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귀국 이후] (3) 歸國(귀국)과 그 直後(직후) [1710]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2-18 08:48
조회
88

[1710] 歸國(귀국)과 그 直後(직후)


두달 안에 돌아 온다고 떠난 북미주 여행이 10년으로 늦었으니 그 동안에 “간다”, “간다”의 입버릇이 늘었을 것은 사실이다.


만 80세의 문턱에서 민통의 책임도 홀가분하게 벗어버린 다음의 “空”(공)은 북미 체류의 구실도 없었다. 카나다 정부에서 생활비는 꼬박꼬박 나오고 동전한푼 안내도 의료는 정성스럽고 4Room의 아파트도 밝고 맑고, 자녀와 손자들이 연방 선물들고 찾아와서 재재거리다 가고, 모퉁이 방이라 뜨는 해, 지는 해의 붉은 노을이 찬란하고 15층이라 전망도 티어 있다. 그만하면 앙생송사(養生送死)에 유감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입버릇처럼 “간다” “간다”고만 하니 자손들도 섭섭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왜 가시려는 거요?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하고 손녀 손주들은 시무룩해 진다.


내 건강은 그리 완강한 축이 아니었다. 십여년래 숙환인 만성간염은 나은 것이 아니라, 멈칫해 있을 뿐이고, 위궤양도 도지지 않는 것만이 다행이고 위천공 때문에 위 절개 수술한 성과는 기적이랄 만큼 속하게 나았으나 음식 조심은 여전히 해야 하고 당료병은 13년이나 계속인체 완치는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탈장이어서 만날 탈장대 신세다.


거기에 나이가 80고개를 넘었으니 아주 떠날 날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내 둘째 서랑인 이상철 목사는 적잖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여러가지 경력으로 보아 장인 영감은 고국의 흙에 묻혀야 할 분인데 이러다가 귀국 기회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었다. 여기서 세상 떠난다 해도 그 유해는 고국에 모셔야 할 터인데 화장은 하기 싫고 – 5, 6년후에 그 유해를 옮길, 치다꺼리는 누가 해 낼 것인가? 자식들에게도 부담이 클 것이다. 그러니 기동할 수 있는 동안에 귀국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말하자면 이런 사고 방식인 것 같았다.


우리 노파는 상철에게 매섭게 항의한다.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보다 더 섧다는데 이 목사는 너무 하는 것이 아니오?”


이 목사의 대답도 단호했다.


“아버지는 가셔야 합니다. 마감 매치는 한국에서 하셔야 합니다.”


옳은 말이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카나다에 와 있었다. 탈장이 심해서 RN인 둘째 자부(孝淳)의 초청으로 수술 받으러 온 것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는데 우울증이 심한 것 같으니 아버님이 오셔야 하겠다는 것이 효순의 편지였다. 그래서 나는 약 2개월 작정으로 카나다에 갔던 것이다. 나를 만나자 아내의 우울증은 사라졌다. 아픈 티도 없고 밥도 잘 먹는다 당장 퇴원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건강하다. 아내가 나를 더 오래 카나다에 있게 하고 싶어하는 심정도 알 것 같다.


長空이 간다니 노수라도 얼마 보태 드려야 하겠다고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 김영천 장로 주동으로 교회 친교실에 나의 서예전을 열었다. 김영천 장로는 石刻(석각)에도 명수(名手)여서 간단한 名句(명구)들을 壽石(수석)에 새겨서 전시하기도 했다. 글씨는 별 것 아니지만, 전시장은 공간만으로 남았다. 재료비와 조각비, 그리고 여러 가지 비용을 제하고도 만불쯤 남았다고 들었다. 교회에 특별 헌금하고 김영천 장로에게 사례금 내고 내 여비에도 큰 보탬이 됐다.


그 무렵(83년 5월) N.Y. 한인회 총무로 있던 김영호 목사로부터 비슷한 요청이 왔다. 김영호 목사는 고 김정준 학장의 당질이다. 드류 신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다듬는 동안, N.Y. 한인회 총무로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내 글씨를 갖고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다. 약 40點(점) 요청해 왔다. 써 보냈더니 예정대로 전시회가 열렸다. 나도 와 보라 해서 겸사 N.Y.에 갔다. 거기서는 잘 팔리지 않아서 밑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두고두고 팔셈치고 내게 1천불을 보내왔다. 그럭저럭 여비는 된 셈이다.


