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범용기 제2권] (106) 민주당 집권시대 – 장면 정권의 終焉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9-12 09:53
조회
30

[범용기 제2권] (106) 민주당 집권시대 – 장면 정권의 終焉


결국에는 ‘장면’의 소재가 알려져서 군정청에 출두, 정식으로 정권이양에 도장 찍었다.


8ㆍ15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진짜 공정선거를 거쳐 민의를 대표한 정부는 ‘장면’ 정권이 처음이었으니만큼, 그것은 ‘국민’의 정부요, 장면 자신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반란군인들이 아무리 협박한다 하더라도 ‘장면’으로서는 자기 맘대로 그 정권을 송두리째 반란자에게 내 줄 권한이 없는 것이었다.


“역적 반도야 물러가라! 나는 3천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나라의 주권을 역적에게 내어 줄 수 없다!” 한번 호통하고 죽었어야 할 것이 아니었겠는냐! ‘인간’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숭고한 ‘절개’임에 틀림없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분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말의 ‘정몽주’와 두문동 72현은 더 거론하지 않더라도, 세조 때의 ‘사육신’, ‘생육신’과 합방때의 민충정공을 비롯한 순국지사들, 3ㆍ1운동 때의 백만으로 헤아리는 숱한 지사들, 그리고 당장 눈 앞에서 자유한국 ‘제단’에 관제물(灌祭物)처럼 부어 쏟은 청년학생들의 피를 보더라도 ‘장면’은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때 무슨 일이었던가 워싱톤에 들렀었다.


박정히 반란정권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무렵이었다. 주한 미8군에서도 박정희 반란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당황하던 때였다.


그 당시 워싱톤 교포사회는 산만하고 무조직한, 좋게 말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였다. 일정한 여론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개인들 모인 데서 개인 자격으로 내 소견을 말할 밖에 없었다.


강연회 얘기도 있기는 했었지만 실현은 안됐다.


그때 내가 들은대로는 미8군에서 토벌령을 내리도록 하명(下命)해 달라고 특사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내왔었다 한다. 케네디를 만나 일체 서류를 내놓으면서 8군사령관의 뜻을 전달했다.


케네디는 말했다. 이것이 8군사령관이 할 일이 아니다. 한국정부가 해야 한다.


“행정부 최고 책임자인 ‘장면’은 숨어서 그 행방을 모릅니다.”


케네디는 “이런 나라의 위기에 정부책임자가 정부를 버리고 도망친 그런 정부를 내가 어떻게 도우란 말이냐?”하고 서류를 동댕이치면서 노발대발했다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까십’은 워싱톤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미8군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가서 토벌에 동의를 얻으려 했단다.


윤보선은 거부했다고 들었다.


“내가 장면이 좋은 노릇을 해 줄 줄 아나?”


이런 ‘까십’도 워싱톤에까지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민주당 정권때에 주미대사로 있다가 군사정권에게 쫓겨난 장리욱 전 주미대사를 찾아갔다. 한신졸업생 박원봉이 나를 에스콧 했다.


그는 시외 멀고 치벽한 해변가 따님집에 우거하고 있었다. 박원봉군도 초행이라 반나절을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국군은 피로 나라를 지킨 애국자들인데 그들도 한번 정권을 잡아봐야 할 것 아니겠오?”


“국군 고급장교들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지성인에 속할거요. 한번 나라를 잘해보겠다는데 구태여 막을 건 없잖겠오?……”


나는 이어 없었다. 장리욱이 흥사단 국내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은 구태어 거론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민주당 정권의 중직에 있던 분으로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후에사 들은 얘기지만 내가 찾아갔던 바로 그날 오전에 군부에서 일부러 특사를 보내 감언이설로 설득했다고들 했다.


나는 워싱톤에 다시 돌아왔다.


“어디 코리아 데스크에나 들어가 볼까?”하고 동지들과 의논했다.


“최경록 장군도 박정권에 협력하기로 했고, 케네디도 구데타 정부를 상대하기로 했으니 가 봤자 ‘행차 후 나팔’일 것이오!”