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부단없이 생동하는 바닷물 같으신 분 / 안희국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5 09:27
조회
420

부단없이 생동하는 바닷물 같으신 분


안희국(전 한신대학교 교수)


[1] 두 분 선생님, 만우와 장공을 만나다


나는 청소년 시절에 같은 군내에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두 분의 선배님을 알게 된 것이 나의 삶의 방향을 가늠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두 분 다 작고하신 만우 송창근 박사님과 장공 김재준 박사님이시다.


만우 선생님의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나의 부친 때부터 교분이 있어 왔기에 나도 여러 번 뵈온 적은 있으나 장공 선생님 댁은 엄격한 유교적인 가정이셔서 교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만우 선생님과 장공 선생님을 연계시켜서 쓰는 것은 그 두 분의 관계가 청년시절부터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나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는 그 두 분을 힘입은 바 지대하기 때문이다.


장공 선생님이 회령 간의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웅기 금능조합 서기로 있을 때 만우 선생님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접하고, 그 후 만우 선생님이 졸업한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음은 알았으나 나는 그때까지 그를 뵌 것은 없었다.


그런데 1928년 내가 서울 피어선 고등성경학교 3학년 때, 장공 선생님은 청산학원을 졸업하시고 미국 유학 준비차 서울에 오셔서, 피어선 학원 기숙사에 계시면서 한 학기 동안 창세기 강의를 하셨다. 그런데 그 강의가 명강의여서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때 나는 내가 신학공부를 하게 되면 구약을 공부하리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장공 선생님은 도미 직전에 앳된 나를 어떻게 보았던지 하루는 불러서 “내가 안 군이 알고 있는 송창근 선생님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가는데 안 군도 여기를 끝내고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에 가서 공부하고 때가 되면 미국 유학을 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부탁을 하시었다. 하나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면서 교과서 3책을 주셨고, 두 번째는 ‘결혼을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리고 일본문 프랜시스 전기와 슈바이쳐 전기를 주셨는데 그 두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장공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병석에 누우셨던 아버지께서 별세하셨고, 나는 가난한 가정의 장자로, 아래로 5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5년 되는 해에는 꼭 떠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후 나는 고향에서 어업조합의 서기로 있다가 함북노회 전도사가 되어 선생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신아산교회로 가게 되었다.


이때가 1929년의 봄이었다고 기억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오신 만우 송창근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김재준 선생의 본댁으로 가려고 하는데 같이가자”는 것이었다. 약속된 그날에 송 박사님은 우리가 세를 들어 사는 집으로 들어오시자마자 “내가 미국을 떠날 때 김재준 선생이 고향으로 가거든 안희국이란 청년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아 보라”고 해서 “내가 집에 와서 아우에게(송 박사님의 아우는 나의 사촌 매형)들어서 알았는데, 그래 공부하러 언제갈래?”하고 묻기에 나는 “내년 봄에 떠나겠습니다” 했더니 그럼 됐어. 하시고는 “지체치 않고 떠나자”고 하시기에 나는 따라 떠났다.


장공 선생님의 고향에는 가까운 거리에 5, 6개의 부락이 있는데 교회는 귀낙동에 있었다. 그 교회는 장공 선생께서 세우신 사립학교에서 시작된 교회로 그 교회에서 장공 목사님까지 4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 장기형 목사와 안세민 목사는 미국에 계시고 김광세 목사는 순교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평일인데도 교회당에는 교인들과 동네 유지 분들이 많이 모여서 송 박사님의 말씀을 경청하였다. 송 박사님은 장공 선생과 장기형 선생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니 모두들 기뻐하시었다. 그날 우리는 저녁에는 장기형 선생님 댁에서 ‘떡 잔치’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안내인을 따라 오봉동 장공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그 댁은 정남향으로 독채의 기와집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는 장공 선생님의 형님의 영접을 받고 방에 들어가서 인사를 했다. 엄격한 유교 가정의 예법이라 백씨께는 무릎을 꿇고 앉으셔서 송 박사님의 말씀에 경청하셨다. “재준 선생은 건강도 좋고 학업성적이 월등해서 교수와 서양 학생들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고 하신즉 그분은 “그렇습능가”(그 고장의 존댓말)하실 뿐 자진해서 물으시지는 않으셨다.


