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6권] (1626)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준다면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11-15 08:19
조회
362

[범용기 제6권] (1626)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준다면


예수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다른 민족, 다른 나라, 다른 사회계층, 다른 생활양식, 더군다나 서로 적의를 품고 있는 인간 관계에서 차별대우 때문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얘기의 내용을 말씀드린다면 어떤 유대교 율법 학자가 예수를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는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은 율법학자니까 율법은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당신은 이 과제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예수는 그의 현명한 대답에 감탄했습니다.


“당신 대답은 훌륭합니다. 가서 그대로 행하시오!”


다시 말한다면 “그것을 생활화하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것은 그 생명의 시간적 길이, 즉, 끝 없이 오래 산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는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 길이길이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삶의 ‘부피’가 아니라 삶의 바탕을 의미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삶의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살려는 의욕에 몰려 살려고 활동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원불변할 가치를 가진 삶이란 어떤 것일까를 알지 못하고, 되먹지 않은 삶에 일생을 날려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그 율법학자는 그런 삶의 낭비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서 이 질문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예수는 서른 세 살 정도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나는 지금 일흔 여섯 살입니다. 예수의 두곱 이상 산 셈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바탕으로 본다면 예수의 그것에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삶의 넝마밖에 남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33년이란 짧은 삶은 그 삶의 속에 품겨 있는 가치의 영원함에서 영원한 삶인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도 그런 삶의 비결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비결은 그 자신이 벌써부터 갖고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 뿐입니다. 예수는 시계 바늘을 정확한 시간에 맞춰놓듯 이 율법학자의 지식을 그의 삶의 초점에 꼭 맞춰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욱 더 어려운 문제가 떠 올랐습니다. 그 계명을 알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라, 그리하여야 영생을 얻는다 했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한다는 것도 끔직스레 어려운 낱말이지만, 사랑을 실천하려면 사랑하는 주체인 “나”와 사랑받는 객체인 타인이 설정돼야 하는데 내 사랑 받을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동네 사람들입니까? 내 가족입니까? 내 친척입니까? 내 친구들입니까? 내 동족입니까?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들도 내 이웃입니까? 억울하게 차별대우 받는 인종이나 민족이 차별하는 인종이나 민족을 이웃이라고 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은 있다 해도 그렇게 될 성 싶습니까? 고도의 문화를 가진 시민이 야만인을 자기 이웃으로 자기 같이 사랑하란 말입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은 2천년 지난 지금에도 변함없이 제기되는 영원한 질문입니다.


예수는 이 복잡스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지으셨습니다.


이 비유의 줄거리를 요약해 봅시다.


어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소지품을 다 뺏기고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 되어 길가에 쓰러져 다 죽어가는데, 그 앞을 지나가는 제사장도 못본 체 외면하고 레위 사람도 손 안대고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죽어가는 사람의 상처를 기쁨으로 닦아주고 천으로 감아주고 자기가 타고 온 나귀 등에 태워 여리고까지 가서 여관에 뉘어주고 음식을 청해 먹이고 간호를 부탁하고 모든 비용을 자기가 내고 떠나면서 “이 분을 잘 간호하고 대접하고 쉬게 하시오. 그 동안에 든 비용은 내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리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조난자의 이웃이 누구겠소?” 하고 예수는 율법학자에게 반문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할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이 비유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1)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대신에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 하고 자문자답해 보라는 뜻입니다. 자기 중심의 이웃개념에서 이웃중심의 자기 개념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그 주격의 위치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본 회퍼의 ”타인을 위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겠지요.


(2)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려고 해도 내 이웃이 돼줄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경우에 나는 무작정 기다려야 합니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말씀했습니다. 내 이웃이 돼 줄 사람을 소극적으로 기다려야만 할 것이 아니라, 네가 적극적으로 네 이웃을 만들어야 한다. 너는 “이웃 창조”에서 선(善)해진다 하신 것입니다.


(3) 모르는 체 지나갔다는 사람들은 어떤 인간들이었던가를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유대민족의 종교지도자입니다. 요새로 말한다면 목사나 신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입니다. 교권자들입니다. 그들이 성전 안에서 자기들 의식과 제전을 집행하고 율법과 전통을 가르치는 일은 그들의 본직입니다. 그러나 사회문제, 일반적인 인간문제, 특히 이(異) 종교, 이 민족, 이 국가, 이 계급의 인간문제, 제도문제, 관습과 생활양식 문제 등등에는 아무 선의의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기피하고 배척하는 “게토”의식만 늘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안다지만 수박 겉핥기였습니다.


“레위 사람”도 못본체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이란 유대민족 12지파 중에서도 특별하게 종교부문을 전담하고 그 종교를 직업으로 밥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생계를 위한 토지 등 고정재산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 가운데서 택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 특권층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성전” 종교요, People의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백성과는 상관 없는 종교였습니다. “정결법”에 의하면 시체나 죽어가는 피투성이 인간은 보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정하게 되려면 시끄러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경우에 처해 있었는가 들춰봅시다.


