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28) 복음의 새로운 이해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1-21 09:03
조회
315

[범용기 제6권] (1628) 복음의 새로운 이해


“하느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서장에 “하느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그 분이 곧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 예수시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인간을 그 비인간화한 모든 경지에서 구출하여 다시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친히 “인간”이 됐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연합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 인간의 비인간화, 인간학대는 그칠 줄 모릅니다. 정치면에서 독재정권, 경제면에서 독점재벌 등이 어떻게 인간을 잔해하고 착취하고 노예화하고 살륙하는가는 이제 덮어줄 수 없을만큼 고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모든 데에 “인간조건”이 선행할 만큼 인간이 Close up되었습니다.


미국의 “지미 카아터”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대 모든 정책수립에 인권과 민권을 선행시킨다고 선언함으로써 당선되었습니다. 정치ㆍ경제ㆍ종교ㆍ문화 등등이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고 인간이 그런 것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런 것들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ㆍ기계ㆍ가축ㆍ재산목록 등일 수 없다는 것이 상식화했다는 말입니다. 신학은 오새는 “인간론”부터 시작합니다. “인간” 구원, 즉 신학에서의 “구원론”도 개인 영혼의 사후영생이라는 타계 낙원설에 머물지 않고 얽히고 설킨 세계적 인간사회로서의 Total Salvation을 지향하는 시야에서 인간을 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기독교 “복음”도 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도 “본래의 것”이겠습니다만 그 동안에 너무 왜곡된 해석으로 그 정체가 모호하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명등에 Focus를 맞춰서 그 본모습을 찾자는 것이 되겠습니다.


탐조등의 광파 속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인간학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1] 한국 교회의 율법주의


(1) 인간은 죄인이란 것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때, 유태교의 율법주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서나 온전히 의로운 생각, 감정, 의지, 언어, 행동만을 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장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 – 장담하는 그것이 그의 인간교만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교만”은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가운데서 제일 으뜸가는 죄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다 죄인이라면 – 그러면 “죄”가 무어냐? 무얼 잘못해서 “죄인”이 됐느냐? 하는 것이 당연한 첫 물음일 것입니다.


1885년 한국교회 창설 당시 선교사 시대로부터 물려받아, 50년래 “정통”으로, 굳어진 “죄”의 속알을 본다면! (1) 십계명에서의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한 것이 거의 절대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어떤 “신”을 상징해 만든 석상, 목상, 불교의 불상, 유교에서의 위패, 칠성기도, 상산제 등등을 통털어 우상숭배로 몰아치웠습니다.


이조 5백년래 국교적인 위치를 자랑하던 유교에서 제일 먼저 반발했습니다.


유교에서의 상ㆍ제 의례는 “효도”를 근원으로 한 “예절”인데,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의 제사를 폐할 수 있느냐? 예수는 못 믿어도 그건 못하겠다…”고 선택 없는 결단을 합니다.


“불상” 때문에 불교는 덮어놓고 우상종교로 취급됩니다. 탁발승에게 쌀 한줌 “동량”을 줘도 책벌 받았습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결사 거부한 분들도 “우상헤게 절할 수 없다”는 심경이 그 행동의 중요한 동기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본천황”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산 “우상”에게 요배하는 “종교행위”에는 “거부” 의식이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더군다나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에 항거한다는 기독교 사회윤리적 의식은 아직 싹트지 못한 때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쯤은 “몰라서…”란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에는 남과 북이 다같이 어떤 한 인간을 절대화하여 “신”의 자리에 앉히는 우상숭배 행위가 조직적으로 강요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독자의 태도는 명백합니다. 우상숭배냐, 우상파괴냐의 둘 중 하나를 택할 밖에 없습니다.


“아니오” 하면 우상파괴 편이 되고 “예” 하면 우상숭배의 일원이 됩니다. 초대 선교사들의 거의 무분별한 파괴운동은 이 역사의 최후 결승전에서 무력화했습니다.


둘째로 : 초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승된 기독교 윤리는 굳어진 청교도 윤리였습니다. “바리새”적인 말단 윤리, 율법화한 형식주의 윤리였습니다. 술ㆍ담배 금하는 것, 불상, 불교와 절연하는 것, 제7계명인 간음 또는 음행을 엄금하는 것,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 안식일(일요일)을 엄수하는 것 등등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나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소극적인 “금계”를 기반으로 한 구약 율법주의 윤리였습니다. 신약적인 은혜의 윤리, 사랑의 윤리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윤리였고 국가, 사회, 국민, 민족적 윤리에는 거의 Touch한 바 없었습니다. 독립선언서 33인 중의 기독교측 민족대표자들도 민족적인 인연에서였고 떳떳한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가 아니었답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일에 가담한 것이고 정치에 개입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청교도적인 범죄의식에 한 조항 더 써넣은 “주홍글씨”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사실, 마포삼열 선교사는 길선주 목사님에게 “목사로서 안할 일을 했다”고 충고했단 말도 들려왔습니다.


이런 윤리개념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갈다귀는 걸러먹고 약대는 통째로 삼킨다”는 양심상태가 생겨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벌써 그런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죄”란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인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요소를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죄”라고 규정합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인간회복, 인간구원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 인간을 유혹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것,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것, 인간의 창조성을 위축시키는 것,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 등등이 가장 근본적인 범죄행위라고 봅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존엄한 인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그 권리를 찬탈하는 자에게 굴종하거나 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어떤 체제든, 집권자든, 법이든, 조치령이든 간에 그것이 인권과 민권을 무시하고 강압하는 한, 그것은 범죄적인 권력인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적인 근본입장에서 본다면 “독재”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좌든, 우든, 독재는 우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부터 착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권력구조라 하겠습니다. 선의의 독재, 조속한 능률적인 현대화를 위한 독재, 안보를 위한 독재 등등 “미사여구”로써는 기독교를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독재 자체가 “악”인데 “선의”의 독재가 어디 있습니까? 능률이니, 안보니 하는 것이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인데 인간성을 파괴하고, 민족정기를 오염 위축시키고서 무슨 능률이고 안보입니까?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고 예수는 말하였는데 독재자는 자기의 불의한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무죄한 인간을 무더기로 살육하고서도 당연하게 여급니다. 이북에서의 “숙청”, 이남에서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 연행, 고문, 감금, 투옥, 장기 징역 등등은 “극”을 향해 치솟는 “죄”의 “마광”입니다.


[2] 둘째로 –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기쁜소식”이란 말인데 무엇이 기쁜 소식이란 말입니까?


“복음”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해방”의 소식입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고 공생애에 들어갈 때, “천국이 당장 임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했습니다.


“천국”이란 것은 “하늘나라”란 뜻인데 마태복음에서 즐겨 쓴 어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로 “하느님 나라”로 기록돼 있습니다. 결국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 영원 무궁한 이상적 왕국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 전 우주와 자연을 예외 없이 포괄한 “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설교 실현에 동원된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신자요, 성직자요, 나아가서는 전세계 모든 인간들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우리에게서 뺏을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어리석음”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푯대를 향하여 일사불란 달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데에 함께 계셔 주십니다.


전세계 신앙동지들이 구름같이 둘러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졌습니다. 그 패잔병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977년 2월 24일
N.Y. 만하탄 교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