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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9회]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 / 이기영 목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12 19:21
조회
3483

[제39회 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6년 11월 17일(목) 오후 5~7시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
-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 -

이기영 목사

한신대학교(Th.B)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Th.M) 그리고 영국 셀리옥 대학(Selly Oak Colleges), 센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D. Min)을 졸업하고 유티카 대학(Utica College of Syracuse University)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B.A)

주요 경력으로 뉴욕 유니온신학교 객원 수학(교회사), 한신대학교 강사, 기장 총회교육원 목회신학대학(원) 교회사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목회 경력은 천은교회 담임목사, 한일교회 부목사, 목포중앙교회 담임목사, 미국 장로교(PCUSA) 임마누엘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고, 현재 한국기독교 장로회 전남노회 원로 목사이다. 저서로서 『섬김의 길, 평화의 길』(1994), 설교집 『민족의 길―예수와 함께』(2014)가 있고, 역서로는 『새 시대 그리스도교의 사명』(2013), 『비잔틴 전통의 성인들』(2016)등이 있다.

[1] 동방 정교회의 역사

그리스도교역사에서 동방과 서방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헬라어 권역과 로마 교구를 중심으로 라틴어 권역에 속한 서방으로 구분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324-337)는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의 충돌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옛 수도를 버렸고, ‘문명화된 세계’로 간주되어온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을 비잔티움이라는 보스포러스 옛 그리스 도시로 옮겼다.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 혹은 ‘신(新)로마’라 불리게 된 이 도시는 이후 로마제국이 1453년 투르크에 멸망하기까지 1100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제국의 수도였다.1)

1) 존 메이엔도르프, 「비잔틴 신학」-역사적 변천과 주요교리,2013,정교회출판사, 9 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중심지들이 사라진 후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도시의 주교는 ‘세계총대주교’라는 칭호를 가진다. 선교사들은 발칸지역,동유럽의 대평원에 신앙을 전해주었다. 서방 라틴세계에서 ‘구로마’가 그러했던 것처럼,‘신로마’또한 중동지역과 동유럽 문명의 요람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그 시대의 모든 보편적 공의회들은 콘스탄티노플 혹은 그 인근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후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오는 선교사들은 슬라브 민족과 동유럽의 다른 민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불가리아 864년, 러시아 988년), 성서와 예배문서들을 각기 다른 지역의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동서방교회의 분열의 원인과 격렬한 논쟁 중 하나는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동방과의 협의 없이 추가한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조항과 관계된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9세기에 포티우스(pho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정한 것을 교황이 거부한 것도 중요한 분열의 원인이다. 동서방간의 논쟁의 심화는 1054년에 서로간에 파문장을 보냄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제4차 십자군(1204년)때에 서방교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사건은 서방을 향한 동방의 적의를 증대시켰다.2)

2) Bruse Shlley,Church History in plain Lauguage,박희석역.「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2005. 크리스챤 다이제스트.187-199

이 글은 비잔티움 제국의 시대(324-1453)에 일어난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에 대한 소고(小考)이며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2의 로마

초대교회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로부터 위대한 제국을 떠맡게끔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주된 적수인 멕센티우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밀비안브리지’의 전투라고 묘사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 전날 밤에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 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즉 그것은 “이 표징으로 정복하라”(In this sign couquer)였다.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 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 사건들의 연속은 교회사 첫 번째 주요한 시기를 끝내고, 비잔틴 그리스도교 제국의 창조를 가져오는 것이었다.3)

3) 존 안토니 맥구킨, 졸역 「비잔틴 전통의 성인들」.2016,동연 18-25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최고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자, 새로운 국가 창조에 주요한 요소로서 교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맥구킨 교수는 로마 영토내의 동서방 지역들의 독재적인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과업 결과를 다음과 같이 알린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제2의 로마’, ‘모든 도시의 여왕’―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옛 수도를 능가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로마 세계의 진정한 심장부 즉 국제적인 문화의 영향력의 주요한 창구이자 중심지였다”4)

4) John Anthony McGuckin,「Standing in God Holy Fire:Byzatine Tradition」 졸역. 「비잔틴 전통의 성인들」 2016. 동연 21

그리스도교화 한 로마제국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천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문화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 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5)

5)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한정숙·김경연역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2014, 까치글방, 9

[2]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325-787)

동방정교회에서 공의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기구라 믿으며, 보편교회를 본질적으로 협의회적(conciliar)교회로 생각한다. 공의회는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이다.6)

6) 디모데 웨어, 이형기역, 「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 2008, 한국장로교출반사, 5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 믿음의 종교이지만 또한 지식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이런 지적인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문이 생겼다. 과연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인가? 소위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의문이 제기 되었던 것이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 생활은 일곱 차례의 보편적 공의회의 지도를 받았다. 공의회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결정하였다.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그리고 성화상이 그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325)

