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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초기 조선신학원 시대의 장공 선생님 / 조향록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7 16:26
조회
1137

초기 조선신학원 시대의 장공 선생님

조향록 목사(증경총회장)

내가 장공(長空)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1940년 4월 9일 아침 9시였다.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 일층에 있는 조선신학원 교수실에서다. 고향 선배 이명하 형이 송창근 박사님을 통하여 장공 선생에게 나를 소개하였기 때문에 처음 인사를 드려도 생소하지 않았다. 신학원은 첫 학기가 개강이 되어 며칠이 지난 때여서 교수님들은 강의에 나가시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 분은 장공 선생밖에 없었다. 40대 초반이였던 선생은 머리를 빡빡 깎고 카키색 일본 국민복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나를 반가이 맞아주신다.

별 말씀도 없이 시험문제집 한 장을 주면서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답만을 쓰라고 하시더니 두틈한 영어 책 한두 권과 노트, 분필통을 들고 강의실로 가버리시는 것이다. 내가 시험지에 대답을 적어 넣는 한 시간 동안에도 한두 분 교수님이 별 말씀도 없이 교수실에 들렀다가 또 강의실로 가시는 것이다. 나는 곁눈을 팔 시간도 없이 그저 아는 데로 시험에 답만을 체워 넣었다. 장공선생이 강의를 끝내고 들어오셔서 내 시험지를 받으시고 잠시 밖에 나가라고 하신다.

함경도 두메 산골에서 자라 서울 구경도 처음인데 오자마자 시험을 치르고 밖에 나오니 4월 초순의 따사로운 햇살도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마당에 오가는 학생들은 학생이 아니라 모두 어른들이었다. 선생님보다도 나이 더 들어 보이는 어른들이었다. 한두 분은 허리조차 꾸부정한 늙은이같이 보였다. 신학생이니 그렇겠지 했으나 학교에 입학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분위기가 그렇게 활기차고 기뻐 보이지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오니 나를 교수실에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때 교수실에는 책상 세 개에 두 교수님만 계시고 한 분의 책상은 뒤에 있었다. 그 한분은 윤인구(尹仁駒) 원장님이셨는데 자리에 없었다. 장공 선생님은 나를 곁에 계신 선성님께 인사를 드리라 하시면서 소개해 주셨다. 그분이 규나이(宮內彰) 선생님이시다. 나는 그래도 일본 말을 잘못해서 그저 한두 마디로 일본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장공 선생은 입학이 허락되었다는 말씀과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해주셨다. 그밖에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왜 원장도 안 계신데 학생 입학을 허가하시는가? 더군다나 편입생인데도 그럴까? 그러나 교무실을 나와 승동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임시 기숙사로 쓰는 방에 들려 한두 분 학생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알아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장 윤인구 목사님은 개학도 채 되기 전에 정식으로 입학식도 못하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윤 목사님이 수일 후에 풀려 나와 4월 19일인가 아침 채플 시간에 입학식을 겸하여 예배 드리고 공부는 전같이 계속하였다. 장공 선생은 구약, 규나이 선생은 신약, 윤 원장님은 이론신학(교리, 교리사) 등으로 학과목을 나누어 가르쳤다. 학과목에 따랄 1, 2, 3학년생이 합반으로 강의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세분 선생님은 마치 초등학교 교사들처럼 하루에도 한 분이 두세 강의에 5, 6시간씩 맡아 교실을 들락날락하면서 가르치셨다. 불란서 혁명 후 불란서 학계에 백과사전파가 나왔듯이 세분 교수님들은 백과사전식 신학 교육을 담당하셨다. 그분들이 백과사전식 학자들이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평양신학교는 이미 문이 닫혔다. 당시 강습소 인가라도 받고 겨우 문을 연 한국 유일의 목사 양성기관인 조선신학원인데 단 한시간인들 결강이나 휴강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받은 정규 교육은 시골 4년 제 소학교와 일년에 한 달씩 공부시키는 성경 학원에서 5개월을 배운 것뿐이다. 성경을 거의 외다시피 알고 있었고 약간의 독서는 했다하나 학문을 제대로 받아들일 만한 기초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성경공부나 내가 믿은 예수 이해도 완전히 소박한 원시적 보수주의였다. 주의라고 붙일 수도 없는 소박한 이해였다. 그것이 철저한 내 믿음이기도 했다. 성경에 쓰여진 말씀이 바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거기에 쓰여진 역사의 사건과 인물들은 모두 그대로라고 믿었다.

