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고 / 김윤옥, 김은희, 나선정, 박계자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25 11:08
조회
566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고
- 여제자들의 좌담 -



: 1994. 3. 14. 오후 6시
: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 회의실
사회 : 김윤옥(제24회 졸업.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장)
참석 :
김은희 (제16회, 선린교회 장로)
나선정 (제20회, 기장여신도회 회장)
박계자 (제27회, 기장여신도회 총무)


사회자 : 우리가 존경하던 김재준 목사님이 가신지도 벌써 7년째가 됩니다. 우리 모교가 펴내는 「세계와 선교」지가 여 제자들의 회고담을 좌담 형식으로 꾸미기를 원해서 이렇게 우리가 모였지요. 사실 여제자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손쉽게 연락이 닿는 사람들을 모으다 보니 우리가 맡게 된 줄 압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도적인 어른이셨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우리가 회담을 펼쳐 본다는 것은 외람된 점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학생시절이나 우리 인생에 크게 영향받았던 소박한 이야기를 회상해 봄으로써 그분의 따뜻했던 사람됨이나 역사를 바꿔 나가시던 기백의 배후 이야기가 되살아날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선 김은희 선배님,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1] 학창시절 기억


김은희 : 저는 부산에서 입학을 했어요. 그 당시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김재준 목사님이 어떻게 생긴 분이시고 어떤 말을 했고 등등의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흥분했지요. 입학 면접 시간에 떨면서 목사님을 처음 만났는데 보니까 키도 자그마하고 목소리도 작고, 어쩌다 한번 책상 위를 보시고 뭐 쓰시다가 하면서 사람은 한 번도 안 보셔요. 그래 나를 전혀 안 보신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물어보실 것 물어보셨어요. 나중에 강의실에서도 우리는 안 보시고 천장하고 마루만 보시고 강의하셨죠.


사회자 :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목사님 별명을 “천지”라고 했어요(웃음)


박계자 : 그럼 김은희 선배 당시는 목사님이 참 젊으셨겠어요?


김은희 : 그래요. 그래요 아마 40대였을 거예요.


박계자 : 야아, 젊은 목사님이네요…


나선정 : 지금 살아 계신다면 94세지요. 1901년생이시니까.


사회자 : 그러고 보니 아직도 살아 계실 수 있었는데… 참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 김은희 선배 당시는 몇 년도입니까?


김은희 : 52년도입니다. 나의 학창시절은 그분이 53년도 새 교단 출범 이후 온갖 정열을 기울이시던 시절을 본 거지요 50대 초반의 한창때의 목사님이셨지요.
우리는 그 당시 김재준 목사님의 설교를 먹고사는 사람들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와 강의를 들으려고 구름같이 모였어요. 그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 서울대 교수, 이대 교수 등 유명한 학자들이 많았지요. 그 분은 그러니까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이었어요.


사회자 : 저의 학창시절의 기억도 그때가 1960년대인데 목사님은 카리스마와 상징적 존재로 유명하셨어요. 그럼 나선정 선배는 어떤 기억이 있으세요?


나선정 : 저는 58년경에 입학했어요. 그때는 동숭동에서 수유리로 막 옮겼을 때인데 목사님이 학장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강의시간은 우리에게 많이 할당되지 않았죠 그런데 정말 강의시간에는 하늘 쳐다보시고 손에 드신 안경을 내려다보시고 우리는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지금도 “김재준 목사님 강의는 기침까지 받아써야 한다”라고 말하지요. 그렇게도 좋았던 생각이 남아 있어요.
한번은 학장님 댁으로 찾아간 적이 있는데 목사님이 “콩나물 먹어봤니?” 하고 물으셨어요. “예 요즘은 콩나물만 먹어요” 하니까 “너희들 콩나물신학을 해야 해. 콩나물은 물을 주면 빠지지. 그래도 그 콩나물은 자라거든. 너희도 나가서 일하노라면 ‘내가 이런 일 할 것인가’ 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콩나물 생각하고 물은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하시는 거예요. 저는 정말 김재준 목사님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긍지를 가지게 되는지 몰라요. 생각나세요. 김은희 선배님? 우리가 이우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만우절 날?


김은희 : 그래 그래 거짓말해서 모두 속았었지….


나선정 : 그때 김분옥을 시켜서 교수님댁을 다 돌게 했는데 내가 있던 기숙사 5동 1호실에서 보니까 교수님들이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는 숨어서 킥킥 웃으며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 목사님은 제일 마지막에 오시는 거예요. 안경을 이렇게 내려쓰시고 이렇게 건너다 보면서, 침착하시게 오시는데 글쎄 이우정 선생님이 나와서 마중하셨지요. 우리가 개구쟁이였어. 그뿐인가, 개교기념일에는 목사님에게 여자 옷을 입혀드리고 킷킷 웃어도 목사님은 다 받아주시고 우리와 함께 친교시간을 가져주셨어요. 그저 방긋이 웃으시면서 거부도 안 하시고…


김은희 : 우리는 그래서 가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 말을 주고받았어요. 예수님하고 비슷한 분이라는 인상이 참 강했지요.