여러 숙적들을 제거하고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제국에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Arius)가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다”라는 삼위일체와 관련된 발언이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구에서 발생된 문제였지만 제국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다소 위협적인 사안이었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의 교사 루시안의 제자였다. 그는 좌파―오리겐 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만 성부로 인정하고, 예수는 피조물로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근거로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 아니라 ‘유사본질’(Homoiousios)이며 심지어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고 비성서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이 아리우스를 소환하여 철회할 것을 강요했으나, 아리우스가 거절하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처음 열렸던 325년 니케아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는 황제의 여름 별궁에서 3개월동안 진행되었다. 토론 끝에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으며, 부활절 날짜 등 20개의 교회법들이 결정되었다.7)

7) Leo Donald Davis,「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325-787)Their History and Theology」1990,The Liturgical Press Collegeville,minnesota, 51-68 2장 니케아공의회1,325에서 자세한 삼위일체논쟁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졸역. 출간예정)

니케아의 과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확장시키고 개정하였다. 특별히 성부와 성자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확정하여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즉,“성부로부터 나오시고(proceeds),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영화되심을 받으시는 분.”8)

8) 디모데 웨어,같은 책,33

또한 공의회는 새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의 위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음으로 그 서열을 로마 다음으로, 알렉산드리아 앞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였기 때문에 영예에 있어서 로마감독 다음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에베소 공의회(431): 그리스도론 논쟁크리스토토코스냐, 데오토코스냐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444년 사망)은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된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다른 감독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사람이다. 시릴과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중 한분이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인성에 대한 묘사와 하나님의 단일한 위격(a single person)안에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의견이 달랐다. 이 두학파가 서로 조화를 유지하지 않고 투쟁으로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비극이었다.9)

9) 디모데 웨어,같은 책,35

네스토리우스는 처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르기를 거절함으로 논쟁을 촉진시켰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제목은 이미 대중적 신앙속에서 받아들여졌으나, 네스토리우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신성의 혼동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공의회에 의해 지지를 받은 시릴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는 본문으로 대답하였다. ‘마리아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일치성을 안전하게 한다. ‘본질상 하나’(Homoousios)라는 단어가 삼위일체론에서 우선성을 차지하듯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단어가 성육신론에서 우선성을 차지한다. 에베소 공의회(431)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10)

10) 디모데 웨어, 같은책. 36. 게오르크 오스트로 고르스키, 「비잔티움제국사 324-1435」 2014. 39.시릴과 네스토리우스 간의 논쟁을 역사적 사회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Leo Donald Davis, 같은책, 4. The Council of Ephesus,431에서 신학적 논쟁 자세한 상황을 참고할 수 있다. 140-163

칼케돈 공의회(451): 신성과 인성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재위450-457년)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리스도교의 제4회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완전하다고 분리할 수 없는, 그러나 또한 뒤섞일 수 없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신앙이 재확인 되었다.11)

11)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바전티움 제국사 324-1453」 40

그러나 칼케돈의 결정으로 비잔티움의 중앙부와 제국의 오리엔트 속주들 사이에서 간극이 심화되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한때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의 피난처였던 시리아도 단성론을 지지하며 칼케돈의 교조에 반대했다. 양성론(兩性論,dyophysitism)을 지지하는 비잔티움 교회와 단성론을 지지하는 오리엔트 교회의 대립은 그때부터 초기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격렬한 교회 정치 및 국가 정치상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단성론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정치적 분리 주의 분출구가 되었다. 즉 단성론은 비잔티움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콥트인과 시리아인의 표어로 이용된 것이다.12)

12)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크키, 같은책 40-41.이집트의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일부 교회들은 아직도 단성론자들이다. 이슬람이 북아프리카의 침공때에 단성론이었기에 쉽게 점령되었다는 역사적 일화가 있다.

칼케돈 정의(定意)는 그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두 개의 공의회에 의해 보충되었다. 제 5차 공의회(553년)는 알렉산드리아 관점으로 칼케돈을 재해석 하였고, 칼케돈이 사용했던 것 보다 건설적인 용어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의 단일한 위격을 형성하도록 연합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제6차 공의회(680-681)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단일한 위격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의지(意志)를 가져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참 인간이다. 그는 신적 의지 뿐만 아니라 인간적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13)

13) 디모데 웨어, 같은책 41. Leo Donald Davis,같은책 .260-270

7차 공의회,(2차 니케아 공의회,787): 성화상 논쟁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들은 681년 공의회에서 끝나지 않았고, 8-9세기에는 다른 형태로 확장되었다. 논쟁은 성화상들(The Holy lcons),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의 어머니, 그리고 교회와 개인의 집에서 숭배되었던 성자들(the saints)에 집중되었다. 이콘은 하나의 단순한 형상이나 장식이나 성경에 대한 삽화가 아니다. 교회사 속에서 이교(異敎)와 이단 세력들과의 투쟁 속에서 형성해 낸 특별한 형상들은 이콘반대운동시기에 수 많은 순교자와 고백자들의 피 값으로 지켜 낸 것이다.