그런데 장공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의문이 일어났다. 그분이 말은 강의가 구약 성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분은 이른바 성서 연구에 있어서 고등비평(high criticism)을 도입하여 성서 기록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추적하여 가면서 성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찾으려 했고 동시에 성서본문(the text)자체의 검증을 시도했다. (low criticim 不等批評). 말하자면 성서 연구의 학문적 접근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연구인데도 그때까지의 나는 내 자신이 배워 오고 알고 있고 믿어 온 성서의 믿음이 모래성처럼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위기감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저 배워보자는 욕망으로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리만큼 노트에 옮겨 놓고 저녁이면 머리 속에 새겨 넣으리만큼 복습했다. 의문이 더욱 깊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질문은 못했다. 그것은 내 성격 탓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른들 앞에서 머리를 쳐들고 다니지 못했고 묻는 말도 얼굴을 붉혀 겨우 한두 마디 대답하는 정도였다. 고향 교회 집사님이 내가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향록이는 두세 명이 모인 데서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목사가 되려 하는가라고 했다. 한 학기 공부가 거의 끝나게 되는데도 질문을 못했다.

그러나 그대로는 더 참을 수 없어 한번은 마음을 굳게 다져 먹고 말문을 열어 질문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정리된 내 논리를 펴서 질문을 드렸다고 생각했다. 장공 선생이 늘 하시는 태도 그대로 의자에 앉아 내 질문을 들으시고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좀 더 공부하고 나서 질문해” 하시고 또 강의를 계속하셨다. 나의 처음 질문이 막혀 버린 것도 그렇거니와 대답을 듣고나니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게 대답하신 장공 선생님이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대답하신 것만은 고마웠다.

그때 장공선생의 별명은 천지(天地)였다. 강의를 하시면서 학생을 쳐다보는 일이 없이 땅 한번, 하늘 한번 번갈아 쳐다보면서 강의하셨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더군다나 한 교실에 20명 정도의 학생들이 앉아 강의를 듣는데도 중간쯤 뒤로 앉은 학생들은 귀를 기울여도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낮은 음성이었다. 별로 웃는 일은 없으셨다. 때론 약간 유머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경우도 그 유머가 서툴러서 스스로 쑥스러워 하시기도 했다. 언젠가 짓궂은 학생(김반석 전도사)이 “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데 죽게 지으셨을까?” 라고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장공 선생은 가만히 앉으셨다가 통명스럽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이 잘 한 일이냐 나쁜 놈들이 죽지 않고 모두 오래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나”라고 대답을 하시고, 또 강의를 계속 하셨다.

그때 우리 학생들은 매일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을 장공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서울 시내에 계신 목사님들 중에서 강사로 오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으나 그 분들이 교회 일과 교단 일에 매여 결강을 하는 경우에는 거의 장공 선생이 자기 강의로서 쉰 시간을 채우셨다. 그래서 한 학기동안 장공 선생에게서 받은 강의는 시간으로 따진다면 한 교수에서 3년간 받을 강의 분량을 넘게 배운 셈이 된다. 그런데 나는 한 학기 동안 받은 강의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노트에 담아 그것을 암기할 정도까지 수록하고 나니 그제야 선생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학문에 입문하고 난 다음에 질문하는 것이지 그 전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뜻으로 이해했다. 학문에 있어서 질문이란 모르는 것을 물어 교사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고 보충하는 것이라는 진리다. 학문 수업에 있어서 질문다운 질문은 가르치는 이와 거의 비슷하게 같은 학문 수업의 도를 익혀 가는 사람끼리 나누는 학문에 관한 대화라는 경지다. 그러니 우선은 열심히 배워야 한다.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판단과 비평은 접어두고 배워야 한다.