길 가에 한 유대인이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고 있다. 그 의복과 몸차림으로 보아 유대인임에는 틀림 없겠다. 그런데 유대인의 종교적 책임자인 제사장도 거저 지나갔다. 유대인의 특권적 지성인이라는 레위 사람도 못본 체 지나갔다. 나는 무언가? 나는 유대인에게 멸시 당하고 나를 보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고 외면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와야 할 의무가 어디 있는가? 저 사람이 내게 도움 받아 살아났다 하더라도 내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가 내게 도움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살리려고 손을 대는 순간 저 사람이 숨이라도 넘어 간다면 나는 살인혐의로 잡혀갈지 모른다. 그리고 저 사람을 때려 눕힌 강도가 이 근방에 숨어있다가 나까지 죽이고 약탈할지 누가 알겠느냐? 등등 갖가지 그늘진 의혹이 그의 맘에 설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단했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원점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 사마리아인, 선인, 악인, 종교인, 문명인, 야만인, 강도할 것 없이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지으신 본 모습의 인간이란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을 돕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고 결단했을 것입니다.


그의 즉각적인 구호행동이 이런 따위 추리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그런 교양이 벌써부터 축적돼 있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선한 일을 한다든지 은혜를 베푼다든지 하는 신념이 생길 여백 없이 행동에 옮긴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생명의 은인에게 걸고들 무뢰한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시대는 예수의 시대와 꼭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시대에는 개인 윤리가 윤리적 가치규범의 전부였고 “사회윤리”란 것은 개인 윤리의 한 예증(例證) 재료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일반 대중은 자기 개인 또는 자기 가정의 이해관계에서 맴도는 윤리생활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건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를 것 없겠습니다만, 지금은 제도의 개선에서 법적으로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개인”은 사회 또는 국가라는 “체제” 안에 제한되는 “개인”입니다. “체제”는 전체로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체제주의자”는 개인의 인격이나 인권, 민권 등을 무시할 뿐 아니고, 유린하고 들기가 일수란 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히틀러”라든지 일본의 군벌전제자 동조(東條)라든지, 소련의 “스탈린”이라든지가 모두 그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한국의 “박정희”는 일본 동조 시대에 “동조”의 막하에서 일본육군장교로 일본에 충성을 서약한 사람이랍니다. 그는 지금 “동조”에게서 배운 것을 한국에서 재연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인권도 민권도 송두리째 몰수하여 자기 손에 걸머쥐고 잔인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3천만 국민에게는 참정권도 발언권도 없습니다. 언론, 출판 등 “매스 메디아”는 KCIA의 사전 검열에 의하여 “스크린”됩니다. 조금이라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판이고 변호고 시끄럽다고, 그의 지령 하나로 연행, 구속, 투옥, 장기징역, 사형까지도 내려집니다.


지금 한국민은 강도 당하고 피투성이 되어 길가에 쓰러진 죽어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짐승이나 노예가 아니고 자유하는 “인간”이란 각도에서 본다면 반드시 “과장표현”이랄 수도 없겠습니다. 독재자는 국민을 “이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재산이나 원수로 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기 전에는 독재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재자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한국인에 대하여 일본인, 특히 일본 크리스찬이 취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약탈자 옆에 서서 그와 함께 도 하나의 강도행위를 할 것입니까, 그렇잖으면 한국내정에는 간섭 안한다는 미명 아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무관심 태도를 취할 것입니까? 더 나아가서 “가지도로”(火災盜)가 되어 이 틈에 한번 경제 식민지나 만들어 본다고 돈 긁어 모으는 도박 행위에 쌍불켤 것입니까? 그렇잖으면 진심으로 돕고 인간으로 대접하고 살피고 친하여 “이웃”을 창조할 것입니까? 아마도 크리스찬이라면, 또는 “인간”이라면 후자를 택할 것이 사실이겠습니다.


일본 동경에 있는 JNCC 나까지마(中島) 총무와 그의 동지들로서 조직된 “한국문제 긴급협의회” 여러분은 오래 전부터 자유 한국을 위한 민주화운동자들의 좋은 사마리아인 구실을 해 왔습니다.


이와나미(岩波)에서 출판하는 “세까지”(世界)지도 막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원래 한국과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고 속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인간관계의 부조리 때문입니다. 왜 인간관계가 그렇게 부조리하게 됐는가? 그것은 일본이란 나라가 국가 이익 때문에 약소국가를 병탐하고 압박하고 착취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단악, 체제악이 일본의 인간주의자와 기독자의 공동전선 앞에서 붕괴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창조 운동이 삶의 주유를 이루도록 우리 다 함께 선한 싸움을 싸워 봅시다.


하느님이 같이 하시고 그리스도가 동행해 주십니다.


한국 안에서는 벌써 이 의로운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전 세계 교회와 양심적 인사들이 우리편에 섰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바울은 격려합니다.


[1976. 2. 20]
토론토 일본교회 부인 수양회에서
원래 일어로 쓴 것을 한국말로 다시 번역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