약 120년 동안 지속된 성화상 논쟁의 교훈을 통해 교회는 이콘을 정교회의 가르침의 전체로서의 정통신앙(orthodoxe) 그 자체의 표현으로 본다. 이콘에 대한 공경은제7차 공의회(787년)에서 정식화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교리이다. 교회의 근본교리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성화상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동방정교회의 승리’로 알려졌다.14)

14) 레오니드 우스펜스키,「정교회의 이콘신학」 2015, 정교회출판사. 9-12. 하나님의 인간을 자신의 ‘image'즉 icon에 따라 창조했다는 사실에서 정교회의 모든 신학적 인간론이 출발한다. 디모데 웨어, 같은책. 43

성화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아름다운 예술을 통해서 피조물을 구원하는 영적 능력의 생동감 있는 표현이다. 성화상의 예술적인 완벽성은 천상영광의 영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조화(調和)와 아름다움(美)으로 환원된 실물의 구체적 예이며 성령의 그릇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성화상은 우주조화(宇宙造化)의 한 부분이다. 성화상은 승리의 노래요, 계시이며, 악령의 치욕과 성인들의 승리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이다.15)

15) 강태용, 「역사와신학 동방정교회」 2010, 홍익재, 51-52

공의회의 역사적 의미

7개의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에 대단히 중요하다. 동방정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7개의 공의회들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현대적이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의 기간들 속에서 위대한 신학의 시대를 보았고, 모든 세대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구함에 있어서 공의회들은 성경 다음의 기준과 안내서로 삼고 있다.16)

16) 디모데 웨어, 같은책 47-48

7개의 공의회는 325년부터 787년까지 무려 462년 동안 진행된 동방과 서방의 연합 공의회였다. 공의회의 최대 목적은 당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성서적 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7개의 공의회는 동방의 4개 주요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등이었다. 공의회는 교회 안에서 발생된 신학적이며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로 황제들의 소집에 의해 모인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이해에도 중요하다

7개 공의회의 주된 관심은 삼위 하나님의 세 위격과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였다. 따라서 “예수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다”라고 선언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사실 ‘칼케돈 정의’(Chalcedonian Definition)는 오늘 모든 동방정교회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 발생된 교회들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오늘날 동방정교회는 7개 공의회만 인정하는 교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방정교회는 ‘7개 공의회 교회’로 불렸다. 물론 몇몇의 동방교회들은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초기의 4개 공의회만 인정하는 교회도 있다. 로마 카톨릭은 7개의 공의회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포함한 14개의 공의회까지 모두 21개 공의회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와 칼빈 중심의 개혁교회는 초기 4개 공의회만 인정하였다.

장공은 민족수난(6·25전쟁)과 한국 장로교의 분열의 시기에 즈음하여, 공의회의 역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삼을게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가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인자하시고 오래참으신다.…그리스도교 역사는 이점에서 무수한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아타나시어스와 아리우스가 서로 상이점(相異点)을 인정하면서도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여 보충해 갔더라면 얼마 지나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둘다 바로 깨닫게 하여 교회는 그 후의 끊임없는 살육을 면했을 것이다. 그후에도 가령 네스토리앤(景敎)을 추방하지 않고 교회 이상(以上)의 사랑으로 용납하였다면 그 수 많은 경교인들로 하여금 유랑하다가 민멸(民滅)의 비운에 빠지는 일은 면케 하였을 것이다.”17)

17) 「십자군」 속간 제10호,1952.11 “종교재판의 성서적 근거” 1-7

[3] 동방정교회의 영성

예배의 아름다움의 영성

동방정교회 예배는 헬라적 상상력에 의해 그 형태가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상징들이 사용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서방교회에서 부르는 ‘미사’ 대신에 ‘성찬예배’라고 부른다.

동방정교회 예배는 오랜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예전의 기본적 핵심은 그리스도와 사도시대로부터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 첨가되면서 9세기에 와서 최종적으로 기본적 형태가 만들어졌다. 성찬예배는 복음 중심의 삶에서 얻는 심오한 기쁨을 표현하고 느끼는 현장이다.

예배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다. 개인이 아닌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앙 공동체가 말과 행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단합된 하나님의 소리로서 공동체를 영적으로 끌어올려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케 한다.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현존케 한다.18)

18) 박찬희, 「동방정교회 이야기」 2012, 신앙과 지성사, 137-142

9세기경부터 러시아의 공후들은 간헐적으로 세례를 받았고, 실제로 키에프 루스 전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988년이었다. 당시 키에프 루스의 통치자였던 블라디미르(Vladimir) 공후는 987년에 러시아 땅에 종교를 전해 주려는 주변국들의 사절단을 접견하였다. 처음 온 사절단은 이슬람을 믿는 자였고, 다음은 로마 가톨릭을 믿는 게르만이였고, 그 다음은 유대교를 믿는 자였다. 그러나 다 받아드릴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마지막 동방정교의 원리를 전해주자 공후는 그들의 박식함에 탄복하였다.

