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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살아 계시는 분 / 신종선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8 11:14
조회
1231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살아 계시는 분

신종선(서울노회 공로목사)

나는 나의 은사 고 김재준 목사님이 그의 자서전 「범용기」에서 나를 기억해 주신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김목사님은 「범용기」에서(287쪽) 나를 “우수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과찬하시면서 나에 대한 기억의 한 토막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뱀을 함께 먹다

김재준 목사님이 신학교의 머리 아픈 문제로 속세를 떠나 잠시 광주 백운산 계곡 평심원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폭포에서 몸을 식히고 돌아오시는 길에 제법 큰 독사 한 마리를 때려잡았다. 마침 그때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평심원에서 수양 중에 있었는데 목사님이 때려잡은 그 독사를 가져다가 구워서 목사님을 대접하고 우리도 함께 먹었다. 사실 그 분은 평생 처음으로 뱀 고기를 대했으나 -그것도 자기가 때려잡은 것이었는데- 나의 권유에 못 이겨 잡수셨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별미였다”라고 감탄하여 마지 않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승에게 나의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간 나는 신학생으로서 소명의식이 없어 여러 번 심산유곡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몸부림쳤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번민을 다 들으신 목사님은 명쾌한 말씀으로 나에게 빛을 던져주셨다. 내 본위로 하나님을 불러내려는 것은 일종의 “영적 탐욕”이라는 것과, 소명감은 풀이 자라듯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자라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신학교에서 꾸역꾸역 공부하노라면 소명감을 언제인가 명약관화하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셨다. 나는 거기서 용기를 얻어 다시 신학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상이 스승의 나에 대한 회고였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밝혀둘 것이 있다. 사실 나는 광주 백련계곡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더욱 평심원에 들른 적도 없다. 물론 뱀을 요리하여 구어 스승을 대접한 일도 없다. 아마도 김 목사님이 약간 기억의 착오를 일으키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이 기억의 착오 속에서 깊은 은사의 정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분이 나를 한 제자로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정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추모하면 할수록 김 목사님은 나의 훌륭한 은사이셨다.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언제나 나는 그 분에게 상담하여 나의 소명감의 고민을 해결 받은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분은 나의 인생의 중요한 시절에 나를 가장 보람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신 은사이시었다. 비록 일종의 기억의 착오가 포함되어 있지만 보잘것없는 나를 우수한 지성의 소유자로 과찬하여 삶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내가 권하는 뱀 고기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받을 만큼 마음의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나를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게 해주셨던 것이다.

인생관의 수립

만일 내가 그분의 강의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나의 인생관을 수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부산 피난시절 한국신학대학이 남부민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을 때 거기서 일년 반 동안 공부하였다. 그때 김 목사님의 강의를 들은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과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서울에 수복하여 동자동 언덕에서 2년 반 동안 공부할 때 김 목사님의 강의를 여러 개 듣게 되었다. 그분은 그때 구약학 에서부터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특별히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왜 내 마음이 이렇게 불안한가?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은 죄라고 하였는데 죄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역사는 구원되는가? 이러한 깊은 인생의 문제로 고민하고 몸부림쳤다. 친구들에게 그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별로 시원한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나는 김 목사님의 인간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김 목사님은 그때 R. 니버의 인간학 Human Nature and Destiny를 교재로 강의를 하였다. 그분은 원저자 니버 이상으로 더 명료하게 진리를 파헤쳐 나갔다. 그때 그 강의의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았고 나의 인생의 문제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그분의 덕택으로 그 후 나는 니버의 인간학 책을 탐독했으며 E. 부룬너의 Man in Revolt를 비롯하여 베르자예프와 불트만의 인간학에 대한 책도 읽게 되었고, 키에르케고르의 책들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 나름대로 인간에 대한 나의 견해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나의 인생관의 기초를 닦아주신 은사이시다.

