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30) 인격수양의 과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1-21 09:10
조회
430

[범용기 제6권] (1630) 인격수양의 과제
- 흥사단 모임에서 -


나는 흥사단원도 아니고 흥사단원이 되기까지 통과해야 할 “심사”에 합격될 자신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흥사단에 드신 분들 중에는 내 선배 또는 내 친한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친근감”, 어떤 경우에는 “동지애”도 자연스럽게 느끼곤 합니다.


일제시대에 국내에서는 흥사단을 “수양동우회”라고 불렀습니다. 직접적인 독립운동 또는 정치운동이 아닌,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한 모임이란 뜻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제말기에 일본정부가 한국의 근본적인 “일본화”를 강행하면서 한국민족 말살과 “황민화”, 그 단계의 시책으로 “조선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 조선역사 말살과 일본역사화, 조선문화 그 전통과 습속의 말살과 일본신도화” 등등이 강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김윤경,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등이 검거되어 형편 없는 고문 끝에 무한정 투옥되었고, 수양동우회 역시 “민족주의자” 특히, 독립운동의 간접적 행동그룹이란 의미에서 종로서에 검거되었습니다. 때는 늦은 가을, 초겨울의 계절이라, 여름옷 차림으로 갑작스레 검거된 그들은 초겨울 음산한 지하실 유치장, 세면바닥에서 꼭대기 작은 부서진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눈보라에 떨고 있었답니다. 모두 40세 넘은 분들이라, 뼈에 파고드는 추위에 누덕진 몸이 얼음덩이고 굳어지는 괴로움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광수, 주요한을 수반으로, 김윤경, 이대위, 백영렵, 송창근, 정인과, 한승인 등 수십명이 투옥되어 재판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보석되어 집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린대서 “장공”도 부지런히 방청했습니다. 판사의 질문에는 이광수, 주요한이 대표로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광수의 진술은 문학적이었고 주요한의 진술은 이성적, 법률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일본어는 완벽하고 유창했습니다. 두분 다 “천재”라고 느꼈습니다.


경성 지방법원에서는 “독립운동”이랄 수 없으니 검사의 기소가 사실무근이라면서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검사의 상고에 의하여 복심법원에 넘겨졌습니다. 거기서는 의도적으로 피고들에 대한 불리한 증언만을 모아 유죄로 판결하고 10년 5년 2년 등의 형량이 선고되었습니다. 나도 방청했습니다만, 이건 진짜 엉터리라 느꼈습니다. 객관적 증거나 피고인들의 진술에 의한 판결이라기 보다도 판사 자신의 심증에 의한 “고집”이었습니다.


“안창호가 독립운동과 관계없이 이런 그룹을 만들었겠느냐? 양심대로 말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요. 그러나 법관으로서는 횡포에 가까운 발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지방법원에서 1년 2년 또는 반년 등 경한 형량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분들 중에는 대법원 상고에 동조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개정한지 불과 몇 10분 안에 “전원 무죄”를 선언하고 폐정했습니다.


“장공”은 대법원 판결 때에도 방청하려고 허둥지둥 쫓아갔습니다만, 한 10분 늦었었습니다. 바로 현관문 밖에 도착하자, 모두들 와 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무죄야 무죄!” 하면서 내 손을 잡고 기뻐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니고 내 허물없는 친구들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 단체라는 것이 법적으로 확인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까놓고 말한다면, 흥사단의 창설자인 도산 선생은 애국자요, 독립운동 지도자요, 혁명가요, 사상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가”였습니다. 그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해외로 떠날 때, 남기신 “거국가”는 “장공”도 소학교 시절에 배운 노래였습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그가 해외에서 교포들을 발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특히 상해임시정부 각원으로 있을 동안에는 내무총장, 노동총판, 재미국민회 중앙총회장 등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끼리서의 불신, 배신, 헛된 공명심, 권모술수, 지도자들의 불화, 비겁한 변절 등등에 좌절과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구서야 어떻게 건국대업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장기적이긴 하겠지만, 민족성 자체의 개조부터 시작해야 하겠다고 통감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민족이 세우는 나라는 그 민족의 인간됨됨의 정도를 넘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필자가 접촉한 경험으로서는, 연희전문의 김윤경 교수 같은 분은 수양의 높은 경지에까지 올라간 분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는 흥사단원으로서 매일 생활보고를 본부에 제출하고 있었습니다.