“간다”는 소리의 메아리가 N.Y., 와싱톤, 필라델피아, 플로리다에까지 퍼져서 작별 강연, 석별 파아티 등으로 바삐 돌아다녔다. 마감회는 아마도 N.Y. 목요기도회 주최 송별연이었던 것 같다. 목요기도회는 이번이 제100회 모임이라 했다.


소련 미사일의 “KAL기” 격파 사건이 간데마다 주요 화제로 되어 있었다.


長空은 귀국하여 무얼 하려는가? 하는 것이 간데마다의 질문이었다.


나는 북미주에 오기 전부터 하던 일을 계속 하겠다고 막연한 대답을 한다. 그것은 국민의 민주화와 교회의 사회화를 의미한 것이다.


기독교의 사명도 천명된다. 공중이 권세 잡은, 죽음의 천사인 핵무기 문제도 거론된다. 백인교회 담임인 金英哲(김영철) 목사가 사회했다.


강연이 끝나자 N.Y. 모임에 來參(래참)했던 李行雨(이행우)님 車(차)로 필라델피아에 갔다. 세 시간 달렸다. 그 댁에서 잤다.


9월 2일 아침 - 金舜卿(김순경) 博士 인도, 李行雨 님 둘째 아드님의 운전으로 Penn이란 높은 山頂(산정)에 올라가 “필” 市(시)를 한눈 아래 볼 수 있었다. 보이는 도심지는 약 30만 인구라니까 옛날의 서울 정도다. 그러나 林間 수백리에 주택들이 공간 아쉬운 줄 모르고 널려 있어서 총 인구는 훨씬 더 많다고 했다.


밤에는 필市 교포 유지들 약 60명이 한인 회관에서 작별 잔치를 열어준다. 姜瑾(강근)씨, 李源一(이원일) 박사(의사) 등이 격려와 부탁의 말씀을 준다. 김순경 박사도 오셨고 우리 졸업생으로서는 최재소 한 사람 뿐이었다. 부인들이 많았다.


김순경 박사 차로 그의 댁에 가서 밤 2시까지 그의 以北(이북) 여행담을 들었다. 그것은 진짜 목격담이었는데 비참 그것이었다. 김순경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로서 템풀대학교 원로 교수다.


나는 방랑객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탄식삼아 말씀하셨다. 나도 그 점에서는 비슷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도 하셨다. 이것은 死後天堂(사후천당)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세에서도 맞는 말씀이다. N.Y.에 가면 최우길 장로 부부가 내 방을 따로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 뒷 뜨락은 산토끼도 많은 密林(밀림)에 이었다. 숲속에서 불쑥 솟아나는 아침해의 동그란 불덩이는 하늘에 화재를 일으킨다. 여러장 사진에 박아갖고 왔다. 그는 사회사업 센터를 갖고 쉴새없이 뛴다. 주일 날에는 N.Y. 만하탄 교회에 나간다. 장로로 찬양대원이다. 그렇게 분주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신 동문회에도 열심이다. 부인은 간호 사업에 바쁘고 子女(자녀)는 없다. 둘 다 나가면 집은 빈다. 내가 혼자 있는 경우에는 내 손으로 국 끓이고 밥하고 김치와 밑반찬으로 의젓하게 식탁을 꾸민다. 배는 부르지만, 멋은 없다. 평생 혼자 산다면 무던히 삭막할 것이다. 어쨌든, 흉허물 없는 후배다.


이번 들렀을 때에는 그 집에 식구 둘이 늘었다. 전에 없던 조막만한 발바리 자웅이 응접실 모퉁이 빡스 안에 있었다. 몸은 그야말로 조막만하고 눈알이 톡 튀어나오고 주둥이는 “불독”型(형)인데 몹시 신경질이다. 바깥 길 가는 행인의 구둣발 소리에서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리고 짖어댄다. 내가 들어와도 끊임없이 짖는다. 목에 줄이 매여 있으니 덤벼들 염려는 없다손 치더라도 내게 귀염받을 짐승은 못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끄러워서 다른 데로 옮겼다.


어쨌든, 최우길은 진실하다. 그 바쁜 와중에 박사공부를 계속한다. 노인네로서 그의 신세 안 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N.Y. 가서 또 하나 내집 같이 유숙할 수 있는 고장은 한승인 장로 내외분 댁이다.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콜럼비아 대학교 경제학과(?)를 일학년부터 시작하여 정규로 졸업하고 한때 서울 화신상회 이사로도 있었고 미군정 때에는 상공부장 인가에도 있었다. 민주당 정권 때에는 장면 씨의 入閣(입각) 권고를 거절하고 주불대사로 해외에 오갔다. 박정희 군사 구테타 직후에 박정희의 귀국 명령을 무시하고 미국에 와서 민주운동의 선봉, 원로로 지금까지 쉬지 않는다. 그는 島山先生(도산선생) 숭배자로서 흥사단일에 심신을 바친다.


