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45) 李朝末(이조말)의 斷末魔(단말마)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1-30 09:18
조회
112

[범용기 제6권] (1645) 李朝末(이조말)의 斷末魔(단말마)


중국은 네 살짜리 아이인 애친각라 채점 - “광서제”가 즉위하고 서태후가 섭정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서태후가 여황제인 셈입니다. 그럭저럭 “광서제”도 23세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사실상 정권을 내어주기가 싫어서 권모술수를 부립니다.


서태후는 은퇴합니다. 공허감을 메꿀 수 없었습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남겼는데 나는 그 보다 더한 기념품을 남겨야 하겠다.” 하고 서태후는 맘먹었습니다. 일본은 새 군함을 기쓰고 사들여 참신하고 강대한 해군을 Build up하는데 중국의 북양함대는 그 수로서는 일본보다 조금 많지만, 낡았고 사정거리도 짧고 해병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해군 총원수인 “이홍장”은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는 해군 재건을 위한 예산을 가까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그 예산을 가로채어 이화원이라는 이름의 이른바 “만수산” 비원을 조성했습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남긴다는 경쟁의식에서였다고 한다면, 모름지기 마음도 흐뭇했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독재정권의 횡포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는 국민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양이” 즉 서구 여러 나라들은 이 “까리”에 중국을 아예 나누어 먹자고 덤빕니다.


한 걸음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범아”주의에서 “탈아”주의로 방향을 바꿔 서구의 침략국가들 틈에 끼어 그 일원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아편판매로 폭리를 거둡니다. 그래서 아편전쟁이 생겨 청국은 참패합니다. 반발하는 국민은 각처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혁명운동이 본격화 하여 내란상태가 됩니다. “러샤”의 남하정책은 집요합니다.


“손문”은 한족 중심의 민주혁명을 일으켜 만주족의 “청왕조”를 전복시킵니다. 혁명이고 내란이고 모두 무력 투쟁이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이 “독립국가”여서 중국의 변방 또는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마침내 일청 전쟁을 일으킵니다. 한국은 “사대파” 즉 친중파가 김윤식 등을 중심으로 집권합니다. “친일파”랄 수 있는 김옥균 일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당시 집권파인 민씨 일당을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 배후에는 한 소대의 병력도 없었습니다. 일본군인 한 중대를 믿고 일을 일으켰지만 개화파인 김옥균 일당이 민씨 세력을 이겨낼 것 같지는 않음을 안 일본은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김옥균 정부를 소외시켰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이홍장을 만나려고 중국에 가는 도중, 상해에서 홍종우란 자객에게 암살되었습니다. 민씨 정권은 김옥균을 역적으로 몰아 시체를 한강 백사장에 “효시”하고 찢어 8도에 나누어 돌렸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민비와 대원군과의 권력쟁탈전이 터집니다. 대원군은 서구제국의 중국 분할야심과 그 실제 진행과정을 목격한 “영웅”이었기에 한국에는 아예 서양뙤놈은 발도 못붙이게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척사비”를 서울을 위시한 주요 도시에 세웠습니다. 대원군은 내정을 쇄신하고 개화운동의 실적도 적잖이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극”(Polirity)을 달리는 것이어서 열린 창문이 없기 때문에, 내쉬고 들이쉬는 숨줄이 막힙니다. 결국 스스로 질식상태에 빠집니다. 가톨릭인들이 불란서와 통한대서 마구 살해했습니다.


한말의 혁명운동은 “될 뻔하다 안된” 미완성 교향악이었습니다. 그 주요원인은 강대국들의 간섭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환경적응성이 민첩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로 들 수 있겠습니다.


살아야 하는데 살려면 강한 놈에게 등넝쿨처럼 감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주체성(Self Identity)을 상실한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오면 “언제 내가 그랬더냐?” 식으로 새 주류에 협력하여 충성도 합니다. 약소국민의 생활철학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대원군은 뻣뻣한 고목같이 타협 없는 한 “극”을 달렸고, “민비”는 “등넝쿨”처럼 요리저리 강한 나라에 감기며 제 속을 차렸습니다. 친일, 친중, 친로 등등의 세, 넷의 “뿔”을 한 손바닥으로 조종합니다.


“국가”로서의 독립된 경륜 때문이라기 보다도, 개인, 또는 가문의 영달을 앞세웠습니다. 영리하면서 암매했습니다. 중국 청조를 망친 “서태후”나 한국의 “민비”나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일본의 낭인 부대에게 살해되고 남은 실적은 1910년의 한일합방이었습니다.


나라는 없어도 민족은 있다


민족이 살아 있으면 “나라”가 없어져도 그 민족은 또 다시 “나라”를 세웁니다.


합방 일년 전, 할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총살했습니다만, 그 이듬해에 한국은 일본에 합방되었습니다.


1909년에 일본은 한국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일면 적응, 일면 항거하면서 국가 재건의 작업을 계속합니다.


