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0534] 정통과 이단 / 1962년 10월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30 09:56
조회
529

정통과 이단


《현대인 강좌》 4권(1962년 10월)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단어부터가 비위에 거슬려서 좀처럼 붓을 들 기분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역사적 현실이니 문제에 오르지 않을 수도 없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한 예수의 말씀,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자처하면서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고,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옥에 갇힌 자 등등에게 자기를 일치시킨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창세 이래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억천만 인간의 문젯거리를 온통 다 자신이 짊어지고 그 몸으로 제물삼아 십자가에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면서 “이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오니 이 사람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이 인간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절대절망의 경지에서 “다 이루었다!”며 외치고 그 영혼을 하늘에 돌린 그의 죽음!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그리스도인의 혼이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잘 믿든 못 믿든, 그리스도를 쳐다보며 사노라는 인간들을 산채로 장작개비 위에 구워 죽이고,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창으로, 칼로, 하룻밤에 수천을 학살하면서 그 피의 분수 앞에서 교회가 ‘감사의 미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심우(心友)라고 믿고 진지한 비판을 기다리며 보내온 신학 논문을 움켜쥔 채, 기습하여 그를 가두고 사형 언도에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뉘일 수 있겠는가? ‘인퀴지션(inquisition)’에 걸려, 토옥 속에서 썩은 인간의 수를 누가 세어 보기나 했을까? 이런 것들이 다 정통 옹호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죄악이고 보면, 그 정통이란 것을 덮어놓고 추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감정을 떠나, 우선 냉철한(?) 이성으로 대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정통주의’란 바른 전통을 수호, 전수한다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에 반대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하인리히 홀츠만의 정의에 따르면, “전통이란 유구한 과거를 현재에 연결하는 정신적 유대로서, 각 개인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고, 다만 역사적 관련성 안에서만 그 정신적인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과거의 유산을 밑천으로 하여 더 좋은 미래를 전취하려는 것이 현재의 인간 활동이라면 전통은 우리 문화 활동의 기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다른 동물과 공통되는 생물학적 전승 이외에 인간에게서만 가능한 문화의 전승과 창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각양의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유산들을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런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밀림의 나상들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는 그 전통이 더욱 빛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구약 수천 년의 독특한 ‘신계’, 그 율법과 예언자와 지자들의 삶과 가르침의 무비한 가치를 우리는 물려받았으며, 신인 예수의 인격과 사업, 사도 전승의 복음, 교부들의 교훈, 성서, 조직된 교회, 각 세대에 면면히 흘러넘치는 풍부한 신앙 경험에서 산출된 성문학(聖文學)들, 암흑을 뚫고 퍼진 세계 선교의 광화, 최근에 있어서는 사회, 국가, 국제 질서 안에서의 속량 사회 건설보 등 가장 고귀한 유산을 전해 받고 있다. 이런 유산들은 다만 무색투명한 철리(哲理)로서의 전승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의 호응으로 산출된 삶과 죽음 자체의 사건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맥박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니 전통을 보수한다는 것은 일반 문화인으로나 기독교인으로 잘못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정통’이란 단순한 전통만이 아니라, 정통 즉 ‘바른 전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바른’이라는 형용사의 권위를 누가 보장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벌어진다. 그 ‘바른 전통’이란 ‘바른 교리’, 늘 입에 오르내리는 소위 ‘건전한 교리(sound doctrine)’를 말한다.