그 분의 설교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군목으로 입대하기 전까지 약 3년 동안 경동교회에 다녔다. 당시 경동교회에는 김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셨고 이상철 목사님이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주일날이 되면 으레 나는 아침 9시 경에 교회에 나아가 먼저 대학반에서 성서공부를 했다. 그때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있던 모 장로님이 대학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장로님은 영어원서로 공부를 지도했고 학생들은 20명 가까이 모였다.

대학 반이 끝나면 나는 곧 11시 예배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곤 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구름 떼 같이 모여들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휴전 직후여서 젊은이들의 마음이 그지없이 컬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당은 비좁고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천리교의 적산 건물 2층을 요리조리 넓혀서 대예배실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설교는 늘 조리정연 하였고 시종여일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부흥사처럼 폭포사가 내리 쏟는 것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매도하거나 웅변가처럼 바위를 깨뜨리는 것같이 외치는 사자후의 설교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설교는 대하(大河)같이 유유히 흐르다가 마침내 사람의 영혼을 진리의 대해(大海)로 인도하곤 하였다.

어떤 선배는 그분의 설교하는 태도를 “天地”라고 평하였다. 그분은 설교할 때 시선을 청중을 맞추지 않고 원고를 한번보고 천정을 한번보고 계속 그렇게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또 어떤 경동교회에 다니던 선배는 그분의 설교의 수준이 낮아져서 못마땅하다고 했다. 사실 경동교회가 옛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고자 했을 때 김 목사님의 설교의 초점이 대학생 중심에서 일반교인 중심으로 바뀐 적이 있었다. 나는 이런 모든 얘기를 귀 너머로 들으면서 꾸준히 경동교회에 나갔으며 그의 설교에 심취되었다. 그 분의 설교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TV의 화면처럼 나의 뇌리에 살아서 나를 사로잡고 있다.

나는 나의 설교가 전적으로 스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이 사람의 감정을 감동시키는 부흥설교를 하지 못한다. 또 바위를 때리고 깨뜨리는 것 같은 사자후의 웅변적 설교도 못한다. 나는 늘 나의 설교가 대하(大河)같이 유유히 흐르다가 급기야 사람들의 영혼을 대해(大海)에,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러한 설교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아직 스승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분은 아직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스승인 것이다.

삶의 자세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54년 5월 11일 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다. 이 날은 경기노회가 총회로부터 지시받은 김재준 목사 제명 처리안을 통과시키는 날이었다. 다시 말하면 김 목사님의 한 가닥 붙어 있는 머리가 날아가는 날이었다. 기라성 같은 한신 출신의 투사들이 감동적인 웅변과 호소와 읍소로 김 목사님의 제명을 저지했으나 결국 역불급, 수에 밀리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노회장이었던 원만한 한경직 목사가 통과시키지 못하는 것을 정치적 재능이 있는 부노회장 김필순 목사가 강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신학생으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한 선배가 김 목사님은 학장실에서 하루 종일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벼랑에 선 것과 진배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서예를 할 수 있는가? 맨 처음 나는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분의 삶의 자세였던 것이다. 그분은 아무리 긴박하고 목을 치는 일이 닥쳐와도 한 걸음 물러서서 정신을 가다듬어 대처하였다. 그분은 스스로 이 삶의 철학을 “공자보다는 노자를 관우 장비보다도 도연명(陶淵明)을 택하는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다.

그후 그 분의 유유자적하는 삶이 늘 내 가슴에 영상화되곤 하였다. 이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삶이었다. “人無遠慮, 必有近優”(원대한 생각이 없으면 눈앞에 근심이 있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김 목사님은 늘 보수주의를 넘어 진보하는 삶에로, 율법주의를 넘어 은혜 충만한 삶에로, 틀에 박힌 삶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나가시는 분이었다. 나는 늘 그분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늘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그분을 흠모하고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준 목사님은 하늘나라에 가신 지 벌써 오래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타계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내 마음 속 깊이에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나의 스승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