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4) 어릴 때 추억 - 아버님, 어머님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6 20:15
조회
490

어릴 때 추억 - 아버님, 어머님


아버님은 함자가 ‘호병’씨로서 백부님과 함께 ‘글 하신 분’이고 특히 시문에 능하셨다. 5형제 중 둘째 분이신데 형제분들 함자는 셋째분으로 ‘기병’, ‘연병’, ‘순병’씨시다. 아래로 세분 다 글은 못하셨고 셋째 숙부님이 무과로 ‘선달’이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넷째 숙부님은 베장사로 자주 서울에 드나 드셨고, 다섯째 숙부님은 소 장사로 황소 몇 마리씩 끌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거의 평생을 드나드셨다.


아버님은 글을 했으니까 과거 한번 보잖을 수 없대서 노자도 없이 호랑이 제집처럼 드나든다는 강팔령을 넘어 숙식은 김삿갓처럼 가다가다 걸리는 민가에서 신세지고, 험하고 가파로운 마천령을 넘고 도적도 많다는 삼방골을 누비며 석달을 걸어 서울에 간다. 그래서 어전에서 ‘과거’라고 보기는 했으나 낙방했단다. 어느 고을 원님도 차례가 오지 않아서 겨우 함남 문천 책실로 부임했다. ‘책실’이란 것은 지금의 비서실장 비슷한 직책이던 모양이다. 매관매직이 심했던 때라 그때 ‘원님’으로 문천에 부임한 사람은 일자무식의 ‘행운아’였다고 한다. 그래서 글 잘하는 책실이 반드시 옆에 있어야 했는데 아버님이 뽑혔던 것이란다. 송사가 들어오면 뒤에 숨은 ‘책실’이 판결문을 써서 슬그머니 원님 자리 밑에 밀어 넣으면 원님은 그것을 ‘호방’에게 주어 읽게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에 어머니는 갖 분가한 살림을 도맡아 몹시 어수선한데다가 첫 애기인 내 형님은 나면서부터 앓기만 했기 때문에 아버님은 가정책임상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 후에도 한 두 번 과거 볼 기회는 있었지만 아버님은 아예 단념하셨다. 가사도 가사였지만 국운은 것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고 기강은 무너지고 출세가 도리어 욕이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래서 그때부터 ‘창꼴’에 숨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으며 풍월을 벗삼아 흥이 나면 시를 쓰고, 안개 속에 약을 캐고 ‘형’을 도와 농사도 하시고, 아이들 모아 글도 가르치고 ‘유유자적’ 여생을 지내셨다. 1940년 2월 12일 77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경원군 용계면 함향동 평강 채동순씨 셋째 따님이시다. 향곡 선생의 사대손 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정약용과 함께 조선실학파의 최후를 장식한 ‘박제가’가 까닭도 없이 함북 종성에 유배되어 3년 6개월을 귀양살이 했다는 기록과 직접 관계된 것인지는 모르나 그때 회령, 종성, 경원에 걸쳐 회령의 최학암, 종성의 한봉암, 한치암, 남오룡재, 경원에 채향곡 등 실학파 석학들이 별 무더기처럼 배출했다. 학의 연원은 송우암으로부터 왔단다. 어쨌든 어머니는 향곡 선생 직계 사대손(?)이니까 가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후예임에 틀림없겠다.


어느 어머니도 그렇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 인자하셨다. 제사나 환갑 같은 집안 큰일 치를 때, 집안 어른으로서 수십명 젊은 아낙네들을 각기 책임 주어 일 시키고 보살피시는 온유하면서도 위신어린 어머니 모습에는 내 어린 마음으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수님이 상 차리실 때 나는 꼬마라고 작고 예쁜 놋주발에 밥을 담아주곤 했었다. 어머니는 ‘큰 그릇에 담아줘라. 그래야 사람도 큰 구실을 한단다’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밥 그릇만은 컸었다.


형님은 첫난이고 나는 막내나 다름없었기에 연령의 격차 때문에 ‘형제감’이 희박했었다. 형도 아버님과 꼭같이 근엄했기에 나는 무섭기만 했다.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할 정도였고 내 편에서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식사 때에는 더군다나 말이 없다. ‘식불언’(食不言)이라는 공자님 말씀대로였다.


어머니는 내 입에서 쌍스러운 말이 한 마디라도 나오기만 하면 결코 가만두지 않으셨다. 반드시 책망하시고 고쳐 주셨다. 언젠가 내가 못된 장난을 하다가 어머니께 들켰다. 어머니는 사랑방에 나를 혼자 데리고 가셔서 머리칼을 빗질해 주시면서 책망하셨다. 나는 어머니 얼굴에 그런 위신이 감도는 것을 전에는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못된 장난 하던 애가 후에 더 큰 인물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더라만!’ 하시며 한숨과 함께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게 됐다.


아버니와 형님이 모두 내게는 압력 권위였기 때문에 나는 노상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께 호소했고 어머니는 아버님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변호해 주셨다.


아버님이나 형님이 나를 사랑했을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유교의 계층 윤리가 인간관계에 경화증을 일으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랑이 원활하게 전달될만큼 맥박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중간 역할은 언제나 어머니가 맡으셨다. 내 나이 80을 넘으면서도, 지금은 없으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영원한 어린애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어머니(1862~1936)는 1936년 8월 10일, 75세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