블라디미르는 한 종교가 자기백성에게 적합한지를 검토하며 여러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성찬전례에 참석한 비잔틴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에 인도 되었을 때, 만여 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진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 예배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동방정교를 찬미하였다. “소신들은 소신들이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나이다. 지상에는 그러한 광휘와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없기에 제대로 묘사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다만, 그곳에서는 신께서 인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의 예배의식은 다른 민족의 예배의식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소신들은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나이다.”19)

19) 존 안토니 맥구킨, 졸역, 「비잔틴 전통의 성인들」 2016, 동연, 193-194 석영중, 「러시아 정교, 역사, 신학, 예술」 2007, 고려대학교 출판부, 16-17

현자들(사신)의 말에 감동을 받은 블라디미르는 이듬해(988년)에 세례를 받았고 키예프 루스의 국교는 동방정교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천여 년 동안 러시아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게 될 영성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20)

20) 석영중, 같은 책, 18 (키에프 루스는 강력한 공국으로 성장하며 오늘날의 러시아의 모태가 되었다.)

러시아가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 예배의식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종교의 원리나 종교에 내포된 사상 혹은 교의가 아니라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신과 국가의 종교를 결정했다. 동방정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교의적이고 덜 체계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실 동방정교는 따지고 논하고 분석하기 보다는 관상하고 전 존재로써 체험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러이사인에게 하나님은 진리와 믿음의 신일뿐 아니라 아름다움의 신이었고, 그리하여 신앙이란 곧 아름다움이라는 등식이 그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아름다움은 곧 진리였으며 진리는 곧 선한 것이었다. 진선미(眞善美)의 합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논리적인 증거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 우주적인 조화의 이상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장인과 화가와 시인들의 가슴속에서 반향하고 있다. 예술은 신의 선물이며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신과 교감할 수 있다는 확신은 수세기동안 이어져 온 러시아문화의 전통이다.21)

21) 석영중, 같은 책. 19

따라서 우리가 감히 진단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아름다움, 신앙과 아름다움의 합일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중세문학 작품과 찬란한 이콘과 장엄한 성가, ‘미(美)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러시아의 문화와 예술 전체를 아우르며 천여 년 동안 면면히 지속되어 온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 예전(禮典)을 구성하는 기도들은 그 전성기에 있어서 그리스의교부신학에서 고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전은 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로부터 기인한다.22)

22) 루돌프 브랜들레, 이종한역,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고대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 2016. 분도출판사. 7-10, 요아니스 알렉시우, 요한 박용범 역,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2014, 정교회 출판사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불의의 권력에 맞선 정의의 설교자였고 평소와 유배 중에서도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의 진정한 목자였고, 그는 유배에서 순교자로 그의 유해가 담긴 관으로 콘스타틴노플에 귀환한 예수님 닮은 교부였다.

후세사람들이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 황금의 입(金口))라 부르는 안디옥 출신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요한, 고대 말엽 교회의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주일마다 수천 개의 정교성당에서 거행되는 그의 이름을 딴 전례(典禮)를 통해, 그의 저술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운데 살아있다.

수도사들의 영성

수도운동은 박해시기에 사막으로 피신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313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밀란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4세기초부터 이집트는 엄격한 수도운동의 중심지였다. 수도사들은 청빈과 고행으로 피의 순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순교자들이었다.

수도운동은 영어로 ‘monasticism’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유래하였다. 모나코스는 ‘solitary’ 즉 홀로 기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수도운동은 엄격한 절제의 삶을 열망하고 기도생활과 하나님을 관상하며(contemplation), 또한 예배하는 삶에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기 원하는 자들로 시작하였다. 수도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자기욕망을 제어하며 수덕(修德)의 삶을 사는 것(asceticism)이었다.23)

23) 박찬희, 「동방정교회 이야기」 2012, 신앙과 지성사 170 ‘asceticism’은 금욕주의보다 수덕주의가 그 의미에 더 가깝다.

수도사들은 사막, 광야로 은둔함으로써 교회생활에 예언자적이며 종말론적인 성직의 의무를 다하였다. 그들 은수자들은 황량한 광야의 숲속 오두막 집이나 동굴, 심지어 무덤 속에서, 나뭇가지 사이에서, 바위꼭대기에서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은수생활의 큰 모델은 수도운동의 창시자, 이집트의 안토니오(251-356)이다.

일반적으로 동방정교회 수도원은 서방교회 수도원보다 덜 활동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동방정교회 수도사의 첫째 사명은 기도생활이다. 다른이들에게 봉사하는 것도 기도를 통해서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수도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오히려 수도사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다.24)

24) 강태용, 「동방정교회」 2010, 홍익재. 54-55.

