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44) 명나라와의 관계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1-30 08:57
조회
252

[범용기 제6권] (1644) 명나라와의 관계


중원에서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明”(명)나라는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아예 고려까지 자기 광우리에 잡아놓으려고 터무니없는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고려는 “명”나라와의 친교에 노력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고려가 “원” 왕조와 너무 가까이 지냈으니 “원” 왕조를 뒤집은 “명” 왕조가 고려를 환대할 까닭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1388 A.D.(우왕 14년)에 명나라에서는 철령(鐵嶺) 이북의 땅은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통고해왔습니다. 한(漢) 武帝(무제) “유철”의 4郡制(군제)를 되살리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려도 할 말 있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구려 땅이었던 만주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게끔 됐던 것입니다. 고려에서는 “최영”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고 조민수(趙敏修)와 이성계를 일선 사령관으로 하여 북벌(北伐)의 길에 올랐습니다. 우선 만주벌판을 꿰뚫어 북경까지 쳐들어가자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왕건”이 염원하던 고구려 실지회복을 실현하려는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성계는 압록강가 위화도까지 갔습니다. 소위 “군대”란 것은 농민, 천민들을 강제징발한 훈련 없는 “오합지졸”이고 군량도 없고, 군수품도 없다시피 한 허울만의 “원정군”이었습니다. 압록강이 아주 얼어붙었다면 모르지만, 때가 7월 장마철이고 건널 배도 없습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자살”의 강요다 하고 이성계는 반발했습니다. 이성계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린다는 구실로 위화도에 머물러 “쿠데타”를 설계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편으로는 “이성계 부재(不在)”라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왜구” 패도적들이 “무인지경”인양 남해안을 약탈합니다. 이성계는 네 가지 원정 불가론을 들어 회군을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네 가지 원정불가론이란 것은 ① 작은 나라가 먼저 큰 나라를 건드리는 것은 자살행위다. ② 여름행군은 홍수, 질병, 수송로 차단 등등으로 공연한 희생자를 많이 낸다. ③ “왜구”의 침략에 기회를 제공한다. ④ 장마철에는 활줄이 늘어져서 전투가 잘 안된다 등등이었다고 합니다. 모두 당연한 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최영”은 왜 원정을 강요했을까요? 이것은 추측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영 자신으로서는 이성계의 신흥세력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흉계를 앞세웠던 것 같습니다. 이성계는 단연 회군했습니다.


개성에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偶) 왕을 폐하고 창(昌) 왕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왕은 구세력에 조종되어 이성계 암살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답니다. 하마터면 살해될 뻔 했었답니다.


이성계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착취자원인 토지대장을 몰수하여 거리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1390 A.D.)


유교의 영향


이 무렵에 유교가 수입되었습니다. 고려말 불교가 너무 타락했었기 때문에 기강과 윤리를 줄거리로 한 유교가 환영을 받았습니다. “신유교”라는 주자학이 중점이었고, “성리학”이 유교철학으로 학문의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준”(趙浚)이 경제이론가로 등장했고 정도전(鄭道傳)이 불교비판의 선봉을 달렸습니다. “포은 정몽주” 같은 유학자는 고려왕조의 현존질서 안에서의 유교적 사상갱신을 주장하였었으나 그 세력은 개별적으로 고절(孤節)을 지키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1392 A.D. 공양왕 4년 7월에 공양왕으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이조(李朝)의 창업 태조가 되었습니다.


이씨왕조


이렇게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게 됐습니다만, “좋다꾸나”하고 당장 허락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명”나라의 “인준”을 받아야 할 것인데 명나라 천자가 “이신벌군”(以臣伐君)의 역적 죄인을 문책한다는 의미에서 토벌군이나 보내면 큰 일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李朝實錄(이조실록) 첫권 태조대왕 年記(년기)에 보면 이성계는 앞질러 사죄하고 “명”나라 “천자”에게 “칭신”(稱臣)하고 폐백을 올리고 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와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었답니다. 요새로 말한다면 “위성국” 비슷한 입장이겠지요.


여진족과의 인연


이성계가 혈통적으로 여진족과 인연이 있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만, 그의 근조들과 그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여진족과 긴밀한 관계가 이어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개국 일등공신 명단을 보면, 그의 맏아들 “방원” 다음에는 이지란(李芝蘭)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지란”은 여진족인 董斗蘭, 즉 “퉁두란”인데 이성계 혁명군의 총수로 활약한 결의형제였기에 태조대왕 이성계가 자기와 같은 성 李氏로 ?姓하여 “이지란”이 되었다고 이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성계와 여진족


이성계가 전주 李씨 라지만, 원래는 함경도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경원군 두만강가에 가파로운 山城(산성)이 중세기 “보루”(Citadel)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용당(龍塘)입니다. 거기 올라가 보면 강 건너 벌판이 타작마당같이 훤하게 전망됩니다. “용당” 바로 밑은 “용당”을 떠이고 있는 그 산이 두만강에 내리꽂혔고, 강 저쪽도 같은 지형(地形)입니다. 사람이 혼자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강가에 실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강은 두 산뿌리에 부딪혀 뒤집히며 맴돌며 급류가 되어 내리달립니다.


