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귀국이후] (10) [1717] 1983년 晩秋(만추)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5-20 17:34
조회
101

[1717] 1983년 晩秋(만추)


1983년 10월 28일(금) - 윤반웅, 유운필, 전학석, 10월 29일에는 안희국 선생과 혜순, 행강의 친어머니(안사둔), 탁연택 부부, 조선일보 기자 등이 연방 찾아와서 반겨준다.


1983년 10월 30일(일) - 서대문 밖 경서교회에서 설교했다. 全相根(전상근), 尹男慶(윤남경) 그리고 여러 옛친구들이 반가왔다. 관북에서 온 분들이 많았다.


기장교회가 서울 南(남)에는 성남교회, 東(동)에는 경동교회, 西(서)에는 경서교회, 北(북)에는 성북교회가 있다. 四方(사방)에서 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속으로 영그러간다.


1983년 10월 31일 – 음력 9월 26일은 長空(장공) 생일이다. 오전에 성암교회 이영찬 목사가 축하인사로 왔다. 西獨(서독)서 잠시 다니러 온 손규태 목사가 생일축하로 들러 절했다. 단용 부부와 아이들 河榮(하영)과 徐榮(서영), 仁鏞(인용)이 모두 와서 절한다. 명은과 명혜는 자기들 용돈을 모았다가 할아버지께 양말 한 타스, 관용과 정희는 생일축하케익 – 그래서 즐겁게 지냈다.


경동교회 할머니들은 내 생일 祝品(축품)으로 보료 一襲(일습)을 가져왔다. 北儂(북농)의 四君子(사군자) 열폭 병풍을 두르고 보료를 깔고 진공단 한복에 마고자까지 입고 도사리니 갑작스레 귀족 기분이다.


명은 엄마는 부엌에서 바쁘다. 이럴때면 의례 명은 외할머니가 와서 돕는다.


1983년 11월 2일(수) - 성북서 양기웅 형사가 와서 담화했다. 자기가 나를 맡았노란다. 애기엄마는 나의 就籍(취적) 수속 때문에 법무부로 시청으로 果川(과천)에 옮긴 외무부로 분주하다. 일체 필요서류를 단번에 갖추어 갈 수도 있을텐데 하나 해오면 된다고 해서 가면, 그때에서야 또 다른 하나를 딴데서 얻어오란다. 들볶고 애먹이는 수법인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 84년 8월 30일에도 이 일은 끝나지 않고 있다. 체류기간을 두 번 연장했는데도 취적이 안되서 그대로 버려 뒀더니 벌금 6만원이 나왔다. 두말없이 물었다. 호적이 그대로 있는데도 일부러 그걸 말소하고 다시 취적수속을 하라는 것이다. 그만하면 “준법정신”은 세계 일위라 하겠다.


1983년 11월 5일(토) - 인천 판유리 사장 최태섭 장로가 남산 실업인 회관에서 만찬에 초대한다. 김상근 총무가 자리를 같이 했다. 그는 경제에 밝은 실업인이다. 한국경제에는 出口(출구)가 없다는 비관론이다.


1983년 11월 6일(일) - 오후 2시에 갈릴리교회에서 예배했다. 문익환 목사가 인도하고 설교했다. 김지하 어머니도 거기서 만났다. 한국교회를 연구하는 미국인그룹 10여 인과 카나다 연합교회 본부 사람과 Miss 커넬 등이 참석했다.


1983년 11월 7일(월) - 2PM 기독교 방송국회관 강당에서 이우정 선생 著(저) “예수, 여성, 민중” 출판기념회와 환갑 祝宴(축연)이 있었다. 來客(내객)이 초만원이다. 교우, 일반인사, 여직공 대표들, 각 노동단체 대표들, 학생들이다. 내가 축도했다.


저녁에는 한신 男子(남자) 졸업생 동창회 간부가 종로 한진식당에 長空과 鄭學長夫婦를 초대했다. 회장은 김정현 목사였다.


1983년 11월 8일(화) - “新東亞”(신동아)誌(지) 최일남 편집차장과 기자 세 분이 와서 “인터뷰”했다. 최일남씨는 이름난 作家(작가)여서 요령도 좋았지만 인간적으로 속이 트인 분인 것 같았다. 아주 자연스레 대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