‘안토니오의 전기(傳記)’의 저자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가 이집트 전역의 의사(醫師)가 되었다고 썼다. 안토니오는 생의 초기 18세에서 55세까지는 사막에 은둔한 채 고독 속에서 살았다. 그 후 그는 견고한 울타리 안의 생활을 단념하고 방문객을 맞이하였다. 한 무리의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모였고 때로는 아주 먼데서부터 조언을 받으러오는 사람들의 모임이 더 크게 생겼다.

수도사들의 외적과정(課程)의 형태는 거의 같다. 즉 수도사는 우선 들어오기 위한 은둔(隱遁)으로 은수(隱修)한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그 자신에 대하여 진실을 배워야 한다. 고독 속에서 긴 수련을 한 후에 스타렛츠(장상)로서 요구되는 통찰력의 은사를 얻고서야 자기 독수방(獨修房)의 문을 열수 있고, 그가 은수했던 세계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25)

25) 강태용, 같은 책, 56. 스타렛츠는 성령 충만한 영적지도자, 통찰력과 지혜를 갖춘 지도자, 영적 안내자이다. 레이문트콧체/베른트묄러 편, 이신건 역, 「고대교회와 동방교회」 1995, 한국신학연구소. 안토니오와 은둔수도원 운동, 293-301

10세기 이후 정교회 수도원의 주된 중심지는 아토스(Athos)인데, 6,670피트 높이의 꼭대기에 정점을 이루는 북그리스에 있는 돌 바위가 많은 반도이다. 거룩한 산(聖山, Holy Mountain)으로 알려진 아토스는 은수자 조직뿐 아니라 수십개의 제도적 수도원과 많은 수의 작은 수도원을 포함하고 있다. 아토스반도는 완전히 수도원 촌(村, town)으로 되었으며 수도원이 팽창해 나가던 시대에는 거의 4만 명의 수도사가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20명의 지도급 수도사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인 대 라브라(Great Lavra)는 혼자서 26명의 총대주교와 144명 이상의 감독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아토스(Athos)의 중요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26)

26) 강태용, 같은 책, 56. 디모데 웨어, 이형기 역, 「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 2008, 한국장로교출판사, 53.

그 시대의 영적 아버지들은 믿음이 강했으며 매우 소박하였다. 대다수의 영적 아버지들이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자신을 낮추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떠한가? 학문적으로는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논리를 내세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마음속에 질문과 의문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참으로 뻔하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힘든 세상을 만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기적이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 뿐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7)

27) 파이시오스 수도사, 「아토스성산의 수도사들」 2011, 정교회출판사, 17-18.

예수기도와 헤시카즘 - 쉼 없는 기도와 침묵의 영성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정교회의 기도 중에 ‘예수기도’라는 기도형태가 있다. 이 기도의 성서적인 배경은 다음의 말씀과 성구에서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마6:7).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빌2:9-10). 한센병 환자 10명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 세리의 기도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여리고 시각장애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 등이다.

정교회 전통에서 ‘예수기도’는 세 단계의 진행과정을 가진다. 첫째, 입술의 기도로서 외적자아가 육체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단계이다. 둘째, 마음이 무정념, 아파데이아(Apatheia)의 상태에서 평정심을 가지고 드리는 내면적 단계이다. 셋째,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심장으로 드리는 육과 영의 연합된 기도 단계이다. 이런 단계는 기도자의 진보와 더불어 기도자체의 성장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마음의 상념을 제거하고 간절한 기도의 반복을 통해 기도의 깊은 단계인 무정념(Apatheia)의 단계에서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가져온다.

정교회는 이러한 하나님 경험을 ‘신화(神化, Theosis)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한다. 이러한 신화의 단계에서 기도자는 호흡마다 하나님 성품의 담지자인 예수와 하나 됨을 경험한다. ’예수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절대적 침묵이다. 이 침묵기도를 가르켜 ’헤지카즘‘(Hesychasm)이라고 하는데, 기도자 즉 헤지키스트는 기도 속에서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지향한다.28)

28) 존 안토니 맥구킨, 졸역, 「비잔틴 전통의 성인들」 2016, 동연, 제7장 ‘헤지카즘의 빛나는 침묵’을 참조하라. 헤지키아(Hesychia) - 평온은 기도에 몰두하기 위해 조용한 은둔의 삶을 추구하는 수도사. ‘예수기도’의 짧은기도의 규칙적이고 느린 반복에 의해 영적인 감각을 조용하게 할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헤지카즘(Hesychasm)은 정교회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합일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해지키아(Hesychia)의 상태를 추구하는 수도방법이다. 헬라어 ‘해지키아’는 고요함, 평정심, 침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수도사들은 관상수도에서 고요와 평정심을 통해 인간적 격정(pathos)을 물리치고 무정념의 상태(apatheia)에 이르고자 해지키아의 상태를 추구한다. 해지카즘은 13세기 중엽에 정교회 영성의 샘이라 일컬어지는 아토스 성산의 수도사 니케포로스(Nikephoros)가 기도법으로 추구한 이래 정교회 수도사들의 중요한 기도법이 되었다.29)

29) 존 안토니 맥구킨, 같은 책, 제7장 참조. 박찬희, 「동방정교회 이야기」, 158-161.

