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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목요강좌 제37회] 구원에 대한 성서적-신학적 성찰 / 김균진 박사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07 16:41
조회
2165

[37長空사상연구 목요강좌] 발제
일시 : 2015917() 오후 5~7

구원에 대한 성서적-신학적 성찰
-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 방향과 연관하여 -

김균진 박사
(연세대 명예교수 / 조직신학)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목회소명을 받았고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M. A.), 독일의 튀빙겐 대학교에서 몰트만 교수의 지도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받았다. 1977년부터 2009년까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했고, 다수의 저작 가운데 은퇴 후 최근 기독교신학을 총망라한 『기독교 신학』 1, 2, 3, 『현대 신학 사상』, 『죽음과 부활의 신학』 등의 저작선집 8권을 저술했다. 

세계 모든 종교들의 중심적 문제는 구원의 문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가 존재하는 목적도 인간과 세계의 구원의 문제에 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종교가 존재하는 목적도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데 있다. 교회와 신학의 존재 목적도 여기에 있다.

그럼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우리는 종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원에 대한 가장 보편적 이해는 이원론적, 피안적 이해라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을 때,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돌아가, 피안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 곧 시간의 끝이 없는 생명을 누리는 것, 차안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이원론적, 피안적 이해는 기독교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종교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서 이 세상의 모든 고해를 떠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는 반면, 어떤 다른 종교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으며 무병장수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

기독교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먼저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이와 연관하여 우리 교단의 선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구약성서의 이해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죄의 용서를 구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는 구원에 대한 매우 다양한 표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원의 표상들을 발견한다:

[1] 땅과 많은 후손을 얻고,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살게 되는 것

창세기 12:1-3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땅과 많은 후손들을 얻어 큰 민족을 이루며,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는 것,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된다. 고대 중동지역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며 항상 생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히브리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땅이었고, 그 다음에는 많은 후손을 얻어 그 땅에 창성하며, 풍요와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땅을 빼앗기고, 언어의 상실과 창씨개명을 통해 일본에 동화될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같은 표상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 기록 전체를 통하여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히 차안적이고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는 총체적 구원으로 생각된다. 구원에 대한 이같은 표상은 구약성서 전체의 기본적 표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데 있다(창 12:3).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땅에 사는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구원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시작일 뿐임을 “아브라함의 약속”은 보여준다. 따라서 폐쇄적 민족주의는 배제된다.

[2] 출애굽의 해방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남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구원관 속에는 위에서 기술한 구원의 표상이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종족이 멸종될 위기 속에 있었던 히브리들이 출애굽의 해방을 통해 땅과 많은 후손을 얻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출 3:8)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같은 구원관을 요약한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약속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구원으로서 공공의 성격을 가진다.

많은 신학자들은 출애굽을 단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으로만 해석하는데, 이것은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출애굽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언약)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가르침(토라: 율법)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데 있다(참조 출 19:5-6).1)

1)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구원관의 한 가지 중요한 약점은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데 있다. 물론 해방신학, 민중신학이 태동하던 시대의 상황은 후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해방신학, 민중신학은 해방된 민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민중교회가 사라진 원인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침 곧 율법이 구원의 길로 나타난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법, 곧 율법을 지키며 사는 데 있다. 율법의 핵심은 1.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2. 아래로 힘없는 이웃에게 자비를 행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구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이 이루어져도, 이 율법의 핵심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되어버린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당신들을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멸망)가 당신들에게 닥쳐올 것입니다”(신 28:1.15). 그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느 8장 참조).

[3] 예언자들의 구원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 멸망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

그러나 가나안 땅에 입주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풍요와 평화 속에서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다. 어린 아이를 불에 태워 죽이며, 불의와 부패와 타락에 빠진다.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빠진다. 이 때 예언자들은 통치자와 백성들의 회개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방신들을 버리고,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출애굽의 야웨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섬기고 그의 가르침(율법)을 지키며, 특히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예언자들은 외친다. 성전에 바치는 제물과 종교적 절기와 행사들은(오늘 우리말로 하면 십일조와 교회의 수난절,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등의 절기 행사들)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원의 길은 1. 이방의 거짓된 신들을 버리고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며, 2. 악한 행실을 버리고, 이웃에게 자비를 행하며, 정의를 회복하는 데 있다: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사 1:16-17),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2-24). 특히 예언자들은 통치자들의 회개와 정의를 강력히 요구한다.

