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1769] 3ㆍ1 독립선언과 한국 歷史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2-27 08:40
조회
154

[1769] 3ㆍ1 독립선언과 한국 歷史


獨立이란 것은 “홀로 선다”는 뜻인데 거기에는 남에게 依存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主體性을 확립하는 것과가 함께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역사에 참된 의미에서 獨立性, 主體性(Self-identity) 이 있었느냐?


韓國史는 한국國家보다도 한국民族史가 더 근본적인 위치에 있다. 日帝때 李商在영감의 말씀이라고 전해진 데 의하면 한국이 한 “나라”로서의 역사는 없어졌지만, 그 民族으로서의 生命은 地下水가 되어 땅 속에서 汪洋한 大河를 이루어 흐르고 있다. 나는 그 물결소리를 듣는다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집권자가 學園의 숨은 소리, 민중의 소리를 들을 귀가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귀머거리 정치다. 듣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으니 보아도 보지 못하고 생각해도 자기 생각만 하고 판단해도 자기 판단 밖에 안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 말씀이라도 들릴 텐데 그런 신앙도 없으니 사면 절벽이다. 그러니까 獨裁밖에 모르게 된다. 그런 것은 主體性이라기 보다도 고집이라 하겠다.


한국의 政治史로서는 주체성을 자랑할 염치가 없다. 古代史는 차치하고 三國時代부터 보더라도? 고구려는 大國으로서 충분히 나라로서의 주체성을 발휘했었다. 부여족으로서 만주와 연해주를 판도로 中國과 一對一로 대결했다. 丸都에서 平壤으로 首都를 옮긴 다음에도 中國의 隨나라, 唐나라와 대결하여 그들의 침범을 물리치고 나라 威信을 드높였다. 그 당시에 만일 羅濟同盟에 고구려까지 합한 四國聯盟으로 한몸되어 唐에 대결하였더라면 조상 때, 夫餘族이 山東半島를 통하여 中原에 殷나라를 세우고 殷文化를 꽃피운 것과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 연합군이 中原의 사슴(鹿)을 잡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됨”의 큰 心臟과 넓은 비전과 통일된 지혜를 못가졌었기에 결국 신라는 죽을판 살판 唐과 合하여 동족인 고구려를 멸망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를 唐에 할양했다. 이때부터 한국의 주체성은 弱化一路를 걸었다.


고려조의 王建은 가장 정치가다운 임금이었지만, 그 末期에는 몽고족으로 中原을 정복한 원나라에 종속되었고 渤海(발해)는 만주 전체를 주름잡은 “海東盛國”이었지만, 만주족인 女眞에게 패망하였다.


李成桂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李王朝를 세웠지만 中國에 대하여 “臣”으로 自稱하고, 조공을 바치고, 李王朝를 세운 데 대하여 “天子”의 승인을 받으려고 忠誠을 서약하였다. 지금의 독립문은 기전에는 “迎恩門”이었다.


中國勒使를 맞이하는 문이란 말인데 우리 王朝는 중국天子의 베푸는 은혜로 존속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라 자체가 종속국이었으니 완전한 主體國家랄 수가 없었고 民族도 종속민족으로 生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나라의 主體性에 충성한다는 것보다도 어느 큰 세력에 종속하여 개인이나 家門의 出世를 누리려는 분위기가 一般 士大夫나 국민심리 가운데 누룩같이 배여들어 발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韓末개화운동을 계기로 世界的 폭풍이 한반도에서 회리바람을 일으켜 露, 淸, 日 세나라의 각축장이 되었고 결국 勝者인 日本에 合邦되고 말았다.


1919년 3.1 운동은 우리민족의 自主性과 우리나라의 독립성, 즉 주체성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었다. 이것은 전민족적 선언이었고 전민족적 운동이었다. 日警에게 백만단위의 同族이 학살되었다. 日帝가 만주를 먹고 中國本土를 침략하였을 때 世界는 궐기하여 침략자를 응징했다.


日本은 敗亡했다. 무조건 항복했다. 한국은 1945년. 8.15.에 해방되었다. 그러나 허리가 잘렸다. 美ㆍ소가 각기 한토막씩 가졌다. 실질상, 우리나라는 종속국으로 환원되었다. 우리는 지금 독립된 것이 아니고 독립하려고 전진하는 상태에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진행형이고 Period가 아니다. 우리민족에게 진짜 독립정신이 옛날부터 불붙고 있었다면 벌써 불을 뿜으며 터졌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있었더라도 지금쯤은 탈출구가 마련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집권당국에서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현혹시키고 생각을 통제하고 국민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폭발직전의 활화산 위에서 춤추는 것과 같이 무모한 장난이라 하겠다.


