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3) 어릴 때 추억 - 증조부님과 조부님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6 20:13
조회
694

어릴 때 추억 - 증조부님과 조부님


내 증조부님 함자는 ‘덕영’씨다. 선조 대대로 적지 옆 홍의동에 살다가 ‘상리’로 옮겨 우리 ‘종가’집을 세우신 분이다. 땅 약 3만평쯤 개간해서 일약 ‘대농’축에 들었다.


그 때에는 개간만하면 제 땅이었단다. 그 분은 성격이 호탕하고 괄괄해서 ‘영웅’은 못 되도 ‘호걸’에는 가까웠다고 한다. 일화로서 흔히 ‘기사년’(己巳年) 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사’년은 아버님이 여섯 살 때라니까 1869년 쯤이었을 것이다. ‘기사’년이라면 ‘飢死’를 연상하리만큼 곡식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흉년이었던 모양이다. 증조부님은 세월되는 꼴을 보시고 전 가족과 친척을 동원하여 심산유곡을 샅샅이 누비며 무릇 먹을 수 있는 푸성귀나 산나물, 산열매, 칡뿌리, 칡넝쿨, 머루, 나리 등속을 모조리 거둬다가 말리었다. 흉년든 원인이 여름내 비만 왔기 때문이었다니까 밭곡식 밖에 모르는 북관 농민들에게는 치명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지의 자연은 아랑곳 없이 제대로다. 오히려 더 잘자랐을지 모른다. 그리고 증조부님은 피해가 덜한 인접 고을에 다니면서 소금을 콩으로 바꿔 곳간에 쌓았다. 따라서 우리 가까운 집안에서는 희생된 사람이 없었단다. 그 무렵 적지 옆 홍의동에 남아 있던 친척 몇이 ‘아사’ 직전이라는 소문을 듣고 우차를 보내서 옮겨왔다. 그날 밤에 그들은 부엌에서 잤는데 아침에 보니 모두들 산더미 같은 배를 안고 정신없이 쓰러져 있더라는 것이다. 천정과 벽에 메단 메주를 기껏 먹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영양실조를 앓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여러 부락 사람들이 가정을 흩어, 죽든 살든, 제 손으로 빌어먹게 했기 때문에 증조부님 댁은 걸식자로 포위됐다. 처음 얼마 동안은 죽 몇술씩이라도 줘 보냈는데 차츰 감당할 수 없어 대문 빗장을 잠그고 농성했다. 아침에 대문 밖을 비스듬히 내다보면 뚱뚱 부어 늘어진 시체가 너저분했고 앞 시냇가에서는 어미가 자기 애기를 삶아 먹은 일도 있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우리 집안 꼴이 어떻게 됐겠느냐?“하시며 아버님은 감개무량 하셨다.


증조부님은 무당이나 점장이 따위를 온전히 무시하셨다고 한다. 밭 가운데 억년 묵은 ‘용왕목’이 있어서 모두들 거기에 고사 지내고 헝겊 조각을 매달곤 했다. 사람들이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한 덕택으로 그 나무 밑에는 유난스레 풀이 자랐다. 증조부님은 그 풀을 싹 베어다 소먹이로 썼다. 사람들은 질겁했다. ‘이제 큰 탈 날텐데 저 영감 어쩌자고 저랬나!’


그날 밤, 자정 때 쯤에 바깥 마당이 떠들썩 한다.


‘우리는 용왕목에 살던 도깨비다. 우리를 침범한 벌 받아라!’


증조부님은 분노가 치밀어 의복도 걸치락 말락 구석에 있는 홍두개를 휘두르며 창문을 박차고 나갔다. 도깨비들은 혼비백산 달아난 뒤였다. 동네 청년들의 장난이었는지, 증조부님 자신의 환상이었는지 그런건 알바가 없다. 나는 아버님 말씀 그대로 적은 것 뿐이다.


또 하나 – 아버님 결혼 날, 다시 말해서 우리 어머니 시집 오던 날, 동네 개구쟁이 젊은이들이 큼직하게 ‘달아 먹는다’면서 황소를 끌어내 잡으려고 덤볐다는 것이다. ‘울력성당’해서 기세가 대단했단다. 증조부님은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불한당 같은 놈들, 너희 하는 짓이 소고기는커녕 개고기도 못 먹을 녀석들이다. 썩 물러가 주는 대로 먹고 가라!’


산울림 같은 호통 바람에 모두 숙어들고 말았다.


이것은 그때 신부였던 어머니로부터 오랜 세월 후에 내가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행화춘’이라는 몸종까지 붙여, 어마어마한 행차로 시집왔는데, 소 한 마리쯤 ‘옛다’하고 던져줘야 사둔들 앞에서 위신이 설게 아니냐 하는 말씀이었다.


내 할아버지 함자는 ‘동욱’씨다. 동생되시는 분이 ‘동숙’씨인데 바로 옆집에 살으셔서 우리는 두 집에 분간없이 드나들며 장난하고 먹고 자고 했다. 두분 다 풍채 좋으시고 풍만한 몸집이 위압을 느끼게 했다. 할아버지는 거창한 ‘증조부님’ 그늘에서 자랐기에 독자적인 일화는 별로 없다. 큰 아버님인, 내 백부께서 평생 서울 계셨기에 조부모님들은 늘 허전하셨던 것 같다. 큰집 사잇방 아랫목에 호랑이를 그려 짠 보료를 깔고 머릿 맡에 문갑을 놓으시고 긴 장죽을 놋재털이에 땅당 두들기시며 종일 앉아 계신다. 손부가 진지상을 드리면 잡수시면서 무슨 야사 시븟한 이야기를 하신다. ‘이런 傳言이 있었느니라’하신다.


나도 구석쟁이에서 밥먹기에 바빠 들은체 만체, 손부님도 들은척 만척, 그러나 혼자 말씀으로 때로는 빙그레 웃으신다. 할아버지에게 안긴다거나 그 앞에서 응석을 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끔찍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수구주의자’였다. 그래서 백부님의 개화운동에는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벼슬이라도 하다가 때가 바뀌면 깨끗이 물러나 낙향할 것이지 ‘피발역복’(머리깎고 양복 입은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하고 ‘양이’(서양뙤놈)을 따라야 한단 말이냐?”하셨다. 특히 ‘단발’을 싫어하셔서 “‘승혈만항’(주의 피가 거리에 찬다)이란 예언이 있느니라”하시며 노기를 띠기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