포로기의 예언자들(특히 제2, 제3이사야)은 바빌론/페르샤의 포로생활에서의 귀국과 민족공동체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적 회복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차안적이고 현실적이며, 공동체 전체의 총체적 구원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도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간주된다(느 8장).

[4] 메시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짐,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나라의 운명이 점점 더 기울어져,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의 건설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한다. 처음에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생각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 전체의 구원자로 생각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이방 민족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전체의 보편적 구원으로 확대된다. 인간의 영역은 물론 자연의 영역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 11:6-9),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사 35:1).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이해된다(사 65:1, 66:22).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 세계사적 미래로 분명히 드러난다.

[5] 성문서에서 하나님의 구원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네 가지 성문서는 매우 독특한 현세적 구원관을 보여준다. 욥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1. 하나님을 경외하며, 2. 물질적 축복을 받아 풍족하게 살고, 3. 많은 후손을 얻으며, 4.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선과 정의를 행하며, 5. 삶의 모든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6. 자기의 수(壽)를 다하는 데 있다(욥 42:10-17).

시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극심한 가난과 질병, 하나님 없는 자들의 억압과 모함과 소외, 삶의 불안과 고통을 벗어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안전하게 사는 데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시 1:1-2).

잠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지혜롭게 사는 데 있다.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 곧 이웃에게 자비와 정의를 행하는 데 있다: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7.19), 악한 자의 집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의로운 자의 사는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내린다(잠 3:33).

전도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 일들의 “때”(태어날 때, 죽을 때 등)에 순응하면서(전 3:1-8) 주어진 삶의 형편에 만족하고(전 5:1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주어진 생을 즐기고 장수하는 데 있다: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해라”(전 9:10), “오래 사는 사람은 그 모든 날을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한다”(전 11:8),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전 12:13).

[6] 후기 유대교의 묵시사상적 구원관

하나님의 구원이 점점 더 멀어져 보이기만 하는 역사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묵시사상(Apokalyptik)이 등장한다. “묵시”는 세계사의 종말(eschaton)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apokalypsis)를 말한다. 따라서 묵시사상은 계시사상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것은 에녹서 등 구약 외경에도 나타나지만, 구약 정경의 문서와(에 38, 욜 4:9-17, 슥 13, 단 2, 사 24-27) 신약성서에도 나타난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묵시사상에서 유래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묵시사상에 의하면 역사가 진행될수록, 세상의 죄는 더 악화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세계의 마지막 곧 목적(telos)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대 파멸이다(비관주의적 역사이해).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계의 대 파멸, 메시아의 초월적 오심,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과 지금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사도신경에 나오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이를 말함)을 거쳐, 하늘에서 초월적으로 내려올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는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눅 11:20).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약성서의 이해

[1]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

예수의 공적 활동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과 함께 시작된다(막 1:15).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 특히 비유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설명이요, 예수의 다양한 활동들, 특히 질병과 장애의 치유, 귀신추방, 죄인과 세리들과의 친교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신을 통하여 세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사건들이다: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눅 10:9), “내가 하나님의 능력(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눅 11:20).

이같은 공관복음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를 통하여 세워지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현실이 이루어지는 데 있다. 여기서 예수는 묵시사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른다(예수를 “묵시사상가”(Apokalyptiker)로 보는 Rudolf Bultmann에 반해). 묵시사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왕국은 역사의 종말에 올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구원관의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차안적인 것,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것, 정신과 물질을 포함한 총체적인 것,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공적인 것, 개인은 물론 모든 민족과 인종과 자연의 영역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를 말한다. 복음서의 내용을 분석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1. 악령(죄와 죽음의 세력)이 물러나고(예수의 귀신추방 참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세계, 2.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죄를 짓지 않는 세계, 3.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충만한 세계, 4.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과 착취와 억압이 없고, 빈부의 극심한 차이가 없는 세계(눅 4:19의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 선포 참조), 5.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함께 나누는 세계(오병이어의 기적 참조),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샬롬(건강, 풍요, 평화) 안에서 사는 세계라 요약할 수 있다. 이같은 세계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복음서는 시사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민족들의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한다. 이제 구원은 예수의 자기희생의 죽음을 통하여 죄용서를 받고,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자 “메시아”(그리스어 번역 “그리스도”)로 믿으며, 세례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다(행 2:22-42, 8:12 참조). 궁극적 구원은 만물의 회복에 있다(행 3:21).

[2] 죄의 용서, 하나님의 칭의,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

바울서신의 가장 중심적 구원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 곧 칭의에 있다. 칭의는 불의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구원의 길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 행위 곧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을 통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칭의를 믿는 믿음에 있다(롬 3:21-28).

