독교 진리의 객관적인 표준을 확보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2) ‘공의회’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공론의 장에서 해결하고, 보편적인 신조나 신앙고백서를 통해 교회적 일치를 추구하는 통로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장공이 지적했듯이 공의회가 교권정치의 도구가 되어 다수파가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기독교세계를 분열시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점은 숙고해 볼 대목입니다. 장공이 “공의회 역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이 글을 쓸 당시(1952년 11월) 교권주의자들의 행태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배와 기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동방정교회 영성’을 접목시키려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기영 목사님의 지적과 강조점을 고려해 볼 때 과연 현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만큼 ‘영성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는가? 감히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 논찬자의 생각으로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없으면 없는 만큼 이기영 목사님의 ‘동방정교회 영성’ 관련 탐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고 상식적 수준의 도덕성도 확보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이기영 목사님이 장공의 “십자군 영성”이나 “제3일의 영성”을 소개하며 의도한 바와 같이 “십자군의 참된 의미와 사명적 역할”의 실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번영신학’에 기대어 성장주의 신화의 굴레에 갇혀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장공의 십자군 영성과 제3일의 영성은 매우 도전적이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렸다고 봅니다. 필자는 ‘영성’이란 의미가 개인주의적이고 정적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고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교회 현장에서 장공의 사회적 영성을 더욱 발전시키는 과정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3]

이기영 목사님이 장공의 영성신학을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토론한 부분은 이 글이 주는 최고의 기쁨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공이 주창한 내용들은 기독교영성의 역사적 전통에서 고찰해 볼 때 영성 이해의 주체성과 상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공의 영성신학은 이질적이거나 상이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새롭게 이해한 창조적 해석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4]

본 논찬자는 이기영 목사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이 글의 주제도 그렇거니와 글의 전개상 ‘동방정교회 영성’과 ‘장공의 영성신학’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즉 동방정교회 영성과 장공의 제3일의 영성이 만나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이 목사님께서 양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영성’이란 용어의 정의에 관한 물음입니다. 장공이 정의한 ‘영성’ 개념, 즉 “인간의 자기초월”, “하나님 형상화 작업”이란 의미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성’이 하나님과 만남을 목표로 한다면 주지하다시피 바울-어거스틴-루터와칼빈-칼 바르트로 이어지는 영성 신학은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이해하는 ‘신화’(theosis)개념과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개념에서 하나님 경험,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신적 속성과 본질의 고양을 통한 신적 본성에의 참여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신적 본성의 주입(infusa)을 전제한 이해입니다. 교회사에서 ‘경건’(pietas)과 ‘신비주의’(mysticismus)가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만약 장공의 “인간의 자기초월”, “하나님 형상화 작업”이 이와 같은 동방정교회의 ‘신화’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면 개혁교회 신학노선에 위치 해 있는 장공 신학의 전면적인 재해석도 가능하겠다는 논찬자의 판단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영성’은 자칫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 결합’이나 ‘존재론적인 연합’으로 오해될 우려가 다분하다. 따라서 장공이 말한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귐”의 영성, “청빈영성”과 “생활신앙” 영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끝으로 장공의 영성신학이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접목되고 구현될 수 있는지 이기영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