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 - 왕건의 통일왕국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9-01-29 08:49
조회
117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


왕건의 통일왕국


“왕건”을 생각할 때, 구약성서의 다윗을 연상합니다. 다윗은 탁월한 전략가임과 동시에 일선 지휘관이었고, 능숙한 정치가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왕건도 뛰어난 전략가며 지휘관이었고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부전승”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력을 동원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내분을 조장하여 스스로 깨어진 다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 상위라 하겠습니다.


“신라”의 경순왕을 항복시키는 데 있어서도 뒤에 군사력을 둘러 포위망을 굳혀 놓고, 왕에게 양위를 권했습니다. 경순왕은 자기가 독에 든 쥐의 신세임을 알았습니다. 신하들을 불러놓고 양위를 선언했습니다.


“천년 왕권을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반역자에게 물려준다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대하겠습니까?” 하고 태자는 통곡했답니다.


“사태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내 어찌 무고한 백성의 피를 쓸데 없이 땅에 쏟겠느냐?”


태자는 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 나무껍질로 남은 몇날을 지내다가 거기에 묻혔다 합니다. 비로봉 채 못가서 “마의태자능”이란 자그마한 토총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건”은 피흘림 없이 “신라”를 판도에 넣었습니다.


(2) 후백제의 “견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력 없는 군인이었습니다. 신라 서울 경주를 침략하고 호남 중심의 후백제를 세우기는 했습니다만, 935 A.D.에 맏아들 신검이 하루속이 왕노릇하고 싶어 자기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견훤”의 다른 자녀들이나 국민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내란 상태가 됐습니다.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왕”으로 맞이하여 극진한 예우를 베풀었습니다. 견훤을 따르던 유력한 고위층 사람들이 왕건에게 내응하기를 자원했습니다. “신검”은 936 A.D.에 군대를 동원하여 왕건과 최후결전을 시도했습니다. 참패하였습니다. 후백제는 완전히 왕건의 판도에 들어왔습니다.


고려왕조


918 A.D.에 고려 태조 왕건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신라” 때 판도 전부를 국토로 한 통일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만주에 사는 고구려 유민이 “발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국가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고려는 발해와 친했고, 발해도 고려와 형제같이 가까웠습니다.1)


1) 발해가 건국된 때는 698년으로 '남북조시대'는 엄밀하게 말하면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던 시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주의 원주민족으로서 “거란”이 강대하게 되어 자기들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후에 “금”나라가 되고 “청”나라가 되어 중원 천자로 군림하게까지 이르렀으니 미상불 원기왕성한 신흥민족이라 하겠습니다. 보통 여진족이라 부릅니다. “거란”과 “고구려”는 민족이 다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거란” 추장들이 팔월 추석날 “월별” 속에 “통문”을 넣어 추석날 달밤에 갑자기 발해 서울 동경성을 총공격하기고 하고 연합군을 편성 잠복시켰다 합니다.2)


2)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세웠고,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거란'과 '여진'을 혼동해서 사용하는데, 아마도 캐나다에서 범용기를 집필할 당시에 참고할 수 있는 사료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을 기억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족과 여진족을 혼동한 듯 합니다.


명절 기분에 들뜬 발해는 의외의 함성과 돌격에 당황 패주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합니다.


필자가 동경성에 들렀을 때, 본대로 말한다면 한국 것과 꼭 같은 기왓장과 다듬이돌, 경주에 있는 것과 같은 배가 부푼, 우물 등등이 폐허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인가는 없었고 바닥은 경학호 화산이 터질 때 분화구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잔물결로 굳어진, 하나로 얽힌 반석이었습니다. 그 위에 쌓인 먼지가 얕은 토양을 폈더군요. 남대문이 남아 있었는데, 한국의 성루와 그 구조가 꼭 같았고 다만 그 규모가 작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문외한도 “이건 우리 나라였구나!” 하는 인상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해”가 망한 것은 926 A.D.이니까 고려 건국 후 8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많은 피난민이 “고려”로 넘어갔습니다. “신라”가 고려에 정식으로 항복한 것은 9년 후인 935 A.D.랍니다.