「예수기도」에서 수도정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저자 이에로테오스(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순종, 겸손, 자기멸시, 기도를 향한 끝없는 갈망이다. 영적 아버지에 대한 순종 모든 이들을 향한 겸손이며, 가장 위대한 활동은 겸손과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부유해진다. 겸손과 거룩함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공동체 사업도 금방 흔적도 없이 무너지지만, 거룩함과 겸손이 함께 한다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놀라운 차원의 열매를 맺는다.’30) 하나님께 순종, 모든 이에게 겸손, 거룩함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0) 이에로테오스, 「예수기도」 2013, 정교회출판사, 210.

수도정신은 무엇을 하든지 칭찬 받는 일과 칭찬을 잃는 일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어디에 있든지, 길을 가든지, 운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예수기도를 드려야 한다. 신자들은 “끼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며 응답한다.

아토스 성산으로부터 광야의 한밤중 한 은둔 수도사의 기도영성에 대한 체험담이 전해진다. “수도사는 나가서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멀리 바다에서 물결소리가 들려왔다. 영원의 온화함이 격해진 내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 거대한 고요, 나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광야를 곽 채우고 계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31)

31) 예수기도, 225.

아토스 성산의 수도원 원장과 수도사는 대화 내내 율법적 훈계가 아니라 진정한 신비학적 가르침을 주고받았다. 수도사는 옛날 가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머리를 숙여 무릎사이에 두었다. 그리고 예수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훈훈하게 하기 시작했다. 밤 시간은 수도사들에게 아주 역동적이고 생명이 넘치는 때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때가 ‘끊임없는 기도를 수행하는 시간이고, 또 예수를 마음 속 깊이 묵상하고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2)

32) 예수기도, 226.

‘예수기도’는 더 높고 깊은 경지로 안내한다. 자정이 훨씬 지났을 것이다. 밤 꾀꼬리가 일어나 노래하고, ‘통회의 샘’들은 목마른 대지를 흘러적시고, ‘거룩한 산의 등대’들은 빛을 비추고, ‘향내나는 그윽한 백합’들은 온 땅을 그 향기로 채우고, 암자들마다 기도소리가 울리고 참회와 빛 비추임의 눈물로 넘쳐난다.…수도사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넘치는 자비를 빌기 위해 일어난다.33)

33) 예수기도, 230.

이상의 기도와 명상은 아토스 거룩한 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이다. 예수기도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또는 혼자서도, 공동기도로도, 개인기도로도 할 수 있다. 예수기도는 모든 세대를 위한, 어떤 장소이든, 매 순간을 위한, 사막이든, 도시이든, 초보자이든, 경험자이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신학자라면 당신은 참으로 기도하고, 만약 당신이 기도한다면 당신은 참된 신학자이다.”34)

34) 예수기도, 204.

[4]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俊, 1901-1987)은 한국 근대사를 살며, 목사와 신학교수 그리고 저술가로 진리추구와 신앙적 양심으로 사회 역사참여와 구도자적 그리스도인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과 진보적 자주적 신학함은 큰 자취를 남겨 신학과 역사의 방향을 찾는데 길잡이가 된다.

먼저 ‘영성’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 ‘인간의 자기초월’, ‘하나님 형상화 작업’, ‘자연속의 역사창조’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체험과 그 구현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초월의 만남과 교류, 그것이 종교요 역사이다. 장공의 영성은 초월적이며 현실적이고, 종교적이며 역사적이다. 분명히 장공이 그리스도교와 민족역사에 평상 솔직하고 충실하려 노력하였던 것도 그의 영적체험과 구현의지 때문이었다.

장공은 3·1운동이후, 우리민족이 일제에 항거하던 무렵에 새 깨달음과 고향을 떠나 신앙의 새 여정을 시작하였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앙체험, 기도에 열중, 밤새워 성경읽기, 전도와 가난한 자돕는 마음이 일어나며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새사람’이 됐다고 자의식했다.35)

35)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 1971, 5권 ‘한권의 성서’, ‘무소유의 낭만’, 217-226.

