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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그리스도의 발자국만을 따라 사신 분 / 강신정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17 19:40
조회
1647

그리스도의 발자국만을 따라 사신 분

강신정
(기장 제65회 총회장)

[1] 장공과의 첫 만남

나는 21세 때 학비, 생활비, 미국 유학비까지 보장해 주겠다는 한 선교사의 호의를 사양했다. 그것은 목사인 아버지의 목회현장에서 받은 인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27세 때 바울의 소명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헌신했다. 4년간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신학교 문을 들어섰다. 때가 일제 말기여서 외국 유학생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어서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왔다.

이미 조선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는 합쳐서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수업중이고 성결교신학교와 합동을 절충중이었다. 당시 총리(총회장) 김응순 목사의 의견을 따라, 나는 성결교 신학교로 앞질러 들어갔다. 합치면 성결교신학교 교사를 쓰게 된다고 해서였다. 그러나 양측이 교수 내용 문제에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조선신학교는 일본인의 정동교회당으로 옮겨서, 나는 본의 아니게 성결교신학교에서 한 학기를 배웠다. 그때 신사참배 문제로, 성결교 중진들이 구속되고, 교단과 학교는 해체되어 문을 닫았던 것이다.

이때 나는 가족이 있는 만주 하얼빈에 가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 총회 본부에 계시던 아버지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고 올라와 아버지와 함께 정동교회 2층 구석에 있는 작은방을 찾아갔다. 아버지의 소개로 조선신학교 교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분이 바로 장공이셨다. 별다른 절차를 밟지 않고 이미 한 학기 공부를 했다는 것으로 전학 조건이 된 것이다. 이것이 장공과의 첫 만남이었다. 학교라기보다는 어느 자그마한 사설 강습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2] 모교의 명맥을 지키다

장공과 우리(5, 6회 동문)는 모교의 명맥을 지켰다는 생각이 든다. 4회까지 96명을 배출한 모교가 45년 새 학기에는 지망생이 전무했다. 그것은 날로 더해가는 일제의 한국교회 말살정책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재학생마저 한 사람씩 징용으로 뽑아가고 있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군사 훈련도 하고 근로 봉사도 해 가면서 징용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장공은 교수들과 의논하고 학도 동원령에 의한 일터를 찾은 결과 국내에 세 곳, 일본에 한 곳을 물색하였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는 집으로 가면 징용을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원효로 기숙사 사생들이 하나 둘씩 징용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다. 만일 뿔뿔이 흩어진다면 학생 없는 학교는 문을 닫고야 말 것이다.

이때 나는 졸업반 반장이요, 학생 대표였으므로, 학장과 의논하고 총학생회를 소집하여 “물론 우리들이 귀향하면 각자 징용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다 여의치 못할 때는 끌려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이미 우리는 헌신한 몸이니 신학생이란 이름을 가지고 한 곳에 가서 동고동락하다가 만에 하나 총격으로 죽는다 해도, 신학생이란 이름을 가지고 한 구덩이에 함께 묻힌다면, 이보다 더 영광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역설했다. 결국 모두 찬성했다.

그래서 그해 5월 1일 비 오는 날 아침 장공 이하 교수들의 전송을 받으며 전성천 강사 인솔하에 눈물을 머금고 서울역을 떠나 평양시 선교회 군수공장(전 종연 방직공장) 기숙사 3층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에게 법학 통론을 가르치던 하나무라 경성제대 교수가 추천한 곳이고 그의 제자들이 평양 법조계에 군림하고 있어서 우리는 공장 안에서 우대를 받았다. 본래는 통년동원인데도 전성천 강사가 공장장과 교섭을 해서 6개월만 일하고 돌아가게 되었으나 3개월 반 만에 해방이 되었다.

이때 많은 에피소드가 있으나 다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교수들은 교대로 출장 교수를 했고 학생들은 낮에는 우산공장과 선반공장 두 곳에서 나누어 일했고 밤에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장공은 텅빈 학교를 지키다가 7월달에야 신입생이라고 이일선 군 외 5명인가 보내온 것으로 기억한다. 전후 사정을 생각해보면, 5, 6회 동문이 모교의 끊어질 뻔했던 명맥을 지켰다는 생각이 든다.