自由韓國(자유한국)을 위한 운동과 독재반대 데모 대열에서 그의 얼굴을 못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승인 장로는 島山(도산) 선생의 참 제자인 것 같았다. 그의 主著(주저)인 “島山 安昌鎬”는 島山傳記(도산전기)의 결정판이다. 한승인 장로는 말한다.


“예수님 다음에는 島山을 숭배한다”고. 그가 일제 때 서대문 감옥에서 미결수로, 2년 동안 한 방에서, 島山을 모시고 있었다니 누구보다도 島山을 잘 알 것은 사실이겠다.


N.Y.와 와싱톤에서 신세진 친우가 하도 많으니 여기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N.Y. 김홍준 장로의 진지한 생활 태도와, 행려자에 대한 환대와, 사업에 대한 설계 능력 등은 감탄할 만 하다. 내외분이 모두 지성적이고 겸손하다. 그의 고분한 호의에 “空”은 감사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목요기도회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토론토에 돌아 와서도 환송의 모임이 잦았다. 토론토 한인회, 토론토 민주건설 협의회, 토론토 한인연합 교회, 토론토 한인 교직자 연합회 그 밖에 여러 개인 가정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안 갈수가 없다. 이제 또 연기할 면목도 없다. 하느님께서 귀국의 길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1983년 9월 18일 – 예정대로 토론토 공항을 떠난다. 전송하는 교우와 친구들과 그 가족들과 내 자녀 손들로 대합실을 메꿨다.


비행기가 약 30분 늦게 떠났다. 時差(시차) 관계로 같은 날 저녁 때에 뱅큐바 공항에 내려 장범식 박사 댁에 유숙했다. 김풍환 의사 댁에서 밤참을 차렸다.


감사할 뿐이다.


1983년 9월 19일(월) - 토론토에서의 오랜 친구인 장철호ㆍ김연옥 부부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점심 대접 받고 공항에 나가 비행기에 올랐다. 밤없는 구름 위를 가는줄 모르게 간다. “간다”, “간다” 하며 몇 해를 되새기던 길 – 지금은 진짜 “가는 것”이다. “넌스탑”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다. 앉아서 먹고 앉아서 자고 깨며 졸며 태평양을 간다.


1983년 9월 20일(화) - 일기는 맑고 밝다.


계속 태평양을 간다. 저녁 7시에 동경에서 KAL기에 옮겼다. 약 30분 후에 서울 국제공항에 내렸다. 법무부에서 나온 法務官(법무관)은 예상 이외로 친절했다. 손수 세관에서 짐을 옮겨주고 리어커에 실어 손수 끌어다 준다. 여권 비자 관계로 약 2백명의 교우, 동지, 선배, 후배 가족과 친척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하였다. 도착한지 2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C.I.A.에 끌려 간 것이나 아닌가 싶어서 더욱 애탔던 모양이다.


결국 박수와 환호와 만세 속에 入國(입국)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3년 9월 23일(금) - 오늘부터 손님이 찾아온다. 첫 來客(내객)은 성북교회 허광섭 목사였고, 이어서 문재린 목사님과 사모님, 문익환 목사 부부, 이해동 목사 부인 등이었고 권현찬 목사, 김인호 목사, 박찬섭 목사 등 성풍회 분들이 제2진이었다.


오후 2시에 한양대학교 김연준 총장이 차를 보내왔다. 관용이 더러 모시고 오라 한 것이었다. 관용과 함께 갓다.


“漢陽(한양)의 王者(왕자)”로서의 풍모가 익어가고 있었다. 자기가 작곡한 聖歌曲集(성가곡집) 카셋을 들려주었다. 巨物(거물)임에 틀림없다.


“사랑의 실천”을 좌우명으로 사노라 했다.


옛 친구, 새 친구, 동문과 동창, 목사와 교인, 친척과 동지 – 찾아주는 손님은 끊일 날이 거의 없다. 미국이나 카나다만 해도 은퇴자는 폐물이고 “권외인간”이랄 수 있는데 여기서는 孔子(공자)님 덕분에 늙은이가 대접받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귀국의 행복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