“독서”는 무슨 책을 몇페이지, 운동은 무슨 운동을 몇 시간,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음식은 무슨 음식을 몇 번 등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무실” “역행”이 안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현배 교수도 그러했다고 짐작됩니다.


국어학계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그런 규율 있는 수양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겠습니다.


나는 잘 모릅니다만, 생각건대 도산선생께서 흥사단을 구상 발족하신 데는 개별인격 개조에서 민족개조에로 나아가서는 “조국재건”이라는 “정치목적”까지 포함시킨 설계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애국자의 최종 목적은 “새 나라 건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모임에서 어떤 젊은 “단원”(?)이 발언한 말은 당장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격수양을 위한 단체요 정치와는 무관하니 정치 얘기는 삼가시오……!”


이런 말은 일제 폭정시대에, 그래도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으로 택해진 생존전략이었고 흥사단의 근본목적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서와, 민주당 정권 초기에 흥사단 지도급 인사들이 정계에 “데뷰”하여 고위 행정관으로 활약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흥사단으로서의 정치 프로그램이 청사진화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한 초기 역사에서 해방 한국의 새 나라 초석을 제대로 세우는 영예를 어느 정도 일실한 것이 아닌가 싶어 자못 애석하게도 생각됩니다.


사실, 어떤 단체, 그것이 “정당”이 아닌, 인격수양 단체라 하더라도 실제상 정치관련에서 제외될 수도 없고, 제외된 것 같이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진실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정치권 외에서 살 수가 없다면 평소에 확고한 정치이념과 그 현실을 위한 정열을 드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존 정치 압력에 대결할 용기와 효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세취이가 고작일지도 모릅니다. 적이 나타나기 전에 항복 준비부터 서두를 경우도 있겠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앞에서의 국내 흥사단 형태는 맛 잃은 소금이란 평도 면하기 어려운 열매를 거두었다고들 합니다.


처음 도산 선생 묘소는 미아리 공동묘지 능선 너머에 있었습니다. 어중이 떠중이 무덤들 옆이었습니다. 분묘도 보통보다 조금 큰 봉분이었고 그 앞에 세운 비석도 보통 크기였습니다. 흥사단원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명색이 목사라, 장례식 주례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묘지까지 따라가게도 됩니다. 나도 그럴 때마다 도산선생의 묘소에 성묘할까 방문이랄까 하지 않은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민중의 지도자로서 민중과 함께 계신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런 명사들의 후광을 자기 권력 확보의 전략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한강 건너에 “도산공원”을 만들고 도산묘를 거기에 이장하고 어마어마하게 “귀족화”했습니다. 그리고 이장식 프로그램 일체를 흥사단에게 맡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산선생 추모사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맡아했답니다.


이 일련의 행사 때문에 함석헌 선생은 그 독특하고 신랄한 필봉으로 “흥사단에 의하여 박정희에게 팔려간 도산은 통곡한다……”는 내용의 꾸지람을 터뜨린 일이 있습니다. 이건 내가 북미주에 옮긴 후에 된 일들입니다만, 아무리 관대하게 본다 하더라도 “도산”이 국내에서 국내 흥사단에 의하여 빛나게 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게 된 실정입니다.


나는 일제시대 말기의 친일 기록들을 수집 출판한 “친일문학전집”이란 책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웹스터 딕셔내리” 만큼이나 큰 책이었습니다. 친일 인사들의 행적과 문헌들을 수록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춘원”이던가 주요한이던가가 남긴 일문으로 쓴 “천황찬가”는 일본인 작가로서도 따라가기 어려운 “명작”이라고 감탄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 그들이 국내흥사단 간부 또는 대표자로 버젓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도산 선생의 후에에도 신의와 기강이 허술해진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나는 이런 약점이 흥사단에서 인격수양과 정치 훈련과를 분리시킨 데서 파생한, “벌레먹은 열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도산선생을 창설자로 모신다면 “도산”의 독립운동과 정치이념 등을 청사진적으로 계승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박정희의 자기 독재권력 선전용으로 팔리는 일쯤은 거부할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김종필과 “도산”이 어찌하여 그렇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친화될 수 있을까?


해외의 흥사단원들은 이런 점에서 도산정신을 선양함과 아울러 그의 정치구상과 그 시대적인 발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본인은 단원이 아니지만 흥사단에 지대한 관심과 경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이런 말씀을 여쭙는 것입니다.


망언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1977. 7. 23. 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