936 A.D.에 후백제까지 망했으니 이제는 명실공히 왕건의 통일 조선이 됐습니다.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은 “만주까지 합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염원”에서였답니다.


왕건은 평생 북벌, 즉 만주 탈환을 꿈꾸고 있었다 합니다. 무던히 치밀한 작전계획도 꾸몄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는 종시 오지 않고 말았습니다.


왕건은 통일신라의 호족과 귀족들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란이나 사회질서 혼란의 틈을 타서 토지를 겸병하고 서민을 혹사하여 부자가 된 호족들과, 정치 군사면에서 공을 세운 “귀족”들의 세력을 뿌리 뽑을 실력도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무마하여 안전을 보장하려 했습니다. 그 지름길은 그들과 인척관계를 맺는 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딸을 왕비로 삼습니다. 왕건은 왕비 29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궁궐 안에서의 그 여인들의 사랑 싸움, 질투, 권력 다툼이 얼마나 앙칼졌겠는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거란” 관계


왕건은 북방민족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발해”가 여진족에게 멸망된 다음부터는 여진족을 몹시 경계했습니다. 신의 없는 약탈자로 규정지었습니다.3)


3) 원래 발해를 멸망시킨 것은 거란의 요나라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에게 복속되어 있던 말갈족이 후에 여진족으로 일컬어지면서 금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란”은 “거란”대로 고려를 침공합니다. 여진족 중에서 “아골대”라는 영웅이 나타나 거란과 모든 만주족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큰 나라를 세웠습니다.4)


4) 여진족의 '아골대'는 아마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 '완안아골타'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 거란의 세 차례 고려 침입은 여진족의 금나라가 아니라, 거란족의 요나라입니다. '완안 아골타'는 거란의 세 차례 침입 이후인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란”은 992 A.D., 1010 A.D., 1018 A.D. 등 세 번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격퇴되었습니다.


1018 A.D. 제3차 침공 때, “거란”은 10만 대군을 몰고 왔었으나 고려군의 총사령관 강감찬 장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전멸되고 약 3천명의 패잔병만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은 우리 민족국가의 자랑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거란”의 침입은 다시 없었습니다.


여진족이란 족속


여진족이란 만주일대의 토착민족이어서 문화는 보잘 것 없어도 “북방족”으로서의 기백과 저력은 강인했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문약”에 빠지지 않은 만성의 원기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골타”는 그런 인간들을 “군단”으로 단결시켜 한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약탈하고 점령하고 전리품을 나눠갖는 재미란 대단한 것이었나 봅니다. 아골타는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금”이라 일컫고 도읍을 “심양”에 정했습니다. 그는 금나라 태조가 되었고 그의 아들 “태종”은 만주를 통일하고 중원에 진출하여 송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부자를 사로잡아 갔습니다. “송”나라는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거기서 왕조를 다시 세워 소위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양자강 이북은 금나라 판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필자가 16세 때, 회령읍에서 약 40리 서북 쪽에 있는 “오국산성”이란 고장에 가 본 일이 있습니다. 천길 깎아세운 절벽이 두만강에 내리박혀 저절로 요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인가가 없었고 “휘종”이 유폐되 있을 때의 우물에 만년 맑은 샘이 고여 있었고 그 우물 이름은 “송제정”이라 했습니다. 휘종의 비각도 있었습니다. 강 바로 건너편도 높은 절벽인데 꼭대기에 암굴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한성재”라더군요.


