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너희들에게 득이 된다면 나를 이용해도 좋다 / 김호식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4 19:06
조회
1366

너희들에게 득이 된다면 나를 이용해도 좋다

김호식(서울북노회 공로목사)

[1] 두 번 놀라다

나는 이미 몇몇 잡지에 김재준 목사님께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들은 주로 한국 교계와 한국 신학계에 끼친 그 분의 비중과 영향에 관한 글이었다. 그러나 이 번 부탁은 ‘장공을 회상하는 글’을 쓰라는 것이니 주로 그 분과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라는 모양이다.

1957년의 일이다. 나는 그때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 기독 청년연합회(교파 연합 단체, 당시 회장은 유재신 씨)의 총무직을 맡고 있었다. 전국기독청년하령회의 강사를 교섭하기 위해 김재준 목사님을 뵈려고 수유동 한국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를 찾아갔다.

그러나 목사님은 사택에 계시지 않았다. 전화가 없던 때니까 약속도 안하고 찾아갔던 탓이다. 허름한 옷을 입고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는 식모 할머니께 ‘그럼 사모님을 뵙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식모 할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고 옷깃을 여미더니 ‘내가 목사님의 부인’이라고 말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을 뿐 아니라 무척 무안했다.

그 분이 바로 그 유명한 김재준 목사님을 평생 모신 장분녀 사모님이셨다. 사모님께 있어서 목사님은 남편이라기보다는 하늘이요, 천사였다. 한국의 목사 중 부인으로부터 가장 큰 ‘존절한 존경’을 받은 분은 아마 김 목사님일 것이다. 내일 몇 시쯤 오면 목사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큰 감동에 사로잡혔다. 허술한 사택, 가난이 밴 가구들, 식모 할머니로 보이는 사모님…,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 진짜 선비가 지금도 계시구나!” 밥 굶을 각오까지 하고 신학교에 진학한 나로서는 큰 감동의 날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말로만 듣던 큰 목사님을 뵙고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빈약한 체구, 까무잡잡한 얼굴, 못난 입술, 듣기 싫은 음색, 그 눌변(訥辯) … 이 분이 그 위대한 역사를 만들고, 그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그 높은 존경을 받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란 말인가!

[2] 같은 교회에서 뵙게 되다니

1961년은 나에게 있어서는 행운의 해였다. 1월부터 경동교회에 시무하게 되었고, 두 달 후 3월부터는 연세대학교의 강사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김재준 목사님이 창립하신 경동교회에서 시무하면서부터 주일마다 김 목사님을 뵙게 되었고(성북교회로 가시기 전에는 경동교회에 출석하셨다), 또 목사님에 관한 수많은 에피소드를 강원용 목사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김 목사님께 대한 경동교회 올드 멤버들의 존경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1945년 12월 첫 주일, 세 사람의 친구가 각각 교회를 창립했다. 김재준 목사님은 경동교회를, 송창근 목사님은 성남교회를,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를, 같은 날 현재의 위치에서 각각 창립하셨다. 김 목사님이 한신 학장으로 가시면서 강원용 목사님이 경동교회의 당회장이 되셨다. 김 목사님을 경동교회의 명예 목사로 예우해 드리면서 매월 얼마의 생활비를 드린 적이 있었다. 당시는 온라인 제도도 텔레뱅킹 시스템도 없어서 내가 월말이면 생활비를 직접 갖다 드렸다. 사모님만 계실 때는 문 밖에서 봉투만 전달하고 오지만, 목사님이 계실 때는 들어가 차를 대접받기도 하고 식사를 대접받은 적도 있다. 목사님의 사생활을 뵐 수 있다는 것만도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 때 목사님 댁에는 식모(그 당시는 가정부라는 말이 없었다)가 있지 않았고 ‘식부’ 역할을 하는 총각이 있었다.