여기서 죄인의 칭의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구원을 개인의 칭의, 곧 개인의 구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인 반면, 칭의는 개인의 내면과 관계된 부분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바울은 개인의 죄용서와 칭의를 선포로 축소시켰다고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라 말할 수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바울이 말한 개인의 죄 용서와 칭의는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칭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 곧 한 인간의 인격과 삶 속에서 시작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다고 보도한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행 28:23, 28:31 참조). 하나님의 구원은 불의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죄용서와 하나님의 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고후 5:17) 다시 태어나는 데 있다. 죄의 세력에 묶여 살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있다(롬 6:6-8).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빌 2:12). 끊임없이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골 3:9-10).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는 먼저 한 인간에게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용서를 받고 회개한 한 인간의 인격과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공중에 뜬 구름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죄의 세력에 묶여 죄를 지으면서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옛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거룩한 사람, 새 사람으로 변화(성화)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 5:8),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골 3:5).

그러나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고후 11:12) 결코 구약성서의 구원관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총체적, 보편적 구원관이 그의 서신 곳곳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개인의 죄용서와 칭의에 머물 수 없다. “더 이상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모든 민족들의 세계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같은 총체적, 보편적 구원관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린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고전 15:54-57),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골 1:20), 인종과 사회계급과 성별을 초월한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공동체(갈 3:28),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골 2:10),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골 2:15),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하나됨(통일, 엡 1:10),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심(고전 15:28),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며 신음하는 피조물들에 관한(롬 8:22) 바울서신의 많은 말씀들에 나타난다.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고전 15:24, 참조 골 2:10).

[3] 요한문서의 구원관: 영원한 생명이 있는 빛의 세계가 이루어짐

신약성서 후기문헌들, 특히 요한문서는 영과 육,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 “하늘에서 오시는 분” 등,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개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세계는 어둠을 사랑하며 어둠 속에 있다. 그것은 악마의 세력, 곧 죄와 죽음의 세력에 묶여 있다(요일 5:19). 한 마디로 그것은 “어두움”이다(참조 요 1:5, 엡 5:8: 이전에 여러분은 “어두움”이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3:31, 1:29) 예수는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빛”이다(8:12, 11:9). 하나님의 구원은 어린 양 예수의 죄의 용서를 믿고, 빛과 진리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5:24).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요일 5:13, 요 6:10). 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17:14.16),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참조 (참조 3:3).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의 삶에서 분리된 어떤 신비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요일 2:15). 죄를 짓지 않으며(요일 3:9),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말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고,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는 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과 죽음에 머물러 있다(요일 2:10, 3:14). 가장 큰 사랑은 형제자매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데 있다(요 15:13).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죄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악마에게 속하게 된다(요일 3:8).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복음은 성찬의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살은 참 생명의 양식이요, 그의 피는 생명의 음료이다. 신자들이 성찬 예식에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실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있다(요 6:53-56).

요한문서를 위시한 신약성서의 후기문서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구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총체적, 메시아적 구원관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개인과 관계된 것이고, 현실의 세계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자칫하면 영지주의적 구원관에 빠질 위험성도 보인다.

그러나 요한문서는 구약성서의 메시아적, 총체적 구원관을 조심스럽게 나타낸다. “말씀(Logos)이 육이 되었다”는(요 1:14)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은 물론 육체와 물질의 영역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요한문서가 사용하는 “어둠”, “죽음”, “거짓”, “불법” 등의 개념들은 로마제국의 현실을 가리킨다.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원형경기장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을 즐기며 열광하는 로마제국은 “살인하는 자들”(요일 3:15), “어둠의 자녀들”, “마귀의 자녀들”이(3:8.10)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한 역사학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던 검투사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경기에 동원되는 검투사 수는 지역과 부의 정도에 따라 달랐다. …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경기당 평균 625쌍의 검투사를 투입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원정에서 승리한 후 107년 개최한 경기에서는 1만 명의 검투사가 싸웠다….”2) “관중이 패배한 검투사를 죽이라고 외치면 검투사는 무릎을 꿇고 왼손으로 승자의 왼쪽 넓적다리를 잡고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때 투구를 쓰는 유형의 검투사들은 투구를 벗지 않았다. 승리한 검투사가 패자의 얼굴과 눈을 보지 않아야 목을 더 쉽게 벨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검투사도 인간인 까닭에 만감이 서렸다. … 그러나 감정에 연연하여 죽이지 않거나 지체한다면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앞날은 없었다. 살해가 결정된 상황, …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패자를 위한 길이다. 단번에 숨통을 끊지 못하면 패자를 더 처절하고도 깊은 고통으로 빠뜨리는 것이었다….”3)

