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46) 우리 역사의 이단자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1-30 09:21
조회
98

[범용기 제6권] (1646) 우리 역사의 이단자들


(1) 장보고(張保皐 A.D. 845) - 완도 사람으로 조선에 능숙하여 거대한 상선을 건조하고 중국과의 무역로를 트여, 수출과 수입에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해적떼가 들끓었지만 장보고는 자기의 해병을 편성 훈련시켜 무역로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무역왕”임과 아울러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하였습니다. 그의 신분은 이제 한 무명의 “섬사람”이 아니게 됐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김우징을 도와 그를 왕위에 앉게 했습니다. 그 이름이 “신무왕”(神武王 - 839 AD)이었습니다. 그 다음 임금인 문성왕(文聖王, 839-857 AD)도 그가 옹립했습니다. “장보고”는 자기의 딸을 문성왕비의 차비 즉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여, 문성왕 자신의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벼슬아치들이 반대하여 일은 틀렸습니다. “섬사람”의 딸을 왕실의 왕비로 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보고는 결국 육해군 사병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역적모의자란 억울한 죄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묘청”이나 “이괄”은 들어난 왕위쟁탈자였달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보고”는 자기 힘으로 제해권까지 장악하고 무역으로 나라의 재정을 부유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중앙에 힘을 심어야 하겠다는 설계는 귀족, 양반들이 너무 횡포를 부리는 데 대한 자기보호책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사람을 장려는 못할지언정, 눌러 없애 버린다는 것은 적어도 한 나라를 경리한다는 정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짧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2) 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 등 높은 스님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스님들은 “불살생”이라는 계율을 엄수합니다. 하물며 전장에 자신 출전하여 인간생명을 창검으로 무찔러 생명의 피로 정토를 물들일 정당성은 있을 수 없겠습니다. 그것은 “파계”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나 왜병이 나라를 짓밟아 경사에까지 밀고 올라올 때, 서산대사, 사명당 등 고승들은 승병을 일으켜, 스스로 대장이 되어 왜적과 대결했습니다. 일본의 침략부대를 실력으로 물리칠 “장군”들로서의 “승려”였습니다.


결국 왜구는 물러갔습니다. 나라에서는 이 승병대장들에게 높은 영예로 관씌웠습니다. 사명당은 일본과의 강화조약 대표로 도일하기도 했었습니다.


(3) 남이장군 – 이조 3대 임금 태종대왕의 외손자입니다. 세조 3년(1457 AD)에 17세의 약관으로 “무관”에 장원급제하여 1467년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여 용맹을 떨쳤습니다. 26세에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군 건설에 정열을 쏟을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질투하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적”이란 억울한 죄목으로 살해됐습니다. 필자가 아이 때부터 귀에 익숙했던 남이 장군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 대장부)


유자광 일당은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쳐서 항간에 유포시켰답니다.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는 것을 나라를 取得(취득), 즉 제 것으로 만든다”는 말로 바꿔친 것입니다. 그런 무인으로서의 천재를 우리 역사에서 말살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文治國家(문치국가)에서의 “이단자”로 토벌된 희생자였습니다.


(4) 남이 장군에게 토벌된 “이시애”도 우리 역사의 두드러진 이단자였습니다.


그는 함북 길주 사람으로서 회령부사로 있다가 세조 13년에 그의 아우 이시함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동기는 북도의 수령들은 북도 사람 중에서 우선적으로 선임해야 할 것인데 왜 남도 사람만 임명하느냐 하는 불평에서였답니다. 함경도 모든 고을이 이에 합세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구성군 李浚(이준)을 함길, 평안, 강원, 황해 4도 兵馬都總師(병마도총사), 말하자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문석, 허종, 남이, 강순, 어유소를 전선 사령관 대장으로 임명하여 “이시애” 군대와 대결하게 했습니다.


“이시애”는 북청 싸움에서 패하여 길주로 도망했습니다. 그는 남은 무리를 모아 여진 땅에 들어가 재기할 계획이었으나 그 길이 순조롭지 못해서 실패작으로 끝났습니다.


(5) 정철과 그 일파 – 정극인, 박인로, 종순, 황진이, 이인식 등은 한말 문학, 예술계의 문학운동은 중국 한문학의 말미에 붙어 살았다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보편화했습니다만, 한학자들의 압력 때문에 이 “한글”은 보편화하지 못했고, 겨우 안방규수나 궁궐 안 여인들의 행문구실 밖에 못했습니다. 한문이 진서, 즉 “참글”이라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웠습니다.


“정철”과 그 일파는 우리나라의 “한글” 문학을 부활시킬 뿐 아니라, 예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문학형태 즉 시조, 가요, 별곡, 그리고 신소설, 장가, 단가 등등을 발굴, 창작하여 한학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이단자”로 되었습니다.


정철은 1562 A.D.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 대사간, 우의정 등의 고관을 지낸 “巨人”의 우두머리였다 합니다. 그는 최고급 한학자였습니다만, 민중의 한글문학에 파고든 이단자였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후예”는 빈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우리의 한글문화는 본 고장을 찾아 무럭무럭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6) 기독교 개혁파 교회의 이단자도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아주 최근에 속한 운동이었습니다만, 선교사 의존의 한국교회 시대에서 한국교회의 독립시대에로 Start한 것입니다. 선교사의 정신적 식민지로서의 한국교회에서 선교사와 협동시대에로 옮깁니다. 정통주의적, 주입식 신학교육에서 자유비판의 신학교육시대에로 진입했습니다.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의 자주자립 자치의 확립에로,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중요한 일원으로 그 모임의 간부로, 중앙위원 집행위원 등의 일원으로 전 세계 교회와 사회문제에 실질적인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자체를 하느님 사랑의 역사로 변질시키려는 한국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교회주의” - 나쁘게 말한다면 “교회이기주의”(Churchism)에 농성하여 교회와 세속 사이에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 지성인과 교회집단은 위에서 언급한 “보수일변도”의 “교회지상주의”에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이노리티”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총회에 정진되어 물러났습니다. 중세기적 이단재판권이 총회에 있었다면, 그 주동자는 화형에 처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는 중세기 아닌 20세기 자유시대였기 때문에 “이단자”에게도 생존과 활동의 여백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미래는 “이단자”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미완성”입니다. 이미 얻은 사람도 아니요, 이미 이룬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우리는 고정주의에 항거합니다. 더 새롭게, 더 참되게, 더 넓게, 더 높게 개혁해 가려는 전진자, 경주자, 그 선수입니다.


선교사들은 선교사 배척자로 찍고 소외시킵니다.


대교회 목회자들은 교인을 분열시킨다고 접근도 못하게 합니다.


“독신자”라는 교인들은 세속과 짝하여 성역을 더럽힌다고 외면합니다.


보수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비판한다고 불경죄로 몰려 합니다. “이단자”는 사면초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아주십니다. 그리스도는 등에 손을 얹어 복빌어 줍니다. 소수의 신앙동지들은 고락을 같이 나눕니다. “이단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그의 것이란 말은 옳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