나는 목사님이 붓글씨를 쓰고 계실 때 방에 들어간 적도 여러 번 있는데 “휘호 한 장 써 주십시오”하는 말씀을 한 번도 드리지 못했다. 그 후에 내가 여기저기 지방에 강의나 집회 때문에 가보면 김 목사님의 휘호를 갖지 않는 제자가 없을 정도인데 가까이서 자주 뵙던 나만 그 분의 휘호 한 장 없는 것이 못내 섭섭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내가 목사님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얼마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렵게 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며, 또 목사님의 성격의 일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목사님은 ‘내 휘호 한 장 써 줄까?’하고 결코 내게 먼저 물어보시지는 않을 분이다. 목사님은 피동적인 성격이어서 그런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제자를 좋아하셨다.

[3] 참 잘했어

강원용 목사님은 내가 경동교회에 부임하던 61년에 여섯 번 해외에 나가셨고, 그 다음해에는 다섯 번 나가셨다. 그리고 한 번 나가시면 짧게는 두 주간, 길게는 두 달 동안 교회를 비우셨다. 드디어 강 목사님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중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되셨고, WCC 중앙위원, CCA회장이 되셨다. 주일에 Ⅰ부 예배만 드리던 경동교회는 곧 Ⅱ부 예배, Ⅲ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부목사가 나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행정, 교육, 심방, 주일 밤과 수요일 밤 집회인도, 모두 내가 해야 했다. 게다가 연세대학교에 주 9시간 출강까지 하느라고 나는 너무나 바쁘게 일했다. 나중에는 강원용 목사님은 1년의 반 정도는 해외에 나가 계셨고 귀국하셔도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실로 출근하셨다.

강 목사님이 해외에 나가실 때는 주일 강단 설교를 교섭할 명단을 주셨다. 그 명단 이외의 사람은 절대로 경동교회 강단에 세우지 못했다. 강 목사님은 종종 내게도 주일 낮 강단을 맡기셨다. 해외 유학한 교인들, 교수들, 대학생들, 학생들, 4ㆍ19 주동자들이 주종을 이루는 회중에게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로서는 존절한 마음으로 강단에 섰다. 특히 김재준 목사님이 앞자리에 앉아 계시니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목사님, 오늘 제 설교 엉망이죠?”하고 여쭈어 보면 열 번이면 열 번 다 “참 잘했어”라고 칭찬해 주셨다. 김 목사님은 칭찬을 잘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배가 끝나면 번번이 설교가 어땠느냐고 여쭈어 보곤 했다. 김 목사님은 나의 기를 죽이지 않으시려고 칭찬을 하신 것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4] 회갑 예배

김재준 목사님의 회갑기념 행사가 나흘 동안 경동교회서 있었다. 사흘 동안은 저녁마다 “장공 선생 회갑기념 신학강연회”를 가졌는데 하루에 두 사람씩 모두 여섯 사람의 강연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인데 모두 김 목사님의 제자들이었다. 마지막 날은 회갑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회갑예배 마지막 부분에 목사님의 ‘답사’가 있었는데 그 때 하신 말씀을 지금까지 40년 동안 기억하고 있다.

한 사람의 교수로서, 또 한 사람의 목사로서 회갑을 맞는 느낌은 마치 ‘만리장성 밑에 서 있는 노인’과 같은 기분입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을 만리장성 담 밑에 불러모아 놓고 ‘너희들은 이 성벽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가야 한다. 만리장성 성벽 너머에는 광활한 들판과 위대한 세계가 있느니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곧 교수요, 목사입니다. 그는 그렇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친히 성벽 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등을 밟고 성벽을 넘어가도록 도와 주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젊은이까지 다 보내고 나면 자신은 밟고 넘어갈 발판이 없어 혼자 외롭게 성벽 밑에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하루 종일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어느덧 서쪽 하늘의 석양은 붉게 불타고 있으며, 바람결에 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은 희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회갑을 맞이하여 두 개의 상반된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아아, 참 힘든 일생이었구나’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아아, 참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단 교수나 목사의 일생뿐이겠습니까? 부모가 된다는 것도, 선배가 된다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삶일 것입니다.

