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9) 경원 함양동 3년 – 향동학교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9 08:48
조회
402

경원 함양동 3년 – 향동학교


그 무렵에 경원 함양동 외갓집 동네에는 사립학교가 생겼다. 거기 황수봉씨라는 경성 함일학교 다니던 분이 계셨기에, 우리 외사촌 형님들은 그이와 협력하여 사립 향동학교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학부 인가까지 맡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문화의 물결이 거기까지 배여든 것이다. 학교 재산은 오로지 채씨 문중에서 나왔기 때문에 설립자, 교장이 모두 채씨였다. 교장은 채규혁씨라는 촌 살림으로서는 가산이 알찬 분이었다. 교사로 있는 김회영씨는 우리 이모님 손자로서 백부님이 교장으로 계실 때, 서울 오성중학교를 제2회로 졸업한 정력있는 이십대 청년이었다.


내 아홉 살 때였든가 어느날, 외사촌 형님들과 김회영 씨가 우리집에 오셨다. 어머니께 안부 여쭙기도 할겸, 나를 구출할 계획에서였던 것 같다. 그들은 서울 우리 백부님이 어떻게 신문학에 열심이라는 것과 나라와 세상 형편으로 보아, 구학문에 매여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님께 역설했다. 아버님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그 동안에 계몽주의 서적도 많이 열독하셨기에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님은 개화운동 자체에는 찬동하면서도 일본 세력에는 질색이었고 오히려 원세개 편이었다. 어쨌든 설득이 주효해서 그들은 이튿날 나를 데리고 떠났다. 아버님은 내 며투리(삼으로 엮은 초신) 바닥에 두꺼운 천 조각을 꿰 붙여 주셨다. 산길 삼십리에 발이 부르틀까 염려해서였다. 나는 그때 엉덩이까지 머리태를 꼬아 드리운 진짜 ‘총각’이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곱게 빗질하고 새옷 입혀 보내셨다. 그들을 따라 하늘처럼 높아 보이는 ‘창령’을 넘어 고아산 골짜기 30리를 걸어 함향동 외갓집에 갔다. 70넘으신 큰어머니(외삼촌댁)께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외사촌 형님은 ‘우선 머리부터 깍자’하고 이발 기계를 꺼낸다. 앞 이마에서부터 밀어 올린다. 순식간에 구름 같은 머리칼이 신문지 위에 시체처럼 쓰러진다. 그리고 나는 ‘중대가리’가 됐다. 정수리에는 금 갈랐던 선이 신작로처럼 하얗게 남았다. 머리카락은 고이 싸서 짐 속에 간직했다.


나는 향동학교 삼학년에 편입되었다. 선생은 내게 이질뻘 되는 김회영씨이기 때문에 그는 꼬마 학생인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기백있고 건강하고 수재 타입에 야망도 컸었다. 분열행진 때 호령도 우렁찼고 운동경기 등에도 뛰어난 선수였다. 웅변도 잘해서 한 주일에 한 번씩은 온 동네 어른들을 초청하고 아이들에게 토론과 연설을 시키고서는 자세하게 평가해 주었다.


어려운 한문 읽더너 나로서는 소학교 공부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본말, 창가, 체조, 분열행진 등등은 서툴렀지만 곧 따라갈 수 있었다. 첫 체조시간에 다른 애들 눈치보며 뒤늦게 어정대는 꼴이 하도 우스워 구경 온 동네 어른들이 배꼽쥐고 웃어대던 광경이 지금도 선하다. 그러나 한문독본 같은 것은 배우나마나였다.


그럭저럭 한 학기를 지내고 학기말 시험을 치르게 됐다. 그때까지 향동학교에서는 ‘안학봉’이라는 좀 나이든 소년이 언제나 정상(Top)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동네 ‘토백이’가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굴러다니는 ‘놋장이’로서 그 동네에 정착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가난한 소작농인데 붕괴 직전의 초막에 살고 있었다. 그는 수재랄까, 어쨌든 소위 ‘반촌’아이들을 누르고 언제나 정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안군은 나보다 두세살 위였는데 마마를 잘못해서 얼굴이 엉망으로 얽었다. 힘도 세고 몸집도 컸다. 그런데 그 동네 어른들은 자기네 아이들 학업성적이 안군보다 못한 것 때문에 늘 불쾌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내가 같은 반에 편입되어 첫 번 학기시험에서 안군보다 월등한 상 위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어른들은 무슨 설욕이나 한 것처럼 통쾌해 했다. 그 대신 안군은 울었다. 나도 좋은 기분이기는 했지만, 들뜨지는 않았다. 잘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거고 못하면 떨어지는 거지 뭘 그렇게 흥분들이냐? 하는 쪼였다. 그 후에 나는 안군과 퍽 친하게 지냈고 성적에는 담담했기 때문에, 안군도 자기 실력대로 제 자리에 안정했다. 졸업때까지 그 질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때는 바로 ‘데라우찌’가 조선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무단정치를 한답시고 강압 일변도의 ‘불도저’를 밀어댔다. 일시는 조선 아이들 사기가 오른다고 소학교에서 체조경기, 분열행진 등 과목을 폐기시킨 일도 있었다. 하루는 김회영 선생이 우리 삼 사학년 아이들을 모아 놓고 통렬한 애국연설을 했다. 그는 일인이 어떻게 민비를 살해하고 궁궐 안을 마구 짓밟고 이등박문이 어떻게 농락하여 합방까지 강행한 것, 개화의 선열들이 어떻게 장렬했다는 것, 이준 선생이 할복하신 일 등등 사천년 역사와 이천만 민족이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느냐? 지금도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 제발 ‘여러분’은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대를 이어 싸우라, 하시면서 아이들 앞에서 통곡했다. 아이들도 덩달아 엉엉 울었다.


그 때 월급은 칠원씩이었는데 회령 탑동 사립 소학교에서 월급 십오원씩에 초청했기 때문에 그는 그리고 가게 됐다. 그 때가 하기 방학이라 나는 집에 와 있었다. 나는 회영 선생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있을 수 없는 일 같이 놀랬다. 아빠, 엄마가 ‘우리집’에 언제나 있듯이 선생도 ‘우리 학교’에 언제나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선생’이 갑자기 아주 떠나 간다니 모두들 서리맞은 햇내기 풀잎처럼 축 늘어졌다. 나는 30리를 뛰다시피 달려 외갓집에 갔다. 회영씨는 “아저씨 잘 오셨소. 나는 아저씨를 못 다 가르친, 남은 학기 과정을 며칠 동안에 다 가르치고 갈테니 염려마오”했다. 아닌게 아니라, 한 학기치를 며칠 안에 다 배웠다.


떠날 때, 그는 길가에 늘어 선 아이들 하나하나를 손잡고 격려했다. 아이들은 울었고 교실에 돌아와서도 종일 울었다.


그 후의 향동학교는 후손없는 초상집 같았다. 이런 선생, 저런 선생, 데려와 봤지만 선생같지도 않았고 선생답지도 않았다. 졸업기 가까이 되어서는 그나마의 ‘선생’도 가 버렸다. 그래서 김회영씨가 회령에서 일부러 내려와 시험보고 채점하고 졸업식까지 치루었다. 그는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나는 꽃 구경 온 파랑새 외다. 꽃도 좋지만 열매가 더 중하니 여러분이 큰 열매를 많이 맺히면 그때 또 와서 더 큰 축사를 하겠노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