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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참 자유인으로 살고 가신 큰 스승 / 이해동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11 12:02
조회
1490

참 자유인으로 살고 가신 큰 스승

이해동(서울노회 원로목사)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며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도 그 축에 끼고 싶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외람되다고 허물할 분들이 많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 일에 뒤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른들이 많고 좋아하는 분들도 여럿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요?’ 하고 묻는다면 저는 단 일초도 머뭇거릴 필요 없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요’ 라고 답할 것입니다. 어쩌면 저와 똑 같은 대답을 할 사람들이 이 땅에는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신에서의 목사님을 통한 배움은 많은 제자들에게 공통된 사실일 것이고, 저는 목사님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었으며, 저희 내외가 받은 첫 아들의 이름을 목사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제 큰 놈 이름이 운주(雲柱)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구름기둥이 됩니다. 주(柱) 자가 저희 집안 항렬(行列) 자라고 말씀드렸더니 “구름기둥은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이 머무는 곳”이라는 설명을 붙여 雲柱라는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저의 평생의 목회와 삶의 질을 결정해 준 한빛교회에로의 부임도 사실은 목사님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64년 당시 인천지역에는 기장교회가 하나도 없었는데 저는 저보다 일 년여 전에 인천에 오셔서 산업전도를 시작하신 고 이국선 목사님의 부름을 받고 인천에 와서 기장교회 하나를 개척하기에 이르렀고, 7년여 동안 인천교회를 목회하다가 1970년 당시의 여러 가지 사회 정황변화에 따라 인천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변함없이 저를 아껴주시는 스승 김 목사님을 찾아뵙고 의논드렸더니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 후 목사님께서 이우정 선생님으로 하여금 문익환 목사님께 말하게 하여 마침내 1970년 3월에 제가 한빛교회에 부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한빛교회에 부임하여 1984년 6월까지 햇수로 15년, 만으로는 14년이 좀 넘도록 지나는 동한 저의 삶은 참으로 역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당이긴 하지만 땅을 사서 교회당을 건축하고, 사택을 마련하고, 교육관을 마련하는 등 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목회에 전념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은 손길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빛교회 자체를 몰아넣었고, 저 또한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두 번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저의 목회와 삶의 질과 외관이 성격지어진 것은 결국 제가 한빛교회 목사로 봉직한 때문이고, 저를 한빛교회로 가도록 하신 분은 사랑하는 저의 스승 김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렇듯 저는 목사님과는 떨어지거나 멀어질 수 없는 인연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킬 수 없었습니다. 임종뿐 아니라 1974년 캐나다로 이주하신 후 서신으로 밖에는 직접 뵌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해외생활을 정리하시고 귀국하신 것이 1983년 9월인데 저는 목사님께서 귀국하시기 한 달 전인 8월에 영국 버밍험의 쎌리옥 칼리지에 가게되었고, 이어서 84년 8월부터는 한빛교회를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독일 헷쎈-낫사우 주교회의 선교동역자로 라인-마인지방 한인교회를 1988년 8월까지 4년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74년부터 돌아가신 87년 1월 27일까지 14년여 동안 목사님과 저와는 공간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어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14년 동안에 직접 뵌 것은 제가 독일로 이주하기 위해 84년 6월에 일시 귀국했던 때 뵙고 떠난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참으로 죄스럽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목사님의 사랑 어린 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에게 끊임없이 보내 주신 편지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여기에 목사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몇 개의 편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1976년 성탄날에 제 아내 종옥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제가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이종옥 씨, 그동안 멀리서 實感 있는 위로도 드리지 못한 채로 소식만 傳聞하고 있었오이다. 海東 牧師 몸에는 이상 없겠지요. 이 추운 겨울을 어찌 지내나 싶어 맘 조리고 있소이다.
갈릴리에서 예수님 만나는 즐거움과 영광이 축복과 위로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自由와 解放, 平安과 正義의 해 되기를 祝願하며 또 한 해 挫折 없는 健鬪를 기대합니다
 1976, 성탄날 김 재 준

귀국하신 다음달인 1983년 10월 23일자의 영국에 있는 저에게 내리신 편지입니다. 자상하시고 따스한 정이 묻어있고, 10년만의 귀국소감이 베어 있습니다.