[5] 사경회에 함께 강사로 초청 받다

1972년의 일이다. 리승만 박사가 세우신 ‘시카고 한인 감리교회’(당시 담임 목사는 차현회 목사)에서는 교회 창립기념일을 맞아 큰 사경회를 열었다. 강사는 김재준 목사님과 유학 중이던 나였다. 두 사람이 사흘 동안 집회를 나누어 인도하게 되었고, 한인신문과 광고 전단으로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그런데 당시 김 목사님은 캐나다에 머물러 계시면서 이상철 목사님과 함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을 소리 높이 외치고 계셨는데, 주 캐나다 한국영사관에서 목사님의 여권에 ‘목적지 추가’ 허락을 내어 주지 않았다. 미국까지 가서 반정부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조처였다. 결국 목사님은 미국에 오시지 못했고, 사흘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모든 집회를 나 혼자 담당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교회 회중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 일로 미국내 한인들로부터 항의를 크게 받은 당국은 그 다음 해 세인트․루이스 한인교회에서 강연회 연사로 초청한 것은 허락해 주어서 미국에 오실 수가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과 교포들이 멀리서도 와서 대성황을 이루어 강연회를 계획한 우리는 너무 기뻤다. 미국인들도 많이 참석하여 목사님은 영어로 강연하셨다. 어떤 부분은 우리말로 하시고 조승준 박사가 영어로 통역하기도 했다.

[6] 나를 이용해도 좋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했는데 그 이유를 나는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목사님은 남을 꾸중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제자라도 잘 나무라지 않으신다. 상대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꼭 제자에게 주의를 줄 일이 있으면 말씀으로 면전에서 못하시고 편지로 쓰시는데, 보통 때는 펜으로 쓰시지만 중대하게 꾸중하실 때는 반드시 붓으로 쓰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주 있지는 않다. 나는 한 번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은 칭찬만 하시고 왜 꾸중은 안 하세요?” 목사님의 대답은 “사람은 남이 지적해 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하셨다.

둘째, 제자들에게 잘 이용당하신다. 똑똑한 사람들은 말을 부탁 받거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플라스가 되는지 마이너스가 되는지, 자신의 명성과 처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먼저 계산해 보고 수락한다. 그러나 목사님은 자기의 입장보다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앞서서 “나로 인하여 너희가 덕 볼 일이 있으면 나를 이용하라”는 식이다. 인권측 제자가 초청해도 잘 가시고, 비인권측 제자가 초청해도 잘 가셨다.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목사님에게는 양쪽 제자가 다 ‘사랑하는 제자들’이었다. 목사님은 자기애적이 아니고 봉사적이다. 목사님은 어머니 마음 같아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제자들이 잘 모셔 가기도 하고, 자기들 편으로 끌어당기기도 했다(요 21:18 참조). 체면 바르고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존경만 하게 된다.

셋째, 목사님의 글에는 매력이 있다. 목사님의 글에는 힘이 있다. 바울이 말보다 글이 더 힘이 있었듯이, 목사님의 글은 멋있고 맛있고 부드럽고 세차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그것이 문재(文才)에서 나오는 글이 아니라, 인격과 사상에서 나오는 글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글은 확실히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동서양의 사상을 다 섭렵하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없는 글이다.

목사님은 1987년 1월 27일, 내가 경동교회의 당회장으로 있을 때 돌아가셨다. 운명하시기 사흘 전에도 나는 한양대학병원으로 문병을 갔지만, 이미 말문을 닫으시어 아무 말씀도 듣지 못했다. 빈소를 경동교회에 차리고 5일장으로 모셨는데, 종교계와 학계는 물론 정치ㆍ경제ㆍ예술계의 수많은 명사들이 빈소를 찾았다. 많은 조문객이 아무 것도 들지 않고 갔지만, 그래도 일회용 종이컵 2,700개를 소비하고 매일 식사를 150명 이상 대접했으니 결국 800여명 정도의 식사를 대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