이성계의 근조들은 목조(穆祖), 도조(度祖) 등, 말하자면 할아버지, 증조부님 등등은 두만강 하류로 내려가 경흥군 적지(赤地), “굴포” 바닷가의 고도(孤島)인 적도(赤島) 등지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필자는 소년시절에 그 고장에 자주 다녀봤습니다. 赤地(적지)에서 도조(?)가 꾸었다는 “용몽”(龍夢), 여진추장의 추격을 받아, 바닷물 위를 걸어 “붉은 섬”에 들어가 오래 거기서 살았다는 赤島 등등의 사연들이 모두 “기적비”에 깔축 없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赤島까지 들어가는 길은 “돌다리” 같이 되어 바닷물이 찌면 나타나고 조수가 들어가면 물속에 잠깁니다. 아마도 도조(?)가 섬에 들어갈 때는 썰물시간이었고, 여진추장 “제천호”(諸千戶)가 따라왔을 때는 밀물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필자가 갔을 때에는 그 섬에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살던 유적은 온 섬에 골고루 남아 있었습니다. “부추” 등속의 식용식물, 집터와 토기, 기왓장의 파편이 널려 있었습니다. 농토도 있었습니다. “비각” 안에 赤島記蹟碑(적도기적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태조가 “동구릉”을 왕능지로 택정하자 “적지” 근방의 近祖(근조) 능묘들을 거기에 이장한 다음에도 본래의 능분(陵墳)은 원형 대로 경흥에 남겨뒀기 때문에 탐승자의 실망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적들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다음에, 자기의 왕권이 하늘의 정한바요, 선조의 유덕(有德) 때뮨이라는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조작”이었다고만 생각하기에는 너무 실감적이었습니다. 이성계 일족은 남진하여 “함흥”으로 진출하였다가 “고려”에 중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만강가 地線(지선)은 그 이름에서도 드러납니다. “경원”(慶源)은 경사 날 근원의 고장이란 뜻이고, 경흥(慶興)은 경사(慶事, 즉 王朝)가 일어난 고장이란 뜻이겠고 함흥(咸興)은 경사가 다 이루어졌다는 고장이고, 영흥(永興)은 경사가 영원히 일어난 고장이란 뜻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함흥에서 영흥에로 옮겨 살았고 거기서 강씨(姜氏)와 결혼하였던 것입니다.


이태조 대왕은 동구릉 자기 능묘에 함흥 서호진에 무성하는 갈대를 옮겨 심어 잔디에 대신했습니다. 베여도 베여도 다시 자라 5백년 천년을 살아 있습니다.


漢陽遷都(한양천도, 1396 AD)


이성계는 개성의 옛 도성을 떠난 한양, 즉 지금의 서울에 옮겼습니다. 한국 풍수설의 조상인 도선(道詵)이 한양성(城) 터와 왕궁터 등을 점지(點指)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한양”은 이조 5백년 도읍처가 되었습니다. 사면에 산이 둘러서 음폭한, 갇힌 물웅덩이같이 된 고장입니다.


이조사(史)는 바로 우리 세대까지 이어온 우리 자신들의 역사기 때문에 누누이 기록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몇 가지는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①은 세종대왕(1418-1450 AD)께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표음문자인 한글을 창안하여 漢文(한문)에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밖에도 한국문화의 새로운 발굴과 선양으로 나라 위신을 드러냈습니다. 농학, 의학, 약학, 천문학, 이상적 국가이념설정, 아악 등등도 정비했습니다.


② 1437 A.D.에 김종서 장군의 여진토벌과 두만강 유역 백두산 밑까지의 6진(鎭 ) 개척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흥, 경원, 은성, 종성, 회령, 무산의 여섯 고을을 정립시켜 우리 국경을 확실하게 그어놓은 것입니다.


③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世祖 1455-1468 A.D.)가 왕위를 찬탈한 때의 사육신, 생육신 이야기입니다. 대국을 만회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죽음으로 불의에 저항한 松竹(송죽) 충절은 우리민족 윤리의 항구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④ 임진왜란(1592) 때의 이순신 장군입니다. 문신들의 전횡으로 사화(士禍)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신(武臣)은 하시(下視)되고 따라서 국방력은 형편 없이 약화되었습니다. 그틈을 타서 일본군은 남조선해안에 대거 상륙하여 승승장구 서울에까지 밀고 올라옵니다.