장차 중국 천자 될 사람이 그 암굴에서 전략을 다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국산성”은 필자가 좀 더 풍부한 예비지식을 갖고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고장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 “여진족”이 “발해”를 망하게 했고, 이 여진족이 만주일대를 점령하고 “중원”에 진출하려는 기세를 보이고 있었으니만큼 “왕건”은 맘이 초조해졌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북진통일”을 서둘렀다 하겠습니다. 군사적으로 “북”의 남침을 경계하는 나머지 문화적으로는 당송의 높은 문화를 수입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러나 아직 “유교”가 수입되지 않은 처지였기에 “도교”, “풍수설”, “호국불교” 등등이 판을 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4)


4) 원래 발해를 멸망시킨 것은 거란의 요나라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에게 복속되어 있던 말갈족이 후에 여진족으로 일컬어지면서 금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여진”족과의 대결은 고려 왕조의 한 전통 정책이 되었습니다. 제16대 예종(1105-1122) 때에 “윤관”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여진 정벌에 나섰습니다. 여진족은 추장 중심의 원시사회 단계에 있었으므로 “윤관” 장군은 쉽사리 함흥평야를 석권하고 북청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진족은 “살려줍소”하고 애걸합니다. “윤관”은 결코 여진족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조에 순종한다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진 추장들은 고려조에 대표단을 보내어 고려왕조에 충성을 서약했나 봅니다. 왕은 윤관 장군에게 철군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점령했던 아홉성을 그들에게 도루 내주게 했습니다.


아마도 영토를 넓히면 그만큼 지키기가 어렵고 지키지 못해서 뺏기면 체면이 안됐고 하니 그들에게 자치하게 하고 “조공”이나 바치게 하는 것이 알맞은 정책이다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고려의 말기


당, 송 문화가 들어오면서 문신, 귀족이 전횡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청자기, 목판인쇄, 금속관 주자, 한약재, 인삼, 지필연묵, 금, 은, 동경, 비단 등속이 고려의 특산물로 되었고, 서예, 동양화 등에도 특출한 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민중화하지는 못했고 문신 귀족계층의 사치품으로 화신했던 것입니다.


문신귀족은 콧대가 높아서 왕실과의 인척관계를 맺어 왕권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대신 무신은 “문신” 귀족의 사병같이 푸대접을 받게 됐습니다.


각처에서 무력반란이 일어납니다. 묘청은 “서경” 즉 평양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송도”는 수도로서 판국이 시원찮으니 “서경”에 도읍을 옮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궐까지 지어놓았습니다. 평양 즉 “서경”에 천도만 한다면 정권은 자기 손에 들어온다는 것이 묘청의 계산이었겠지요. 그것이 잘 안될 것으로 판정되자 그는 자기 왕국 창건을 선포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대위”라 하고 연호를 “天開”(천개)라 했답니다.


고려 왕조에서는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토벌에 나섰습니다. 김부식은 중국 숭배자였습니다. 어쨌든 토벌은 성공했습니다만, 묘청은 민중 반란의 영도자로 요새 와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려 수도권 안에서 지금까지 차별대우 받던 무신들이 문신을 누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주역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단 정치권력은 잡았지만, 실지로 행정능력은 없는 인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체 내에 내분이 생겨서 서로 죽이자 보니 중견충이 붕괴되었습니다. 얼마 남은 “무신”들은 토지겸병과, 신변 보호를 위한 사병 양성에 혈안이 됩니다. 돈이 무지하게 듭니다. 돈 짜낼 데는 농민과 천민 계급이란 “광맥” 밖에 없습니다. 농민만 죽어납니다. 그래서 농민반란이 쉴새 없이 폭발합니다.


고려왕조 19대 명종(1190-1197)은 암매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정을 바로잡을 구체안도 갖고 있었답니다. 무신의 본산인 최충헌 자신도 국정쇄신을 위한 구체안 10조목을 “명종”에게 건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안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반란진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강력주의로 나갔고 군사권도 자기가 장악했던 것이랍니다.