[2] 인간적인 목사님


사회자 : 그래요 그래서 어떤 중학교 교장은 “나는 예수님을 잘 모르나 김재준 목사님이 믿으시니까 나도 믿는다”고 했대요. 이제 자연스럽게 인간미 넘치시던 목사님의 회고로 넘어가 볼까요?
제 경험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저는 다른 대학을 다녔던 사람인데 한신에 와서야 교수님들을 통해서 지식과 인격이 함께 전달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일 때, 목사님은 학장을 그만두시고 설교학이나 목회학을 가르쳐 주셨는데 목회학은 지금도 저에게 인간이해와 신학의 관계를 쉽게 파악하게 해 주었던 과목이었어요. 저는 학문보다 사실 한신에서는 인간됨을 배웠다고 생각됩니다.


김은희 : 등산 가지 않았어요? 수유리 뒷산에… 목사님은 등산을 좋아하셔서 늘 학생들을 몇명 데리고 등산 다니셨지요. 나는 직원이었는데 등산 갔던 일이 참 기억에 남아요.


사회자 : 백운대를 참 좋아하셨지요?


나선정 : 그러니까 사색 시간이었을 거예요. 조병옥 박사 묘소나 깔멜 수녀원쪽으로 시간만 나시면 산책 다니셨지요. 말 수도 별로 없으시고, 우리들이 재잘거리고.


박계자 : 저는 선배님들보다 훨씬 뒤에 들어왔어요. 그때 목사님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기독교입문,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기독교와 토착화, 목회학… 그런 거지요. 기독교입문 첫 시간에 들어갔는데 칠판에다 목사님이 “신학=인간학”이라고 쓰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 얼마나 충격 받았는지 몰라요. 목사님은 이어서 성육신을 이야기하시고… 아까 말대로 ‘천지’ 보시면서 말씀도 조그맣게 하시고, 선배들이 무조건 베껴 쓰라고 해서 열심히 베껴 쓰고 했어요.


나선정 : 기침까지 받아써야지….(웃음)


김은희 : 인간적이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목사님은 안 보시는 것 같아도 다 보시고 그 사람의 사정을 다 파악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절대로 사람들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목사님은 ‘그래도 말이야 그 사람은 이런 저런 점은 참 좋은 점이야’ 하시며 꼭 좋은 능력 있는 점을 이야기하시거든 그뿐 아니지 교수회에서 쫓겨날 뻔한 학생들이 목사님 때문에 구원받은 적이 한 두 번인가? 언제나 목사님은 교육자답게 학생들의 앞날을 열어 주시고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어요.


[3] 영향받은 신학, 신앙


사회자 : 그래요. 저도 그 에피소드는 아는데 지금 우리 교단의 유명하신 지도자급 목사님들이 김재준 목사님 덕에 구제된 분들이 많지요(웃음). 그러한 스승에게서 아마도 목회자의 심성을 많이 배우게 되었을 겁니다. 이제는 목사님에게서 영향받게 된 신학이나 신앙문제로 넘어가 볼까요?
제 이야기부터 하려면, 저는 목사님의 삶을 통해서 살아 있는 신학을 터득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몸은 작고 조용한 분이신 데 큰 나무였어요. 세속적인 이야기, 보통사람의 이미지인데 거기에 신학과 신앙의 진수가 있는 것을 감지했어요. 그래서 정말 저는 목사님 덕분에 다이아몬드 같이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3대째 기독교인 집안 출신인데 한신에서 목사님을 졸업 안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박계자 : 그래요, 저도 향린교회 시절이나 미국에서 지냈을 때, 목사님 주변에서 목사님이 전혀 크게 주장을 안 하셔도 역사를 바꾸어 놓으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 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셔요?” 하면 “이용당해도 역사만 바로 되면 된다”고 하시면서요.


나선정 :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눈으로 사람을 보시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사람을 보시니까요. 투시하는 것 같아요. 호가 그대로 장공이라, 무한한 하늘이지요.
이것은 내가 전해들은 이야긴 데요. 목사님이 제자들의 목회를 둘러보시러 어느 시골 교회에 가셨는데 그날 따라 그 교회 목사가 김 목사님이 쓰신 설교를 그대로 했대요. 그런데 김 목사님이 앉아서 들으니까 그렇게도 은혜롭더래요. 예배가 끝난 후 담임목사가 ‘하도 좋아서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그랬노라’고 하니까 목사님께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대요. 제자 목사가 무안하지 않게요.