경제적으로도 예속경제다. 국산경제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 도약대는 마련된 것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런데 국민과 관공리가 아직까지도 外來品을 무조건 좋아하고 호화주택과 사치와 향락을 행복으로 여기며 거만하다. 이런 것은 역시 주체성 상실에 따르는 노예근성의 발로라 하겠다. 이것은 正義없는 경제 제일주의가 낳은 멸망의 자식이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가 정부에서 내어건 표어였다. 잘 산다는 것은 호화판으로 산다는 것인데 호화스런 물자가 없으니 외국에서 가져올 밖에 없고 화려한 외국물자가 정상절차로서는 수입될 가망이 없으니 밀수입해야 하고 밀수입하려니 뇌물정책을 써야 한다. 얼마 그러는 동안에 그것이 상습이 되어 “免而無恥”가 된다. 경제정의는 간곳 없고 不正부패가 “지혜”로 가장되고, 어떤 不正이라도 발견만 안되면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고 당당해진다. 良心이 썩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3.1정신이 아니다. 3.1정신은 어디까지나 도의를 선양하고 폭력을 부정했으며 전세계에 도의적인 새 질서를 세우려 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해서까지도 무저항과 용서를 선포했다. 말하자면 무저항 불타협의 진리 투쟁을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정의없는 번영은 거름 무더기에서 나온 버섯과 같아서 그것이·건국이념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분히 기독교 윤리의 반영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의 부패상을 보라. 부재자 투표란 것과 전국구 의원이란 것은 집권자의 여의주(如意珠)여서 그것은 모조리 여당이다. 그 수가 과반수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른바 “안정세력”이 된다. 된다는 것보다 사전에 되어 있는 것이다. 부정부패 만능의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상 그 동안에 명성그룹사건, 정내혁사건, 장영자사건, 광명사건, 영동사건 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한 사건의 부정축재액이 전 국가예산액을 초과하는 거액이라는 것이었다. 3.1 정신의 “도의의 世界”는 완전 모독이었다. 그래서 4.19 전통을 이어받은 학생들이 일어나고, 경제부정에 희생된 노무자들이 일어나고, 민주정치회복의 민성이 地下水的인 흐름에서 地上으로 噴出했다.


인도의 간디는 우리보다 五年후에 인도 독립을 위하여 우리와 비슷한 불타협 비폭력의 眞理把持로 大英帝國에 맞섰다. 그래서 이겼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眞理는 있었으나 把持 - 즉 굳게 잡고 꾸준히 행진하는 底力이 부족했었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러서는 독재정권이 3.1 정신자체를 오염시키고 있다. 3.1 정신은 기독교회 사회참여 本流인데 지금의 교회는 그 예언자적 의무를 등한시하고 교회주의에 농성하려 한다. 우리는 임진왜란때 全國이 日本의 폭력침략에 짓밟히고 임금이 의주까지 쫓겨 갔던 것을 안다. 그 당시 불교 승려인 西山大師와 四溟堂 禪師가 僧兵大將으로 단연 전투에 나섰다. 우리 국민으로서 어느 유명하다는 大宗師보다도 西山과 四溟堂을 숭앙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역사의 격랑 속에 적극 투신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가 우리민족의 종교로 되기를 바라고 또 50년래 주장해왔다. 지금도 그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나라를 세운다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정치참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지금은 “밋쇼데이”의 신학이 세계적으로 공인되었고 책임사회의 전위부대가 기독교인임을 전 세계가 기대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적어도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최저선의 가치기준은 堅持해야 할 것이다. 교인이면서 그것도 못한다면 맛 잃은 소금 구실밖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교인의 역사참여를 이단시 한때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카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농민, 노무자, 학생, 근로소년, 소외된 출옥자, 그리고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등등에 전위역할을 담당하고 용감하게 뛰는 청장년이 많아졌다. 독재자는 눈에 가시같이 미워할 것이다. 그래서 분열시켜 개별격파하려고 광분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로 뭉쳐야 한다. 자기 교파 안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교피들과의 사이에서도 서로 하나같이 협동(協動) 해야 한다. 신앙과 생활의 정결과 성실, 대사회관심의 책임적인 의무감, 天國來臨의 길닦기 作業, 人間존엄의 회복과 앙양, 범세계적 사랑의 공동체 강화 등등의 역군으로 용감하게 봉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3.1 정신의 완성이고 동시에 그리스도교회로서의 本分의 중요한 항목이다. 최후의 一人, 최후에 一刻까지 변함없이 꾸준해야 한다. 생각컨대 33인 中에서 이 맹약을 지킨 분은 개혁불교의 萬海 韓龍雲 선사 한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日人의 폭력적 학살 행위에 희생된 분들은 우리민족의 民衆的 愛國운동으로 높이 榮光받을 때가 올 것이다.


