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0132] 종교와 과학 / 1947년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30 09:49
조회
509

종교와 과학
(요한복음 18:37~38)


(1947년)


[1]


빌라도가 예수에게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고 물었을 때, “네가 말한 대로 내가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음성을 듣는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진리가 무어냐?” 하고 빌라도는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어냐?” 이것은 결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정치가이면서 철학자였습니다. 사실은 정치인일수록 철학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오히려 우리의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빌라도의 이 질문은 지금도 사람들이 모색하고 있는 숙제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전지하지 못한 한, 이에 대한 해답은 완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종합적인 해답을 시도한다면 대략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영적인 진리.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계시된 진리로서 하나님의 대언자인 예언자, 신비 영험자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진 진리라 하겠습니다. 신비적 영험, 직접 계시, 직관 또는 직감, 영감 등을 통하여 우리 영혼의 안테나에 감촉되는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감각적이어서 정확 무오를 주장하며, 진정한 실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식을 자부합니다. 종교적 진리, 또는 신앙의 진실이라고 합니다.


2) 감각적 진리. 감각을 통하여 얻은 사실의 진실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눈이 희다’ 하는 것이 감각을 통하여 얻은 사실이라면 ‘눈은 검다’ 하는 논리는 허위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의 진리, 실험의 진리로서 과학은 주로 이 영역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3) 이론적 진리. 이것은 이상의 두 진리를 이성으로 종합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철학적인 진리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감각을 통하여 경험한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절대자인 하나님의 직접 계시만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이성은 논리와 변증법 등을 통하여 진리의 어떤 체계를 구성합니다. 수학적 진리 같은 것은 감각을 통한 것도 아니며, 직접 계시로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 이성의 논리적 정당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진리의 3대 시스템이며, 모든 진리는 이 셋 중의 어느 하나에 계정될 것입니다.


[2]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란 것은 결국 어느 한 편이 모든 진리를 독점한 것으로 자부하고, 감정적으로 자기주장을 절대화함과 동시에 다른 한 편을 비진리로 규탄하는 데서 생긴 비극이라고 봅니다.


실험과학의 진리 체계를 유일한 진리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1) 초감각적 실재와 그 가치에는 전연 몰취미하게 됩니다. 초감각적인 세계란 비실재이거나 실재라 할지라도 ‘불가지’의 것이니만큼 비실재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런 것은 운위할 필요도 흥미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질과, 그와 인간과의 관계 등을 탐구하는 것은 미신이거나 낭비된 연구라는 것입니다. 종교, 신학 등이 잔존하기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장식용 골동품 같아서 한 취미로 허용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2) 그 대신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물리, 화학, 생물학, 그리고 그 상호 관계 등 감각적 현상의 연구, 그 관찰과 물질적인 실험에 의한 생활 도구들의 발명 등등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결국 지식이라면 자연과학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종교와 신학은 물론이고 철학까지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3) 철학계에 미친 영향으로 본다면, 실험적 귀납적인 결론을 진리로 상정하고 연역적인 것은 그것이 실험적인 결론과 부합하는 한도 안에서만 진리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10세기까지에는 실증적인 철학이 7.7%이던 것이 20세기(1900~1920년)에는 72%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4) 감각적인 진리는 불가피하게 유물론이 됩니다. 모든 물건은 그 물질 면에서 접촉이 가능하며 정신도 물질 현상의 부산물로 생각합니다. 유심론적 견해를 가진 분들은 물질계도 초감각적 실재에의 한 현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만, 유물론자는 그 정반대인 것뿐입니다. 인간의 의식, 문화세계까지 물질적, 기계적 행동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인간은 복잡한 원자, 전자의 배합체라 합니다. 그것은 반응하는 기계라 합니다. 심리는 자극과 반응의 관계라고 합니다. 소위 영적ㆍ정신적 운운하는 것은 무지와 미신의 소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5) 이런 감각 문화의 세계에서는 자연과 물질의 가치가 그 문명의 왕자를 점령합니다. 물질적 풍부, 세속적 만족, 감각적인 유틸리티와 쾌락 등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감각적인 것만이 진리라면 더 감각적일수록 더 진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이 감각 문명의 진전에서 거두는 진리의 성질은 어떤 것일까요?


(1) 일시적입니다. 감각의 세계는 주마등과 같이 변합니다. 활동사진과 같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 줄달음질치는 화면 가운데서 단말마적인 인상을 받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라거나 궁극의 목적이라거나 하는 데는 취미가 없습니다. 진보다, 진화다 합니다만 그 종국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났으니 할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감각의 세계가 아니고, 다만 현재만이 실재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오늘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2) 감각 중심의 진리는 상대적입니다. 오늘의 환경과 내일의 환경은 다릅니다. 오늘의 감각과 내일의 감각은 다릅니다. 그 정도와 평가도 다릅니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그 개인과 그 단체와 그 환경과 그 시간과 그 요소에 따라 그때그때에 작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상대주의입’니다. 이렇게 상대주의로만 나간다면 결국에는 회의, 냉소, 허무감 등으로 굴러갑니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감이나 진리 추구의 신경이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이 진리 체계에서는 모든 데에 개념화, 일반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가령 말[馬]이라 한다면 하나하나의 실재적인 ‘말’을 대상으로 관찰합니다. 개념화한 말, 사람 등은 비실재요, 개념적 공각(空殼)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세계는 갈수록 분산적이 되고 이론적인 것은 갈수록 빈약해집니다.