李海東 牧師 惠鑑 1983년 10년 6일에 부친 畢函을 接承했습니다. 너무 오래 苦海에 難航을 계속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조금 바람이라도 쐬라고 海外에 보내신 줄 믿습니다. 건강을 충분히 회복하시고 그동안에 기회가 차단되었던 見聞도 넓히고 氣分을 새롭게 하여 再出發하시길 원합니다. 語學관계가 不自由하다지만, 智慧는 반드시 전해지는 知識에만 依存하는 것이 아니니 그리 걱정할 것이 없는 줄 압니다. 旅行코오스에서도 제6감으로 印象되는 지혜가 많을 것이고 牧會 실제에서도 많은 示唆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에 가장 유익한 冊들을 講師들에게 물어봐서 많이 사 갖고 오면 두고두고 꾸준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歸國한 후 첫 주일에는 松岩교회에서, 둘째 주일에는 京東교회에서, 셋째 주일인 오늘(10월 23일)은 한빛교회에서 禮拜했습니다. 교인들의 奉仕태도도 진실했고 설교도 좋았습니다. 김성재 목사가 설교했습니다. 나는 그런 대로 건강을 보전하고 있으며 老妻도 비슷하고 환경정돈에 바쁘게 지냅니다.
여기 저기서 오라는 데도 많고 일부러 이 白雲臺 밑 居所까지 찾아주는 舊友들도 많아서 맘에 위로가 됩니다. 한신대 수원 Campus에도 가 봤고, 다음 주일에는 수원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본래 위장이 약하기 때문에 水土가 바뀌어서 그런지 캐나다 있을 때보다 좀 언짢기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즐겁고 故國山川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전에 비하여 간데 마다 森林이 울창하고 복잡은 하지만 교통망도 못 갈 데가 없어서 국토정리에는 큰 성과를 보이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서울 인구가 너무 많아서 어디가 어딘지 아직은 잘 몰라서 내 막내 며눌애가 착실한 비서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문목사님 가정에도 초대받아 갔었습니다.
여기는 丹楓이 들기 시작해서 今週末이나 來週에는 滿山紅葉일 것 같소이다. 어딘가 단풍구경을 가볼 생각도 간절합니다만, 건강이 어떨지 모르겠오이다. 부디 잘 마치고 좋은 열매를 거두시고 還鄕하시기를 빕니다.
10. 23. 空

歸國하신지 6개월쯤 지난 1984년 2월 29일자에 보내신 편지에 보면 그동안 여러 교회를 둘러보시고 느끼신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과 염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부만 소개합니다.

李海東 牧師! (前略)
나는 역시 기장 교회 全體를 맘에 새기고 있기 때문에 全國的으로 배려하지 않을 수 없오이다. 위선 長기간 사회, 국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무거운 구름으로 덮여져있었기에 교회도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몽롱한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먼저 Let the church be the church로 목표를 정했오이다. 교회까지도 物量主義, 出世主義 등에 잠긴다면 맛 잃은 소금이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受難의 榮光은 언제나 기억하면서 - 人間回復, 人間구원의 本職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十字架 없이 부활이 없고, 生命을 잃지 않고 生命을 얻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每事에 그리스도를 푯대로 바라보면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下略)
筆 長空

1986년 9월 1일자에 주신 편지에는 이미 목사님의 병환이 짙어있는 것을 실감케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자를 아끼고 위하는 포근함이 배어있습니다.

西獨 李海東 牧師 淸鑑 1986년 8월 23일의 貴函을 받고 기뻐합니다. 長空의 몸은 하느님의 돌보심과 全國 많은 同窓生, 친구, 同志들의 간곡한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셔서 지금은 많이 나아 가까운 데는 外出도 합니다. 어제는 캐나다에 移居하는 나의 次男 식구 5人이 一個月前에 나의 病苦를 걱정하여 여기까지 와서 나를 위로하고 歸伽했는데 내가 空港까지 나가 그들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別로 건강에 영향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하여 병원의 지시대로 거기서 주는 약들을 먹고 매일 주사도 맡고 몇 주일 지나면 병원 主治醫에게 가서 다시 체킹도 하곤 합니다. 원래 完快하는 병은 아니라지만 糖尿는 完全히 無糖으로 계속되고 血糖은 음식에 따라 오르고 내리고 하지만, 거의가 正常線을 넘지 않으니 그리 염려들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독일 생활에 익숙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不遠에 自然스럽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미 시작했으니 主님이 보내신 宣敎者임을 自覺하고 初代선교사들처럼 고생과 精誠을 계속하셔야 할 것입니다. 子女들이 다 영리하고 착하니 독일유학생으로 學業을 完遂大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그것만으로도 큰 滯獨意味를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부디 健鬪하시다가 主님이 돌려보내시는 때에 다시 本國에서 聖役에 공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늘 소식 주시기를 바랍니다.
長空