1910년,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평화의 물결이 몰려듭니다. 한국도 나라 되찾기 운동을 전개합니다. “일제” 군정 아래서 우리의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단체들은 예외없이 말살되었습니다. 한국말, 한국글, 한국풍습, 한국적 생활양식까지 모두 일본화돼야 한다고 강요당합니다. 그러나 종교단체만은 “정교분리”라는 원칙 아래서 존속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단체들은 우리 역사의 새 세기를 만들어 낼 의무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민족적 독립국가의 재건이었습니다. 3.1독립선언은 발표됩니다.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의 손병희를 위시하여 기독교 신교와 불교의 한용운 스님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사회적, 국가적 참여를 당연화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살육으로 백만 단위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국내에서 할수 없는 일을 국외에서 맡아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중국, 러샤, 하와이, 미국본토, 유럽 등 전 세계에 퍼져 조선독립 운동을 불사조 같이 계속했습니다.


10년 후, 3.1 독립운동에서 33인의 독립 선언에 동참하여 백만단위의 애국지사들이 선혈로 조국의 토양을 물들였습니다만, 독립은 해답 없는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진행형”입니다.


1945년 8월 15일 -


제2차 대전에서, 지는 편에 주사위를 던졌던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은 “해방”되었습니다.


미군정에서는 조선에 있던 일본인을 싹 쓸어 현해탄 저쪽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서유지를 위해 일본군인이 창 꽂은 총부리를 시민들 가슴에 겨누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혼자서 종로를 걸어 을지로 4가와 마주치는 모새기까지 왔습니다. 마침 일본 장교가 찝차를 타고 와서 연설을 하더군요. “지금 우리가 간다마는 아주 갈 줄 아느냐? 십년 후에 다시 보자! 너희가 기분에 들떠서 일본인을 한 사람이라도 살상하는 일이 있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본 침략주의 군벌은 예나 지금이나 손톱만큼도 변한 데가 없답니다. 우리 “독립”이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제일차적인 조건으로 하는 말입니다. 일본은 경제, 정치, 군사의 세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한국을 재침략합니다.


자기들이 약세일 경우에는 “하이, 하잇” 하며 마치 “종”이나 된 것 같이 아양을 떱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강세”라고 판정될 때에는 눈을 부라리며 “불독” 같이 으르렁대고 덤벼듭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국력을 되찾은 일본은 그들의 침략근성을 차츰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방직후에 항간에는 “소련에 속지 마라, 미국을 믿지 마라, 일본이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하라” 하는 속담이 유행했습니다. 통찰력 있는 속담입니다. “조선”은 “조심”할 뿐 아니라, 극복하고 백년대계를 앞에 놓고 당당하게 행군해야 할 것입니다. “조심”이란 것은 “Look in”이라는 내향적인 어휘여서 “Look out” 같이 외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외 발전도 없이 이조 5백년을 안방에서만 지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주의도 그 일례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통일된 민주, 민중, 민족국가로 발전되려면 “게토”일 수가 없는 것이고, 독재 정권으로서의 “일방통행”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자기 나라 이익을 위해 그어 놓은 38선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한 때 혼란을 이루겠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면 질서가 잡힐 것입니다. 같은 민족, 같은 가족, 5천년 같은 뿌리에서 싹트고 자라난, 그리고 지금도 자라는 단일민족이니만큼, 그 혈연이 갑자기 싱겁게 묽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남한의 군사정부는 “10년 후에 다시보자”던 일본 침략군벌의 “서자” 격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주의, 미국의 돈벌이주의, 그리고 소련의 적색제국주의 등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 자치, 자립을 내용으로 한 진정한 독립 민족국가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아직도 미완성이기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진행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신성한 건국운동을 위하여는 이남과 이북이 다 같이 성실겸손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북의 공산독재, 이남의 군인독재정치에 항거하여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민주체제를 확립하려는 민주운동자들, 굴할 줄 모르는 수난민주 동지들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존경합니다. 한국 교회가 의로운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 때문에 세계교회의 면류관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일체가 되다시피 친해졌습니다.


미ㆍ소 대립의 시대에서 -


이제 자유진영의 종주국이라는 “마몬” 왕국인 미국과 공산독재의 진원지인 소련과 동양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는 중국과 그리고 약삭빠른 일본과 무시못할 제3세계와 “검은대륙”이라던 아프리카 등등이 얽히고 설키고 밀고 당기고 하면서 제각기 자기 살 길을 찾노라 몸부림치는 틈바구니에서 허리마저 잘린 한반도 우리 나라가 어떻게, 또 무엇으로, 대결하며 독립, 자주할 수 있을까? 나라를 경영한다는 정치인들이 무엇보다도 이 거대한 문제부터 “테클”해야 할 것이 아닐까?


우선은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고, 개인의 영달보다도 나라 걱정을 앞세워야 하겠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여야 하겠습니다. 권력에 아부하여 출세부터 해놓고 보자는 전통적인 부패관료주의를 탈피해야 하겠습니다.


외세를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만, 외세에 이용 당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용”하는 것이지, 이용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결국은 “강자”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미래의 문제는 – 민족적인 “위신”을 세우고 우리 자신들이 각기 책임을 느끼며 제 나라 일을 제 손으로 열고 밀고 세워 나가는 그 태세의 확립여하에 좌우될 것입니다.


그리하려면 “군정”을 하루 속히 “민정”으로 옮겨야 합니다. 자유 없는 국민에게는 “비전”이 없습니다. 자유 없는 개인은 “인간”이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가운데서 “설득”하고 단합하고, 즐겁게 자기 살림,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서독 프랭크풀트에서의 강연에
다른 강연을 덧붙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