“권력”이란 아편 같아서 중독성이 강합니다. 최씨는 자신이 왕이 되지 않는 대신에 왕을 맘대로 조종하고 세우고 갈아치우고 하는 권력을 걸머쥐고 있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최씨네 사랑방 안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몽고와의 관계


역사의 눈보라는 또 그 코오스를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사막의 유목민족민 “몽고”가 달려 나옵니다. 징기스칸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분산된 유목인들을 한 데 뭉쳐 한 거대한 왕국을 세웠습니다. 우선 “거란” 왕국인 “금”을 쳐부수었습니다. 거란족은 항거와 반란으로 맞섰습니다. “거란”은 고려와 연합하여 몽고에 항전하려 했습니다만, 고려는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거란”은 우선 고려를 침범했습니다. 굶주린 이리떼 같이 약탈합니다. 고려에서는 장본인인 몽고와 직접 외교관계를 맺음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했습니다.


거란군의 거점인 압록강 연안 강동성을 함락시키는 데 협력해 달라고 몽고에서 제의해 왔습니다. 고려는 그렇게 해서 거란군을 강동성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고종 6년 1219 A.D.에 몽고는 만주대륙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큼에서 멈출만큼 신사적인 몽고는 아니었습니다. 몽고군은 나선 김에 고려까지 먹고 갈 작정이었습니다.


1231년에 몽고군은 제1차로 고려에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몽고군 총사령관은 “살레탑”(撒禮塔 또는 撒利塔)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북 구성을 포위했습니다. “구성”은 요새여서 가장 중요한 전략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경손, 박서 등의 수비와 공격이 결국 몽고군을 패잔병으로 만들었습니다. 몽고군의 주력부대는 계속 남하하여 “송도”를 포위했습니다. 임금 고종(1213-1259)은 강화도에 천도했습니다.


몽고군은 사막민족이어서 생소한 바닷물에는 질겁을 합니다. 강화도까지 쳐들어갈 용기는 없었습니다. 고려의 “고종”은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목판을 시작했답니다. 나라 회복을 위하여 부처님께 고임을 받으려 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족들도 임금 따라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뭍에 남은 국민 전체는 자기네 끼리서 “민병” 단을 만들어 끝까지 몽고와 싸웠습니다. 농민, 천민, 노예, 초적, 다시 말해서 강도집단까지도 한몸 한마음 되어 몽고와 싸웠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게릴라전 중심의 전투부대였다 하겠습니다. 누가 임명한 것도 아니지만, 지도력 있는 “왕초”가 저절로 지휘관이 됩니다.


삼별초는 최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삼별초는 민간인으로서의 나라의 파숫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야별초, 우별초, 좌별초로 편대한 “항몽전투의용대”였습니다. 거기에 귀환 포로로 조직된 “신의군” 등이 가담하여 각처에서 몽고군을 격퇴, 격파했습니다. 진도가 본거지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몽고는 고려를 먹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장기전을 펼 수도 없었습니다. 몽고는 고려를 자기네 “위성국”으로 만드는 데서 멈췄습니다. 그 후의 고려는 몽고말을 쓰고, 몽고글을 배우고, 몽고에 조공물을 바치고 태자를 몽고에 인질로 잡히고, 몽고 왕실과 고려 왕실의 결혼관계를 맺고 하는 등등이 요청되어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고려 임금을 “폐하”라 부르던 것을 “전하”로 격하시키고 “조”나 “종”으로 부르던 “묘효”를 금지했습니다. 행정기구도 전면 개편하여 단일화함으로써 몽고의 간섭과 압력이 더 효과적으로 시행되게 만들었습니다.


몽고의 창업주라 할 수 있는 세조 홀필렬(쿠빌라이, 忽必烈)은 세계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중원에 진출하여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리고 1271년에 중국 천자가 되어 국호를 원이라 했습니다. 원세조는 “러샤”와 “유럽”과 “퍼샤”, “인도”까지도 정복했습니다.


