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0526] 자유에의 헌사 - 이상주의는 고귀한 것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2-26 16:00
조회
25

[0526] 자유에의 헌사


이상주의는 고귀한 것
- 3ㆍ1정신의 비판에 대하여 -


우리가 어떤 정신을 비판한다는 것은 몹시 주관적인 것이어서 시비가 당장에 가려지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인간 관계에 얽힌 사건인 경우에는 함부로 평이나 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 같은 명언이라도 그의 할아버지가 직접 말씀한 것은 그 자손에게 더 깊은 애정으로 인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핀잔을 준다는 데는 깊은 지혜를 요한다. 3ㆍ1정신과 그 운동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은 전 민족의 순정에서 끓어 넘친 피의 기록이기 때문에 너무 대담한 평을 삼가야 한다. 거기에 오류라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현 세대의 각광 아래서 재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건설적이요 전승적일 것이다.


가령 S씨의 논한 바 「3ㆍ1운동은 실패했다」하는 것은 그 당시에 당장 독립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일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에 이 운동에 몸 던진 지사, 열사들은 독립이 당장에 된대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면면한 민족 생명 속에 우리의 피를 부어 넣어둔다.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선언하고 사라진다」하는 각오로 모험한 것이었다. 「파리」강화 회의에 대하여 아주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꼭 독립하리라고 기대하여 3ㆍ1 선언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사필귀정」이라는 말과 같은 일종의 장기적인 신념이었으며 하나의 종교적 당연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그것이 8ㆍ15에서 성과를 보았다고 믿는다. 한 민족의 생명의 혈맥은 결코 세대의 바램과 함께 무관련하게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3ㆍ1 때에 피로 심은 민족생명의 자주 독립이 8ㆍ15에서 싹텄다고 확신한다. 정말 실패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민족 대표자들 중에서 그 당시의 신념을 제대로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분들이 있었다는 사건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심은 피의 제물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는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정의에 의탁하느냐 힘에 의지하느냐의 문제다. 언제나 정치는 「파우워ㆍ폴리틱스」였던 것이다. 힘 없이 국가는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도의의 세계다. 미래는 역시 「힘」에서 「도의」에로 접근하고 있다. 「도의」를 무시한 「힘」이 서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반복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먹이 가깝다」는 것이 도의에 의하여 규제되지 않는다면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만으로 이론은 족할 것이다.


당시의 3ㆍ1운동자들이 「도의」를 무기로 삼았다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닌 줄 안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힘의 대결」을 시도할만한 아무 준비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부르짖었다는 데에 그들의 용기가 높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 편에서 폭력 혁명을 원칙으로 하고 나섰더라면 일제는 아무 마음의 불안도 없이 당연하게 섬멸 작전을 전개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원칙 아래서 우리가 거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패배자」란 딱지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3ㆍ1운동자들에게는 자랑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너희의 불의한 폭력에 죽는다. 그러나 우리의 도의적 정신은 죽지 않는다」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무저항적 항거의 문제다. 의병이 되든지 「게릴라」가 되든지 할 것이지 무저항적이 다 무어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저항적 항거야말로 참된 인격적 용기를 요하는 행동이다. 인도의 간디는 3ㆍ1운동자에 비하면 훨씬 후진이다. 그런데 그의 무저항적 항거 운동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인도 역사에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유산이 증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3ㆍ1운동과 그 이후에 무력 항쟁이 젊은 혈기를 솟구치게 한 사건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주에서의 어느 무력 항쟁 지도자는 부하에게 자기가 죽거든 머리를 베어 일군에 갖다 주고 그 대가를 받아 무기를 매입하라고 할만큼 절실 소박한 투쟁을 계속했었다. 우리는 그 당시의 물샐틈없는 일군 통제하에서의 무력항거란 그것이 「게릴라」전이라 할지라도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군비도 무기도 도저히 입수할 수 없었다. 이런 물리적 투쟁 방법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당연 궐기하여 삼엄한 정신적 - 오직 정신력으로서의 항거를 시도했다는 것은 역시 숭고한 용기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의 모 기자의 말에 「워싱턴」은 칼이 있었으므로 칼을 들고 싸웠고 「간디」는 칼이 없었으므로 칼없이 싸웠다고 한 것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간디」의 무저항적 항거는 다만 부득이한 궁여책만이 아니었을 것은 물론이다. 3ㆍ1운동에서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넷째로 너무 관대해서 일본에 대한 선언이나 요구라기보다도 하나의 「탄원」인 것 같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권리장전선언에 약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감인 것이다. 폭력의 시대가 도의의 시대로 접근한다 할지라도 도의는 과거를 불문에 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책임적 합리적으로 이를 처리하는 데서만 제대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독립 국가요 우리 민족이 자주 국민이란 대원칙만은 선언된 것이어서 극비리에 창졸한 가운데서 극히 단시일 내에 이를 작성해야 할 초조한 그 당시를 상상한다면 너무 완전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도리어 무리가 아닐까 싶다. 요컨대 현실주의의 시대라 하여 이상주의의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 우리의 자유와 독립은 우리가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 할지라도 전세계의 관계성 안에서 그것이 주어진다는 것, 우리의 성패 판정에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힘을 길러야 할 것이나 도의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것, 등등은 명심해야 할 점이 아닐까 한다. 三ㆍ一운동자들을 「부르주아」라 부를 것도 없다. 그들은 그런 계급을 의식한 바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지성으로서의 선각자로서 피로 이은 민족애의 순정에 불탄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들의 정열은 오히려 「종교적」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생명」 그것의 약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그런 것으로 받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거기에 현대의 첨단적인 「메스」를 가한다면 그 생명은 죽고 만다. 그러므로 분석적인 정치학적, 사회학적 역사 비판 또는 유물론적 역사 비판(이북)을 시도하기보다는 동정적인 설명에 착념하는 것이 더 많이 건설적일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