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29) UM 창립총회를 열면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1-21 09:07
조회
366

[범용기 제6권] (1629) UM 창립총회를 열면서


1969년 3월 – 두 임기 밖에 연임할 수 없다는 헌법에 손을 얹고 국민에게 서약한 박정희 대통령은 3선제로 헌법을 고치자고 발표했습니다. 국민은 분격했습니다.


“이것은 독재선언”이다. “이것은 평생유임의 속셈이다” 등등.


정계의 여ㆍ야나, 기독교계의 신교ㆍ구교나, 기독교 교수협의회 회원이나, 종교에 무관한 학계인사들이나, 언론인이나 학생이나 법조계나 일반시민이나를 논할 것 없이 모두가 반대였습니다. 국회의 여당 의원들까지도 찬반으로 갈라졌습니다.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3분의 2 찬성표를 얻기는 절대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국회의장이란 분은 “이효상”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항간에서는 그를 “박정희”의 “바지 저고리”라고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의사당에 농성하여 밤을 새고 있었답니다. 토요일이었습니다. 밤 12시가 되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이제부터는 일요일인데 ‘의사일정’도 없으니 해산합시다” 했답니다. 그래도 미덥지 않아서 국회의원들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더군요. “그럼 나는 갑니다” 하고 이효상 의장은 뒷문으로 퇴장했는데 공화당 의원 몇 사람이 그를 따라 나가더랍니다.


그들은 뒷 판자문을 떼고 어두컴컴한 뒷골목 건너편에 있는 국회의사당 “별관”에 들어가 껌벅이는 촛불 몇 개를 켜고 모여 섰습니다. 이효상은 “통과했습니다” 하고 딱딱 책상을 두드리고서 생쥐 같이 도망쳤습니다. 새로 세시였습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당장 서명하고 대기시켰던 기자들에게 발표했습니다.


신문들이 그 동안의 국회내 분위기와 경과와 조작 통과 진상을 보도했을 때 국민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습니다.


국민은 확실히 “주권”을 도적맞았습니다.


누가 도적질한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되찾으려는 운동은 누가 보아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1969년에 구성되었습니다. 단일야당이라는 신민당, 그 밖에 “군소정당” 퇴역장성 중 몇사람, 학계, 종교,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 등등 총망라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거의 전부가 개인자격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38선을 합법화하는 소위 “유신헌법” 초안은 “도물시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품 안에서 “귀공자”로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르겠습니까. 1971년 유신체제가 공포되고 그 다음해에 유신헌법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헌법에는 “비상조치령”이라는, 박정희 “작품이 머리에 씌워져 있었습니다. 계엄령 비슷한 것인데 대통령이 계엄사령관까지 겸임한 조치였다고 하겠습니다.


정부에서 공포된 새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야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인의 비밀투표 행위는 맘대로 조작하기 어렵다는 것을 4.19 때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이나 어촌민의 “표”는 도지사로부터 말단 면장, 동장 파출소 소학교 교사들까지 총동원하여 미리 매수하고 투표날에는 전국 트럭을 동원하여 투표장까지 실어왔습니다. 순진한 촌 어른들은 어린양 같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유신헌법은 통과됐답니다.


유신체제가 선포된 다음 해에, 그래도 “민주주의”에 싦아할 수는 없다고, 종로 중앙 YMCA Bar에서 민주인사 15인이 모여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학생들의 데모가 매일같이 전국 각처에서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박정권”은 그만큼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KCIA는 거의 “만능”이었습니다. 피의자가 심문 중에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도록 돼 있다고 했습니다. 서울법되 최종길 교수의 고문사, 장준하의 의문사, 그 밖에 어둠 속에 매몰된 원혼들의 시체 – 그 수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작된 민혁당 사건의 무더기 살인극, 숱한 청년 학생들의 연행, 고문, 미인계 유혹, 수감, 투옥 등등은 “연속극”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비인간, 비민주, 반민족의 불법, 횡포가 범람하여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Demonish Power에 항거하는 국내 민주전선은 처음부터 저절로 범국민적이요 동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와 정의를 위해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의 이런 의로운 기개와 용감한 투쟁이 국외에도 번졌습니다. 그래서 한국민주화 운동은 국내 국외가 공동전선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박”의 독재정권은 갈수록 고립되고 자유한국을 위한 운동은 점차 확대되어 지금은 세계가 우리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카터 정권에서도 “인권”을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적어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진실”인 것 같습니다.