송 박사님은 그런데 그때 조용한 기침소리가 나더니 미닫이를 반쯤 열고 장공 선생님의 모친께서 나타나셨기에 우리는 절을 올렸다. 70년대의 연세로 보이시는 자당께서는 인사를 받은 후 곧 일어서시면서 “우리 재준이는 언제 오게 되겠습능가?” 하시니, 송 박사님은 “이제는 공부도 끝나가고 있으니 속히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하신 즉 자당께서는 “내 생전에 다시 보게 될는지…” 하시더니 눈물을 닦으면서 조용히 미닫이를 딛고 돌아가셨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남녀유별’이라는 엄격한 유교적인 가풍이 70대의 노모로 하여금, 머나먼 미국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소식을 가지고 온 친구 분에게까지 내외를 하도록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공 선생님의 모친께서 나가시자 형님께서도 밖으로 나가셨다. 그때 송 박사님은 다리를 펴시면서 “아, 살 것 같다. 안 군 우리도 일어나 가기요” 하셨다. 그래서 송 박사님과 나는 장공 선생님의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 댁을 떠났다. 한 백미 터쯤 걸어 나오니 버드나무가 있고 그 밑으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신 송 박사님은 “아아.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을 이래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 개천에서 용이 났구나”고 탄성을 발하셨다. 얼마 걸어오시다가 송 박사님은 나보고 “내가 만일 재준 선생 만한머리를 가지고 내가 공부한 전공했더라면 한국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약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나는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신아산교회를 사면했다. 마침 함북노회가 회령에서 모이는데 나더러 ‘목사후보생’ 추천을 받으라고 해서 참석했다. 후보생은 문준희(후일 목사로 순교)와 나였는데 문 전도사는 평양신학교를 지망했음으로 추천을 받고 여비까지 받았으나, 나는 청산학원으로 간다는 이유 때문에 추천받지 못했다. 나는 멋적기는 했으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때 내 앞에 언제 귀국하셨는지도 모르고 있던 장공 선생님이 나타나셨기에 놀랐다. 그런 결과를 지켜보신 장공 선생님은 내 손을 곡 쥐며 웃으시면서 격려를 해 주셨기에 나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2] 평양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그 후 6년이란 세월이 흐른 1939년 봄이었다. 나는 청산학원 신학부 예과 3년, 본과 3년의 정규과정을 끝내고 귀국을 서두르고 있을 때에 부산에서 계신 송 박사님께서 부산에 들러가라는 연락을 받고 들렀다. 만우 목사님은 나더러 “목회를 해야지”라고 하시기에 나는 “앞으로는 일본말로 설교를 하게 된다고 들었는데 저는 그렇다면 목회 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목사님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소리 말고 집에 갔다가 연락을 하거든 순종하라” 하셨다.


그런데 집에 와서 쉴 새도 없이 송 목사님으로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관식목사님과 약속이 되었으니 지체 말고 평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양에 가서 김관식목사님을 뵜더니 “집에 가서 가족을 데리고 곧 이사해 오라”고 하셨다. 이라 하여 나는 전통이 있는 장대현교회의 조사(전도사)겸 교회에서 경영하는 숭혜여학교의 교사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따라서 나는 분수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지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 말씀인 즉 “은진중학교의 교목이시던 김재준 목사님께서 조선신학원 설립차 서울로 가시면서 그 후임으로 나를 추천했기에 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절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서울에서 장공 목사님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는데 “꼭 은진중학교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만우 목사님께 그 사실을 알렸더니 목사님은 노여워하시면서 “결코 장대현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존경하는 두 분 선배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목사님도 장로님들도 극구 만류하시기에 떠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다시 은진중학교의 연세 많으신 교장선생님께서 오셔서 간청하심으로 나는 가족과 의논하고 용정행을 단행했던 것이다.


북간도의 오월은 계절적으로 변덕이 심했다. 그야말로 황진만장의 찬바람이 연일 계속되었다. 그때 나의 가족은 넷이었는데 세 살 된 아들애가 감기에 걸리더니 급성폐렴으로 번져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설상가상 격으로 나 역시 감기로 기침을 하면서 한 학기를 넘겼으나 그 해 가을에는 결핵성 늑막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교탁에 섰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1년 후에 퇴직하고, 가족은 고향으로, 나는 긴 요양생활로 이어져서, 주을 온천으로, 강원도 통천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의 용정행은 학교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나에게는 애상의 추억만 남기고 말았다.


[3] 부산에서 장공 목사님과의 재회


1950년 12월말이었다. 그때 한국신학대학은 부산에 피난 중이었다. 나는 배로 부산에 도착한 수일 후에 장공 목사님과 청산학원 동창인 조선출, 김정준 두 목사님들을 반갑게 만났다. 그러나 만우 송창근 목사님의 납북의 비보를 듣고 슬픔을 금치 못했다. 그 후 나는 세 분의 목사님의 배려로 한신대학과의 인연을 맺게 되어 정년퇴직까지 한신대에 있었다.


1957년 한신대학이 수유리에 새 교사를 건축할 때 나는 제일 먼저 신축교사 밑에 소가 있는 농가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고, 다음으로 장공 부학장님도 구내에 있던 건물을 수리하고 이사하셨다. 그때는 교사도, 교수들의 사택도 없을 때였다.