(4) 이것은 모든 것을 실리주의적으로 평가합니다. 실리적인 것이 진리입니다. 학교란 것도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특히 물질생활, 세속생활을 위하여 유용한 것을 연구 조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술자, 의사, 실업인, 법률가, 정치인, 교사, 설교자 등이 모두 실용적, 직업적인 데에 그 목적을 세우고 있습니다.


(5) 실용적이기 위해서는, 또는 실용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잘 고안되고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과학은 힘의 별명입니다. 이 ‘힘의 철학’이 도의를 대신하며 종교를 대신합니다. 힘이 곧 정의요, 도덕입니다. 그래서 히틀러, 스탈린, 군국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힘의 정치는 폭력과 침략으로 영광을 삼습니다.


[3]


종교적 진리란 하나님을 최고의 권위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뜻인 거룩한 사랑이 땅 위의 전 사회에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건국 대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 일꾼의 활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감, 초감관적, 초이성적인 신앙을 통하여 선포되는 진리입니다. 물적 현상에서 추출된 것이 아니라, ‘절대 타자’인 하나님의 계시에의 응답입니다.


무상한 세파 속에서 영원을 체득하며, 파멸의 운명에서 영생을 체험하며, 세기말적 퇴폐에서 신천지를 약속받고, 알파와 오메가가 일직선으로 연결된 역사의 종말을 보는 것입니다. 상대적, 일시적, 유물적, 실험적, 비인격적인 과학의 영역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비과학적 또는 초과학적이기 때문에 비진리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비진리라면 그것은 실리적 견지에서도 무용하고 유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리주의 철학의 태두인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경험론에서도 지적된 것과 같이 종교는 크게 유익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 전인격적인 봉헌을 스스로 요청할 만큼 강력한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수십억의 명철한 지성인과 가장 감수성이 강한 시인, 문학가들과 가장 실천적 이랄 수 있는 실업가, 정치인 등이 이른바 우부우부(愚夫愚婦)의 무리와 함께 이 종교적 진리에 만열을 느끼며 참 삶의 희열을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이란 신화의 울타리 속에 모든 진리를 유폐시킨다는 것은 현대인의 조잡한 속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감관과 이성과 직관을 공평하게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감관에 의거한 과학도 반드시 실험적 귀납적인 노력에서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직관에서 어떤 힌트를 얻어 그것을 실험실에서 귀납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과학의 어머니라는 수학적 진리는 이성에서 탄생한 직손(直孫)입니다.


숱한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졌지만 그것이 뉴턴의 이성적 탐구에 과제로 채택됐을 때에 비로소 ‘만유인력’의 진리가 발견되었습니다. 목욕탕에 몸을 담그면 그 몸이 저절로 뜬다는 것은 억년 묵은 일반화한 상식이었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이성에 부딪쳤을 때 비로소 중력의 진리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등잔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펜들럼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이와 같은 예의 하나입니다.


과학자는 진리에 대한 충성이 그 과학 활동의 동기가 되어 있는 것만큼, 그 태도와 감격 자체가 벌써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이 과학적 진리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경우, 그 신앙 자체가 완명(頑冥) 고루 해집니다. 철학이 종교적 신앙을 무시할 때, 그것은 이성지상주의가 되어 회의와 불가지론에 빠지고 더 나아가서는 허무의 공동(空洞) 속에 질식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셋은 서로 존경하여 보충할 것이요, 서로 배격하며 헐뜯을 것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현대 과학의 너무나 급속한 발달과 그 과도한 과학주의 때문에 생겨질 파멸을 우려하며 종교의 재건에 정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4]


지금 사람들은 이 과학이 낳은 무서운 기계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계를 움직인다는 것보다 기계가 사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방대한 물질문명을 통어할 인격과 도덕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 인류는 다시 원자탄의 위력에 눌리어 서로 불신하며 떨고 있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가 누구입니까 하며 호소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회개와 신생으로 새 인간 창조의 길을 걸읍시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와 나라가 아니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와 나라를 목표로 재출발합시다.


우리 조선에서는 실제로 과학은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 세계가 발산하는 사상적 경향만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훌륭한 현상이랄 수 없습니다. 과학은 과학대로 발달시키면서 그 과학의 세계를 철학으로 감싸고 종교로 순화하여 전 우주적인 구원의 왕업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