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12) 회령에서 3년 – 회령군청(16~18세)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30 10:08
조회
192

[범용기] (12) 회령에서 3년 – 회령군청(16~18세)


향동학교 시절에는 열렬한 민족지사였던 김회영 선생이 그동안에 마음에 돌려 먹고 보통문관 시험을 치러 합격과 함께 판임관이 됐다. 정복 정모에 한줄기 금줄이 번쩍인다. 옆구리에 칼까지 찼다. 내가 농업학교 졸업할 무렵 그는 나를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 고원으로 추천해서 채용되었다. 겨우 열 여섯 살 된 소년이다. 재무부 주임은 마쯔모도 히사오란 사람이었고 내 직속상관이랄 수 있는 간접세과 수석 서기는 소가라는 전형적인 일인이었으나 아주 소심해서 뽐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청내 분위기가 전혀 차별감을 느낄 수 없이 평등하였다는 것이다. 책임분야는 분명했지만, 지위로나 연령으로서나 차등대우는 없었고 용어에도 차별이 없었다. 군수와 주임은 종종 반말을 썼지만 서기급에서는 고원들에게 언제나 존대어로 대했다. 그렇게 평등일 수가 없었다. 간혹 ‘면’에 출장이라도 가면 면장님까지 쩔쩔맨다. 열대여섯살 소년이지만 ‘군’(郡)이란 후광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세 연초세과에 있었기에 시내의 공인 양주장에 다니며 처음 술죽 만들때부터 증류할 때까지 신고한대로 했나 돌아다니며 검사하고 증류한 술의 알콜 함유량이 34도를 넘지 않나 검사하는 일을 맡아왔다. 그것은 시무시간 이외의 ‘출장’으로 된다. 그리고 일년에 두어번 밀조주나, 담배 무허가 경작 등 범법자가 없나 해서 군 전 구역을 돈다. 그때에는 주임서기와 같이 간다. 장기 출장이기에 출장비가 꽤 된다.


나는 한번 회령군 용흥면 영천동 일대를 돌아본 일이 있다. 아주 치벽한 두메산골이다. ‘소가’서기는 이십일 가까운 출장에서 한 건도 범법자를 발견 못하면 복명할 면목이 없으니 하나만 사건을 만들자고 한다. 그런데 재가승들이 산다는 ‘멱사리골’ 입구 산 밑 외훗집에서 술죽 항아리를 발견했다. 사건을 만들면 이십원 벌금이다. 그때 이십원은 미화 십불에 해당한다. 가난한 산골 농가로서는 치명적인 부담일게다. 노인이 애걸복걸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재수없이 ‘복명’꺼리에 걸린 것이다.


우리는 사실대로 보고만 하는 것이요 사건판결과 벌금액수 등은 도청에서 직접 통고해 오는 것이었다. 후에 알아본 일이지만, 그 집에서는 그걸 물고도 그런대로 살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진짜 두메산골인 재가승들 마을로 들어갔다. 여진족 패잔민이 피난지에 정착한 고장이란다. 양켠이 가파로운 산이고 가운데가 좁다란 골짜기로 되어 꼬불거렸다. 사람들은 몸집이 크고 얼굴이 길죽하고 순진해 보인다. 귀일과 메밀이 주식이고 의복은 삼베를 광모고가 바꿔 입지만 대체로는 겨울에도 삼베 옷 그대로란다. 제일 그럴듯한 집으로 찾아가 하루밤 유숙을 청한다. 까맣게 그슬은 창문을 열자 파리떼가 확하고 낯을 덮친다. 방바닥에는 피나무 껍질로 엮은 자리가 펴 있었다. 기와집이다. 사잇방에는 한 육십 되어 보이는 노인장이 아랫목에 좌정하고 있었다. 저녁상이 들어왔다. 조와 귀일과 감자 등을 섞은 밥 그릇과 소금물 국과 소금을 뿌린 생무가 반찬이었다. 밥을 한 술 떠 넣었지만 씹을 수 없었다. 첫술부터 모래가 버석한다. “그래도 돌보다 밥알이 많을걸!” 했다는 농담으로 웃어버리기에는 너무 심각했다. 결국 못 먹고, 비상용으로 갖고 갔던 농마가루를 익혀 저녁을 때웠다. 자정쯤에 사람들의 ‘우, 우’ 하는 소리가 난다. 웬일인가 했더니 귀일 훑어먹는 곰떼를 쫓는 소리라 한다. 곰과의 생존경쟁이다. 사람들은 물푸레 껍질을 다려서 옷감에 염색한단다. 그래서 전부가 청바지 저고리다. 남녀관계는 비교적 개방적인 모양이고 성관계도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무슨 축제일에 동네 청년들이 모이면 그 집 삼밭은 결단난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들은 이야기다.


우리가 유숙한 집 노인 영감이 그 동네에서 제일 팔자 좋은 분이란다.


“쌀밥은 몇 번이나 잡수십니까?” 하고 내가 물었더니 “어디 쌀밥 있겠소? 일년에 두어번 먹는 내가 상팔자지요”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여진족인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재가승’이란 말도 남들이 하는 소리다.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다를 것 없는 한국 사람이었고 자연에 유폐된 동족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또 하나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곰도 얼굴을 내민다기에 우리는 동네 장정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물론 돈 주고 한 일이다. 길가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왜 여길 뛰쳐나가지 못하십니까?”


“생각은 있어도 그게 쉽지 않더군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