그의 진리추구의 마음과 청빈, 무소유의 낭만은 장공에게 신앙체험 전과 체험 후의 삶을 확연히 갈라놓는 분기점(turning point)이 되었다. 이런 거듭남(重生)과 신생(新生)의 체험을 통과함으로 그리스도인 장공의 삶의 시작, 새 출발이 되었다. 동방정교회의 신생체험과 유사한 부분이어서 객관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 이후 장공의 삶은 청빈과 진리탐구자로, 사회 역사적 삶의 정황을 안고 책임적인 삶을 보냈다. 장공의 삶은 청빈영성과 생활신앙으로 일관하였다. 이후 우리는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십자군의 영성

장공은 1937년 5월에 개인 신앙잡지 월간 「십자군」(十字軍, The Crusader)을 창간하였다. 장공은 귀국해서 평양에서 얼마 지난 후 간도 용정에서 2년 여 지내면서 많은 글을 발표하며, 고독과 혼란의 어둔 시대 상황에서 예언자적 영성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잡고 행진하는 ‘십자군 영성’을 가졌었다. 장공이 잡지 제목을 ‘십자군’이라 했을 때 그가 의미하는 십자군은 무엇이었는가를 성찰해 볼 필요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십자군’은 중세기 성지(예루살렘)회복이란 명분하에 무기로 승리주의에 잡혀 정복전쟁에 나서서 이교도(이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추방했던 파괴적 십자군이었다.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에서 갖는 상징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에 자유로이 왕래한다는 것은 당연한 공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십자군’은 성지회복의 목표 외에 다른 과오를 저질렀다. 4차 십자군 원정 때 1203년 7월에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수많은 생명을 죽였다.36)

36) 알리스터 맥그리스, 박규태 역 「기독교의 역사」 2016, 포이에마, 204-207.

장공에게 ‘십자군’은 영적 의미를 갖고 그리스도를 총수로 하며 칼 대신 성경으로, 폭력 아닌 사랑의 실천으로 어둠의 시대 상황에 계몽과 선한 사회사역을 추구하는 복음의 일꾼들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십자군의 참된 의미와 사명적 역할을 찾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미국교회사의 흐름을 관찰할 필요성을 갖게 한다.

한국 선교 역사에 직접 영향을 끼친 미국의 대각성운동 역시 성찰해 봐야 할 대상이다. 19세기 후반에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찬양인도자인 친구 생키(Ira Sankey, 1840-1908)를 만나 동역하였다. 무디는 보수적인 부흥사였고, 그는 1876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결성하여 수 천 명의 젊은 학생들이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실현하는 일에 나서도록 용기를 북돋았다.37) 그것이 곧 미국의 세계선교에로 이어지게 한 역사였고, 한국 선교에도 직접 영향을 끼쳤다.

37) 마크 A·놀, 「미국 카나다 기독교 역사」 2005, CLC, 603

20세기에 개신교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1918-)은 십자군 운동을 기획하였다. 그의 사상은 철저히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였다. 그의 경력 초기에 빌리 그래함의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은 미국의 전통적인 신앙과 조화를 이루었다. 1950년 그는 장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결정의 시간”(The Hour of Decision)의 첫 방송을 진행했는데, 그것은 반공주의 열풍과 복음주의를 전형적으로 혼합시킨 것이었다.38)

38) 마크 A.놀, 같은책, 604-605.

장공의 ‘십자군’의 기본정신은 무디(3차대각성운동)와 그래함(4차대각성운동)의 승리주의 에 도취되어 성장신화를 끌어냈던 것과 반(反)하는 것이었다. 해방직후부터 한국교회의 양상은 노골적으로 들어난 교권 발동과 그것에 의한 사상 통제였다. 여기에는 미국선교사들의 물질적, 정신적 가세가 있어서 자뭇 만용적이었다.39)

39) 「십자군」 1956년 6월, 속간 제25호, 10.

장공은 속간 「십자군」(The Crusader, 1950.1~1956)을 내면서 보수 근본주의, 한국교회 어두운 상황에서 계몽적 역할을 하며, 개혁교회의 개혁적인 사명에 온갖 힘을 쏟았다. ‘기장의 탄생’, 출애굽 역할을 한국신학대학(당시)의 신학의 고장에서 출범시켰다.

장공은 망국의 백성들이 포로처럼 살아가던 만주 땅 용정에서 ‘십자군 영성’(Crusader Spirituality)을 체득했고, 1947년-1953년 기장 출범 당시 종교개혁자적 사명으로 한국교회의 바른 방향을 향하여 계몽적 책임성을 갖고 용진했던 것이다. 민족수난(6.25전쟁)의 와중에서 교회는 교권다툼과 교회 분열의 아픔의 이중고(二重苦)를 겪어야 하였다.

장공은 그때에 세계교회의 신학적 주류(主流)에 병진함으로써 교회신학의 본류(本流) 또는 주류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 세계교회의 신학은 정통주의에서 그 정반대인 자유주의로 옮겼다가, 다시 종합된 더 높은 차원에로 진행되고 있다. 2) 역사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는 인간 역사라는 소재(가루서말)에 하나님 나라라는 속량 역사(누룩)을 심어, 결국은 그 소재인 인간 역사 전체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 또는 감화 아래 있게 하는 ‘하나님-사람’의 운동이다. ‘우리는 세계교회와 병진함과 동시에 전적인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전 부문에 주(主)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전 존재를 바치려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라 하였다. 3) 현실교회 자체의 문제로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인격적 친교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방 전후해서 들어난 모습으로 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것보다 어떤 ‘우상과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었다.40)

40) 「십자군」 속간 제25호,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1-10.

