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글

[0364] “크리스찬의 평화” (1954.11)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2-20 18:47
조회
27

“크리스찬의 평화”
(요한복음 14:27, 마태복음 5:9)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이것은 누가복음 2:14에 있는 성탄의 날 천군 천사가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전한 기쁜 소식의 노래입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만난 인사할 때 ‘샬롬’합니다. 샬롬은 평안 또는 평화란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과 같은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 인사로 쓰는 평안이란 말은 유대인의 샬롬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이 70門徒를 둘씩 둘씩 짝지어 순회전도하러 보내실 때 방문하는 가정마다 그 집의 평화를 빌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돌아갈 때 예수님은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작별인사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간과 하느님이 그리스도 신앙안에서 하느님과 화목(평화)하게 됐다는 것을 간 데마다 강조했습니다. 영어로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Lord”가 그의 신학을 구성한 기주였습니다(롬 5:1). 그는 복음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롬 10:15).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하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지각에 넘치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애용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① 자기 자신 안에서의 심리적 평준화와 조절에서 얻는 마음의 상태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달관, 회피, 은둔, 냉소, 굴종, 안심입명, 무사주의 등일 수 있겠고, 팔자소관이라 하여 주어진 운명에 맡기는 평안도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말한다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입니다.


② 종교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 – 사람은 가고 사람은 오고, 낳다가는 죽고 대를 이어 또 낳고 합니다. 자연 속의 새 짐승도 그렇고 풀과 나무도 그렇습니다. 물도 뜨거우면 마르고 차면 얼고 비오면 불고 하지만 제 골을 백년 천년 흐르고 있습니다.


자연을 인격화하여 달과 함께 시 쓰고 물과 함께 노래하고 죽림속 칠현처럼 吟風詠月로 身遊物外하는 평화 생애도 있습니다. 도교적인 평화라 하겠습니다. 세상 풍진에 뜻이 없으니 세상 걱정 안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인연을 끊고 무아 해탈의 경지에서 業(카르마)을 남기는 일 없이 空에 살다가 열반, 즉 영원한 무아의 정적에 들어가는 불교적 평화도 있습니다.


구약종교에서는 역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하느님의 계시로 이에 대결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은 전쟁 없는 국제평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얻는 마음의 평화 등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속은 이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순응할 뜻이 있어도 대체로는 제물이 많으면 그 바친 자가 도둑놈이든 협잡꾼이든 덮어놓고 ‘네게 평화가 있으라’ 하고, 가난해서 빈약한 제물 밖에 바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눈 한 번 거들떠 봐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집권자가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게 되어도 “평온하다, 평화다”고만 하여 악정을 조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강대국이 쳐들어올 기세를 보여도 평화, 평안만 합니다. 그것도 神託이라 하여 하느님이 그러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 예레미야는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한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우주는 저절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인데,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창조주 하느님의 지으신 솜씨 – 그 작품이란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질서에 따라 나고 자라고 늙고 죽고 또 나고 하지만, 그 원형은 하느님의 형상이어서 전적으로 ‘자연의 아들’인 것은 아니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를 볼 수 있는 신적인 자유를 갖고 있으며, 그 자유는 창조주와 대결할 자유까지 포함한 ‘자유’였던 것입니다.


창조주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자유하면서 창조주와 사랑의 관계를 즐기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와의 사랑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고 자기가 신이 되려 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평화를 회복할 경륜을 진행시켰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합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느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인간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인간성이 동물의 반열에까지 추락했습니다. 돼지먹이를 나눠 먹으려는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게 됩니다. 아버지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껴안고 입맞추고 목욕시키고 새 옷 입히고, 온 동리를 불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탐욕과 횡포로 유물ㆍ무신의 시궁창에 허덕이는 현대인은 탕자의 모습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한 그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안에서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인은 속죄주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事爲는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느님의 경론에 순종함으로써만 평화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우주의 낙원입니다. 인간은 낙원의 관리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낙원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지혜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신의 계율을 파괴했습니다. 그는 낙원에서 쫓겨나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하느님과의 평화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하느님은 神子 예수를 속죄제물로 죄인들에게 내어주며 인간과의 화해를 촉구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가 수립되게 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평화, 평화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아닙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 안에 품긴 때, 아들 딸이 아버지 품에 안긴 때, 죄인이 거룩한 이의 용서를 얻을 때,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을 때, 영생을 노래하며 死線을 넘을 때,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는 때, 부활의 영광이 내 영혼에 태양같이 비취일 때, 그리스도가 새 현실 새 질서의 중심이 되고 우리가 신천신지의 상속자로 임명받을 때, 그리고 다시는 전쟁이 없오 어린애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 받음이 없고,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눕고 칼과 창이 쓸데없어 농기구로 다시 만드는 때 – 그때에 참평화가 우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 현실로 본다면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군비를 깎아 약소국들 자립ㆍ자활ㆍ자치를 돕는 사랑의 선물로 쓰고, 남과 북의 우리 민족은 인간사랑, 민족사랑, 집안사랑으로 악의 없이 껴안는 날을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소위 평화통일은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한다”던 예레미야의 경우와 같아서 빈 말, 헛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남과 북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원형적인 평화에 모험의 씨를 뿌려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란 말을 1백 69회나 썼다고 다이스맨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참 평화, 영속하는 내실있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No’가 ‘Yes’에로, 심판이 은혜에로, 죄가 거룩에로, 죽음이 영생에로 그리스도 안에서 차원 높은 평화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공허감이 실재로, 불안감이 안정감으로, 초조감이 확신으로, 열등감이 하느님 자녀로서의 긍지로, 죄책감이 하느님의 宣義로, 유한감이 영원에로, 죽음이 부활로, 실망이 희망으로, 좌절감이 사명에로, 고난이 영광에로.


이런 사람에게는 평화가 영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평화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성 자체 안에 형성된 깊은 평안입니다. 바다의 표면은 바람과 함께 물결이 뒤설레지만 바다 깊은 데는 언제나 평온합니다. 바람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引力이 끌려올릴 때에만 밀바닥까지 끌려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자기 몸으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느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195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