김은희 : 글쎄, 나는 결혼한다고 보고하러 갔더니 목사님은 “장일조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다”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그때 그저 나를 격려하시는구나 했지만 그말이 나의 평생을 좌우하더군요. 자신감을 주고 말이지요. 언제나 목사님은 당신이 상대하시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를 아시고 그 말을 하시는 거였어요. 정말 진짜 목사님이셨어요.


나선정 : 보통 스승은 대학이 끝나면 끝나는데 목사님은 평생 스승인 것 같아요. 제가 여신도회 총무시절입니다. 참 어려운 시절이고 고민이 많은 때였는데 캐나다에 교환 프로그램으로 다녀왔을 적에 만나 뵈었어요. 돌아와서 잊고 사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쓰신 휘호 우편으로 온 거예요. 보니까 한시인데 그 뜻이 그 당시의 나의 상황에 대한 가르침이셨어요. 어찌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아무리 우겨쌈을 당해도 꿋꿋이 달려가는 뜻인데 그 당시의 고민스럽던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모릅니다.


사회자 :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독일에서 교민묵회를 할 때였어요. 목사님은 해외에 계실 때 독일의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요. 『범용기』에도 쓰셨지만요. 그런데 우리 교회 10주년 행사로 목사님을 모셨는데 그 행사를 치르시고 캐나다로 돌아가시더니 손규태, 김윤옥이라고 우리 두 사람 앞으로 휘호를 쓰셨는데요. 목회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길을 일러주시는 한시를 멋있게 써 보내셔서 지금도 우리집의 가보예요. 정말 투시력과 제자에 대한 사랑, 자기 몸이 병들었는데도 제자를 사랑하시느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에요. 한번은 우리가 크리스마스 카드에다가 바빠서 이름만 써서 보냈더니 나무래는 긴 편지를 보내셨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이름만 쓰는 인사도 있느냐, 그러면서 3장이나 되는 긴 편지로 섭섭함을 표현하시는 거예요.


박계자 : 그래요, 정말 그 편지… 처음부터 끝까지 젊고 힘찬 필치의 그 편지 말이지요. 우리 부부도 받았어요. 미국에서 『범용기』 출판 위해서 송금해 드리면 꼭 편지를 보내세요. ‘조수경․박계자 부부에게’ 이렇게 이름을 나란히 꼭 쓰시고 말이지요 그 많은 제자들이 편지 보낼 텐데 모두 꼭 회답을 정성어린 필치로 쓰셨어요.


김은희 : 약자다 싶은 제자들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더 관심 하시고 그 편에 서서 발언해 주시고….


사회자 : 그런 생활신앙, 생활신학을 우리가 영향받았지요. 그래서 지금도 목사님은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받은 이런 신학은 평생 버릴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의사집안이라 말하자면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지만 한신에서 목사님의 삶의 신학을 통해서 약한 자와의 연대, 편애신학, 해방신학을 터득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저의 평생을 영향준 것입니다. 목사님을 알게 된 후에 제가 읽던 세계문학 작품들,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거지요.


김은희 :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 노선의 제자들은 모두 그렇지요. 시끄럽지 않으나 역사를 바꾸고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면서 개혁해 나가고, 약자 편에 서고 강인하면서도 사랑이 있고…. (웃음) 정말이지 특수한 스타일의 사랑들인 것 같애. 그런데 목사님은 여성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사회자 : 제 경험으로는 제가 비교적 사랑을 받은 기회가 많았던 제자인데요 여자이기 때문에 시집가야 한다거나 여자니까 부엌일을 혼자 나가서 하라거나 그런 경험은 없어요. 제가 한신에 들어가니까 어떤 유명하신 교수님이 저더러 “윤옥이는 시집을 금방 가겠지” 하시는 거예요. 아예 시집갈 사람으로만 보는 거예요. ‘신학생이 아니라 시집가는 과정으로 들어 온 여학생이’ 그런 태도 말이지요. 저는 어머니와 약속해서 캐나다에 유학 가려고 왔는데 말이지요.(웃음) 그런데 김 목사님은 나에게 “복음서에 여자들이 많이 나오니 누가복음의 여성관을 써보지” 그랬어요. 해방적인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김은희 : 김 목사님은 능력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주의셨으니까. ‘능력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여성도 능력만 있으면 하는 거다’라고 인정하신 거죠 따님 공부시키신 것 보아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대하셨어요.


나선정 :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윤리를 배웠는데요. 그때의 가르침으로 제가 지금도 살아가는 것 같아요.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도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뼈대는 그때 목사님이 가르침이에요. 오늘도 우리의 행복을 이끌어 주시고 콩나물신학으로 꾸준하게 용기를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참 인간이란 참 길잡이를 바로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길도 달라지는 구나’ 싶어요.


