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3권] (38) 北美留記 第一年(1974) - 한국에서의 마감 몇주일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0-12 11:47
조회
12

[범용기 제3권] (38) 北美留記 第一年(1974) - 한국에서의 마감 몇주일


1월 28일 – 집에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를 읶으며 자성한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좀더 겸손해야 하겠다. 나 자신의 “Yes”나 “No”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하여 그의 “Yes”와 “No”를 말해야 한다.


1월 29일(화) - 토론토 “신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1월 30일(수) - Academy House에서 Lutheran이 주최한 모임이 열렸다. 거기 모여 온 젊은 목사들이 내방했다. 한국에 온 ‘루터랜’은 ‘미조리 시노드’ 소속이어서 극단을 걷는 보수파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한신” 출신이었기에 나와는 가까이 지냈다.


2월 3일(일) - 오전 예배는 경동교회에서 드렸다. 예배 후에 강원룡 목사가 경동교회 찬양대원들을 Academy에 초대하여 오찬을 대접한다. 나도 동참하여 저녁때까지 환담했다.


나는 한 2개월 동안 캐나다에 갔다 올까 하는데 어떠냐고 강목사에게 물었다. 그는 한국 정세가 참으로 나를 요구할 때까지 얼마 동안 캐나다에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다.


5:00PM에 일본 아카데미 사람 요시노 목사와 한신대 강사 사와 澤正彦 목사가 내담했다.


4:00PM에 카톨릭시보 여기자가 내방하여 근황을 전해 준다.


1월 31일(목) - 장준하와 백기완에게 15년 징역이 구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2월 5일(화) - 신년휘호 몇 폭 썼다.


작가 이호철이 간첩혐의로 구속됐다고 지상에 보도되었다. 이호철은 충실한 민주동지로서 처음부터 우리와 고락을 같이 했었다. 그는 연행되었다. “왜 민주운동 그룹에는 그토록 충성이냐”고 따지더란다.


“소설 재료를 얻으려고 그랬오!”


2월 6일(수) - 9:00AM에 신촌 “개발공사”에 가서 이민을 위한 Orientation의 모임에 참석했다. 보통 하루종일 있어야 하는데 한 시간 후에 가라고 해서 돌아왔다. 번호는 103이었다. 1년 안에는 전엣 조서가 통용되기 때문이란다.


관용과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박근원 박사 딸 “우인” 양을 문병하려는 것이었다. 어제 퇴원했다고 한다. 그 후 귀여운 “우인”은 뇌암으로 먼저 갔다.


2월 7일(목) - 2:00PM에 성서공회 실행이사회를 소집했고, 4:00PM에 베다니 학원 이사회를 불렀다.


2월 8일(금) - 한신빌딩에서 한신 이사회 인사위원회에 참석했다. 퇴직 교수 거의 전부가 복직됐는데 전경연 박사 것만 부결되었다. 그 이론이 “무사주의”여서 나는 도중에 나와 버렸다. 후일에 전경연 박사도 한신 교수진에 들어갈 수 있었다.


2월 11일(월) - Nostradamus의 “The Centuries” 대예언이란 책을 읽었다. 1999년 7월에 인류가 전멸한다고 예언했다.


그는 물론 크리스찬이다. 기발한 천재였던 것 같다. “괴테”와 같은 시대였고 친구였으며 괴테도 “파우스트”에 그의 예언을 인용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는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Radical한 종말 심판론은 창조주의 전 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와 어떻게 일치될 것인가.


2월 12일(화) - 큰 눈이 내린다.


이른 아침에 조원길 목사가 왔다. 이달 15일에 Elham 대학에 유학간다고 했다. 작별 인사 방문이었다.


2월 13일(수) - 신학교 신입생 Interview모임에 참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오는 지원자 중에는 “유망주”가 많은 것 같다. 서울법대 졸업생들에게 “왜 법조계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법이 있어야지요!”하고 대답한다.


소련의 노벨 수상자 솔제니친이 고국에서 추방됐다고 보도됐다.


2월 14일(목) - 5:00PM에 향린교회에서 안희국 한신교수 설교집 출판기념과 그의 환갑 축하잔치가 있어서 참석했다.


서평 – 서남동 교수
약력 – 문익환 목사
축도 – 장공


아주 간결한 잔치였고 참석자는 약 200명이었다.


밤에 김연준 한양대 총장이 수유리 우리집에 내방하여 11:00PM까지 담화했다.


2월 15일(금) - 총회 사무처에 들러 신우관 회계서류에 Sign하고 세금관계 보고를 들었다. 모든 종교단체와 교회당 울타리 밖에 있는 목사관등에는 예외 없이 과세한다는 지시가 고지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급징수”한다고 했다. 그러나 교계의 반대가 더무 심해서였는지 몰라도 결국 유야무야로 그 자체가 둔갑하고 말았다.


2:00PM에 대법원 117호 법정에서 열리는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사람들에 대한 공판광경을 참관했다. “○○의 서재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있었다. ○○의 방에는 백남운의 조선경제사가 있었다” 등등이 기소이유라 했다.