루터와 그 동역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교권적 제국주의에서 복음의 자유를 회복한 것이 교회사상에 거대한 생명운동을 전개한 것이었음을 시인한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정통주의적 ‘바리새이즘’에서 복음주의를 수립하려는 우리의 운동이 교회사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없다는 확언이었다.

‘94개 논제’는 무엇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종교개혁을 향해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 신학자들의 ‘94개 논제’가 전 세계 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94개 논제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역사적으로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95개조항을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 그 자리에 붙게 된다.

94개 논제의 신학화 작업은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협력기구인 세계 루터교 연맹(LWF)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를 발의하면서, WCC가 협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94개 논제 작성을 위한 5년간의 위크숍 통해 종교개혁 신학에 정평이 난 학자들이 동원되었다. 특히 프란시스 교황은 94개 논제를 환영했고,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94개 논제를 격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유산이 우리 시대에 비판적인 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94개 논제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종교개혁의 급진화’는 과거인 종교개혁의 뿌리에 내재적 비판을 시도하면서 미래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운동으로 한층 다가 설 것이다.

이번에 논제를 94개로 정리한 것은, 우선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겸손의 표시이다.

94개 논제 가운데, 29조는 십자가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와 식민주의 시대 십자군 전쟁 사이의 오욕으로 얼룩진 교회의 모습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민중(minjung)과 만인을 위한 경제 정의와 생태의 생명망의 보존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드러난 생명신학(부활)을 위해 십자가의 신학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41)

41) 「기독교사상」 2016, 10월호, 62, 76

장공은 그의 ‘십자군 영성’으로 기장의 역사적 존재 의의가 뚜렷하며 또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교 역사의 본류(本流)를 지어가고 있음을 천하에 공언(公言)한다는 것이었다.

3일의 영성

장공은 1970년 9월 「제3일」을 창간, 1974년 4월까지 44호를 발간하고, 1974년 10월 「제3일」 속간 1981년 6월까지 60호를 발간하였다.(카나다) 당시 군부 유신 정권에 대한 항거로 발행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대단히 큰 비중과 의미를 갖는다.

슈바이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예수전’에서 이렇게 그렸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굴러 오는 역사의 바퀴를 전신으로 가로 막았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바퀴는 그대로 굴러서 이 젊은이를 압살(壓殺)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압살된 그 시체가 그 바퀴에 그대로 붙어 돌아갔는데, 그것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굴러가는 바퀴를 정지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장공에게 있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악의 정점에 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아니오’가 바로 무덤을 열어젖힌 부활이었고, 죽음으로부터 제3일째 되는 날이었다. ‘제3일’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고 장공은 창간호 「제3일」(The Third Day)에서 외쳤다.42)

42) 「제3일」 창간호 안표지.

예수의 십자가는 결코 상징(Symbol)이나 장식품이 아니며 미술품도 아닌 무시무시한‘죽음’이다. 콘스탄티누스시대도 지나가고 후기콘스탄티누스시대(Post-Constantine Era)가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외로운 죽음의 씨앗에서 싹트는 부활을 되찾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이다. 관념이나 심볼이나 미술품이 아닌 ‘몸’으로 죽고 사는 역사의 시대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내일을 위한 십자가의 행진에서 그 현실적인 의미가 체득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된 메시지이며 그것이 ‘제3일’의 영성이다.43)

43) 「장공 김재준 전집」 11권, 87.

장공에게 이 세 번째 날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였고 역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자 토대였기에 이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정체성이라 여겼다. 따라서 ‘제3일’은 지난(至難)했으나 궁극적으로 사망(불의)을 무화(無化)시킨 생명부활의 믿음이며 영성의 본질이었다.

인간 역사와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를 뿌리내려 그 힘을 온 땅에 펼쳐야 할 존재가 바로 ‘제3일’의 영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며 정체성이었다. 장공에게 그리스도의 몸(교회)은 인간과 우주, 민족과 세계를 아우르는 공동체적 생명을 일컬었으며, 하나님 사랑 안에서 만물이 정신, 영으로 변화하여 자유케 되는 상태와도 비견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교회는 물론 세상을 넘어 온 우주를 품어 속량할 만큼 넉넉한 사랑의 존재였다.44)

44) 「장공 김재준 전집」 18권, 528-532.

초대 그리스도교와 동방정교회는 ‘부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 현존을 영적으로 매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역사성을 넘어 종말론적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 인간과 우주의 미래, 곧 우주자체의 전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다. 장공이 끝까지 잡으려 했던 목표, 곧 우주적 생명 공동체는 천지인(天地人)의 일체 관계성이 회복된, 죽음 본능이 지배(역할)못하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모습이다.

참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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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디모데 웨어, 이형기 역, 「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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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찬희, 「동방정교회 이야기」, 신앙과 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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