문무겸전한 이순신 제독은 “거북선”이란 철갑선을 만들어 간 데마다 일본목선함대를 섬멸하고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일본군은 약탈과 난행과 살육으로 겨우 사기(士氣)를 유지했었습니다만, 후속부대도 못 오고 군량과 무기수송로도 이순신 장군에게 잡혀버렸기 때문에 5년만에 철군하고 침략의 장본인인 “풍신수길”은 “덕천가강”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1) 조선을 응원한다고 명나라 군대가 오긴 했습니다만, “벽제관”에 복병해 있는 일본 정예부대의 요격이 무서워서 파주에 주저 앉고 임금인 선조(宣祖, 1567-1608)는 압록강까지 쫓겨가고 문신각료들도 따라갔습니다. 그러고서도 하나 반성함 없이 국가의 간성인 이순신까지도 질투모함하여 파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영의정인 유성룡(柳成龍)은 어느 정도 예외였다 하겠습니다. 이순신은 겨우 “역적모함” 흉계에서 벗어나 한 병졸로 白衣從軍 했다가 다시 복직되었습니다. 임진 10년전 “이율곡”의 10만양병 제의도 썩은 문신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명”나라는 이번 출정에서 국력이 너무 소모되었기 때문에 만주족에게 망하고 淸王朝(청왕조)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1644 AD).


1) 역사적으로 '풍신수길'이 '덕천가강'에게 망한 것은 아니고,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 풍신수길의 가문까지 장악해서 권력을 잡은 사람이 '덕천가강'입니다.


⑤ “최제우”의 동학혁명입니다. 교주인 최제우 선생은 “서학”이랄 수 있는 가톨릭(天主敎)에 대결하는 “동학” - 유, 불, 선 세 동양종교를 한 데 뭉치고 거기에 천주교를 가미하여 한 새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한국정부로부터 사형되었습니다. 그 후에 전북 고부출신인 전봉준 장군이 농민혁명군을 통솔하고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양반계급의 농지겸병 및 농민(小作人) 농노화, 외세의존의 매국행위 등등을 일소하고 명실공히 독립국가로서의 조선을 재건한다고 선서했습니다. 그의 혁명군은 전남북을 휩쓸고 일본과 청국의 조선정치 간섭을 배격했습니다. 이제는 서울에 진격하려고 만반준비를 갖춥니다. 청국의 원세개는 청국병정을 아산(牙山)에 상륙시켜 한양을 지킵니다. 일본은 최신무장한 사단병력을 투입하여 전봉준을 칩니다. 전봉준 장군은 그야말로 최후일각, 최후일인까지 싸웠습니다만 일군에게 포로가 되어 “참형”(斬刑) 제2대 교주로 최시형이었고 그 후에 일본에 있던 손병희가 제3대 교주로 추대되어 “동학혁명”을 “천도교”라는 이름의 종교형태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쨌든, 동학혁명은 우리 민족의 불멸의 자랑이라 하겠습니다.


⑥ 이조말기 실학파 유학자들의 출현입니다.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조공물 바치러 갈 때에는 수행원도 많았기에 그 일행에 섞여갔던 지식인들이 대륙문화의 전령자 또는 선구자 구실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청조 말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제스윗”(예수회)이 서양문화를 중국에 전하면서 선교의 길을 열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교리를 중국식으로 설명합니다. 중국사상과 기독교교리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로마법왕청의 금령이 없었더라면 그 자유로운 “토착화” 운동이 어떤 놀라운 풍작을 거두었을까 하고 아쉽게 여기보기도 합니다.


한국의 유교학자들은 주자학파 일변도였고, 성리학이라는 “인성론”(人性論)이 중세기 유럽의 변쇄철학 비슷한 추상적 개념식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논쟁에 몰두하는 동안, 민중의 실생활과는 인연이 멀어지고, 자기파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정권쟁탈에만 눈을 붉혔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실학파”가 일어났습니다. 실제생활화한 유교윤리를 강조하면서 자신들도 그 방면에서 실적을 보이고 그 방향에서의 실용적인 저서들을 반포했습니다. 관리는 어떻게 백성을 대하고 농사는 어떻게 지으면 수확을 증가시킬 수 있고, 무역은 어떻게 하고 관혼상제는 그 본래의 의도에 따라 어떻게 간소화하고 하는 등등을 가르쳤습니다. 자기 자신들은 그 당시 누구에게도 못지않은 학문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벼슬”이 그들 학문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 없이 함북 “종성”에 밀려가 오래 살았다는 박제가의 영향이 미쳤었는지 몰라도 종성 용계면의 “오룡천” 유역에서 소위 오룡천 5현이 났습니다. 회령의 최학암, 종성의 남오룡재, 한봉암과 한치함 ‘형제, 경원 함양동에 채향곡 등이 실학자들로서 쟁쟁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학”의 연원은 송 우암 선생에게서였다고 합니다. 북학파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들 자신은 “학파” 소속에 흥미를 느낀 것 같지 않습니다. 한국 실학파의 조종이라면 정약용과 그 그룹의 학자들이라 하겠지요. 그들이 집권했더라면 “영조”(1724-1776)와 같은 명군(明君)과 손잡고 한말의 국운을 본궤도에 올려놓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사의 대세를 만회하지는 못했고 한 헌책자(獻策者)로, 유적자(流謫者)로 비극의 일막극을 연출한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허공을 때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생활유교” 학자로, 우리 민족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진실한 전통에는 재생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