나는 장공 목사님과 자주 화계사 영내와 주변의 계곡 등에 산책을 하기도 했다. 방학 때 지방에 집회가 있어 가실 때에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그럴 때마다 왕복 차 속에서 또 여관은 온돌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새 교사가 완공된 이듬해였다. 나는 두 번이나 장공 부학장님께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다. 하나는 나의 건강이 갑자기 좋지 못해서 의사의 권고도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사장 김종대 목사님께서 두 번이나 나에게 ‘목사안수건’으로 말씀하시면서 “신학대학교수가 목사가 아니고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목사가 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기에 평신도이기를 고수하는 나 자신도 적격자가 못됨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공 부학장님은 “안 선생의 건강회복을 위해서는 여기처럼 좋은 데가 흔치 못할 것이고, ‘목사안수’건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회에서 이야기했으니 다시는 거론되지 않을 것이오 앞으로 농촌목회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교회봉사와 졸업 후의 교회 알선의 뒷바라지를 안 선생이 해주지 않으면 누가 하겠소?”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주저 않고 말았던 것이다.


회고해 보면 장공 박사님과 내가 부산에서 재회해서 한신대에서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그 후 그 어른이 작고하시기 전까지, 학장과 평교수 개인적인 인간관계, 또는 가정적인 관계 등 긴 세월동안 나는 그 어른의 주변에서 살아 왔다.


장공 김재준 박사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각에서 ‘장공상’에 관해 논급하였기에 내가 여기에서 새삼 사족을 달 필요도, 또 그럴 수도 없다.


장공 박사님은 내면세계는 내게 있어서는 흡사 깊은 바닷물 같아서 그 수심을 나의 자로는 잴 수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나는 바닷가 태생이기에 바다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다는 표면으로 보아서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다 속은 쉴 새 없이 흐름 때문에 만 가지 어족들이 그 흐름을 따라 교류할 뿐만 아니고 바다 밑에 있는 온갖 정물들도 그 쉴 새 없는 물갈이 때문에 그것들에 부착된 때깔들이 말끔히 씻기어져서 본색대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장공 박사님의 심성은 부단 없이 생동하는 바닷물과도 같아서 정체하지 않는 분이라고 보았다. 고인 물이 썩듯이 장공 박사님께 있어서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어떤 교리나 전통이나, 제도나 의식 따위는 그것에 생명이 없는 한 썩고 말기에 그분은 결사코 도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임종을 앞둔 장공목사님의 짙은 향수


장공 목사님께서 한양대학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문병객이 없을 때면 그분과 나의 화제는 고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 어른은 다시 보지 못할 곳이어서 그랬던지 무척 향수에 젖곤 했다. 당신이 태어나 성장한 고향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가 태어난 고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음으로, 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가 안 선생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한 20리, 두만강 상류에 있는 ‘용혈’에서 사립학교 선생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 그 일대를 돌아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장공 목사님은 나더러 “안 선생, ‘상리’(上里)라는 말과 ‘수하’(水下)라는 말을 아느냐?”고 묻기에 나는 “압니다. ‘상리’는 목사님의 고향인 농경지대를 말하고 ‘수하’란 두만강 하류에 있는 토박한 지대와 가난한 해진(海津) 사람들을 비하(卑下)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까?” 했더니 그렇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상리 사람’들은 고집스런 유교적인 전통을 묵수해서 ‘공맹지도’ 운운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지. 그러나 ‘수하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학교가 되어서 개화사상과 독립사상을 심어주었어. 내가 ‘상리’에서 사립학교를 세웠을 때 동네사람들이 서당을 세워야 한다고 떠들어서 내가 고향을 떠나 수하인 ‘용현’으로 와서 중등 정도의 학교를 세웠을 때 모두들 협력해 주었어”라고 하셨다.


나는 장공 목사님이 그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고 있었으나 실은 그분에게는 ‘마음의 고향’은 없으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으로 갔으나 간 것이 아니고 들렀을 뿐이다… 가정은 내게 있어서는 이방지대였다”라고 쓰셨고, 내가 미국서 귀국했을 때 아버지께서 ‘이제부터 교(기독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부자유친(父子有親)으로만 지내자’고 하셨다. 그러나 목사님으로서는 유한이 없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공맹지도’를 정도(正道)라고 하시면서도 한때는 풍수설 같은 장서를 탐독하셨고, 기독교의 부흥회에도 가보았다고 하셨으니 그분에게도 ‘구도자’(求道者)의 여백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술회하셨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만일에 장공 선생님이 청년시절에 친구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분이 타고난 풍부한 달란트를 사장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도시에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만인 축복의 기관’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 장공 선생님을 불러서 ‘축복의 기관’으로 삼으신 기이한 섭리에 대하여 감사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