사회자 : 그렇지요. 목사님은 상대방을 파악하셨으나 그 파악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었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한 파악이었지요.


나선정 : 바로 목회자상이지요


박계자 : 장공보다 흐르는 물 같으셔서 장해(長海)라고 해도 좋았어요. 다 품으시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시는 바다지요.


[4] 사모님에 대해서


사회자 : 여성문제가 나왔으니 사모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회고를 해야 되겠지요. 제 기억으로는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어요. 수유리에서 가까이 살았을 때는 사모님이 우리 집에 식칼을 드시고 김장을 도와주시러 오셨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아마 전날 밤 놀러갔을 때 김장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김은희 : 저는 사모님은 김재준 목사님의 강력한 보호자라고 봐요. 돈을 못 벌어 와도 청빈으로 보호했고 밤늦게 제자들, 여자들이 찾아와도 흔쾌히 대하시고 뒷소리 없었고… 목사님이 그랬어요. “우리 집 사람은 생전 달걀도 안 먹고 김치고 생선이 버리는 부분만 먹고 그런데 참 건강해.”


박계자 : 그렇지 달걀 안 잡수시니 얼마나 건강해.(웃음)


김은희 : 얼마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흔 몇 살이 되시도록 병도 없으시고 비만하지도 않고… 그분 이름이 장분녀인데 목사님이 사모님 이름으로 편지를 쓰신 적도 있어요.


나선정 : 사모님은 참 인격자였어요. 아마 사모님 집안이 옛날 상당한 양반 집안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떤 면으로는 도를 닦으신 분인 것 같고요. 목사님이 돈을 여유 있게 주신 것도 아니고 유학 가신 후에는 또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양식이 없어서 남이 걱정할까 봐서 빈 솥에 물을 부어서 불을 때서 연기를 내셨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요. 우리 같은 어린 제자들에게 꼭 경어를 쓰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지요.


김은희 : 목사님이 사모님의 인격에서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유학에서 돌아오시니까 목사님은 다른 현대적인 여성에게 갈 거다 각오하고 계시드랬잖아요. 사실 세상 적인 남편의 점수에서 보면 목사님은 낙제 점수인데도 사모님의 취향이 고상해서 당신이 거기서 가치를 캐내신 거지요.


[5] 만년의 목사님과 우리


사회자 : 우리가 목사님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자료는 밤을 새도 모자랄 거예요. 이제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만년의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목사님은 만년에 참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어요.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경흥이라는 함경북도에 있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독일에 오셨다가 스위스 북한 대사관에 가셔서 문제도 일으키셨는데… 그것은 모두가 통일을 위해서 누구를 이끄시고 북한에 다녀오심으로 터부를 깨보시겠다는 생각, 나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실행 하셨지만요. 그런 간절한 생각을 가지셨는데 결국 이루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지난 1992년 9월에 평양에 갔을 때, 목사님 영혼하고 대화하면서 다녔어요. ‘목사님 여기 보세요. 평양이 이렇게 크네요…’ 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통일에 관심 하는 것도 목사님 영향이 커요


나선정 : 그래요 통일에 대한 목사님의 움직임은 사실 세계적인 것이었지요.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하신 것이 다 그런 맥락이 아니겠어요? 나는 목사님이 지으신 찬송가 261장을 부를 때마다 목사님 생각이 나요. “하늘 씨앗이 되어…” 그 구절 말이지요.


김은희 : 씨앗이야. 우리는…


나선정 : “하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생명을 이어간다.” 그런 제자의 도를 우리는 다해야겠지요. 스승의 넓은 이해력, 넓은 사랑을 가지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고, 한신도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는 학교가 되어야겠지요. 현재 한신 교수님들은 김 목사님의 제자들이니 진일보하셔서 우리 한신 전통을 살리는 운동을 일으켜야지요.


사회자 : 옛말에 ‘제자는 스승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더 나은 인격자가 되어서 한신 교수의 전통을 흐리지 말고 그대로 세우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된 제자들은 약자와 연대하신 스승의 뜻을 받아서 여목사나 여교역자들의 문제에 이해있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되셨으면 싶습니다.


김은희 : 한 분 갖고 안되면 네 분이 모여 한 분 몫이라도 해야지요.


사회자 : ‘우리 기장 교단에 김 목사님 같은 큰 민족적 지도자가 없어서 야단이다’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요. 그런 말하는 사람들이, 저부터 김 목사님의 한창 활동하시던 나이에요. 이제는 우리 제자들이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데 너무나 부족하다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김은희 : 그래요. 큰 스승을 가진 행복한 여 제자들이지요.


사회자 : 그래요. ‘큰 스승을 가진 행복한 여 제자들이다’ 이것을 맺는 말로하고 이것으로 우리의 행복했던 목사님 회고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