일본은 바닷속 섬나라기 때문에 해군 없는 몽고는 고려를 앞잡이로 내세울 방침을 세우고 고려 백성을 총징용하여 배 만드는 부역에 밤낮 없이 혹사했습니다.


공사 감독은 물론 고려인이지요. 그리하여 1274년(충렬왕 즉위한 해)에 제1차 일본원정에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태풍계절이어서 모두가 바닷물에 먹혀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생, 사막의 “기마부대”로서만 지낸 몽고인이라, 바다의 태풍 계절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대신 고려는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몽고는 지금의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제주도를 자기들의 직접 관할 구역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 “과부, 처녀, 취고별감”이란 관청을 두어 미녀 공납의 책임을 지게도 했습니다.


그 때에도 만주에 정착해 사는 고구려 유민들 세력은 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유민들은 고려 편에 서서 몽고의 고려 지배에 항거했습니다.


몽고는 고려왕실 가운데서 暠(고)란 분을 심양왕으로 삼아 만주의 고구려족을 회유하게 했습니다만, 효과보다도 역효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공민왕의 비극


고려의 마감임금 공민왕은 단행력 있는 담대한 임금이었습니다. 한말의 대원군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원에서는 한족이 몽고족인 원왕조에 반기를 들고 각처에서 반몽전이 전개됩니다. “미륵불”이 강림하여 중생을 건진다는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이 폭력반항을 일으켜 전국을 휩씁니다. 소위 “홍건적”이란 반란민중입니다.


북중국의 원왕조 자체 안에서는 단말마적인 정권 다툼이 생겨 국고금은 낭비되었습니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은 굶어 죽습니다.


고려의 공민왕(1351-1374 A.D.)은 때를 놓칠 세라 원왕조에 항거했습니다. 왕 자신이 몽고식 편발을 풀고 몽고식 의복을 팽개쳤습니다. “친원파”를 용감하게 숙청했습니다. 원나라에서 직접 설치한 “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에 뺏겼던 우리 국토를 모두 회복했습니다.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금지하고, 국내의 권문 세도가들의 농민 착취를 금했습니다. 물론, 공민왕 이전에도 비슷한 개혁운동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만, 늘상 호족들의 반발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內患(내환)이 어느 정도 제거되었습니다.


그 밖에 또 하나 외우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해안에 불법침입하는 해적입니다. 보통 왜구라고 합니다만, 일본 “놈팽이”들이 갑작스레 올라와 약탈과 난행을 거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저런 “왜구”를 막으려면 세도가들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사실 홍건적은 10만명 단위로 1359년과 1361년 두 번에 걸쳐 고려를 약탈했습니다. 수도인 개성은 함락되고 공민왕은 피난갔었습니다. 이 때에 무장들의 활약으로 홍건적은 격퇴되었습니다만, 민간인의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정치 실권자였던 최영까지도 실각하고, 전후의 수습을 위하여 신돈이 총책임자로 등용되어 위에 말한 사회 개혁운동을 강력 추진시킨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노예해방, 전제개혁 호족 억압 등등이 진행된 것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번에도 호족들의 반발이 노골화하였습니다. 호족 귀족들은 “신돈”을 반역자로 몰아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이것은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민왕은 1374년에 궁궐 안 환관의 손에 살해당했습니다.


공민왕이 죽은 후, 친원파가 득세했습니다만, 대세는 만회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친원파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성계는 이자춘의 세력을 배경으로 고려왕조에 등용되었습니다. 그는 명장임과 동시에 정치가였습니다. 이성계는 홍건족에게 함락되었던 수도 개성을 1361 A.D.에 탈환했습니다. 몽고의 명장 납합출의 수만명 침략군을 함흥평야에서 격퇴하였습니다. 북방 변두리를 침범하는 여진족을 그때 그때마다 격퇴했습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다음에도 이성계는 여전히 국방에 전력했습니다. 1380 A.D. 우왕 6년에 운봉에서 왜적을 대파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기념비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