적어도 교인은 두가닥 혀를 용납할 수 없다. 전술은 달라도 목적까지 위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양심이 심판할 것이고 歷史가 증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3.1 정신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① 독립 …… 남의 나라에 의존 또는 예속되지 않는다.


② 자주 …… 스스로 자기운명을 개척 발전하는 민족이 된다.


③ 자유 …… 양심적ㆍ사회적ㆍ민족적으로 시민자본자유를 되찾는다.


④ 그러나 세계 여러나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까지라도 共生하기 위한 운동 interdependant를 지향한다. 世界萬郭에 고하는 것이다.


⑤ 가치기준은 “힘”(폭력)이 아니고 도의라는 것, 이것은 정치이기 전에 진리운동이다. 따라서 종교운동이다.


⑥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하여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운다.


⑦ 새로운 민족혼의 탄생이다. 갓난애기의 외마디 울음소리가 “만세”였다.


⑧ 종교인임과 동시에 민족의 사람이요, 歷史의 책임자라는 의미에서 종교인의 폐쇄성이 극복되었다.


⑨ 당초부터 구체적인 설계도가 있은 것이 아니었다. 학생운동, 민중운동, 여성운동, 사회혁명, 국가혁명 등으로 분석되고 분업되고 총사령관 한사람 밑에서 작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발전 과정에서 때와 장소와 인물에 따라 자유와 독창으로 전개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가령 비폭력 불타협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일본토벌에는 독립군의 무력투쟁이 불가피했으되 무정부 분산세력으로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는 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재정이 필요하니 하와이, LA등지에서 자금내기에 몰두하였었다.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도 없을 수 없었다.


⑩ 이런 현상을 우리는 발전적 3.1 정신이요 3.1 운동의 계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3.1운동은 진행형이라고 한다. 그것이 원래 종교적이었고 종교인들이 주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기독교회는 발전되는 3.1 정신, 3.1운동의 육성자, 지원자, 혹은 기수 노릇을 할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에 추수감사절이 있는 것과 같이 3.1절 예배행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후손대대에 알리고 전해줘야 할 사적이 너무나 많고, 그 의로운 선열들의 이 땅에 쏟은 피가 너무 진하기 때문이다.


⑪ 우리민족은 오래 기억하는 습속이 부족하다. 건망증이 생긴다. 학원에서는 4.19를 잊지 않고 우리 국민의 독립, 자주, 자립, 민주를 잊지 않으려고 목숨을 희생하지만 일반시민은 될 수 있는대로 잊어버리려 한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잊지 않기 위하여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한국교회에서 3.1절, 전국에서 백만단위의 우리겨레가 학살된 이 3.1 순국자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Lest we Forget을 위하여 기념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의 3.1 기념일 모임에 경의를 표합니다.


태평교회에서 (1985. 3. 1.)


1985년 3월 5일(화) - 홍사단 본부의 초청에 따라, 3.1운동에 대하여 강연을 했다. 나는 흥사단원이 아니지만, 홍사단을 창설하신 도산선생을 존경한다. 그리고 흥사단원 중에는 나의 막역한 친구님들이 많다. 그래서 흥사단원이라면 나의 동지라고 믿고 대한다. 그들의 생활 좌우명인 務實, 力行, 信誼, 勇氣는 아무 데 내놓아도 진리라 하겠다.


나는 오늘 오전에 YMCA, 그룹집회실에서 열린 숭전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서 내가 쓴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란 拙稿(橋?)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내 논문평이 끝나자 중도에서 나와 오후 3시의 약속시간 안에 낙산 밑에 있는 흥사단 본부 집회실에 도착하여 내 의무를 이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