[3] 장공은 나로 하여금 기장인이 되게끔 무언의 영향을 주신 분

나는 졸업한 다음해에 목사가 되어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총회가 장공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제삼기는 해방 후 처음 모인 새문안교회 총회 때라고 기억된다. 장공은 내게 “너는 나를 따르라”, “우말 안 개구리들과는 짝하지 말라”, “융통성이 없는 옹고집들과는 사귀면 안 된다” 이런 따위의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다만 내가 신앙적 또는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장공과 서고도 선교사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불의를 보고 떠난 것뿐이었다.

일제 말기 전쟁 수행에 피를 쏟아붓는 한국에서 의식(衣食)의 문제는 참으로 비참했다. 기숙사 학생 중 한 명이 하도 배가 고파서 밤중에 부엌을 뒤지다가 누룽지를 찾아들고 “이것 먹으면서 기도를 드려야 하나” 했다는 말을 후에 본인에게 들었다. 이러한 현장에서 나는 장공을 보았다. 일체 내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산처럼 안정된 자세로 험로를 해치고 벽을 뚫고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고 전진하는 그의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를 닮은 의연한 인격임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엄격히 훈련받은 나의 신앙 양심에 불의한 결정을 내린 총회의 처사가 용납이 안 되었다. 대구에서 모인 36차 총회가 김, 서 두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짓는 현장을 보고 여러 명의 목사들이 북장로교 선교사 대표를 찾아가 “미국교회도 김, 서 두 목사를 이단으로 봅니까?” 물었더니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로 수년간 진통하는 총회를 보면서도 왜 꿀 먹은 벙어리입니까?” “예, 그것은 총회가 조직된 지 이제는 40년이 되었으므로 당신들 문제는 당신들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선교부 대표 2명을 총대로 보내고 있으면서 이율배반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다시 부산에서 36차 총회가 모여 조선신학교란 직영 신학교가 있는데도,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제3학교 설립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지면 관계로 자세히 쓸 수는 없다. 다만 조선신학교 지지표가 46표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표 대결에서 이기기 위하여 선교부 2표, 지역이 없는 이북 5개 유령 노회 총대 5표를 급조해서 51표로 대결에 임했던 것이다.

나는 그 시간에 2층 방청석에서 정대위 목사와 참관하고 있었다. 충분한 토론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2, 3명이 발언했을 때 정일영 목사가 언론 중지 동의를 했고 박병훈 목사가 재청을 했다. 장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나 각본대로 지역이 없는 유령 노회 총대 5명을 더해서 결국 51대 46으로 가결했다.

이 중대한 문제를 토의없이 결정짓는 데도 김재석 총회장은 양심을 속이고 회의를 이끈 것이다. 이 변칙 통과의 비리를 본 정대위 목사는 격분해서 퍼부었다. 나는 이런 비리를 볼 때마다 ‘저 말썽만 부리는 6, 7명의 목사만 제거하면 총회가 조용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목사들이 장공을 닮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리하여 내 마음이 이내 굳어졌을 때 신명 형님을 만났다. 형은 “총회가 장공을 이단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처럼 부패한 것은 아니다. 남아 있으면서 시정하면 되지 않겠느냐!”했다. 그러나 나는 “형님은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죄 없는 목사를 인해전술로 축출하는 총회 산하에 더 이상 머무르는 것을 나의 신앙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약자 편에 서겠습니다”하고 형님과 갈라서는 아픔을 경험했다.

나의 아버지 강병주 목사와 형님 강신명 목사를 아는 이들은 강신정은 떠나지 못할 사람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어느날 신애균 선생을 만났는데 “나는 강 목사만은 떠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하면서 환영한다는 뜻으로 굳은 악수를 해 주었다. 때가 때니 만큼 뭉클했다.

