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25)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2년생(귀낙동 학교에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3 17:17
조회
183

[범용기] (25) 소학교 교사 3년 – 교사 2년생(귀낙동 학교에서)


‘서당’은 학부형들이 서당 훈장과 일년 계약으로 시작한 것인데 어떻게 중간에서 학부형이 일방적으로 훈장에게 그만 두랄 수 있겠느냐는 것이 ‘서당해산’의 난제였다. 나는 강재용 씨와 의논하고 귀락헌병파출소장을 면회했다.


“우리가 우리끼리서 학교집을 수리하고 ‘보통학교’ 전과목을 가르칠테니 당신이 서당을 해산시키고 아이들을 모아줄 수 있겠오?”하고 물어봤다. 그는 당장에 “어디 해 봅시다”한다. 그는 키 크고 잘 생긴 시원스런 사내였다. 그는 이튿날 헌병보조원들을 시켜 ‘훈장’들을 모았다.


“이게 어떤 땐데 귀한 어린이들을 쓸모없는 바보로 만들려는 거요? 가르친 기간만의 학채를 받아 갖고 댁에 가서 집 일이나 도우시오”했단다. 물론 나 자신은 실제로 아이들이 모여지기까지는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헌병파출소장은 이어서 학부형들을 불렀다.


“내가 당신들 귀여운 어린것들 장래를 생각하고 하는 말인데, 서당은 해산하고 훈장에게는 가르친 달수에 따라 학채를 드리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시오. 곧 학교가 열릴거요”했단다.


그래서 서당은 며칠 안에 다 없어지고 아이들을 해방됐다.


나는 서울서 같이 지내던 오촌조카 희용 군과 또 한 젊은이와 셋이서 ‘교사 팀’을 짜고 ‘커리큘럼’을 만들고 셋이서 초, 중, 고 세 반으로 나누어 가르치기로 했다. 아이들은 백 열명인가 됐다. 고등반은 내가, 중등반은 희용, 초등은 김이 담임했다.


아이들에게 호미, 삽, 곡괭이, 걸래, 물통 따위를 가져오게 해서 운동장을 닦고, 창문들을 씻고 종이를 발랐다. 마루바닥도 말끔해졌다.


내가 담임 맡은 고등반은 나이든 학생들로서 몇 사람은 스물 두 셋 된 어른이었다. 나는 보통학교 사오륙학년 과정을 일년 동안에 다 떼도록 교안을 짰다. 보통학교 삼학년 정도의 연령층이 제일 많았기에 그것을 한 반으로 해서 희용 군이 맡고 일 이학년 나이의 아이들은 김이 맡았다.


다들 열심이었다. 내 반에서 가장 뛰어난 수재는 지금 로스엔젤레스에서 목회하다가 은퇴한 장기형 군이었다.


시작이 초가을이었기에 졸업시키려면 일년 반은 가르쳐야 했다.


다음 해부터 나는 일주일에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청년들과는 예배도 같이 보았다. 별 말썽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바빠졌다. ‘창꼴집’에서 학교까지는 거의 십리길이기에 매일 학교 옆 김기련 씨 집에 하숙했다. 기련 씨는 웅기 시절의 친우였는데 지금은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그의 부인과 외딸과 어머니가 그의 본집에서 산다.


큼직한 기와집에 농토도 적잖았기에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기련 씨 ‘어머니’는 굿으로 한 몫 보는 모양이었고 기련 씨 딸은 귀낙동학교 고등과 삼학년이고 ‘부인’도 예배에 참석했다. 나는 그댁 사잇방에서 유숙했다. 청년으로서 예배에 참석하는 분 중에는 김현규란 분이 있었다. 똑똑한 젊은이어서 말이 통했고 후에 설립된 ‘아오지 교회’에서 장로가 됐다고 들었다.


여름 중복이었던가, 어쨌든, 복날 밤이었다. 나는 혼자 학교 교실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근방에서 떠들썩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기련 씨 부인이 혼자 들어와 내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는다. “선생님 어디로 피하세요”한다. “지금 동네 청년들이 복날 막걸리에 얼근해 갖고 몽둥이를 들고 예수쟁이 교사를 쫓는다고 우리 집에 몰려왔습니다. 우리 집에 안 계신 걸 알면 학교에 밀려올 거예요. 어서 피하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웬일인지 마음이 유난스레 평안했다.


“괜찮습니다. 어서 댁에 들어가 보세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염려 마십시오.” 했다. 부인은 불안해 하면서도 그대로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고함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앉은대로 잠시 기도했다. 그렇게 평화롭고 기쁠 수가 없었다. 성령의 위로란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인간의 감정, 판단, 설계, 심리작용 등등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어지는 ‘영’의 감격이었다.


가까워지는 것 같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다들 도중에서 가버린 모양이다.


나는 영속하는 영의 감격을 염원하면서 아쉬운 새벽을 앉은대로 맞이했다.


그 후부터 아이들은 날마다 줄었다. 집에서 못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용감한 몇 아이들만이 집에서 쫓겨나고 매맞고 하면서도 학교에 나왔고 주일학교에도 나오곤 했다.


그 동안 내가 김기련 씨 부인 댁에서 하숙한다는 것 때문에 수근거린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남자 주인 없는 젊은 부인 집에 학교 선생이 유숙한다는 건 이상하다는 것이다. 기련 씨 부인은 나보다 두 세 살 위었는데도 사람들은 ‘까십’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남편 간지 4년이니 외롭기는 했을 것이다. 앞뜰에 자란 오얏나무에 오얏열매가 소북히 달린 걸 익은대로 따서는 고은 함에 담아 내게 갖다 준다. “첫 과일을 남편께 드리는 아내는 행복할거에요”하기도 한다.


세끼 밥상은 꼭 자기가 드리고 물리고 한다. 밤늦게 학교 사무실에서 돌아오면 새 이부자리가 고이 깔려 있다.


항도(港都)에서 치여난 부인이라 촌티 없었고 세상 이야기도, 교회 이야기도 주고 받을 지성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티끌만큼의 사심(邪心)도 없었다.


사람들이 ‘까십’을 지어 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자기 속의 사특한 생각으로 남을 보기 때문에 깨끗한 사람도 사특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예수님 때에도 그러했다고 자위하며 전혀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 부인도 같은 심경이었다.


어느 날 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만 있을 때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 마음 깨끗한 줄 안다만, 그런 소문이란 뒤집어 보일 수도 없을 것이다. ‘선생’은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도 여자 문제에 걸리면 억울하게 누명쓰는 경우가 있다. 세상이란 네 생각같이 간단한게 아니니 그 집에서 나오너라. 그리고 어려워도 집에서 다녀라……” 하셨다.


“내 양심이 결백하고 그 부인도 결백한데 사람들이 제 생각만큼만 여기고 그런 조언을 퍼뜨린다고 해서 내가 그댁에서 나오면 도리어 우습잖습니까?”하고 대답했다. 아버님은, “나오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대로 있으면 조언할 기회를 계속 주는게 된다”하며 강권하셨다. 며칠 후에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집에서 통근했다. 기련 씨 부인은 좀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 없었고 곧 다시 명랑해졌다.


어쨌든, 그 부인도 계속 신자로 지냈고 오랜 후일에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로 갔다.


그때 믿은 학생 가운데서 후일에 목사 셋이 났다. LA의 장기형 목사, 서울에 안세민 목사, 그리고 이북에서 농촌개량을 위한 농촌목회에 전력하다가 공산정권에 순교한 김내병 목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