제2 학기 공부는 참으로 재미가 났다. 성경을 보는 눈이 밝아지는 것 같고 성경을 읽어 그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스무 살 앳된 시골 청년이었다. 사실 내가 서울로 올라올 때는 ‘신학원 공부 분위기가 시원치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의 길을 걸을 것이다’ 라고 마음먹고 떠났다. 목사가 되어도 대학 공부를 마친 후에 신학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 연령으로 보아서도 처음 신학 공부가 제대로 이해되었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제2학기부터는 의문보다도 학문에 대한 갈망이 더 깊어졌다. 나이는 어렸어도 성경 본문은 신구약을 모두 외다시피 통달해 있었기 때문에 성경 연구에 대한 학문적 접근 방법이 무엇인가를 약간이라도 깨우치고 보니 그 때문에 배워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제 공부, 제 신학을 찾아가면서 배우는 공부가 되었다. 시험을 치르면 늘 좋은 성적이었다.

1학년을 끝내고 겨울방학을 고향에 가서 지낸 다음 새 학기에 서울로 다시 올라올 때 어머님이 선생님께 드리라고 하시면서 창란젖을 석유초롱 하나에 가득 담아 주셔서 장공 선생님께 갔다 드렸더니 퍽 반가워하셨다. 그 자리에서 장공 선생님은 “자네는 영어공부를 했으면 좋겠는데 영어 강습소라도 다니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셨다. 그때 서울에는 종로3가에서 비원 앞으로 가는 길가엔가 거기에 영어강습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닫혀버렸다. 나는 그때 1년간만이라도 영어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일생 후회하고 산다. 그때 신학원에서 장공선생이 히브리어를, 규나이 선생이 희랍어 초급 정도를 가르쳐주었다. 그 때문에 자기 스스로 사전을 찾아가면서 공부할 기초를 배웠다.

목회 생활에 쫓기는 몸이라 거의 잊어버렸던 희랍어도 크게 효력을 본 일이 있었다. 먼 후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신학교에 유학했을 때 돌연히 신약 교수가 학기말 시험에 요한 1서 1장을 희랍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해 내라는 것이었다. 동급생들이 모두 쩔쩔매고 근심이 태산 같았을 때다. 사전을 보고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성경 내용도 거의 알고 있었지만 문법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모를 단어는 사전을 찾아 쉽게 답안을 채울 수 있었다. 후에 그 교수님이 내 조선 신학원 성적표를 뒤적이다가 나를 보고 ‘희랍어 코스는 마쳤구먼’ 하면서 내가 희랍어 실력이나 있는 것처럼 표정을 짓던 일이 기억된다.

나는 장공 선생에게서 강의 같은 강의를 받은 것은 실상 일학년 한 해 동안이다. 2학년, 3학년도 거의 같은 교육과정이 진행되었지만 그 2년 동안 조선신학원과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환란과 파고가 위험도를 넘어서 분초를 다투어 생존 여부를 안고 씨름하던 때다. 성결교단과 대한구세군은 이미 총독부에 의하여 교회의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은 일본인들의 조종에 의하여 조선 기독교 혁신 교단으로 개명ㆍ합병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자 장․감 양 교단 내부에서 친일, 반일, 세력의 치열한 갈등과 내분이 불붙은 시기였다. 조선신학원도 제2학년 2학기는 감리교 신학교와 통합을 전제로 합동 교수를 시작하고 신학원마저 교수 학생 전원이 냉천동 감신 캠퍼스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2학기는 감신 학생들과 함께 합동 수업을 받았다.

