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2) 어릴 때 추억 - 창꼴집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6 20:11
조회
952

어릴 때 추억 - 창꼴집


둘레가 40마일 쯤 되는 분지에 산맥이 둘러쌌으니 어디를 보나 ‘산’의 능선이 하늘을 만진다. 그 안에 여섯 부락이 있는데 송상동, 귀락동, 회암동, 농경동, 삼봉동, 그리고 오봉동이다. 지금은 ‘아오지로 통일됐다.’


내가 나서 자란 동네는 오봉동의 일부인 ‘창꼴’ 즉 창동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창꼴집’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일부러 지은 이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저절로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이조 때에 ‘비축미’ 창고가 바로 우리집 옆에 있었기에 그 동네를 창꼴이라고 하고 우리집은 ‘창꼴집’이라 했단다. 나는 ‘창고’를 본 일이 없다. 밭 한가운데 두드러기처럼 불룩한데가 보일 뿐 그것이 창고 터였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노성’ 봉우리가 흘러내리다가 ‘아차, 너무 내려왔구나!’하고 돌아 앉은, 집 한 채만을 위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동서남을 향했기에 햇빛은 남아 돌아간다. 집 구조는 여기로 말한다면 똑 같은 크기의 침실 넷, 침실들만큼 큰 부엌칸, 거기 이어 집새칸(소먹이 써는데) 방앗간(여인들이 발로 찧은 방아), 외양간 등등이 벽으로 가로 질린 한 채로 된 건물이다. 서재는 서쪽에 딴 건물로 됐는데 ‘봉계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한 채로 된 기와집이지만 서재는 초가집이고 거기에도 부엌, 베짜는 방, 널빤지 두는 방, 곡식 저장소 등등이 붙어 있다.


집 앞면은 물푸레 가지나 싸리로 엮은 ‘바재’(울타리)로 둘렀고 농기구, 우차등속을 넣는 고깐이 바로 ‘바재’ 옆에 서 있다. 집에서 이십보 정도 산 밑에, 스무자 깊이에서 솟는 샘물이 있어 우물이 맑다. 집터 주위에 자연스레 펼쳐진 ‘터 밭’이 만 평쯤 한 필로 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는 절벽이 되었고 그 절벽 밑은 흰돌, 푸른돌이 있는대로 깔린 냇가, 시냇물이 맑게 흐른다. 그 시냇가 벌판에는 개버들이 밀림을 이루어 여름철 꾀꼬리 노래가 시끄러울 정도다. 집 처마 끝에는 의례 제비둥지가 있어 강남갔던 제비가 다시 와 옛 집을 수리하고 새끼를 길러 날린다. 고즈넉한 밤이면 앞뒷산에서 접동새 울음이 구슬프다. 산비둘기, 부엉이가 ‘베이스’라면 꿩은 ‘테너’랄까, 어쨌든 심심찮은 자연의 ‘향연’이었다.


뒷산 꼭대기에는 노성(老城)이라는 한 옛날 ‘성채’(citadel)터가 있다. 앞면은 집더미 같은 바위가 와락 무너져 길이 없고, 길을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주위는 넓은 초장이 무연하고 물기가 축축해서 동네 소들은 모두 거기서 한나절 풀을 뜯으며 지낸다. 성채 및 가장자리에는 붓꽃이 수북하게 피었다. 뒷면에는 ‘성’에까지 오솔길이 늘여져 있다. 힘든달것 없이 발을 옮기면 정상이다. 두리뭉수룩하고 샘터도 있고 성터도 약간 남아 있다. 거기에 노갑(老甲)이란 장군이 살았었고 앞면 바위들은 노갑장군 부인이 치맛자락에 담아다 팽개친거라고 촌늙은이들이 전설을 일러주곤 했다.


두만강 가 여섯 고을은 땅 속이 온통 석탄이라니까 어느 태고적에 어마어마한 지변(地變)이 있었던 것은 상상할 수 있겠다. 노성 주변 뙤밭에도 화석된 나무등거리가 널려 있다. 보기에는 나무토막 그대론데 들려며는 천근무게다. 진짜 돌이다.


우리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송상이’ 즉 ‘송진산’이다. 푸른 능선이 하늘을 스쳐 달린다. 제일 높은 봉우리가 가마솥 엎어 놓은 모습인데 거기에 두 뿔이 마주 서 있다. 서쪽에 경흥과 경원 두 고을의 ‘진산’인 탑향산(속칭 탑고개)이 있다. 생김새는 송진산과 비슷하나 뿔이 없다. 둘다 장중한 ‘포오즈’다.


산과 인간과 생명으로 통한다는 것이 ‘풍수’ 신앙이다. 노성은 가까운 동네의 ‘성역’이어서 거기가 ‘명당’이라고 어느 족속이 ‘암장’ 즉 조상의 뼈를 몰래 묻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난다. 장마나 가뭄이 심하다든가 무슨 재난이다 유행병이 생기면 어른들은 우선 ‘노성’부터 점검한다. 누가 ‘성역’을 더럽히지나 않았나 해서다. 창꼴집 옆 골짜기에 유난히 늙은 버드나무가 있다. 그것도 소위 ‘용왕나무’여서 ‘성목’이다. ‘재액’을 위한 ‘방도’로 헝겊조각을 매달기 외에는 거의 ‘불가촉’이다. 건드리면 탈이 난다는 것이다. 송진산이나 탑향산은 ‘성역’이랄 것은 없으마 ‘영산’이어서 감히 정복했다거나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신령한 푸른 능선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으로 족해한다. 소낙비에 몸 씻는 맑은 푸르름, 흰구름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살짝 가리운 산기슭, 그리고 구름 위에 처든 머리의 드높음-이런 것이 내 어린 때 몸에 밴, 과장 아닌, 산의 신비였다.


송진산이나 탑향산 기슭까지 드문드문 인가가 몇호 있기는 하지만 ‘화전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집 형님은 한 해에 한번씩 송진산 기슭에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소 고삐를 꼰다. 섬유가 질겨서 노한 황소도 끊기 힘들다. 소들은 열발쯤 되는 이 고삐에 매여 왼 종일 뙤약볕에 쪼이며 물 한모금 못 마시는 일도 있다. 저녁 때 고삐를 풀면 쏜살같이 뛰어 앞 시내에서 샘물에 주둥이를 박고 무한정 먹이면 그것으로 소들은 행복하다. 이튿날 다시 풀 밭으로 끌려 간다.


이것이 ‘소팔자’다. 그대신 소는 못 고칠 병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잡아 먹지는 않는다. 돼지와 닭만이 먹히기 위한 가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