그 중에는 서적상도 한 사람 섞여 있었다. 그는 불온서적을 유포시켰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그의 진술은 이러했다. 나는 법 절차를 어긴 일이 없다. 서적 구입 규정에 충실했다. 일본에 주문하기 전에 구입할 서적 목록을 작성하여 주문허가를 받는다. 허락된 서적만을 주문한다. 책이 온다. 그러면 그 책을 검열관에게 드려 내용을 검사하게 한다. 그 검사에 통과된 책만을 판매한다. 통과 안된 책들은 반송한다. “나는 그대로 해 왔다….”


“그런데 내가 왜 죄인으로 끌려 다녀야 하느냐?”하고 차근차근 진술했다. 그의 답변은 묵살됐다.


그 날에는 심문으로 끝내고 그들은 다시 고랑에 손발이 묶여 형무소에 갔다.


함석헌, 천관우와 나는 공판정에서 나오다가 길가 어느 초라한 다실에서 차 마시고 문안을 나누고 작별했다. 그것이 천관우와의 마감 면회였다.


2월 18일(월) - 11:00AM에 김연준 총장이 차를 보내 자택에 초정한다.


12:00AM에 거기서 민관식 문교부장관과 나를 오찬에 동석하게 한다. 인사를 교환하는 정도로 끝냈다.


2:00PM에 민장관은 가고 나는 남아서 김총장과 장시간 간담했다.


2월 20일(수) - 2:00PM에 총회 사무실에서 “학생관건축위원회”가 열렸다. 건축비 1,300만원을 연동에 있는 기독교 연합빌딩에 투자하기로 의결했다. 그 돈을 지금까지는 “한신대”에 대여했었으나 저리였고, 통화팽창 관계도 있고 해서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가결한 것이다.


2월 21일(목) - 나의 “캐나다 여권신청서”를 제출했다.


2월 22일(금) - 한신대 졸업식 날이다.


2:00PM에 한신대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생 45명이다.


2월 23일(토) - 저녁에 한신대 젊은 교수들이 내방했다.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특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2월 28일(목) - 10:30-12:15AM 약 2시간 한신대에서 특강했다.


3월 1일(금) - 창천 감리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를 드린다. 그 교회 단독행사다. 담임 목사인 박춘화가 한신대 졸업생이라는 인연으로 나에게 설교를 청했던 것이다.


박춘화 목사는 한신대 재학중부터 8년에 걸쳐 그 교회를 목회한다. 교인이 약 200명이교 교회 행정이 정돈되고 짜여 있었다. 기미년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과 인연 깊은 교회여서 박춘화 목사는 그것을 그 교회 전통의 귀중한 하나로 충성스레 지키는 것이었다. 천관우, 김동길도 출석했었다. 내가 어떤 내용의 설교를 하나 궁금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3월 2일(토) - 손녀 명은을 안고 산책한다. “할아버지”의 즐거움이다. 이건 오늘만이 아니라, 거의 매일 행사로 되어 있었다. 정보원이 멀지감치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내 다니는 ‘코오스’가 변경될 경우에는 갑자기 나타난다.


3월 3일(일) - 경동교회에서 예배했다.


W.C.C. 중앙위원이고 “바아젤 밋션” 회장이라는 Rossel목사가 설교했다. 설교 요지는 교회론이었는데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전파를 위탁맡았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A) 경제적으로 Share하고 (B) 사회적으로 인간차별이 없고, (C) 다양성 안에서의 Unity로 Fellowship, 즉 친교를 증진해야 한다 등등의 내용이었다고 기억된다.


밤에는 T.V.로 “로마의 휴일”을 감상했다.


3월 4일(월) - Dr. Kang과 함께 Koreana Hotel 22층에서 식사를 나누면서 Academy 이사회 진행에 대하여 간담했다.


3월 5일(화) - 관용을 데리고 김연준 한양대 총장을 방문했다.


나의 캐나다 가는 여권이 나왔다. 주로 관용이 수고했다.


3월 6일(수) - 캐나다행 여권과 여행절차를 전부 완료했다.


3월 10일(일) - 오늘은 “노동의 날”이다.


3:00PM에 인천 산전 Center에 갔다. 거기서 3.10노동절 기념예배 모임이 있어 설교했다. 감리교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같은 사업을 하고 있었으나 소속단체의 한계선을 넘어 협동할만큼 폭 넓은 것은 아니었다.


이국선, 전주석, 전택완, 길진경 등 여러 친구의 친교를 감사한다.


3월 11일(월) - 6:00PM에 Academy House에서 Dr. Kang이 신양섭, 조덕현, 이영민, 이영찬, 이해영 등을 만찬에 초대하고 나의 Canada여행 계획을 피력했다.


Dr. Kang이 “얼마 동안 떠나 계시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나는 찬성한다”고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도 찬의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해영”만은 굳어진 표정으로 첨부터 끝까지 한마디 말도 발언하지 않았다.


그때 이해영은 당뇨병이 심해서 정양 중이었다. 결국 이해영과의 이 순간이 영원한 작별이었다. 그의 “침묵”은 지금도 나에게 Abyss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