목사님은 언제나 제가 올린 상서(上書)에 答信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제게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목사님의 친필을 마지막으로 봉독한 것이 1986년 연말이었습니다. 召天되시기 40일전인 1986년 12월 18일자에 쓰신 편지였습니다. 저는 이 하서를 봉견(奉見)하고 상서치 못한 채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 만 것입니다. 참으로 죄스럽고 씻지 못할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한 달 후인 1987년 2월 28일에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와 추모강연회가 당시 제가 시무하던 라인-마인지방 한인교회(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재독한신동문회, 재독한인교회협의회, 기독교민주동지회(유럽지부)가 연합으로 주최하였습니다. 사회는 박명철 목사가, 기도는 김원배 목사, 성경봉독은 김윤옥 선생, 설교는 제가, 약력보고는 신흥섭 목사, 임종예배 후 영결식까지의 보고는 손규태 목사, 조사는 함석헌 선생의 조사를 남정우 목사가 대독, 조가는 프랑크푸르트교회 성가대와 조병옥 선생의 부인이 작곡한 문익환 목사의 옥중시, 그리고 제 딸아이 이수연이 ‘꽃상여 타고’를 불렀고, 운명하시기 불과 일주일전인 1987년 1월 19일에 함석헌 선생과 두 분이 함께 발표한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박창빈 목사가 읽었고, 인사말은 제가, 축도는 손규태 목사가 했습니다. 그리고 추모강연은 ‘장공의 신학사상과 한국교회운동’이라는 주제로 채수일 목사와 ‘장공의 사회운동과 해외운동의 과제’ 라는 주제로 박병철 목사가 담당하였습니다. 비록 조촐했으나 매우 충실하고 뜻 있는 추모행사였습니다.

이제 저는 당시 추모예배 때 했던 설교 가운데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큰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제가 이해하는 그 분이 어떤 분이셨나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렵니다.

“…저는 지난 1월 28일 김 목사님의 서거 소식을 듣는 순간 앗차 하는 깊은 뉘우침과 죄스러움으로 몸과 마음이 떨렸습니다. 지난 연초 한국의 한 친지의 서신을 통해 김 목사님께서 3개월밖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시기 전에 上書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했었으나 끝내 上書치 못한 체 서거 소식을 듣고 나니 풀지 못할 한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저는 확신합니다. 아니, 저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저와 같은 확신을 가지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평생을 오직 주의 종으로, 주의 뜻만을 쫓아, 티 없이 맑게, 굽힘없이 곧게, 꺾임 없이 꿋꿋이, 끊임없이 줄기차게, 신명을 다해 사신 분이라는 것을, 그러기에 그분이야말로 이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김 목사님의 외모야 결코 출중한 편이 못됩니다, 왜소한 체구를 지니셨고 말씀도 유창하신 편은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속사람은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넓고 높푸른 허허 장공(長空)이셨습니다. 사람을 대하시는 그 분의 마음결 젖먹이의 살결처럼 부드러우셨지만 하느님의 진실을 향한 그분의 뜻 강철같이 굳으신 분이셨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 분의 선하고 바른 뜻 굽게 하거나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평생동안 다만 주님의 뜻을 따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시며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매여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타고난 자유인이셨습니다. 그분이 매였다면 오직 주님께 매이고, 정의에 매이고, 진실에 매이고, 사랑에 매이고, 자유에 매여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타고난 자유인이셨습니다. 자유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예’ 할 자유는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에게나 ‘예’ 할 자유는 넘치도록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물들이 모두들 겁먹고 ‘아니오’를 하지 못하는 때, 그분만은, 고 장공 김재준 목사님님만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아니오’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스스로 쟁취하고 유감없이 누리고 가신 우리의 큰 스승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