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0936] 의의 봉화 - 전태일님을 추도하며 / 1970년 11월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6-01 13:02
조회
1095

의의 봉화
– 전태일님을 추도하며(누가복음 4:16~19)


(1970년 11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이것이 선교자 예수의 첫 번째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 앞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 사회자에게 주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은 고루 잘살게 되는 일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기쁜 소식은 해방되는 일입니다. 눈먼 자에게 기쁜 소식은 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눌린 자에게 기쁜 소식은 자유 평등이 선포되는 일입니다.


이런 예수의 메시지를 기독교 사회에서는 추상적ㆍ관념적ㆍ정신적으로만 해석해서 가난이란 마음의 가난을 의미한다, 포로란 죄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눈먼 자란 어두워진 영혼의 눈을 의미한다, 눌린 자란 죽음의 공포 분위기 속에 떨면 사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뼈에 말라붙어 건장이 된 것 같은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이렇게 실생활과 유리된 정신적인 것이라면, 그분이 구태여 하늘에서 땅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몸으로 계셔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몸이란 인간을 구성한 모든 요소가 구상화한 것입니다. 인간이 몸으로 괴로우면 그것이 그대로 정신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가난에 시달려 그 야들야들한 어린 몸들이 먼지와 병균 속에 먹혀가는 줄 알면서도 죽지 못해 하루 몇 백원 임금으로 13시간 입술 깨물며 노동하는, 그 눈물겨운 실상을 못 본 체, 모르는 체하면서 정신적인 해방을 설교한다면 예수님이 옳게 여길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이 첫 메시지는 몸을 가진 인간의 현실적ㆍ물질적ㆍ사회적 관련에서의 선언입니다. 비인간화한 인간 군상의 비참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역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데 교회로서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고난당하는 인간들(suffering humanity)에게 파고들어 현실적인 사회 부정, 부패, 악랄한 인간 학대, 탐욕적인 착취 등 인간악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면서 그것을 회피하고 제자직을 자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주변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들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려고 온갖 힘을 다하다가 기진맥진 벽에 부딪혀 젊은 자기 몸을 횃불삼아 이 사회의 숨은 암흑을 고발한 고 전태일님의 번제단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할 염치가 없습니다. 인간의 피를 짜내어 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으로 내 탐욕을 채우고, 그 탐욕으로 인간성을 썩혀서 내 권력에 거름이 되게 하는 악령들에게 ‘아니다!’ 소리 한번 쳐보지 못한 교회인으로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참회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태일님의 죽음을 추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 빠져 무기력한 교회 자신을 추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옛날 예언자들도 다 그렇게 했는데, 천국은 그들이 상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의 사모하기를,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애타게 사모합니까? 사모하지는 못한다 해도 관심이라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의를 세우려면 불의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의에의 항거가 그대로 의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전태일님은 젊은 생명을 제물 삼아 이 부정, 불의, 부패, 탐욕, 인간 학대에 도전했습니다. 전태일님은 기독교 신자였고, 그의 부모님도 신자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의를 위한 삶의 폭발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더 큰 삶의 균열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산 자로서 그의 죽음을 예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몽매한 인간들이 그의 죽음의 의미까지도 왜곡시켜 죄인의 무덤에 인봉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그의 뜻이 사회에 알려지고, 그가 몸으로 심은 한 알의 밀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극진히 사랑하던 근로 대중의 비참이 경감되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포로 된 자에게 해방, 눌린 자에게 자유와 평등이 선포되고 성취되게 하기 위한 다짐입니다.


이것이 달성되기 전에는 가신 전태일님의 젊은 영혼이 편히 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 불타는 몸으로 통곡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