2) 배은숙, 『로마 검투사의 일생』, 서울: 글항아리. 2013, 309. 3) 위의 책 317 이하.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로마제국을 그 죄악으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음녀”요 “바빌론”에 비유한다. 12만 명에 달하는 노예들과 지방의 빈농들과 도시 빈민들이 참여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혁명은(주전 73-71년), 900명에 달하는 원로원 귀족들과 빈민들의 극심한 사회 양극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기초한 로마제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신약성서 후기문서는 로마제국의 타락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요일 5:19), “그들은 대낮에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한다. … 그들의 눈에는 간음할 상대자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죄를 짓기를 그치지 않는다. …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채우는 데에 익숙하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식들이다”(벧후 2:13-14). 한 마디로 로마제국은 “어둠”이다(이 말씀에 비추어 오늘 한국의 현실은 어떤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같은 로마제국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영지주의가 말하는 영혼의 구원의 구원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를 밝히는 “세상의 빛”이요(요 8:12, 1:4), 참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 “영원한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의 물” 곧 생명수다(6:48.68, 4:14). 그는 인간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이다(요일 4:14). 그가 희생의 죽음을 당한 것은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요일 2:2).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어둠의 세계가 하나님의 빛의 세계로, 죄와 거짓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로 변화되는 데 있다. 달리 말해, 하나님 없는 죄악된 세계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전망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더 이상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데 있다. 세계사는 구원의 역사를 향한 투쟁의 과정이다.

요한문서에 의하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빛의 자녀들”이요(요 12:36), “진리의 협력자들”이다(요삼 1:8). 이 세상의 불의한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쫓겨날 것이다”(요 12:31, 16:11). 결국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적을 이룰 것이다. 그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요 16:33).

맺 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성서의 구원관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았다. 이 다양한 측면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구원관의 핵심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메시아적 구원관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묶여 있는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본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Christos).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의 구원은 메시아적 구원일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에서 유래하는 메시아적 구원관은 기독교의 생명이라 말할 수 있다.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내세의 구원을 기다리거나, 인간 내면의 영적, 정신적 구원을 가르치는 반면, 기독교는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2. 하나님의 자비와, 3. 하나님의 정의가 충만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

따라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물론 기독교 모든 교단들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불우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행함은 물론, 우리 사회 속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주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웃에게 정말 자비를 행한다면, 하나님의 정의에 관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불의한 사회 제도와 구조를 방치하면서 자비를 행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위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예수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라”고 가르친다.

정의가 없는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요즘 그리스의 국가부도의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 경제가 불안한 가운데 있다. 그런데 그리스의 국가부도 위기의 뿌리는 그리스 사회의 불의와 부패, 특히 공직자들의 불의와 부패에 있다고 한다. 최근에 일어난 중국 텐진 항의 대 폭발사고의 내면적 원인도 중국 공무원들의 부패에 있다고 한다.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고, 국가의 제반 산업시설을 성실히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한다.

한국 사회의 불의와 부패도 심각한 수준이다. 방위산업에 관련된 공직자들의 뇌물수수로 인해 중요한 무기들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2014년도 국제투명성기구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경제협력기구(OECD)에 속한 34개국 중 27위라고 한다.

그동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사회정의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주요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이같은 전통은 계속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교회의 역사의식의 결핍을 극복하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1945년 8.15해방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 맞먹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8.15해방을 기념하는 교회의 연합행사는 찾아볼 수 없다. 주일예배의 대표기도와 설교 시간에 간단히 한 마디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이다. 자기의 역사를 회상하는 민족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결핍된 역사의식의 회복은 중요한 선교 과제에 속한다.

그런데 성서는 구원의 인격적 차원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나님의 메시아적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신약성서 후기문서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이 세계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요,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도 인간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인간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철저하게”, 곧 “뿌리에서부터(Radical, radis: 뿌리) 파악해야 한다(K. Marx)”.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한 인간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화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이 선교의 중요한 과제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먼저 사람을 구해야 한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정의에 관심하는 동시에, 개인전도와 교인들의 성실한 양육에 관심해야 할 것이다.4)

4) 구원론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 김균진, 『기독교신학』, 제3권, 새물결플러스 2014, 제9부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세우는 하나님의 구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