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1987년 1월 19일]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21-01-25 10:28
조회
368

[1987년 1월 19일]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시시각각으로 어둠 속으로 치닫는 정국을 보다 못해 우리는 한국의 늙은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 탄원합니다.


늙은이가 가진 것은 경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20세기의 첫 해에 나서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이씨 조선이 망하는 것도 보았고, 군국 일본이 패망하는 것도 보았고 제3세계 나라들이 군벌의 발호로 고난을 겪고 있는 것도 듣고 있고 핵우산을 펼쳐들고 세계의 모든 약소국을 못살게 하면서 무너져가는 대국가주의를 유지해보려 발버둥치는 미국이나 소련의 음모도 알고 있습니다. 노서지곡이라고 늙은 쥐가 곡식이 어디 있는지 아는 모양으로 비록 제1선에서 일하지는 못해도 우리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첫째 정부 당국에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여러분은 잘못 출발했습니다. 그 흔적을 아무리 없애려고 6개 성상을 지나면서 온갖 치장을 했어도 국민은 그때를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거기에 군국주의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전 정권(前 政權)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잘못입니다. 군인 조직은 상하질서가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극상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 그 기본질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군대라는 특수 집단에서는 가능해도 국민 사회를 그렇게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도 처음에는 개방정치를 표방했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꼭 군대 통치 방식만 남지 않았습니까! 정권 평화 교체를 크게 내세우지만 군인은 전진만을 알도록 훈련돼 왔습니다. 국민이 바라는 정권 교체란 군사정권의 종식을 뜻하지 그 안에서 사람만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어떤 방법으로 재집권한다 해도 국민은 더 이상 여러분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이 매일 같이 겉으로는 잔치 마당을 벌이고 뒤로는 그 잔인성을 연속하기 때문에 이 국민에게 분노만 팽창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김근태 씨 고문 사건에도 뉘우치지 않고 성고문을 자행하더니 급기야 고문치사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도덕적 양심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할 수 없거니와 고문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과 국민,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 앞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겠는지 깊이 생각하고 어떤 결의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국민과 나라가 살아남아야 당신들도 살아남지 국민과 나라가 살지 못하고 당신들이 사는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몸부림은 우리 민족의 몸부림으로 알기에 우리는 희생되는 여러분의 소식을 들을 적마다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혈기가 이성을 누르는 나이에는 안하무인으로 선생도, 심지어 부모도 없는 듯 스스로 오만하기 쉽습니다. 이런 자세는 이 사회가 명분이야 어떻든 수용하지 않습니다.


폭력에 지친 우리 국민은 폭력을 싫어합니다. 감정이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감정의 불길이 너무 치솟으면 도리어 도둑을 부르게 됩니다. 현재는 힘의 철학을 믿는 낡아빠진 대국가주의가 스스로 망하느라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때인데 여러분은 새 시대의 주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지성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의 옳고 그름은 국민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서 반응합니다. 심한 표현으로 국민을 잃고 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야당 여러분에게!


2ㆍ12 선거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말없는 국민이 얼마나 정확하게 볼 것을 보고 제대로 판단하는가를 백일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여러분에 대해 실망하는 걸 아셔요! 이번에 여러분을 대표로 뽑은 것은 권력을 누리라는 게 아니라, 오래 뺏긴 권리 되찾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감옥 생각하지 않고 그 대임을 영광으로 알고 나섰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 자리에 연연해서는 아무 것도 못해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계파니 자리다툼, 심지어는 분파 운동이 있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고도 국민의 심판에 견딜 줄 아나요. 여러분께 건 기대에 배신당하면 국민의 마음은 역전하여 여러분을 적으로 삼으리라는 것을 경고합니다. 여려분은 주권재민의 민주화를 이룩할 큰 책임이 있습니다. 민중 생존권을 확립하고 자주 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서야 하는 큰 사명이 있습니다.


군인들에게!


나라의 울타리인 군인들! 그대들은 민족 전체를 위해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사명이지 결코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분명히 할 일이 있어! 무자(武字)의 뜻은 무기(武)를 멈추게(止) 하자는 것입니다. 쓰지 말라는 것이 무기지 결고 쓰자는 무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만큼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일들이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런데 정치권력에 눈이 어두운 극소수의 군인들 때문에 여러분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사는 것은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튼튼한 전선을 위해서도 정치에 맛을 들인 군인은 다시 등장하지 말도록 여러분이 함께 단결해야 할 것입니다.


근로자와 기업주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먹여살리는 생산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경영주 없이는 그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업주와 공생(共生) 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여러분과 기업주가 함께 만들어내는 재산은 절대로 어느 개인이나 족벌의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생기는 재산이 어떻게 분쇄되어 의롭게 쓸 수 있도록 여러분이 깊이 간여하는 것은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이 정당한 권리를 방해하는 어떤 세력도 국민들과 함께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기업주들도 이러한 본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인의 것이라는 생각이나 오히려 내가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전 근대적인 착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건설을 위하여 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라는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씨알) 여러분!


우리는 이 이상 상전 모시는 종의 시대에 살지 맙시다. 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묘한 ‘프락치’ 정책으로 ‘정보국화(化)’ 하며 국민 운동을 통제하는 경찰을 ‘전투’ 경찰이라고 이름한 데서 보듯이 국민을 전투의 대상으로 아는 이 정부의 횡포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악의 뿌리가 문제입니다. 엉겅퀴에서 포도는 못 땁니다. 자유는 정의를 내포하며 질서는 자유와 정의를 전제합니다. 그러기에 국민 여러분밖에 이 나라를 바로잡을 힘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1987년 1월 19일
김재준, 함석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