말하자면 기독교를 해설하는 이론이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경우에 그 정사(正邪)를 판단할 표준적이요, 권위적이요, 판단 규준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어떤 ‘교리체계’가 있다고 인정함과 동시에 그 체계는 곧 자기들의 그것이라 하는 데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기독교적 계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어떤 내성과 통찰에서 오는 ‘철리(哲理)’를 앞세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삶으로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역사란 그 당시의 시간과 공간이 짜여 들어 구체화한 것이어서, 똑같은 사건을 반복시킬 수는 없다. 기독교가 오늘의 역사 안에서 우리의 삶에 바탕이 된다면, 그것은 2000년 전의 팔레스틴 역사 안에 짜여든 기록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역사적 상대주의에 안주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 역사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역사 안에 침입하는 역사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전체로서의 정신과 그 윤리의 대헌장을 발견하여 그것을 우리의 정통으로 삼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죄인, 하나하나의 무상한 인간들을 대신하여 자기가 죽음을 택한 그 지상의 사랑[아가페]과 그 사랑 안에서의 정의의 체형인 십자가의 형장을 우리는 예수의 기본정신이라고 본다. 어느 누구나 원칙적으로 이것을 부인할 크리스찬은 없을 것이다. 이 정신을 각각 다른 역사적 현실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응용하는 것이 그 시대의 크리스찬 생활규범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체적인 표현 형태는 그 역사적 정황의 차이에 따라 각양각색이므로, 문자주의(literalism)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런데 구교에서는 교권을 배경으로 한 법왕무오설에 의하여 자파의 교리체계, 후에는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절대화하여 이에 불응하는 신자를 이단으로 몰아 교권으로 탄압 살해하였으며, 신교에서는 개혁자들의 다음 세대부터 성서를 배경으로 한 성서문자무오설 또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여 역시 이에 이단을 말하는 자를 이단으로 몰아 핍박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인간성 안에 너무나 뿌리박고 있는 죄악성이 세속적으로 발동한 면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구교에서는 그 방대한 종교제국의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 통제의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요, 신교에서는 구교와의 쟁패전에서 구교의 권위에 못지않은, 자기들의 의존할 객관적 권위자를 소유하기 위하여 성서의 권위를 객관적ㆍ학문적으로 확립하려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 장난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는 비극이 계속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독일을 위시한 구미제국에서의 비판철학의 예리한 해부도와 각종 과학, 특히 역사과학의 강력한 탐조등 앞에서, 종래에 신성불가침의 문서였던 성서까지도 그 해부대 위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서, 그리고 교회까지도 그 거룩의 보자기 속에 숨겼던 기만을 백일하에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성서비판학, 즉 성서의 문학적, 역사적 비판이 학계의 주요 과제로 되어 이제는 그 업무가 거의 완수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성서는 오히려 그 참면목을 드러내고 신학은 다시 그 소재를 바로 찾게 되었다.


그러면 정통주의, 더 따져 말한다면, 정통주의 신학의 오점이 무엇이었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거짓 절대에 의존하려 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신앙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상숭배로 화해 버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신학체계란 그것이 아무리 완미(完美)하다 할지라도 상대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신학이 신학하는 사람의 주관과 지성의 차이에 좌우될 뿐 아니라, 그가 진공(眞空) 속에 사는 인간이 아닌 한,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 그 관련 윤곽을 이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학의 중요 자료인 성서 자체가 역사적인 기록인 데다가 그 사건들을 보는 눈, 해석하는 각도가 사람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그 해석 능력에 또한 각각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대적 성격인 그들의 ‘일종의 신학체계’를 마치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타고난 절대인 것처럼 내세우려는 데서 온갖 잘못이 생겨났으며, 그 잘못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데서 악랄한 수단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는, 특히 최대 교파인 장로교회의 초대 선교사 거의 전부가 열렬한 정통주의자들이었으므로, 새로 출발하는 한국 교회는 정통주의 신학의 왕국으로 세운다는 결의가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전 세계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풍미되던 시절에도 한국 교회만은 유효하게 ‘쇄국주의(쇄교주의라 할까?)’를 견지하여, 개교 50년을 통하여 무사히, 그리고 안전히 번영하게 그 우물 안에 개구리 격의 긍지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대전(大戰)에서 지축은 돌고 역사가 바뀌어 자유라는 문이 사방팔방으로 열려지는 바람에 각양 신학 사조는 이 진공점(眞空點)에서 강렬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는 산산이 뒤흔들려, 약간의 돈키호테식 호걸들, 공중을 날고 있는 신비군상, 부서진 문패의 파편들을 등에 지고 제각기 유산 분양에 광분하는 종파 싸움, 어지간히 충신인 근왕파(勤王派) 등 난무하고 있다. 여하간 소위 정통왕국은 깨어졌으며, 깨어져 가고 있다. 이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의 모든 인간적 약점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양심 한 구석, 또는 그 밑바닥 전체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는 순수한 정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무엇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 신념 자체가 자기기만, 자기만족 또한 맹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전적으로 기만적인 악당, 말하자면 흔히 우리 입에 오르는 악마 또는 마귀, 마귀당이라고 혹평한다면, 그것은 평자 자신의 무서운 교만이 범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완강한 정통주의는 정신을 물상화하며 생명을 고정화하여 정체와 독선과 자기류의 합리화를 조장한다. 이것은 문화의 폐색과 생명의 질식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에 있어서도 그 본원을 교리체계보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두고 그의 생명에 향응하여 세대를 창조하는 진실로 ‘산 종교’, ‘사는 종교’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은 정통과 이단을 함께 초극한 생명에의 접선인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도 어린 생명의 싹이 트고 그것이 고요히 그러나 힘차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긍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