[4] 애자(碍子) 사건에 얽힌 이야기

내가 전도국 총무일 때 어느 날 장공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알고 보니 학교에 돈을 빌려준 사람과 약속이 있어서 오신 것이었다. 상대는 장공의 제자로 나에게는 신학교 후배였다. 그는 어느 소교파 소속이었고 부자였다. 그는 안면몰수하고, 빌려 준 돈을 약속을 어기고 갚지 않는다고 내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불순한 언동으로 다그쳤다. 당하고만 있던 장공의 모습이 지금도 역력하다. 그때가 교사를 수유리로 옮긴 후였고, 따라서 학교 살림이 어려워 하석상대(下石上臺)하던 때로 기억된다.

이때 학교의 살림을 맡은 학감 조선출 목사가 부산 부두 창고에 잠자고 있던 애자를 헐값으로 사서 팔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에누리 없이 믿고 학장과도 의논없이 거액을 투자하였다. 학교 살림이 어려운 것만 생각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애자는 압록강 수풍댐 수력발전소에 맞춘 전기 부품으로서 국내 어느 발전소에도 크기가 맞지 않아 판로가 막힌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트남에서 필요로 하고 또 크기가 맞아서 출하하려는데 그곳에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단시일 안에 학교 살림을 여유 있게 만들려던 계획이 무너지면서 이 사실이 노출되고 만 것이다.

이때 일어났던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다 덮어두고, 교수들의 성명서는 총회로 비화했고 학장 장공의 해명서는 이사회에 들어가서 총회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의 늪에 빠졌다. 이때 나는 동문회 회장으로서 파송 이사였고, 선린촌 최문환 목사는 경기노회 파송 이사였다. 이사회가 다각적으로 해결책을 모색중에 있을 때, 우선 교단적으로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고 안정시켜야겠다는 의견들이 많았으나 막막했다.

이때 최문환 목사와 나는 뜻이 같았기 때문에 학장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어느날 밤 학장 공관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온 것은 이사회가 보낸 것이 아니고 다만 이 문제의 확대를 막고 수습하려면 학장님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왔다는 뜻을 밝히고 나서 나는 이렇게 간청드렸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학감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소란이 계속 확대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때 학장님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처럼, ‘내게는 책임이 없다. 학장의 도장을 학감이 가지고 저지른 일이니 학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해명서만 내신다면 그 결과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될 줄 압니다. 정부나 사회에서 우두머리들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사례가 많이 있으니 이번 사건에 학장님이 도의적인 책임을 져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우리 교단 안에서는 문제삼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학감의 잘못은 법대로 사무적으로 처리가 될 것이요, 교단적 소란은 진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우리가 찾아뵌 것입니다.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결국 고개를 가로 저으시면서 “그렇게는 할 수 없소!”라고 침통한 표정으로 잘라 말씀하셨다. 이때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저는 아버지와 형님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인격이 소중했기 때문에 목사님이 서는 곳에 함께 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문제의 도의적인 책임을 거부하신다면 저는 오늘부터 목사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직선적인 고언(苦言)을 당돌하게 드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를 드린 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공관을 나섰다.

얼마 후에 나는 조선출 목사가 청주제일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간다고 들었다. 나는 조 목사를 만나 “당신이 강단에 서서 화해의 복음을 증거해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가기 전에, 장공을 찾아가서 그간의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해소하시오. 그래야 화해의 복음을 자신있게 증거할 수 있지 않겠소!”하고 권유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공이 맹장염 치료차 적십자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김정준, 조선출을 불러 “그때 내가 너무 소심하고 옹졸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나서지 못해서 더 큰 고통을 겪게 한 것을 많이 후회했소. 도리어 자기 변명의 해명서 내기에 급급했으니 부끄럽기 한이 없소. 마음에 두지 말고 용서해 주기를 바라오”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역시 장공은 목사 중의 목사란 생각을 했다.

나는 선친께서 목회중에 실수하셨을 때는 상대가 누구든 즉각 겸손히 사과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어렸을 때 나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나도 그랬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이는 없으나 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는 데는 시간을 끌지 않는 데 있었다.

나도 장공의 그 점을 높이 평가하며,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소탈하게 그리스도의 발자국만 꾸준히 따라 가시던 장공 선생님의 인격을 언제나 우러러보며 옷깃을 여미고 존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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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사건]은 제46회 총회 회의록 [부록 제1호] 한국신학대학 경리조사 처리에 관한 건 ☞ 44쪽 이하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