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12) 회령에서 3년 – 회령 간이농업학교(13~16세)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30 09:15
조회
261

[범용기] (12) 회령에서 3년 – 회령 간이농업학교(13~16세)


한 달쯤 집에 있었을까, 외사촌 형님이 ‘회령 간이농업학교’에 입학시킨다고 또 데리러 왔다. 나는 따라 나섰다. 삼월이라 눈이 녹으며 얼며 한다. 하루에 오십리 정도 밖에 걷지 못했다. 첫날에는 종성 남오룡재 선생 손부된 우리 외사촌 누님 집에서 자고 다음날 회령, 세곡 강부령, 영감댁에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회령읍에 가서 여관에서 잤다. 그 때에는 고무신이 없을 때여서 솜버선에 초신을 신고 간다.


녹지도 않은 눈얼음 반죽 길을 풍덩거리며 간다. 처음에는 시렸으나 나중에는 무감각이다. 그래도 발이 아주 얼지는 않았었다.


나와 관석 두 소년을 회령읍까지 데리고 가신 분은 물론 우리 작은 외사촌 형님이시다. 그는 관석군의 아버님이다.


이튿날 학교에 갔다. 회령읍 동문 성밑에 있는 기전 군청 ‘객사’가 우리 들어갈 학교 집이었다. 입학시험 시간보다 한 오분 늦었다. 그래도 관대하게 시험장에 들여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합격자 발표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외사촌 형은 하숙을 정해주고 학비를 다 치루고 한달 하숙비도 주고 가셨다. 이 학교 전임 선생은 두분이었다. 교장은 회령 공립보통학교 교장이 겸임하고 시간 강사도 보통학교 선생님이 대신해 주었다.


교두(敎頭)는 일본 분으로소 ‘세도사다기지’란 고추같이 작고 매운 진짜 일본식 인간이었다. 가장자리를 얄미울 정도로 다듬은 새까만 콧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애기도 없고 화분 가꾸기가 유일한 취미였다. 또 한 분 전임 교사로서 수원 농전 출신이니 학력으로는 월등하게 위인데도 실제로는 일본선생 조수격으로 자족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아무 인상도 감화도 받은 것이 없다. 그의 이름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보통학교 교사로서 최선생이란 분이 한 주일에 두 시간씩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다. 그때 소위 고등한문 독본이란 것은 제법 어려운 글이어서 퇴계, 율곡 문집에서 뽑은 것도 있고 경서와 사서에서 전재한 것도 있었다. 최선생은 정규사범 출신으로서 아직 젊으셨지만 한학에 조예가 있고 민족과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한문시간에 조선역사 이야기도 하고 퇴계, 율곡, 이충무공 등의 글을 읽어주기도 했다. 하루는 손필대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손필대가 장원급제하고 아주 양반 자세가 심한 양반 고을에 성주로 임명되어 갔다. 지금까지 이 양반세도가들 등살에 견디어난 성주가 없었다. 갖가지로 망신시켜 쫓는 것이 그들의 취미였다. 그 세도가는 한(韓)씨와 노(盧)씨 가문이었다. 손필대는 첫 시장(試場)에서 ‘한 노를 몰아 저는 토끼를 쫓는다’(韓盧而迫蹇兎)하는 방(시험제목)을 내걸었다. 이것은 통감에 있는 구절이다. ‘한로’(韓盧)는 유명한 사냥개 이름이다. 말하자면 노씨와 한씨를 사냥개로 몬 것이었다. 그런데 멋도 모르는 샌님들은 명문을 짓노라고 끙끙댄다. 그 중에 한 장 글이 들어왔다. “한도 큰 성이요, 노도 큰 성이니 두 성이 합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이 반드시 클 것이요 손자를 낳았으니 손자도 반드시 클 것이다”(韓亦大姓 盧亦大姓 兩大姓合生子 子必大 孫必大). 말하자면 손필대를 자기네 손자로 몬 것이다. 그런데 손필대는 그 글에 장원급제를 주면서 큰대자(大) 옆에 주필(朱筆)로 점(글이 좋았을 때 시관이 붉은 붓으로 찍어 주는 감격의 표) 하나씩 찍어서 내걸었다. 말하자면 큰 대자(大)가 모두 개견(犬)자로 돼 버리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한이란 성도 개성이고 노란 성도 개성이니 두 개성이 합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도 개일 것이고 손자도 개일 것이다’로 된다. 그래서 그 고을 세도 양반이라는 한씨와 노씨가 손을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야사에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우리는 무척 재미있어했다. 최선생의 의젓하고 어른다운 모습에 눈에 선하다


어쨌든 거기서도 졸업 때 첫째라나 해서 우등상을 탔고, 함북도지사상도 탔다. ‘우등생’이면 큰 사람 된다는 확률은 없다. 얌전한 샌님으로 끝나는 우등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도 후자의 하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