그해 겨울 방학이 지나고 3학년 새 학기에 돌아와보니 조선신학원은 장공 선생 등에 의하여 정동에 있는 정동 일본인교회에서 개학한다고 하고, 당시 조선신학원 원장이셨던 윤인구 목사님은 혁신 교단의 교학국장을 겸하고 있었던 관계였는지는 모르나 감리교 신학교와 통합을 전재로 하여 냉천동 감신교에서 조선 신학원을 개학한다 했다. 학생들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에 크게 당황했다. 한쪽은 설립자 김영철 장로님과 김재준 교수를 주축으로, 한쪽으로는 당시 이사장 전필순 목사(당시 혁신교단총리)와 원장이신 윤인구 목사님을 주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신학 학생들은 두세 명을 제외하고 전원 장공 선생을 따라 정동 일본인 교회당에서 개학한 조선신학원으로 가버렸다. 냉천동 쪽에 남아 있던 두세 분은 윤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분이어서 잠시 그 쪽에 머물렀다가 모두 이쪽으로 합류했다. 나는 제3학년을 정동 교회당에서 공부를 마쳤다. 이 와중에서 나는 상급생이기도 하고 또 학생회장직을 맡게 되어 조선신학원이 당한 고난의 격랑 속에서 함께 참여하게 됐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큰 곤란은 먹을 양식이었다. 매일 먹을 양식은 모두 배급을 받아 살아가야 했다. 그 배급 양식의 분량이 정상적인 양식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기숙사 학생들은 인원수에 가감이 있어 살아갈 수 있으나 교수님들은 부족한 양식을 채울 방도가 없었다. 교수들이라 해도 일본인 목사님들은 어떻게 해서 살아가는데 장공 선생님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그때 다섯 명의 자녀들과 두 내외를 합한 7명의 대가족이었다. 자녀들은 모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을 때다.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을 것이 없는 때인데도 그중 한 끼는 죽을 쑤어서 먹어야 했다. 장공 선생님은 그전 해까지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시더니 그 해는 도시락이 없이 점심을 굶고 다니셨다. 언젠가 기숙사 학생들이 배급받은 쌀을 한두 말 따로 나누어 장공 선생님께 갔다 드렸더니 그것도 잠시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 사모님은 거의 굶고 지냈을 것이다.

겨울철에 선생님 댁에 들렀더니 사모님의 눈은 물론이고 당시 정신여자중학교에 다니시던 큰따님 정자 양의 손등도 얼어 터지고 부풀어올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을 굶어 죽지 않고 목숨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동급 동창생인 이춘우 장로와 고 박학수 군의 도움이었다. 이 군은 고향이 양주, 박 군은 파주여서 집에서 지은 농사에서 약간씩 양식을 나누어 선생님께 가져다 드려서 최악의 경우를 겨우 넘겼던 것으로 안다. 박 군은 후에 고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는 반일 운동 비밀 결사 건국 동맹에 가담하였다 잡혀 종로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던 끝에 8․15해방된 다음 날 출감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문에 시달려 해방된 조국 하늘을 하루도 나다니지 못하고 출감 열흘만에 가버렸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그 장례는 장공 선생이 집례했다. 그의 시신을 감장하신 분은 당시 여운형 선생을 모시고 계셨던 고 일가(一家) 김옹기 장로님이었다. 오랜 후에 고 일가 선생님과 옛날이야기를 서로 나누다가 박 군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일가 선생님은 그때에 처음 장공 선생을 만나셨다했다. 그후 그 두 분은 평생의 친구요 동지로서 뜻과 우정을 나누면서 사시다가 두 분 다 가셨다. 이 글을 쓰다보니 장공 선생님을 뵈옵고 그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아온 세월 50여년 간이라 지난 일들을 회상하니 책으로 엮어도 큰 책 한 권이 모자랄 것 같이 생각된다. 그래서 우선 짤막하게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던 시절 이야기를 약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