1976년 우리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하여 북미주에 “North America Coalition Human Rights in Korea”가 미국 NCC안에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북미주 항인사회에서도 각 지방 한인 민주단체들을 총망라한 연합체로서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 - “한국 민주화 연합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금년(1976년) 1월에 L.A.에서 예비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연합 “체”라 하지 않고 연합 “운동”이라고 한 것은 일은 별로 못하면서 “기구”만 만드는 것이 한인사회의 “폐단”이란 것을 절감한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Super Structure를 만드는 것보다 실제 운동에 치중하자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헌장은 있어야 하겠기에 “약법 3장” 식으로 간단한 합의안이 “Coalition” 성격의 것으로 초안되어 오늘 그 첫 총회가 모이게 된 것입니다.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7인위에서 제출한 헌장초안을 충분히 검토 채택할 것과 그 헌장에 따라 해야 할 사업을 계획 추진할 것과의 두 가지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지방 민주단체들의 요망사항을 소개하겠습니다.


(1) 권위주의적 하향식 헌장을 만들지 말 것.
(2) 지방 민주단체들의 자치와 창의에 간섭, 침해 등 권위주의적 행동이 없을 것, 따라서
(3) 전국기구가 구성된다 하더라도 Coalition 성격의 범위를 넘지 말 것 등등입니다.


그래서 이번, 지방단체 대표자들 선출 방법에 있어서도 각 지방단체에서 예정된 대표자 수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선출한 명단을 중앙 사무국에 보고하고 그 보고에 따라 중앙 사무국에서 보내온 “대표자 권”을 가진 사람만이 정회원으로 언권과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당면과제는 남한의 민주화와 남북한의 통일문제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긴박한 운동목표는 남한의 반독재 민주운동 지원입니다. 당장 우리가 이런 과제를 논하고 있는 동안도 남한의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은 목숨을 모험하고 있습니다.


“4ㆍ19 고난선언”을 외치고 잡혀간 한국신학대학생 5명은 “반공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남한산성 밑, 구석진 비밀 유폐소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일제 말기에 헌병들이 “不逞鮮人”(불령선인)을 처형하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이 학생들의 구출을 위하여 N.Y.에서는 매일 기도, 송금, 격려전보 등으로, 와싱톤에서는 강력한 Lobby로 분주하답니다.


국내에서의 “남북통일운동”은 거의 질식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박”은 반박정권=용공=친공=이북스파이=국가반역=사형이란 공식을 “국시”로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만큼 통일에 대한 연구, 이북 공산독재의 실태파악, 국제정세, 재외교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촉진 운동 등등은 직접 우리의 당면과제로 채택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한의 민주통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요”, 공산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6ㆍ25의 이북 남침은 남한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남한 국민은 그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오히려 더 굳은 신념으로 반대한다고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선 남한의 반독재 민주운동 지원에 대동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체 안에 쐐기를 박을 만한 “균열”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근자에 KCIA의 국외 교포사회 교란작전은 가속도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교포간의 이간책, 공갈매수, 불신 분위기 조성, 개인 이해 관계를 이용한 개별 격파,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 유포 등등으로 교포단체 자체의 무기력화, 좌절감 조장, 무관심 등등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민주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전투의 장기화를 원망하지 말고 장기전을 위한 “의식화”를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기회”는 “준비”한 사람에게 옵니다. 너무 피곤하면 얼마 쉬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포기”는 금물입니다.


이것으로 개회사에 대신합니다.


1977년 6월 23일
St. Louis UM 창립총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